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자니아 통신] 낼손은 중국 유학중




수업 시간에 맞춰 본관 건물의 계단을 오르는데, 몇몇의 젊은이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늘 그렇듯이 눈인사를 하고 지나치려는데, 익숙한 얼굴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달려든다.  


“야! 낼손 아니야? 이게 얼마만이야? 방학했나보네.”

“응.”

“멋있어졌는걸.”


육 개월 전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동료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이곳에 부임해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강사 휴게실에서였다. 그는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다짜고짜 한국어를 가르쳐 달란다. 그동안도 비슷한 사람들이 종종 있었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반을 만들어 오면 수업을 해주겠다고 건성으로 받아 넘겼다. 반을 만들만큼의 열정이 있다면 시작해 봐도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그런 사람은 없었고, 그 역시 그 범주를 뛰어넘지 않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저녁, SNS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룹 채팅방을 만들고 나를 초대한 그들은 열띤 토론을 시작했다. 몇 시간 만에 내가 제시한 하한선을 훨씬 웃도는 인원을 모으고 스스로 수업 일정을 조율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만난 아프리카인 중에서 가장 추진력이 뛰어나고 열정적인 사람을 꼽으라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연코 넬손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자그마치 네 개의 나라로부터 장학금을 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어느 나라로 가야 할까 고민하더니, 커져가는 중국의 영향력을 고려해서 그곳을 선택했다고 말하며 떠났다. 그 후, 간간이 소식을 전해오다 한동안 뜸하더니 방학을 맞이해 돌아온 것이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그의 이야기도 들을 겸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할 말이 오죽 많겠는가! 그는 스마트폰에 담긴 동영상을 재생시키는 것으로 말문을 연다. 장기 자랑을 하는 장면인데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저마다의 재치를 뽐내고 있었다. 그 중에서 풋살구 냄새가 날듯 한, 앳된 한국 아가씨를 가리키며 짝꿍이란다. 평범한 외모지만 수줍어하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다며 은근한 관심을 보인다. 이십대 후반, 독신인 그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어 기숙사 베란다에 쌓인 눈을 보여 준다. 처음 가까이에서 눈을 본 것이라고 했다. 여행 중 찍었다는, 연탄난로에 언 손을 녹이던 장면 역시 신기해 죽겠다는 표정이다. 일 년 내내 가을 날씨 같은 이곳에서 살던 그에게, 그렇게 춥고 그렇게 더울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요즘 그에게 가장 신나는 일은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스카웃 제의. 아프리카에 진출한 중국 기업들이 대사관을 통해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를 한다고 했다. 그를 원하는 곳이 늘어날수록 몸값도 치솟고 있단다. 말하는 내내 살짝 상기된 모습이 귀엽기까지 하다. 하지만 다국적 기업의 리더가 꿈인 그를 묶어 둘만큼의 조건을 제시하는 기업은 없어 보인다. 우선 일 년 중국어를 공부한 후에, 이미 확보해 놓은 이탈리아로 건너가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니 말이다. 

 

얼마 전 동료 강사가 내게 물었다. 한국으로 보낸 편지가 며칠이면 도착하느냐고. 한국에 애인이라도 숨겨둔 것이냐며 짐짓 농담으로 받았는데, 원서를 내기 위해서였다. 주소를 보니 지방대학이다. 국비장학생 모집에 오프라인으로만 서류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쯤이면 결과가 나왔을법한데 아무 말이 없는 걸보면 결과가 좋지 않았나보다. 공연히 내가 그를 탈락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미안한 마음이다. 

대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치고 외국유학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영어 강사인 나의 친구 로엘 역시 유학을 꿈꾼다. 그러나 장학금을 받는 것도, 자비로 유학을 떠나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 이곳의 교육자들에게 다양한 국비 유학 기회가 많이 주어졌으면 좋겠다. 



2018.04.08

 탄자니아에서 소파아

대안이 없는 채로 ‘용서’는 불가하다.


이미 일어난 성폭력 이후로, 수를 셀 수없는 2차 가해까지 발생한 상황에서 ‘죄송하다.’ 한 마디가 쉬이 진심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물론 말 뿐일지언정 사과는 당연히 중요하고 또 면피와 변명용 말조차도 받는 사람에 따라서는 없느니보다 나을지도 모르겠다. 사과마저 없이 스스로 목숨은 끊은 자들은 피해자의 피해를 법적으로 가릴 수조차 없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얼마나 이해하고 반성하는지 전혀 가늠할 수조차 없는, 이제 겨우 한 달도 안 된 시점에서 그 사과가 양심이니까 이제 되도록 믿고 이제 그만하자는 것은 현재 상황에서 또 다른 폭력이나 다름없다. 근본적인 대책은커녕, 상처에 대한 치유 방안도 전혀 없으면서 단지 그저 이 나라의 가정과 사회의 평화를 위해 망각을 유도하는 이 파렴치한 ‘양반 의식’에 대한민국의 모든 폭력이 항상 빠짐없이 그 뒤로 숨었다. 때와 시기에 전혀 맞지 않는데도 아주 조심스럽고 신중한 이 ‘용서와 화해’에 대한 제안이 바로 온갖 도덕적 가치로 점철된 평화주의의 얼굴을 했지만 실상은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폭력의 옹호론이자 적폐이다. 


바로 그 사고방식이 장자연을 죽이고 그간 모든 피해자들을 삶의 목소리를 죽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진정으로 깊이 공감하고 이해한다면 적어도 현 상황에서 ‘얘들아, 이제 그만 싸우자~’란 말은 상식적으로 결코 꺼낼 수도 없는 말이다. 몇 번을 부끄럽다, 반성한다고 시작하며 글을 써도 이는 명확하게 ‘3차 가해’이다. 차라리 진정으로 감내하고 묵묵히 행동하겠다는 의지라도 보였으면 모를까.


법적으로 처벌받는 성폭력이든 그렇지 않은 성폭력이든 성폭력은 언제나 한 집단 내부에서 사회적 관계로부터 매장당할 위협을 포함하는 권력의 강제성 속에서 발생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두가 사회의 안녕과 평화를 추구하는 와중에 ‘용서하고 화해하란 말’을 거부하는 것도 이 위협에 포함된다.)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당할 때 단순히 하지 말라고, 거부의사만 표시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겪어보지 않은 자들의 심각한 착각이다. 예쁜 여자만 보면 마음이 혹해서 그게 성폭력으로 이어지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는,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의 가해자들에게는 사실 거절을 넘어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혐오와 분노를 표출해야한다. 그런데 이는 실제로 피해자에게 있어서는, 보이지 않는 칼을 든 범죄자에 대해 사회적 생명과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저항이나 다름없다. 피해 순간에 대다수의 피해자들은 자신에게 그간에는 우호적으로 대해준 가해자는 물론 주변 모든 사람들과 관계가 적대시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그 가해행위를 ‘내가 참으면 모두가 괜찮을 일, 내가 상대의 마음을 좋게 받아들이면 되는 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를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배려라고 여기며 자신의 피해를 드러내지 않고 감내한 결과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와 분노로 이어질 거란 건 생각도 못한 채 무수한 피해가 그렇게 쌓여만 간다. 


심지어 당하고 나서 신고를 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내가 속한 직장에서 퇴출당할 위험은 당연지사요, 사건의 해결 과정에서 나 자신과 가해자의 사적 관계에 치중하는 정신 나간 내부 분위기는 피해자들의 입뿐만 아니라 숨통마저 틀어막는다. 자신의 자아실현에 대한 모든 준비 과정과 사회경제적 조건은 물론이요, 지난 모든 삶까지 모두 내던져야 말할 수 있었던 피해자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현 상황에서 가해자들이 억울할지도 모른다느니, 가해자들 명예도 소중하다느니 같은 말은 피해자들이 어떤 마음과 어떤 상태로 지냈는지 본질은커녕 전혀 고민조차도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사실 이 미투 운동에서 참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게 있다. 아무도 진정한 책임자와 해결 방안을 전혀 논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이 그 동안 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단순히 가해자가 엄청 큰 권력을 가져서가 아니다. 우리 직장의, 우리 사무실의, 우리 학교의, 우리 조직의 무조건적인 안녕과 평화를 추구하면서 문제제기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한 책임자가 누구인가를 봐야한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이런 책임자들은 자신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가만히 있으면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침묵과 눈치 보기나 하다가 사안이 종료될 거란 걸 뻔히 알고 있다. 그렇게 피해자를 점점 더 깊은 좌절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가해자는 대놓고 감싸는 비이성적인 상황을 모두 용인된다. 

‘우리 중엔 그런 사건이 있을 리가 없다’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가져왔던, 피해가 발생한 모든 집단 내 책임자들의 방관과 나태함과 무지함에서 비롯된 무대응, 무대책이 그렇게 사람 한 명이 아니라 무수한 이들에게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씻지 못할 상처를 남긴다. 


그 책임자들의 앞잡이를 자처하면서, 나도 먹고 살아야 되니까, 사정이 안 좋으니까, 괜히 문제 커져서 좋을 게 없다며 틀어막는 입이 피해자의 입인지, 가해자들의 입인지 가리지도 못하는 비겁한 사람들은 그 다음이다. 무엇보다 그게 스스로가 아닌지를 돌아봐야 한다. 지금까지 그 자기 살기도 바쁘다는 외면과 무관심이 바로 2차, 3차 가해였으며 가해자만큼이나 피해자에게 지대한 상처를 주었음을 뼈저리게 반성해야하는 것이다.


박새솜


본 글은  167호 장제모칼럼의 '미투,  그리고 용서'에 대한 

박새솜 씨 개인의  반박글입니다.


[장제모 칼럼] 반성과 참회 그리고 보속(補贖)




‘미투’ 열풍으로 얼룩지고 있는 이 세태에 필자는 ‘용서’가 필요한 것을 피력한 바 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정말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 수 있는 것’은 어렵고 그래서 부끄러운 행위 곧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는 보통사람의 일상으로 이해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것은 잘못은 잘못으로 인식을 해야 하고 잘못이 있다면 그에 따른 필요한 행위를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잘못을 했다면 사실대로 인정(반성)하고 진정한 참회와 함께 이를 갚는 후속 행위를 해야 한다. 그 잘못으로 인해 누군가에 상처를 주었다면 더욱 그렇다.

잘못을 저질렀지만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은 그 잘못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어도 그로서 그 잘못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최소한의 위안을 줄 수 있는가 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제3자나 피해 당사자에게까지도 아름답게 이해될 수 있다. 그렇듯 반성을 하고 그에 합당한 행위를 하는 것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다. 죄를 지었다고 자책에 빠져 있지 말고 스스로 반성하고 참회하는 모습을 보이고 이를 행동하는 행위 곧 보속(補贖, 죄로 인한 나쁜 결과를 보상하는 일)을 함으로 참회는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이치는 이에 대한 교훈을 말함일 게다.

가톨릭교회에는 ‘고해성사(告解聖事)’라는 제도가 있다. 신자들이 일상에서 죄를 지었다면 그것을 사제에게 고백하는 것으로 반성과 참회를 동시에 행동하게 하며 이에는 반드시 보속(補贖, paenitentia)이라는 과정이 요구되고 그것을 수행함으로 이 성사는 완성되는데 그 취지는 유의 할만하다. 가톨릭교회의 고해성사 찬사를 늘어놓고자 함이 아니다. 필자는 가톨릭 신자지만 개인적으로 이 제도에 비판적이다. 다만 그 취지의 긍정성을 말함인데 요지는 자기의 죄를 알고 진정한 반성과 함께 그것을 갚는 행위를 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참회라고 보는 것이다.

사람들이 지을 수 있는 죄를 다 열거하는 것은 대추나무에 열린 대추 수를  세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달리 말하면 죄의 종류가 많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 연루되기 쉽다는 것, 즉 죄를 짓지 않고 세상을 사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그렇듯 죄에 빠지기가 쉬운 세상에 사는 우리들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죄를 짓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죄를 짓고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에 따른 대응은 사람에 따라 가지각색이다. 반성은커녕 도리어 문제를 제기하는 피해자나 제 삼자에게 공격적 자세로 자기 옹호를 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반성은 하지만 그 이상의 행위를 하지 않는 이가 있고, 통렬한 자기반성과 함께 그에 따른 응분의 책임을 지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이 유사한 행위 즉 죄를 짓고도 그것을 감추려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것을 갚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 등 갖가지 유형을 볼 수 있다. 과연 다양성이 존재하는 사회가 오늘 우리사회의 현상이다! 

우리가 상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죄를 지었고 그것을 자기 이성으로 판단을 하였다면 가능한데로 빨리 반성과 함께 그것을 갚는 순서를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인류가 역사를 기록하던 시간에서 시작해 오늘에 이르도록 이른바 도덕과 윤리로 이해되고 있고 그것을 양심적 가치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질서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망라하는 사회 보편 질서로, 사람들은 이를 지킴으로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명분을 구하게 된다.

그런데 죄를 진 자가 그가 속한 사회의 법질서의 판단에 의해 범법(犯法)이 인정되었지만 이에 불응하는가 하면 적반하장 식의 주장을 일삼는 일을 보게 된다. 자기방어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는 사안이지만 적어도 그 사회 공동체가 합의한 법질서에 의한 판단이라면 그것 즉 자기방어의 정당성은 무조건적 인정은 곤란하다. 물론 실정법에 따른 판단이라 하여 그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실이라 하기는 그렇지만 정의와 민주주의가 숨 쉬고 법치가 살아있는 공동체의 법질서에 의한 결정이라면 그 결정의 신뢰성은 인정되어야 한다.

탄핵으로 파면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일심 공판에서 법원은 징역 24년에, 벌금 180억원을 선고하였다. 이와 같은 중형의 근거는 대통령으로서의 헌법적 책임을 방기(放棄)하고 국정질서를 무너뜨렸으며, 재벌들을 압박하여 거액의 뇌물을 수수하였는가 하면 특정인의 인권을 유린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용납되어서는 안 될 행위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는 증거가 명백한데도 부인으로 일관하는가 하면  재판을 거부하는 비겁함을 보였다. 대통령까지 지냈던 분이 세상이 다 알고 자신도 수긍되는 범죄를 저질러 놓고도 반성하지 않는 모습은 참 사납다, 더욱이 이를 심판하는 국가질서 유지 보루인 법원의 출석요구를 거부하는 것은 그가 전직 대통령인가에 대한 의문보다는 과연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공동체의 일원인가를 의심케 한다. 

범죄자가 불리하다 하여 재판을 거부하는 것은 자기방어를 위한 한 방법으로 볼 수 있지만 대통령까지 지낸 분이 상당한 이유 없이 그와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모양이 좋지 않다. 그것으로 자존심을 지키고 반사적으로 지지자들에게 연민을 더 갖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다른 국민에게는 혐오의 감정만 더하는가하면 스스로 불명예의 너울만 두껍게 할 뿐이다. 그가 인식해야 할 것은 아직도 그의 죄과에 따른 응보는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보도를 보면 아직도 그에게 물어야 할 책임이 더 있고 그것은 앞의 결정보다 더 무겁다고 한다. 

또 다른 대상이 있는데 역시 권력을 앞세운 범죄혐의로 구속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 법원은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발부하면서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이 인정 된다"고 판시하였다. "범죄의 많은 부분에 대하여 소명이 있고, 피의자의 지위, 범죄의 중대성 및 이 사건 수사과정에 나타난 정황에 비추어 볼 때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다"며 영장발부 사유를 밝혔다. 구속영장청구 이유를 보면 ,그의 혐의는 뇌물수수, 횡령, 조세포탈, 직권남용 등 14개나 된다. 그럼에도 그는 박 전 대통령처럼 죄과를 부인하는 등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하면 재판정에도 나오기를 거부하고 있다. 형사피의자가 그의 죄과를 따지는 재판을 거부하는 것은 실정법을 부정하는 행위이고 이는 국법을 무시하겠다는 것으로 오만함의 극치다. 스스로 헌법 보위의 책무를 지겠다고 대통령 취임 시 선서를 했던 당사자로서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국가의 최고 지도자는 보통사람과는 차별이 있어야 한다. 사람됨은 물론 고도의 도덕성과 국가와 국민을 생각하는 지도자적 자질을 갖추는 등 국가 최고 지도자로의 면모를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국가지도자는 많지 않는데 특별히 눈에 띄는 분이 있다. 앞의 우리의 두 지도자의 경우와 다른 사례라 비교하기는 그렇지만 국가지도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이가 있는데 전 독일 수상이었던 빌리 브란트가 그 분이다. 그는 독일 수상 역임 당시 자기가 범한 죄도 아닌데도 통절한 반성의 모습을 보임으로 세계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1970년 12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태인 추모비 앞에 헌화하고 비에 젖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다. 그는 독일이 유태인에게 행한 비인간적 행위에 독일을 대표하여 사죄를 하고 필요한 후속조치를 하였다. 

그는 국민에게 봉사하는 것은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와 국민의 자존심을 드높이는 일이야 말로 진정한 국가지도자의 덕목으로 본 것으로 이해한다. 오늘의 문명사회에서 국가지도자의 모습은 이런 분일 것이다. 그런데 앞의 우리의 두 지도자는 어떠한가? 그들은 국민을 실망시킨 것에 그치지 않고 국가와 국민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았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다시는 이와 같은 지도자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2018.4.10.)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기고] 만18세에 선거권!



<이미지출처 sbs홈페이지>



저는 만 18세 선거권에 대하여 찬성합니다. 선거권을 찬성하는 이유는 첫째,OECD 국가 중 선거권이 만 19세인 곳은 우리나라 밖에 없을뿐더러 만 18세는 병역, 납세, 운전면허, 혼인, 공무원 시험 등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일들도 모두 한 나라의 국민으로 충분히 좋은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허용한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학교를 다니고 많은 것을 배우는 나이인 만큼 선거를 하기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고 학교에서도 선거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에 장난으로 생각하지 않고 신중히 선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번째로는 청소년들도 소리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14년 4월16일 300여명이 사망하여 큰 비극을 가져왔던 세월호 사건은 촛불집회로 많은 사람들을 일으키게 되었고 그 중엔 청소년도 대다수 였습니다. 또한 특성화고등학생 권리 연합회 추진위원회에서 특성화고 학생들의 권리시위를 할 만큼 청소년들은 많은 것을 해내고 있습니다.

만18세 선거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청소년들은 정치에 대해 모른다고, 학업에 지장이 갈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월호에는 고등학생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당시 대통령은 성인들이 선택하고 뽑은 사람이였습니다. 만 18세와 만19세. 1년 동안 정치지식의 차이가 크면 얼마나 클까요? 이 나라의 미래는 청소년이라고 합니다. 나라의 미래이자 1년 후면 성인이 될 청소년의 선택권이 들어있는 사회에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만18세에 선거권이 주어지길 바랍니다


동일여자상업고등학교

신성애



[칼럼]늦은 밤에 다니지 않아야 하는 이는 누구인가?



간통이라는 죄가 있었다. 이 죄를 적용할 때나 폐지할 때나 남성 그리고 노인층 조금 더 나가면 이른바 보수 기독교계가 반대를 했다. 간통죄가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1905년이다. 대한제국 형법은 기혼여성이 간통한 경우 해당 여성과 그 상간자(相姦者)를 6월 이상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하지만 당시 처벌 대상은 기혼여성만 이었다. 이후 1953년 남녀 모두 처벌 대상이 되는 간통죄가 만들어졌다. 간통죄를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부인의 간통만을 처벌하는 불평등 주의와 남편에 축첩 관행을 용인하는 차별주의에 대한 단절이다. 그래서 바뀐 것들을 보면 서얼의 폐지를 비롯해 동성동본불혼제도 폐지, 소유 불분명한 부부재산에 대한 부부의 공유, 이혼 배우자의 재산분배청구권, 협의이혼제도의 합리화, 부모의 친권공동행사, 적모서자관계와 계모자관계의 시정, 상속제도의 합리화, 이혼 및 사별 여성의 재혼금지조항 폐지 등 가족관계의 현대적 개선이 있었다. . 


하지만 시대가 발전하고 변하면서 여성의 권익을 신장시켰던 간통죄는 다시 여성들의 권익에 족쇄가 됐다. 간통의 문제가 형사적인 문제인지 사생활의 영역으로 문제가 있다면 민사적인 문제인지, 그것에 대한 통제가 양심과 관계에 대한 책임인지 국가의 역할인지에 대한 무수한 논쟁을 불러왔다. 결과적으로 간통죄는 세계적 흐름에도 맞지 않고, 여성에게 불리한 차별과 부담을 가중시키는 통로가 되었기 때문에 폐지가 된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통해 법의 사회적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절대적인 법이란 없다는 것이다. 무수한 많은 변화와 관계 속에서 이전에는 순기능을 하였지만 이제는 역기능이 된 것이 많다. 이에 대한 사회적으로 약자나 소수자의 입장에서 권익을 넓히는 것이 진보적인 입장이 되고 현실을 고수하려 하면 보수적 입장이 된다.  


간통죄를 도입할 때도 간통죄를 폐지할 때도 보수적 입장을 가진 이들은 가족의 보호였다. 간통죄가 도입돼도 간통죄가 없어져도 세상이 개판이 될 것이라 말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족쇄를 풀은 여성들의 권리는 ‘미투운동’이라는 새로운 길을 열어젖히고 있다. 물론 그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메갈리아 논쟁에서 보듯 상처투성이 전진의 길이다. 대놓고 공격을 가해 직접적인 상처를 주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그 아타(我他)의 색이 선명하며 공격도 방어도 혼란스럽지 않다. 문제는 변화 자체에 대해 적대시하는 감정과 행위는 극단의 행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로부터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고’ ‘화해와 용서’가 필요하다고 이들이 있다. 참 좋은 말이지만 이것이 순서와 방향이 뒤틀리면 가해와 피해가 뒤집히는 참사를 만난다. 대표적인 경우가 한일위안부(일본군성노예)에 대한 일본 아베 정부의 적반하장이다. 가해자가 화해와 용서와 미래를 이야기하다 못해 이제 불가역적으로 논의조차 하지 말자는 말을 하는 지경이니 말이다. 선의가 악의가 될 수 있는 대부분의 5경우는 서 있는 곳, 그곳이 어디인지 모를 때 발생한다.         

 

어느 학교 캠퍼스에서 야밤에 강간 성폭력이 발생했다. 이에 대해 학교당국은 순찰을 강화하고 각종 경계를 챙기면서 여성들의 늦은 밤에 홀로 다니지 말 것을 홍보했다. 소중한 나를 내가 먼저 지키자는 것이었다. 다들 짐승 같은 범인을 욕하면서 신속하게 대처를 한 학교당국을 칭찬했다. 그 중 하나가 여성 기숙사에 대해 경계 강화와 함께 밤 열시 이후의 출입을 관리한 조치였다. 대다수의 여성 기숙사의 학생들은 학교당국의 보호 조치에 안심하며 순응했다. 다시 세상을 평화로워 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여성 기숙사에 있던 한 여성주의자가 대자보로 이의를 제기했다. 


“이상하다. 잘못됐다. 범죄는 남자가 저질렀는데 왜 피해자인 여성에 대해 절제와 조심과 통제를 가하는가? 여성이 혼자 출입하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의 출입을 제어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폭력의 원인을 막아야지 왜 폭력의 피해자들을 관리하는가? 과연 타당한가?” 과연 누가 한밤중에 출입을 자제해야 하는가? 


우리는 일상에서 많은 것을 포기한다. 그런데 그것은 주로 힘에 대한 굴종이다. 그 힘이 사람의 생존과 연결될 때 그 위력은 말도 못하게 커진다. 대표적인 것이 ‘남성의 사회적 진화의 지체에 의한 어떤 폭력성, 또는 야만성에 대해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포기가 있다. 예를 들면 수컷들의 ‘성욕’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동물적 본능과 사람으로 본성을 혼동한다. 그래서 식욕 색욕 등의 본능을 사회 문화적으로 절제하는 것에서 ‘짐승과 다른 인간으로서 정체성’이 만들어 진다. 아니면 그것이 ‘야만 = 짐승’의 상태다. ‘야만 = 인간적 존엄의 부재’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미친개를 그냥 방관하는 것과 같다. 내가 물리지 않아도 누군간 물린다, 그럼으로 대처는 당연히 회피가 아니라 몽둥이로 미친개를 제압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 반대였다. 군대라 어쩔 수 없이 광주시민에게 발포한 군인들, 명령에 어쩔 수 없어 살인 진압이나 불법 선거, 댓글 조작에 동원된 경찰, 공무원들, 회사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 순응한 회사원들, 나라도 살기 위해 남에게 영혼 없는 좀비 아니면 사탄이 되는 것을 불사하는 무수한 일탈들이 당연한 듯 자행된다. 이 당연해 보이는 것 속에 웅크린 것이 바로 우리 사회 지배구조다. 봉건적 굴레, 식민지적 굴종, 군사독재정권의 억압, 신자유주의가 만든 돈에 대한 열정적 자학이 만든 총체적 적폐다. 


미투 운동은 이 위선과 거짓으로 강제된 세상의 판을 뒤집자는 양심의 소명이다. 미투 운동은 피해자들의 연민의 호소나 가해자 개인의 복수가 아니다. ‘특권과 반칙’으로 뒤집힌 세상에 대한 전면성찰이다. 그러니 개인적인 용서니 화해니 하는 말을 가해자들이 할 말은 아니다. 더 많이 아파하며 보고 듣고 안으로 성찰할 일이다. 그렇게 심장으로 응답할 때 남성들도 피해자의 손을 잡고, 잘못된 세상의 판 자체를 바꾸는 길에 동참할 수 있다. 여기에 미투 운동의 혁명성이 있다. 낡은 것을 부수고 난 뒤에 새로운 것을 짓는 법이다. 아니면 부실공사이고 그 결과는 더 치명적이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기고]16, 그날의 기억! 세월호,,,,



 

올해도 봄꽃이 피기 시작하였습니다.

흐드러지게 핀 하얀 벚꽃, 노란 개나리, 분홍 진달래, 하얀 목련...

어느 꽃을 빼놓으면 서운해 할 듯 싶은 그 예쁜 꽃들은 4월 봄이 되면 어김없이 핍니다. 아이들이 세월호를 타고 수학여행을 가던 그날에도 4월 봄꽃은 피었겠지요?

 

수학여행을 가기위해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탑승했던 세월호가 가라앉던 그해에 제 아들도 고2였었습니다. 지금 그 아들은 군대 있습니다. 그런데 이맘때면 무언가 가슴이 꽉 막힌 듯 하고 가슴이 답답함이 밀려옵니다.

4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은 선명히 떠오릅니다. 점심시간에 지인과 간 식당에서 틀어놓은 TV에선 배가 기울어지고 있었고 그 시간만 해도 아직 세월호는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부 구조되는 사람들이 보였으며, 190여명의 승선인원 중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방송 자막이 나와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방송 내용은 모두 오보였다는 사실이 곧 밝혀졌습니다. 일부 사람은 구조되고 300여명은 구조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게 나라냐! 어떻게 한 사람도 구조하지 못하나 허공에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원망하고 무능한 이 나라의 대통령을 원망하며 어쩜 그럴 수 있을까만 연발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피맺힌 희생을 통해 거짓말만하고 국민을 권력으로 농락하던 그 무능한 정부에 저항했습니다. 2016년 무서리도 춥던 그 해 겨울, 서울 광장에 모여 세월호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별이 된 우리의 아이들에게 지켜주지 못했다는 용서를 빌면서, 그 유가족과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온 가족이 참여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린 목청껏 불렀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침몰하지 않는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2017년 전 대통령 박 근혜 구속,

2018년 전 대통령 이 명박 구속..

 

시간이 지난 요즈음 뉴스에선 그때의 대통령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뉴스는 세월호에 있던 아이들을 구조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구조하지 않은 거라고. 그리고 아이들이 가라앉는 배 안에서 살려달라고 몸부림칠 때 우리의 대통령은 침대 속에서 나오지도 않고 비서실에서 긴급하게 전달하는 내용도 책상 어딘가에 올려져 있었다는 것을 듣게 됩니다.

 

저는 올해 50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늦은 나이에 새롭게 배운 것이 있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하던 그날을 기억하며 절대 침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정치인들이 잘 하는지 지켜봐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올해는 개헌과 6월 지방선거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금천구 시민 사회조직에선 6월 지방선거에 대비하여 정치인들에게 정책제안을 하기 위해 모임을 진행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 마을의 정치발전을 바라는 마음으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섭니다.

 

2018. 04. 10.

폭풍바람이 부는 4월 고 순남


[책] 하위권의 고수





 ‘하위권의 고수’는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에 연재된 작품으로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 캠페인을 벌이는 가운데 쓰여진 10명 작가의 창작동화모음 책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상황과 고민하고 있는 마음들이 10편에 담아져 있다. 동화 속의 아이들은 고민을 힘들어 하고 절망하기보다 용기를 내어 –기적과 환타지 속으로 들어감- 스스로 행복해지는 방법들을 찾아가고 있다.  

 아이들은 자신과 꼭 닮은 동화 속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면서 위안과 용기를 받는 동화가 될 것이고, 어른들은 아이들의 마음을 좀 더 이해하는 소통의 시간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 속 <별난 개구리 별개>, <벌레 만들어 드립니다>는 시들어가던 아이들에게 기적의 선물을 통해 다시 자기 모습대로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스스로 행복으로 나아간다. <꼴찌를 찾습니다>, <웃음소리> 는 우리 사회의 일등주의 경쟁교육을 꼬집고 있다. 꼴찌가 일등으로 일등이 꼴찌로 바뀌는 대역전이 펼쳐진다,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습니다>는 참 마음이 아프다. ‘가만히 있어’라고 억압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너무도 창피하다. 어른이라는 이름하에 아이들의 생각까지도 좌지우지하려 하지 않았는지 말하고 있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여김은 아이들의 마음을 알아주고 아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동화이다. 책 마지막에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에 공감하며 올려본다.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


1. 지금 행복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행복합니다.


2.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공부는 ‘마음껏 놀기’입니다.


3.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성공입니다.


4. 아이와 노동자가 행복해야 좋은 세상입니다.


5. 교육은 상품성이 아니라 인간성을 키우는 일입니다.


6. 대학은 선택이어야 합니다.


7. 아이 인생의 주인은 아이입니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시미선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또 다시 희망버스가 출발한다




 희망버스가 있었다. 2011년 6월, 이명박 시대라는 절망의 한복판에서 죽음으로 암흑을 가르던 희망의 신음소리 같은 몸부림이었다. 지독한 이기와 탐욕의 시대에 돈 시간 마음 다 주며 연대에 나선 시대적 의인들의 발걸음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헬 법원은 7년의 긴 과정 끝에 사랑의 실천을 ‘유죄’로 확정했다. 한진 중공업 조선소로 들어간 것은 “목적이 정당”할 지라도 “불법적 수단의 사용”으로 부당하며, "교통방해를 직접 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시위참가자들과 공모해 교통을 방해한 것“으로 불법이라는 것이다.


  당시 동료이자 동지인 한진 중공업 김주익 노조 위원장이 목을 매 자결한 크레인에서 농성 중인 김진숙은 말했다. “크레인에 올라가 있는 동안 끝이 없는 싸움이 될 수 있겠고” 박창수 김주익을 이어 "내가 죽어야 싸움이 끝나”겠구나. 그때 그 죽음의 그늘을 거둬 준 것이 희망버스였다.  "309일 동안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고립감'이었다. 희망버스를 통해 나는 살 수 있는 힘을 얻게 됐다." 사람을 구한 것과 특별한 손괴도 없이 농성 현장을 방문하기 위해 행진을 한 것에 대해 대한민국 법은 유죄라 한다. 아이가 차도에 있어 이를 구하려 해도 도로에 무단 침입을 하는 것은 절대 하지 말라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차도에 나서면 불법이라는 경중완급도 사회적 책임도 인정도 사랑도 없는 법을 무조건 따르라는 헬조선의 헬 법원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3.1혁명과 4.19혁명으로 규정했다. 3.1은 반제 민족해방혁명이다. 새로운 나라는 자주와 평화로운 나라라는 선언이다. 봉건 왕조 신분제 사회로의 복귀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으로 나간다는 혁명이다. 4.19는 비록 5.16 군사쿠데타로 피를 흘렸지만 부정부패하고 독재적인 이승만 정권에 맞서 민이 나라의 주인임을 실천한 혁명이다. 3.1혁명과 4.19 혁명, 모두가 당시 법률로는 불법이다. 하지만 누가 두 혁명을 두고 ‘목적은 정당하지만 수단이 불법으로 부당하다’고 할 것인가? 약자의 이른바 불법은 법이 보장되지 않는 곳, 법이라는 이름이 가진 자의 흉기가 되어 법이 불의가 된 곳에서 피는 민주주의의 본체다. 본시 법은 상식의 최소화이다 기성관념의 집약이라 극히 보수적인 관념체계다. 그래서 모든 역사적 진보와 발전은 법의 준수가 아니라 기존 법의 한계와 모순을 깨어 확장하는데서 나왔다. 실정법으로 가두거나 규정당하지 않는 곳에 내일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있는 것이며, 그래서 기존 법과 정의가 충돌하면 정의의 입장에 서는 것이 옳은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법원은 끝내 사람의 목숨보다 작업조차 멈춘 조선소 텅 빈 광장을 채운 누군가의 재산 소유권이 더 소중하다고 선언했다. 이것을 법비(法匪)라 한다. 


  악법도 법이라 지켜야 한다는 것은 봉건시대 신민(臣民)의 논리다. 아니 봉건시대에도 폭압한 정권에 대한 저항이 인정됐다. 악법은 법이 아니라 악으로 보고 반드시 그것을 고쳐야 사회의 정의가 선다고 믿는 것이 민주공화다. 그래서 우리는 부정이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을 짓밟고 불의에 저항하는 곳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이가 있다면 불(不)법이 아니라 반(反)법이라도 희망버스를 출발시키고 또 타야 한다. 빛이 환할수록 더 어두워지는 그늘이 우리의 눈길이 머물 곳이기에.. 


  전주에 택시 노동자 김재주가 있다. 전주시청 앞 20m 높이 조명탑에 오른 지 3월22일로 200일을 넘기고 몸서리쳐지는 날짜를 하나하나 늘리고 있다. 저 날짜의 숫자는 그저 숫자가 아니다. 사람이냐 야만이냐를 묻는 역사의 질문을 담은 숫자이고 무게다. 그는 전주시청과 택시사업주, 노조가 합의한 전액관리제를 전주시청이 이행하지 않자, 지난해 9월4일부터 고공농성에 돌입했다. 흔히 우리는 택시가 이른바 사납금제로 운영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납금 제는 하루 일의 시공간적 변동성을 고려하지 않아 회사에게는 일정하고 고정적인 수입을 주지만 기사에게는 장시간 노동에 종종 자기 돈을 쳐 박아야 하는 살인적 노동조건을 만든다. 그래서 이미 1997년 사납금 제도가 불법화되었지만 전국의 법인택시 대부분은 일 단위에서 월 단위로 변경한 불법적 사납금 제를 고수하고 있고 지자체들은 이를 묵인하고 있다. 불법을 고수하기 위해 정부 지자체 사용자 그리고 이미 노동자의 권익대신 사용자와 결탁한 어용노조들의 강고한 야합이 있다. 특권과 반칙과 차별과 학대를 적폐의 가장 밑바닥 뿌리들의 결합니다. 그 결과 기사들은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면서 소정근로 시간은 4시간~ 6시간으로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모든 교통수단 중 압도적으로 많은 교통사고율과 사망사고율에 시달리고 있다. 


  김재주씨는 이미 2016년 2월 전주 시로부터 ‘전액관리제를 2017년 1월부터 시행’한다는 지자체 차원의 노사정 협약의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의 토대인 더불어 민주당이 오래 집권 중인 전주에서조차 약속을 지키지 않아 공중농성을 200일 넘게 진행하고 있다. 노동자의 권리 뿐 아니라 스스로 정한 법까지 20년 넘게 지키지 않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 이유는 택시라는 현금 사업에 토호정치, 지자체의 무책임과 비리구조, 사용자의 탐욕과 어용노조의 패악이 고스란히 작동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죽어나는 것은 직접 일하는 택시기사이며 노동자 서민이다. 이런 악폐 적폐를 깨기 위해 김재주 택시기사는 ‘가로 180㎝×세로 70㎝’ 조명탑 공간에 6개월이 넘게 박혀 있다. 


  다시 출발하는 희망버스는 불법 사납급 제라는 대못을 함께 빼자는 촛불 정신의 제대로 된 계승이다. 그리고 이번 희망버스는 목적은 물론 심지어 수단도 정당하다. 김재주 택시기사를 구하고 전국의 택시 노동자를 구하고 무엇보다 안전한 택시를 시민들에게 제공하자는 희망버스다. 함께 희망버스를 타, 보이는 적폐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밑바닥 적폐에 절망하여 신음하는 형제들의 목소리에 촛불의 힘을 싣자.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미투, 그리고 용서

   

   이른바 ‘미투 운동’ 열풍으로 지구촌이 시끌시끌하다. 남성들은 민망함을 넘어 부끄러움을 피할 길이 없고 여성들은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을 구하려는 듯 대열을 갖춰 대 반격을 개시하고 있다. 바야흐로 인간 절반들의 거대한 전투가 전개되는가? 물론 이 물음은 필자가 스스로에 묻는 것이고 그것은 남성이자 사회의 기성인으로서 부끄러움에 더해 두려움조차 느껴지는 걱정의 우회적 표현이다.


걱정이 된다 하여 좀 심하게 표현을 한 것 같지만 전개되는 양상을 볼 때 사태가 만만치 않다. 권력자들에서부터 교양과 품위를 자랑하는 시인, 작가들 교수님들로 연결되더니 우리도 빠질 수 있느냐는 듯이 연예인들도 속속 나타나기 시작하는 등 그 진행이 예사롭지가 않으니 말이다. 이러한 현상인데도 말 앞세우기가 여간 주저되지 않는다. 명색이 칼럼리스트를 자부하면서도 말이다. 나이가 들었다 하지만 필자도 정상적인 감성을 가진 남자 그러니까 매력을 가진 여성을 보면 아직도 가슴이 설레는 남성 군에 속하니 이를 어찌하겠는가? 

그렇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하고 싶은 말을 해야겠다. 적어도 내가 사는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부끄러운 현상들을 보고 못 본 채 침묵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자책을 감당하기 어렵다. 더욱이 그 동안 정의를 좌우명처럼 내세우며 세상을 간섭하였으니 말이다. 


   서설이 길었다. 예민한 사안으로 들어가는 만큼 단단히 채비를 해야 하기에 그랬다. 말문을 열어보자. 주지하다시피 ‘미투 운동’은 선진국인 미국에서 시작되고 그것은 태양이 뜨면서 빛이 세상에 퍼지듯 지구촌을 밝히면서 예외 없이 이 땅에도 이르렀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성(性) 개방이 관대한데다 우리보다 인권이 존중되는 미국에서 이 바람이 시작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아직도 남성우위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양성평등을 내세우고 있지만 대부분의 기득권층은 남성이 독점하다시피 자리하고 있고 그것은 권력으로도 작용하고 있는데 ‘자유와 평등의 나라’라는 미국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다시 우리나라를 보자. 언제부터인가 성에 대해 관대해지고 에로티시즘은 예술의 중요한 한 장르로 자리 잡았는가 하면 성인들에게 더러는 로망으로도 생각하는 시대가 아닌가, 솔직히 말하면 정결한 성(性)은 그가 성인이라면 아름답게 봐주는 시대가 오늘 우리 사회의 트렌드다. 그리고 성(sex)이란 건강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본능적 욕망이고 그것은 보편적 현상으로 이해를 한다. 그럼에도 오늘과 같은 문제 즉 ‘미투’가 제기되는 것은 그 행위가 다분히 비평화적적인 등 일방적인 면이 강하거나 비록 서로가 이해될 수 있는 사이일지라도 공감의 정도에 차이가 있는, 말하자면 두 성(性) 사이에 진정한 교통이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 장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위해  전제해야 할 게 있는데 그것은 분명한 범죄로 보아야 하는 행위는 이 장 이야기에서 제외한다. 그것은 실정법(형법)에서 다루어야 하므로 사법기관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장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미투 운동’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양자 사이에 책임 소재 등 다툼의 여지가 있는 경우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남성의 입장에서 ‘미투 운동’을 만나는 것은 변명이 어려운 부끄러운 일이고 따라서 반론을 말하는 것도 편치가 않다. 그러나 이런 부류의 사건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사실들이 있고 그 책임을 무조건 남성에게 돌릴 경우 이를 방어하는 것이 어렵다. 사정이 그런데도 문제가 제기되면 무조건 남성 책임 일변도로 몰아가는 것은 합리적도 합법적도 아니다. 이 문제는 당사자 즉 상대가 있는 만큼 상호작용이 있었을 것인 만큼 그에 진실이 요구된다. 다시 말하면 분위기에 편승한 여론을 앞세워 미확인 상황을 사실인양 하여 억울한 피해자를 만드는 일이 없어야 한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야겠지만, 현재 언론 등에 의해 드러난 ‘미투’ 중에는 이런 점에서 살펴 볼 사안도 있을 수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불쾌하게 들릴 수 있지만 현재의 흐름에서 사실이 아니거나 왜곡된 사실들에 대해서는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 흐름은 마침내 제어하기 어려운 격랑(激浪)을 일게 하고 결과적으로 피해자에게는 아픔을 더하고 더불어 억울한 가해자들을 만들게 됨으로 좋지 않은 사회 풍조를 일게 한다. 


실제로 우려하던 사태가 보이기 시작했다. 양심의 가책인지 극심한 모욕감인지는 모르지만 고귀한 자기 생명을 해하는 사건이 두 건이나 있었는데 이런 일이 앞으로 얼마나 더 나올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자해자를 옹호하고자 함이 아니다. 고매한 인격자라도 성(性)에 대해서는 평범한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었을 때 반응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명예를 생명보다 중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다.   


제3자들이 해야 할 것은 사태가 노정되었다하여 사실여부에 관계없이 가해용의자에게 돌을 던지는 것을 쉽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역할보다는 피해자가 일상의 평범함에 숨어 있게 하는 일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 용의자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피해주장자에게 위로 보다는 또 다른 피해를 주는 일이 된다. 더욱이 용의자에게는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충격을 가하게 되고 그것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더라도 그것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는다. 


   그간 제기된 문제 중에는 여러 정황 등 제3자가 볼 때 공감이 쉽지 않은 경우가 있었고 사람에 따라 정도에 차이는 있겠지만 저항조차 갖게 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이런 문제들로 사법절차가 진행 또는 준비하는 경우도 있는데 걱정되는 것은 이로 인한 세상의 양성(兩性)이 서로 대립함으로 갈등으로 연결되면 쉽게 지울 수 없는 사회적 상처가 된다. 이런 사회적 불신이 빨리 종식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응징을 당할 일을 했다면 그에 합당한 조치가 필요하겠지만 그것이 불확실할 때는 누가 누구를 단죄하기 위한 사실 확인보다는 용서와 화해를 권하는 일이 더 바쁘고 아름답다.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역할을 해야 한다.


   형법에서의 범죄는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의하면 되지만 그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당사자야 감정적일 수 있지만 그것을 보는 제3자들은 간섭을 하지 않는 것이 좋고 간섭을 하려면 이성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남녀 간의 문제는 참으로 오묘하여 보편상식으로 접근하기는 난해한 경우가 있다. 성급한 접근은 오류를 만들 수 있고 그것은 양 당사자를 난처하게 만들 수가 있는가 하면 약자에게는 흉기가 될 수 있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그동안 누구나 인정하는 고매한 인격자로 살아온 사람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여론이라는 무서운 파도를 만날 수 있다. 이른바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의 교훈이다.


   살아오면서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시인이 고뇌한 것처럼 세상사에 노심초사해야 하는 현대인들이 곧 우리들이다. 어제 한 실수를 되풀이 않겠다고 다짐해 놓고도 자기도 모르게 반복하는 보통사람이 곧 나인 것이다. 바람직한 삶은 자기에게 엄격하고 그래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다. 이런 자기 관리도 가치가 있지만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 또한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이제 맺음을 하자. 문제가 있다면 사실 그대로 실정법 규정에 따라 처리되는 것을 동의하자. 객관적으로 보아야지 편견을 두지 않아야 하고, 가급적 원만한 결말이 되기를 바라자. 모두 우리의 이웃이고 함께 살아갈 공동체 구성원이 아닌가? 피해자에게 부탁한다. 용서가 가능하다면 용서를 해주자. 어려워도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고 함께 살고자 하는 이웃의 정이다. 상대가 진심으로 뉘우치며 바라는 용서에 응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다!

(♣2018.3.22.)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당신의 좋은 마음이 일상의 성폭력의 씨앗이라면?

 

사내새끼가 어디 고추 떨어지게 질질 짜고 있어!”

여자애가 치마를 입었으면 다리를 오므려야지..”

 

성폭력 피해사실을 세상에 드러내는 미투 운동이 최근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다. 가해자로 지목된 각 계의 유명인사와 정치인들은 언론과 대중의 뭇매를 맞고 있으며 () 조민기 배우의 사망이후로는 미투 운동이 이제 중단되어야한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미투 운동에 의해 대부분 나와 내 생활과는 먼 얘기이고 권력이나 힘이 있는 사람들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폭력의 씨앗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당연하거나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성차별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국적도, 지능도, 집안소득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으며 성별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생물학적인 성별로 사회적 역할은 물론 연애의 역할까지 구분 짓는데 익숙하다. 이는 가해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변명 속에도 담겨있다. ‘사랑하는 사이였다’, ‘부적절한 관계였지만 성폭력은 아니다’,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라고. 이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이 권력을 가졌거나 가질 수 있는 위치였다는 사실은 끝끝내 이해하지 못하거나 부정하고 부인한다.


여성은 남성이 해온 모든 위치에서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권리와 권력을 가진 존재이며 남성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사회에서 스스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 은연중에 억압당하고 강제당하는 일들이 일상에 얼마나 많은지 셀 수도 없다. 오늘 아침만 해도 당신은 화장은 하지 않은 여성에게 왜 여자가 화장을 안 하고 밖에 나왔는지 의문과 불편함이 들지도 모른다. 물론 스스로 그 불편함이 어디서 왔는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을 테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이 불편은 화장도 안하고 다니는 저 여자의 잘못이라며 쉽게 비난해버린다. 당신은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을 보며 문란해 보이고, 성폭력의 타깃이 될까봐 걱정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마음은 그 여성을 향한 당신의 좋은 마음이자 배려이지 이 애초부터 잘못된 걱정이란 건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당신은 어쩌면 술에 취해 성폭력을 당한 여성은 불량한 행실의 대가를 치른 것이며 성욕을 참지 못한 가해자가 더 불쌍하고 측은하게 느껴지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화장을 안 하고, 웃통을 벗고, 술에 취해도 결코 성폭력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특히 가해자가 아닐 것만 같은 대다수의 여성들도 이런 성차별적 판단을 아주 쉽게 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킨다. , 성별을 가리지 않고 이런 진부하고 낡은 성 차별적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으면서 스스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한다면, 자연스럽고 좋은 마음이 바로 일상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범죄자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pexels


성폭력은 성 차이를 온갖 편견과 선입견으로 꽁꽁 싸맨 사람들로부터 일상적으로 행해진다. 그리고 그 속에는 온갖 장구한 폭력과 억압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따라서 미투 운동으로 폭로되는 성폭력 사건들이 이해가 되지 않고 불편하다면 성 차별의식이 소멸하고 있는 작금의 새로운 현실을 스스로가 유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진심으로 미투 운동이 멈추기를 바란다면 자신부터 성폭력을 조장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행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은 물론 성폭력 가해자와 2차 가해자들에게까지 처벌이 집행될 수 있는 정책과 제도적 환경을 요구해야한다. 이 두 가지가 병행되는 과정이 이루어질 때에야 비로소 미투 운동으로 용기를 낸 모든 피해자들과 함께하면서 미투 운동이 발전적으로 해소되는 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박새솜 기자

한반도의 봄을 봄답게 만들자!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을 느낄 수 없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 지 참으로 자주 만나는 말이자,  탄식이고 절망이고 원망이다. 다된 밥에 재 뿌리고 남 잘되는 꼴은 물론 제 민족 평화롭게 통일하자는 것도 배가 아픈 종자들이 많고도 많으니 봄은 매년 오건만 아닌 봄만 온 것이 한반도의 최근 현실이었다. 그래도 어쩌랴. “안 된다 안 된다 하면 되는 것도 안 되고, 된다 된다 하면 안 되는 것도 된다.”는 늦봄 문익환 목사님의 말씀, 매년 되살리며 살 수 밖에. 방북 후 돌아오면서 구속만 남은 상태에서 기자가 후회하지 않는가를 물었을 때 목사님은 ‘후회는 일 자체의 부정인데 통일로 가는 길에 후회는 없다. 반성을 할 뿐이다. 더 잘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더 찾는 성찰 말이다.’라고 하셨다. 이후 문 목사는 “통일은 됐어.”를 외치고 사셨는데 그 완성형에 담긴 간절함이 아직도 절절하게 심장을 울린다. 

그리고 2018년 봄이 왔다. 증오와 혐오대립의 영구 동토가 될 듯한 한반도에 봄바람이 불고 있다. 봄바람에 봄나물들이 겨우내 언 얼굴을 편다. 한꺼번에 돋는 초록의 혁명에 어떤 드센 겨울도 견딜 수 없는 자연이지만, 사람의 일만 항상 자연의 법칙을 뒤틀었다. 평화와 통일은 종북 몰이의 먹이가 되고, 증오와 전쟁은 애국이 되었다. 항복을 먼저 하지 않으면 대화마저도 안 된다는 불통의 칼바람만 ‘전략적 인내’니 ‘적극적 관여와 압박’이니 하는 이름으로 한반도를 덮었다. 이랬던 한반도의 겨울이 드디어 깨지고 있다.  


오는 봄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가장 큰 변화는 결국 북한이다. 북한 김정은 체제는 아주 전략적으로 한반도 정세를 재구축했다. 아무리 노를 저어도 제자리인 역류에서 노 젓기 식 6자회담이나, 미국의 변덕과 중국의 오만이 만든 수동적 상황을 때려 치고 판 자체를 바꿨다.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 먼저 산 다음에 상대를 공격하는)' 전략이다. 아생(我生)은 북의 핵 무력의 완성이다. 이후 우리민족끼리라는 본래의 힘을 극대화하여 기존 정세의 흐름을 갈라 치며 살타(殺他)가 아니라 상생(相生)의 길을 개척했다. 6자회담으로 상징되는 대국적 꿈에 빠져 역사적 동지를 외면하는 기존의 중국 통로가 아니라, 우리민족끼리라는 남한 통로로 평화의 길을 내고 있다. 이것이 김정일과도 다른 김정은 식 변화의 요체인데 통미봉남이라는 있지도 않는 유령과 한미동맹이라는 악령에 귀신 들린 남한사회에 대한 능동적 대처이기도 하다. ‘남한을 통한 미국 다루기’의 청사진은 김정은의 신년사에서 그린 그림이다. 

이것은 남한에게는 한반도 운명의 운전대를 잡은 역할의 힘을 실어 주고, 미국에게는 남한의 어법으로 트럼프의 심기를 마사지하는 효과를 얻으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과정은 분단을 이권의 숙주로 삼아 부귀 권세를 누리는 분단 세력들에게 혼란과 자기 부정 그리고 자기 파괴의 계기를 만들 수 있다. 미국과의 교섭의 난관을 남과 함께 분담하는 효과를 기대하면서 분단 적폐들을 타격할 수 있는 일거다득의 묘수다. 이런 북의 전략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에는 또 다른 결정적 힘이 있다. 2017년을 가른 ‘촛불 광장’의 힘이다. 남한 민중의 힘이 분단 반동의 쳐 둔 정치적 절망을 때려 부쉈기 때문에 가능했다. 북의 핵무력이 보이는 파도라면 한반도의 봄을 부르면서 미투 운동을 통해 차별과 혐오의 근저를 휘젓는 촛불광장의 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을 결정하는 해류와 같다. 


봄바람의 현실적 발아(發芽)는 물론 평창 올림픽이다. 올림픽의 대의명분이 이렇게 훌륭하게 작동되어 위선(僞善)을 진선(眞善)으로 만든 경우가 있을까? 남북 특사 방문을 통해 이렇게 전쟁을 평화로 돌리는 전격(電擊)이 이전에 있었던가? 전격적인 변화의 꽃이 남북정상회담이라면 그 열매는 평화협정을 만들어 낼 북미 정상회담이 될 것이다. 이 와중에서 북이 남을 얼마나 깊게 이해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3차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이 가진 현실과 명분의 충돌에 대한 완화, 남한 내부의 통미봉남과 위장평화 적화통일의 두려움, 분단을 지배의 토대로 삼는 이들에 대한 남한 내부적인 견제까지 어느 것 하나 빼 놓지 못하는 명수를 던지는 김정은은 애송이가 아니라 말 그대로 능력과 감각을 갖춘 외교의 명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평화로 한반도 정세를 푼다면 우리 안의 비극과 상처를 돌려 올림픽의 대의명분을 제대로 살린 것처럼 세계 체제적 문제를 한반도로부터 푸는 쾌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흥분만큼 내부적 냉철함이 필요하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기억과 책임을 다시 점거하는 일이다. 우리는 일본의 군국주의 만행과 이로부터 받은 민중들의 고통을 두고 역사전쟁을 하고 있다. 우리가 명예롭기 위해서 일본군 성노예를 조성하고 그것으로 부귀(富貴)를 챙긴 친일의 무리와 그 후예들, 미군기지와 위안부 문제, 무엇보다 월남 참전을 통한 남한 군사독재정권의 만행에 대해 제대로 된 인식과 반성을 해 내는 일이다. 남의 티끌을 보기 전에 내 눈에 들보를 들어내야 한다. ‘일본 장교 출신들에 의한 주도된 한국군’의 무도함은 유신 독재와 특히 광주에서 시민에 대한 학살을 통해 확인했다. ‘제 국민에게도 저리 흉악한데 하물며 외국에서 고삐도 없이 저질렀을’ 만행을 생각하면 베트남 민중들의 고난에 식은땀이 흐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절박하게 할 일은 한반도의 봄을 지키기 위해 한국 군부의 사대 망국성과 흉포함을 그대로 정치화한 세력에 대한 응징을 하는 일이다. 최근에 태극기에 성조기 그리고 이제는 일장기 까지 내 건 역사적 흉물들, 히틀러 나치의 폭력보다 더 잔인한 사적이고 증오적 폭력을 자랑하는 극우반동의 기독교를 참칭한 세력이나 공개적으로 반동을 체현한 자유한국당류의 정치에 대한 단호히 거부하자. 독재와 그 후예에 대한 역사적 불관용만이 불안한 민주주의를 지키는 진정한 안보다.  


4월 남북 정상회담, 5월 트럼프의 북한 방문, 한반도에 거대한 환절기가 시작했다. 안양천 길에서 막 파릇한 새싹위에 하얗게 덮인 서리를 보았다. 봄이 완숙되기 전에 꽃샘추위도 창궐할 것이다. 노동자 민중의 힘으로 우리의 평화 통일을 향한 봄을 봄으로 느끼지 못하는 한탄의 한반도를 이제 마감하자.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책] 오이대왕 



할아버지, 아버지, 엄마, 누나, 동생과 함께 사는 평범한 가정 볼프강네 집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밀가루 반죽으로 빚은 듯한 오이 모양을 한 괴 생명체는 뻔뻔하고 거만한 태도로 자기는 지하실에 살고 있는 쿠미-오리 2세 대왕이라고 소개한 후 신하들의 반란으로 내쫓김을 당했으니 정치적 망명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가족들은 모두 이 불청객을 탐탁찮게 생각하지만 웬일인지 아버지만큼은 오이대왕에게 호의적이다.

  볼프강네는 성실한 아버지와 가정적인 어머니, 다복한 세 아이와 할아버지가 함께 사는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처럼 보였다 오이대왕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가족들은 엄격하고 권위적인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버지의 강압적인 태도에 눌려 말하지 못한 비밀을 하나씩 숨기고 있다. 오이대왕은 자신의 입지를 세우기 위한 방편으로 이 비밀들을 하나씩 수집하다 볼프강에게 들키게 되고, 비밀의 주인들은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게 된다. 

  첫 번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오이대왕은 새로운 계획으로 자신의 새로운 왕궁을 세우려한다. 거짓과 회유로 아버지를 사로잡은 오이대왕의 계획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불청객은 아버지를 닮아 있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아버지와 사이가 좋은 막내 닉을 제외하고는 가족 모두 이 오만한 불청객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마치 자신의 일부를 감싸듯이 오이대왕을 포용하고 심지어 자기 침대를 내어주며 대왕으로 깍듯이 받들며 수발을 든다. 한 침대에서 볼을 맞대고 사이좋게 오이대왕의 왕관을 부여잡고 자는 장면은 기이한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이 기이한 장면에서 아버지가 왜 오이대왕을 극진히 대하는지 알 것도 같다. 아버지는 왕관이 아닌 왕관이 갖는 절대적 권위를 부여잡은 듯이 보였다. 어쩌면 오이대왕은 아버지의 권위적인 사고와 엄격함이 극대화 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었을까? 

  어린 닉은 아무 거부감 없이 오이대왕에게 애정을 주고 순전한 마음으로 아버지도 사랑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오이대왕은 아버지와도 오이대왕 자신과도 가장 사이가 좋았던 막내 닉에 의해 쫓겨나게 된다. 가족 모두 오이대왕을 어떻게 쫓아내면 좋을까 결정하지 못하고 미뤄두고 있을 때 어린 닉은 너무도 간단하고 손쉬운 방법으로 해결하게 된다. 마치 아버지에게 붙어 있는 불필요한 것을 떼어 내듯이 망설임 없이 간단하다. 

 

“내 이야기가 아름답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늘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다.”

    -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이경선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소피아의 탄자니아 통신-36

꿈을 서포트하는 추장님



외국에서 혼자 보내는 명절이 특별할 것은 없다. 늘 그렇듯이 토스트 한쪽과 계란 후라이,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하고, 지인들과 메시지로 새해 덕담을 주고받던 중, ‘해피 설날, 저는 평창에 있느라 가족과 못 있네요,’라는 메시지가 날아왔다. 탄자니아 한글학교 교장선생님, 김태균님이시다. 

내가 그를 이렇게 부르는 것은 첫 만남을 교장선생님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러 개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와 맺어진 관계의 유형에 따라 그를 부르는 호칭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느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는 건 대충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새 평창까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 같던 그가 한가하게 올림픽 구경을 위해 그곳에 갔을 리는 만무한데 하며 갸웃거리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케냐올림픽위원회 아시아총괄 홍보관’으로 위촉 받아 스태프들을 측면 지원하기 위해 그곳에 있다는 메시지가 떴다. 그제서야 며칠 전 읽었던 신문기사가 생각났다. 


늘 표범무늬 선수 복을 입어서 ‘눈표범 소녀’라는 멋진 별명을 갖고 있는, 스키 선수 사브리나 완자쿠 시마더의 이야기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에 살며 스키광인 새아버지에게 어릴 때부터 스키를 배웠고, 동계올림픽 출전권을 따냈지만 참가비를 마련할 수 없어 출전을 포기해야 할 처지였다. 그런데 때마침 이웃 나라 탄자니아에서 사회적 기업 ‘나우 리미티드’를 운영하던 김태균 대표가 그녀의 사연을 접하고, 그녀를 도울 방법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 했고, 동아프리카에 진출해 있던 하나카드가 손을 내밀어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적도 부근의 나라에서 무슨 동계 올림픽이야? 하는 시선이었던 반면, 그는 눈을 보기 힘든 아프리카에서 겨울 올림픽에 참가한다는 자체가 귀한 일이라 생각했다니 그 역발상이 무릎을 치게 만든다. 하나카드 역시 본사에서 마케팅 본부장까지 보내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니 고마운 일이다. 선한 의도가 기업 이미지를 드높이며 윈윈하는 결과가 되었고 민간 외교관 역할까지 톡톡히 한 셈이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작년 여름 다르에스살람에서였다. 한글학교에 대한 관심이 그를 만나게 했다. 한국국제학교와 한글학교에서 일한 경험 때문에 새로운 나라를 방문하면 기회를 만들어 찾아보는 것이 재미이기도 했지만, 학교를 운영해 보는 꿈이 있기에 현지학교 뿐 아니라 한글학교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탓이다. 그 날도 출장 스케줄이 잡혀 있었을 뿐더러 탄자니아에 자리 잡기 위해 오신 선교사님을 도와주시느라 짬을 내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곧 음베야로 돌아와야 하는 나를 위해 차 한 잔의 여유를 내준 것이었다. 

그는 키가 크고 늘씬해 양복이 잘 어울리는 멋쟁이로 교장 선생님이라기보다는 잘나가는 사업가 같은 첫인상이었다. 그가 건넨 명함은 나우리미티드 대표. 한글학교는 정규 학교가 아니므로 선생님들의 직업이 따로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순간 어찌된 영문이냐는 표정을 지었나보다. 그는 노트북부터 펼쳤다. 그곳에는 자신이 맡은 직함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족히 열 개는 되어 보였다. 혹자는 다양한 직함을 갖고 있는 자신에게 숨겨진 의도가 있는 건 아닐까하고 의혹의 눈길을 보내기도 하지만, 정작 자신은 오늘 하루의 호흡이 즐거울 뿐이란다. 그리고 멀리는 못가도 물러날 생각은 없단다.  

돌아오는 길에 그의 집에 잠시 들렀는데,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아파트로 내부는 손수 디자인했다는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그 감각이 예사롭지가 않다. 그중 유난히 나의 주의를 끄는 물건이 있었는데, 동물의 털을 붙여 만든 봉이었다. 아무리 봐도 먼지떨이 같은데 인테리어 소품이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자신이 추장작위를 받았기 때문에 갖게 되었고 추장을 상징하는 물건이라고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했기에 작위까지 받을 수 있었던 거냐고, 그 비결 좀 가르쳐 달라고, 나도 좀 받아보고 싶다 했더니 피식 웃고 만다.

그의 다양한 일 중 가장 멋진 것은 학교에 도서관을 지어주는 일이었다. 아프리카에 올 때부터 꾼 꿈이었지만 재정적인 문제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데, ODA에 참여하며 ‘탄자니아 작은 도서관 프로젝트’를 만나게 된 것이라 했다. 한글학교를 방문했을 때 도서관도 찾아보고 싶었으나 학교가 방학이어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사진으로 본 도서관은 너무나 세련되고 예뻤다. 이곳에도 저런 인테리어 소품들이 있었냐고 감탄했더니, 한국에서 가져온 것이란다. 정말 보람 있었겠다며 부러워하는 내게,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진행과정에서 학생들과 선생님들에게서 전해져 오던 감동을 피부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사명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라 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그와 함께 이곳에서 일을 해보고 싶다. 참 일을 잘 찾고 행동으로 옮겨 결과로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2018.02.27

 탄자니아에서 소파아

[도서]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꽃집을 운영하시는 박선생님은 시를 좋아하신다. 가끔 책이나 인터넷에서 본 아름다운 시를 들려주시기도 하시는 데 박선생님이 들려주시는 시는 언제나 내 마음에 들어와 잔잔한 울림을 준다. 그래서 이제부터 나도 시를 가까이해 보기로 했다.

  박선생님이 추천해 준 박준 시인의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 것도 없겠지만>은 산문집이기는 하지만 첫 장을 펼치면 시가 나온다.

 

  그늘

남들이 하는 일은 

나도 다 하고 살겠다며

다짐했던 날들이 있었다.


어느 밝은 시절을

스스로 등지고


걷지 않아도 될 걸음을 재촉하던 때가 있었다는 뜻이다.


 역시 시는 어렵다.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 이해하기 힘들다. 작가가 이 시를 쓰게 된 동기나 배경이 나와 있을까 기대하며 수수께끼의 정답을 찾듯 책장을 넘긴다.


  연인은 섬으로 떠났다. 여자는 일출을 보러가고 싶다고 하고 남자는 일몰이 아름다울 것이라 말한다. 연인은 시내에서 3일을 보내고 마지막 날 일출과 일몰을 보러가려 했으나 진종일 짙은 안개와 강한 비가 내려 보지 못했다. 여자와 이별한 후 남자는 혼자 일출과 일몰을 보러 갔다. 


 우리도 때때로 오늘을 살면서 오늘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미루며 산다. 그리고는 미련이 남아 지난 일에 대해 후회하고 아쉬워한다. 지나간 젊은 날에 대해 후회하는 사람은 ‘왕년에 내가 잘 나갔지’라고 이야기하고 또 오늘을 그냥 그렇게 떠나보는 경우가 많다. 

 한때는 나도 내가 무엇을 잘 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 그냥 그렇게 젊음을 보냈던 적이 있었고 직장생활을 할 때는 여기는 나랑 안 맞아하고 단정지었던 적이 있었다. 젊은 날에는 아픔도 많고 고민도 많아 삶이 내 마음처럼 되지는 않는다고 투덜거렸지만 이젠 나도 흰머리가 나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현재의 내 삶이 점점 내 마음에 든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유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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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MeToo, 위드유WithYou


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no. 165





“스웨덴은 제도를 통해 평등을 선언하고 있지만, 일터를 비롯한 직장과 가정에서 발생하는 성희롱과 폭력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은 여성의 책임인양 인식되어 왔다...강간 사건이 발생하면 당시의 상황, 여성의 옷차림 등에 대한 문제가 항상 불거졌다. 다른 범죄에서는 없는 일이다.” (스톡홀름 대학 교수) 아빠와 엄마를 구분하는 차이는 모유가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 뿐이라는 스웨덴조차 미투운동이 열풍이다. 하물며 기껏 있는 인권 조례마저 없애는 한국에서 미투운동은 열풍을 넘어 쓰나미가 되어야 한다. 일전에 한국사회엔 메갈리아 논쟁이 있었다. 그 결과 메갈리아로 상징되는 ‘행동하는 페미니즘’은 사회적 역풍을 맞았다. 역차별이라며 분노한 남자들의 분기로 갑자기 한국은 남녀평등을 넘어 여성우위의 세상에 되었다. 가련한 남성들이라니. 마치 순종하는 피해자가 아니라 빗자루 들고 저항하는 피해자를 만난 불쌍한 강도 꼴 아닌가? 그런데 서지현 검사의 폭로가 나왔다. 아니 검사도? 우리나라 최고의 권력자 또는 권력자의 칼도 여성이라면 희롱당하고도 눈치를 보며 침묵을 해야 한다니. 남성 중심의 지배 질서와 문화는 얼마나 은밀하고 강고한 것인지...


대한민국의 지배 문화는 곰팡이 문화다. 진실의 빛을 싫어한다. 진실 앞에서 용기를 내는 것을 혐오한다. 용기는 ‘배신자요 개돼지 자식’들의 짓이다. 그러니 옳고 그름의 용기를 내는 것은 바보다. 용기를 내는 순간 모난 돌이 되어 정을 맞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족 동료 등 주변 관계에 피해를 주는 공적이 된다. 진실에 비겁하고 윗선에 비굴하고 아래 것들에 잔인 하라는 것이 대한민국 문화의 숨겨진 아니 공공연한 비법이다. 물론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불과 10년 전의 상식으로도 지금의 여러 가지 사회적 개념을 따라 잡을 수 없다. 대표적인 것인 성소수자들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확장이다. 80년대 초중반만 해도 진보적 사상과 이론을 배우면서도 성소수자들의 문제 등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계급의 문제, 체제의 문제, 빈곤과 배제의 문제로서 대강 볼 뿐, 현실적 과제나 이해로 다가오지 않았다. 오직 피해 당사자들의 분투 속에서 우리의 눈은 조금 더 멀고 깊게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역동적 혼돈사회’다. 전진과 후퇴가 한꺼번에 진행된다. 후퇴를 전진이라 믿는 자들이 있고 전진(변혁)은 불가능하다며 현실에 안주하는 이들이 다수다. 이 엉거주춤 체제가 87년 이후 한국이다. 지난 20여년 혼돈 속 패자는 인간이고 승자는 돈이었다. 공동체적 관계, 사회적 발전은 기업과 개인의 승자독식의 탐욕에 분쇄됐고, 민주주의를 내세웠던 이들은 기껏 좌파신자유주의가 되었다. 87년 6월을 넘어 7~9 노동자 대투쟁이 보여준 민주주의 실질적 과제는 낡은 유물로 내쳐졌다. 민주노조운동을 죽이고 진보정당 운동을 죽이고 변혁적 운동을 죽이고 평화와 통일을 죽이며 민주주의가 개살구가 되는 과정이었다. 진보적 미래가 삭제된 한국사회가 되는 것은 개인의 열정이 사회적 역사적 진보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기껏 저만 살려는 죽음의 경주자가 되는 것으로 낭비됐다. ‘총체적 퇴행!’, 그것이 우리가 만난 지난 20년의 세상이다. 그 퇴행의 일면을 보여 준 것이 메갈리아 논쟁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동으로 확인된 반 여성주의는 변혁적 전투적 노동운동을 탄압 타락시키는 그 논리 그대로다. 노조가 자긍(自矜)이 아니라 기피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페미니즘은 혐오의 다른 말로 취급되었다. 이런 사회적 퇴행 현상으로 변화가 아니라 ‘변질’은 평창 올림픽의 남북 단일팀 문제에서도 발생했다. 촛불로 우리 사회는 퇴행은 막았지만 물꼬는 트지 못했다.  


미투운동은 일반적으로 ‘폭력의 고통과 수치와 책임을 피해자가 뒤집어 씌고 사는 것에 대한 저항’이다. 고통의 가해자에게 가해의 책임을 묻자는 것은 가해자 중심의 체제 인식 그리고 두려움에 대한 절대 저항이다. 우리에겐 촛불 이후 더욱 깊숙하게 변혁해야 할 한국 사회 적폐의 본령을 파고드는 일이다. 형식에 갇혀 죽은 실질적 민주주의를 다시 부활시키는 일이다. 비정규직 노동의 문제, 최저임금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 갑 질 지배 종속 문화에 대한 앙칼진 저항, 평화와 통일을 향한 새로운 모색 그리고 작금의 미투운동까지 기존 사회 정치 구조로는 담을 수 없는 새로운 변화를 시작하자는 의미다. 가해에 대한 정당한 응징은 가해와 피해를 정면으로 뒤집어 죄의 무게를 통해 평등의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미투운동은 우리 사회의 근본적 변혁의 불가피함을 보여 주며 촛불의 동력이 퇴행을 막는 것을 넘어 역사적 물고를 트자는 외침이다.  


미투MeToo는 ‘나도 피해자’요로 번역하면 안 된다고 한다. ‘나도 고발한다.’가 맞는다고 한다. 80년 광주시민이 역사의 희생자가 아니라 역사의 열사요 전사인 것처럼 미투MeToo를 외치는 이들은 약한 희생자가 아니라 억압과 탄압에 맞서 용기를 낸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의 상처에 머물며 상처를 감싸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그들이 상처와 고통을 딛고 일어선 용기와 함께 해야 한다. 이것이 폭로 고발자들이 용기를 낸 진정한 이유인 가해에 대한 처벌과 함께 ‘다시는 이런 일을 통해 고통 받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는 바람의 진정한 의미다. 그럼으로 위드유WithYou도 피해자 약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개인적 위로가 아니라 사회적 변화를 향한 동반, 동지의 약속이자 외침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것은 진보적 인물의 개인적 위선이나, 권력형 관계에서 개인의 변태적 일탈이 아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생각 구조 체제와의 투쟁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별짓을 다한다는 ‘목구멍이 포도청’ 논리에 담긴 사이코패스적 인성을 강요하는 자본의 성공 중심의 위계질서와의 싸움이다. 우리 안의 위선적 체면 문화, 문제를 정면으로 보지 않고 기피하는 방관을 통한 묵인 문화를 뒤집는 투쟁이다. 법제도만으로 사람의 존엄이 지켜지지 않음을 확인하며 평등한 인간들에 의한 사람 중심의 사회적 변화를 위한 투쟁이다. 사회적이고 주체적인 자성과 각성의 ‘아픈 매’로 미투MeToo운동을 보고 옹호하자. 불편하고 어색해도 그 불편과 어색이 만든 것이 지금의 현실임을 직시하자.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소피아의 탄자니아 통신-35


드론과 로봇




로봇이 교통정리를 하고, 광산에서는 금이나 다이아몬드를 채굴하고 있다. 드론이 국립수혈센터에 필요한 혈액을 나르고, 농장 위를 날며 땅 속에 심어놓은 센서를 통해 작물이 받는 스트레스를 감지한다. 

“로보캅과 드론이 아프리카 6억 명 일자리 위협”, 이라고 쓴 대문짝만한 타이틀만 없었다면, 미래도시의 한 장면을 묘사한 대목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이 기사의 요지는, 산업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 로봇이나 기계의 도입만을 장려하면 실업률을 크게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선진국들이 각종 규제로 신기술을 막고 있는 사이 아프리카는 낮은 규제 장벽으로 신기술을 적극 도입한 결과라는 부연 설명과 함께.  

아프리카에 대한 기사의 대부분이 내전, 기아, 풍토병, 에이즈 등에 대한 부정적인 것이었다면, 선진국에서도 실현되지 않은 신기술이 아프리카에서는 이미 상용화 되었다는 기사는 참신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미 6억의 인구가 일자리를 잃은 것처럼 과장하는 보도는 읽는 내내 나를 불편하게 했다.

 

콩고 킨샤샤 지역 어느 곳에서는 2미터가 넘는 장신의 로봇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르완다에서는 얼마간의 드론이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외진 곳에 응급을 요하는 혈액을 나르는 일도 하고 있을 것이다. 국토의 절반을 누비며, 란 대목에서는 의구심이 들지만. 남아공과 보츠와나에서도 다국적 기업이 소유한 광산에서 로봇이 금이나 다이아몬드를 채굴하고 있을 것이다. 남아공을 우리가 말하는 아프리카의 범주에 넣어야 하나에 대한 의문은 차치하고. 어쨌든, 전혀 없는 사실을 있다고 거짓 기사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아 온 아프리카와는 많이 다르다. 

나는 세네갈과 탄자니아에서 각각 2년 남짓 살았고, 기회가 되면 주변 나라를 주마간산 격으로 보고 왔다. 그렇다고 내가 아프리카를 잘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혀 모른다고도 할 수 없다. 서울 가 본 사람과 안 가 본 사람이 싸우면 안 가 본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다. 나는 저런 기사를 보면 기자에게 묻고 싶어진다. 정말 아프리카에 대해서 잘 알아서 저런 기사를 쓴 것이냐고. 아프리카가 내전과 기아, 에이즈와 풍토병이 창궐하는 야만적이고 미개하며 죽음의 땅이라고 보는 것만큼이나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두바이에서 무인 드론 택시가 시험 비행하는 장면을 보며, 아프리카에 꼭 필요한 교통수단이군, 했다. 유선전화시대를 건너뛰고 무선전화시대로 직행했듯이, 인프라 구축비용을 극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으로 드론 택시만큼 확실하고 경제적인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계화의 또 다른 이름인 로봇이 사람을 대체할 것이란 점에서도 아프리카라고 예외가 되진 못할 것이다.

‘화폐보다 더 안전해 아프리카에서 비트코인 광풍이 분다.’는 뉴스도 있었다. 정치적 불안 요소가 큰 일부 국가에서는 가상화폐가 실제화폐보다 안전자산으로 평가되어 거래 프리미엄까지 붙는다는 내용이었다. 

분명 아프리카도 빠른 시일 내에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란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GDP성장률은 아프리카가 얼마나 빠른 성장을 하고 있나 보여준다. 현재 GDP성장률 1,2위가 가나(8.3%)와 에티오피아(8.2%), 그리고 코트디부아르(7.2%), 지부티(7%)가 4,5위로 뒤를 따른다. 세네갈(6.9%)과 탄자니아(6.8%) 역시 8,9위를 기록해 상위 10개국 중 6개가 아프리카 국가다. 이런 수치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나는 이곳의 잠재력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풍부한 부존자원과 강한 지구력을 가진 사람들, 교육만 전제된다면 엄청난 폭발력을 지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의 지나친 과장 보도는 사실을 왜곡해서 우리에게 아프리카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2018.2.11일

* 탄자니아에서 소파아

[도서]노란우체통




“흑흑흑”

“훌쩍 훌쩍”

“으~아~앙”

밖에서 돌아오니 딸아이 방에서 처음엔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울음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그런데 딸아이 뿐만아니라 함께 있던 조카의 울음소리까지 같이 들린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이야?’

‘방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거지?’

무슨 일인가 싶어 뛰어들어갔더니 하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통곡하고 있고 또 하나는 무릎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왜 그러는데?”

“흑흑.....훌쩍훌쩍”

“엉엉엉”

두 아이 모두 계속 울기만 하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며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아님 둘이 싸웠나?’

혼자 별의별 생각을 다하며 아이들에게 계속 무슨 일인지 물었다.

그랬더니

“아...빠, 아...아..빠가 흑흑... 주...주..죽어...으~~~앙”

“주..죽어....펴...편...지.앙앙앙”

아이들은 울면서 뭐라고 말을 했는데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어 정말 답답하고 가슴은 두망망이질쳤다.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 하나?’라고 생각하는 찰나 딸아이가 노란그림이 있는 얇은 책을 들어 올리며 더 큰소리로 울어댔다.

“너 지금 이 책 보고 운거야?”

둘 다 우느라 대답은 못하고 고개만 끄덕거린다.

<노란 우체통>그 책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렵게 낳은 외동딸 솜이를 두고 아빠는 떠나야 된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건강하다 장담하던 솜이 아빠는 건강검진 결과에 씌어있는 대장암 판정을 믿지 못한다. 오진일거라 생각하며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니지만 결과는 항상 그대로일 뿐! 그것도 말기. 딸아이에게 비밀로 하고 아빠는 딸과 함께 추억 만들기를 하려고 하지만 딸아이가 그 속을 알 리 없다. 아빠가 보내는 사랑한다는 문자, 지우지 말라고 아빠가 부탁하지만 솜이는 바로 지워버리고 어떻게든  딸과의 추억을 많이 남기려 노력하는 모습에 마음 한켠이 저려온다.

플룻을 하는 솜이가 독일로 연주회를 떠났을 때 아빠는 이 세상을 떠난다. 아빠는 솜이와 엄마를 위해 편지를 준비해 때가 되면 도착하게 하고 솜이는 그제서야 아빠의 깊은 사랑을 느낀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빠를 떠나보내야 했던 솜이. 아픈 몸을 이끌고 가족들에게 편지를 준비했던 아빠! 아빠는 편지라는 선물을 자신이 죽은 후에도 계속 받아볼 수 있게 했지만 아빠가 죽어간다는 사실도 모른 채 아빠에게 투정만 부렸던 솜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이 더 아파지겠지. 

솜이가 커가는 과정을 생각하며 솜이에게 편지를 준비한 아빠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을까? 어쩌면 솜이에게도 아빠와 헤어질 준비 할 시간을 주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얇은 저학년 문고지만 이 책을 어린아이를 키우는 모든 부모들도 함께 읽기를 권하고 싶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진수정

아주 정치적인 올림픽을!




순수라는 말은 불순하다. 순수가 무엇을 비교하는 도구가 될 때 특히 불순하다.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들을 순수한 일반시민이 아니라 할 때, 시민을 달고 나온 촛불시민 마저 순수 선량 시민이 아니라고 할 때, 자주 통일 민중 문학을 순수문학과 대립시킬 때, 자기들의 의도에 반하는 것을 정치적이라고 하거나 당리당략이라며 수순하지 않다고 할 때 그 순수는 구린내 난다. 순수한 올림픽 정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평창 올림픽을 평양올림픽으로 만들었다고 할 때 그 순수함이란 실은 ‘분단 증오 혐오 전쟁’의 오염의 다른 말이다. 태극기를 흔들지만 그들의 순수한 진심은 성조기이듯 말이다. 


올림픽도 실은 지극히 정치적이다. 고대 올림픽은 그리스를 구성하는 국가들의 피폐를 막기 위해 전쟁 대신 가짜 전쟁(경기)를 겨룬 것이다. 올림픽 종목 자체가 결국 전쟁 훈련의 과정이었다. 근데 올림픽은 프랑스인 쿠베르탕의 제안으로 1896년에 시작되었다. 그때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전신인 자유주의 전성시기, 그러니깐 독점자본주의가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영불이 식민지를 독식하고 아직 미국 독일 일본 등이 팽창을 향한 시간이 필요한 시기 ‘ 지금 이대로’의 평화를 필요한 시기에 만들어 진 지극히 정치적 산물이다. 그 후 올림픽은 체제 선전장, 국위 선전장, 내부 통치용 애국 일치의 국가주의 선동 장의 무기로 활용된다. 대표적인 것이 히틀러의 베를린 올림픽과 피의 광주를 가리려고 한 전두환의 88 서울 올림픽이다. 전두환이 광주의 피로 만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 손엔 총칼, 다른 손엔 스포츠 색스 스크린이라는 이른바 3S정책을 폈는데 그 정점에 88이 있었으니 이 얼마나 정치적 올림픽이었던가?


사실 올림픽의 가장 큰 문제는 올림픽 자체다. 민족주의 애국주의로 인류의 친선과 연대에 대해 자꾸 금을 긋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규모와 과정이 거대한 생명의 터전과 시간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평창 올림픽만 해도 가리왕산의 600년의 역사, 그 600년을 지킨 주목과 신갈나무 금강송 등의 생명과 시간을 파괴했다. 인간들의 한 달 유희를 위해 생명들이 터전과 시간의 무한대를 희생시키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분산 동시 개최 등 파괴 없는 인간들의 유희가 모색되는 것이 옳다. 산천이 투기의 대상이 되고, 빈자들이 쫒겨나는 거대한 파괴의 올림픽은 지구의 생존 앞에서 자기 고민을 해야 한다. 올림픽 개최 자체에 대한 반대가 소중한 이유다.


쿠베르탱은 올림픽 정신은 ‘승리가 아니라 참가에 의의’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올림픽 구호는 법정 스님이 인간이 만든 가장 어리석고 최악인 “더 빠르게, 더 높이, 더 강하게”다. '평화와 화합'을 강조했다지만 쿠베르탱에게 노벨 평화상을 추천한 곳이 독일 히틀러의 나찌였다는 사실은 얼마나 통절한 역설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북한과 아예 압박과 전쟁을 사주하는 미국과 일본, 그리고 그 뼈 속 노예들의 반북 행보, 도대체 어디에 평화화 화합이 있을까? 왜 IOC는 여자 아이스하키팀 참가 수를 두배로 늘려주고 왜 유엔은 북 제제명단에 있는 인물들의 제제를 풀어 줄까? 누가 올림픽 정신에 가까운가? 단일팀 구성이 평창이 평양을 품는 방향이 올림픽 정신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정치란 곧 올바름이다(政者, 正也)”이라 했다. 공자가 올바름을 강조한 것은 법가식 형벌론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다. 체벌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솔선수범으로 다스리는 것이 옳다는 말이다. 자기는 구부러졌으면서 백성만 올바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파렴치하지만 실은 바른 백성을 자기처럼 굽으라 하는 것으로 아주 지독한 폭력이자 살생이다. 그래서 법을 빙자하여 백성에 폭정을 가하는 놈들을 법비라 했다. 법을 망나니칼로 들고 난동을 부리는 도적들, 요즘 우리가 만나는 폭력 경찰 검찰 그들을 법으로 방어 보호하는 판사들이다. 그래서 정치란 법 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법 형식이 가해자 지배자의 흉기가 된 조건에서 법을 넘어 구현되는 문제 해결의 관계 또는 과정이다. 


법은 상식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 응결물이다. 법은 현실의 뒤를 쫓는 사후 정리이지 새로움에 대한 개척과 창조가 아니다. 법대로가 지독히 보수적 논리인 것은 법을 넘을 때 인간의 인권과 민주주의가 확장되었던 역사가 잘 보여 준다. 그래서 정치가 필요하다. 정치는 관계에 의거한 법적 해결이 아니라 현실적 해결이다. 올바를 정(正)은 一 + 止다.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우선 서서 살피는 것이 올바름의 기반이라는 말이다. 지금 아픈 사람들, 지금 고통을 받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지금 약한 사람들을 살피는 것이 강자들의 독주에 대한 최소한의 제동을 걸고 두로 돌아보란 말이다. 목표를 향해 600년 주목의 허리를 자르고, 미래에 올 기업의 위기 때문에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을 자르고, 몇 백 마리 병든 닭을 핑계로 수천만 마리 닭을 죽이는 이 잔혹한 질주에는 올바름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정치적이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지배세력들이 자기를 반대하는 이들에게 낙인으로 찍는 ‘정치적, 이념적, 운동적, 민중적’이라는 모자엔 굴복 복종 자발적 노예의 마약과 족쇄만 있다. 오히려 우리는 더욱 정치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가장 정치적이었을 때가 언제인가?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어 부정비리 적폐의 심장을 가를 그 때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태극기를 든 반동 수구 완장들도 있다. 정치적이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방향이 문제다. 민중의 민주주의가 밥이고 평화고 통일이고 인권이며 번영이라는 정치적 관점으로 돈과 권력의 지배에 지극히 불순한 정치적 존재가 가장 순수한 역사적 존재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파괴와 반목에 반대 했던 평창 올림픽은 현실이 됐다. 차악으로 올림픽이 인간 간(間) 평화라도 기여되기를 바란다. 그러기위해 평창 올림픽은 한반도 올림픽이 되고 한반도에서 핵무기와 전쟁을 없애는 올림픽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평양 올림픽이라 한다면 기꺼이 되자. 평양 올림픽은 실패의 이름이 아니라 성공의 호명이다. 남한 민주주의 활력이 한반도와 세계 평화의 운전대를 잡고 운전을 시작했다는 디딤돌이란 말이다. 평화와 화합이라는 올림픽 정신이 위선이나 장식이 아라 실체적으로 구현된 첫 올림픽이란 말이다. 무엇보다 김대중 이후 남한에서 의식적으로 지워진 평화와 통일로 가는 길이 다시 시작됐다는 말이다. 신자유주의 발전 논리가 만든 물질만능, 신자유주의 헬 조선이 만든 이기적 탐욕과 사회적 좌절, 분단 증오 정치가 만든 혐북 종북 반북 비통일 논리라는 시대적 퇴행을 돌리는 희망의 유턴 올림픽이 됐다는 말이다. 이럴 때 우리는 거대한 생명의 파괴 생태의 파괴에 대해 저 가리왕산 600년 주목과 신갈나무 잘린 허리와 시간 앞에서 ‘차선의 최선’을 다하려 했다는 속죄의 염치라도 만들 것이다. 

사족이지만 이름에 걱정하지 마라. 평양 올림픽이 되어도 역사와 세계는 여전히 2018년 2월 동계 올림픽을 평창 올림픽이다. 북이 평화의 기치를 훔친다면 평화의 깃발이 하나 더 늘었다는 의미다. 그러니 평창과 평양은 평화로 하나 된 올림픽을 흔쾌히 만들자.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장제모 칼람] 기초자치단체장의 3연임 제한 규정 시비 


차성수 금천구청장이 금년 지방선거에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불출마 사유는 당사자 외는 알 수는 없지만 자기 나름의 변화를 기하고자함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금천구의 보통 주민들 다수가 아쉬워하는 것을 보면 그의 퇴장은 분명 아름다운 행보로 보인다.

그가 구청장 재직 중 한 업적은 객관적 자료가 있는 만큼 이를 언급하는 것은 오히려 실례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그는 구정 ‘케치프레이어’에서 본 바와 같이 ‘구민 우선’을 유난히 주장하였고 실제로 ‘주민 참여’를 내세우는 여러 시책을 적극적으로 폈다. 특히 지방분권을 부르짖으면서 글자 그대로의 지방자치 시행을 개헌 목표로 내세우고는 전국을 순회하던 열정은 인상적이었던 것은 필자만의 느낌이 아닐 것이다.


퇴임하는 구청장의 찬가를 부르자는 것이 아니다. 그가 남다른 열정으로 부르짖던 ‘지방분권’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시점인데 왜 구청장 출마를 포기하였을까 하는 의문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서다. 문제만 제기해 놓고 자기는 빠지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다른 계획이 있고 그것을 행동하기 위함인지.....


그가 모 언론 매체와 인터뷰한 내용을 본 적이 있다. “....구청장을 그만둬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이유 중 하나가 3선 연임 제한이다. 연임 제한이 있는 한 3선에 도전해 당선된다 해도, 빠르면 1~2년 안에 레임덕이 올 것이다. 구청장이 잘하든, 못하든 강제로 마무리 국면을 맞게 된다. 나갈 운명이 정해져 있는 사람 아래서 일하는 공무원이 열정을 쏟을 리 만무하다. 구청장도 사람인데 무슨 열정과 의혹이 생기겠나.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그리고  ‘3회 연임을 한다면 그것은 더는 구청장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고 따라서 재임 기간 중에 레임덕 현상을 배제할 수 없다.’ 면서 구청장 불출마 사유를 분명하게 밝혔다.(서울신문 2018.2.01.)


그는 인터뷰 말미에, ‘지방자치 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 3선 연임 제한이다. 차라리 정당에서 재임 기간 구정(區政)을 평가해 공천을 안 주면 되는데, 불필요한 법적 장치를 만들어 놨다.’ 면서 현재 제도에 대한 불편한 심기도 숨기지 않았다.


인터뷰 내용이 그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구청장 불출마를 결심하게 된 핵심 이유는 지방자치단체장의 ‘3선 연임 제한’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차제에 그 제도 설치 배경 등 문제점을 살펴본다.

지방자치법 규정 제87조(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임기) 제1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임기는 4년으로 하며,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 즉 구청장 등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3회 연임을 하면 다음 회에는 출마를 할 수 없다. 


이러한 규정에 전 서울 강남구청장 등 전국 지방자치단체장 27명이 지자체장의 연임을 3번으로 제한한 지방자치법 87조 1항에 대해 낸 헌법소원에서 재판관 6대3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지자체장은 다른 후보에 비해 선거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하고 장기집권 가능성이 높지만 견제수단은 미흡하다며 3기 연속 선출됐더라도 한번 걸러 다시 입후보 할수 있으므로 지나친 제한이 아니라"고 하며 위헌확인 소를 기각했다.(헌법재판소 판례 2006.2.23. 2005헌마403[기각])


이러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의 타당성을 인정한다면 연임 제한을 두지 않은 국회의원 선거법과의 형평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과제를 만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참고할 수 있는 것은 정치자금법 제6조 규정의 위헌 여부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단이다. [정치자금법 제6조 위헌확인 2005헌마1095] 이를 살펴 보면,

“가). 기초자치단체장과 국회의원은 그 지위 직무 및 기능이 본질적으로 다르고, 국회의원은 지역구 단위 선출이지만 국민을 대표하여 입법과 정치 담당 정치인이고, 기초자치단체장은 한정된 지역에서 주민의 복리에 관한 자치사무 집행 행정기관이므로 정치적 역할 등이 현저히 작으므로 후원회를 통하여 정치자금 지원 필요성의 측면에서 양자는 본질적 차이가 있으므로, 국회의원(후보자 등)에 대하여는 후원회를 인정하면서 기초자치단체장(후보자 등)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는 법률조항은 차별의 합리성을 인정할 수 있다.”<요약>

◇주:  나)항은 기조단체장과 광역단체장의 차별 판결이므로 생략한다.


위 내용은 정차지금의 형평성에 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지만 양자간  차별 필요성을 두는 이유다. 이의 문리(文理) 해석을 하면, ‘국회의원은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나 기초단체장은 그런 범주에 포함되지 않고 그래서 차별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국회의원은 정치인으로 분류되지만 기초자치단체장은 정치인이 아닌 단순행정기관의 담당자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자체장은 다른 후보에 선거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하고 장기집권 가능성이 높지만 견제수단은 미흡하다’며 3선 연임 제한의 타당성을 인정하면서 국회의원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영향력을 말하면 국회의원이 기초자치단체장보다 월등한 것은 우리 정치판의 현실이 아닌가! 지면관계로 추가 연구는 다른 기회로 미룬다.

(♣2018.02.12.)



                                   필자는 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문빠 정치에 대한 넋두리


민주당 정치를 진보라 하는 것은 민주당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잘해서 ‘중도보수’정치다. 그래도 파쇼독재와의 투쟁에서 야당이기에 겪은 질곡을 알기에, 사대수구세력들의 정치 폭압의 실체를 알기에 그들의 정치가 집권 이후 ‘자신들의 약속을 지키는 정치’는 될 줄 알았고 그렇게 성공하길 빌었다. 김대중의 정치가 한국 사회의 주류가 되어 제대로 된 보수와 진보가 대결하는 정치를 바랬다. 하지만 그는 총칼을 돈으로 바꾼 자본 독재의 길, 신자유주의로 갔다. 노무현의 성공을 원했다. 하지만 그도 파병을 통해 그의 갈 길을 분명히 보여주며 아예 신자유주의를 제도적으로 완성한다. 두 정권의 통치 토대는 결국 자본주의 최악의 퇴행체제 ‘신자유주의’였다. 당시에 성공하길 바라기 위해 성공을 비는 이들이 손에 들어야 하는 것은 당근인가 채찍인가 논쟁이 있었다. 필자는 당연 비판으로 ‘정치적 공황’을 예방하라고 했다. 하지만 결과는 두 여중생의 죽음이 만든 촛불로 집권한 이가 보수대연정을 말하고, 서민들의 대통령이라며 정리해고와 파견 비정규직도 모자라 노동법을 민법으로 함몰시킨 ‘노동 쟁의에 대한 손배 가압류 시대’를 열었다. 그 파행과 역주행의 결과가 이명박근혜 시대다. 




노무현의 죽음을 새긴 지지자들은 독기를 품었다. 노무현이 죽음을 통해 말하려는 성찰은 비탄과 분노로 뒤 덮여 기존 체제엔 과유(過猶)하고, 노동자 민중과 진보엔 불급(不及)’한 정치적 감성을 만들었다. 좌우 양방향에 대한 피해의식은 좌우 양방에 대한 무차별 혐오를 나갔다. 특히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에 대한 배제와 혐오는 실은 한국에게 미래를 삭제하는 저주였다. 귀족 떼쟁이 민주노총을 혐오 대상으로 만들고 그나마 새로운 정치였던 민주노동당을 탁란(托卵)을 통해 와해시켰다. 통합진보당의 해산은 그것의 설거지였을 뿐이다. 한국 지배 구조의 한계가 만든 요행으로 민주당은 다시 집권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미래로 향한 소통대신 더 단단한 내적 응집과 외적 단절을 정치를 하기 시작했다. 그를 위해 스스로 어용이 되고 광신이 되고 정의가 되고 진리가 되어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규정하며 힘을 과시한다. 자기들의 비판은 열려있고 남의 비판엔 닫혀 있는 소통부재는 더욱 단단해 졌다. 그 결과 불거진 사회적 현상이 ‘문빠논쟁’이다. 모든 빠에겐 집착이 있다. 대상 자체에 대한 애호라면 피해가 덜 한데 비교 대립하는 빠라면 안으로는 더욱 증오가 단단해지고 밖으로는 더더욱 가해로 강해지니 그 해악은 가늠하기 어렵다. 문빠 논쟁의 핵심은 ‘소통과 해결’의 문제지만 그들은 그저 승패의 문제일 뿐이다. 소통과 해결을 향한 지지와 옹호가 아니라면 도대체 문빠와 박사모가, 촛불과 태극기가 어떻게 무엇이 다른 것일까?  


그래서 필자는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을 기대했다. 남북문제 한미 문제만큼 남한 내부의 소통과 단결도 중요하고, 그것이 민주와 인권, 진보적 미래에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어설픈 기자의 질문에 답변을 했다. 나보다 더 많이 악플을 당한 정치인은 없다며 "저는 저와 생각이 같건 다르건 유권자 국민들의 의사표시라고 받아들인다. 그런 부분에 대해선 조금 담담하게 그렇게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고 한다. ‘담담하게’... 이 표현의 강자(强者)스러움에 대해 한숨을 쉬었다. 절박한 사람 앞에서 담담한 사람들이란 구경꾼 아니면 강자다. 악플이라도 그것을 무시해도 되는 조건을 가진 자와 악플이 생존 자체에 대한 위협이 되는 이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악플에 자결까지 하는 현상에 대한 최소한의 통찰이 없는 대답,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에게 침착하라며 수영법을 설명하는 이의 말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절대 맞는 것도 아니다. 왜냐면 ‘말을 하나 안한 것과 같은 격’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의 문빠 현상을 대통령은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필자는 문재인 정권이 자주와 평화 통일과 민주와 인권의 역사에서 소중한 정권이길 바란다. 민주주의가 활기가 군사독재의 일사분란함보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큰길이자 지름길임을 보여주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어용’을 불사한다는 문재인 지지자들에게 다시 한 번 묻는다. 진정으로 성공한 정권이 되기 위해 지지자들이 손에 들어야 할 것은 칭찬인가 비판인가? 어떤 이는 이를 비판적 지지와 전략적 지지로 구분하면서 성숙한 민주시민 능동적인 모습이라 한다. 하지만 이른바 전략적 지지라면 그것은 약자의 방어논리일 때 가능하다. 책임을 지고 힘을 휘두르는 문재인 정권과 그 지지자들이 할 말이 아니란 말이다. 막내의 심정으로 부모의 역할을 할 수 없다. 귀를 열고 맘을 열고 머리를 차게 하는 것은 비판자들의 몫이 아니라 지지자들의 몫이다. 아니면 그것은 임금의 자리에 앉아서도 과거의 피해에 망상으로 빠지는 폭군과 간신의 모습일 뿐이다. 칭찬으로 크는 것은 아이의 시간이다. 비판으로 강해지는 모습이 책임을 지는 이들의 성숙된 모습이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지만 비판의 문을 통과하지 못한 비판은 상대의 눈을 가리고 진부(陳腐)의 길을 가게 만든다. 봉건시대에도 충언과 충신은 쓰고 감언 간신은 달다며 경계를 한 이유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에서 일이다. 왕이 신하에게 좋은 인재를 등용하여 성공한 정치를 할 수 있는 법을 물었다. 그때 곽외라는 이가 한 말이다. “천하의 제왕은 승승과 함께 합니다. 일국의 왕은 친구와 함께 합니다. 제후라면 간신히 신하와 함께 합니다. 그러나 나라를 망치는 정치가는 발 아래로 부리는 자들, 찬양하는 자들만 찾습니다.”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큰 정치는 스스로 겸손하여 배우는 정치를 한다. 배운다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성찰을 통해 가슴을 열어 소통하는 정치다. 나쁘지 않는 정치는 뜻이 맞는 친구들과 의리의 정치를 한다. 지역정치를 하는 이들은 이익을 같이 하는 부하의 정치를 하고, 최악의 정치는 노예들의 정치다. 다른 이들을 미워하고 성내고 무례하고 핑계를 대며 비난만 하며 자기 찬양만 열중하는 정치가 노예정치다. 문재인 정권과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은 지금 남한의 정치는 어떤 정치로 흘러가고 있는지 돌아보고 돌아 볼 일이다. 그래서 뉘우치는 모습이 아니라 깨우치는 모습으로 한국 정치사에 빛나는 한 역사를 만들기 바란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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