웹진 [플랫슈즈]는  금천구에 살고 있는 몇몇 엄마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아이를 안고 지나가는 엄마들이 어김없이 신고있는 굽낮은 플렛슈즈처럼 내밀하고 섬세한 ‘여성’, 그리고 ‘엄마’의 시각으로 하이힐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갖춘 플랫슈즈와 같은 따뜻한 글들을 만날 수 있는 웹진이다.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힘들었으면 다같이 의논하거나 합의한 바도 없이 여자들이 이렇게 한마음 한뜻으로 파업에 돌입했겠어요?” 

  출산율 저하 현상을 두고 어느 학자가 일갈하던 말이 뇌리를 스친다. 프랑스에서 유년기를 보낸 어느 여성은 자신은 결코 한국에서는 아이를 낳지 않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무엇이 여성들로 하여금 이런 독한 결심을 하게 만드는 것일까? 






  나는 모든 여성이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여성이 모성(母性)을 타고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어머니의 거룩한 사랑’에 대한 무수한 말들이 어머니로서의 기쁨을 가로막고 어머니로서의 고단함을 토로할 수 없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 태어나 보람을 느낀 몇 안 되는 일 중에 하나는 분명 아이를 낳은 것이다. 또한 아이를 키우는 일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단함 속에서도 습기 눅눅한 방에 스며드는 햇살처럼 살가운 기쁨을 맛보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아이 낳기’를 권유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은 다른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기쁨과 보람을 안겨주지만 그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고단함을 기꺼이 견디겠다는 ‘결단’과 ‘결심’을 요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낳는 일은 엄청난 각오 없이는 결행할 수 없는 ‘구국의 결단’이 되었고, 그것은 진정 ‘나라를 구하는’ 일이 되었다. 


한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수의 젊은이가 다수의 노인을 부양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전망하고 있다. 더구나 소수의 젊은이 가운데 안정된 일자리를 갖고 부모 세대를 부양할 만큼의 세금을 내거나 경제적으로 자신의 부모를 직접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이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일자리를 제대로 갖지 못한 한국의 젊은이들은 20대 후반이 되어서도 부모에게서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지 못한 채 용돈을 받으며 생활하거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최소의 생활비만을 충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부모 세대나 부모는커녕 스스로를 부양할 능력조차 없으며,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부모로서의 삶은 때로 지나친 ‘낭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노인 인구가 어린이나 청년 인구를 월등하게 앞서는 시대를 맞이하면서 부양해야 할 사람만이 남고 부양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사라져가는 사회는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이 아이 없는 사회의 초상화는 생명의 활기가 사라져가는 사회를 예고한다. 이런 사회에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거나 변화를 모색하거나 미래의 희망을 노래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이 싫어서 아이들의 출입을 금하고 싶어하는 이 사회에서 이제 정말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깔깔대는 웃음소리, 번잡하게 뛰어다니는 발자국 소리, 장난스러운 질문과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재잘거림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 우리는 이 소란스러움이 사라진 침묵 속에서 고독하게 늙어갈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이 이처럼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음을 아이를 낳을 능력이 있는 여성들 또한 모르지 않는데 왜 그녀들은, 혹은 우리들은 아이를 낳지 않기로 마음 먹은 것일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이를 낳지 않기로 마음 먹은 것이 아니라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이며, 차마 출산을 결단하지 못하는 것이다. 매스컴마다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젊은 여성들을 나무라며 아이를 낳는 일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지 떠벌리고, 방송마다 아이 낳은 사람들이 나와 아이를 낳고 키운 일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었는지 설득하는데도 왜 이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 꿈쩍도 하지 못하는 것일까? 마주치는 어른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게 결혼을 권하고 결혼한 여성에게 아이 낳기를 권하고 첫째를 낳은 사람에게 둘째를 권하고 둘째를 낳은 사람에게 셋째를 권하는데, 이런 걱정과 간섭이 귀찮고 싫어서라도 한 번쯤 생각해 볼 만도 한데 왜 이다지도 확고한 것일까?


  지난 여름 슬로베니아를 여행하면서 내가 가장 부러웠던 것은 오후 4시나 5시 무렵 동물원이나 근처 공원에 아이를 데리고 나들이 나온 가족의 풍경이었다. 여행자인 나와 달리 매일 일터에 나가고 아이를 돌보는 일상을 되풀이하는 중일 텐데도 평일 오후 여가를 즐기는 그들의 모습은 생활의 노동에서 멀리 떨어진 나보다도 더 여유로워 보였다. 내가 부러웠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오후 4시나 4시 반 경에 엄마와 아빠 모두가 일자리에서 돌아와 자기 아이를 맞이할 수 있고 그 아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평일 오후 5시경 동물원에 갔을 때 아이들은 모래사장에서 도마뱀 모양의 나무통 위에 물과 모래를 섞어가며 깔깔거리고 있었고 엄마들과 아빠들은 아이들이 노는 곳 근처에 한가롭게 놓인 썬베드 위에서 일상의 수다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이런 풍경을 한국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고, 단 한 번도 꿈꾸어보지 못했다. 

  찾아가는 박물관마다 직원이 친절하게 나와서 유모차를 받아 올려주고 엘리베이터까지 안내하여 동승해 주었다. 유럽 지역 내에서 탑승한 비행기 안에서도 승무원은 물론 앞뒤 자리에 동석한 어른들까지 모두 아이의 번잡스러움이나 수다스러움을 귀찮아 하지 않고 오히려 마술 등을 보여주며 아이와 재미있게 놀아주었다. 이제 막 36개월이 지난 아이를 데리고 혼자 3주 동안 외국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분위기 덕분이었다. 오히려 여행의 피로감이 가장 가중된 시점은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였다. 9시간이 넘는 비행 시간 동안 나는 비행기에 동석한 한국인은 물론 승무원의 눈치를 봐가며 아이의 행동을 제지해야 했다. 여행의 들뜬 기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귀국 이틀 뒤 나는 여행 다닐 때처럼 자연사박물관을 가겠다고 떼를 쓰는 아이를 이기지 못해 결국 인근 박물관 나들이에 나섰는데, 말도 통하고 익숙한 공간인 한국의 박물관에서 오히려 유럽에서보다 훨씬 큰 피로감을 맛봐야 했다. 아이가 떠들지 않도록 시종일관 잔소리를 하거나 아이를 제지하면서 유모차를 혼자 끌고 이리저리 동분서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 후 내가 여행을 하면서 피상적으로 경험한 것 이외에도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혜택들이 아이와 아이를 둔 부모들에게 돌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유럽 지역 내에서도 차이가 있지만 유럽 내에서 출산 및 육아에 대한 복지 혜택 수준이 가장 낮은 나라도 한국보다 월등히 나은 혜택을 보장한다. 아이는 물론 아이를 둔 부모의 교통비를 감면하거나 전기세, 수도세 등의 각종 공과금 감면 혜택을 주기도 하고, 또 만 3세가 될 때까지 정부에서 무상으로 신뢰할 만한 베이시시터를 모든 가정에(맞벌이 가정 등의 별도 조건 없이) 파견하기도 한다.    

  나는 이들 나라가 한국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여서 돈이 많기 때문에 이런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시 나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여행했는데 이들 나라의 경제적 상황이 한국보다 월등하게 낫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과 이들 사회의 차이는 각 사회가 어떤 가치를 우선시하고 어떤 사안을 가장 중요한 이슈로 다루고 있는가 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출산장려금이나 각종 보육 지원 정책을 내놓고 있기는 하지만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사회가 사회 구성원을 길러낸다’는 관념을 서로 확인하거나 공유한 적이 없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들어가는 대부분의 비용과 시간, 각종 노동과 보살핌의 활동 등이 고스란히 아이를 낳아 기르기로 결심한 개인의 몫으로 돌아간다. 말 그대로 한국에서는 출산이 개인이 결단하는 문제가 된 지 오래다. 

  한국이 시스템 부재의 사회인 것은 최근에 와서 더욱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온 국민이 목격한 세월호의 침몰은 공공 영역의 부재 속에 모든 문제를 개인에게 떠맡겨온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고통스럽게 증언한다. 한국에서는 물난리가 나면 정부 관계자나 관리들이 나서서 방둑을 수리하고 수재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발적 헌금인 수재의연금을 걷어 해결하려 든다. 사회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 시스템을 통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구심을 향해 결속하려 드는 개인들의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 해결되는 것이다. 막대한 사회적 자원을 시스템을 튼실하게 구축하고 합리적으로 작동시키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헌신과 희생을 촉구하는 사회적 선동이나 캠페인에 쓰는 장면을 흔히 목격할 수 있다. 

  개인의 희생을 통해 굴러가는 사회가 진정 좋은 사회일까? 개인이 헌신이나 희생을 결단하거나 결심하지 않아도 자신의 행복을 꿈꿀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인 것은 아닐까? 개인의 희생과 헌신에 관한 미담(美談)들이 ‘세상은 아름답고 살 만한 곳’이라고 우리 귀에 속삭이지만 이 미담들의 그늘에서 개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고단한 일상과 고통의 몸부림은 세상 밖으로 드러날 기회조차 상실한 채 땅 속 깊숙이 파묻히고 있다. 더구나 출산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미담의 차원을 넘어서 하지 않는다면 사회적 책무를 외면하는 일종의 비윤리적 행위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너는 네가 살고 있는 사회의 미래를 저버리는 무책임한 사람이 되는 거야.”라는 협박 아닌 협박의 말로 기혼 가임 여성을 압박하는 사람을 보는 것이 드문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여성의 출산을 반기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이가 축복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승인한 결혼을 통해 부부가 된 이성애자 남녀 부모 밑에서 ‘합법적으로(?)’ 태어난 아이들만이 축복받을 자격을 얻는다. 이른바 ‘미혼모’로 불리는 여성들의 출산은 환영받지 못하며 이들의 출산을 장려하거나 지원하는 어떤 사회 정책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또 태어난 모든 아이들이 사회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 자라나는 것은 아니다. 이 사회는 오직 아이가 태어난다는 사실, 혹은 태어난 아이의 숫자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그 아이가 어떻게 자라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미래 사회 구성원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으니 이를 저지해야 한다는 생각만 할 뿐 미래 사회 구성원들이 어떻게 자라나고 있는지, 이들이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잘 자라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는지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태어난 아이가 만 3세가 될 때까지 모든 출산 가정에 베이비시터를 파견하는 사회는 성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만 3세까지의 보살핌이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인식이 널리 공유되어 정책적으로 실행되는 데까지 이른 사회다. 이런 사회는 출산만이 아니라 태어난 아이들이 충분한 보살핌 속에 자라나 건강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것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미래 사회 구성원이 될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일, 다시 말해 아이들을 돌보고 키우는 일을 사회가 담당해야 할 중요한 ‘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낳으라고 말하지만 태어난 아이를 기르는 데는 무관심한 사회,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을 개인의 결단으로 내모는 사회는 ‘불임의 사회’에 가깝다. 임신을 하지 않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한국 사회’다. 아이를 낳아 기를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출산이 반드시 육아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가임 능력’은 ‘보육의 역량’을 포함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가임 능력은 생물학적 능력만이 아니라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요즘 여성들이 이기적으로 자기만 생각해서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으려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한국 사회’인 것이 아닌가. 아이를 키우려 들지 않는 사회는 ‘가임 능력’을 상실한 사회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생명의 가치를 부르짖는 일이 사치가 되고 생명을 지키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정략적으로 이용되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태어난 모든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는 어떤 의미에서 가장 명확한 ‘불임’의 증거다.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생명을 낳아 기르는 일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사회에서 출산을 부추기는 모든 선동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을 결단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유에서 출산을 결심했건 간에 나는 그들의 용기에 힘찬 격려의 인사를 건네고 싶다. 그리고 제발 이들의 용기있는 결단이 헛된 일이 되지 않도록 내가 사는 이곳이 부디 생명을 존중하는 세상이 되기를 기원한다.      



플랫슈즈  김영희


원문글 플랫슈즈 http://flatshoes.or.kr/xe/feature/552


[기고]팽목항에 다녀왔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로 참 많이 가보고 싶은 곳이 생겼습니다. 시간은 스스로 내어야만 생긴다는 사실을 잊고, 바쁘다는 핑계로, 한동안 삶은 저에게 거기를 찾아갈 만큼의 시간적 여유로움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말로 거기를 다녀 오기를 차일 피일 미루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왜 거기를 가야 하는지,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거기를 찾아 가는 것을 미루고 있었다는 것이 저의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제 뇌리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을 때, 일단 가보자 마음먹고, 마침 함께 길을 나서겠다는 친구와 안산에서 매일 팽목항으로 가는 무료버스를 타고 다섯시간이 걸려 드디어 그 곳을 찾아갔습니다. 

버스는 세월호 가족(유가족.실종자 가족)들이 계신 컨테이너 숙소 앞이 목적지였고, 그 숙소 앞에서 버스에서 내려 저희는 바로 앞에 보이는 팽목항으로 갔습니다. 노란 리본이 붙은 빨간 등대가 저만치 보이고 등대까지 가는 양 옆 난간에는 세월호 진실규명과 안전한 대한민국을 염원하는 현수막과 함께 노란리본들이 알알이 박혀 있었습니다.

수천개의 노란리본들이 바람에 꼬리를 날리고, 바람에 딸랑이는 풍경소리가 어우러져, « 우우우~~~ »하는 애닳픈 소리를 내며 쓸쓸하고 슬픈 세월호 이야기를 전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저희는 세월호 진실규명을 위한 팻말 시위를 진도 군청 앞에서 하기로 하고, 먼저 세월호 가족분들께 인사드리려고 가족 숙소로 들어 갔습니다. 숙소로 들어서자, 가족분들을 위해 상주하는 자원봉사자분들이 저희를 맞아주시며, 이 곳에서 가족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계시며, 그 분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분들이 바라는 것은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을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팻말시위를 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리고, 대신 잠시 산책을 가셨다는 가족분들을 기다리며 팽목항 주변을 둘러 보았습니다. 

팽목항은 가옥들이 거의 없고 많은 섬들로 둘러 쌓인 아주 작은 항이었습니다. 저녁시간이 되어서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식사 준비를 하고, 가족분들과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시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팽목항에서 세월호가 있는 맹골수도는 한시간 반을 배를 타고 가야한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분들에게서 듣게 되었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 분들의 아픔을.

보고픈 아이들을 이야기하실 때는 아직도 사람들 앞에서는 울지 않으시려고 밤에 몰래 우신다면서 손으로 눈물을 훔치시고, 거의 매일 팽목항 등대에 가셔서 보고싶어도 볼수 없는 자식들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다 오신다고, 자식이 왜 죽었는지 알아야 그나마 살아 갈 수 있을 것 같다고,……그리고, 4.16이 반년이 넘어가고, 해가 바뀌어 가지만 뭐하나 밝혀진 것이 없어서 세월호 가족들이 모여서 수없이 회의를 해도, 가족분들의 입장은  매번 같으시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제가 입고 있던 세월호 후드 티셔츠를 보시고는, 당신들은 가슴이 너무 아파서 입지는 못하고 걸어만 두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후드 티셔츠에는 팽목등대가 그려져 있는데 그걸보면 진도vts(관제탑..당시 제구실을 안한)가 연상되신다고 하셨습니다. (진도 vts는 팽목등대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거리에 있습니다)그래도 당신들 대신 세월호를 잊지않기위한 옷을 입어주어서 고맙다며 사진을 찍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꽃을 피우며 울다 웃다 하다보니, 비가 내리는 팽목항의 밤은 깊어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쉬운 마음을 안고 2014년 올해가 가기 전에 다시 오리라는 약속을 하고는 다시 제 삶의 자리로 되돌아 왔습니다. 

반년이 넘었든 일년이 넘어가든, 언제가 될지 모르는 세월호의 진실규명 !!! 부모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자식이 왜 죽었는지, 그것 뿐이었습니다. 

지금 유가족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슬픔을 나누는 일이고 그 슬픔은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위로와 치유를 받는다는 것을 저희는 그분들을 통해 배웠습니다.

팽목항을 다녀오고, 그분들을 만나고서야 제가 왜 그곳에 가고 싶었는지, 그리고 거기에서 무엇을 배우게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세월호 이전에 나는 나와 내 가족의 안전만을 생각했고, 세월호 가족분들과의 만남으로 그 안전은 타인의 안전이 보장될 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여행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안전한 대한민국의 시작은 그 분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며 이 글을 마칠까 합니다.

여러분 기다림의 팽목항으로 함께 갑시다!!!

‘기다림의 팽목항’에는 9명의 잃어버린 찾는 애타는 마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함께 가요!  팽목항 



12월 27일(토)~28일(일) 1박2일  회비 1인당 2만원

7시30분 금천 출발→ 9시 안산셔틀버스출발→ 팽목항

문의 010-7750-2431



기고 윤정수

매 주 목요일 금천구청앞에서 촛불을 들고 있습니다.


*  본 글은 금천자립생활센터의 희망보고대회에서 정임희씨가 발표한 내용이다.


선천적인 장애로 인해서 나의 삶은 평탄하지는 않았다.  어릴 적에는 친구들과 놀고 싶어도 놀지 못할 때가 많아서 친구들한테 놀림을 받은 적이 많았다.  못 걷는다고 친구들이 죽은 쥐도 갔다가 옆에 놓기도 하고 성냥불을 등에다 지지기도 하여 울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힘들어서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어디를 가고 싶어도 혼자서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갈 나이가 되었는데도 아버지가 지병으로 아프셨기 때문에 초등학교를 데려다 줄 사람이 없었다. 엄마는 가장의 역할을 하시면서 초등학교에 전입 할 생각도 , 배우고 싶다는 마음도 가지지 못했다.

 지인의 소개를 받아 삼육재활원에서 양재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우연히 병원에 갔다가 붙은 허벅지를 수술을 하면 걸을 수 있다는 의사의 권유로 수술을 했지만 생각보다 좋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26살 나이에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고, 바쁜 가족들 속에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자신감도 없어지고 소심해졌다.

그러다 병원에서 원장님 소개로 공부방을 소개받고, 눈이오나 비가오나 공부방이 있는 날은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녔다.  공부방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이수하였고 초등학교 검정고시에도 합격했다.

그러던 중 어느날은 밖에서 운동하고 있는데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있으니 함께 가보자는 말을 듣고 금천자립생활센터에 오게 됐다.  금천센터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을 소개받고 이야기를 하다보니 ‘정말 나같은 중증장애인들을 위해 일하시는 분들이 있구나’  하는 설렘도 있었지만 ‘내가 이곳에서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금천센터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조금씩 발전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조모임이나 동료상담, ILP에서 자립에 대하여 하나씩 알아가게 됐다. 집에만 있을 때는 아무생각 없이 지내왔지만 개별ILP 숙박체험을 하게 되면서 혼자서 자립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됐고 생활하면서 자신감이 생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활동보조인과 이곳저곳 동행하여 과제 수행을 하면서 자립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에 필요한 것들을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다.

센터에서 컴퓨터 교육을 연계해줬고, 컴퓨터도 지인에게 후원받아 기초교육을 배우며 새로움을 느겼다. 

금천센터에서 서포트하는 자조모임이 처음에는 귀찮고 싫었지만 지금은 모임이 기다려지고 설렘으로 다가온다.  금천센터의 여러 가지 활동에 참여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중학교 과정을 배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배우고 싶다는 생각으로 학교선생님과 상담을 하던 중에 중학교 과정 학교를 소개해 주셨고 활동보조인과 함께 서류를 준비하여 입학등록을 했다.  배우지 못한 서러움이 나도 이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변했다.  그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고 뛸 듯이 기뻤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좋아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더욱 더 열심히 하여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 하고 글 쓰는 직업을 갖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며 책도 많이 읽고 여러 사람들과도 많은 대화를 나누며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정리할 것이다.  

자조모임이나 동료상담, ILP를 통해서 내 자신을 돌아보고 나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자신을 발전시키도록 도움을 주신 금천센터에 감사드리고, 앞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격려를 보내주시는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정임희

2014년 여성공익단체역량강화지원사업   “짧은 여행 긴 호흡”

女友들의 幸福한 旅行 - '금천 여성 G'

여우들의 행복한 여행-'금천 여성 G'의 여행은 한국여성재단과 교보생명이 후원하고, 금천구에서 활동하는 3개 여성단체(살구여성회, 숲지기강지기, 은행나무도서관)의 활동가들이 3박4일 일본으로 쉼 여행을 다녀 온 이야기입니다.   

첫날, 잇다리 깃다리(왔다 갔다)

 일본에서의 첫 날, 온전히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이동을 하기로 한 우리는 공항에서 가방을 끌고 전철에서 전철로 옮겨 타며 오사카 ‘난바’로 갔다. ‘가와라마찌역’의 가방 수납장에 가방을 맡기고 교토 ‘핸디크레프트 센터’를 찾아갔다. 낯선 길이라 몇 번씩 길을 물어서 찾아간 곳은 마치 이사를 하는 중이라 비어 있어서 썰렁한 분위기였다. 헛걸음을 다시 돌려, 니시끼시장으로 가서 시장구경을 하기로 하고 택시를 탔다. 그런데 시장인데도 불구하고 6시에 문을 닫아서 파장 분위기의 시장을 서둘러 볼 수밖에 없었다. 택시까지 동원해서 찾아온 곳을 후루룩 둘러보다가 아쉬운 마음에 <다꼬야끼>를 사먹었는데, 우리 일행 중 누구의 입맛도 끌어당기지 못하는 맛이었다. 

 시장에서 나와서 가방을 찾으러 역으로 갔는데, 가방을 맡겨둔 곳을 정확하게 기억해내지 못해서 엉뚱한 역에 가서 가방을 찾느라고 우왕좌왕 하고서야 가방을 찾을 수 있었다. 낯선 것들로 인한 시행착오를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었는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호텔을 찾아가는 길에도 마지막 관문이 놓여있었다. 가방들을 끌고 호텔을 찾아가던 중 높다란 육교가 우리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어찌할 수 없어서 낑낑거리며 육교를 건너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기진맥진. 일본에 들어선 이후 호텔에 오기까지 몇 차례 시행착오를 거쳐야했던 오늘의 주제를 우리는 <잇다리 깃다리(왔다 갔다)>로 정했다. 다행히 호텔에 온천이 딸려 있었는데, 우리나라 온천에 비하면 작은 목욕탕 정도의 규모였지만 야외 온천은 따뜻한 물과 시원한 바람을 함께 느낄 수 있어서 피로를 푸는데 도움이 되었다.


둘째 날, 일본의 대중교통을 체험하다.

 오늘 주요 일정은 ‘케이분샤 책방’과 도서관인 ‘어린이 미래관’을 보는 것이다. 어제에 이어 우리는 전철과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전철은 우리나라에 비해 폭이 좁았고, 노약자우대석이 우리나라처럼 있었는데, 우리보다 좌석이 더 많았다. 버스와 택시 모두 우리나라의 것에 비해 크기가 작았는데, 버스를 타고 내릴 때 운전사가 마이크로 직접 안내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승객이 다 타고 내릴 때까지 재촉하는 법이 없이 느긋이 기다리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버스는 내릴 때 요금을 지불하게 되어 있었다. 

 ‘케이분샤 책방’과 ‘어린이 미래관’은 교토에 살고 계시는 동화작가 김황선생님이 안내해 주시기로 사전에 섭외를 하였다. 사진으로 본 선생님보다 훨씬 젊고 밝아서 기분 좋은 만남이었다. 서점과 공방, 카페 공간이 함께 있는 ‘케이뷴사 책방’은 현재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서점들과 작은도서관이 있어서 새롭지는 않았지만 오랜 역사로 인해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라는 것이 부럽기도 했다. 

 선생님 덕분에 계획에 없었던 ‘field society’와 ‘조선학교’를 볼 수 있었다. ‘field society’는 생태체험교실도 운영하고 자연물을 이용한 조형물들을 전시, 판매도 하는 곳이다. 주차장에서 그곳까지 걸어 들어가는 길이 한쪽으로 숲이 조성되어 있는 제법 긴 골목길이었는데, 그 길을 걷는 동안 숲을 걷는 느낌이 들었다. 

 숲 속에 숨겨져 있는 것 같은 조선학교는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한국에서는 공식적인 지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남북분단의 흔적을 이곳에서도 확인하는 것 같아서 더욱 가슴 아팠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은각사’였는데, 이끼가 다양하고 잘 관리되어 있었고, 보기 싫은 하수구 구멍 같은 곳은 대나무로 엮은 것으로 가려둔 세심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은각사’를 나와서 ‘어린이 미래관’으로 선생님과 동행했다. 그곳에서 선생님의 싸인이 들어간 동화책과 그림책을 선물 받았고, 우리도 감사의 마음을 담아 준비해간 선물을 전해드렸다. 어린이 미래관은 1층에 아이들을 위한 실내놀이터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책이 있는 2층 도서관에서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모습이 좋아보였다. 우리나라 그림책 ‘시리동동 거미동동’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다음으로 찾아간 교토 에콜로지는 마감 시간에 할아버지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서 둘러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전철과 버스로 갈아타는 가운데 이제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 탐방 이틀만의 성과였다. 일본의 전철이 무척 복잡하다고 하나 이틀 만에 익숙한 도로를 찾아낼 수 있었으니 이만하면 대중교통 탈만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저녁 식사는 한국식으로 돌솥비빔밥과 지짐이, 떡볶이 등을 먹었는데, 일본의 식당에서는 단무지도 추가되는 게 없고, 물도 싸갈 수 없다고 해서 좀 야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셋째 날, 교토(비와호)와 오사카(난바)

 첫 출발은 일본의 국철인 JR을 타는 것이다. 가방을 들고 이동해서 비와호 박물관에 가방을 맡기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비와호는 머리로 그렸던 것보다 컸다. 호수라기보다 바다처럼 보였다. 박물관을 통해 비와호의 생성과정을 보고 조금 걸어서 수생식물공원으로 갔다. 열대 식물들의 이체로운 모습에 감탄하고 햇살에 비친 그 고운 색채와 하늘의 다채로운 구름 그림이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식물원에서 맛난 밥을 먹고 걸어서 나오는 길에 느긋한 시간과 높고 푸른 하늘, 따사로운 햇살에 우리 일행 모두는 여행의 감흥에 젖었다. 길거리 즉흥마당으로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한 때를 즐거이 보냈다. 대자연 아래서 허물어지는 경계, 그 어디쯤에 우리가 있었다. 

 두 번째 숙소를 찾아가는 길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일본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경험으로 ‘아갓다리 사갓다리’(오르락 내리락)를 했지만 이 또한 여행에서 만들어내는 예기치 못한 이야기, 두고두고 끄집어낼 맛난 이야기일거라고 여겼다. 조금 지친 몸을 안고 호텔로 들어와 짐을 풀고 저녁은 영향보충으로 일본의 소고기 ’와규‘를 먹으러 갔다. 눈앞에서 요리를 하는 모습을 보며 먹는 화려한 식단은 오늘 하루의 피로를 풀기에 충분했다. 좋은 음식으로 휠링을 한 우리는 ’밤의 난바‘를 보러갔다. 도심의 거리를 누비며 서울의 도시와 다르지 않는 탁한 공기, 지저분한 거리, 많은 사람, 높은 빌딩의 오사카를 볼 수 있었고, 깨끗한 거리, 맑은 공기, 잘 정리된 수로, 누구를 세워서 물어도 길을 친절하게 안내해주던 교토와는 사뭇 달랐다. 우리 일행들은 교토의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


 넷째 날, 돌아가고 싶지 않아~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 누군가가 말한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언제 또 이런 여행을 할까?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3년 뒤에 이런 기회를 또 갖자며, 건강도 챙기고, 언어도 배우고, 여행 경비도 저축하고...... 자꾸 마지막 날이라는 게 아쉬워서 이동하는 동안 내내 다음 여행을 꿈꾼다.

 공항으로 가기 전 도심을 즐기는 시간, 도시 한가운데 몇 개의 건물을 연결해서 만든 ‘난바파크’, 각각의 건물주들이 이런 합의를 해 냈다는데 놀라고, 이 식물들이 잘 자라도록 관리해 놓은 것에 또 한 번 놀라고, 산딸나무에서 산딸도 따먹는 행운도 얻어서 더욱 즐거웠다. 

 이번 여행을 즐겁게 해 준 데에는 두 사람의 역할이 컸다. 이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준비해 준 김현미선생님과 여행 내내 안내와 숙소와 먹거리 정보, 그리고 일본의 문화와 자연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었던 김혜숙 선생님이 있어서 자유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난바파크에서도 김혜숙선생님은 일본의 거지문화에 대해 맛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노숙자를 볼 때면 문득 문득 ‘난바파크’가 기억날 것이다. 


 오랜 시간 단체 활동을 해오면서 이런 호사는 처음이다. 사업비가 아니라 여행경비라니, 활동가들은 늘 자기 경비를 쓰고 활동을 한다. 그런데 여행 경비를 주다니 이런 사치(?)가 어디 있을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풍성한 여행이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겪었던 시행착오는 피로를 가중시켰지만 두고두고 퍼 올릴 이야기 자산이다. 

단체 일을 하느라 늘 분주하게 뛰어다녔던 시간들을 조금은 보상받는 느낌이었는데, 같이 활동하는 동료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이런 기회가 더 많아지기를 기대해본다.

‘난바파크’에서 나와 일본을 대표하는 초밥으로 일본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고 공항으로 갔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3박 4일 동안의 여행을 되새기는 끝없는 수다가 오고갔다. 

살구여성회 사무국장 

김현미

볕바라기 주간보호센터, W몰 지정기탁- 제주도 가을얼굴을 보다

여행을 통해 세상 만나기



가산동 W몰의 서울사회복지공동모금회 지정기탁으로 볕 친구들이 가을 여행을 다녀왔다. 출발하기 며칠 전부터 태풍 풍윙의 위세를 보도하는 뉴스에 귀를 기울이며 촉각을 세우며 출발을 기다렸다.



9월 22일(월), 출발 하루 전

아직은 날씨가 좋다. 내일부터 3박 4일 제주도 여행을 간다고 하지만 녀석들은 별 감흥이 없다. 다만 우리 집 막내 현아양만이 3박 5일 제주도, 아시아나, 비행기 슈웅~ 하면서 이문희 선생님과 잠을 잘 거라고 박수치는 모습만이 우리의 여행을 확인 시켜줄 뿐이다.

23일(화) 여행 하루 차.

엄마들이 지고 이고 온 배낭, 자신의 짐은 스스로 관리해야한다고 설명을 하고 녀석들 등에 배낭을 메어주고 탑승을 위해 줄을 서고 있다. 홀로서기도 연습이 필요하다.  드디어 숙소 도착  여행 중 기분 좋은 피로를 마음껏 풀어 놓아도 되는 우리들의 공간, 안심 보금자리. 이랜드파크 호텔·레저 사업부에서 후원해 주신 켄싱턴리조트, 여기서 3박을 했다.


24일(수) 여행 이틀 차.

리조트에서 아침 식사로 준비해 주신 성게 미역국으로 배를 든든히 하다. 배도 든든하니 마음도 든든하다.  저녁 식사 자리에 옆 테이블에 놓여있는 맥주잔, 이미 성인이건만 우리들의 식탁에 늘 빠지는 알코올. 이 녀석들의 나이 땐 붉은 등불아래서 이상은 높게, 사랑은 깊게 그리고 잔은 동등하게를 외치며 몇 순배의 술잔이 오고 갔는데.

울 녀석들과 언제나 술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외칠 수 있을까?  


25일(목) 여행 삼일 차.

이른 아침을 먹고 리조트 내 산책을 하였다. 리조트 내에 올레 7코스의 일부분이 포함이 되어있단다. 멀리서 좋은 것을 찾는 나의 어리석음을 또 확인하는 순간이다. 가까이 보석이 있음을 미처 못 보는…그런데 사유지인 이 공간을 올레꾼들을 위해 개방한단다. 물신주의가 팽배한 작금에 이랜드의 큰  마음에 감사함을~  그런데 개인적으로 바닷가 우체국에서 손 편지 못 쓴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날. 

마지막이란 단어는 늘 아쉬움이 짙다. 공항에서 부터 제주의 얼굴을 보여주고 다시 제주 공항으로 우리를 데려다 줄 차량. 아직 일정이 남아 있지만 평소보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느낌이다. 

제주 켄싱턴 호텔에서의 조식. 공공장소에 갈 땐 늘 녀석들과 약속을 한다. 조용히 하기, 질서 지키기. 세월이 좋아져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능숙하게 경직되어있는 나는 주변의 시선에 레이다가 끊임없이 작동하고, 언제 어디서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르는 녀석들을 보호하기 위해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적절하게 사용하도록 기계가 내장되어 있다. 

엄마들이 타인의 시선에 무심하게 녀석들과 교양있게 식사할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우리는 자신의 삶이 건강하도록 몸과 마음을 살펴 특별히 힐링을 위해 숲길을 찾지 않을 것이다. 다만 숲길을 걷는 것은 우리의 삶을 더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즐거운 놀이 이기 때문이다.

볕 친구들과 제주도에서 3박 4일을 함께했다. 개인신고시설이라 정부의 운영 지원이 없어 살림살이가 조금은 빡빡해도 서울사회복지공동모금회 지정기탁과 이랜드 파크 호텔∙레저사업부의 지원으로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지정기탁을 해주신 금천구 가산동 W몰 사장님과 이랜드 파크 호텔∙레저사업부 김을회 과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감사함을 기억하겠습니다. 

사족으로 장애 자녀를 둔 부모들이 지치지 않고 양육하기 위해서는 당신 자녀들에게 절망이 아닌 희망을 보아야한다. 주어진 오늘, 부모님들이 자녀들과 별 일 없이 지낼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시고, 지혜를 모아 오늘을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함께 마음을 모아주기를 바래본다.


주간보호센터 볕바라기

신혜옥 대표


(86호  2014. 11.17~11.30)

시흥중, 공개 천체 관측회 개최



지난 10월 8일 수요일 ‘2014 교내 공개천체관측회'가 열렸습니다. 2010년부터 5년째 해마다 열리는 천체관측회는 ‘모이자! 별 볼 일 있다!’라는 제목과 같이 정말로 별 볼 일 있는 하루를 만들었습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행사를 축하하면서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보고 자신의 미래와 꿈을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자.’라고 학생들에게 말씀하셨는데, 학생들은 활동 내내 반짝이는 눈빛과 행복한 웃음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친구 또는 가족과 밤하늘을 보면서 자신의 미래와 꿈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1부, 2부 행사로 나누었고 총 4회를 계획했으나 4회차에 너무 많은 학생들이 몰려 한 회차를 추가하여 총 5회로 진행하였습니다. 우선 1부 행사로 약 50명 정도의 학생들이 도서실에서 ‘천문교육체험활동’을 하였습니다. 접수대에서 활동지를 받고 교육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뉴스, 동영상 등을 이용하여 개기월식의 윈리를 탐구하고 나서 Starry Night(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우주의 모습과 하늘의 별자리, 그리고 오늘 밤 우리가 관측할 별이 무엇인지 등등을 대형 스크린으로 보았습니다. 

1부 행사가 끝나고 저녁 7시부터 운동장에서 2부 천체관측행사가 열렸습니다. 1부 행사를 마친 학생들이 학습지를 가지고 운동장으로 나가 개기월식과 별들을 관측하였습니다. 별 관측을 전문으로 하시는 강사가 가을 밤하늘의 별자리에 대해 설명을 할 때는 별까지 뻗어나가는 초록색 레이저를 보면서 감탄의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습니다.  

 운동장에는 5대의 천체망원경이 일렬로 놓여 있는데, 순서대로 관측을 하면 됩니다. 첫 번째 망원경으로는 달 표면, 두 번째 망원경으로 직녀성, 세 번째 망원경은 알비레오 이중성, 네 번째 망원경으로는 견우성, 마지막 망원경으로는 보다 크게 확대된 달 표면을 관측하였습니다. 달의 표면이 징그럽다는 학생, 신기하다는 학생, 직녀성이 다이아몬드 같다는 학생, 이중성이 놀랍다는 학생 등등 다양한 반응을 쏟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학교의 운동장은 즐거운 추억으로 가득하였습니다.  망원경에 보이는 천체 사진을 핸드폰으로 찍어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고 친구들과 공유하기도 하였습니다.

5가지의 관측이 모두 끝나면 칭찬 도장을 받고 기념품을 받게 됩니다. 시흥중 천체관측회 라는 로고가 새겨진 텀블러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4회차 실시하도록 계획하였으나 마지막 회차에 70명이 넘는 학생이 몰려 한 회차를 더 늘려 결국 5회차로 실시하였습니다. 인원을 제한하고 시작 후 5분이 지나면 입장을 시키지 않았더니 도서관 행사에 대한 집중도와 호응도가 훨씬 높아져 효과적인 천문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천문교육에 대한 학생들의 만족도가 상승하였습니다.  

도시의 하늘이라 쏟아지는 별을 볼 수는 없지만, 서울의 운동장 하늘에서도 별을 볼 수 있었다는 데서 잊을 수 없는 시간이 되지 않았나 합니다. 더욱이 올해는 개기월식이라는 특별한 천체현상을 직접 체험할 수 있어서 더 소중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순서를 기다리면서 질서 있게 행사에 참여한 250여 명의 시흥교육가족(재학생과 가족, 졸업생, 교직원과 가족, 학교 전담 경찰관)의 모습이 정말 보기가 좋은 밤이었습니다. 

           

시흥중학교 기고


달도 보고, 별도 보고, 지식도 얻고, 텀블러도 얻고 1석4조!

평소에 우주과학에 관심이 있었다.  태양과 행성, 위성...그리고 별...우주는 참 신비하다! 그런데 이런 기회가 있어서 별을 보러 갔다. 학교에서는 일단 개기월식의 설명을 들었다. 왜 개기월식인데 달이 빨갛게 보이는지...사실 백조자리의 부리에 있는 별은 하나로 보이지만 사실 색이 다른 두 개의 별이라는...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매우 신기했다. 실제로 운동장에 가서 망원경으로 보니 그 별은 파란색과 빨간색 2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었다. 

개기월식을 위해 달을 보는데, 달이 표면까지 보일 정도로 자세히 나왔다. 달은 구멍(크레이터)이 많았지만 정말 이뻤다! 개기월식을 망원경으로 보니 매우 이쁘고 신기했다. 우리 눈으로는 이렇게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이 없었으니...

달도 보고, 별도 보고, 지식도 얻고, 텀블러도 얻으니 1석 4조다! 

다음에는 내가 고등학생이 돼서 못올거라 아쉬워하고 있으니 선생님께서 여기에 고등학생도 많이 온다고 내년에도 와도 된다고 하셨다. 내년에도 시간이 된다면 꼭 다시 오고 싶다^^

시흥중학교  3학년 6반  

 이예원


(85호  2014. 10.27~11.16)

(85호  2014. 10.27~11.16)

퇴직을 앞 둔 금천구청 박 팀장은 “젊은 시절 동창회비를 낼 수 없어 동창회도 나가지 못하고, 친구를 만나도 공무원 월급이 얼마나 되느냐며 밥값 내지 말라는 동정어린 얘기를 들어가며 공무원 생활을 해왔다”며 울분을 토해냈다. 결혼 전 너무 월급이 적어 처가에서 결혼을 반대해 어렵게 결혼했다는 박팀장은 퇴직 후 받는 공무원연금으로 장인어른에게 겨우 승낙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지난 33년 동안 철썩같이 믿고 의지한 국가의 약속이 공무원연금인데, 이제 와서 철밥통, 세금도둑으로 몰고 있는 현실을 보니 내가 믿었던 국가가 악덕기업주였던 것 같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2000년에 입직한 김 주임은 앞서 다니던 회사에서 170여만원의 급여를 받았는데, 첫 급여 95만원을 받고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당시 인사담당이 “비록 지금은 적은 급여지만 나중에 공무원연금으로 보상을 받으니 열심히 근무하자”는 말에 사표를 내지 않았는데 지금은 후회스럽다고 한다.

 공무원사회가 반 토막 나는 연금으로 동요하고 있다. 지난해 금천구청 퇴직자는 22명이고 퇴직자 평균 재직년수는 31년이다. 대부분 6급 이하 하위직 공무원으로  150~250여만원 정도의 연금을 수령한다. 즉 35년 동안 매달 급여의 7%를 납부하고 250만원 미만의 연금을 수령하고 있는 것이다. 언론에서 보도하고 있는 300만원 이상 연금수령자와 500만원이 넘는 고액 수령자와는 거리가 멀다.

국민연금보다 기여금도 오랫동안 더 많이 내고, 고용보험, 산재보험도 없이 영리활동 제한까지 받는 것을 오직 연금으로 보상받는 공무원연금의 특성은 무시되고 있어 공무원은 억울하다. 단지 국민연금 84만원보다 많으니 공무원연금도 반토막내겠다는 정부의 행태는 그야말로 악덕기업주의 모습이다.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공무원을 고용하면서 외국보다 싼 임금을 지불하지만, 퇴직 후 연금으로 보상한다는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 것이다. 정부가 공무원 고용에 대해 감수해야할 당연한 책임은 외면하고, 싼 임금에 연금까지 줄인다면 저렴한 노동력으로 국가를 운영하게 되는 것이다. 공공서비스가 부실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이다.

연금은 공무원이 직무에 전념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이다. 재정적자로 인해 연금을 개악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정부가 각종 부담금을 미납하고, IMF 당시 11만명의 공무원을 구조조정하며 퇴직급여를 공무원연기금에서 지출하는 등 현가기준으로 기금 32조를 떼먹어 공무원연금 부실의 원인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자로 인해 연금개악을 논의해야한다면 월급여 150만원의 하위직의 연금은 높이고, 고위직의 연금은 깍는 하후상박(下厚上薄)을 전제로 사회적 합의를 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지금처럼 청와대와 새누리당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은 공무원의 공분만 살 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국가가 공무원연금 개악에 앞서 할 일은 국민연금, 기초연금 등 공적연금을 강화해서 국민의 노후를 책임져야 한다. 공무원노조는 노인빈곤율 1위, 자살율 1위라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 국민연금의 지급수준을 높여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무원연금과 국민연금을 모두 하향평준화하려는 정부의 의도는 결국 국민의 불행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국가가 책임있는 자세로 고민하고 오히려 국민연금을 공무원연금 수준으로 올려야 하는 이유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금천구지부 수석부지부장  김민완

(85호  2014. 10.27~11.16)

다른 지자체들을 보면 세월호 현수막의 거취 및 철거 여부에 대한 갈등이 많은 것 같다. 현수막이 불법이라는 사람에서부터, 불법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때로는 법률보다 인지상정이라는 인의와 감정에 기대기도 한다. 


그러나 세월호 거리 현수막이 정말 불법일까? 게시되고 있는 지자체의 단체장들은 불법을 눈감아주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게시에 대한 철거 여부가 온전하게 단체장의 권한이자 권리일까? 


철거에 대해서 나는 이것은 국가의 권한도, 단체장의 권한도 아니라 온전하게 게시한 시민만이 권한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민주주의 국가 성립의 전제는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는 자연법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즉 재산권과 생존권, 행복추구권,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 등등으로 대변되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에 대한 합의를 기반으로 근대 민주주의 국가는 설립되었다. 바로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지키기 위하여 인간에 대한 기본권은 누구에게도 침해 받을 수 없는 천부인권이 부여된 것이다. 인간이 생물학적 존재이기에 생명을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듯이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한 사회에서의 정치적인 표현의 자유는 누구에게도 양도될 수 없는 것이다. 그 존엄이 전제가 된 것이 근대 민주주의 국가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이를 의사표현의 자유로 구체화하여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는 누구에게 허가를 받거나 검열을 받을 대상이 아니라고 못박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 현수막이 불법이라고 주장하는 측은 대통령령인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 시행령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고 불법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측은 상위법인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 8조 4를 근거로 적용배제의 대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8조 표시•설치 기간이 30일 이내인 비영리 목적의 광고물등이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면 허가•신고에 관한 제3조 및 금지•제한 등에 관한 제4조를 적용하지 아니한다. 8조의 4 - 단체나 개인이 적법한 정치활동을 위한 행사 또는 집회 등에 사용하기 위하여 표시•설치하는 경우) 또한 이를 너무 협소하게 해석하여 세월호 현수막이 정치적 집회나 행사 등을 내세우는 주장이 아니기 때문에 불법이라고 주장한다. 또는 이미 30일이 지났기 때문에 불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법 2조2를 보면 이 법률의 설립취지가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바로 “이 법을 적용할 때에는 국민의 정치활동의 자유 및 그 밖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아니하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라고 말이다. 여기서 우린 동법 8조 이전의 조항인 2조2 조항의 취지와 함께 국민의 정치활동과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다 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당의 현수막은 법으로 보호가 된다. 그렇다면 국민의 정치활동은 정당을 통해서만이 가능한가?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주체인 시민의 현수막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이 없다는 이유로 과도하게 불법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위의 조항이 하는 말은 결국 옥외 광고물의 경우에도 국민의 정치활동의 자유와 그 밖의 권리를 정당하게 보호를 해야 한다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물론 일정부분 각각의 가치가 충돌하는 즉 다툼의 여지가 있다. 당연히 의사표현의 자유를 포함하여 행복추구의 자유, 재산권행사에 대한 자유 등등의 여타의 다른 가치와 충돌 할 수 있으며, 그럴 경우 예를 들면 타인의 존엄과 권리를 침해할 때는 엄격하게 제한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현수막을 크게 제작하여 타인의 가게를 가려 영업행위를 현격하게 방해했을 경우, 또는 타인의 이익을 현격하게 침해했을 경우, 또는 공적인 자산(가로수나 가로등 등)을 현격하게 훼손될 수 있을 경우들에는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이 당연히 옳다. 그리고 공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자가 그 제한에 대한 여부를 일정 정도 판단하고 공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세월호 현수막은 그렇지 않다. 우선 크기에서도 세월호 현수막이 교통을 방해하거나, 타인의 재산권을 침해하거나, 공적 자산의 가치를 현격하게 훼손하거나 하지 않는다. 또한 현저하게 훼손되어 있어 공적 공간의 미관을 현격하게 해치지 않으며, 그 내용 또한 미풍양속을 해치거나 인종차별적인 범죄를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법이 공정하게 평가할지는 둘째치고 그리고 법률적 다툼의 여지는 있겠지만 단체장의 의지로 세월호 현수막을 철수할 수 있다는 주장은 민주국가의 근간이자 생명인 정치적 의사표현의 권리를 과도하게 침해하는 것이라 볼 수 밖에 없다. 조금 더 나간다면 단체장에게도 철수할 명분도 권한도 없는 것이다. 이는 거치한 시민의 사적 자산이기 때문이다. 오직 거치한 시민들이 합의를 하거나 직접 철수할 수만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그러면 누군가는 반대되는 표현도 할 수 있지 않냐고 말이다. 그래서 현수막이 이곳 저곳에 남발하고 시끄러워지지 않겠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보장되면 그만이다. 왜냐하면 결국 그것은 공적인 공간에서의 도덕적 명분의 우위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다수 대중의 평가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정리되기 때문이다. 즉 누가 공공선을 위한 더 큰 가치를 주장하고 누가 더 부끄러운 주장을 하는 것인지 공적인 공간에서 다수 대중에 의해 판가름 나게 될 것이며, 부끄러운 자들은 자진 철수 할 것 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적 의사표현의 행위는 사적인 공간이 아니라 공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적인 공간에 대한 모든 점유 행위가 공적 공간을 무단으로 점유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정치라는 것은 공적인 공간에서 각각이 자신의 정체성들을 현시하는 과정에서 더 큰 공적인 가치가 발현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공적인 합의가 이루어지며 또한 그 합의에 따라 정치적 정당성이 비로소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누리는 무한한 자유를 포기하고 대리인에게 일정 정도의 권한를 부여한 이유는 인간으로서의 재산과 생명과 권리를 지켜주겠다는 약속 때문인 것이다. 그 약속이 헌법으로 구체화 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 일정의 권한을 부여 받은 공직자가 나서서 인간의 권리를 지켜주고 신장시키기는커녕 마치 공적 공간에 대한 무한 권리를 부여 받은 양 부여 받은 정치적 권한을 통치적 권리로 착각해서 행위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공직자의 임무는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표현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지켜야 하는데 있다. 인간에게 생물학적 생명이 중요하듯이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정치적 생명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족이지만 

한 사회가 공무원들에게 공적 자금을 투여하고 한 사회의 명예와 영광을 부여하는 이유는 시민들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시민들의 권리과 민주주의를 책임지라고 부여하는 것일 것이다. 정치적 의사표현이 죽은 사회는 이미 사회가 아니라 집단에 불과한 것이다. 사회가 아닌 곳에서 부여 받을 명예와 영광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84호  2014. 10.13~10.26)

▲ 축제의하이라이트 경품추첨_엄마아빠아이들이 모두 나와서 경품을 원하고 있군요


거리에 날리는 비눗방울을 따라가니 흥겨운 음악소리가 흘러나온다. 수많은 사람들이 얼굴마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의 합창소리를 듣는다. 9월 24일, 금천마을공동체지원센터에서는 11명의 금천마을지기가 지난 두 달간 준비한 금천마을지기축제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마당에선 비눗방울이 하늘로 날리고, 넓은 홀에선 아이들이 사방치기와 비석치기를 하며 뛰어놀았다. 매콤한 떡볶이냄새가 솔솔 풍기고 저마다 손에 먹음직스런 샌드위치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에서, 그것도 평일 오후에 이 많은 관객들은 어떻게 모여들었을까? 



금천마을지기는 누구인가요?


  마을지기는 간단히 말하자면 성장하고 있는 마을활동가라고 한다. 반팔을 입어도 어색하지 않은 지난 늦은 봄, 마을에 관심을 갖고 마을을 더욱 자세히 알고 싶었던 주민들이 마을지기 모집 공고에 지원했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마을지기로 활동하게 되었다. 금천구는 총 10개동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안양천으로 나뉘어진 독산 분소지역까지 포함해 총 11명의 마을지기를 선발하게 되었다. 이들은 기존에 꾸준히 지역 활동을 해왔던 사람들과는 달리 이제 막 마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또 마을을 관찰하고 있던 이들이다. 평생을 금천구에서 살아온 토박이 젊은 엄마부터, 도서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다가 마을공동체에 관심을 갖게 된 분들, 마을의 사각지대와 소외계층에 관심이 많은 목사님, 마을에서 일터를 찾고자 하는 20대 청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마술사까지 그 구성도 다양하다. 그만큼 마을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돋보이고, 다양한 관심사만큼 다양한 시각으로 마을을 바라보고 있다. 


금천마을지기는 무엇을 하나요? 


  그렇게 선발된 마을지기들은 매주 1번씩 금천구마을지원센터에 모여 서로의 마을활동을 공유하고 공통의 미션활동을 수행해왔다. 5월달 부터였으니, 벌써 5개월을 꽉 채워 활동했다. 그 기간동안 한명의 결석도 없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우리 마을’이라는 하나의 공감대, 마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쑥쑥 성장해서 지금은 금천 마을에서는 어딜가도 아는 사람이 넘치는 마당발이 되었다고 한다. 금천마을지기가 해온 미션을 살펴보면 그리 어렵지 않지만 마을 활동가로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내용들이 들어있다. 마을지기의 역할을 직접 규정하는 토론을 하기도 하고, 우리 동네에서 자랑하고 싶은 마을사람과 이야기거리를 찾기도 한다. 우리 마을의 자원찾기 미션은 2달에 걸쳐 장기미션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했던 우리마을 SWOT 분석은 구청과 각 동의 공무원들에게도 큰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이번 금천 마을지기 축제도 기획과 준비과정부터 마무리까지 모두 마을지기들이 주체가 되었던 축제였다. 장장 2달을 꽉 채워 매일같이 기획회의가 있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많은 사람들은 어디서 왔나요?


  금천마을지기축제에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체험부스, 또 다양한 먹거리 부스, 축제에 방문한 주민들이 즐겁게 즐길만한 공연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었다. 공연팀도 다양했다. 3-40대 엄마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는 우크렐레 동아리 자화자찬과 아주까미의 연합공연, 50-60대의 시니어가 주축이 되어 활동하는 느티나무 통기타 동호회, 초등학교 저학년~고학년이 함께 어우려져 활동하는 지혜의 숲 어린이 도서관의 합창 등 세대를 아우르는 공연이었다. 남녀노소 어떤 연령대의 주민 누가 오더라도, 그를 위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있는 것이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축제, 어떻게 가능했을까? 바로 그것이 금천 마을지기의 힘이었다. 나의 친구와 이웃이 주최하는 축제이기에 마을 주민들도 모두 주인의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축제준비과정이 모두 오픈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고, 서로 도와주고자 하는 분들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나 금천마을지기 축제를 가장 뜨겁게 달궜던 경품 추첨시간! 이날 모인 약 50개의 경품은 각 동의 마을지기들에게 다양한 주민들이 후원해주셨던 물품들이었다. 마음을 담은 “관계”의 힘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오후 4시부터 8시까지, 딱 4시간동안 펼쳐졌던 흥겨운 축제의 장은 약 250명의 방문객이 왔다간 것으로 집계되었다. 준비했던 먹거리와 체험상품들은 모두 매진되어, 금천 마을지기들은 완판녀, 완판남이 되었다. 행사가 끝나고 난 뒤 축제를 방문했던 주민들은, 함께 뒷정리를 도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만큼 금천 마을지기들은 주민의 삶 깊숙히서 관계 맺은 친구로 또 이웃으로 마을에서 강하고 촘촘한 그물망을 형성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금천 마을지기들이 샅샅히 마을을 돌아볼 때, 정말 주민에게 필요한 아이디어와 주민이 원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마을의 미래를 꿈꾸어가며 가꾸어가는 금천마을지기, 앞으로의 활동도 기대된다! 


금천구마을공동체지원센터  마을로청년활동가 정소민



(84호  2014. 10.13~10.26)

여러분들은 꿈이 있으십니까?

만약 꿈이 있으시다면 그 꿈을 이루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시나요?

저에게는 사회복지사 라는 꿈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그 꿈을 포기하게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왜냐고요? 부모님의 반대? 주변에서 하지 말라그래서? 아닙니다.

성적, 성적이 제 꿈을 포기하라고 합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요즘은 어떤일이든 대학을 나오고 스펙이 있어야 할 수 있구나 라고요.

그리고는 한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대학가면 인생이 성공하나? 

대학이 뭐길래 사람들은 대학 대학 노래를 부르지?

대학 못나왔다고 취직도 시켜주지않고서는 왜 노동력부족 타령일까?

하는 의문 말입니다.

물론 공부가 중요하지 않다는건 아닙니다.

다만 성적보다는 그 사람의 의지와 얼마만큼위 노력을 했는지를 좀 더 봐달라는 것입니다.

단지 공부를 못해서, 성적이 낮아서, 대학을 못가서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한다는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단순히 학력만으로 사람을 평가하기 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과 의지를 좀 더 높게 평가해 자신의 꿈을 이룰수 있는 기회가

모두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난곡중 3학년 김미애

(84호  2014. 10.13~10.26)

나는 91년도에 대학에 입학한 소위 학력고사 세대이다. 국영수를 포함해 체력장까지 13과목을 모두 시험보고 총점에 따라 대학의 당락이 결정됐다. 지원할 수 있는 대학은 단 한 곳. 그것도 시험 보기 전에 미리 지원한 후 시험 점수에 따라 당락이 나뉘는 방식이었다. 변화된 최근 입시와 비교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상한 제도다. 

원서 마감 때가 되면 여러 장의 원서를 들고 온 가족이 여러 대학에 대기하다 경쟁률이 가장 낮은 학과에 막판 눈치 보기 접수가 성행하기도 했다. 지금처럼 사교육이 일반화되지 않았지만 학력고사 두어달 전에 몸값 비싼 찍기 과외 선생을 만나면 막판 점수가 2-30점씩 오르는 일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때문에 당시 부모의 경쟁력이란 막판 찍기 과외 선생을 붙여줄 수 있는 경제력이 있는가였다.

2014년 대학 입시 수시전형 원서접수가 일단락되었다. 최근의 대학입시는 예전의 학력고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졌다. 수시모집과 정시모집이 있고 학교별로 내신, 수능, 논술, 면접, 학생부 비교과 영역 등을 다양하게 반영한다. 

크게는 학생부 교과 전형, 학생부 종합 전형, 논술전형, 특기자 전형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세부적인 입시요강을 살펴보면 학교별로 반영하는 교과의 영역도 다르고 반영하는 방법도 천차만별이다. 심지어 국어나 수학 점수를 입시에 아예 반영하지 않는 학과들도 많다. 

마치 입시괴담처럼 ‘누구는 몇 등급으로 어느 대학에 갔다더라’하는 소문들이 심심치 않게 들리기도 한다. 

수시전형은 내신이 중심임에도 일반고 1, 2등급 학생들은 떨어지고 특목고 4, 5등급 학생들은 붙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최근에는 입시컨설팅이 유망 산업이 되었다. 막판 경쟁률을 가지고 눈치보기 지원을 하던 1991년 수준이 아니다. 아예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몇 군데 대학을 찍어놓고 내신과 모의고사 점수는 물론 동아리 활동, 수상경력, 독서 이력 등을 체계적으로 관리한다. 공부만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는 학생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제 부모의 경쟁력은 단순한 경제력이 아니라 고도의 정보력이 되었다. 부모가 입시전형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빨리 알고 있을수록 아이가 좋은 대학에 입학할 확률은 높아진다.

교육열이 높다하는 지역에서는 입시 정보를 공유하는 학부모 모임도 성행하고 있다. 정보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지는 학부모들은 값비싼 컨설팅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영어 공부도 아니고, 수학 공부도 아니고, 논술 준비도 아니고 대학 입시 전형을 이해하고 준비하기 위해 적지 않은 사교육비를 지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중3, 고1 쯤 상황을 파악하면 다행이다. 고 3이 돼서야 입시가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손써볼 방법조차 없다. 그저 부족한 성적에 맞추어서 아무런 준비도 없는 빈 학생부를 들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감수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최근에는 ‘차라리 예전 학력고사가 좋았다’는 자조 섞인 탄식마저 나온다. 그러나 아이들의 취향과 적성, 희망 전공과 관계없이 그저 학교 성적만을 가지고 한 줄로 세워 대학을 보내는 것이 과연 옳은가? 단연코 그렇지 않다. 

입시의 다변화는 학생들을 평가하는 다양한 방법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다만 애초의 취지에 맞게 단순한 교과 성적이 아니라 학생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점검할 필요가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입시 전형은 진로를 위해 성실하게 자기 준비를 해 온 학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보력이 많은 능력 있는 부모를 둔 학생들의 교과 성적을 메꿔주는 대체 수단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조희연 교육감 당선 이후 ‘일반고 살리기’가 화두다. 일반고를 살리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달라진 입시제도에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특목고를 해체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일까? 일반고의 슬럼화는 공부 못하는 아이들 때문이 아니다. 달라진 교육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 일반고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 싶다.

김유진 (지성의 숲 부원장)


세월호참사 과연 남의 일인가?

  정의당 금천지역위원장 공병권

우리는 이웃과 더불어 산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 이웃, “우리라는 생각에 너무 인색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옆에 이웃이 불행하다면 나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이웃이 어떻게 되든 나와는 상관없는 문제다라고 생각해도 누가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사실 나 혼자만 잘 살고 내 것만 잘 챙기면 살아가는데에는 지장은 별로 없습니다. 이것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우리 현재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갑자기 사고가 났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른 체 한다고 가정을 한번 해봅시다. 나와는 상관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들이 혼자 해결해야할 문제라고 생각하고 그냥 본체만체하고, 연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면 살아가는게 정말 끔찍하지 않겠어요. 과연 더불어 산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세월호 참사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고 그냥 빨리 마무리만 되면 모든 것이 잊혀지는 그러한 문제일까요.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일까요?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문제는 남의 문제가 아니고 당장 내일이라도 나에게 닥쳐올 문제인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내가 언제 저 배나 비행기를 안탄다고 보장할 수 있나요. 다행히 내가 탄 비행기나 배가 사고만 안나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할 수 있나요. 그렇게 확신할 수 있나요. 그렇게 사고 안나기를 요행만 바라고 살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근본적으로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자 하는 것이 세월호 문제를 풀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주변에 수없이 많은 사건, 사고들이 발생합니다. 사소한 사건부터 대형사고까지 곳곳에서 발생하고 사건처리가 됩니다. 고의적으로 사고를 내는 것이 있는가 하면 과실, 천재지변 등등 사건이 일어나며, 이것이 일어나지 않게는 할 수 없습니다.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서 모두가 사회적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건이 일어나면 우선 그 사건이 왜 일어났는가? 그리고 사건이 일어났을 때 과연 책임있는 사람들이 구조활동을 적절히 했느냐? 사고 수습을 어떻게 제대로 했는가? 하는 문제는 아주 중요하고 기본적인 조사내용들입니다.

 

세월호 문제도 이것을 조사하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특별한 것도 없습니다. 엄청나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성역없이 진실을 밝혀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끄럽습니다.

 사건에 대한 조사는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조사를 하는데 이에 응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요? 그냥 하는 수 없지라고 포기해야 하나요? 강제로 수사할 권한도 없이 조사를 한다고 해 봅시다. 조사 받는 기관들이 순순히 자료등을 잘 내어 놓으면 모르겠지만 권력기관들이 조사기관에 순순히 모든 자료들을 내 놓겠습니까? 그동안 우리들이 보아온 조사기관들의 무력한 모습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조사기관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주어 제대로 조사하여 진실을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 세월호 조사의 목적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법학자들도 조사기관에 수사권, 기소권을 주는 것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당과 권력 잡은 사람들만 안된다고 합니다.

 조사기관에서 대충 조사하게 해서 다시 필요한 것에 대해 특검에 맡기자는 것인데 (지금 상설특검제도하에서는 특검의 공정성을 기대할 수 없음) 그동안 우리가 특검에 대해 신뢰를 할 수 있었나요. 뭘 그렇게 복잡하게 하나요. 조사기관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주면 아주 깨끗하고 명쾌하게 정리될 것을..... 헌법에도 위반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이야기 하고 있는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누구나 다 알 것을 굳이 위헌문제를 시비삼아 본질을 왜곡하고 진실을 회피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제 좀 솔직해집시다.

 

그리고 한번 생각해봅시다. 세월호 참사가 났을 때 모든 국민들이 그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배가 서서히 넘어져 가고 있는 모습을 모든 국민들이 안타까워하며 도대체 왜 구조를 못하는지 답답해 했습니다. 그래서 저것은 문제가 있다, 왜 저렇게 내버려 두는지, 구조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왜 한명도 구조를 못했는지 모두들 궁금해 했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세월호 참사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하자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다 6.4지방선거, 7.30보궐선거를 거치면서 집권당과 정부는 서서히 초심을 잊어버리고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서든 빨리 마무리 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언론에서도 이제는 세월호사건 빨리 마무리 하는 것이 좋겠다,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데 왜 이문제에만 매달리고 있나. 경제살리기 정책에 힘쓰자라고 연일 방송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어르신들도 어떤 소문을 들었기에 이제 세월호 사건 지겹다. 그 만큼 보상을 받았으면 되었지 얼마나 더 받으려고 저렇게 하나. 한 몫 챙기려고 하나 등등 사실이 아닌 사실들을 퍼뜨리며, 오히려 이러한 세력들이 세월호 문제해결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과연 자기 자식들이 이 사건의 당사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떠들고 다닐 수 있을까?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된다. 특히 사실정보가 아니라 허위 정보를 고의적이든 고의적이지 않든 확인해보지도 않고 마구 떠들어 대는 것은 이 세월호 사건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 세월호 참사는 그냥 시간이 지나면 국민들에게 잊혀지고 덮고가야 할 문제가 아니기에 더더욱 유가족들과 국민들은 단식이라는 극단적인 처방을 하면서까지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월호 참사문제를 당리당략적으로 정치적으로 풀어서는 안될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당과 정부는 이 문제를 단순히 교통사고니, 유족들이 양보를 해야한다 하면서 정치적으로 끌어들여 이 문제를 풀려고 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이고 우리 미래세대의 안전의 문제이고 남들의 문제가 아니고 당장 우리의 문제이고 나의 문제이기 때문에 더 중요한 것입니다.

진실을 밝히고 앞으로 재발방지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하는 것이 그렇게 무리한 주장일까? 대통령도 왜 우리 국민들이 교황님이 오셨을 때 그렇게 기뻐하고 환호했는지 한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자국민들을 아파하는데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고 모른척 한다면 그 대통령 자리를 내 놓아야 할 것입니다. 국민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어루만지지 못한다면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여야가 대치하고 있을 때 정국을 푸는 것도 또한 대통령의 몫입니다.

혹자는 대통령이 무슨 잘못이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정말 대통령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을까요. 사고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고가 일어난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사고가 왜 일어났고, 사고가 일어났으면 그것을 책임져야할 책임자들이 사고 수습을 위해 제 역할을 했느냐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할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수많은 국민들이 생명을 잃었는데 거기에 대해 전혀 책임이 없다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나요. 그리고 사고 수습을 위해 정부를 잘못 운영한 책임은 없을까요.

 

그러하기 때문에 어느 특정인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 아니라 진상규명을 통해 잘못이 있는 사람에게 책임을 묻고 앞으로 이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 세월호 유가족의 요구이며 우리 국민들의 요구인 것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이것은 대통령과 무관한 문제인 것처럼 여당과 야당이 알아서 하라고 하면서 책임을 떠 넘기고 있습니다. 세월호 문제는 정치적 이해관계로 풀 것이 아니라 국민을 기준에 두고 이 문제를 풀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풀지 못하고 그냥 뒷짐만 지고 있겠다는 것은 무능한 지도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만 불행한 것입니다. 하루속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의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도, 우리 주민들도 이제 세월호 문제를 지겹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초심으로 돌아가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 이 문제를 우리 국민들끼리 서로 반목을 하면서 싸워야 합니까? 이게 정말 우리 국민들끼리 서로 싸우고 다투어야할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내 생명과 안전과 직결된 문제 이게 왜 정쟁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까?

 이제는 우리도 성숙한 국민으로 사건의 본질을 바로 알고 진정 세월호 유가족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왜 이 문제에 대해 저렇게까지 피토하며 외치는 사람들이 있는지 귀 기울여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강보험 관리방식을 다보험자에 의한 조합방식으로 할지 단일보험자의 통합방식으로 할지를 놓고 오랜 논란 끝에 통합방식으로 운영한지 16년이 흘렀다. 1998년 통합에 이은 2000년 의약분업제도 시행 당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재정파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이슈는 주로 보험재정의 안정성과 보장성의 수준이었다.

지금은 우리나라 건강보험제도가 훌륭한 제도로 인정받아 개발도상국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글로벌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안고 있는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직장가입자와 그 피부양자, 지역가입자로 구분되는 가입자격과 소득, 재산, 자동차 보유정도에 따라 7개 부류로 서로 다른 보험료 부과기준에 의해 보험료를 산정하고 있다. 또한 요양기관의 진료비 적정청구 여부를 진료비 지급 전에 보험자가 심사하지 않고 별도의 심사기구를 분리해서 운영하는 비효율성이다.

7개 부류로 서로 다른 부과기준은 보험료의 부담의 불공평, 불형평 논란으로 제도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고 있다.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예를 들면, 직장 다니는 자녀의 피부양자로 등재된 동창 친구는 보험료를 내지 않는데 반해 실직한 자녀를 둔 나는 보험료를 내야 하고, 정년퇴직으로 소득이 줄거나 없어도 집이나 자동차가 있다는 이유로 퇴직 전에 내던 직장보험료 보다 더 많은 지역보험료를 내야 한다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민원의 약 80%를 차지하는 연간 5,730만 건은 보험료에 관한 민원이다.

건강보험료 부과체계개선은 반드시 필요하다. 공평하고 납부능력에 맞는 보험료 부과로 국민들의 불신도 해소하고 생계형 체납자가 양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1989년 전 국민을 대상으로 건강보험을 확대한 것이 25년 전이다. 당시 소득파악율이 낮다는 점이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의 보험료 부과방식을 달리하는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현재 보험료를 부과하는 주요 근거가 될 수 있는 소득파악율이 92%에 이르고 양도소득, 퇴직소득, 상속, 증여소득까지 포함할 경우 95%이상이라면 불합리한 보험료 부과방식은 당연이 개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보험료 부과기준을 소득 단일기준으로 할지, 소득을 기준으로 기본(최저)보험료를 둘지, 소득과 재산을 부과기준에 동시에 고려할 지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빠른 시일 내에 국민 모두에게 동일한 부과기준을 적용하도록 부과체계를 개선해야한다. 

이것이야말로 건강보험제도의 완성도를 높이고 글로벌화를 뒷받침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시흥1동 이성한



아침이면 뒷산으로 나들이를 간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 몸도 깨우고 마음도 들여다보는 참 좋은 시간이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숲이 있어 누리는 행복이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어서 좋은 게 또 있다. 어린이도서관, 작은도서관이 그렇다. 이들 도서관은 어린이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책도 보고 친구도 만나고 믿을만한 동네 어른도 만나는 곳이다.
12년 전에 그런 꿈을 꾸었다. 우리 동네 아이들이 맘 놓고 찾아갈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동네 엄마들과 모여서 동화책을 읽다가 도서관을 하나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함께 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15평 남짓한 곳에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을 만들었다.
처음 도서관 문을 열고 매일 오후3시면 책읽어주기를 했다. 그 때 와서 뒹굴며 책이야기를 듣던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고, 청소년이 되어서 다시 동생들에게 책을 읽어주러 온다.
10여년을 넘기면서 어째 우여곡절이 없었을까마는 그래도 지금껏 처음 생각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동안 이사를 두 번 했다. 이제 날 좋은 5월에 세 번째 이사를 할 계획이다. 동네에서 제법 긴 시간을 지내다보니 우리를 응원해주는 좋은 이웃도 생겨서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이 반 지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아담한 독채를 사서 우리에게 전세살이를 하도록 내주었다. 고맙고 참 고마운 일이다.
좁지만 마당에 작은 텃밭도 있고 나무도 있으니 우리가 늘 꿈꾸던 모습에 한 발 더 다가간 셈이다. 빠듯하게 집을 구하다 보니 건물은 무척 낡았다. 내부수리를 해야하는데 비용이 없다. 이사갈 날은 잡아놓았는데 어찌해야할까 또 한번의 어려움에 부딪혔다.
내부수리를 지원해주는 공모사업도 찾아보고 주변에 아는 사람들을 통해 재능기부도 알아보고 사람과 사람을 건너면서 혹시 좋은 방법이라도 있을까 모두 나섰다.
이 글도 좋은 생각과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 올려본다. 아주 사소한 거라도 귀뜸을 해주면 좋겠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작은 손길들이 모여서 한 고개 거뜬히 넘어갈 것이다. 그래서 참을만한 무거움으로 봄날 같은 소식을 기다린다.

시미선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관장

중앙하이츠 희망지기

위치 : 독산1동
∙코스 : 중앙하이츠 아파트단지 내 생태학습장 둘러보기 > 중앙희망지기 사랑방 > 책이 든 거리 작은도서관

 아파트가 우리 주거문화로 자리잡은건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아파트가 아니라고 이웃과의 교류가 활발하거나 공동체가 더 활성화 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파트가 우리 삶의 단절된 모습을 보여 주는 건 사실이다. 금천구에는 아파트가 주거의 30% 정도인데, 그 중에서 공동체 회복의 필요성을 깨닫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아파트 공동체 활성화의 최일선에 독산1동 중앙아이츠가 있다.
 중앙하이츠 희망지기의 시작은 삶의 필요에 의해 주민들이 움직인 경우이다. 아파트 관리동 내 4층 헬스클럽의 이용률이 현저히 저조함에 공간의 필요성을 느낀 주부들이 동네 돌봄공간으로 변신시켜 다양한 프로그램운영과 함께 동네사랑방으로 자리 잡았다. 희망지기의 시작과 함께 본인도 성장하셨다는 희망지기 대표님과 희망지기의 시작과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을투어는 기획되었다.
 10월의 마지막 수요일, 독산역에 중앙희망지기를 가기위해 금천구 곳곳에서 주민, 활동가분들이 모였다. 중앙하이츠는 독산역에서 5분거리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로 아파트 단지 입구에는 희망지기에서 주말프로그램에 참여중인 학생들이 아파트 안내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희망지기는 아파트 단지 내 자연을 생태학습프로그램으로 연계시켜 진행 중으로 상당히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 중에 하나라고 한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세명의 친구들이 아파트 단지를 소개해 주었다. 직접 마이크를 들고 아파트 곳곳에 있는 식재와 공간을 설명하는데 처음하는 안내라며 어색해했지만 투어에 참여하신분들의 많은 호응과 함께 아이들의 목소리도 우렁차게 커지고 더불어 아파트에서 아이들과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아파트 단지를 둘러보고 본격적으로 중앙하이츠 희망지기 사랑방이 위치한 관리동 4층으로 이동하여 희망지기의 지난과정과 현재활동등을 공유하는 자리를 가졌다. 간단한 설명 후에는 희망지기의 운영주체와 시스템, 입대위, 부녀회와의 관계 등에 대한 심층적인 질문과 대답이 오갔고, 벽산아파트에서 공동체 활동을 시작하려고 준비중이신 주민분은 사업의 노하우 등을 여과없이 질문하여 참가자 분들의 많은 공감대를 얻기도 하였다. 질의 응답 후에는 희망지기 회원과 참가자들간의 자유로운 이야기가 오갔고, 희망지기의 유아프로그램인 체조교실을 참관하여 현재 프로그램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도 가졌다.

            

 
중앙하이츠 희망지기 사랑방을 나와 근처에 있는 책인 든 거리 작은도서관을 방문하였는데, 이곳은 독산역 경관가꾸기 사업으로 10월 8일 개관하여 독산역을 이용하는 주민들의 작은 쉼터 역할 분 아니라, 지역공동체 활성화 거점공간으로 성장하고 있는 곳이다. 개관식에는 희망지기 아이들의 악기연주 참여가 있었고, 작은도서관인만큼 지역사회와 연계하여 다양한 활동 등을 펼칠 예정이라고 하였다. 도서관을 둘러보고 마무리 인사를 하며 중앙하이츠 희망지기의 투어는 마무리 되었다.



남문시장

∙위치 : 독산3동 남문시장 일대
∙코스 : 사회적협동조합 자바르떼 > 남문시장 > 금복상회 > 살구여성회 지역아동센터, 따뜻한 밥집

 5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남문시장은 독산3동 경제활동의 중심으로 과거 대면시장과 더불어 구로공단 시절 호황기를 누렸던 지역의 큰 시장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도 금천구 주민이 많이 이용하는 전통재래시장이며, 2011년부터2013년까지 문전성시 프로젝트가 진행된 곳이기도 하다. 문전성시 프로젝트는 문화를 통한 전통시장 활성화 시범사업으로 전통시장을 지역문화공간이자 일상의 관광지로 조성하여 전통시장활성화 등을 목표로 진행된 사업이다. 3년동안 이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남문시장에는 다양한 상가민 공동체가 형성, 소멸, 진행되기도 하였는데,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사회적 협동조합 자바르떼와 함께 이번 마을투어는 기획 되었다.
 12월 둘째주 수요일 오후 2시. 자바르떼 사무실에서 투어는 시작되었다. 추운겨울과 어울리는 따뜻한 난로에 모여 3년동안 사업을 진행하신 대표님의 개괄적인 설명과 함께 남문시장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상가민들의 공동체 형성과정, 가게 문을 닫고서 시장의 축제를 벌인 일, 상가민과 작가와 만나 시장활성화를 위해 함께한 프로그램 등의 소개를 통해 상가 공동체에 대한 현실적 이야기와 방안 등을 이야기 하는 자리였다. 또한, 금천구에서 다양한 문화공동체 사업을 하고 있는 사회적협동조합 자바르떼에 대한 참가자들의 질문도 많았으며 지역의 새로운 단체와의 만남에 참가자들의 호응은 높았다.

남문시장의 숨은이야기를 듣고 현장으로 바로 이동을 하여 남문시장의 살아있는 모습들을 둘러보았다. 그 중에 5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살아있는 봉제부속박물관’인 금복상회에 들러 남문시장의 일면을 들여다 보기도 하였다. 50년이 넘게 한 직종에서 삶의 풍파를 이겨낸 흔적들이 가게 곳곳에서 볼 수 있었고 참가자들은 남문시장에도 이런 곳이 있었냐며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남문시장에서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시장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살구여성회가 운영하는 ‘따뜻한밥집’과 ‘지역아동센터’였다. ‘따뜻한밥집’에서 맛있는 떡과 차와 함께 투어참가자들을 반갑게 맞아 주셨는데, 따뜻한 밥집에 처음 온 주민들은 이곳의 이야기를 듣고 본인도 자원봉사를 하고싶다며 자청하기도 하였다. 따뜻한 밥집은 살구여성회 회원과 자원봉사자들이 오랫동안 동네 어르신들의 점심을 대접하며 어른신의 말벗이 되어주고 함께 어울려 사는게 무엇인지를 실천하고 있었고, 바로 옆에 위치한 지역아동센터는 사회적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과 맞벌이 부부로 시간이 여의치 않은 독산동 지역의 부모들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이기도 했다. 이 두 공간이 함께 남문시장에 있음으로서 지역사회가 공동체적 삶을 본질적으로 고민해봐야하지 않을까라는 참가자의 귓솟말도 있었다. 이 두곳을 끝으로 추운겨울에도 함께 마을 곳곳을 둘러본 참가자들의 아쉬운 목소리로 남문시장의 투어는 마무리 되었다.



지금까지 마을투어를 통해 암탉우는마을, 문화마을, 중앙희망지기, 남문시장을 둘러보며 금천구 지역의 마을들을 둘러보았는데, 기획과정에서도 많은 것을 느꼈지만 투어를 직접 진행하면서 참여자와 마을에서 살고계신 분들의 삶에 대한 열정과 희망을 보았다. 동네에서 바삐 살다보면 옆집에 누가 사는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 살기 바빠 쉬어가지 못했다는 참가자의 이야기를 듣고 올해에도 금천구의 희노애략이 담겨있는 마을의 모습들을 둘러 볼 기회를 여러 포맷으로 준비하고 즐거운 마을여행의 일환으로 참가자들이 즐겁게 마을투어에 올해에도 참여하기를 기대감을 가져본다.
 

마을지원센터 이지연 간사



암탉우는마을

∙위치 : 시흥5동
∙코스 : 마을지원센터 > 마을예술창작소 > 암탉우는마을 >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 마을지원센터

꼬끼오~~암탉우는마을에 가면 과연 암탉우는소리가 들릴까?
암탉우는마을은 금천구에서 가장 유명한 마을 중에 하나이다. 2012년 10월 생활녹화경진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후로 외부, 내부 손님의 방문이 끊이지 않고 있는 암탉우는마을은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진 희망마을’이란 주제로 시흥5동 218번지 일대에 낙후된 환경을 초록빛 커뮤니티공간으로 일군 공간이다. 쓰레기로 가득했던 공간을 공동의 텃밭으로 만들고 벽화를 그려서 환경적으로 접근이 용이한 공간으로 탈바꿈되었다.
이러한 마을의 이야기가 소리소문없이 금천구 지역에 퍼져 암탉우는마을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하면 방문할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끊임없이 증가하였다. 그래서 암탉우는마을과 커뮤니티공간을 중점으로 시흥5동의 찾아가는 마을투어는 기획이 되었다.
2013년 8월의 어느 날 찾아가는 마을투어는 마을지원센터에서 시작되었다. 마을투어에 대한 간단한 브리핑을  한 후 20여명의 주민들과 함께 동네 마실을 나가는 마음으로 더운 여름의 햇빛을 막기 위해 모자를 착용하고 마을예술창작소인 어울샘으로 렛츠 고고고!! 어울샘은 2013년 7월에 개관하여 주민의 문화예술활동을 지원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각광받고 있는 곳이다.



마을속으로~(Go! Go! Go!)



쉬어가는 퀴즈


지금이야 어울샘이 많은 주민들이 이용하고 오가는 주민들이 많았지만, 당시만해도 어울샘의 존재를 모르는 시흥5동 지역분들과 타 동 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어울샘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어울샘이 주민의 공간으로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쉬어가는 퀴즈를 틈틈이 두어 마을투어의 흥미를 높였다. 암탉우는마을에서 활동하는 숲지기 강지기의 김혜숙 대표가 암탉우는마을의 탄생배경과 숨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마을투어 참여자들과 자연스레 질의응답이 오가고 암탉우는마을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앉아서만 마을을 이야기 한다면야 누군들 못할까. 마을의 현장으로 가서 직접 주민과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울샘에서 5분도 채 안되게 걸으면 암탉우는마을이 나온다. 일단 텃밭으로 탈바꿈된 골목길을 들어가보고 우리마을에 이런곳이 있다며 새삼 놀라는 주민들의 목소리와 함께 암탉광장으로 이동하였다. 암탉광장에는 방범초소가 하나 있는데, 마침 방범초소에서 암탉우는마을의 할머니들이 손바느질로 마을지도를 만들고 계셨다. 할머니분들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고 이것저것 이야기들이 오가니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암탉광장에서 200m 정도 걸으면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이 있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은 지역의 작은 도서관으로 시작하여 금천구 작은도서관의 뿌리로 자리매김하고 있고 현재 900가족 이상의 지역회원이 이용하고 있으며 작년 11회 생일을 맞아 지역의 주민들과 그 기쁨을 나눴다. 독산동에 살고 있는 주민중에는 작은도서관에 대한 끝없는 관심으로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오랜역사와 꾸준히 지켜나가고 있는 자원봉사시스템에 관해서도 질문을 하며 학구열을 높이기도 하였다. 은행나무도서관을 끝으로 다시 마을지원센터로 돌아와 찾아가는 마을투어에 대한 후기담을 나누며 시흥5동 마을투어는 마무리를 하였다.



단체사진


문화마을


∙위치 : 독산3동 일대
∙코스 : 꿈꾸는 나무 > 관천교회 쌈지공원 및 독산고등학교 등산길, 벽화 > 5통 생활가로 주변 > 목화공원, 목화 경로당 > 꽃동산 > 독산 3동 주민센터(문화마을만들기 협의회사무실)



금천구에도 오랜역사의 마을이 있는데 그 중에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독산 3동의 문화마을은 마을공동체가 활성화되기 전부터 마을만들기가 진행되어 온 곳이다. 독산3동의 문화마을만들기는 2006년에 시작되어, 2007년 문화마을만들기 협의회의 구성으로 주민과 함께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곳으로 과거 마을만들기 사업이 환경위주의 사업에서 주민참여 사업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담고 있으며, 주민참여 마을만들기 사업의 효시로 현재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에 찾아가는 마을투어를 통해 문화마을만들기 사업을 재조명하고, 독산3동 마을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문화마을의 마을투어는 기획되었다. 문화마을에서 7여년 동안 활동하신 주민활동가와 함께 마을투어 코스를 짜고 시범투어를 통해 코스는 최종 정해졌다.
9월 초. 아직 더위가 남아있는 오후. 독산3동에 새로 오픈한 청소년 문화공간인 꿈꾸는 나무에 모여 독산3동 문화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먼저, 꿈꾸는나무에 대한 소개를 하였는데, 이곳은 청소년들이 직접 참여하여 논의하고 결정하며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활동하는 곳으로 금천진로직업체험센터와 금천교육복지센터가 들어와 있으며 오후 3시 이후에는 청소년들만 사용할 수 있는 오롯이 청소년을 위한 공간이다. 학부모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소개가 끝나고 문화마을에 대한 전체적인 브리핑을 시작하였다. 오랜 역사를 가진 문화마을인 만큼 개괄적인 설명을 하고 마을로 들어가서 투어를 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재미있을거 같아 짧은 브리핑을 주민활동가가 설명하였다.
설명을 마치고 관천교회 쌈지공원을 시작으로 투어는 시작되었다. 쌈지공원은 구의 경계지역으로 방치되어 있던 자투리 공간을 주민의견수렴을 통해 쌈지공원으로 조성하여 주민들의 쉼터로 활용한 곳이다. 행인들의 노상방뇨 등이 문제였던 곳이 버스를 기다리는 주민들의 쉼터로 변모된 곳으로 현재는 관리소홀로 쉼터의 재 기능을 발휘하고 있지는 못했다. 그래서 투어에 참여한 주민들과 관리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고 지속적으로 마을만들기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 하는 시간도 가졌다. 다음은 독산고등학교 등산길과 벽화를 보러 이동하였다. 그 당시 영남초등학교 학생들이 참여하여 벽화, 시화를 조성하였고 최근 2013년에 보수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된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번 문화마을투어에는 어린 친구들을 포함한 다양한 세대가 참여하여 중간에 잠시 퀴즈를 통해 쉬는시간을 가졌고, 큰 길을 건너 5통생활가로로 이동을 하여 투어를 계속진행하였다.



잠깐퀴즈



5통 생활가로


5통생활가로는 과거 5통가로 내 모든 가옥 및 상가민을 대상으로 생활환경개선을 위한 설문조사 후 마을만들기사업을 진행한 곳으로 주민, 학생, 주민자치위원등이 직접 차없는 거리 축제를 진행하였으며 인근 학교 청소년들과 마을의제발굴을 통한 벽화프로그램등도 진행한 곳이다. 또한 현재는 없어졌지만, 당시 문화마을 사랑방이 있었던 곳을 들러 과거 문화마을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5통생활가로를 지나 목화공원과 목화경로당을 방문하였는데, 가로등 부족, 삭막한 분위기 등으로 공원의 재 기능을 못하고 있는 공원을 식재교체, 벤치설치 등을 통해 환경을 개선하고 쓰레기투기, 노인들의 쉼터부족 등의 문제해결을 위해 담을 허물고 화단을 조성한 과거 마을마을기 환경조성의 사례를 보았다. 현재 마을공동체사업의 초기 사업으로 환경적 개선을 통해 주민의 관심을 높이고 소프트 프로그램을 도입하던 옛날방식의 마을만들기 사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현재의 마을공동체 사업과의 차이점 등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동진빌라 옆에 있는 꽃동산과 산기슭벽화로 코스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발품을 팔아야 했던 곳이다. 꽃동산은 주민제안으로 대상지를 선정한 최초의 장소로 지금까지 주민들이 초화류 식재 행사 및 잡초제거 등의 활동을 통해 관리를 하고 있으며 과속차량으로 인한 소음, 높은 옹벽으로 인한 단조로운 경관등을 개선하기 위해 벽화를 그리고 청소년들의 참여를 통해 지역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한 작업이었다고 했다.



단체사진

문화마을의 현장을 돌고 문화마을만들기협의회 사무실을 방문하여 그 간 문화마을만들기 사업을 하시면서의 축적된 자료를 공유하며 마지막 티타임을 가졌다. 7여년의 활동을 하신 주민활동가분의 노고가 자료를 통해서도 보였고, 아낌없는 박수가 나오기도 하였다.

암탉우는마을, 문화마을의 마을투어를 통해 주민들은 다양한 마을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마을이란게 다양한 사람들이 얼마나 다른 모습으로 켜켜히 삶을 살아가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는 곳으로 좋은것만 있을수 있겠는가. 이러한 마을의 참된거짓과 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마을투어를 통해 잠시나마 들여다본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삶을 충실히 제대로 살고 있는게 아닐까 싶다.

다음번엔 아파트공동체인 중앙희망지기, 상가공동체의 대표주자 남문시장의 마을투어이야기를 진행할 예정이다.


마을지원센터 이지연 간사




‘락희럭키구로공단’은 구로구의 가리봉동과 금천구의 가산동 및 독산 3, 4동 일대를 생산과 이주라는 두 주제로 투어하는 프로그램이다.  총 세 차례로 나누어 연재되는 ‘락희럭키구로공단’ 마을투어에 관한 마지막 연재로, 지난번 ‘생산의 길’에 이어 지역 내 이주민들의 일상을 탐색하는 ‘이주의 길’ 코스를 구성하는 경로지들 및 관련 이야기들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1화] 2013/12/17 - 생산과 이주는 금천구를 이해하는 키워드

[2화]  2014/01/23  - [락키럭키2화]쌍입술, 외입술, 후다입술의 차이를 아세요?







옛 구로공단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 지역의 거주자들은 알고보면 ‘모두가’ 이주민들이다. 도시개발의 여파로 강제추방 당해 쫓겨 온 철거민으로 시작해, 노동집약적 산업으로 수출을 주도했던 구로공단이 생기면서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젊은이들, 그리고 현재는 내국인이 외면하는 힘든 노동의 자리를 마다하지 않는 외국적 이주민들까지, 이 지역의 대부분은 어려운 삶속에서 생존을 모색하기 위해 혹은 푸른 꿈을 이루기 위해 태어나 자란 곳을 등지고 떠나 온 이주자들이다. 

구로공단 설립 전후로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지는 50년이 넘는 이주의 역사와 풍경은 이 지역의 독특한 문화적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매우 미약하다.  외국적 이주민에 대한 통계자료 등이 정리되어 있을 뿐 그들의 일상이나 내국인들과의 교류 혹은 갈등 방식, 혹은 그들 간의 공동체에 대한 지역적 차원의 깊은 연구나 관심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주의 길’ 코스의 구성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과제였다. 

수 차례의 현장 조사 및 몇몇 이주민들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기는 했지만, 3개월의 연구 기간 동안 이주의 역사가 지닌 복잡한 이야기들을 다층적으로 끄집어 내고 다른 문화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바탕으로 경로를 구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미숙한 연구를 기반으로 장소와 이야기들을 억지스럽게 끼워맞추기 보다는 상상력에 근거하여 이주민의 일상을 투어자 스스로가 탐색하는 방식으로 구성하는 전략이 간구되었다. 

즉, 두 명의 가상 이주자들과 그 인물들의 지극히 개인적일 수 있는 일상 공간들을 탐색하도록 설계되었다. 가상의 이야기들이긴 하지만 문헌조사와 일련의 현장답사 등에 근거한 가설적 경로들로, 투어자는 이 가설적 경로를 직접 떠돌며 ‘이주의 진실’을 스스로 완성해 가는 또 하나의 이방인이 된다. 

가상의 두 인물들은 공단시절 상경한 ‘내국적 이주민 김모씨’와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중국 연변을 등지고 조상의 고향을 찾아 온 ‘조선족 이주여성 리모씨’로, 이 두 사람은 동일 장소를 다른 이름으로 기억하고 상이한 문화적 사용법을 취하면서 ‘스치지만 접속하지 않는’ 중첩된 일상의 동선을 영유한다.       

현재진행형 이주민이라 볼 수 있는 조선족 이주여성 리모씨의 이야기는 퇴근길의 종착역인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서 시작하여 새벽인력시장이 열리는 남구로역에서 끝을 맺는다. 

그 사이를 안정된 주거권인 비자의 획득과 관련된 기술학원 및 행정사 사무소들, 일자리를 알선해 주는 인력사무소들, 고국의 사교춤 문화를 맛보고 고된 노동의 시름에서 벗어나 흥취를 느낄 수 있는 사회적 장소인 무도회장, 고향의 먹거리들이 즐비한 옌벤거리와 가리봉 시장, 단골 음식점들과 옷가게, 저렴한 월세집인 쪽방, 해외전화카드와 간단한 주전부리 등을 구입하고 동포대상으로 배포되는 신문도 구할 수 있는 중국전화방, 중국인에 대한 편견을 개선하고 스스로 치안의 문제들을 해결해 보고자 설립한 외국인자율방범대, 어려운 시절 저렴한 이용료로 숙식을 해결해 주었던 재한동포나눔의쉼터 등이 경로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리모씨의 경로는 대부분의 우리에게 아직은 낯설게 느껴지는 중국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도록 설계되었다.  

이제는 어쩜 동네 토박이라고 불릴지도 모르는, 공단의 일손이 부족한 시절에 상경한 이주민 김모씨의 이야기는 리모씨의 경로 순서와 반대로 인력시장이 열리는 남구로역에서 시작해 가산디지털단지역, 그러나 김모씨에겐 여전히 가리봉역인 그곳에서 끝을 맺는다.

그 사이에는 일자리를 못 구한 날 또 다른 행운을 바라는 마음에 애용하는 복권가게, 이제는 어엿한 자기소유가 된 공영주택, 작업복과 안전화를 파는 가게들, 저렴한 하룻밤 잠자리가 되어주었던 심야만화방, 아내가 다니는 가리봉 교회, 그 앞의 오래된 마을장소들인 신일문구사와 백련다방, 패션아울렛 단지들이 생기기 전 패션아울렛의 원조 중 하나였던 가리봉 시장과 근처의 옷가게들, 친구들과 어울려 술잔 기울이곤 했던 공단식당, 지금은 하이힐로 뒤바뀐 젊은 날의 작업장 대우어패럴 등이 경로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김모씨의 경로는 공단시절을 전후로 시작된 이주문화와 관련하여 현존해 오고 있는 오래된 동네장소들을 추억하거나 노동의 삶을 기억하도록 설계되었다. 

리모씨와 김모씨로 상정되는 가상의 이주민들의 이야기는 사실 정직한 노동력을 기반으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며 꿈을 쫓는 모두의 삶을 빙의한다. 

동일 장소들을 다른 시간의 이주경험으로 채운 두 인물의 공통 키워드는 바로 ‘꿈’이다. 일이 있는 한 삶을 희망으로 채울 수 있는 청령한 에너지를 생성해 내는, 급속하게 변해가는 세상이지만 건강한 이 한 몸 있다면 미래가 두렵지 않은, 고향을 등지고 국경을 넘는 용기와 결단을 갖게 한 바로 ‘그 꿈’ 이다. 


옌벤거리에 처음 왔을 때 찐삥(중국식 부침개)을 사며 설레였던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너무나 그리웠던 고향의 음식들이 즐비한 이 거리에서 느꼈던 반가움과 유독 늘 배가 고팠던 이주 초창기의 나날들. 여전히 이런저런 꿈으로 가득차 있던 그 나날들을 리모씨는 잊을 수 없다.  (리모씨 이야기 중)

가파른 세상 변화에 재빠르게 적응하는 재주가 부족해 그저 정직하게 노동하며 삶을 일궈 온 김모씨에게 가리봉역 가는 길은 변함없이 1978년이다. 전남 고흥서 사촌형을 따라 올라온 서울, 열일곱 청춘의 꿈을 나이 오십줄이 넘은 지금에도 되새기게 해 주는, 이루지 못한 성공이 아쉽기 보다는 더 나은 내일을 희망하게 해주는 푸른 길이다. (김모씨 이야기 중)




2013년 하반기 이주문화에 관심있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3회의 시범투어가 이루어졌다. 애초에 설계된 6회 차를 채우지 못한 이유는 조기마감된 생산의 길과 달리 이주의 길에 대한 관심의 부족이 주 원인이었다. 

이는 이주라는 주제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외면당하고 있는지를 반증해 주는 상황이기도 하다. 

국제도시 서울을 지향하며 매년 빠른 속도로 성장해 가는 해외 이주민의 비율에 비해 타 종의 문화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교류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더욱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들려는 우리 사회의, 개인의 의지는 매우 박약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반면에 진행된 3회의 투어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누고 중국문화에 대한 궁굼증들을 친절하게 해갈해 주신 이주여성 해설사 김타다씨 역할의 주요함은  다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그 사람과 가까이 만나고 이야기하는 것이 필수적인 과정임을 깨닫게 해 주는 시간들이었다. 

아울러 이주의 길 중간쉼터로 기꺼이 장소를 할애해 주신 백련다방 사장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생산의 길과 이주의 길을 자유여행하고 싶은 개인 투어자들을 위해 구축된 웹사이트를 소개하면서 본 연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모바일 환경에서 최적화되어 있으므로 손에 든 가이드를 따라 혼자서, 혹은 동네 친구들과 날 좋을 때 조금은 긴 산책을 나서보시기를, 그곳에서 생산하고 꿈꾸는 삶의 에너지를 다시금 느껴보시기를 권한다. 락희럭키구로공단 웹사이트 주소는: www.gurogongdan.org


최영숙 (셀프메이드시티 대표 / 락희럭키구로공단 총괄디렉터)


* 락희럭키구로공단은 서울시 '2013 자치구 동네관광 프로그램 개발 및 운영'사업으로 <금천구>와 <금천문화원> <사회적협동조합 자바르떼>에서 진행한 사업이다. www.facebook.com/luckygongdan

* 3회에 걸쳐 연재를 해주신 최영숙 대표님과 자바르께 관계자분들께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편집자주-

 금천문화역사포럼 마을탐방 기고

 

한참 더웠던 여름, 8월에 금천문화역사포럼에서하는 구석구석동네 탐방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초등3학년 아이를 키우며 1학기에 있던 우리고장 알기 사회과 숙제를 하며 아쉬움이 많았던 터라 기쁜 마음에 참가 했다. 아이와 우리고장 알기 숙제를 하며 화도 나고, 내가 이 동네 계속 살아야 하나 그런 맘도 생겼었다.
이유인즉 구청홈페이지도 네이버도 별 도움이 안 되었던 것이다. 짤막한 성의 없는 설명들은 문화유적과 위인들에 대해 충분한 이해전달이 되지 않는 그냥 문자였다. 스토리가 없는 문자.
아이에게도 자랑스레 여기는 이래서 우리의 자랑이고 이분들은 이러이러해서 정말 훌륭한 분들이란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구석구석동네 탐방은 답답한 맘을 해결해주는 단비 같았다. 날씨는 더웠지만 눈으로 보고 전문선생님들의 설명을 들으며 호압사, 한우물, 석구상,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 순흥안씨 묘, 녹동서원과 단군전 터 등을 3차에 걸쳐 탐방이 이루어졌었다. 초, 중, 고 학생들과 어르신들로 한 회에 50여명이 모여 탐방을 함께 했다.
진심으로 귀중한 시간이었다. 과거에서 현재로 잇는 우리고장의 몰랐던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과거 시흥현의 중심지였고 정조대왕이 화성으로 가다 머무르셨던 시흥행궁과 관아터가 있었던 관악, 영등포, 구로, 경기도 시흥시를 아우르는 금천현의 가장 중심지였던 것도 알게 되었다.

 


순흥안씨묘가 단순히 오랜된 개인의 묘지가 아닌 600년 전 분묘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태조대왕이 자신의 묘자리를 양보 할 만큼 조선의 개국 공신으로서의 업적과 묘의 규모 문인석, 사당 등 조선시대를 만날 수 있는 귀중한 곳 이었다.
일일이 다 글로 설명 할 수 없지만 탐방 내내 "아.. 그랬구나"를 연발 할 수밖에 없는 내가 보였다. 구석구석동네 탐방을 하며 첨으로 내가 살고 있는 금천이 참 괜찮은 마을이란 것을 올 여름 더위만큼 강렬하게 나에게 그려졌다.
함께 했던 엄마들과 아이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 쪽방체험을 하며 쪽방에 누워 그 시대의 많은 이야기들을 아이들과 나눴다.

 

 


그러고 보니 우리 금천은 이야기가 참 많은 동네였는데 왜 그 이야기들을 인터넷에서도 구청 홈페이지에서도 알 수 없었던 걸일까?
그럴 수밖에 없는 많은 사정들이 있었겠지만 지난일이고 이젠 그 이야기들이 마을사람들에게 많이 많이 알려 졌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이 참 괜찮은 곳이고 멋진 곳이란 것을 알려 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중에 나의 고향은 이러한 곳 이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고향을 만들어 주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앞으로도 계속 지속적인 구석구석동네탐방이 이뤄져야 하며 더 많이 사람들이 참여할 기회가 만들어지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이런 훌륭한 프로그램을 진행해 주신 금천문화역사포럼과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해 드리고 싶다.


이희경 독산4동

 

지난 9월 6일 오전에 국가정보원에 신고 됐다는 전화를 받았다. 경희대학교에서 <자본주의 똑바로 알기>라는 2학점짜리 교양수업을 가르치고 있는데 9월 6일은 그 수업 첫날이어서 오랜만에 학교에 나갔다. <자본주의 똑바로 알기>는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변증법적 유물론 및 역사 유물론을 쉽게 가르치는 강의다. 수업 전에 잠시 쉬고 있는데 학교 기관에서 필자가 국정원에 신고 됐음을 알려준 것이다. 신고자는 경희대학교 관련 기관들에 메일을 보내, 필자를 국정원에 신고했으며 왜 신고했는지를 알려왔다는 것이다. 신고이유가 ...궁금했다. 그저 책 쓰고 강의하고 애들 먹여 살리기 바쁜 사람을 무엇으로 신고했을까?

내가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반미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게다. 그 근거로 든 것은 우선 내가 쓴 책들이다. 무슨 책을 썼냐고?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청춘에게 딴짓을 권한다> <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 <국가의 거짓말> <다극화 체제, 미국 이후의 세계> 등이다. 아! 맞다. 2011년 말에는 팍팍한 생계해결을 위해 <글쓰기 클리닉>이란 책도 썼다. 또 다른 이유도 들었다. 내가 예전에 민주노동당의 간부였다는 것이다. 그렇다. 필자는 2006년에 민주노동당 서울시당에서 교육부장을 했다. 하지만 이후 민주노동당이 참여당과 합당해서 통합진보당으로 바뀔 때 그에 반대하여 탈당한 이후 당적이 없는 상태다.

요컨대 이런 무시무시한(?) 책들을 쓰고 한때 민주노동당에서 간부였던,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반미사상을 가진 사람이 경희대학교에서 <자본주의 똑바로 알기>란 주제로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을 세뇌시키고 있어서 국가정보원에 신고를 했다는 것이다. 학교에 신고사실을 알린 이유는 빤하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강의하도록 놔두느냐는 것일 테다. 신고자는 최근 이석기 의원의 구속사건을 예로 들었다고 한다. 통화를 마치고 내 입에서는 장탄식이 끊이지를 않았다.

내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어떻게 책 내고 강의한다고, 그리고 한때 민주노동당 간부였다는 이유로 사람을 국가정보원에 신고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여기가 과연 민주주의 사회인가? 내가 가진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고자가 메일에서 이석기 의원 구속사건을 예로 들었다는 것이 자꾸 머릿속에 머물렀다. 그래서 이석기 사건을 곰곰이 복기해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현재 이석기 의원이 소위 내란예비음모라는 무시무시한 이유로 구속된 결정적인 근거는 ‘녹취록’이다. 국가정보원이 통합진보당 내에 포섭한 사람을 통해 지난 5월에 있었던 모임의 내용을 음성 및 영상으로 확보했다고 알려져 있다. 녹취록이란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 당사자가 한 ‘말’이다. 좀 거칠게 얘기하자면 이석기 의원 및 관련자들이 체포되고 구속되는 이유는 그들이 특정한 ‘말’을 했다는 데에 있다.

오해가 있을까봐 좀 부연설명을 하자면 필자는 만약 국정원에서 증거로 제시한 녹취록이 사실이라면 관련자들은 정치적 도의적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통합진보당에 쏟아지는 여론의 공분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사실 필자가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이석기 의원 쪽의 주도 하에 민주노동당이 참여당과 무리하게 통합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런 얘기까지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구차하다. 그럼에도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내 글에 조금이라도 객관성을 부여하고 싶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라면 최소한 어떤 사람이나 세력이 어떤 특정한 ‘말’을 하고 ‘글’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나 구속을 하면 안 된다. 상식 아닌가. 물론 그 말이나 글을 근거로 수사를 진행할 수는 있지만 과연 ‘말’과 ‘글’이 체포나 구속의 사유가 되는 이 상황이 정상적인지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만약 사회가 이것을 용인한다면 그동안 군부독재와 싸우면서 어렵게 획득한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이 허물어지는 것 아닌가.

국가기관이 나서서 ‘말’과 ‘글’만을 이유로 사람을 체포하고 구속하는 현 상황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능하게 만든다. ‘저 사람은 저런 책을 쓰고 저런 말을 하니 내가 신고해서 체포하고 구속 시켜야겠구나.’ 나를 신고한 사람이 신고사실을 경희대학교 관련 기관에 메일로 떳떳하게 알리기까지 한 데에는 바로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정부기관인 국가정보원도 ‘말’과 ‘글’만을 이유로 사람을 체포하는데 자신도 당연히 ‘말’과 ‘글’을 이유로 신고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석기 의원 구속 사태가 벌어지면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 많이 회자되던 시를 하나 옮기겠다.

「그들이 처음 왔을 때」

- 마르틴 니묄러

나치가 공산당원에게 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뒀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노동조합원에게 갔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유태인에게 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나에게 왔을 때,
항의해 줄 누구도 더 이상 남지 않았다.

국가정보원에 신고를 당했다는 전화를 받은 후, 수업에 들어가 필자는 다음과 같은 비루한 얘기를 했다.

“이 수업은 여러분이 내 강의를 듣고 마르크스 사상에 세뇌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물이나 현상, 사건을 특정한 측면에서만 보면 항상 같은 부분이 보일 뿐입니다. 이 수업은 마르크스라는 사람이 세상을 보는 관점, 그러니까 마르크스의 세계관을 함께 공부하는 시간입니다. 마르크스의 세계관을 통해서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보면, 자유시장경제라는 특정한 관점에서 봤을 때 보이지 않는 자본주의의 다른 모습이 드러납니다. 사물이나 현상, 사건을 다양한 관점과 시각에서 볼 수 있을 때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깊이가 깊어지지요. 이 수업이 여러분에게 그런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대학에서 학생 가르치는 사람에게 느닷없이 이런 얘기를 하게 만드는 이 상황은 정상이라 할 수 없다. ‘말’과 ‘글’만을 이유로 사람을 구속하고, 타인을 신고하게 만드는 사회는 최악의 사회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구속 사건은 우리에게 최악의 사회로 회귀할 것인지를 묻고 있다. 단순히 이석기 의원의 발언이 적절치 않았다는 이유로 상황을 방관하게 되면, 결국 그들이 ‘말’과 ‘글’을 이유로 나에게 왔을 때 항의해줄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임승수 독산4동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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