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아의 탄자니아 통신-33    


아, 덥다 더워


“너, 돈 좀 있어?”

“아프리카에서 금방 온 내게 돈이 어디 있어? 그런데 왜?”

“돈 있으면 비트코인에 투자 좀 하라고.”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 온 친구와의 대화 내용이다.

주위에서 가상화폐 투자로 돈 벌었다는 사람들이 많아 투자를 해보려고 했더니  정부의 규제로 계좌 개설 자체가 불가능해지자 계좌를 가진 젊은이에게 돈을 맡기고 대리 투자를 했는데 며칠 사이에 많이 올랐다는 자랑 겸 투자권유 차 전화를 한 것이다. 하도 해괴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수익이나 손실이 발생했을 때는 어떻게 배분하기로 한 것인지가 궁금해 꼬치꼬치 캐물었더니, 이익은 똑같이 나누고 손실은 본인이 전부 떠안기로 했다는 것이다. 나도 너 같은 투자자 좀 찾아 봐야겠다며 허풍을 떤 후, 일단 돈부터 회수하고 추이를 지켜보다, 꼭 해야겠다 싶으면 본인계좌를 만든 후, 다 잃어도 대세에 지장이 없을 만큼만 투자해 보라고 권했다. 그녀는 사람을 그렇게 못 믿어서 어떻게 사느냐고 혼잣말 하듯 한마디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름 시대의 변화 정도는 읽으며 산다고 생각한 내게 오랜만에 들어간 한국의 가상화폐 광풍은 상실감 비슷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 바보가 된 듯도 했다. 가상화폐를 카카오 페이나 네이버 페이처럼 온라인 지급 결제 수단으로 쓰이는 것이라고 이해하며, 카드조차 필요 없는 시대니 여간 편리하지 않겠구나, 라고만 생각했으니 사실 바보였던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가상화폐가 우리나라에서 거래가 되었기에 나는 까막눈이 된 것인지 궁금했다. 2013년, 내가 아프리카로 향한 시점과 거의 비슷하다. 이곳에서도 가상화폐에 대한 기사를 접하긴 했을 터이지만 관심이 없으니 저 세상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눈 돌릴 사이도 없이 내 눈 앞에 쫙 펼쳐지니 무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2030세대가 주축이 된 작금의 투기 열풍에 법무부는 가상화폐 거래소 폐지를 추진 중이며, 투자자들은 청와대 청원 게시판으로 몰려가 거래소 폐지나 가상화폐 투자를 도박으로 보는 것에 반대하는 청원을 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갑론을박을 가만히 지켜보다보니 시대적 요구에 의해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정책으로 막을 방법은 없어 보인다. 일시적 유행을 넘어서는 거센 물결이 될 것은 분명하다. 

 나는 지금 가벼운 옷차림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올해 들어 가장 춥다는 날, 한국을 떠나오며 입고 있던 두꺼운 옷을 경유지마다 매미가 허물을 벗듯 한 겹씩 벗어던지자 여름 원피스 한 겹만 남았던 까닭이다. 단시간에 일확천금을 번 사람들의 무용담을 들으며 느꼈던 상실감도, 시대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바보가 되었다는 자괴감도 더위 속에 던져버리고, 모기장 속으로 들어온 한 마리 모기를 잡기 위해 모기채를 힘껏 휘두른다. 아, 덥다 더워.



2018.1.14일

* 탄자니아에서 소파아

[소피아의 탄자니아 통신-32]  젊은 그들



‘쓰러진 노인에 패딩 벗어준 중학생들, 국회의원상 받는다.’ 란 타이틀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누군가의 선행이 또 다른 누군가의 눈에 들어, SNS라는 날개를 달고 날아오른 결과다. 하지만 어찌 그것뿐이겠는가? 숨겨진 이야기는 또 얼마나 많겠는가?

그 기사가 뜨기 얼마 전, 내가 한국에 도착한 날이다. 나는 여름옷을 입고 있었다. 남아프리카를 들러 오느라 겨울옷을 준비할 여가가 없었을 뿐더러, 픽업 나온 택시를 타고 곧바로 세브란스 병원 근처 숙소로 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짐을 풀자마자 저녁 약속이 있어 그대로 외출하게 되었는데, 길에서 만난 청년이 놀란 토끼 눈을 하며 묻는다.


“춥지 않으세요?”

“추워요.”

“제 옷 벗어 드릴까요?”


점퍼의 지퍼를 만지며 말하는 품새가 곧 벗어 줄 태세다. 더운 나라에서 갑자기 오느라 겨울옷을 준비 못한 탓이고, 조금 후면 친구가 따뜻한 옷을 가지고 올 거라 했더니 그제야 안도의 눈빛이 된다.

그 일이 있은 며칠 후, 아침부터 날리던 눈발이 녹아, 저녁이 되자 거리를 온통 스케이트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신고 있던 신발이 빙판에는 무방비 상태인 걸 알았기에 조심하며 걸었는데도 순간 균형을 잃었는지 속수무책이다. 눈앞에 불이 번쩍 나는가 싶더니 바닥을 향해 사정없이 나동그라졌다. 그때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나를 일으켜 세운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경황이 없었을 뿐더러, 아프고 놀라고 창피한 마음에 인사조차 할 여유도 없이 보냈다. 지금 생각하니 참 미안하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 근처에 거처를 정하다 보니 젊은이들의 삶을 많이 엿볼 수 있다. 추위 속에서도 싱싱하게 빛을 발하는 그들을 보며 참 눈부시다는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 데, 명물길을 토론의 장으로 달구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이고, 한편에선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약속 시간에 쫓겨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틈은 없었지만, 유튜브에 올릴 동영상을 만들고 있는 듯했다. 소셜 커뮤니티를 이용해 자신의 견해를 공유하고 여론을 만들어 내는 그들에게 찬바람마저 강력한 메시지 전달의 소품이 되는 듯하다. 

그들이 생산해 내는 콘텐츠를 접하다보면 우리나라가 변해가는 속도를 피부로 느끼게 되는데, 이제 내가 그 흐름에 동참하는 것은 벅차다는 생각에 서글프기까지 하다. 새로운 환경과 변화는 나를 들뜨게 했으며, 그것들을 즐기곤 했는데 이번에는 영 다르니 말이다.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그것을 가리기 위해 짙은 선글라스까지 끼니 행동은 굼뜨고 행색 역시 추레해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든 탓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추운 날씨까지 가세해 나를 더 움츠려들고 소심하게 했을 터이다.


따뜻하고 느린 그곳이 그립다. 내 보폭은 어느새 아프리카에 맞춰져 있고, 내 시야 역시 그곳의 높이에 멈춰지고, 흐름에 따라가기 위해 끊임없이 주위를 곁눈질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에 길들여진 탓일 것이다. 그곳이 내가 있을 자리라는 생각은 더 확고해 진다. 눈의 복시는 거의 회복했고, 내년 초에는 탄자니아로 복귀하게 될 것이다. 한 발짝 떨어져서 젊은 그들이 만들어가는 변화를 멀리서나마 지켜보고 지지하며 편들어 주면서, 천천히 따라가는 것도 즐거운 일일 것이다. 


* 소피아님은 탄자니아에서 코이카 봉사활동을 하던 중 건강악화로 일시 귀국해 치료를 

받고 있다. 

[기고]만절필동(萬折必東)


순자에 나오는 구절이다. 강물을 바라보는 공자에게 제자 자공이 물었다. ‘강물을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공자는 물의 특성을 들어 설명한다. “물은 모든 생명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나 그것을 억지로 하거나 생색내지 않으니 덕(德)스럽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며, 곧고 굽은 곳도 이치를 따라 흐르니 의(義)를 닮았다. 자꾸 커지면서 다함이 없이 흐르니 도(道)와 같고, 결단하고 흐르는 변함없는 소리에 계곡 폭포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용(勇)하고, 울퉁불퉁한 곳에 흘러도 그 수면의 평평함을 잃지 않으니 법(法)을 닮았다. 가득차도 억지로 깎아 내거니 덜지 않으니 정(正)이요, 온화하고 부드러워 구석구석 도달하니, 찰(察)이다. 들어가거나 나오는 것에 따라 아름답고 깨끗해지니, 선화(善化)를 닮았고, 물은 ‘수없이 많이 꺾이더라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가니’, 지(志)를 닮았다.” 설명 중 마지막 구절이 만절필동(萬折必東)이다. 강은 직선이 아니다. 곡선이다. 한 순간 한 면만 보면 강은 굽이굽이 돌고 돌아 변덕스러운 모습니다. 하지만 만 번을 꺾고 돌아도 결국 바다로 가는데 중국의 지형은 서고동저(西高東底)라 결국 동으로 일관되게 흐르는 강으로 사람의 뜻을 풀었다. 한번 먹은 마음, 처음처럼 유지하자는 것이다. 


물의 통해 삶의 지혜를 말하는 것은 흔하다. 물의 비유는 공자보다 노자가 유명하다. 노자는 말한다. “최고의 선(上善)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아주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道)에 가깝다.” 물은 산이나 바위가 앞을 막으면 돌아간다. 낭떠러지를 만나면 떨어지고 깊은 웅덩이를 만나면 바닥까지 채운 다음 길을 떠난다. 젖은 땅이든 마른 땅이든 가리지 않고 나아간다. 오염된 하수구든 비옥한 밭이든 따지지 않고 적신다. 물이 지나간 자리는 아무리 황폐한 폐허라도 생명이 움튼다.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지저분한 곳에 있는 것을 불평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있으면서도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툴툴거리지 않는다. 그러면서 가는 곳마다 생명을 살린다. 그래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깊고 큰 바다를 이룬다. 그 모습이 도(道)다. 


이번에 문제가 된 것은 비유가 조선의 지리적 특성과 다름에도 그를 통역 번역 없이 꿰맞춘 것에 있다. 한반도는 중국과 달라 동고서저(東高西低)라 두만강을 빼면 모든 강은 서로 흐른다. 그러니 만절필서(萬折必西)가 되어야 한다. 이런 비슷한 예로 조선시대 한시를 보면 ‘원숭이가 없는 한반도인데도 비통한 마음을 원숭이 우는 소리’로 비유한 경우가 많다. 실사구시를 하지 못한 양반 지배층들의 정신적 사대주의의 결과다. 정말 유구한 적폐라 아니할 수 없다. 뭐 이런 모습은 지금도 여전하다. 아니 더하다. 서구 문물에 대한 추종 말이다. 미국에 이르러서는 아예 그 사대가 자랑이다. 문재인 조차 전쟁의 참화보다는 흥남철수의 은혜를 말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을 우선하는 한미동맹이라는 신화는 사대주의의 극치인데 더 불행한 것은 그 사대주의가 헬조선에서는 부귀영화의 가장 큰 힘이라는 점이다.  

   

노영민 주중 대사가 신임장을 전달할 때 방명록에 ‘만절필동 공창미래(萬折必東 共創未來)’ - 지금까지의 어려움을 뒤로하고 한중관계의 밝은 미래를 함께 열어나가기를 희망합니다. 라고 적었고, 문재인 대통령의 방중에 맞서 흠집을 내려는 수구 언론들의 폭로로 문제가 된 것이다. 만절필동 자체를 사대주의로 모는 것은 선비의 뜻 군자의 뜻에 대한 부족한 인식이다. 문제는 선비의 곧은 절개를 소중화라며 사대사상으로 만든 것이 조선 후기 당파정치로 사대주의를 근본주의까지 밀고 간 송시열과 그 후예(영남패권)의 후과니 그저 사대주의가 지배 한 우리역사천년을 한할 수밖에. 


실제 공자의 말 중 우리가 현실에서 다시 새겨야 할 것은 의(義), 법(法), 정(正)위 구절이 아닐까 한다. 교수들은 올 한해를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 했다. 하지만 파사는 있지만 현정이 없다. 가장 눈부신 국정원 개혁조차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둔 것을 보면 본질불변의 개살구 빛 개혁이다. 게다가 노동자 민중의 삶속에서는 아예 파사도 없다. 공자님은 의(義)를 낮은 곳에서 아픈 이들의 처지와 조건에 맞추는 것으로 보았다. 신자유주의형 자본주의는 염치도 잃고 부자 편에만 선 극단의 체제였다. 그나마 이를 수정한다는 문재인 정권이 최근에 최저임금 인상 자체를 무력화 하고 장시간 노동을 유지하려 한다. 낮음이 없으니 옳음이 없다. 오히려 옮음에 반한다. 공자님은 법(法)을 울퉁불퉁한 곳에도 평평함을 잃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공평함이 법의 기초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묶여 있는 양심수들을 보면 공평함이 기존의 기울어진 조건의 바로잡음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은 듯하다. 멀었다.

예전에 인심은 쌀 됫박질에서 나왔다. 꾹꾹 누르고도 수북하게 주는 것이 인심이다. 설렁설렁 담고 수북한 것을 싹 잘라내는 것을 야박하다 했다. 이득만 노리는 장사치의 마음이 아니라 덤으로 표현되는 정이 사람의 마음이자 바른 세상 정(正)이다. 공자님의 이런 말씀은 소비문명은 발전했지만 우리가 잃은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정말 간곡한 환기가 아닐까.  


실제 문재인 정권의 방중의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이 싼 똥인 사드를 미국 대신 무마하려는 것과 북한을 더욱 강하게 압박하자는 순방목표자체에 있다. 미국에 자주(自主)하지 못하고 싼 똥이나 치우니 잘해도 치욕이고, 동족을 압박하여 굴종을 요구하는 성공해도 평화를 해치는 이 근본적 문제에 대한 성찰이 절실하다. 특히 트럼프는 오직 미국 이익에 철저한 양아치 정치를 한다. 이른바 대국의 체면과 명분도 팽개친 이다. 그에 대하여 ‘아니오.’ 하지 못하면 명분 실리 모든 것을 잃는다. 한국은 예속적 한미관계를 극복하는 노력으로 이웃 나라로 다가가야 한다. 노예적 굴종으로 미국 이익을 대변하며  그 모습으로 남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그저 어리석음이다. 이게 우리의 비극이다. 그러니 필동이고 필서고 자주와 평화로 흐르는 큰 강물 자체가 없는 것, 이것이 현 남한 사회의 정말 큰 문제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회의(會議)를 논하다.




우리 사회에서 각종 회의는 오래 전부터 있었으나 그것의 실효성에 대한 평가들은 지금과 같이 민주주의가 확대되면서 활발히 제기되기 시작하였고 그러한 흐름들은 회의를 통한 성과를 이뤄내는 자극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실질적인 성과도 이뤄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전에도 필자는 아직은 회의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할 생각이 없다. 그동안 필자가 참여했던 회의의 질이 문제라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를 부인하거나 변명할 생각이 없다.  


회의의 목적은 공동체의 발전이나 당면한 문제의 해소와 같은 현실적인 것도 있으나 취미나 친목과 같은 단순한 회의도 있는데 따지고 보면 회의란 사람들의 모임 즉 공동체가 속성이므로 그 목적은 생산적 지향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모여 회의라는 형삭을 통해 의견을 나누는 것은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유효한 방법이고 회의는 그 강력한 수단이다. 


이러한 회의의 긍정성에도 부정성을 앞세워 서두를 꺼내는 것은 경험칙을 앞세운 걱정을 말하는 것만이 아닌 현실에 당면한 사회 문제로 이의 해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서 솔직히 회의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이야기 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운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현상이 아닌가?. 

회의(會議)를 사전에서 보면 ‘어떤 사항을 여럿이 모여 의견을 교환하여 의논하는 일(기관)’이라 하고 있다. 


‘여럿’ 즉 공동체가 모여서 공동의 과제를 논의하여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회의인 것이다. 이러한 진행에서 토론이 전개되고 찬성과 반대가 부딪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회의에서 토론을 통한 찬·반을 논하는 과정이 생략되거나 소극적인 경우가 있는가 하면, 찬반 주장이 지나쳐 충돌로 이어져 회의의 본질이 실종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회의의 긍정성에 흠을 만드는 현상들이다. 어떤 사항을 두고 의견이 같으면 찬성을 하고 다르면 반대를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런데 토론이 생략되고 찬성을 유도하는 식의 진행이 되거나 주도세력이 일방적으로 진행하여 회의를 당초 설정한 목적 구하기 위한 형식적 절차로 삼는, 사실상 회의라 하기는 좀 그런 경우가 있다. 그런가 하면 반대를 하면서 철저히 이기적 자세로 접근하는 진행도 있다. 반대로 끝나지 않고 상대 안을 무력화 하는 등 회의의 결과에 흠결을 만들려는 경우도 있는것이다. 


우리사회에서 회의의 비합리성은 공사(公私) 양 부문에서 다 볼 수 있지만 그것의 해악이 공동체에 미치는 경우는 아무래도 공적 영역에서 많이 제기되고 있고 그것은 왕왕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경우들이 있다. 물론 사적 영역에서도 영향을 주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사회적 파장이 큰 경우는 역시 공적 영역이 많다. 여기서 말하는 공적 영역이란 국회를 비롯한 각종 국가기관의 회의로 그에는 말단 행정단위인 읍·면·동의 회의도 예외가 아니다. 이 밖에 국가의 직·간접 간섭을 받는 공공기관의 회의도 공적 영역에 포함한다.


공적회의에서 가장 지적되어야 하는 문제는 민주성이다. 사회의 민주화가 향상되고 있는 만큼 이 지적은 잘못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그렇지 않다. 정부를 비롯해서 하위 행정기관에 이르기까지의 내부 회의에서 민주성이 경시되는 경우가 있고 지켜지는 부분도 다분히 형식적이다. 즉 형식에서는 민주성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관이나 공공 기관이 주도하는 회의에 민간 위원이나 유사 신분으로 참석을 해 본 사람은 무슨 말인지 잘 알 것이다. 대개 주관 처(관청 등)가 목적하는 바를 미리 정해놓고 이의 합리성을 구하기 위한  회의가 많은 것이 그것이다. 


공적 영역 회의 모두를 문제 삼고자 하지 않는다. 민주성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고 투명성 또한 객관화의 정도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어 기본은 지켜지고 실제로 그러한 바탕에서 진행되는 것도 많다. 그런데도 부정성을 말하는 것은 모든 회의가 그렇지 못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는 최상위급 회의에서 주로 볼 수 있고 읍·면·동 수준의 최하위 행정기관에서도 쉽게 목격된다. 특히 정부 주도의 고위회의에서 그런 경우가 많은 데 문재인 정부 수립 이후 진행되고 있는 이른바 ‘적폐청산’은 그런 회의로 인 한 결과의 한 유형으로 본다

사적 영역에서의 회의 비합리성은 오래된 관행이고 그것은 정상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시쳇말로 ‘좋은 것이 좋다’는 관념적인 접근이 사실적 현상이 버린 경우다. 주로 민간의 소단위 공동체 예를 들면 친목회 등 그 아류들로 이는 공동체의 목적성을 볼 때 별 문제로 보지 않을 수 있지만 옳은 회의 모습은 아니다. 회의는 회의인 만큼 그 본질에 충실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민주시민 의식이 향상되고 사회의 민주주의도 튼튼해진다. 

자본주의가 가치인 공동체에서 그에 바탕한 질서를 두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상법적용 이나 그에 준하는 질서에 속하는 예를 들면 기업경영이 그런 유형이다. 그러함에도 회의 룰(rule)은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상식에 어긋나거나 보편질서에 위배되는 경우들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자기들만의 문제라 하더라도 기업의 사회성은 부정될 수 없는 만큼 정의의 문제가 제기된다. 정의를 경시하는 공동체는 그에 따른 응보(應報)를 만난다. 그것이 진리다. 


이러한 문제들이 있다 하여 공동체의 합리적 논의 시스템이자 문제해결의 유효한 수단인 회의를 부정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것이 가진 긍정성들이 올바르게 실현되고 그래서 계속적으로 희망적인 이 수단이 지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사적 영역이던 공적영역이던 회의다운 회의를 하자는 것, 즉 회의의 본질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회의 이야기를 꺼냈으니 국회 이야기도 해보자. 국회야 말로 회의 전문기관이 아닌가! 회의는 국회의 정체성, 즉 회의가 없다면 그들 존재 이유도 없다. 그런데도 회의를 참 잘못한다. 정체성이 회의인 그들이 주역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불행이고 국민들에게는 비극이다. 그들이 회의를 잘못하는 것은 제도에 문제가 있어서도 그들에게 지적(知的)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고등교육을 이수한 지식인들이고 더하여 석·박사 학위자도 상당수다. 그와 같이 개인적으로 보면 모두가 역량을 풍부히 가진 능력자들이다. 그런 자들의 구성인 국회가 왜 회의를 잘 못한다는 소리를 들을까?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그들이 처한 환경 곧 우리 정치구조의 문제라 본다. 개인적으로 능력을 가진 그들이 정치 집단에 속하면서 능력은 유보되거나 숨겨져 버리기 때문이다.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후진 정치구조가 우리 국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에게 패거리 집단으로 폄하되는 곧 철학 부재한 정당이 그들의 서식환경이다. 


2018년 국가예산이 논란을 끌더니 끝내 시간을 넘겨 통과되었다. 왜 법률이 정한 일정을 지키지 않았느냐면 국가 살림살이니 잘해 보려 그랬다 할 것이다. 그런 변명을 이해할 국민은 별로 없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럼에도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나름의 소신을 행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를 볼 때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반대를 한다고 표결도 하지 않고 회의장을 떠난 것이다. 반대는 회의에서 자연스런 행위니 누가 탓하랴만 그것을 강하게 표현한다고 그들의 정체성인 회의를 부정한 것은 문책되어야 한다. 반대를 하던 찬성을 하던 회의는 회의장에서 정해진 질서에 따라 표현해야 한다. 그것이 회의의 룰이다. 그들이 이런 무책임한 행위를 다시는 하지 못하도록 대책을 세워야 한다. 가장 유력한 방법은 그런 행위자들은 다시는 국회에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이 있을지 중지를 모아보자! (♣2017.12.09.)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어쩌다 장애인



 한쪽 눈으로 더 많은 것을 보고 있는 것일까? 밤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세상이 자기 복제를 한 모양이다. 늘 보아왔던 익숙한 풍경 사이로 또 다른 세계 하나가 자리를 잡았다. 가만히만 있어줘도 어떻게 해 볼 것 같았다. 이 놈은 도대체가 제 멋대로 여서 옆에 있는 가 싶으면 어느새 밑으로 내려가 있고, 그곳에서 아예 비스듬히 눕기까지 한다. 심한 양안복시다.

혼란에 빠진 뇌는 스스로 한쪽 눈을 희생시키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자신의 꼬리를 먹이로 내주고 도망가는 도마뱀처럼 말이다. 오른쪽 눈꺼풀은 돌덩이를 얹어 놓은 양 아래로 꺼진다.  이러다가 감쪽같이 봉해 지는 건 아닐까? 심장이 멈춘다고 해도 이보다 덜 무서울 듯하다. 

그 무렵 회화 공부를 한답시고 미드를 반복해서 보고, 그것도 모자라 스마트 폰으로 영어 자막이 있는 영화를 서너 편씩 보는 엽기적인 행각을 벌였다. 그게 무리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병원으로 달려갔다. 변변한 검사 장비가 있을 리 만무하다. 안과가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판이었다. 의사는 시력과 안압을 측정한 후, 동공의 움직임을 관찰하더니 근육의 문제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면서, 큰 병원으로 가서 정밀 검사를 받는 게 좋겠단다. 


탄자니아에는 믿을 만한 안과가 없다는 ‘인터내셔널 SOS’의 추천으로 곧장 조하네스버그로 날아갔다. 그곳은 아프리카라기보다 유럽의 연장선 같다. 병원의 규모는 컸고, 의료 장비도 잘 갖춰져 있다. 검사만 하면 정확한 원인이 밝혀질 것이고, 치료 방법도 찾아질 것이라 굳게 믿었다. 다른 사람의 각막을 이식까지 하는 세월이지 않은가? 

할 수 있는 검사는 다 했지만, 원인을 찾지 못한 의사는 스테로이드를 링거로 주사했다. 이틀이 지나자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두통이 심해지고, 명치끝이 답답해 오며 복수가 찬 듯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소화불량으로 생각해 소화제와 두통약을 달라고 했다. 간호사는 약 대신 채혈 준비를 하고 나타났다. 온통 퍼렇게 멍들고 부어오른 손을 또 헤집을 모양이다. 짜증이 났다. 혈액 검사는 이미 다 하지 않았냐고 했더니 의사의 지시란다. 그제야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스테로이드 부작용 테스트냐고 했더니 그렇단다. 

다음날은 팔에 붉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에 화상을 입은 듯 했다. 내 몸과 마음은 더 이상의 치료를 중단하고 한국으로 가야 한다고 소리쳤다. 


퇴원을 하고, 몸을 추스른 후 내 나라로 돌아왔다. 

세계의 끝, 세브란스에 왔으니 걱정 말라던 의사 선생님. 중복 검사는 피하고 몇 가지의 검사를 했다. 모세혈관의 혈액이 일시적으로 잘 돌지 못해 생긴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자연회복 확률 구십 퍼센트란다. MRI 세 번에 척수검사까지 하고도 원인을 모르겠다며 스테로이드로 며칠 만에 내 몸을 초토화 시킨 의사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회복을 도와주는 약을 복용하고, 양쪽 눈을 번갈아 사용하며 쉬는 게 요즘의 내 일과다. 체력이 조금씩 돌아오며 눈꺼풀에도 힘이 생기자 두 개의 세상이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하나의 풍경으로 포개지는 빈도도 늘어간다. 


장애는 타고 나는 것, 혹은 남의 일이란 생각에서 나도 언제든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자각이 생긴 최초의 사건이다. 일일 장애체험이란 행사를 통해서 그 불편함을 경험했다 해도, 그 절망과 두려움을 알 수는 없기에 매우 추상적이고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 정말 한쪽 눈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은 불편함을 넘어서는 공포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이 경험은 못 보던, 혹은 못 본 척 지나치던 사람들을 보이게 했다. 동전 바구니를 앞에 놓고 있는 할아버지, 전단지를 돌리는 할머니, 몸이 불편한 행인 등. 동정이나 연민이 아닌, 나도 저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그리고 오감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눈 코 입 귀가 제자리에 온전히 있다는 것만으로도 완벽한 얼굴이라는 것도 함께 깨닫게 했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도 다시 보이게 했다. 팔짱을 끼고 영화를 함께 본 딸아이, 여름옷 차림의 나에게 파카를 벗어주겠다고 나서던 거리에서 만난 청년, 바쁜 일정에도 병원까지 겨울옷을 가져다주던 윤희씨, 잠시 머물 공간이 여의치 않던 내게 선뜻 집을 내준 형희씨, 먹을 것을 한보따리 들고 찾아와 푸짐한 점심을 차리던 동생,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먹여서 돌려보내고 싶어 하는 지인들, 뒤늦게 홀로서기 하는 나를 격려하며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어 하는 선배, 그들이 내 곁에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바깥에서 살면서 위기의 순간, 돌아올 모국이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한쪽 눈으로 나는 더 많은 것을 보고 있는 것일까?



* 소피아님은 건강악화로 일시 귀국해 치료를 받고 있다. 

‘두 어른’을 읽다



백기완은 여든 여섯 살. 문정현은 여든 살. 아직도 역사의 첨봉(尖峰), 길거리에서 길을 열고 내는 두 어르신이다. 매향리, 대추리, 용산 강정, 밀양, 광화문까지 고통의 땅엔 항상 문정현이 있었고, 해고노동자의 손을 맞잡고 눈물 흘리는 노동자 민중들의 고통의 현장에 새 세상의 길눈이 백기완이 있었다. 송경동 정택용 노순택 신유아 거리의 힘찬 예술꾼들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늪에 빠진 세상을 구하는 두 분의 혼을 새긴 서각 작품을 비정규노동자들을 위해 세상에 내 놨고 그 과정에서 두 분이 주고받은 댓거리가 책으로 나왔다. ‘두 어른’이다. 백기완은 시대의 거짓을 찢어발기는 존재다. 문정현은 버티는 자다 새봄이 올 때까지 겨울을 버티는 겨울나무처럼 말이다. 두 사람의 말을 들어 보자.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견뎠을까? 

“편하게 살고 싶은 생각, 나라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 빛나게 살고 푼 욕구 왜 없을까? 그때마다 ‘하려다 말고, 하려다 관두고 천년을 두고 실패한 도둑의 심정, 그 ‘진땀의 사연’을 품고 사는 것이 삶이다. ‘진땀의 사연’ 그것은 사람답게 사는 양심이고 자기 존엄의 뿌리다.” “안과 밖이 외면할 수 없는 무엇, 고통 받는 걸로 함께 있는 것, 그게 희망이야, 싸움은 희망이지. 그러다보면 영광이 아니라 능욕을 당해, 참으로 치욕스러운 게 삶이지. 진실을 추구하고 거짓을 거부하고 폭력을 폭로한다는 것은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 지고 오르는 예수와 같아서 치욕을 감수하는 일이야.” 


두 사람은 ‘내 것의 세상’이 아니라 함께 사는 세상을 살자고 한다. 아픈 이들의 곁에 있는 자유인이 되자고 한다. 

“불부터 꺼, 물부터 줘. 밧줄이 필요한데 언제 수영법을 설교해. 먼저 가는 사람을 따라가지. 함께 가자며 천천히 가자며 실제로는 길을 막는 짓 하지 마. 불이 되어, 불난 것 먼저 본 사람처럼 뛰어 가. 옳은 길이라면” “자유라는 것은 단순한 삶의 자유, 사실의 자유가 아니야. 껍데기 속에 숨어 있는 거짓을 찢어발기는 것이 참 자유지”  


그러기 위해서 눈도 밝아야 한다. 

“돈과 권력은 우리 민중들을 분할해서 지배하고 분열시켜 지배해. 지들의 결속은 철통으로 마만들면서 우리들의 결속은 무조건 훼방 놓지. 그것이 그들의 수법이야.” “저들은 속이고 우리는 속아. 바른 소리를 하면 대려 몰아붙여, 겁나지 그렇게 만들어 진 것이 소시민이야. 애쓸수록 자기 손해라는 절망, 용기와 사람이 비겁과 눈치를 이길 수 없는 현실, 그 현실을 어쩔 수 없다고 굴복하고 만 것이 소시민이지. 그러니 소시민은 이기주의자야. 우리를 썩히는 가장 큰 독소지.” “그래서 지금은 정직한 것이 살아 남을 수 없는 세상이야. 박근혜보다 이런 세상 자체가 더  절망이지. 세월호와 사드 그리고 강정을 봐. 믿음이 없어 의리가 없어 평화가 없어.”


그래서 어쩌야 할까 두 사람은 말한다. “고통의 눈물, 고통의 노동, 그 눈물로 뜨거운 사랑이, 잃고 잊은 인간성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이지. 한 발짝만 더 가자고, 가다가 죽자고, 한 치라도 더 가자고.” “눈물이 칼이 되어야 해. 주먹은 눈물이 닦는 것이 아니라 적의 급소를 치는 무기야. 그게 사람다운 세상이 사는 길이지.”


그러면 어떻게 될까? 

“정직하다는 것은 미련한 삶을 산다는 거야. 깨어지고 얻어 터졌어. 평생이 그래, 근데 난 지금 여기 남아 있어. 그러니 진적이 없어, 진 것이 아니야.” “가진 것이 하나도 없어 버릴 것도 없게 돼. 그런데도 여전히 매 맞고 주리고 그러니 벌떡 일어설 수밖에, 목숨을 건 알통의 몸부림, 외로운 깃발로 서 흔들렸지. 근데 알어?  바람 찬 날 외롭게 흔들릴 때, 그때 뿌리는 더욱 억세고 튼튼히 땅 심을 움켜지지.” 


두 사람이 말하는 세상은 무엇일까?

“평화는 유지되는 것이고, 평화는 열려있는 것이지. 평화는 일궈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다른 세상으로 가는 동력을 마련하는 것이 평화야. 평화로 다른 세상을 이루고, 다른 세상을 일구는 것 자체가 평화지.” “ 수탈하며 추방하고, 부패타락으로 배신 불신하며, 사람을 죽여 이득을 찾는 돈과 권력. 이기심과 탐욕으로 ‘얄곳’을 만든 것이 자본주의지. ‘얄곳’의 현실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살곳’으로 만드는 거지. 인류의 참 희망은 돈 지위 명예가 아니라, 사람이 참사람이 되는 거야.”


그러기 위해 두 어른은 외친다.  

“사람은 숨 멈춘 게 죽은 게 아냐. 제 뜻을 저버릴 때 죽은 거지. 죽음을 던져 나아가는 것이 역사야. 강요된 죽음에 맞서, 생명을 위해 죽어야 사는 것을 깨달을 때 새 세상은 빚어지는 거지” “기다려라 간절하게. 두렵지. 하지만 지지 말자. 스스로가 놀라고 전부 다 놀라는 것의 시작은 , 지금 그 자리 고통의 자리에 있는 거야.” 


특히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따스한 방에 들면 밖이 싫어. 등때기가 썩는 것이지. 생각도 푹푹 썩는다니깐?” “예수님도 머리 둘 곳이 없다 했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했어. 길 위에 살라는 말이야.” “새날이 올 때 까지가 아니야. 새날을 빚을 때 까지 흔들리지 마. 있는 길만 길인가? 잃은 길을 찾으며, 없던 길을 내며 가야지. 길은 그렇게 길이 되는 거야.” “민중의 배짱에 불이 붙을 때 우리가 아니라 세상이 변해. 그때가 혁명이지.”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는, 좋은 세상을 향한 가는 꿈을 꾸자고”  이 뜨거운 말들, 역사의 어둠을 갈라 치는 새뚝이의 힘찬 말들을 연말연시 지인들에게 선물하시지요.  (?)가 다 슬픈 헬 조선이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글,그림: 전미화 / 사계절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샛노란 표지에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까만 머리의 한 아이가 밝게 웃으며 서 있다. 그 옆에 그려진 말풍선 안에는 뭔가 다짐이라도 하듯 힘차게 적힌 글씨, ‘씩씩해요’. 쉽고 편하게 보는 글줄 적은 그림책인 줄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펼쳤다가 얼마 못 가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는다. 차마 책을 덮지 못한 채 가슴이 아려오는 걸 억지로 눌렀다.


 아빠차가 공중에서 크게 한 바퀴를 도는 무서운 사고가 일어난다. 아주 긴 시간을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는 엄마와 아이가 단색의 바탕에 까만 펜으로 간결하게 그려졌다. 이후 달라지는 생활모습들... 엄마는 더 바빠졌고, 혼자 먹는 밥에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식탁, 아빠 없이 혼자 하는 목욕, 아빠 없이 타는 그네, 잠이 들면 아침까지 엄마를 볼 수가 없기에 곰돌이와 얘기하며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 어느 날은 엄마 아빠와 함께 있는 꿈도 꾼다. 아름다운 풍선으로 가득한 꿈이지만 깨어보니 이불이 젖어있다. 엄마는 화내지 않고 말한다. “괜찮아.” 엄마와 함께 무지개 색깔의 산에 힘차게 오른 날, 엄마는 웃으며 말한다. “이제부터 우리 둘이 씩씩하게 사는 거야, 알았지?” 

이때부터 색이 없던 엄마와 아이의 옷에 색깔이 입혀진 게 보인다. 혼자 먹는 밥도 괜찮아졌고 설거지를 할 줄 알게 되고 엄마가 마신 커피 잔도 치운다. 아빠처럼 어른이 되면 높이 날 수 있을 거라며 혼자 그네도 탄다. 엄마는 예전에 하지 않았던 일들을 하기 시작한다. 운전을 시작하고 망치질도 하고... 사진 속 아빠가 나를 보며 웃고 있고 아이도 함께 웃는다. 그리고 말한다. ‘나는 씩씩해요.’ 마지막장에 그려진 아이의 환한 표정을 보고서야 마음이 놓인다. 그러다가 이내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쭉 씩씩할 수 있을까. 아니, 씩씩해야만 하는데. 


 아이의 시선에서 담담하게 쓴 그림책이지만 나도 엄마인지라 자연스럽게 엄마에게 감정이입이 되고야 만다. 3~4줄에 다 표현하지 못하고 글과 그림 사이에 담겨져 있는 엄마의 마음이 절로 읽혀져서 참 아팠다. 겪어보지 않으면 감히 예상치 못할 아픔과 상처이리라. 얼마 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충격을 준 남편의 직장동료가 생각났다. 남겨진 아내와 4살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이 책을 내밀고 싶다.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는 세상,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 크고 작은 아픔과 상처들을 늘 마주하는 우리들에게 오늘 나는 씩씩해지는 마법을 걸어보고 싶다. 우리 씩씩해요!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윤미희

[노동상담센터가 만나 세상] 

  트럼프의 연설




평택 미군기지 주소는 캘리포니아 주 캠프 험프리다. 주한미군기지는 미국령으로 한국의 주권이 관철되지 않는 치외법권(治外法權)구역이다. 트럼프는 그곳으로 왔다. 한국을 방문 한 것이 아니라 제나라 군 기지에 온 것이고 문재인대통령의 마중은 남의 나라에 들어가 남의 나라 대통령을 마중한 것이다. 트럼프는 무례(無禮)고 문재인은 과례(過禮)다. 이것이 한미 간의 현실이다. 트럼프는 극진한 대접을 받은 모양이다. 그 결과 트럼프가 국회 연설까지 막말로 깽판을 치지 않는 것이 굉장한 외교적 성과가 되었단다. 군사무기 8조 구매, 한미FTA 재협상 시작, 북한 압박 독자 재제 강화, 말을 안 해도 알아서 다 해주며 효자손처럼 가려운데 다 긁어 줬는데 괜한 짓을 할 리가 없다. 아니 트럼프는 국회연설을 통해 할 이야기를 다했다. 그 결과 자유한국당의 만세다. 자한당을 기쁘게 한 게 외교적 성과라니, 이것은 단연코 촛불 이전의 모습이다. 성주 소성리 사드배치는 물론 추가 배치, 광화문 광장에 다시 쳐진 차벽, 국가 물리력에 의한 법의 자의적 전횡으로 촛불이전의 광화문도 되었다. 문재인 정권은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통속적인 소인배 정권인가? 그렇다면 문재인 정권의 말 바꾸기 정치는 사대 종속이라는 대한민국 정치의 적폐다 적자다. 


트럼프는 수사는 화려하나 내용은 텅 빈 연설을 했다. 개살구 연설이다. 그의 현실인식과 역사인식은 거의 1890년대 구 제국주의 시대의 판박이다. 지루한 80년대 반공교육을 해 댄 트럼프가 기껏 90년대 고난의 행군 중인 북한의 모습을 스케치할 때, 성조기와 트럼프를 상왕 조국으로 아는 미친 태극기 노인네들의 환영을 좋아하는 트럼프를 볼 때, 우리는 지금 미국이 얼마나 낡은 체제인지 알아야 한다. 

트럼프 연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꾸로 말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거꾸로 알아들어야 한다. 트럼프가 ‘트럼프의 미국은 이전의 미국과 다르니 북에게 과소평가도 시험도 하지 마라.’할 때 북한은 미국에게 실제적인 위협이요 시험을 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트럼프가 북을 협박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그에 대하여 힘에 의한 평화를 말 할 때 군사 주권이 없는 한국 사람들은 그것이 힘과 무기가 만든 평화 체제가 아니라 전쟁 체제임을 느껴야 한다. 평화를 위한 안보가 강해 진 것이 아니라 전쟁을 향한 대립이 세 진 것이다. 미국과 대립한 체제는 망했다고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소련, 가다피의 리비아, 후세인의 이라크까지 미국과 타협하려는 체제는 오히려 망했음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미국의 오만과 일본의 탐욕에 의해 더욱 위험해지는 동북아 정세를 평화라는 큰 틀에서 정리정돈을 하려면 트럼프의 정책과 변덕에 대하여, 아베의 욕망과 의도에 대하여 자주적이고 평화 통일을 향한 관점에서 다른 관점을 세워야 한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드는 것이 평화지, 농기구를 녹여 무기를 만드는 것이 평화가 아니다. 바로 이 관점에서 한반도 정세의 완화를 해야 한다. 그게 촛불의 염원이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확인한 것은 이명박근혜를 그대로 계승하여 한국당과 성조기 노망든 이들이 만세를 부르게 하는 참담한 모습이다. 이것이 촛불일 수 없다. 


트럼프 연설 후에 정당들의 논평이 가관이다. 자주 평화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다른 수구들이 그렇다 치고 국민당은 트럼프의 연설이 문재인 정부와 다르다고 차이를 공격한다. 민주당은 트럼프와 문재인은 차이가 없다며 방어한다. 두 정당 정치인들에게 기준은 한국이 아니고 트럼프의 입이다. 문재인과 트럼프는 달라야 한다. 같으면 그것이 더 이상하다. 트럼프의 견해는 한국에 와서 실사구시를 통해 비판 교정이 되어야 한다. 그게 생물로서 외교다. 그 외교가 없다. 이것이 촛불의 마음일리 없다. 

더 이상한 일이 있다. 나름 진보적인 사람들의 입에서 조차 ‘북핵 문제에 묶여 미국의 무기 구입을 허용한 조치에 대해 안타깝고 화가 난다. 하지만 현재의 조건상 다른 대안이 없다, 우리는 약자고 어쨌든 한반도의 평화가 중요하니 말이다.’라는 견해가  이성적인 양 말해 진다는 것이다.  

강자가 말하니 약자가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정말 한국적 체념이다. 어용노조를 지지하는 이들, 아니 회사와 공범이 되어 노동자들의 고혈을 짜는 어용들이 하는 말이 바로 그 말이다. 그런데 을들의 고통에 동정하고 분노하는 이들이, 여성이나 성소수자들의 차별과 고통에 공감하는 이들이 약자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면 안 된다. 그 말을 뒤집으면 ‘억울하면 출세하라. 강자의 말이 법이다. 약육강식 정글의 법칙이 세상이치다’라는 오랜 한국 역사가 담긴 처세의 인정이자 왕따 가해자의 논리의 인정이다.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이유도 없이 감정적으로 외톨이를 만들고, 그 책임을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에게 돌린다. “왕따를 당할 만하니 당한다.”는 말이다. 힘을 지닌 가해자들을 보며 겁먹은 방관자들이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 그 왕따에 동참한다. 이제 절대 다수가 된 가해자들은 그 숫자의 의미로 자기들의 상식이고 정의라 믿는다. 최소한의 양심도 잃고 그 독한 패륜적 범죄가 일상이 되고 피해자는 영혼마저 파괴당한다. 힘이 없는 것이 죄다. 


지금 북에 대한 유엔과 미국 그리고 문재인 정권이 하는 짓이기도 하다. 북한의 생존을 위한 저항은 정당방위가 아니라 감히 지엄함에 저항하는 반역자의 범죄다. 북한이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순종 굴종 파괴뿐이다. 그 길을 국제 정의 양심이라 말하고 있는 트럼프, 그 말에 박수를 치며 훌륭하다고 하는 여야 정치인 짐승만도 못한 꼴에 비판을 가해도 모자랄 판에 이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전략이니 불가피(不可避)니 하며 패배와 허무를 부추기는 견해를 만날 때 마다 슬픔이 분노가 된다. 

그들은 노예들의 내재적 복종은 이렇게 완성되는 것임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약자는 순종이 아니라 저항을 통해 세상을 바꿔 왔다는 역사적 진실을 왜 외면할까? 비겁이 헬조선의 운명인가. 그 비겁이 헬조선의 운명을 만든 것은 아닌가? 불의에 저항하라. 약자이기에 더욱 더 저항하라! 

이것이 촛불의 상식이다. 트럼프에 저항하라!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시진핑 사상(思想) 




중국공산당 19차 당대회가 끝났다. 당헌(黨憲)에 '시진핑 사상' 의 명시됐다. 중국 공산당에 삽입된 ‘시진핑 사상’은 “샤오캉(小康) 사회 확립, 개혁 심화, 의법치국(법치), 종엄치당(엄격한 당 관리) 등 ‘4가지 전면’ 전략과 경제·정치·문화·사회·생태문명 건설을 추진하는 ‘5위1체’라는 기존의 시진핑의 정치 철학”을 반영한 것이다. 이를 두고 1인 체제 독재의 강화라는 비판도 있지만 등소평식 개혁·개방 이후 30여 년 동안 쌓여온 빈부·도농 격차, 부패와 과도적 혼란에 따른 민심 이반 등의 모순을 위해선 당의 내적 강화, 당과 대중의 결합의 강화를 통해 해결하려는 모색이다. ‘빈곤의 퇴치와 균형 발전’이라는 ‘소강(小康)사회’는 전면적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가기 전의 과도적 단계라고 한다. 이를 ‘중국의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라 하며 이의 실현을 완성된 지도자 - 당 - 국가로 이어지는 조직과 사상의 강화 속에서 구축하겠다는 의지다. 중국 인민을 떨쳐 일어나게 한(站起來) 마오쩌뚱 30년, 중국을 부유하게 만들었다는(富起來) 덩샤오핑 30년, 그리고 중국을 세계의 강대하게 만들겠다는(强起來) 시진핑의 30년에 대한 전망의 제시다.  


그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보자. 보도를 보면 시진핑의 노선의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는 '선부(先富)론'에서 ‘부의 나눔, 샤오캉(小康)' 사회로 가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성장으로 위해 흑묘 백묘를 가리지 않았던 시절을 접고, 성장과 함께 국민의 평등과 복지도 중시하겠다는 뜻이다. 이것이 실현되면 박정희식 발전론과 중국식 특색 있는 사회주의 발전론의 근본적 차이가 될 듯하다. 시진핑은 세 시간짜리 연설에서 "2020년부터 2035년까지 샤오캉 사회의 전면적인 기초 아래 사회주의 현대화를 기본적으로 실현하고, 2035년부터 21세기 중반까지 ‘부강하면서도 아름다운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하겠다."고 계획표를 밝혔다. 이는 이념보다는 실용, 정치보다는 경제에 무게를 실어왔던 덩샤오핑 등 전임 지도자들과 달라진 청사진이다. 그간의 과정을 중국의 재자본주의화 사회주의 퇴행을 볼 것인지 전면적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향한 전략적 도약의 준비로 볼 것인지가 확인되는 시간의 시작이기도 하다.


둘째는 중국 체제 내부의 강화책이다. ‘의법치국 또는 치국이정(治國理政)'이라는 법치주의 확립과 '종엄치당(從嚴治黨)'이라는 엄격한 당 관리가 그것이다. 법은 일관성과 보편성을 가질 때 신뢰를 지닌다. 그 기준을 가진다는 것은 정권과 집단의 이해관계에 의한 자의적 법집행이나 행정을 경계한다는 것이다. 엄격함으로 당을 운영하다는 것은 이미 시진핑 1기 내내 진행된 당내 반부패 투쟁에서 증명된 바 있다. 이를 통해 사회적 차원에서 보편적 기준을 확립하여 통치의 격을 높이고, 청렴과 능력으로 대중 속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은 당적 지도력으로 사오캉(小康) 사회를 이룬다는 각오다. 


셋째는 중국의 국제 관계에서 '도광양회(韜光韜晦)'에서 '대국굴기(大國堀起)'로 나가자는 포부(抱負)다. 등소평의 ‘숨어서 힘을 기르자는 시대’를 바꿔 자신감으로 강대국 중국을 만든다는 선언이다. 마오가 중국의 역사 속에서 인민의 굴기를 이뤘다면 시진핑은 세계 속에서 대중국의 굴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새로운 중국 중심의 국제 경제의 동맥을 만들자는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해상 실크로드 개척) 정책과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건립, 군사외교적으로 남중국해 영역에 대한 공세적 대응, 미국과 G2 양대강국 체제의 구축 시도 등이 그 구체적 모습이다. 


중국의 힘은 중국 공산당이다. 중국공산당은 독일의 총인구보다 많은 8900만 여의 당원을 가졌다. 당은 서방 정당과 같은 종류의 선거를 둘러싸고 조성된 상대적으로 느슨한 이익집단이 아니다. 중국 국가를 운영하는 뼈대이자 혈맥이다. 국가의 응집력과 동원력의 원천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보편적 기준으로 군림한 서구의 다당제 대의제 민주주의적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 반면에 중국이 보기에 서구의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는 “끝없는 정치 투쟁과 분규, 정책 변경에 따른 혼란과 예측 불가능성” “대의제 선출을 왜곡하는 돈과 언론의 지배, 혐오와 증오로 얼룩진 혼돈의 선택”이다. 


중국의 공산당은 자기들은 ‘공산주의 의식을 가진 노동자계급의 선봉전사’들의 당이라 규정한다. 전심전력으로 인민에 봉사하고, 공산주의 이상을 위해 개인의 희생 헌신을 감수하며 분투하는 당이다. 평범한 노동인민의 일원으로 어떠한 사적 이익과 특권도 추구해서는 안 되는 이들의 당이라고 자기규정한다. 이것이 명실상부하다면 중국의 지배체제는 서구와 다른 맥락을 지닌 정치를 구사할 것이다. 혁명적 당과 당원, 능력 있고 덕 높은 지도자와 지도부를 지닌 인민은 인민 스스로가 존엄해 진다. 과학적 사상, 위력적인 정책과 노선, 분명한 방향을 견지한 지도자의 상징성은 역사를 대표한다. 시진핑의 시대가 중국의 혼란과 과도적 상황을 세계 인류와 중국 인민의 평화와 행복을 향한 길로 밀고 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시진핑은 “빈부격차, 테러주의, 사이버안보, 중대한 전염병 확산, 기후변화” 인류 공동의 도전을 각국 인민들이 힘을 합쳐 극복하고, 각국 인민의 자주적 선택권을 존중, 자국의 의지를 타국에 강요하는 것,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 자신의 강한 세력을 믿고 약소국을 무시하는 것을 반대하며, 타국의 이익의 희생하는 대가로 자국의 발전을 추구하지 않"는 중국을 약속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도 부족하다. 왜냐면 현실 세계 국제질서의 절대 악, 궁극적폐인 ‘제국주의’에 대한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적 국제질서와 싸우는 것이 국제적 공의(公義)가 되어야 한다. 중국에게 그 첫 번째 시금석은 북핵 문제다. 말로만 평화를 말하면서 대국(大國)주의적 입장이라며 유엔 뒤에 숨어 미제의 제국주의 국제질서에 편승하는 입장부터 개선하지 않으면 시진핑 사상은 거짓이거나 빛 좋은 개살구가 되고 말 것이다. 중국이 표리부동이 아니라 표리일체의 나라로 멋진 새 시대를 열길 바란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자카란다 꽃길‘에서 다시 만난 현실




이곳은 봄이다. 

계절의 흐름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흘려보냈던 작년의 봄과는 사뭇 다르다. ‘탄자니아 통신’ 누적 횟수만큼 이곳의 시간이 누적된 탓일 것이다. 

모처럼 나들이 나온 구시가지. 그동안 입고 있던 두꺼운 옷을 벗어던지고 얇은 원피스 차림이어서인지 좀 걷고 싶어진다. 구 시가지를 조금 벗어나자 ‘자카란다 길’이 나온다. 구도심과 이어진 언덕길인데 차가 많지 않아 한적한 것이 걷기에 좋다. 자카란다가 피어있는 이 길을 걸어볼 마지막 봄일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그 길로 끌었다. 

가로수 너머 멀리까지 시야가 확보되니 숨통이 확 트이는 느낌이 들며 살짝 들뜬다. 갓길을 지키는 연보라색 꽃, ‘자카란다’. 이국적인 이름으로 신비한 느낌마저 든다. 종모양의 보라색 꽃이 가지가 휘어질 듯 매달린 것이, 색깔만 다를 뿐 마치 흐드러진 벚꽃을 연상케 한다. 파스텔 색조 특유의 보드라움과 연약함에 보라가 주는 몽환적인 느낌이 묘하게 나의 마음을 쓰다듬는다. 지인들이 인증 샷이라며 찍어 보내 온, 가을 나들이 풍경에 잠시 흔들렸던 터다. 계절 따라 저마다의 아름다움으로 넘쳐 나는 땅에 대한 그리움으로. 

자카란다로 향했던 내 마음이 아릿한 통증으로 옮겨가자 새로 산 하얀 샌들에 눈이 멈춘다. 내리막길이니 체중이 앞으로 쏠리게 되고, 맨발로 샌들을 신은 탓에 얼마 못가 물집이 잡히고 피부가 벗겨진 탓이다. 오랜만에 작정하고 산책이란 걸 해보자며 들어선 길인데, 신발이 발목을 잡을 줄이야. 


내가 여기에 살면서 가장 적응이 안 되는 부분이 도로 사정이다. 버스에서 내려 학교까지 걸어 다니는 일이 많은데, 차라도 지나가면 먼지로 목욕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워낙 길이 험해 혹여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나 않을까 땅만 보며 걷다 보니,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보질 못할 정도로, 나는 차안대를 쓴 말이 된다. 

아프리카의 사정을 익히 알기에 이곳에 오면서 가벼우면서도 편한 플랫슈즈를 신고 왔는데, 말라위를 여행하며 잃어버렸다. 다르에살람에 간 김에 숍에 들렀지만, 우리와 취향과 체형이 다를 뿐더러 다양한 사이즈가 없으니 눈에 드는 걸 고르는 게 쉽지 않다. 몇 개의 숍을 돈 후, 사이즈도 넉넉하며 굽도 크게 높지 않을뿐더러 어느 옷에나 무난히 어울리겠다 싶어 구입한 것인데, 길들여지지 않은 신발이 발에 무리가 된 것이다. 


신발은 문화나 종교에 따라 다양한 상징으로 해석되곤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사람의 발자취라고 생각해서, 자신을 소개하는 글인 이력서(履歷書)의 이(履)가 신발을 의미한다. 또한 그 사람의 자리나 지위로 해석해, 꿈에 새 신발을 사거나 신고 있는 것은 길몽으로 친다. 당연히 잃어버리거나 헌 신발을 신고 있으면 흉몽으로 본다. 이곳과의 계약이 끝나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고민이 있는 나로서는 물집 잡힌 발을 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하이힐이 주는 선의 아름다움과 긴장감을 좋아해 자칭 하이힐 예찬론을 펼쳤었다. 아프리카란 커다란 대륙에 들어서며 플랫슈즈가 주는 자유로움에 매료되어 하이힐을 집어 던졌다. 양 극단 사이의 어느 지점, 적당한 긴장감을 즐기면서도 결코 나를 가두지 않을 적당한 포인터를 찾을 수 있을까? 


자카란다 꽃길에서 만난 봄이 화사하지 만은 않은 이유다.

  

 2017.10.29

탄자니어에서 소피아



장제모칼럼

원전 공론 유감


20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신고리5·6호기공론화위원회 최종권고안 발표에서 김지형 위원장이 최종권고안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를 재개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탈 원전 에너지 정책을 공약으로 제시했고 정부 구성과 동시 건설 중인 신고리 5·6호기 공사를 중단시켰다. 그러나 정치권(야당)은 물론 국민들의 반대 여론이 극렬하게 일자 이의 조정을 위하여 시민대표 참여에 의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위원장 김지형)’를 구성하였고, 숙의 과정을 거친 후 이에 참여한 시민대표 471명의 공사 재개 권고안을 받아들인 결과다. 

과제의 내용이나 중대성을 볼 때 민주적 과정을 거친 합리적 결정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여론이고 더러는 민주주의의 한 완성된 모습이라는 극찬조차 있다. 문제 제기자인 문재인 대통령조차도 “숙의 과정을 거쳐 지혜롭고 현명한 답을 찾아주셨고, 자신의 의견과 다른 결과에 대해서도 승복하는 숙의민주주의의 모범을 보여줬다”고 평가하고 “이번 공론화 경험을 통해 사회적 갈등 현안들을 해결하는 다양한 사회적 대화와 대타협이 더욱 활발해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진행 모습을 볼 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완벽한(?) 과정이고 결과다. 그러함에도 마음 한구석에 공허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원전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필자의 편견적 사고 때문이리라. 

솔직히 말하면 필자는 당초 원전 찬성론자였다. 한국전쟁으로 폐허화한 국토, 모든 것이 부족한 사회에서 오랜 시간을 가난과 함께 살아온 터라 먹는 것이 중요한 일상이던 소년시기를 보낸 필자에게는 먹거리를 해결해 주는 가장 확실한 방향인 나라의 산업발전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희망이자 가치였다. 조금씩 나아지는 경제사정에 감사에 더하여 희망을 부풀리던 청년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애국심으로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했기에 산업 동력인 에너지 확보는 지대한 관심사였고 따라서 원자력 발전에 대한 애정은 마치 자기 성과인양 자부를 둘 정도였다. 부존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이보다 나은 에너지 자원은 없다는 것이 당시 필자의 사고였다.

과거에 필자가 가졌던 것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지금도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원자력 즉 핵물질(Nuclear Materials)에 대한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한 필자지만 그런 사고(思考)를 가진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사물에 대한 사고는 개인의 자유의지이고 그것은 각자의 지식과 소양(素養)에 바탕하고 있으니 그를 어찌할 것인가. 다만 사회적 질서를 구하기 위하여 내 사고와 다툴 일이 아니면 그냥 두고 볼 수밖에. 

따지고 보면 현실에서 원자력만한 에너지는 없지 않는가? 경제성도 그렇고 환경오염 문제도 그렇고 또한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탄소 배출 문제도 그렇다. 그럼에도 원전을 기피해야 하는 것은 가공할 핵무기(核武器, nuclear weapon)의 위력도 그렇지만 그것의 가동으로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방사능(radio-activity) 위험 때문일 것이다. 방사능의 위험성은 인류가 가장 기피해야 할 두려운 존재인 것은 원전 찬성론자들도 부인하지 않는다.

비전문가인 주제에 핵무기나 방사능의 위험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미 많은 전문가들에 의한 각종 자료들이 풍부하게 나와 있는가 하면 그 내용도 더욱 세밀하게 정리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그럼에도 공론이라는 미명으로 그것의 존치를 결정한 것이 과연 공익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판단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음을 감추지 못한다. 

세상은 사유(思惟)하는 인간들이 지배하는 곳으로 그들에 의해 형성된 사회구조에 각자의 개성과 주관들이 지식으로 포장되어 만들어진 질서에 의해 운행되는 공간이다. 그러한 질서는 공동체적 합의를 거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것들에 오류가 있는 경우를 왕왕 발견한다, 인간들은 분별할 줄 아는 지능을 가진 만큼 보편성을 지향하지만 자기 합리화 집착도 가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합리적인 것이라 하여 오류가 없는 것도 아니고 또한 항상 정의로운 것도 아니다. 공론 과정에서 숙의민주주의를 통해 얻어낸 결정이라 하여도 공감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다. 

짐작을 하였겠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공론이라는 과정으로 원전 건설 재개를 끌어낸 결과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자 함이다. 이 결정을 이뤄낸 공론은, ‘원전 건설이냐 중단이냐’를 두고 그에 대한 일정 지식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에게 관련 정보를 제공한 한 후 숙의(熟議)한 것’이라 이해를 한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탓할 데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멋진 결론 도출 모습이다. 그런데도 유감을 참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모습의 숙의 민주주의라도 그것이 만능이 되는 것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범적 공론이라 하여 이를 사회 갈등해결의 만능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공론(公論)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여럿이 의논함. 또는 그런 의논’, ‘공정하게 의논함. 또는 그런 의논’이라 하고 있다. 전자나 후자의 정의는 일반적 이해지만 이번 경우를 표현하기에는 추상적이다. 이 장에서 뜻하는 상황과 목적을 이해하기가 그렇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의 해석을 보니 “공공적인 의견”, "다수자가 지니는 견해와 사상의 경험적 보편성"[법철학』301절] 이라고 하고 있다. 보통 지식 수준으로 이해하기가 좀 어려운 표현이지만 사전적 의미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필자 나름의 이해는, 이 장에서의 ‘공론’은 사회갈등에 대한 공동체적 합의도출이 목적이다.

이번 공론화의 경험을 정부는 평가하면서 “향후 다른 사회갈등 사례에 적용할 수 있도록 공론조사 표준화를 개발하여 우리사회의 제 사회갈등 해결 모델로 정립하겠다.”고 한다. 이러한 정부의 자세는 일견 국민의 뜻을 존중한다는 것으로 비쳐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들의 찬반 의사에 대한 판단이 어려울 경우 국민여론에 의존하겠다는 것으로 책임 회피적인 모습으로 보이는가 하면 포퓰리즘적이라는 비판 여지를 가진다. 국가의 정책 결정은 국가 통치시스템의 룰(rule)에 의해 처리하여야 한다. 이러한 질서를 마련하려고 국민들은 선거를 통해 국가 지도자를 선출하였다. 물론 국가의 중요한 정책 수립에 국민여론을 통한 국민의견을 참고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것의 정도나 한계를 분명히 해야 하고, 그런 범주에서 국가는 시행을 주도하고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가져야 한다. 제대로 된 국가의 통치구도는 그래야 한다.

금번 공론에 대해 ‘대의 민주주의 가치 훼손’을 주장하는 소리가 있는가 하면, ‘대의제와 다양한 형태의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를 가진 여론수렴 수단은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이는 법제도에 의해 민간 또는 민·관이 참여하고 있는 ‘노사정위원회’, ‘최저임금위원회’ 와 같은 법제도에 의한 위원회가 운영되고 있음을 예로 들고 있다. 전자는 국회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설득력을 구하기는 어려울 거 같다. 후자는 공무원이 아닌 민간신분도 국가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강조하는 점에서 공감이 간다. 그러나 유의해야 하는 것은 국가정책 결정에  민간의 영향력 행사가 있다 하더라도 그 결정은 정부의 고유 권한이고 따라서 그에 따른 책임자라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이론의 전개는 기왕에 결정된 신 고리 5·6호기 원전 공사 재개를 반대하거나 문제 삼고자 함이 아니다. 어떻든 합리적인 진행에 의하였고, 그 공론에 참여하여 반대한 자는 물론 국민 다수가 수긍하는 만큼 그 결정은 존중되어야 한다. 다만 이 장을 통하여 피력하고 싶은 것은 국가 정책에 대한 국민 의견을 묻는 것은 마땅하고 또한 합의 도출이 민주적이고 합리적 과정을 거쳤고 그것이 현재에서 공익이라 하더라도, 과연 미래에서도 공익적인가를 살펴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두는 가치는 시간에 따라 가변적이지 않는가! (♣2017.10.28.)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구속, 단죄 있는 청산의 일보!



우리 구로공단은 남한현대사의 자궁(子宮)이다. 한국의 자랑(?)이라는 민주화, 산업화가 보수 진보의 다른 뿌리가 아니라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땀과 근육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구로공단의 역사를 밑으로부터 보면 70년대 원풍모방, 80년대 구로동맹파업과 박영진 열사, 그리고 90년대 혼돈을 거쳐 노예제도인 비정규파견제도에 맞선 현대판 스파르타쿠스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이어진다. 

특히 기륭전자 투쟁은 구로공단 생산적 산업자본이 어떻게 부동산 투기자본이 되고 금융투기꾼들에 의해 난도질당하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여성 비정규노동자들의 가혹한 인간적 소외, 물질적 소외의 현실을 뚝 쪼개 보여준다. 노무현 정권을 함락시킨 신자유주의 정책의 위력을 보여주고, 불법파견을 확인해도 해고가 당연하다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민낯도 확인시켜준다. 법과 정부권력이 외면한 곳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무서운 진실과 무수한 난관에도 절박하고 끈질긴 투쟁과 연대만이 승리의 길이라는 무거운 진리를 증거 한다. 군사독재의 절제를 모르는 칠흑 같은 자본의 착취 사회에서 인간해방의 빛줄기 한 올 되려 했던 전태일의 투혼은 박영진 - 기륭전자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의 빛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기륭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으로 일터로 돌아갔다. 좋은 노예제도가 없듯이 좋은 비정규직은 없다고 비정규직차별 철폐라는 어정쩡한 차별인정의 요구를 비정규직 자체의 철폐로 돌려놨다. 2017년 10월 11일 기륭전자 회장 최동열의 법정구속은 성찰 없는 반인륜적 자본가들의 패악에 쇠고랑을 채운 셈이다.


“최동열이 근로기준법 위반(체불임금)으로 법정구속 되었다. 그간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기쁘다.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우리가 기륭으로 들어가든지 기륭이 망하든가 할 것이다. (돌아 간 일터에서 월급 한 푼 받지 못했는데) 합의 이후엔 최동열은 야반도주했다. 기업 사기꾼 최동열을 반드시 구속시키겠다고 말했고 그렇게 됐다. 이제 여한이 없다. 그동안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께 고맙고 또 고맙다.” 유흥희 기륭전자 분회장의 말이다. 

기륭전자 투쟁을 곁에서 보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자본의 불법 사기 패악 질에 대한 무한한 관대함과 노동자 투쟁에 대한 무한한 사회적 폄하다. 이번 최동열 구속은 체불임금에 대한 형사적 책임이다. 하지만 정상적 사회였다면 최동열은 부동산 투기를 노린 공장부지 매각 개발, 중국공장 인수 과정의 의혹, 본사 사옥과 관련된 과정을 통해 확인된 배임 횡령으로 이미 감옥에 있어야 한다. 당시 노무현 정권은 기륭전자가 불법파견인 것을 확인하고도 위장 도급을 강요했다. 많은 이들이 싸울 만큼 싸웠고, 법원 판결에도 졌으니 타협하자고 했다. 기륭전자 재무 담당 이사는 삼성의 초청으로 삼성 직원들을 대상으로 노조가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로 간증 교육을 했다. 김소연 전분회장 금속노조로부터 월 500만원의 활동비를 받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의식화 조직화 하는 현대판 러드 장군(러다이트 기계 파괴운동이 상징으로 거론된 가상의 인물)이었다. 삼성은 무노조가 필요한 이유로 기륭을, 만약 노조가 필요하다면 바람직한 모습으로 현대자동차 이경훈 집행부를 예로 들었다. 기륭노동자들은 최악의 적의 비난은 최선의 칭찬이라 믿었다. 


최동열은 전 분회장의 대선 후보 출마도 욕을 했다. 분회가 순수한(?) 노조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불온한 노동운동가들의 음모의 증거로 믿었다. 헬조선 대한민국 자체가 개념 없는 괴물의 나라지만 특히 노조에 대한 생각은 유난히 심하다. 정규직이 연대를 말하면 정치적이라며 불온하다고 비난하고, 노동조건 개선을 말하면 이기주의라 욕한다. 노조가 정치 사회적 발언을 하면 사회불안 범죄라 여기며 노사화합의 기수로 제 코만 닦는 것도 아니고 회사의 가려운 곳만 긁어야 노조라 여긴다. 그러니 여성 고졸 비정규직 노동자가 대선후보로 출마한다니 이 얼마나 가당찮단 말인가? 돈 백 인맥 권력 유명세도 없는 비정규직 후보를 위해 십시일반 정신? 돈 받는 것이 아니라 돈 몸 시간을 내는 선거운동? 이 무슨 웃긴 개소리란 말인가? 

모든 사용자들은 노조가 만들어지면 배후를 찾는다. (더 큰 비극은 이런 오염된 현장 민중 무시 시각에 아타가 없다는 점이다.) 이들은 노동자들을 꼭두각시로 여긴다. 시키는 대로 하는 존재다. 그러니 언제나 상급이 있어 지휘를 받아야 하는 존재, 배후가 있어 조종을 받아야 하는 괴뢰들이다. 그런 존재가 스스로 주인이 된다니 터무니없다는 편견이 상식이 된 것이 대한민국이 내장(內藏)한 최악의 적폐다. 


괴물의 세상이 된 이유 중 큰 몫이 ‘역사적 범죄에 대한 단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죄가 없으니 청산되지 않은 식민과 독재와 부패의 후예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근혜의 부끄러운 패악에 대한 최소한의 단죄도 정치보복이라는 작금의 현실은 이 역사적 비극을 잘 보여 준다. 최동열의 구속은 더러운 지배 구조에 대한 투쟁이었다. 이해관계의 조정이전에 옳고 그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 개인의 처지와 조건에 밀린 좋은 게 좋은 해결이 아니라 공동체적 정의가 있어야 한다는 단호한 선언이다. 신영복 선생은 “청산한다는 것은 책임지는 것이다. 단죄 없는 용서와 책임 없는 사죄는 '은폐의 합의'다. 책임짐으로써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청산이”라 했다. 최동열 구속의 의의는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법정에 제출한 탄원서에 잘 나타난다. “우리가 탄원을 하는 이유는 단지 임금지급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수단화 도구화 일회용화 하는 반인간적 범죄의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현재 최동열은 어떤 반성도 죄의식도 없다. 기회가 되면 이런 (범죄와) 고통을 반복하겠다는 파렴치한 모습이다. ‘반성과 성찰’을 할 수 없는 사회적 부적응자, 최동열이 대표하는 (돈과 권력은) 우리 사회 비인간적인 적폐의 근본 뿌리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피땀을 돌려받는 것의 당연 당당함과 반인간적 패륜적 범죄에 대한 엄벌을 내려달라는 것이다.” 진정한 적폐청산의 기본은 ‘웃으며 은폐하고 평화롭게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단죄를 통해 반복을 제거하는 것이다. 적폐청산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기륭전자 투쟁의 결실인 최동열의 구속이 반가운 이유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은행이의 책소개]샤를의 기적



처음 이 책을 만났을 때 다른 그림책에 비해 월등히 큰 크기에 놀랐고, 너무 화려한 그림에놀랐다.

책표지에 너무나 침울한 표정의 꼬마용이 날개를 아래로 떨어트린 채 바위위에 앉아있다.

시무룩한 꼬마용이 궁금해 지며 책을 펼쳐 보게 만들었다.

여러 용들이 화려하게 면지에 등장한다. 

프랑스작가의 작품이지만 서양적인 면보다는 동양적이 냄새 많이 나는 그림책이다.

꼬마용 샤를은 탄생부터 신비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엄마, 아빠의 지지와 사랑 속에 드디어입학 할 나이가 되어 학교에 입학을 한다. 다른 용들에 비해 커다란 날개와 커다란 발을 가진 샤를은 항상 아이들의 놀림과 따돌림의 대상이 된다. 모두 불뿜기와 나는법을 열심히 배우지만 샤를은 책읽기와 시쓰기를 더 좋아하는 낭만 시인이다.

학교에서 학예발표회가 있던 날 다른 친구들은 부모님들 앞에서 자기의 장기와 특기를 마음껏 뽑내지만, 다른 친구들처럼 자랑할 것이 없는 샤를은 혼자만의 도피처였던 화산으로 가서 울적한 마음을 달랜다. 갑자기 화산이 폭발하고 잘 날지 못했던 샤를은 추락하고 만다. 죽음을 앞에 두고 샤를의 마음은 슬프기만 하다. 그 때 작은 파리 한 마리가 “넌 날 수 있어~ 나처럼 작은 날개로도 날아다니는데, 그 큰 날개로 왜 날아보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거야?” 라는 말에 샤를은 날개짓을 해보고 드디어 하늘을 날 수 있게 된다.

샤를의 큰 날개가 하늘의 해를 가리고 어둠이 오자 학교에서는 이 어둠을 이용해 하늘에 불꽃은 쏘아 학예발표회의 하일라이트를 장식한다.

모두 샤를을 칭송하며 샤를의 부모님도 샤를을 자랑스러워 하며 이 그림책은 끝난다.

이 그림책에서 난 요즘 아이들의 왕따 문제와 옆에서 용에 비해 먼지만한 크기의 파리가 샤를의 조력자가 되어 이 멋진 꼬마용의 용기를 끌어내는 것을 보고 느낀 것이 많았다.

과연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진정한 조력자였을까?

나의 체면과 나의 자존심 때문에 아이의 장점보다는 못하는 것을 질책하고 아이의 이야기 보다는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아이를 판단하고 있지 않나 라는 자책감이 들게 했던 책이다. 나는 진정한 누군가의 조력자인적이 있었을까? 나는 그렇지 못하면서 나의 조력자가 되어주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원망만 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프랑스 어린이가 뽑은 마르세유 어린이 도서상과 로빈스 어린이 문학상등 다수의 상을 수상한 이 그림책을 한해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기에 나를 돌아다 볼 수 있는 그림책으로 추천해보고 싶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윤숙

소피아의 탄자니아 통신-28     


송편을 빚으며



추석 연휴가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이 글이 지면에 실릴 걸 생각하면, 뒷북치고도 한참 뒷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박하지만 정겨웠던 이곳의 추석 풍경을 그려보고 싶다. 꽤 오랜 기간 바깥 생활을 했지만, 손수 송편을 빚어 본 것이 처음이기도 했거니와, 나답지 않게 그 일련의 일들이 즐거웠으니 말이다.

음베야의 한국인은 여덟 명에서 단기 체류자인 두 명의 처자가 합세해, 열 명으로 늘어났다. 

일부러 약속을 정하지는 않지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얼굴을 보게 되는 데, 이런저런 이야기로 수다가 끊이지 않는다. 어떤 날은 20대인 창우 씨의 썸타는 얘기로, 어떤 때는 저마다의 여행 다녀온 얘기들로, 또 어떤 날은 한국의 정치 이야기로, 때론 타국에서 생활하며 겪어야 하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 방안이나 자신만의 노하우를 나누는 등, 다양한 주제를 넘나든다. 터줏대감인 선교사님 가족이 있어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구성원들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줄 알고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유연함을 가진 탓이다. 이번 명절 행사도 이런 수다 끝에 나온, 송편이란 단어에서 풍기는 추석 고유의 색깔 덕분이었다. 


자유로운 이곳 분위기답게 식사 시간만 정했다. 그러면 각자의 스케줄에 맞춰 와서, 스스로 자리를 잡으면 그게 자신의 역할이 된다. 

늦은 아침을 먹고 선교사님 댁에 도착한 나는 미리 준비해 둔 송편 재료를 앞에 하고 식탁에 앉았다. 니엘과 나엘(선교사님 딸과 아들), 그리고 새로 합류한 두 처자, 미래 씨와 경서 씨가 함께 한다. 선교사님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익반죽을 하는 동안, 설탕을 넣은 깨소금 소가 만들어지자 준비는 마쳤다. 

나이에 비해 사려 깊고 차분한 니엘은 방법을 가르쳐주니 금방 비슷하게 흉내를 낸다. 동생 나엘은 따라 해보지만 매번 야릇한 모양이 만들어진다. 여러 번 변신 로봇을 만들 듯 변형을 시키더니 드디어 기다란 모양이 완성되었다. 우리는 모두 악어라고 결론을 내렸는데 정작 자신은 청소기를 만든 거라고 해서 폭소를 자아냈다. 


오랜만의 송편 빚기는 옛 기억을 불러온다. 부엌일에는 도대체가 맘이 없던 내게 송편 빚기는 유일하게 잠시의 놀이가 되었었는데, 오빠와 내가 빚은 송편이 제일 예쁘단 칭찬 때문이었을까? 그나마도 오래는 못하고, 약속을 핑계로 늘 도망을 나왔지만 말이다. 

결혼을 한 후에는 의무가 되었는데, 손이 크던 시댁 여자들은 뭐든 많이많이. 그중에서도 독신이었던 손위 시누이가 합류를 하게라도 되면 그 규모는 내 예상을 초월했다. 싫은 내색이라도 하면 바로 분위기가 싸늘해 졌으니, 그녀가 오는 게 참 부담스러웠었다. 한 끼 맛나게 먹을 만큼 즐겁게 만들고 치웠다면 놀이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욕심으로 노동이 되었고, 그 결과는 냉동고의 한편을 오랫동안 차지하곤 했다.


옆에서는 목사님이 가래떡을 뽑고 있다. 곱게 빻아놓은 쌀가루를 시루에 넣고 찐 후, 녹즙기의 노즐을 통해 내보내니 쫀득쫀득한 떡볶이 떡으로 변해 나온다. 물에 내려앉은 떡을 건져내 꿀에 찍어, 송편을 만들고 있는 우리 입에 넣어주는데 정말 추석 기분이 솔솔 난다. 떡 뽑기가 끝나자 이왕 하는 김에 흰 살 생선을 갈아 다진 야채와 잘 섞어 기름에 튀기자 수제 어묵으로 변신. 

부엌에서는 창우 씨의 필살기인 닭 요리가 오븐에서 익어가고, 수업 때문에 조금 늦게 합류한 학섭 선생님은 전을 부친다. 마지막으로 합류한 신자 씨의 부대찌개 냄새로 입에 침이 고여 오고.

선교사님은 솔잎 대신 바나나 잎을 깔고, 찜통 가에 밀가루 반죽까지 둘러 쪄낸다. 따끈한 송편을 한 입 베어 무니 달콤하고 고소한 참깨향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식탁에 가득 차려진 음식들. 서로의 음식 솜씨를 칭찬하며 함께 하는 시간. 누군가가 맛있게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예전에 없이 긴 휴가로 인천공항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소식과 더불어, 여전히 거론되던 명절 증후군. 나의 추석 후기를 보며 한국의 지인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는데, 주부들은 여전히 명절이 부담이 되었고, 남편들은 아내에 대한 미안함으로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고 하소연했고,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대로 인사 아닌, 인사 듣는 고역으로 괴롭다고 전해왔다.

애써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고국에서 전해오는 인사로 추석인 걸 알뿐 그냥 지나쳤을  이곳의 명절이 한국에서의 명절보다 더 명절다웠던 건 자발적이고 자율적이었으며, 공평해서가 아니었을까?  

 

 2017.10.15

탄자니어에서 소피아



국민소환제(國民召還制), 어떻게 생각하는가? 



추석 연휴 중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가 들린다. 국회의원들을 파면할 수 있는 국민소환제도를 논하는 소리가 그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국회의원을 파면할 수 있는 제도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필자 외에도 수없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그럴 만큼 오늘 우리 사회에 국회의원에 대한 신뢰는 낮다. 


사실 국회의원 소환제기는 낯설지 않다. 그간 언론이나 세평을 논하는 자리에서 국회의 파행이나 의원들의 무능, 부정 등 부끄러운 실상이 드러날 때 마다 사회의 여러 경로에서 제기 되곤 했다. 그런데 이런 필요한 제기들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 제재와 관련하여 지금껏 아무런 제도나 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것은 좀 그렇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특정 사안에 대한 부정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면 어떤 형태로던 대안이 마련되는 것이 상례인데 그냥 지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국민들의 무관심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지만 국회의원들의 자질에 문제가 있다는 반증이기도 한다. 법제는 그들 집단 즉 국회의 권한이고 따라서  자기를 구속하는 제도를 만든다는 것은 대단한 각오를 가진 자들도 시행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국민 다수가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당사자들인 그들이 그런 의미 있는 일들을 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차제에 국민소환제에 대하여 알아보자. 국민소환(國民召喚, Recall)이란 국민파면(國民罷免) ·국민해직(國民解職)이라고도 한다. 이 제도는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되었으며 현재 스위스의 몇 개 자치주 외 몇 곳에서 채택하고 있다. 국회의원 등을 투표 방법으로 선출한 유권자들은 그의 해임도 같은 방법으로 할 수 있다는데 그 이론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요지를 말하면 유권자들이 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대표가 그 임무 수행에 부적격하거나 비리 등이 있을 경우 투표에 의하여 파면시키는 제도가 곧 국민소환제다. 그러나 오늘날 선거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상대적으로 국민들은 정치적 무관심에다 행정기능도 복잡 다양하게 전개됨에 따라 이 제도의 의미는 퇴색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제도권에 의한 국민소환제 제기가 있었다. 자유당 말기 무렵인 1950년대 친 정부 세력과 여당 국회의원들이 주축이 되어 이를 시행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오늘에 생각하는 국민소환제로서의 의미를 둘 수 없다. 당시 야당의원의 정부·여당에 대한 집요한 견제에 제동을 걸고자 제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과 같은 국회의원들의 무능이나 비정(秕政)에 대한 응징목적이 아니고 야당 의원들의 활동을 억제하기 위한 집권 세력(정부 측)의 반정부 세력 탄압이 목적이므로 가치를 둘 수 없다. 그러나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런 목적이지만 실정법에 의한 방법으로 야당을 억제하려했다는 사실이다. 이후의 군사쿠데타로 민주주의를 말살한 군사정권은 초법적 방법으로 야당 의원의 활동을 탄압하기 위한 일방적 법 시행과는 비교된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다.


우리나라는 건국 이후 국회의원 등 정치권력을 견제하는 국민소환 규정이 없었으나 1987년 6월 항쟁이 계기가 되어 점진적인 민주주의의 진전으로 이러한 요구는 힘을 얻기 시작하더니 2006년 5월 마침내 주민소환제 법률이 마련되어(법률 제7958호) 이듬해 7월부터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 법률은 지방자치단체의 장과 지방의회 의원을 대상으로 할 뿐 국회의원은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국회의원은 그들이 가진 법률 제정권을 앞세워 그 법률의 본래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 법제(法制)를 한 것이다. 당시에도 국민들의 대 국회의원 신뢰도가 부정적이었음에도 그들이 이토록 용감한(?) 행동을 한 것은 무슨 배경일까?


그들은, 일정 시간이 흐르고 나면 먹고 사는 일에 바빠 남 탓 할 겨를이 없는 국민들은 자기들 생활과 직접 관계가 없는 사안은 곧 잊어버리는, 자유주의 사회에 흔히 나타나는 망각의 법칙을 알고 있기에 그렇게 뻔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치꾼의 생존법칙은 불리한 것은 무시하거나 딴전을 피는 것이 유력한 방법인 것을 그들 정치선배의 행적에서 보고 배워 알고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되면서 갖게 되는 특권이 얼마나 대단한데 어떻게 쉽게 이를 잃을 수도 있는 일에 참여하려 하겠는가?


국회의원이 되면 갖게 되는 권한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대단하다. 면책특권과 불 체포 특권 같은 일반시민들은 가질 수 없는 권한을 비롯하여 경제와 사회 부문에서의 특권을 가지고 있다. 고액의 세비와 다수의 보좌관에다 넓은 사무실에 교통시설 사용 등 여러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민주주의를 채택한 다른 나라도 유사한 제도를 두고 있는 등 국회의원 의정활동을 지원하는 장치를 두고 있는 것은 낯설지 않다. 이러한 국회의원의 권한을 시비하고자 함이 아니다. 국회의원이 가지는 막중한 책임을 살필 때 그에 상당한 권한을 주는 것은 문제 삼을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로 삼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권한의 행사가 그 본래 취지에 부합하는가에 대한 공감을 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국회의원에게 면책특권이나 불 체포 특권을 부여한 것은 국회의원 고유의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게 하려 함이다. 막강한 집권세력의 권력에 대하여 정의롭게 대응함으로 헌법이 지향하는 가치를 수호하게 하려함이고, 경제적 사회적 특혜를 부여한 것은 다른 데 눈 돌리지 말고 오로지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 수행을 성실히 수행하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다. 


국가공동체가 각 통치 영역에 권한을 부여하고 그것의 권력화를 용인하는 것은 질서를 세우고 그것을 지켜나감으로 공동체의 평화와 번영을 도모하기 위함이므로 그 설치는 당위성을 갖는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오늘과 같은 문명의 발달은 그러한 바탕에서 비롯하였다고 이해한다. 다시 말하면 합리적 국가권력 체제는 그것이 미치는 공동체의 평화와 번영의 강력한 수단이 됨에 동의한다.


그렇듯이 국회의원들에게 부여된 특별한 권리는 국민적 동의에 의한 것인 만큼 합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국회의원들이 가지는 이러한 권리들은 오늘에 이르러 그들의 입신양명과 재산형성 목적으로 이용하는 등 반사회적 권력자로 만드는 역현상을 초래케 하여 결과적으로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헌법은 특권층의 존재를 부정한다(11조 ②). 다만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른 권한을 부여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헌법적 가치 수호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 관련자에게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고 국회의원의 면책특권 등은 그런 취지다.


국회의원의 권한은 이런 근거를 가지고 있는데 왜 문제를 제기하느냐는 반문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헌법은 국가 규정의 모법이자 근간이다. 그곳에서 규정하는 권리들은 그것 곧 헌법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하여 규정을 세웠는데 그것이 구성원 중 일부 특정인을 위한 목적으로 이용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고 곧 헌법에 위배된다 할 것이므로 위헌 행위다. 헌법가치 수호를 위하여 부여한 권한이 그것을 훼손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회는 유용한 정치 구성이다. 다른 방안도 있는지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이보다 더 유용한 선택은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그 구성원들이 구성 목적에 반하거나 부합하지 않는 행위를 할 때 대안이 필요하다. 물론 이들을 선택할 때 이러한 점이 유의되어야 하지만 선출자도 피선출자도 그 시스템 관리자도 인간인 만큼 오류를 배제하기 어렵다.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제도를 설치하자는 명분은 그래서 존재한다.(♣2017.10.14.)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장제모칼럼]  금천문화원 vs 금천문화재단



제목에서 누구나 쉽게 연상할 수 있는 것은 중복이다. 명칭에서 그 사업 영역의 유사함을 쉽게 연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제명(題名)으로 삼는 필자가 이 장에서 무엇을 쓰고자 하는가를 눈치 빠른 이들은 짐작을 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중복인 것 같아 참견을 참을 수가 없다. 하릴없는 논객이라 별 참견을 다한다는 핀잔을 각오한다.

참고할 것은, 「금천'문화원'(이하 ‘'문화원'’)」은 ‘지방문화원 진흥법’(법률 제10883호, 제4조)에 의거 설치된 공법 기관이다. 청사는 구청 예산에 의거 건립되었고 현재 ‘금천구시설관리공단’에서 관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금천문화재단(이하 ‘문화재단’)」은 민법 관련 규정(제3장 법인)에 의거 설립된 민법단체(재단법인)다. 두 문화관련 기관(단체)은 서로 다른 단체 정체성을 가지고 각각 독립하여 목적사업을 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일 수가 있다. 과연 그럴까? 두 기관(단체)의 목적, 구성 등을 알아보자.

'문화원'’은 “지역의 고유문화를 개발하고 보존하며 전승하기 위해 관련 법률에 의거 1999년 6월 22일 설립되었다. 향토사의 조사연구와 자료를 수집하고 금천문화지를 매년 발간하고 있으며 정월대보름 구민 척사대회, 금천단오민속축제, 금천한가위대축제와 같은 전통문화행사도 진행하고 있다. 또한, 데생, 한국화, 서양화 등의 수강생들의 작품을 모아 전시회를 개최, 주부백일장 등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외 노래교실, 민요, 전통무용, 풍물, 밸리댄스, 한국화, 서양화, 뎃생, 한글서예, 한문서예 등의 강좌가 있다.”(금천'문화원' 홈페이지 참고) 2015년 2월 제7대 원장(이종학)이 취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화재단’은 구청이 주도하여 2016년1월 재단 설립 T/F팀을 구성 용역 등 준비과정을 거쳐 2017년 3월부터 6월에 걸쳐 임원진과 직원들을 채용하는 등 준비를 하였고, 8월 1일 금천구 대강당에서 지역 주민들을 초치하여 설립을 선포하였다. 2017년 9월 현재 임직원은 재단 이사장(천호선), 대표이사(정재활) 외 이사 및 사무국 직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경영지원팀, 문화사업팀, 도서관운영팀 3팀 체제로 운영한다고 한다. 홍보물에 의하면, ▲우수예술향유 기반조성 ▲생활 속 문화예술 활성화 ▲문화거버넌스를 통한 지역문화진흥 ▲창의적 문화예술교육 실현 ▲지역거점화를 통한 열린 도서관 5개의 추진 과제를 설정, 세부 사업들을 실행할 계획이며, 그 일환에서 금천구의 4개 구립도서관과 ‘금나래아트홀·갤러리’, ‘금천마을예술창작소’ ‘어울샘’ 등을 운영한다. 

살펴 보건데 두 기관(단체)은 설립 배경이 다르고 조직 구성이나 운영행태에서도 차이가 보이지만 하는 일은 유사하다. 다른 점은 구청이 관리책임인 구립도서관을 ‘문화재단’이 관장하게 한 것이 '문화원'과의 차별이라면 차별이다. 그러나 사업목적은 ‘지역문화 진흥’인 것은 공통점인데 문화재단이 금나래아트홀·갤러리’를 관장하게 한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두 기관의 설치 목적은 ‘지역문화 진흥’이고 이는 ‘(민족)문화 창달’을 규정한 헌법 정신(제 9조)에 충실하고자 함이 궁극목적인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중복이라고 시비를 거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같은 목적을 가진 두 기관(단체)이 같은 지역에 있다하여 문제될 게 있는가?’라는 항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민간영역일 때의 경우이지 공공성이 요구되는 곳에서는 합당하지 않다. 동일 임무 영역에서 같은 목적을 가진 사무기구를 두 개 이상 두는 것은 중복이고 이를 피하는 것은 민간영역에서 조차 보편 사고로 받아들인다. 더욱이 국가나 공공영역에서는 그 사무에 중복을 피하는 것은 원칙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중복인 것을 알면서도 국가기관인 금천구청이 이런 사태(?)를 야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는 몇 가지 가정을 둘 수 있다.  첫째는 기존의 ‘문화원’이 본래 목적인 ‘지역문화 진흥’에 소극적이거나 그 수행 역량 문제를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목적사업 추진이 질량(質量) 면에서 충분하지 않아 주민 욕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데 따른 대안 강구와 같은 것이다. 달리 찾아보면, 현재에 제기되는 설립목적과 관련한 문제들 즉 ‘지역문화진흥’ 사업의 소극성은 시스템적 문제로 개선 기대를 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고육책으로도 볼 수 있다. 

둘째는 지역 지도자 군(群)의 문화에 대한 열망 등 신념 때문일 수가 있다. 평소 문화욕구가 강렬하고 지역공동체에 그것의 수요는 많은데 이를 충족할 현실 자원이 만족스럽지 않은데 따른 대안 강구로 보는 것이다. 이에는 서울시의 지역문화 진흥의 강렬한 의지가 있어 예산지원에 대한 확신도 ‘문화재단’ 설립에 한몫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세 번째는 현직 지도자를 포함한 정치세력들의 포석이다. 즉 지지세력 확대를 위한 일련의 행보로 보는 것이다. 이는 필자의 주관적 견해이지만 시기가 지방선거를 앞 둔 만큼 그 개연성을 잘라 부정하기가 어럽다. 정치세력 확대를 위해 활동하는 것을 잘못되었다 할 수는 없지만 만약 그런 지향이 조금이라도 개재되었다면 중복 명분은 어디에서도 찾지 못한다.

앞의 의견들은 가정(假定)임을 전제했다. 따라서 제기한 의견들은 허구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함에도 분명한 것은 중복은 합리성의 결여이고 공공영역에서의 그것은 더욱 그렇다. 새삼스런 이야기지만 공공 시스템에는 국민의 세금이 투여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두 기관(단체)의 속성상 관의 개입은 사실성을 가지므로 그에 따른 비용지출은 국고 의존 형이다. 쉽게 말하면 두 기관 모두 국민의 세금이 지속적으로 투여되는 시스템인 것이다. 유의점은, 비록 그 금액이 소액이고 상당 사유를 가진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공공성에서의 중복 면책 사유가 될 수 없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국고 사용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중복을 탓하고자 하는 것이다.

살펴보면 이런 빌미는 기존 기관인 '문화원'이 만들었다 할 수 있다. 같은 목적을 가진 다른 기관이 같은 지역에 있게 된 것은 기존의 기관이 지역주민의 문화 욕구 즉 “지역문화 진흥” 책무에 충실하지 못한데 대한 반사적 현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관이 앞장서서 중복을 하도록 나름의 명분을 갖게 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문화원'이 뭘 잘못하고 있다는 게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문화원’은 소요비용의 상당액이 (국고)보조금이고 그 공간은 자치구(금천구) 관장인 만큼 분명한 공공기관임을 상기시키고자 함이고, 본연의 임무의 궁색으로 중복 원인을 제공하였을 수도 있음을 말하고자 함이다. 만약 '문화원'이 주민들이 인정할 만큼 목적사업을 충실히 시행하고 있다면 지금과 같은 중복 명분은 누구도 공감하지 않을 것이다.

‘문화재단’은 그들에 의해 나열되고 있는 사업의 상당부분이 ‘문화원’과 겹치고 또 어떤 형태로던 국고 투입이 전제되는 만큼 같은 목적을 가진 ‘문화원’과의 중복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이는 ‘문화재단’과 그 설립을 주도하였고 향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관(官) 즉 금천구에 대한 지적으로이러한 비판에 대한 납득할만한 행보를 하라는 요구이다. 이 요구에 대한 당사자는  ‘문화재단’과 ‘금천구’에 국한하지 않는다. 즉 ‘문화원’도 같은 입장이어야 한다. 지역 문화진흥의 목적은 미리부터 가졌던 그의 책무가 아니었던가! 

기왕에 만들어진 구성이니 삼자가 서로 협의하여 운영의 묘를 기함으로 중복에 따른 주민들의 질타를 잠재울 수 있도록 유익한 문화 접근 기회들을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2017.9.14.)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말라위의 보석, 나도 그런 곳에서 살고 싶어라


말라위, 아니 아프리카에는 내가 ‘그들만의 섬’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자연이 빚어놓은 가장 아름다운 풍경. 다 같이 즐겨야 마땅할 공간에 높은 담장을 두르고, 빗장을 풀 수 있는 열쇠는 오직 돈인 곳.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스런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거부 반응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어디 아프리카뿐이랴. 사람이 사는 세상 어디에나 있지만, 아프리카에서는 피부색만큼이나 더 도드라져 보일뿐. 

그러나 그 가치를 모르면 황무지에 불과할, 아무도 탐내지 않을 땅을, 아이디어와 긴 시간, 노력만을 밑천으로 누구나 쉬어 갈 수 있는 값싸고 편안하면서 즐거운 명소로 다듬어 놓은 곳이 있다. 그러한 곳을 발견하는 일은 가난한 배낭 여행자에게 밤하늘별만큼이나 빛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은카타 베이로 가는 길목에서 중요한 일은 머물 곳을 찾는 것. 여행 전에 대충의 동선만 그리고 떠나온 까닭이다. 너무 많은 정보는 그 자체가 피로이기도 하지만, 현지인과의 대화 속에서 의외의 보물을 길어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요카 빌리지’란 이름으로 수렴이 되었다. 결이 고운 모래사장을 앞에 둔, 전망 좋은 마을이려니 했다. 산길로 난 좁은 길을 따라 터벅터벅 한참을 걸어가자, ‘마요카 빌리지’라고 적힌 대문이 보인다. 내 예상을 깨고, 잡목 사이로 방갈로 형식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하얀 얼굴에 죽은 깨가 귀여운 중년의 여인이, 들어서는 나를 보자 벌떡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케이트라고 해. 반가워.”

“나도 반가워. 소피아야.”


자신의 이름부터 먼저 대는 게스트 하우스 주인이라니, 무조건적인 친근감이 들었다. 방은 일주일분이 모두 예약이 되었고 오늘 하루, 딱 하나가 남았다며 머물겠느냐고 묻는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 아니라면, 하루라도 야생화를 닮은 이곳에 머물고 싶었다.

앞서 걷는 그녀의 뽀얀 맨발이 아슬아슬하다. 흙과 돌로 자연스레 만들어진 좁은 길이었으니 말이다. 방은 도리토리로 4인실, 공용 화장실과 샤워 실을 써야한단다. 사람들 속에서 계속 지내던 터라 혼자만의 공간을 원했는데... 내 표정을 읽었는지 일 인실 가격으로 혼자 쓰란다. 내가 부담할만한 수준이다.


아기자기 예쁜 호수를 배경으로 자리 잡은 카페. 그동안 배낭의 한편에 자리 잡고 무겁기만 했던 천덕꾸러기, 읽고 또 읽어도 헛갈리는 신들의 이름과 복잡한 족보만으로도 늘 처음 읽는 것 같은 책.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동무가 되어 준다. 

가끔 원숭이들이 뭐라도 얻어먹을 거 없나 들락거릴 뿐 조용하다. 책 사이로 저만치 케이트가 보인다. 여전히 그 뽀얀 맨발로, 해안가에 손님들이 부려 둔 요트를 어깨에 메고 끙끙대며 옮기고 있는 중이다. 몸을 아끼지 않는 저런 부지런함과 상냥함, 위험을 부담할 용기가 성공의 비밀이란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가 왜 이런 황무지를 굳이 택했을까, 그녀가 되어 상상의 날개를 펴고 싶어졌다. 원래는 길도 없는 맹지였다니 말이다. 어딘가 분명 그녀의 눈길을 끈, 아무나 발견 할 수 없는 매력을 감추고 있을 것이기에.  

호숫가에 까만 돌들이 물과 육지의 경계에 켜켜이 누워있다. 이끼 낀 돌들이 물빛을 더 투명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저거구나, 저것을 중심으로 놓고 이 땅을 조각하기로 한 거구나. 그리고 오랜 시간을 두고 공을 들였겠구나. 

뭐 특별하지는 않다. 메마르고 가파른 언덕에 꼭 필요한 공간만큼 평평하게 땅을 고른 후, 야영객을 위해서는 물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할 텐트를 허락하고, 가난한 배낭족을 위해서는 저렴한 도미토리를 짓고, 형편이 좋은 여행자를 위해서는 화장실이 딸린 객실도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집과 집 사이를 연결할, 한 사람이 겨우 걸어 갈만큼의 폭으로 길과 계단을 놓자, 남은 잡목 숲은 그대로 정원이 되었을 뿐. 특별하지 않기에 더 특별할 수밖에 없는 곳. 이런 ‘그들만의 섬’이라면 얼마든지 더 많아도 좋지 않을까?


요 며칠 최 영미 시인으로 인터넷이 달아올랐다. 집 때문에 고민하던 중, 호텔에서 살다 죽은 문필가에 생각이 미치며 기발한 발상을 한 것이다. 일 년 동안 호텔방을 사용하게 해 주면 그 호텔 홍보 대사가 되겠다는 것이었는데, 그 글 때문에 ‘갑질 논란’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나 역시 주거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으로, 소박하지만 이런 예쁜 공간을 보면 꿈을 꾸곤 했다. 원피스 한 두 벌로 일 년을 날 수 있고, 이불이 없어도 춥지 않은 따뜻한 나라에 이런 방 한 칸만 있으면 좋겠다고. 언감생심 호텔이랴! 

대한민국의 유명한 시인인 그녀가 한 몸 뉠 공간이 없어, 인터넷에 넋두리를 하면서 벌어진 해프닝이 씁쓸함을 넘어서 슬프기도 하지만, ‘갑질 논란’에 휩싸인 그녀가 한편으로는 부럽기만 한 이유다.




9월14일 소피아

[칼럼]진짜 하루 근무 시간은 무엇인가?



티브이 켜 놓고 출근 준비를 하다 인간 극장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들었다. 보통 사람들의 평범하고 특별한 이야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다. 잔잔하게 전개되는 생의 흐름에 잔잔하게 감동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번 주 사연은 강원도 원주에서 택시운전을 하면 9남매를 키우는 가정이다. 스치며 듣다가 귀에 확 들어오는 소리가 있다. 11명의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아버지 택시기사는 하루 ‘15시간의 근무’를 했다는 것이다. 방송을 보는 이들은 가족들을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구나 하겠지만 내 귀엔 ‘하루 15시간’라는 말만 꽂힌다. 


현재 서울시 택시 노사가 맺은 단협에 의하면 1일 근무는 6시간 40분이다. 실제 서울지역 택시는 12시간 맞교대 형식의 근무를 하고 있다. 그리고 법이 정한 월급제 대신 대부분은 사납금(규정된 액수를 회사에 입금하고 나머지 부분을 임금으로 가져가는 형태의 근무- 법으로는 금지된 불법 제도다.) 제도로 운영하고 있다. 불법을 편법으로 보이기 위해 택시회사 노사는 최저임금을 어기지 않는 부분에서 고정 기본급을 상정하는 소정근로시간을 정한다. 보통 주 5일제에서 토요일이 무급 휴일이면 209시간, 토요일이 유급 휴일이면 240시간이 소정근로시간으로 계산된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불가피하게 고정 기본급 즉 통상임금도 올라야 한다.

 

그런데 사용자들은 금액을 올리는 대신 상여금 수당 그리고 소정근로시간을 줄여 최저임금 인상을 무산시킨다. ‘최저시급×근로시간=고정급’으로 계산해 임금을 지급해야 하지만 택시 사용자들은 기존의 월 고정급 임금을 최저시급으로 나누어 나온 값을 소정근로시간이라 한 것이다. 기존 고정급을 최저시급으로 나누어 소정근로시간만 줄이면 임금 한 푼 올리지 않아도 불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의 마법이다. 사용자가 이런 요술을 부리게 한 것이 근로기준법 제58조(근로시간 계산의 특례) 조항이다. 제 1항 ‘사업장 밖에서 근로를 해서 근로시간을 산정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소정근로시간을 근로한 것으로 본다’ 제2항 ‘노동자 대표와의 서면 합의를 한 경우에는 그 합의에 정하는 시간을 그 업무의 수행에 통상 필요한 시간으로 본다’라는 규정을 악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노사관계는 이런 사용자의 주장에 투쟁 없이 동의하는 관계다. 사용자와 노조 대표자가 조합원들의 피땀을 공동으로 빠는 짓이다. 우리는 이런 노사관계를 ‘어용’이라 부른다. 특권과 반칙, 부정과 불법으로 유지되는 한국사회 자본 체제를 유지하게 만드는 적폐의 한 뿌리다. 이런 터무니없는 억지에 저항하는 것이 노조의 본연의 의무지만 그러면 바로 ‘과격, 불순, 귀족 노조’가 된다. 이런 말을 들어야 민주노조다. 하지만 민주노조를 유지하는 길의 끝은 해고다. 


금천에서도 한남상운 마을버스 노동자들이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를 요구해서 승리했다. 투쟁 1년이 지난 지금 현재 해고자만 세 명, 계약해지를 당한 이들이 몇 명, 그래서 조합원으로 현직에 근무하는 이가 단 한명 남았다. 옳은 말 당연한 요구를 했다는 것으로 직장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이런 악성의 노사관은 일제 강점기 식민지형, 유신독재, 그리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 신자유주의라는 반인간적인 시대가 범벅으로 만든 괴물이다. 인간의 최저한의 존엄성도 파괴하는 반인륜적 범죄다. 그런데 이에 대한 도덕적 사회적 부담은커녕 그걸 잘하면 능력자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검찰과 법원은 이 범죄가 합법하다고 면죄부를 준다. 인간의 존엄성의 파괴가 이윤의 확장이나 보전이고, 평화와 평등, 정의를 말하면 추방 배제가 되는 사회라는 점에서 참 일관되게 잘못된 사회라 헬 조선이다. 


실제 근무하는 15시간, 법이 규정하는 하루 8시간(주5일제면 하루 7.33시간), 그리고 택시 노사가 자기 식으로 규정한 하루 6시간, 최근엔 아예 2시간 30분이라는 소정근로시간, 이 차이가 우리 사회 빈곤과 차별의 실내용이다. 15시간 일을 시키면서 2시간 30분만 인정한다는 이 괴기한 비현실을 현실이라 하고 현실의 고통을 말하면 이기적이라는 하는 뒤집어진 사회 상식들.. 이것을 어찌 한단 말인가?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서울시에 대표적 대중교통수단이 지하철과 시내버스다. 그 중 최악의 막장은 마을버스다. 금천구의 한남 운수 마을버스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2017년 2월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1회 노선운행 후 10분 이상 휴게시간 보장, 운수종사자가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휴게실(편의시설) 마련 등 마을버스노동자들에게 작지만 최소한의 화장실만큼은 편히 갈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는 법안이 마련되었다. 그런데 이법이 발표되고 6개월이 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지역마을버스 134개 업체 (2016년 기준)는 이를 전혀 개선하지 않고 있다. 이 법은  현장에서 단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불법 편법에 대해 사용자도 아니고 서울시가 나서서 개정 여객법은 현실과 맞지 않아 국토부에 보완검토를 요청했다. 4월에 아예 국토부를 방문해 재개정을 요구했다. 서울시가 말이다. 


빈발하는 대중교통의 대형사고는 있는 법도 집행하지 못한 행정의 책임이 반이다. 그런데 전국에서 가장 민주적이고 혁신적이라 자처하는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 행정이 승객 안전을 위한 기사의 단 10분간의 휴식이 배 아파 한다. 삶을 비용으로 보고, 비용의 절감이 일자리의 추방이요 노동자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임용고시생들의 아픔을 보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아픔은 보지 않는다. 공부하는 것과 비정규직으로 불안한 노동을 하는 것, 둘 중에 누가 더 힘들고 아플까? 자영업자들의 박한 삶은 잘도 살피면서 그 사람들의 지휘 감독 속에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이들을 보지 않는다. 이렇게 맹목적인 시각으로 보는 단색의 세상에서 무지갯빛 현실은 결코 볼 수 없다. 나아가 현실을 직시하면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 이상주의자, 무능력자가 된다. 이 거꾸로 된 세상 거꾸로 된 생각들을 뒤집지 않는 한 적폐는 화장만 바꿀 뿐 영원하다. 그 함정과 늪에서 문재인도 박원순도 자유롭지 않다. 그것이 헬조선의 미래를 보여주는 암울함이자 보이지 않는 적폐의 고향이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소장

다당제가 어떤가



지난 선거(2016년) 그러니까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원내 교섭단체를 가지는 정당이 세 개가 출현함으로 그동안 꾸준히 이어오던 우리 국회의 양당제가 무너졌다. 그런가 하면 금년(2017년)에는 집권 여당이던 ‘새누리당’이 대통령의 탄핵사태로 분당이 되어  4+1 정당구도가 되었다. 즉 원내 교섭단체를 가진 정당 4개와 정의당 등 원내 의석을 가진 5개 정당으로 명실상부한 다당제 구도가 된 것이다. 제헌에서부터 최근에 이르기 까지 일부 기간을 제외한  상당 시간을 대한민국의 의회는 양당체계로 이어왔다. 긴 시간 양당제로 지내온 우리 정치판에서 다당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의회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政黨, political parties)의 존재 의미를 알아보자.





정당이란 의회정치를 전제로 공통의 가치체계에 합의하여 정치권력의 획득ㆍ유지를 목적으로 결집한 정치세력들의 집합체이다. 그러나 이는 이론적 배경일 뿐 현실은 여러 가정의 설정이 풍부한 것이 오늘의 정당 실태이고 특히 우리나라의 정당이 그렇다. 다시 말하면 정치권력의 획득 목적이 원류인 것은 다름이 없지만 그 구성체 즉 정당이 표방하는 가치체계는 가변성을 넘어 거의 무질서이다, 곧 각자의 이해에 따라 이합집산을 밥 먹듯 하는가 하면 자기 입지 확보를 위한 선택과 집중이 존재하는 곳, 이념도 사상도 없는 이익 추구가 지상목표인 기회주의 무리들의 집합이 우리의 정당행태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집권을 위해서라면 구성원의 조건도 강령도 추구하는 이상도 필요 없는 곳이 그곳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 정치판에는 이런 부류의 정치세력들이 많다는 일반론이다.



우리의 정당모습이 그렇다 하여 정당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 의회 민주주의란 곧 대의정치(代議政治)이고 그 구성 요소인 (국회)의원의 합리적 배출은 현재로서는 정당보다 나은 수단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양성의 시대인 오늘의 우리사회에서 국회의원은 정치권력의 진수(眞髓)다. 상식을 가진 보통사람들이라면 선망하는 지위인 것이다. 의회민주주의 체제가 옹호되는 한 이러한 현상은 지속될 것이므로 의원이 되고자 하는 자들의 정파(政派)에 대한 집착은 끊임없다. 


이와 같이 대의제(代議制) 곧 의회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국회의원의 위치는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일자리이자 명예욕을 한껏 충족할 수 있는 지위이다. 나라에 따른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들에게는 권위가 주어지고 그것은 객관성 곧 사회적 동의가 부여된다. 이러한 지위인 만큼 국회의원 지망자들은 항상 넘쳐나고 정당은 목적 달성의   수단이 되는 만큼 정당은 존재 가치를 풍부하게 가지게 된다. 그렇듯 정당이 없는 의회민주주의는 생각하기 어렵다. 정당은 국민과 권력의 연결 고리이자 권력의 관찰자이며, 의회정치의 실체적 구성체이다. ‘정당은 현대정치의 생명이다’, ‘현대정치의 특징은 정당체제이다’라는 말을 하는 것도 이러한 배경일 것이다. 


그러면 의회 민주주의의 취지에 합당한 정당체계는 어떤 것일까? 정당이 많은 것이 좋은가 그 반대인가 즉 최근 화두로 등장하고 있는 다당(多黨) 체계가 좋은가 아니면 우리에게 익숙한 양당(兩黨)체제가 좋은가를 묻는 것이다. 사람들의 정치의식에 따라 선호가 다를 수 있겠지만 우리 정치 생태계는 양당제 성장 환경인 것 같다. 정치권력들도 국민들도 그쪽이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는 뜻이다. 현재의 정치권력들은 기왕에 가진 권리를 잃을 수도 있는 불확실성에 빠지기 싫은 게고 국민들은 정치에 별 관심이 없어 새로운 제도에 대한 흥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일 게다. 사정은 다르지만 공통점은 둘다 변화에 흥미를 두지 않는 것을 이유로 본다. 국민들이야 기존 양당체계 외의 정보가 없고 관심도도 낮아서 그렇다고 이해를 해도 되지만 정치세력들은 다르다. 그들은 기존의 양당 체계를 선호한다. 즉 변화를 수용할 의사가 없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현실 정치권력들은 정치판도에 변화가 있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양당제 체계 또는 그것의 선호를 나쁘다거나 잘못되었다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정치풍토가 그렇다는 것이고 그것은 지금까지의 그들에 의한 정치 행태를 볼 때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하였는가 하면 민주주의의 순수성조차도 흐렸다는데 대한 불만을 말하고자 함이다. 물론 이러한 행태가 양당제라는 정치 환경으로 인한 것이라고 잘라서 말하지는 않겠지만 의회 민주주의 본질에 부합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요지를 말하면, 우리정치 환경에서 지금에 이르도록 이어온 양당제는 적어도 국회의원의 자질 변화가 없는 한 바람직하지 않다. 


양당제를 살펴보자. 

양당제란 세력이 비슷한 그러나 이념적 배경이나 사상을 달리하는 두개의 정당이 선거를 통하여 승리하는 측이 계속 또는 교대로 집권하는 형태다. 물론 이러한 체계에서도 정당은 3개 이상이 있을 수 있고 함께 정권획득 경쟁을 벌이지만 실제 정권 획득 정당은 압도걱 우위를 점한 두개인 경우로서 지금까지의 우리 정치구도도 이런 형태로 이어져 왔다. 


양당제는 의회와 행정부에서 국정 심의 등 국가의 중요사안을 양당 간에 결정과정을 가지므로 국가정책 심의와 결정을 위한 과정의 단순화 등 효율성을 가진다는 장점이 있다. 더욱이 집권당이 과반수 의석을 가진 경우 그들 이상대로 내각 구성을 할 수 있고 각종 국가정책 결정을 신속하게 또한 지속적으로 추진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국민의 선택이 두개의 정당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다음 정권 담당 정당의 선택이 용이하여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단점도 있다 기존 정치체제 유지에 기반을 두고 있어 집권당의 장기 집권이 용이하고 특히 과반수 의원을 가지는 경우 정부는 정책의 독주를 할 수 있는가 하면 의회의 견제기능조차 무력화 시킬 수 있다. 더욱 우려하는 것은 의원 선택에 한계를 가지는 것은 치명적 단점이다. 즉 최다 득표자 1명만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양당 후보중에서 선출되고 이러한 운영으로 인적자원의 선순환이 되지 않아 의원의 자질문제를 야기한다. 


여기서 경계하여야 할 게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당연시되는 엽관주의(獵官主義, Spoils system) 폐해가 그것이다. 선거에서의 승리가 선(善)인 정치판에서 공헌자에 대한 논공행상은 자연스럽고 이러한 운영은 아무리 장치를 두어도 옥석가리기가 어렵다. 결과적으로 기회주의자들에게 잔치 상을 차려주는 형국이 되고 그것은 정치판의 건강을 좀먹게 한다. 오죽했으면 “국회선진화법”같은 우스꽝스런 법이 만들어졌겠는가? 정리를 하면,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것이 양당 체계이다.


이런 현실에서 최근에 이루어진 다당제는 신선한 희망을 가지게 한다. 물론 그것의 효율성 문제를 간과해서도 안 되지만 지금까지의 우리 정치판의 적폐(積弊)를 볼 때 효과적 대안이라는 일각의 주장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변화가 필요한 우리 정치판에 시의적절한 처방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싶다. 

새 정부가 구성되고 희망적 신호가 보인다. 과거를 반성하며 필요한 조치들이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 한편 걱정도 있다. 양당제를 선호하고 그래서 인위적 정계개편 의지를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변화가 두려운 것은 그들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야 할 게 있다. 국민들이 선택한 다당제를 지키는 것이 그것이다. 다양성의 시대가 아닌가? 


(♣2017.08.30.)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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