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사과와 용서?!





“나는 이번 여름방학 때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뭔데?”  “아빠를 만들 거야!”


『별맛일기』 2권 <김치말이 국수> 편의 일부 내용이다. 아이들과 함께 읽을 때, 항상 요 대목에서 친구들이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럼 난 모른 척하고 계속 읽자고 한다. 읽다 보면 엄마만 있는 별이가 아빠와 사는 미나에게 두 사람을 연결해 주자며 작전을 짜자고 한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아이들의 모습과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 그러다 이야기가 끝날 쯤 부모님들이 ‘이제 우리 사이 공개해도 될 것 같아요.^^’라고 핸드폰 문자를 주고받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면 읽던 아이들이 모두 잘 됐다고 환성을 지른다. 마치 자기가 미나나 별이인 것처럼 좋아한다. 금방 별이와 미나의 마음이 된 것이다. 



『별맛일기』는 만화책이다. 어린이월간지 《고래가 그랬어》에 연재되었던 만화다. 단순히 연필로 그리고 쓴 흑백만화다. 하지만 결코 단순한 만화책은 아니다. 소박하고 건강한 요리법이 소개된 요리만화책이다. 실제 아무 색도 칠해지지 않았지만 읽다 보면 연한 노랑과 분홍이 느껴진다. 나는 이 책에서 <김치말이 국수>편을 제일 좋아한다. 엄마, 아빠의 결혼을 응원하는 아이들 모습이 참 신선하다. 사실 어린이책에서 부모님들의 이혼이나 재혼에 대해 다룬 책들은 좀 있다. 한부모 가정 이야기도 제법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 책에서 아이들은 어른들의 결정에 따라 힘든 마음을 견뎌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 책 주인공 별이는 다르다. 아빠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솔직히 보여주고 아빠를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드물게 아이가 엄마의 결혼을 도와주는 책으로 에즈라 잭 키츠의 『루이의 아빠 찾기(Louie’s Search)』란 책이 있기도 하다. 그 책에서 루이는 우연히 아빠와 엄마를 연결해주게 되었다. 그에 비해 『별맛일기』의 별이는 아빠를 갖고 싶어 스스로 적극적인 중매쟁이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가정을 꾸렸을 때 별이는 가정을 행복하게 꾸려갈 책임 있는 한 사람이 된다. 

 

이 책은 요리만화책이니 배우고 싶은 요리편부터 순서 없이 봐도 된다. 하지만 그렇게 읽다 보면 처음부터 다시 읽고 싶어진다. 그러니 차례차례 천천히 읽어야 하는 재미있는 책이다. 여럿이 함께 본다면 만화 캐릭터에 맞게 실감나는 목소리로 역할을 나누어 연극하듯이 읽으면 더 재미있는 책이다. 미혼모나 다문화, 동성애에 관한 문제나 기타 사회적 이슈가 되는 일들도 다루고 있으니 그런 것들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이야기 나누며 읽어도 재미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재미있게 읽는 방법은 맛있는 일기인 만큼 주인공 별이의 요리를 직접 따라하며 맛있게 읽어주는 게 가장 재미있게 읽는 법 아닐까?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정선화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는데...


더불어 민주당만 신나는 잔치가 된 선거가 끝났다. 선거결과를 요약한다면 ‘수구 반동 폭망, 중도 보수 대박, 진보 변혁 깜깜’ 정도 되겠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선출제도인 선거를 ‘귀족제도’라 했다. 선거 결과가 항상, 귀족적 힘을 가진 존재들의 잔치이기 때문이다. 돈 많은 부자들, 정치적 유력 인물들, 아주 유명하고 인기가 많아 돈과 권력에게 쓰임새가 요긴한 인물들의 승리만 있는 뻔 한 경주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혁명의 결과지 타협의 결과가 아니다. 민주공화라는 정치 체제는 노예적 질서, 봉건적 체제에 대한 노동자 민중들의 ‘신민(臣民)에서 시민(市民)’ 혁명적 각성의 과정, 지배자들의 목을 매달고 자른 단두대의 시간을 거쳐 왔다. 민주주의는 신분, 종교가 만든 세습되는 특권과 부정부패한 반칙들에 대한 민중들의 역사적 승리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서구의 정치에서 보듯 신분과 종교를 대신한 ‘돈’이라는 우상이 그 과정과 형식을 지배하면서 다시 한 번 정치를 기득권의 전유물로 전락했다. 그래서 선거는 민주주의 유일물이거나 유일 형식이 아니다. 외려 선거는 ‘면피와 은폐의 기능’이 강력해 가장 유능한 지배계급의 권력 유지의 절차다. 선거가 흔히 조직과 바람의 대결이라 하지만 바람조차도 지극히 조직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른바 국정원 댓글과 드루킹 소동에서 확인한다. 치장이 아닌 진짜 민주주의를 위해서 이번 선거 결과보다 광화문 광장의 촛불로 태운 시간이 더 소중한 이유다. 

    

한국에서 선거는 4.19를 만들었지만 유신독재의 성립 수단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선거는 양날의 칼이다. 돌아보면 노동자 민중의 거대한 저항이 세상을 흔들었지만 선거를 통해 세상은 다시 옛날로 퇴행한 다람쥐 쳇바퀴가 우리 현대사이기도 하다. 장면 정부 직전에 4.19, 양김시대를 만든 1987년 시민항쟁 노동자 항쟁, 김대중 정부 직전의 날치기 총파업, 노무현 정권 직전의 미군 장갑차에 학살된 여중생 죽음으로 만든 촛불 항쟁, 그리고 이번에 탄핵 촛불항거까지 낡고 부패한 불의의 지배 권력을 붕괴시킨 것은 노동자 민중이었지만 그 성과물은 선거를 통해 기득권을 양분한 보수 야당세력의 몫이었다. 죽 쒀 개주는 시간은 변하지 않았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의 승리는 과거와의 투쟁에서 현재의 승리다. 과거에게 뺏긴 현실의 10년을 그 적폐의 세상을, 극단의 세계를 보수라 부르는 것은 반(反)상식이다. 수구, 반동, 전제의 시간은 보수가 아니라 파시즘적 반동이다. 그럼으로 민주당의 승리는 수구에 대한 ‘합리, 상식’적 보수, 기껏 잘해야 흔히 말하는 ‘중도 보수’의 승리다. 민주당을 진보라 부르는 것은 수구세력이 자기를 보수라 주장하는 것만큼 정치적이다. 하지만 박근혜를 보수라는 부르는 것이 민망한 만큼 민주당을 진보라 부르는 것은 혼란하고 뒤틀린 개념이다. 예를 들면 탄핵의 역풍으로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노무현 정권이 진보의 최소의 전제, 아니 자유주의적 보수의 최소한의 자부심인 정치사상의 자유를 거부하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하지 못한 이유가 당시 자유 한국당의 전신 한나라당의 반대가 아니라 실은 노무현 정권시기 민주당 안에서 조차 국보법 찬성 의원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문재인이 보여주는 일관적인 안보관은 전형적인 ‘보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민주당을 진보라 하는 것은 유신 독재와 친일 잔재를 민주와 독립운동 세력이라 말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다.


망한 보수를 되살리기 위해 국민을 바보로 여기는 변신 쇼가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데 오른쪽 날개만 단 기형 새가 이승만 정권이다.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운 것이 있다면 분단정부 수립 자체가 아니다. 서구인들의 눈으로 불가능해 보였던 민주주의,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라는 민주주의를 만들어 온 역사를 살았기 때문이다. 분단과 독재와 독점과 부정부패와 반칙으로 이어진 오욕의 역사, 참담한 역사 속에서 근대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위대하다. 1987년 대투쟁으로 만들어진 현행 헌법이 헌법 정신을 반제 자주 3.1운동과 반독재 민주 4.19에서 찾는 것은 그것만이 자랑스러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본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문재인 정권의 수립은 70년간의 오도된 ‘오른쪽 날개’의 정립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형성했지만 상처지고 오염된 우익을 치유하고 재활하는 과정이고 지난 대선과 이번 선거라 할 만하다. 한국정치에서 제대로 된 진보 보수 정치의 정립을 위해서라도 자유한국당류의 수구 반동의 부활이 아니라  진정한 보수정치의 역사와 맥이 세워져야 한다. 문재인 정권을 축으로 민주공화국을 만들고 지켜온 그들의 역사를 정립하는 것이다. 상해임정과 김구와 4.19를 계승하고 5.16에 저항하며 유신 독재에 총구를 겨눈 김재규를 품고 양김과 노무현과 문재인으로 이어지는 자기들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 남한에서 보수정치의 정상적인 구축이다. 


우익, 오른편의 날개가 지나치게 과잉되어 날개를 몸통으로 여기는 몽매가 판을 치는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좌익, 왼편의 날개는 돋다 만 존재다. 진정한 좌익이 형성될 최소한의 전제를 부정하는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조건에서 ‘진보’라는 말 자체가 눈물겨운 사투였다. 그 사투를 감당한 것은 조봉암의 진보당 이후 민주노동당 이었지만 수구의 득세가 보수라는 말을 오염시키자 진보라는 말을 자유주의적 보수 세력이 탁란(托卵)을 통해 진보완장을 차고 있다. 박근혜가 진보의 겉, 붉은 색을 날치기 하자 민주당과 그 주변은 아예 진보의 속살을 가로 챈 꼴이다. 그러니 여전히 한국은 좌익이 없이 나는 불완전하고 불안한 외날개 새라는 것이다. 좌우익을 갖춘 정상적인 새가 되기 위해 시민들의 과거 적폐에 대한 적대의 눈과 함께 미래를 새롭게 여는 눈도 떠야 한다. 민중당 후보와 전혀 새로운 정치를 말하는 무소속 젊은 후보가 낙선하는 것을 보며 과거를 보되 미래를 보지 목하는 맹목의 정치, 남한 정치의 본질적 적폐가 그대로 살아 있음을 본다. 절반의 승리를 완전한 승리로 만들기 위해 노동자 민중들의 민주적 진보적 지혜가 더욱 필요한 이유다. 한국 정치에 왼쪽 날개를 만드는 선거제도와 정치를 위해 과거를 보는 눈과 더불어 미래를 보는 눈도 뜨자.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기고] 6․15 선언 18주년에 향후 18년을 본다 




6․15 선언은 5대 실천선언이다. 자주, 통일, 인도, 교류, 대화를 세상에 표방한 남과 북의 약속이다. 이전에 정권 차원에서 추진하였던 남북의 어떤 합의보다 정치적 악용 가능성이 낮아 실천가능성이 높았던 민족선언이었다. 왜냐하면 국민의 뜨거운 지지와 열망, 남북 정상(정부) 간의 합의, 추상적이지 않고 현실에 기초한 약속 등이 있었기에 그렇다. 하지만 이명박정권으로 바뀌면서 남북관계는 반북대결로 치달아 전쟁위기로 치달았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행히 촛불혁명은 일거에 전쟁의 광풍을 잠재우고 평화를 불러들였다. 어둠의 세력을 탄핵하였다. 촛불혁명은 군주민수(君舟民水)의 원리를 일깨워주었다. 

 촛불! 따스운 촛불, 2016년 길고 추운 겨울을 덥혔던 촛불의 힘!! 여전히 그 따스운 열정과 따듯한 힘과 뜨거운 정신은 살아남아 있음을 목도한다. 촛불의 정신은 세 개의 핵심어 “평화” “정의” “민주”로 나타난다. 실제로 이런 가치가 조금씩 실현되고 있음을 보고 있다. 제7회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표심의 결과도 결국 이를 실현코자 하는 시민의 정치적 선택임을 알 수 있다. 외형적으로는 민주당의 승리라고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평화를 갈망하는 국민의 염원이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6․15선언의 정신은 촛불정신과 맞닿아 있다. 그렇다. 6․15의 실천정신인 대화, 교류, 인도, 자주,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촛불정신인 민주, 평화, 정의를 우리에게 내재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2000년의 6․15선언 후 18년, 이후 18년에는 평화통일이 이루어져 있음을 보고 싶다. 혜안을 가진 이라면 그간 역사의 발전과정으로 보건데,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어있음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18년 동안 6․15선언, 10․4선언, 판문점선언, 북미회담이 열렸고, 평화의 시간표가 하나씩 짜지고 있다. 군사적으로 평화의 조치(비방방송 중지, 군사훈련 중단, JSA의 비무장화)가 취해지고, 체육교류, 개성공단 재가동 등 평화를 위한 방안들이 속속 등장할 것이다. 조만간 경의선을 타고 경원선을 타고 동해선을 타고 묘향산으로 명사십리로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가고, 북녘을 넘어 만주로 그리고 시베리횡단철도(STR)를 타고 모스크바, 베를린, 파리, 런던, 마드리드도 갈 수 있을 날이 18년 내에 이루어리라 본다.

  평화는 경제이다. 평화는 생명이다. 분단 비용보다 통일의 편익이 상상을 초월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함을 알 수 있다. 우리 남쪽의 기초자원(인구, 국토 등)을 놓고 볼 때 경제규모는 더 성장할 여력이 크지 않다고 한다. 통일이 되었을 때 단순한 2배가 아닌 수십 배의 시너지효과가 발생한다고 한다. 대내적으로는 그렇지만 대외적으로는 외세(일본, 미국, 중국 등)에 흔들리지 않는 자주통일국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지난 18년을 거울삼아 현 2018년의 평화를 잘 관리할 때 향후 18년 내에는 평화통일이 되어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구로금천 안병순대표

머리를 멋지게 손질해 드립니다~

가산동 미용봉사동아리 '나.도.함'을 소개합니다




미용실 얼마나 가시나요? 짧게는 한 두 달에 한번 가는 미용실, 동네에 눈만 돌리면 한,두개는 꼭 있는 미용실. 누구나 쉽게 이용하는 곳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미용실 한번 가기가 쉽지않다. 값비싼 비용에 선뜻 발걸음을 나서기도 어렵고, 조금이라도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은 더더욱 그렇다. 이런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자 우리동네 가산동에는 어르신들과 동네주민을 위한 ‘나도함’이 있다.

이미 지역 명소가 된 범죄예방디자인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한 가산동의 공유공간 ‘지킴마루’그 지킴마루에서 한 달에 두 번 미용봉사를 하고 있는 ‘나도함(나눠주고 도와주고 함께하는 모임)’ 에서 봉사를 해오신 지킴마루 임석임 총무님 만나보았다.

 

‘나.도.함’을 처음에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현재는 아니지만 통장을 했었다. 지킴마루를 처음 만들 때도 함께 했습니다. 그 와중에 주민센터에서 이웃서로 잇기 사업 얘기를 들어서 우리 동네를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미용실 원장님이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을 양쪽에서 아들들이 부축해 미용실을 다녀온 것을 보니 너무 안 되어 보였다고 해요. 기술이 있는데 그냥 쳐다만 보니 내 자신이 한심하다.라는 얘기를 듣고 주민센터 사업이 있으니 어르신들의 위한 미용봉사를 해보자고 해서 했습니다. 2017년 4월에 시작했고, ‘나도함’이란 이름도 한 달 넘게 고심하다가 지은이름입니다. 간단하면서 뜻이 있죠?

미용봉사를 한 첫날의 풍경?

설레임과 걱정이 반이었습니다. 과연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진짜 이게 쉬운일이 아니더라구요. 살림하던 사람들이 아침 일찍 나와 청소 하는 거, 저녁 늦게 방범 보는 거(지킴마루 활동) 이런 것도 힘든데 나도함까지 할려고 하니 체력적으로 심적으로 힘들고 걱정이 많았지만 막상 하고나니 뿌듯했습니다. 아 ! 우리가 이런 것도 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은 일?

미용을 하는 공간인 지킴마루가 반지하다 보니 계단이 몇 개가 있는데 하루는 거동이 불편하신 분을 양쪽에서 들어서 내려오는데 어르신이 아프다고 소리를 치시는데  겁이 막 났습니다. 과연 이걸 할 수 있을까? 했던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어르신들이 빈손이 아니라 뭘 가지고 오세요.  음료수나 간식 등을 가지고 오시는데 여기서 전도 부치고 간단한 간식들은 ‘나도함’ 멤버들이 집에서 만들어와서  절대로 가지고 오시지 말라고 하는데 가지고 오시니 부담이 될 때도 있지만 정작 본인들이 미안하시니깐 많이 챙겨 주십니다. 그래서 강경하게 거절을 못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여기에 오셔서 머리뿐 아니라 모여서 같이 간식도 먹어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뿌듯하고 좋습니다.


힘든 순간 

동 주민 사업이다보니 컴퓨터로 서류를 작성하는데 그게 가장 힘들고 어렵습니다. 미용봉사보다 컴퓨터가 더 힘들게 느껴져요. 휴대폰으로 밴드에 올리는 정도는 할 수 있는데 컴퓨터로 직접 서류를 작성하는 일은 어렵다보니 주민센터 직원에게 부탁을 하는게 너무 미안해서 내가 직접하고 싶은데 쉽지가 않습니다.


나도함에 오시는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얘기가 있나요?

원래 10시부터 하는데 어르신들이 일찍 오십니다. 어느 날은  아침 7시에 오셔서 10시까지 기다린다고 하시는데 우리도 새벽에 청소하고 손자들 학교 보내고 아침에 할 일들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장님이 다 해드려야 된다고해 일찍 문을 열어 머리손질을 다 해드립니다. 그리고 순서에 예민하셔서 순서대로 안하면 화내시고 어떤 분은 얘기만 하시고 볼일보고 오셔서 본인순서라고 막무가내식으로 해달라는 하시는데 잘못하면 싸움날거 같아서 걱정이 됩니다. 미용 봉사일에는 예약을 받지 않는데 예약하고 가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시간하고 순서를 잘 지켜주시면 정말 감사하고 좋겠습니다.


앞으로 바라는 점은 무엇인가요?

이종선 원장님이 얼마 전에 사고가 있으셔서 다리가 아프세요.  저도 몸이 많이 아프고 나도함 멤버들도 성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다들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다보니 도 아플까봐 걱정도 되고요. 건강하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몸이 따라줄 수  있는 한 계속 나도함을 하고 싶습니다. 

나도함을 처음 할 때 포부는 진짜 어려운 사람들, 건강하지 못하고 힘드신 분들에게 미용봉사를 하기위해서 시작을 했는데 점점 식구들이 많이 늘어나고 지금은 전화를 안 드려도 많이들 찾아오세요. 머리를 안 하더라고 찾아오셔서 같이 수다를 떠는게 정말 좋습니다. 앞으로도 할 수 있는 한 계속 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다리를 다쳐 아픈데도 불구하고 재능기부를 하고 계신 이종선원장님도 “동네어르신들과 많은 소통이 되고 다른 분들고 알아서 그게 참 좋았고 아픔보다도 보람이, 기쁨이 더 큼니다. 동네어르신들도 좋아하시고 기회가 된다면 앞으로  계속 하고 싶습니다.”고 얘기하시고 얼른 자리로 어르신의 머리손질을 해드렸다.

미용실에 흔히 있는 머리감는 의자도, 여성잡지도, 셋팅기도, 심지어 큰 거울에 높이가 조절되는 의자도 하나도 없고 미용실이지만 가장 따뜻한 미용실이 아닐까?

둘째,넷째 금요일 가산동 지킴마루에는 머리에 보자기를 뒤집어 쓴 동네 어르신들이 잡지책이 아닌 ‘나도함’ 멤버들이 손수 준비한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수다방이 활짝 열린다. 



김진숙 기자

gcinnews@gmail.com

마을과 만나는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교양강좌


'국왕의 나라 태국의 인권 이야기'

 

 

2018626일 오전 10-12

강사 : 박은홍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장소: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시흥5동 탑동초교 근처)

지역 주민 누구나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풍부한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해변, 싸고 맛있는 음식, 화려한 밤문화, 방콕, 푸켓, 치앙마이 등 여행 가보고 싶은 나라 태국이 아닌 군사정부와 왕실의 권력이 지배하는 나라, 태국의 민주화를 외치는 젊은이를 왕실모독죄로 감옥에 보내는 나라,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태국을 만나 봅니다.

 

태국 몽꿋왕 역을 한 율브린너 나오는<King and I>보셨나요? 태국에선 상영금지인 영화입니다. 영국에서 온 여인이 왕과 왕자들을 서양문명의 세계로 인도하는 장면이 주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영화를 오리엔탈리즘으로 해석합니다. 거만한 서양의 시선으로 동양을 폄하해 묘사했다는 겁니다. 좀더 세게 말하면 제국주의 시각을 담고 있다는 겁니다. 태국 왕실은 주변국들이 서양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상황에서도 국가주권을 지켜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2006년 쿠테타 이후로 왕실모독죄 위반 사례가 급증하였습니다. 국왕이 쿠데타를 인정해주었기 때문입니다. 태국에서 왕실을 모독했을 경우 최대 15년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국제인권단체들이 계속 경고를 보내고 있지만 요지부동입니다.

 

주권을 지켜냈던 태국왕실, 그렇지만 인권탄압의 명분이 되고 있는 태국의 왕실, 어떻게 이해야할지, 같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빅데이터 - 미래를 예측하는 기술


올해 대학원에 들어간 조카를 만났다. 무엇을 전공하냐고 하니 ‘빅데이터’를 연구한단다. 

4차 산업혁명에 맞추어 도서관도 변화를 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 같이 작은도서관에서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작은 공간과 적은 비용, 정리되지 않은 많은 정보들 속에서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지? 

몇 년 전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이 있었다. 최고의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과 바둑의 최고 중 최고 인간 실력자의 대결이었다. 과연 인간 대 로봇, 누가 이길 것인가 가슴 졸이며 봤다. 최종 결과는 알파고가 4승 1패로 이세돌에게 승리하였다. 알파고가 이긴 것은 빅데이터 덕분이란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4차 산업혁명 등 요즘 많이 듣는 말들인데 이에 관한 책들이 어려워서 쉽게 읽히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반가운 책을 만났다. 이제 막 5월에 나온 <빅데이터, 미래를 예측하는 기술/안지선 글>은 초등 고학년 이상 읽을 수 있게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빅데이터란 무엇이며 어떻게 널리 활용되고 있는지 다양한 예시를 통해 살펴보고, 국내외의 많은 연구 사례는 빅데이터가 우리 삶 속에 어떻게 들어와 있는지 꼼꼼하게 정리해 준다. 빅데이터의 개념과 함께 실제로 빅데이터가 바꾸어 놓은 세상의 모습,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기술이 미래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얘기해 준다. 

날씨를 예측하는 기상청의 슈퍼컴퓨터와 자동차 내비게이션, 대중교통 안내 시스템, 그리고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스마트폰 등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서비스들은 대부분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기술들이다. 

빅데이터는 세상을 바꾸어 놓는다. 인공지능과 사물 인터넷이 결합한 전자 기기들이 지금보다 훨씬 똑똑해질 거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 목이 말라 냉장고에 가서 물을 찾으면 사용자의 생체 리듬에 맞도록 온도가 조절된 물이 냉장고에서 제공된다. 평소 몸에 늘 지니고 다니는 스마트폰, 몸에 간편하게 착용할 수 있는 스마트 기기들인 웨어러블 제품이 사용자의 생체 리듬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냉장고와 스마트폰, 웨어러블 기기 등이 인터넷 네트워크로 늘 연결되어 내 몸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체크하고, 그 데이터에 근거해 내가 마실 물의 온도를 컴퓨터가 결정해 주는 것이다. 

웨어러블 기기나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생성된 건강 데이터는 내가 자주 다니는 병원의 진료 시스템에도 함께 저장된다. 호흡이나 심장박동 등에서 평소와 다른 증상이 발견되면 적절한 처방이 스마트폰 메시지로 전송된다. 이 원격 진료 시스템에는 유전자 정보와 현재 상태도 저장되어 있어서 질병이 생길 가능성까지 예측해 준다. 참으로 편한 세상이 다가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기계에 의해서 내가 통제되고 있고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좀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내가 움직이는 것이 모두 데이터로 쌓이고 그것은 또 다른 프로그램에 의해 분석되어져 활용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빅데이터의 시대가 되면 교실에도 혁명이 이루어지고, 우리 사회도 더욱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빅데이터, 인공지능, 사물 인터넷 등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 혁명시대에 우리는 좀 더 편리하고 바른 서비스들을 기업이나 국가를 통해 제공받게 되겠지만 그만큼 우리도 모르게 더 많은 통제와 감시를 받는 사회가 될 수도 있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김현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책]사자가 작아졌어 ! -진정한 사과와 용서?!



“으악- 형아!! 흐아앙~” 다급한 절규에 이어 울음이 터져 나오는 동생. 

“그러니까 이런 걸 왜 여기다 놔둬?” 

급한 마음에 자기 잘못을 얼렁뚱땅 상대방 탓으로 돌리며 큰소리치는 형. 

동생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가장 아끼는 물건을 형이 냉장고 문을 열다가 밟아서 박살을 낸 것이었다. 파는 것이 아니니 똑같은 걸 사줄 수도 없고 만들어 주자니 재료 수급부터 만들기까지 동생 특유의 꼼꼼함을 따라갈 수가 없다. 늘 그렇듯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레퍼토리는 사과의 말, “미안~.” 말은 내뱉었으나 내가 봐도 참 형식적이고 영혼 없는 사과다. 동생이 화를 풀고 용서를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미안하다’는 말 자체가 아니라 말을 하는 태도와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에 달려있을 터.

 <사자가 작아졌어!>는 육식동물 사자와 초식동물 가젤이 등장하는 그림책이다. 평소처럼 점심을 배불리 먹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던 사자에게 갑자기 몸이 작아지는 일이 생겼다. 개울을 건너다 물에 빠진 사자를 구한 게 가젤이고, 가젤은 자기가 사자를 구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며 절망에 빠진다. 왜냐하면 사자가 어제 점심으로 먹은 것이 바로 가젤의 엄마였던 것. 엄마를 빼앗기고 점심도 저녁도 굶으며 엉엉 울었던 것을 떠올린 가젤은 사자를 당장 다시 물에 빠트려 버리겠다고 한다. 사자는 자기를 물에 빠뜨려도 달라지는 게 없다며 가젤의 마음을 달래주려고 애를 쓰기 시작한다. 아프리카에 없는 꽃들을 따다 주고 노래도 불러주고 가젤의 뿔에다 멋진 그림도 그려주고 빗으로 털을 가지런히 빗어주고 심지어 발도 닦아준다. 이 정도면 가젤의 마음이 풀렸을까? “다 소용없어. 그냥 우리 엄마를 돌려 달란 말이야!” 오히려 더 슬퍼진 가젤. 가슴이 막히고 숨쉬기도 힘들어하며 울기만 한다. 그걸 본 사자가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꺼내는 말, “그럼..., 날 먹어.” 그러고는 작은 접시 위에 작은 몸을 웅크리고 누워있다. 가젤은 어떻게 했을까? “이제 됐어, 아무것도 필요 없어. 풀만 먹는데 너를 어떻게 먹어? 나도 엄마가 다시는 못 돌아온다는 걸 알아, 그래서 슬픈 거야. 나는 죽을 때까지 엄마를 잊을 수 없으니까.” 똑같은 방법으로 되갚아 준다고 해서 마음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젤도 알고 있는 듯하다. 사자는 가젤의 눈물비를 맞으며 가젤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가젤처럼 다시는 엄마를 못 본다면 정말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젤의 입장이 되어본 것이다. 그리고 가젤의 얼굴로 기어 올라가 눈물을 정성껏 닦아주고 콧등위에 엎드려 포근하게 안아주며 진심어린 사과를 한다. “널 슬프게 해서 미안해.” 

오랫동안 가젤을 안아주고 싶었지만 사자는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순간 다시 커져버렸기 때문에. 그럼 결론적으로 사자의 사과가 가젤의 마음을 달래준 걸까? 가젤은 사자를 정말 용서한 걸까? 커져버린 사자와 가젤은 그 후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책의 엔딩 장면을 보고는 씩 웃으며 책을 덮었다. 


그래.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 마음을 다해 함께 울며 안아줄 수 있는 것, 그것인가 보다. 진정한 사과란. 


“네가 먼저 그랬잖아!”

“아니거든!”

“형아가 그런 거 다 알아!”

“무슨 소리야!..”

평화로운 저녁이다 했건만 형제들의 티격태격 다툼소리가 또 들려온다. 사과하기와 용서하기의 타이밍이 온 것이다. 흑... 과연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고 진정성을 담은 사과와 용서의 시간이 될 것인가. 영혼이 담겨 있든 없든 ‘미안하다’는 말 자체도 꺼내지 못하는 어른들이 많은 걸 보면 아이들에게도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어쨌거나 내가 원하는 평화의 시간은 언제 오려나...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윤미희

                                 



[기고]똥 씌운 비단 보자기가 되려는 사법부(司法府)


대법원에 절망한지는 참 오래됐다. 1,2심을 뒤집어 부당하게 해고된 KTX 여승무원들에게 복직대신 빛 1억과 동료의 죽음을 선사한 것이 시작이었다. “통상임금 소송에서는 ‘신의칙’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해괴한 말로 노동자의 정당한 임금청구권을 제약했을 때, 콜트 콜텍 정리해고 사건에서는 장래 경영상 위기에 미리 대비하기 위한 정리해고도 정당하다고 했을 때,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에서는 고등법원이 회사의 회계조작 사실을 추가 증거 없이 결과를 뒤집어 버렸을 때 내 마음속에서 대법원은 헬 조선의 막장의 위치에서 고사하고 있었다.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 집행정지 사건에서 노동부의 재항고를 받아들이면서 ‘청와대, 대법원 양측에 모두 윈-윈하는 결과’라 할 때 대법원은 아예 권력의 시녀가 되었다. 대법원의 타락은 법원 전체의 타락이다. 사법부(司法府)가 사법부(死法府)가 되더니 아예 돈과 권력을 위한 살법부(殺法部))가 되었다. 

 

대법원의 책임은 법의 공정성과 일관성에 대한 수호에 있다. 공정성에는 사회적 균형감각에 의한 관용도 섞여 있다. 동일한 도장이지만 갑의 도장과 을의 도장은 품은 힘에서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난다. 갑은 그의 힘으로 사태에 대한 상황과 증거를 수십 개 만들 동안 을은 진실 된 증거 하나 지키기도 어려워 오직 양심에 호소하여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세상에서 대법원은 법의 정의로움을 민중들에게 보여 줘, 법을 통한 해결이라는 사회적 믿음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보통 1심보다는 2심이 양형을 줄이고, 2심보다는 대법이 조금 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고통을 이해하는 판결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근혜시대 양승태 대법원장의 시간은 이것이 거꾸로 흘렀다. 우리는 대법원 판사들이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개인적 편향의 문제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스스로 그것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음모적이며 더러운 양아치들의 공모였는지가 밝혀졌다.


양승태는 그 기본이 양아치다. 오직 자기의 실리가 옳고 그름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양아치 의식의 최고봉은 ‘돈만 되면 뭔 짓을 해도 되고’ ‘당선을 위해서는 뭔 말을 해도 된다’는 이명박이다. 하지만 그는 본판이 장사꾼이라 그렇게 닳고 닳아 만들어진 생이라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법관은 그러면 안 된다. 선의와 양심까지 바라지 않아도 시쳇말로 직분에 대한 ‘가오’는 있어야 한다는 최저한 중 최저한의 기대조차 저버린 양승태의 ‘재판을 정치권력과의 거래 수단화’는 우리사회에 대한 가장 절망적인 표현인 ‘헬조선’의 ‘헬’조차도 너무 가벼운 은유라 생각하게 한다. 

타락한 힘들, 타락한 명예들, 타락한 권위들이 만들어 논 결과를 보면 그 계급적 선명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번 법란(亂)의 특징은 판사들의 직업적 이익을 위해 스스로 정권에 부역한 것이다. 문제는 부역의 내용이 모두 노동자·사회적 약자의 마지막 법의 호소에 대한 난도질이었다는 점이다. 모든 타락은 부정한 돈과 권력의 흉기가 된다는 말이 선명하게 입증한다. 얼마나 무서운 가진 자들의 계급적 당파성인가?


다행히 법학교수, 법학자, 변호사 등 법률가들이 지난 5일 ‘대법원 사법농단 규탄 법률가 기자회견’을 열고 거리 농성에 들어갔다. 그분들은 말한다. “법원은 우리를 한 번 판결로 좌절시켰고, 재판 거래 의혹으로 두 번 눈물을 흘리게 했다”, “우리 법률가들은 변호사로서 독립성과 공정성을 내팽개쳐 버린 법원에서 재판할 수 없고, 교수로서 스스로 헌법과 법률을 부정하고 독립성을 포기해버린 법원이 권력과 유착하는 사회에서 법학을 연구하고 가르칠 이유가 없다”,며 “시민의 권리를 살피기보다는 절대 권력의 눈치를 보기 바빴던, 동료 판사의 재산과 친구관계를 감시하는 데 여념이 없던, 상고법원 도입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거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들을 단죄하기 위해 새로이 고발에 나선”것이다. 대법원이 스스로 자폭한 현실에서 다시 대법원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는 법조인들의 노력조차 없다면 법이 우리에게 왜 필요할 것인가? 


그런데 더 놀라운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 서울고법 부장판사들이 판사회의를 통해 ‘고발이나 수사 의뢰는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낸 것에 이어 전국 법원장 회의에서 “사법부에서 고발, 수사 의뢰 등의 조처를 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합리적인 근거 없는 이른바 ‘재판거래’ 의혹 제기에 대해 깊이 우려한다”고 하여 진실규명은 필요 없고, 국민들은 이제 그만 떠들라는 경고를 한 셈이다. “사법행정권 남용 행위가 법관의 독립과 사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 하고 그 책임을 통감한다”, “사법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개혁방안이 신속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으니 문제가 있는 건 인정하는 모양인데 ‘진실규명과 관련자들의 처벌’은 부적절하다는 결론은 어떡해야 나오는 가능한 결론일까? 낡은 집을 부수지 않고 어떻게 새로운 집을 지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 모습은 참 흔하다. 한국 지배문화의 중심 ‘꼰대들의 전형적인 사태 해결책’이다. 벌거벗은 임금과 그 주변 위선들의 수법이다. 타락한 자들은 타락에 대한 반성과 혁신이 타락을 털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싫어한다. 새로움은 낡음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사와 법원장 그리고 고법 판사들은 양승태의 대법원 양아치화에 덕을 봐 지금 지위에 도달한 이들일 것이다. 운명공동체나 다름없으니 그들은 이미 벌거벗은 몸을 가리는 대신 다른 이들의 눈을 가리려 한다. 기존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진실을 묻거나 외면해야 한다. 그 결과 나오는 흔한 모습이자 바로 지금 저 모습이 타락된 한국 역사가 만든 적폐의 전형이다. 마찬가지로 타락이란 노동자 민중의 입장을 떠나, 가진 자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최저임금을 통해 2500만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능욕하는 현 정권도 자기들의 첫 마음에서 얼마나 타락한 것인지 타락하고 있는 것인지 돌아 볼 일이다. 타산지석(他山之石)하란 말이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16살의 시선] 지방선거에 대하여

 

6월달에는 쉬는 날이 두 개 있다. 정확히 말하면 평일에 쉬는 날이겠지. 바로 현충일이랑 지방선거 날 인데 솔직히 나는 지방선거 날이 좋다. 쉬니까. 그 뿐이다. 나는 지방선거에 1도 관심이 없다. 내가 뭐 관심이 없는 걸 수도 있지만 아니면 구청장이나 시장이 안 바뀌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솔직히 나 사는건 똑같다. 구의원, 구청장, 교육감 이런 사람들이 바뀌어서 내 생활에 크게 좋아진 점이나 그런 건 없는 거 같다. 후보들 보면 되게 열심히 홍보하던데. 그게 되면은 돈은 많이 버나보다. 뭐 그렇겠지. 어쨌든 내 생활에 좋게 흘러간 적이 없으므로 나는 관심이 없다. 솔직히 공약 같은 거 봐도 크게 와 닿지 않는다.

뭔 뜻인지도 이해도 안 되고 실제로 저런 것이 다 지켜지는가 생각하게 된다. 공약 중에 웃긴 공약도 있다. 뭐 구로의 지명을 남구로 바꾸자든가 강남을 따라가자는 등 공약이 있다. 솔직히 지명 바꾸는 건 좀 오버다. 강남을 따라 가자라.. 그렇게 돼서 집 값 비싸지면 싫은데. 그냥 구로는 구로가 낫다. 완벽하지 않은, 어딘가 어설픈 점이 섞여있는 구로가 낫다. 강남하면은 뭔가 엘리트 느낌 나고 그러니까. 뭔가 나도 그런 사람들이 돼야 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공약을 내걸었으면 꼭 좀 지켰으면 좋겠다.

그리고 또 그 밖에 눈에 띄는 점은 딱히 없는 거 같다. , 그러고 보니 파란색이 1번이 되었다. 어렸을 때 빨간 색만 1번인 이유가 몹시 궁금했었다. 그래서 걍 멋있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색만 멋있어서 실망을 조금 했다. 뭐 파란색도 색만 멋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설마, 그러겠어.

그리고 3번은 초록색이다. 안철수 이 분은 대통령 나가셨다가 서울시장으로 나가신다는데.. 솔직히 난 이 분 잘 모르지만 무슨 일을 하셨던 분인지 안다. 왜 정치 쪽으로 빠지셨을까. 이 분을 내가 어디서 위인전으로 보았는데 지금 욕 먹는기보다 그냥 원래 자리에서 계속 하셨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박원순 7. 청렴도 최악 취업률 최악 뭐 이런 거 들고 나오셨는데 진짠가. 진짜면 조금 심각한 면이 없지 않아 있긴 하다만. 뭐 한국 인데 뭘 더 바라 겠나. 그냥 좀 한숨 이라도 돌리면서 살 수 있었음 좋겠다.

이러는 거 보면 많은 사람들이 정치 쪽으로 나갈려고 한다. 권력의 힘은 역시 좋은 거 구만. 솔직히 진짜 세상 좋게 바꿀려고 나가는 정치인들이 몇 명이 될까. . 나는 아직 권력의 맛을 못 느껴 보았지만 그렇게 맛있는지 궁금하긴 하다.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닌 거 같고 뭔가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거 때문일까. 아님 진짜 돈 때문일 수도. 암튼 돈은 좋은 것이기 때문에 만지고 싶은 마음은 이해가 된다만 그만큼에 중요한 직업을, 그것도 국민들이 뽑아서 준 것이니 실망 시키지 말고 적당히 벌면서 잘 했으면 좋겠다.

교육감 투표도 한다. 후보는 별로 많진 않다. 3명인가 그 쯤 되는데, 솔직히 소~~올직히 이건 내 주관적인 주장일수도 있는데 교육받는 것은 학생들인데 이거는 조금 학생들이 뽑아야 되지 않나 생각을 해본다. ‘니가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냐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어쨌든 나도 지금은 학생이니까 학생으로서 말해본다. 교육 받는 건 학생이니까 이런 부분은 조금 학생의 힘이 필요하지 않을까. 뭐 어른들도 학생이었을 때가 있었겠지만 지금은 우리가 학생이다. 우리가 교육 받는다. 그러니 교육감도 뽑을 권리가 있지 않을까. 뭐 법적으론 온전치 않은 존재이므로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고 대부분 대충 넘어갈 꺼라는 이유에서 그런다면 조금은 이해가 간다. 그래도 교육 관련은 학생의 말을 조금 기울여 줬으면 한다. 솔직히 이런 공부만 하는 세상에 태어나고 싶었던 건 아니니까. 하고 싶은 존재가 아니라 해야 되는 존재가 되버린 게 좀 씁쓸하다.

뭐 다시 말하지만 난 공부를 전혀 안하지만 현실의 뼈저림에 좀, 많이 슬프다. 공부=돈 이라니.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 수 있을 순 없는 건가. 나도 그러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노력은 하지만 솔직히 안 불안한건 아니다. 이대로 공부를 놓아도 괜찮은 건가. 나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건가 생각 할 때가 수 십번 있고 그래서 내 인생은 망했다.’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여러번 있지만 이미 망한 인생이라면 내 맘대로 살다 죽어라.’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어쨌든 지금 내 생활을 이어 가기로 했다. 뭐 내가 아직 철이 안든 게 확실하다.

뭐 지방선거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 정도 이다. 쉬는 날이라서 좋다. 매일 지방선거나 했으면 좋겠다. 현충일 같은 일로 쉬지 말고 지방선거로 쉬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기서 뽑히신 분들은 돈도 좋지만 조금이나마 세상을 좋게 바꾸어 주셨으면 좋겠다. 그러라고 만든 직업이고 뽑은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난 아직 어른이 아니므로 좀 더 어른에게 응석 부려도 되는 존재다. 그러니 꼭 꼭 좀 부탁 합니다. 돈만 밝히지 마세요. 저도 잘 살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그러니 잘 살 수 있는 배경을 좀 만들어 주세요. 뭐 제가 앞서서 한국에서 뭘 바라겠냐 했는데 그래도 기왕이면 좋게 바뀌는 쪽이 서로 좋으니까요. 이상 나의 생각은 여기까지 다. 분량이 조금 짧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지방선거에 워낙 관심이 없다보니 이렇게 되었다. 앞으론 좀 더 세상 일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겠다.

 

중학교 3학년

김강현

 

[장제모칼럼] 화해의 조건


남북한 정상이 만나 화기애애한 시간을 통해 미래설계를 나눔으로 그간에 첨예했던 남북 간 갈등이 진정되고 평화의 조짐이 인다고 좋아했던 게 엊그제인데 다시 남북이 냉랭한 모습이 되고 있어 모처럼 조성된 화해무드가 깨어질까 걱정이다. 여러 해석들이 있지만 현재의 사정으로 볼 때 당초에 기대했던 남북 간의 허물없는 관계를 이루는 데는 시간이 필요함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북한이 갑자기 경직된 자세를 보이는 것은 보통사람들의 일반적 관점에서 볼 때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양 체제 그러니까 양 국의 최고지도자가 그것도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만나 화해와 평화를 이야기하고 그것을 실행한다고 이른바 판문점 선언을 해 놓고도 석연찮은 이유로 다시 냉랭한 분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더욱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이미 약속한 남북 간 고위급 회담 요청에 응답을 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풍계리 핵 실험장 폐기에 한국 등 5개국 초청을 선언해놓고도 남한만 달랑 빼버리고 다른 4개국 언론인들만 초청한 것은 그들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을 무시할 수 없는 사유가 된다. 

이러한 과정이 있게 된 것은 분명 두 당사자 중에 어느 일방이 잘못을 했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해가 가능하다. 아무려면 양국의 정상이 만나 공식적인 회담을 하였고 대외적으로 선언을 하고 그것을 문서화해 놓고도 채 잉크도 마르기 전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뒤늦게 풍계리 핵 실험장 폐기 취재를 위해 제출한 남쪽 언론인들의 입북을 허가했으니 심각한 상황으로 몰고 갈 심사는 아닌 것으로 볼 수는 있지만 솔직히 상호 간 신뢰에 흠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신뢰의 흠을 만든 주 책임자는 누구인가는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외형으로는 분명 북한의 탓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남측 사람들의 일반적 이해인 것 같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그 책임에 남쪽도 자유롭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는데 이에는 ‘그렇다’는 대답을 해야 한다는 게 필자의 의견이다. 

남북은 한 민족이지만 그간의 경과에서 보았듯이 오랜 분단의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은 서로의 체제에 대한 적대감에 더해 가치관적 차이도 컸었다. 이런 사정으로 연민과 이해 그리고 갈등이 불규칙하게 진행하는 관계였고 어떤 때는 서로가 타도의 대상일 때도 있었는데 최근 그러니까 양 정상이 만나기 직전까지도 그런 상황이었던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파국 일보직전까지 내달았던 게 지난 펑창 동계올림픽 개막전까지였다. 그런 양자기 화해를 하고자 만났는데 그 과정을 보편적 이해로만 보려 하는 것은 무리다. 

북한이 어느 날 갑자기 태도를 달리 한 것(바꾼 것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미국의 강경한 태도가 주요 이유라 보는 견해가 많은 것 같은데 이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액면대로 수용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물론 미국의 자세가 국가대 국가의 외교 관례상 온당하게 보기 어려운 모습이고 특히 미국 최고지도자의 절제되지 않는 언사는 자존심이 상했을 수 있고 더욱이 굴욕적 협상을 요구한 것은 북한이 반발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런데 북측은 이를 남쪽에 분풀이 하듯 반응을 했고 더욱이 마치 그간의 일은 없는 것으로 할 듯이 강경한 자세로 반발은 한 연유는 무엇일까? 시중의 이해를 참고하면 ‘미국에게 질질 끌려 다니지 말고 제대로 할 말을 해라’는 메시지라는 것이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동의하기는 어렵다. 다시 말하면 북측은 미국의 행위도 불쾌하지만 남측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만만치 않다는 제스쳐로 보아야 한다. 즉 화해를 이야기 하면서 상대를 헐뜯는 것은 진정한 화해를 하고자 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표현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무슨 말이냐고 하겠지만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그에는 분명히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것은 필자만의 이해가 아닐 것이다. 화해 무드가 무르익는 시점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를 남측에서 저지른 것이 그것이다. 우선 제기할 수 있는 것은 탈북민이 주축인 일단의 집단이 대북 전단 살포로 자극을 했고 태영호 북한의 전 영국 주재 영사의 대북 비난 발언이 가세했다. 특히 북측이 최고 존엄으로 두고 있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대한 원색적 비난은 화약고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보장된 남측 입장에서는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통제된 사회 질서를 가진 북측 체제에서는 이해되는 것이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더욱이 남북의 정상이 만나 화해를 통한 평화를 이야기 하는 중에 이와 같은 체제 자극에 더하여 그들의 존엄에 대한 모욕적 행위들이 있었던 것은 남쪽에서 조차 심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따라서 북측이 강하게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남측의 행위들이 잘못되었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를 문제 삼는 북측을 두고도 비상식적이라 하지 않는다. 다만 이상(理想) 체계가 극단적으로 다른 두 사이가 화해를 위한 시간을 갖고 있는 중에 일방이 자기 이상체계를 바탕으로 다른 일방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하는 것은 누가 봐도 이해되기 어렵다. 긴 시간을 남과 북은 다른 이상체계에서 지내왔음을 생각하자는 뜻이다.

그렇다고 북측을 무조건 이해를 하자는 것도 아니다. 예리한 칼로 종이를 자를 때도 자르고자 하는 부위나 접근 각도를 제대로 찾지 않으면 목적한 바대로 자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손을 다칠 수가 있듯이 신중하게 접근하자는 것이다. 남과 북은 그럴 만큼 두 사이에는 깊고 난해한 간극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화해의 말뜻은 ‘싸움하던 것을 멈추고 서로 가지고 있던 안 좋은 감정을 풀어 없앰’이라 한다. 지금 남과 북은 긴 시간의 적대행위를 끝내고 화해를 위한 진행을 하고 있다. 그러한 도정에서 서로가 지켜야 하는 것은 화해를 해야 하는 그간의 시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그것은 이성적 가치와 합리적 바탕이 존중되는 일방이 보다 깊은 이해로 접근을 해야 한다. 쉽게 설명을 하면 여러 가치가 존중되는 남측이 아직은 획일적 가치를 가진 북측을 배려해야 한다. 

누가 뭐라 해도 한반도를 공간으로 하는 우리 민족에게 남과 북은 같은 운명체로 서로를 인정해야 하는 사이다. 그간의 격리는 따지고 보면 타의에 의한 것이지 남과 북 스스로가 원하여 있게 된 역사가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남북 분단은 패권주의를 지향하는 서구열강의 탐욕이 근원이고 이에 빌붙어 자기 영달을 꾀하고자 이들과 유착한 당시의 남북 지도자로 인하였다. 그 치욕적인 역사는 한반도를 삶터로 삼는 사람들이라면 부인해서도 안 되고 망각해서도 한 된다. 

이제 남북은 분단으로 인해 생성된 서로의 가치를 살펴보고 그 간극을 좁혀나가는 장을 마련하고자 서로를 조심스레 이해하려는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에 미국이 간여하는 여지를 주어서는 안 되고 중국이 끼어들게 해서도 안 된다. 과거에 그들이 했던 것과 같은 어떤 획책도 이번에는 용인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남과 북이 서로의 지향점이 동일한 것을 찾을 수 있다. 시간이 걸려도 함께 해야 하는 목표는 그것이고 화해는 그래서 필요하다. 

화해는 보편적 조건이 바탕이어야 하지만 그 공식이 이 장에서 도입이 어려운 것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래서 누군가 불익(不益)을 감내해야 하는데 그 자리는 이성(理性)을 바탕으로 하는 체계를 가진 남측이 맡아야 한다. 이는 당면한 현실을 위한 위대한 희생이고 이 땅, 곧 한반도를 공간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들의 후손을 위한 축복의 서막이 된다.(♣2018.05.25.)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평화와 통일’로 가는 길에서 우리의 할 몫은?


우리는 지금 평화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혐오와 증오 대신 존중과 친선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만끽하고 있다. 불과 6개월 전 한반도를 생각하면 상전벽해다. 하지만 이것이 아직 과정에 불과하며 갈 길이 멀다는 것도 우리는 안다. 분단이 만든 혐오와 증오, 전쟁을 이기고 존중과 평화를 위해 남북정상회담이 북미 정상회담으로 넘어가는 국면에서 예상되는 곡절과 부침에 맞서 우리가 단지 박수치는 구경꾼이 아니라 평화가 통일로 이어지는 역사의 주축이 되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김정은은 판문점 회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좋은 합의나 글이 나와도 발표돼도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면, 오히려 좋은 결과가 좋게 발전하지 못하면, 기대가 낙심이 된다.” 평범한 말인데 가슴이 뜨끔했다. 김정은은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합의’가 발전하지 못하고 낙심(落心)이 된 것은 미국과 남한의 문제라는 것을 지적했다. 이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남북 북미 관계의 난관이 위장평화 공세로 뒤통수를 치는 믿을 수 없는 북한 탓이라는 것과 다르다. 북에서는 약속의 파괴가 반공반북에 빠져 북한 붕괴만 노린 남한과 미국의 탓이다. 과연 누가 맞을까? 우리는 이런 판단에 참고가 되는 예를 생생히 보고 있다. 미국과 이란이다. 유럽과 유엔 국제 원자력기구 IAEA가 이란이 약속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해도 트럼프는 약속을 파기한다. 미국과의 약속은 미국만 깨트린다. 이것이 현실이다. 


노동운동의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대한민국 사람은 세 가지를 잘 알아야 한다. 첫째 미국, 둘째 북한, 셋째 우리 자신이다. 미국은 은혜를 베푼, 자유민주의 수호자가 아니라 패권국가로 전쟁원인을 조작하거나 거짓으로도 침략을 하는 나라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전쟁을 일으킨 국가, 모든 전쟁의 배후인 유일한 국가, ‘미국이 곧 세계’라고 믿는 제국주의 국가다. 북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김정은이 보여 주는 일상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북에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는 것 정도라도 이해를 하기를 바란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 아는 것의 시작이라는 성인의 말을 새기자. 우리는 북을 아무것도 모른다. 비참한 거지, 아니면 세습 독재에 열광하는 기괴한 괴물로만 볼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알고 있을까? 사드를 안보라 믿거나 밀어붙이는 모습, 미군을 신성불가침으로 여기는 모습, 진실을 현실을 이유로 뒤로 밀어 버리는 모습에서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아는 척 해온 윤똑똑이들이다. 이런 무지와 몽매가 표현된 대표적인 양상, 세 가지만 꼽아 본다.

 

첫째는 북한의 변화만을 말하는 경향이다. 남북정상은 ‘한반도 비핵화’를 말하지만 이들은 ‘북핵 폐기’만 말한다. 남북관계 북미관계를 마치 패배자의 항복 문서 작성하는 것쯤으로 안다. 정상적이라면 북이 우려하는 것에 대해 무엇을 기존과 다르게 할 것인가를 챙겨야 한다. 북의 극단의 전쟁 공포로 몰아넣는 전쟁 연습의 중단, 남북관계를 범죄로 만들어 원천 봉쇄하는 ‘국가 보안법’의 철폐, 평화와 통일을 종북이라 하면 심지어 의원을 가진 합법정당을 해산시킨 우리 안의 야만에 대한 성찰과 반성, KAL기 폭파, 천안함 사태 등 분단을 이유로 의문조차 불온 시 한 무수한 역사적 만행에 대한 진상 규명 등 우리 안의 분단 적폐를 제대로 제거하는 것에 백방의 노력을 해야 한다. 북송을 원하는 평양시민 김련희나, 식당 여성 노동자들은 외면하면서 북에 억류된 남한 사람은 석방하라는 이 기괴한 염치없음을 성찰해야 한다.   


둘째는 평화를 돈벌이 기회로 보는 경향이다. 북한의 광물자원이 어떻고, 북한의 노동력이 어떻고, 시베리아 철도가 어떻고 하는 논리들을 보면 분단의 순기능을 말하는 척하면서 북한의 자본주의화, 경제 식민지화라는 탐욕에 눈이 벌게진 모습이다. 사회주의 구상무역 체제가 붕괴되고 오직 자본주의적 국제 경제만 존재하는 조건에서 안으로 사회주의적 내실을 견지하고 밖으로 자본주의적 국가 경제력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좌우편향과 실패와 실수 그리고 오류 등은 그런 어려움은 반증이다. 문제는 그것을 허점으로 보고 사회주의 체제의 내적 파괴를 노리는 관점을 그대로 연장시키는 것으로 북을 보는 순간, 그것이 이명박근혜 시절, ‘잃어버린 11년’의 연장이고, ‘통일은 대박’이라는 천박함의 계승이며, 무엇보다 ‘북 붕괴론, 흡수통일론’의 내용적 관철이다. 평화를 말하면서 만주를 회복하고 시베리아를 장악한다는 식의 사이비 국수주의자들이 판을 친다. 

 

세 번째로 평화를 말하면서 분단 전쟁 체제를 영구화하려는 경향이다. 미국 스스로 논의하는 미군 문제에 대해 변동 절대 거부라는 한국의 수구세력과 그런 주장에 눈치를 보며 통일 후에도 외세에 예속되자는 미군 지속 주둔론이나 펴는 집권세력들의 모습이다. 남한에서 그럴 듯한 현실주의는 결국 현실 구조에 대한 굴복이다. 통일을 접고 평화체제 유지하는 ‘분단 관리’ 주장들이 그렇다. 목적을 잃은 길은 결국 모든 것을 잃은 길임에도 말이다. 


자본주의는 공짜가 없다. 남북관계에서 최고의 사기이자 거짓은 이른바 ‘퍼주기’다. 남이 북에게 퍼준다는 환상은 북은 가난하다는 편견과 합쳐 부동의 전제가 되었다. 마치 남한이 천사나 된 듯하지만 남한 내 노동자 민중들을 쥐어짜는 그들이 행여 더 먼 타인에게 천사 노릇을 할까? 이윤이 목적인 자본, 하나를 주면 열을 뺏아 가야 하는 자본의 경영법이 엄연한 현실인데 퍼주기는 무슨 퍼주기인가? 우리는 헬 한 남한에 살면서도 북한에게는 상식조차 견지하지 못한다. 그러니 북의 파격만큼 반드시 존재해야 할 남의 파격을 준비는커녕 생각도 않는다. 미국에게는 굴종과 패배, 북에게는 오만과 나태와 싸워 자주와 겸손, 존중과 친선의 힘을 사회적으로 갖춰내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평화가 통일로 흐르고 그 흐름이 자주와 평등의 남북, 차별과 혐오가 없는 해방된 세상으로 이어지는 길임을 제대로 이해하고 견지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몫이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200억? 있기나 하고?




20년 전쯤이었을까? 너무나 오래 전의 일이라서 까마득하지만, 저렇게도 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 갖게 한 뉴스가 있었다. 모든 것을 다 접고, 전 재산이었던 전셋돈을 빼서 세계 일주를 떠나기로 한 가족의 이야기였다. 지금이야 그 정도 얘기는 너무 흔해 진부하기까지 하지만, 그 당시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가장이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아이들은 휴학 시키고 여행을 떠난다? 그런 발칙한 생각을 감히 할 수 있다니, 그리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니. 나는 즉시 가위를 찾았고, 그리고 스크랩을 했다. 그 기사를 보며 함께 놀라워하고 공감을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하며. 그런데 나와 함께 살고 있던 사람조차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듯 나를 바라보며, 언제 철들 거냐는,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만큼의 표정이었다.

 그로부터 한참 후, 2001년을 며칠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해외로 떠나기 전, 작별 인사 겸 친구와 만났던 날이었기에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던 중 들려왔던 특별한 뉴스가 우리를 붙들었다. 자그마치 200억 우주여행 이야기였다. 지금도 큰돈이지만, 그 당시의 화폐 가치로 보면 천문학적인 돈이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미국의 백만장자 데니스 티토가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우주여행이란 단어만으로도 매혹적이었지만, 그 많은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부자가 많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그 순간 나라면? 이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내게 만약 200억이 있다면, 기꺼이 지불한 의향이 있어,”

“나라면 절대 안하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충만했고, 외국에서 살아볼 기회를 얻은 나는 그때 한껏 들떠있었다. 새로운 경험을 위해서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다고 여겼던 시절이었다. 그에 반해 친구는 나보다 훨씬 현실적이었다. 

며칠 전, ‘현실로 다가온 우주여행, 얼마면 될까?’, 갓 구워낸 빵에서 나는 달콤한 향기를 내뿜는 글귀가 다시 내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이번에는 우주 호텔이란다. 사년 후에나 가능한 여행상품이 단 삼일 만에 4개월 치의 예약이 완료되었단다. 


지금의 나라면?, 하고 다시 생각해 본다. 여전히 미지의 세계는 나를 끌어당기는 최고의 힘이지만, 이제 그것이 최고의 가치는 아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위해 전 재산을 투자하거나, 아프리카에 대학을 설립할 수도 있을 만큼의 돈을 단 며칠의 여행에 쓰지는 않을 것이다. 

5년 전, 세네갈로 가며 생각했었다. 학교를 지어주는 프로젝트를 해보면 좋겠다고. 이제는 내가 직접 학교를 운영해 보고 싶다. 꽤 수준 있는 대학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참 엉터리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문제가 생기면 머리를 맞대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개선하려는 우리나라 조직과는 다르다. 이곳은 그냥 참는 것으로 대체한다. 아니 문제점을 인식하지도 못하는 듯하다. 조금만 바꾸면 오래 편하고 보기도 좋은데, 그럴 의지가 없다. 어쩌다 일을 시작해도 한 번에 잘 하지 않는다.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는 문화 탓에 대충하는 게 습관이 된 것이다. 필요할 때는 격렬한 논쟁도 하고, 죽자 살자 싸우기도 하고, 벌도 주고 해야 하는 데 그렇지가 않다. 자기 것이 아니면 나서지 않는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이기적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은 교육이다. 교육의 중심에 대학이 있다. 우리나라의 역동적인 교육 시스템을 이곳에 가져와 보고 싶다. 예전의 나에게는 개인적인 호기심이 에너지원이었다면, 이제는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관심이 에너지원이 되나 보다. 


2018.05.13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칼럼]시민의 정치인 테러 의미 


야당 중진의원이 한 시민에게 주먹질을 당했다. 그것도 백주 대낮에 그들의 전당이라는 국회에서의 일이다. 어떤 사정인지는 조사를 하고 있어 곧 살펴지겠지만 간단히 이해를 하면 한 시민이 정치인들 그것도 국회의원에 대한 혐오를 행동한 것으로 보이고 그것은 어쩌면 정치인에 대한 증오의 표현으로까지 보인다. 이러한 견해는 물론 필자의 개인적 주장일 뿐 보편이해가 아님을 인정한다. 그런 한편 유감이기는 하지만 그 상황의 이해 그러니까 주먹질을 한 그 시민의 감정을 살피려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싶은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사건의 전말은 사법기관의 조사로 판명되겠지만 이런 사태가 있었던 것은 현재 우리 사회에 일고 있는 정치현상의 비정상이 이유라 생각한다. 피해자와 이해관계가 없는 한 시민이 무엇 때문에 대중들이 다 볼 수 있고 더욱이 뉴스 초점인 인물이라 보도진이 항상 가까이 있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주먹질을 했을까? 그 후 자신에게 닥칠 부정적 사태에 대해 인지하면서도 말이다. 이러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다분히 필자의 편견이 바탕일 게다. 그래서 감정적 접근이라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게 주장하는 필자를 이해하거나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럴 만큼 이즈음의 정치인의 행태는 정말 시민들을 화나게 한다.

그렇다고 폭력을 행사한 시민을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든 폭력 행사는 용인되어서는 안 되고 따라서 행위자에 대하여는 법적 절차에 따른 처분이 있어야 함을 동의한다. 그런 한편 이러한 사태는 단순히 자기 가치에 함몰되어 저지르는 감성적인 행동, 그러니까 문제를 가진 시민이 일상에서 만나는 자기 스트레스로 인한 돌출행위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정신장애가 없는 평범한 시민임이 증명된 것이 이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 한편 이러한 사태가 시위하는 현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즉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정치행태의 비정상의 해소 당위를 시민들이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 한편 이런 유형의 사건을 단순 폭력 행위로 법에 따라 처리하면 된다는 식으로 관심 없이 지나치는 것은 건강한 사회의 모습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우리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비정상적 정치행태의 치유를 기대할 수가 없다.  

피해자가 소속한 정당의 대표라는 분이 이 사건을 두고 정치테러라 했다는 보도를 보았다. ‘테러’라는 말을 사전에서 보면 ‘폭력을 써서 적이나 상대편을 위협하거나 공포에 빠뜨리게 하는 행위’라 하니 그런 표현은 일견 타당한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상대편, 그러니까 폭력을 쓴 자는 누구이고 그 피해자는 누구인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 말뜻은 다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즉 가해자는 시민 한 사람이고 피해자는 정치인인 것이 현재까지의 정황인데 이를 두고 테러라고 하는 것은 무리다. 상대 설정이 일방은 집단이 분명하지만 다른 일방은 집단여부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테러란 적던 크던 적대적인 둘 이상의 집단을 이룬 상대가 있고 이들 중 어느 하나가 다른 일방을 위협하는 행위로 그 목적은 반사이익을 구하고자 함이다. 그런데 시민 한 사람이 정치집단을 위협을 했다는 표현은 사리(事理) 문제를가진다. 그를 공격함으로 이익을 구하게 되는 세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실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세력이 없다하더라도 개인 이해가 있을 경우 유사한 사태를 만들 수 있지만 그것도 현재로서는 확인이 안 되고 있다. 이러한 정황을 살필 때 시민의 일탈과 같은 행위를 공당이자 거대정당의 대표란 분이 테러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다. 테러라는 말뜻을 두고 논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상황을 이해해보자는 것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 미리 이야기해 둘 게 있다. 특정 정치인에 대한 시민 폭력을 옹호하거나 피해 정치인이 속한 정당에 대한 폄하를 목적으로 흠집을 내고자함이 이야기의 방향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그 정치인이 속한 정당에 신뢰를 두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 사건과 연계하여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다.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행태의 폭력은 현재의 우리 정치권 즉 여·야를 망라한 정치인들에 대한 시민 분노의 한 표출이라 본다. 

솔직히 이야기를 해 보자. 이번 피해자 정치인의 저간의 행위를 정의롭다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그의 행위들이 정의로웠다면 이번 시민의 폭력은 절대적 비난 대상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피해 정치인의 저간의 행위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라 할 수 있다. 누가 봐도 그의 지향에는 자기 정파의 이익을 위한 목적만 크게 보일 뿐 국민 모두가 공감하는 즉 정의로운 행위라 할 부분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는 정부를 상대로 진실 규명을 명분으로 삼고 있지만 실제는 자파의 이익을 구하기 위함이고 그의 행동은 자파이익을 위한 것이고 그것을 합리화하고자 일련의 행동을 한 것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의 행위는 그들 정파의 입장에서는 가치 있게 보일게다. 정파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건강도 돌보지 않고 나섰으니 말이다. 즉 지방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자 상대 당의 흠집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확대하고자 희생적 행동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듯 그들 집단에서 그의 모습은 정파가 맡긴 직분에 맞갖은 행동이라 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평가는 과연 시민의 눈높이와 같은가는 의문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그들만의 것일 뿐 시민이 공감하는 가치는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유념해야 하는 것은 특정 집단이 지향하는 가치가 시민의 눈높이와 다를 때 그것은 가치로서 의미를 상실하는 것은 물론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는 점이다. 

이제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그가 목숨을 걸고(?) 감행한 단식의 이유는 진실 규명을 통한 정의의 확립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은 명분일 뿐 6·13 지방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함이 실제 목적이다. 이는 그는 물론 그가 소속한 정파에서도 부인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 정파의 눈높이에서는 정당하고도 가치 있는 일이고 더불어 목적한바와 같이 지방선거에서 유리한 고지 차지의 모티브(motive)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시민들의 입장은 다른 것 같다. 물론 그들과 의견을 같이하는 시민들도 있겠지만 다수 시민들은 그들이 지향하는 가치에 신뢰를 두지 않는다. 더욱이 그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보는 시민들조차 있다. 눈높이의 문제이기 이전에 가치 본질적 문제로 보아야 한다. 인간의 삶에 신뢰를 잃게 되면 그것은 생존가치의 상실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신뢰를 잃어버린 집단인데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다.

차제에 말해 둘게 있다. 정치적 사회적 파동이 있을 때마다 정치인들의 이벤트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물론 정치판에 비리와 같은 비정상행위가 있을 때 문제 제기를 위한 대열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문제수습도 할 수 있고 재발방지에도 기여한다. 그럼에도 유의해야 할 게 있는데 그것을 이유로 정파의 지지를 바꾸는 데 성급함을 보여서는 안 된다. 정치인들은 그것을 노리고 있고 그래서 국가의 이익은 외면한 체 자기정파 이익을 위해 온갖 못된 행위를 다한다. 문제가 있어 지지정당을 바꾸는 것은 유권자의 자유지만 그것이 후보자 선택 이유가 되는 것을 동의하는 것은 민주시민의 모습이 아니다. 

선거에서 투표 행사는 시민의 대표 즉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인 만큼 사람중심이어야지 정당에 두는 것은 사려 깊지 못하고 그런 모습은 민주시민의 자세가 아님을 앞에서 언급했다. 이제 곧 전국 동시 지방선거가 시행된다. 재삼 당부하지만 사람중심으로 선택하기 바란다. 국가가 실시하는 선거는 그 대상이 누구이던지 국가의 살림을 담당하는 능력자 곧 우리의 지도자를 뽑는 과정이다. 이러한 중요한 과정을 정치인의 쇼에 현혹되어 행사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정치꾼들은 이번과 같은 쇼가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된다. 재삼 당부한다. 후보 중에 능력과 자질을 가진 분을 정당에 관계없이 선택하기 바란다. 우리 지도자를 뽑는 일 아닌가! (♣2018.05.13.)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빨간 불길에 휩싸여 건물이 타고 있는 장면이 그려진 책 표지에서부터 어두운 재앙이 느껴진다. 책을 읽기 전부터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한참을 방 한쪽 구석에 밀쳐놨다가 심호흡을 하고 읽기 시작했다. 나는 비참하고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를 외면하고 싶은 본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열두 살 주인공 롤란트네 가족이 4주간 쉐벤보른으로 여름휴가를 떠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행복한 시간을 보낼 준비를 하고 가는 도중 핵폭발이 일어나 잔인하고 무서운 긴 불행을 겪게 되는 내용이다. 한순간의 죽음이 오히려 행복하게 느껴질 정도로 살아남은 이들의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심한 외상으로 인한 고통, 배고픔, 끝없는 갈증, 가족들의 죽음 등 만약 지옥이 있다면 이런 상태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을 다 잃고 아빠와 둘만 남게 된 롤란트도 살아남은 사람들과 삶을 일궈 나간다는 내용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책을 덮고도 한동안 롤란트가 겪은 불행한 일들이 머릿속에 남아 내가 살고 있는 현재와 전쟁과 가난을 겪어낸 과거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다. 나는 이념과 정치를 모른다. 알려고 기웃거리지도 못하고, 사는 것에 바쁘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살고 있는 우리나라가 종전이 아니라 휴전인 상태에 있기도 하지만, 북한에서는 아직도 그 무서운 핵무기를 폐기하지 않았다. 다행히 4.27 남북 정상회담에서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내용의 판문점 선언을 내놓았다. 완전한 비핵화가 현실화 되었으면 하고 간절하게 바래본다. 아주 작게는 물을 아껴 쓰고 쓰레기를 적게 버리는 등 환경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였으면 한다.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곳이니까 깨끗하게 지켜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고 마음이 우울했지만 여러 가지 삶의 과제를 안겨줬다는 점에서 참다운 선생님을 만난 듯 기쁘기도 했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양기순

                                 



당혹스럽고 유감스럽다.

 

< 2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최저임금 개악안을 상정하는 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최저임금 개악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노동과세계 변백선


당혹스럽고 매우 유감이다.” 미국대통령 트럼프의 북미 정상회담 취소 서신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첫 반응이다. 한미 간의 조율이 잘 되고 있고, 북미 정상회담은 반드시 열린다는 말을 한지 하루도 넘기지 못하고 뒤통수를 맞았으니 당혹스럽고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당혹의 내용과 유감에 대한 이후의 대책이지만 아직은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트럼프는 김계관과 최선희 북한의 외교 책임자들의 발언을 이유로 회담의 취소 연기를 하며 마치 중학생들이 연애 밀당이라도 하듯 책임을 넘겼지만 김계관의 말 전에 볼턴의 말이, 최선희의 말 전에 부통령 펜스의 말이 있었음을 감춘다. 아주 전형적인 양아치 시비 걸기다. 원인을 외면하고 보이는 한 부스러기 장면만 극대화하여 결국 힘없음은 죽어라는 그 심보 말이다.

 

대한민국 헬조선에서 우리 민중들에게도 524일과 25일을 넘는 밤은 안과 밖, 이중으로 당혹에 유감이다. 트럼프의 야바위 짓에 의해 동요하는 한반도 평화에 당혹과 유감이라면, 안으로는 최저임금법의 사상 최대 개악을 강행하는 문재인 정권의 반동(反動)때문이다. 최저임금은 민주공화국에서 국가가 보장하는 인간 존엄의 최저 기준이다. 인간 생존의 최저기준이 아니라 존엄한 삶의 최저 기준이라는 말이다. 이런 단어(單語)적 뜻을 최소한으로 실현하라는 것의 상징으로 민주노총은 최저임금 1만원을 줄기차게 요구했고, 지난 대선에서 후보 모두가 함께 공약한 약속이 되었다. 특히 촛불의 힘을 업고 당선을 한 문재인 대통령은 수출 경쟁력이라는 유물대신 소득주도 경제력을 앞세워 최저임금 만원 인상이 구체적인 현실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주었다. 그리고 만원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지만 오랜만에 두 자리 수 인상의 최저임금을 올려 촛불을 든 보람을 주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 최저임금의 개악을 통해 문재인 정권은 촛불 때문에 억지로 쓴 노동존중이라는 가면을 벗었다. 그들은 결국 돈의 편, 강자의 편이었다. 소득주도가 소득(증대)주도가 아니라 소득(감소)주도임을 선포했다.

 

올 초부터 직장 갑질 119’ 등을 통해 가장 극악한 직장 갑질이 노조 없는 회사 직장인들에게 상여금과 식비를 최저임금에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최저임금의 개악을 통해 갑질이라 부르는 패륜적 행위를 ()’으로 보장한다. 정말 노동자 민중의 삶에게 염장 지르는 정권이다. 현대기아차그룹은 사내하청업체에 인상된 최저임금을 주지 않고 법 개악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번 개악을 통해 문재인 정권이 재벌들에게 통상임금으로 해온 임금 도둑질이 못하게 된 것에 대한 보충으로 계열사, 부품사, 사내하청, 수 천 곳의 상여금 복리후생수당을 날로 먹게 해 준 것이다.

 

이번에 환노위를 통과한 최저임금 법안은 그 전까지 민주노총 등이 반대한 최저임금 개악보다 더 나쁘다. 상임위 통과 30분 전에 급조된 법이라고 하는데 내용을 보면 재벌에게 치밀하고 친절하고 노골적이라 아주 오래 재벌들의 민원에 의해 준비된 법안으로 보인다. 정기상여금을 최저임금에 산입한자고 간을 보다가 복리후생비를 전부를 포함시킨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상여금 말살 전략으로 보인다. 자본에게 기본급만 주면 모든 노동조건에서 자본의 사회적 의무를 해방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가장 괴로운 분들은 살 곳과 먹을 것을 제공하지 않으면 일 자체가 어려운 이주노동자들이다. 환노위 개악론자들은 연소득 2,500만 원 안팎의 저임금 노동자는 산입범위가 확대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연봉 2,500만 원 이상을 주는 기업에게 혜택을 준다는 의미다. 게다가 상여금 없이 복리후생비만 받는 노동자의 경우 최저임금액의 7%만 산입범위 예외이고 그 이상은 무조건 해당됨으로 연봉이 2천만 원 수준이어도 산입범위에 포함되게 된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근로기준법의 대원칙인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원칙도 훼손했다. 이들도 지금의 조치가 노동자에게 불리한 조치임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려면 과반수 노조 내지 노동자 과반수의 집단적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에서 최저임금 산입 조항을 예외 조항을 만들었다. “‘쉬운 해고’‘저성과자 해고를 불이익변경이 아니라며 노동개악을 추진한 박근혜도 하지 못한 것을 문재인 정부와 집권여당이 자행한 것”(민주노총 성명서 중)이다.

 

문재인 정권 들어 ‘2인 이상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1년 전보다 3.7늘어 4년 만에 최대 폭으로 뛰었다고 해서 최저임금 인상 효과인가 했다. 그런데 이것이 정책 효과라기보다는 대기업이 사원들에게 보너스를 많이 지급한 영향이란다. 그래서 상위 20와 하위 20소득은 더욱 커져 양극화가 역대 최악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 양극화를 줄이기 위해 현 정권은 대기업 정규직들의 임금을 헐어기로 했나 보다. 남미의 어느 독재다가 빈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빈민을 학살했다는 짓과 같다. 하위 소득을 늘려 불평등을 줄이는 상향 평준화가 아니라면 수치적 평등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우리 노동자 민중들은 하루아침에 안팎으로 봉변을 당하고 있다. 왜 그런가? 밖으로는 한반도 평화의 문제에서 주인이 아니라 기껏 중재자 아니면 미국의 조력자가 되어 주체적 평화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촛불을 들어 만든 정권조차 노동자 민중의 주인이 아니라 가진 자들의 정권이기 때문이다. 노동자 민중이 주인이 되는 정치가 없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의 바지사장 돌격대 홍영표라는 작자는 민주노조운동을 했다는 자다. 그가 앞장 서 노동권을 파괴하는 것은 사대 망국노가 아니면 출세를 위해 변절과 배신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한국 근현대사의 극단의 적폐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최저임금법의 개악을 통해 노조도 단체협약도 심지어 취업규칙의 개악에 대한 노동자들의 최소 저항권도 파괴하려는 문재인 정권의 속셈이 문재인 정권의 본질이다. 노동자 민중의 염원을 집권의 도구로만 악용하고 결국 신자유주의 헬 조선을 만든 정권, 과거를 청산한다며 결국 미래만 파괴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한계가 더 기괴하게 되풀이 되고 있다. 당혹(?!)스럽고 유감(?!)스런 날들이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장

[기고] 불법촬영 사건, 왜 지금까지 손 놓고 있었는가?

 

홍대 남성모델 불법 촬영 사건은 앞서 존재한 다른 불법 촬영 사건들과 확실히 구분된다. 경찰의 대응과 수사의 진행 속도, 법원의 판결, 그리고 언론의 반응과 댓글의 내용이 너무나 다르다.


이번 불법 촬영 사건은 수사를 진행한지 얼마 되지 않아 범인을 검거할 수 있었다. 불법 촬영물을 유포한 용의자의 범위가 좁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경찰이 이번 사건에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존재한 수 많은 불법 촬영 사건들 대다수가 "수사가 어렵다" 라는 이유로 수사가 진행되지 못했다. 경찰은 왜 이렇게 편파적인 수사를 진행한 것일까? 불법 촬영물 유포자, 즉 가해자를 일주일만에 검거할 수 있는 실력과 열정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여성 피해자들의 신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지어 불법 촬영을 한 남성이 현행범으로 체포 되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사건도 있다.

지난해 11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제출받은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불법 촬영 범죄를 일으킨 인원 중 98%(15662)가 남성이고 여성은 총 2%에 그쳤다. 반면 같은 기간에 불법 촬영 범죄의 피해자 26654명 중에서는 여성이 22402명으로 84%에 달했다. 남성은 600명으로 2.3%를 차지했다.

이 자료는 불법 촬영 범죄의 가해자가 대다수 남성이며, 피해자 대다수가 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범죄가 경찰의 빠른 수사진행으로 단시간에 범인을 검거한 적은 유래에 없는 일이다. 수 많은 불법 촬영 사건이 있고 피해자가 2만명이 넘게 있으나, 제대로 처벌을 받은 가해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가해자들 중 90%가 풀려나고, 처벌을 받는다 하여도 솜방망이 처벌이니 불법 촬영 사건이 줄어들리 만무하다.

경찰, 법원, 언론이 얼마나 편파적인지 피해자와 가해자가 남성일 경우와 여성일 경우를 비교 해보았다.

 

경찰의 대응

여성 피해자의 경우: 수사에 적극적이지 않음, 가해자의 얼굴 사진을 찍지 않음, 가해자를 불구속기소로 수사, 피해자에게 "못 잡는다", "이미 게시물이 삭제되어 가해자를 알 수 없다", "그러게 왜 그런 옷차림/그런 장소에 있었냐" 등의 피해자를 탓하는 식으로 수사자체를 거부, 가해자 및 제 3자의 2차 가해로부터 보호를 원하는 피해자의 요구 거부.

 

남성 피해자의 경우: 매우 빠르고 적극적인 수사로 단기간에 용의자 파악 및 범인 검거, 피해자의 2차 가해까지 적극 대처, 가해자가 불법촬영물을 올린 사이트에서의 활동 내역 파악, 해당 사이트에 대한 압수 수색 영장 발부 받음.

 

 

법원의 판결

 

남성 가해자의 경우: 초범이라며 무죄 판결, 가해자 집행유예, 가해자가 반성의 기미가 있다며 감형, 현행범인 가해자 무죄, 가해자에게 솜방망이 처벌 등등.

 

여성 가해자의 경우: 증거 인멸과 도망의 염려가 있다며 판사가 영장 발부 및 긴급체포, 불법촬영 유포 혐의로 경찰 구속.

 

 

기사의 자극성

 

여성 피해자의 경우: 가해자의 사진이 아닌 피해자의 상황을 나타내는 자극적인 이미지, 제목에 가해자 남성의 성별은 표기하지 않으면서 피해자의 성별을 부각시킴, 가해자보다 피해자의 개인정보(나이, 성씨 등)가 더 많이 포함되어 있음.

 

남성 피해자의 경우: 기사 속 첨부된 사진이 학교 건물 또는 가해자의 사진, 기사 내용에 가해자의 개인정보(나이, 성씨 등)이 포함되어 있음. (예시: 20대 동료 모델 모씨(나이, 성별), 동료 여성 모델 ○○○)

 

 

기사의 댓글

 

여성 피해자의 경우: 피해자의 잘못이라며 2차 가해, 피해자에 대한 조롱과 욕설이 난무한 악플이 대다수, 가해자를 옹호하는 발언.

 

남성 피해자의 경우: 가해자에 대한 지나친 폭력적 악플, 이 사건을 남성혐오라 주장, 가해자만이 아닌 여성 전체에 대한 혐오적 악플, 법이 여성들에게 관대하다는 발언으로 특정성별에 대한 혐오를 조장함.

 

불법 촬영 때문에 여성들은 화장실에 가면 먼저 카메라 구멍이 있는지부터 확인한다. 휴지로 구멍을 막거나 송곳이나 핀셋으로 구멍을 찔러보기도 한다. 볼일을 보러오는 것 뿐인데 여성들은 이 간단한 일에도 불안감을 갖고 있다. 화장실뿐만이 아니다. 대중교통이나 직장, 학교, 기숙사, 심지어 집에서도 불법 촬영의 위협을 받고 있다. 남성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고 알지도 못할 일들이다.

홍대 남성모델 불법 촬영 사건의 가해자는 경찰의 조사 당시, "피해자가 다른 동료들과 함께 쉬어야 할 탁자에 누워서 쉬었다." 라고 진술한 바가 있다. 그리고 다른 동료 모델의 말에 따르면 원래 쉬는 시간에 옷을 입고 쉬는데, 남자 모델은 옷도 제대로 여미지 않아 다른 모델들이 눈살을 찌푸렸다고 한다. 아무리 누드모델이라고 하지만, 휴식 시간 중에도 나체를 드러내고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위는 공연음란죄에 해당된다. 가해자는 피해자 남성의 행동에 화가 나 사진을 찍어 유포했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의 편파성에 분노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피해자 또한 경찰의 수사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국민청원 사이트에는 <여성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성별 관계없는 국가의 보호를 요청합니다>, <몰카 등 성폭행 가해자 처벌 건에 대하여>, <홍대 몰카 사건 관련 기사의 자극적 보도 수정 및 정확한 수사 요청> 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라와 있다.

첫 번째 청원을 올린 글쓴이는, "피해자가 남성이기 때문에, 가해자가 여성이기 때문에 수사를 달리 하는 국가에서는 남성 역시 안전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범죄를 저질렀다면 벌을 받고 누구나 피해자가 되었다면 국가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그런 대한민국을 절실히 바랍니다." 라는 문장으로 청원글을 끝맺었다.

다가오는 19, 여성이 피해자인 불법 촬영 범죄에도 수사 당국이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과 이러한 범죄를 일으킨 남성 가해자들이 제대로 처벌을 받을 것을 요구하는 '불법 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가 있을 예정이다.

동일사건이 일어날 때 성별에 따라 편파적 수사를 하는 대한민국이 아닌, 공정한 수사와 재판을 통해 가해자가 처벌 받고 피해자가 보호 받는 대한민국이 되길 바란다.

 

한지수

‘갑질’ 학대(虐待)



<출처 : MBC 뉴스>


근로계약서를 쓸 때 자본은 갑이고 노동자는 을이다. 원청과 하청이 계약을 할 때 원청이 갑이고 하청이 을이다. 전세계약서를 써도 주인이 갑이고 세사는 우리는 을이다. 갑을관계는 책임의 순서를 말하는 것이지만 현실에서 권력적 위계질서의 표현이다. 거기에 ‘질’이 붙으니 갑질이란 ‘힘 센 자가 약자에게 퍼붓는 폭력과 범죄의 학대’ 행위다. 


갑질은 오래된 문제다. 최근에 다시 대두된 것은 병원 안에서 이른바 ‘태움’이라는 비정상적인 관행에 목숨을 잃은 간호사와 대한항공 조씨 일가의 막무가내 패악질이 폭로되면서다. ‘태움’현상은 신참 간호사에게 기합을 주듯 빠르게 일을 습득시킨다는 명분으로 여러 이유로 손이 둔하거나 일을 쉽게 배우지 못하는 신참을 괴롭혀 쫓아내는 폭력이다. 갑질에 대한 자각이 없는 시기에는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이를 당연시하다가 사고가 생기면 ‘못된 고참이나 못난 신참’의 개인적인 문제로 돌려졌다. 하지만 세 살배기도 안다. 이런 참사는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병원자본이 ‘최소의 인원으로 최장의 시간의 일을 통해 최대의 이윤을 모색’하는 과정의 필연인 것을. 인력 확충이라는 정상적이 통로를 통해 환자와 노동자의 안전을 높이는 대신 마른 수건 쥐어짠 돈 중심의 경영이 만든 참극이다. 이 과정이 묵과 되는 것은 병원은 비용 줄이고 노동자들끼리 화합단결을 파괴하니 꿩 먹고 알 먹고 이기 때문이다.


조현민 대한항공 여객마케팅부 전무가 광고제작을 맡은 업체와의 회의에서 광고대행사 직원에게 화를 내며 유리병을 던지고 물을 뿌렸다. 태움이 직장 내 괴롭힘이라면 조현민의 패악은 원하청 사이에서 벌어진 갑질이다. 이후 대한항공 회항의 땅콩언니와 그 엄마까지 갑질 패악이 폭로되면서 일파만파의 사회적 충격을 주고 있다. 이에 대해 노조는 예견된 일이라며 조씨 일가의 전횡적 지배가 관철되는 회사의 구조와 관행, 자정을 위해 필요한 노동조합 활동 중 파업권을 ‘필수유지업무’라는 이유로 원천 봉쇄한 법의 허점이 만든 비극이라 지적한다. 민주노총도 성명을 통해 한화그룹 김승연의 보복폭행, SK그룹 최철원의 맷값 폭행과 같은 재벌들의 어이없는 반사회적 범죄를 환기하면서 ‘재벌의 제왕적 족벌경영체제’가 문제라 지적한다. ‘계열사 순환출자를 통한 불법 경영승계, 일감몰아주기, 내부거래, 납품단가 후려치기 등 끝없는 불법 경영과 비자금 조성, 뇌물공여로 불법경영을 보호해 온 정경유착이 본질이고 실체’라는 것이다. 대한항공 뒤에 숨어 웃지만 삼성의 반 헌법적 노조탄압, 보수우익 단체에 자금지원까지 하며 세월호 진실을 가리려는 패륜, 장충기의 문자가 확인해 주는 ‘청와대, 검찰, 법원, 언론, 국정원’을 아래동생 다루듯 관리해온 삼성그룹 등 재벌 일반의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갑질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인권적 차원에서 지독한 폭력이자 범죄라는 것이다. ‘갑질’은 갑을이든 노자든 자본의 원하청의 문제이든 동등한 존재로서 존중이 깨졌다는 증거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민주주의 기초 전제가 무너졌다는 말이다. 이는 인간관계가 근대 이전 ‘봉건적’ 영역으로 퇴행되어 버렸음을 의미한다. 그 시작은 노동을 인간 존엄의 근거가 아니라 일회용 휴지나 ‘하인 하녀’처럼 부림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에서 부터다. 신자유주의가 노동자들의 인간다움 모든 것을 공격해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을 강요한 것이 그 시작이다. 정리해고는 잘못도 없이 추방당할 수 있다는 것이고, 비정규직은 권리도 없이 의무만 지는 노동을 감수하라는 것이다. 자본에게 의무 없는 권리, 이유 없는 차별의 권력을 준 것이다. 이런 반칙과 특권이 보편화되고 세습화 된 세상이 헬 조선이고 그 구체적 현상이 ‘갑질’이다. 


‘약육강식 승자독식’ ‘권한의 상속과 세습’ 속에서 사라진 것은 민주주의다. 권력이 강요한 수직적 인간관계는 노동에 대한 존중, 인간 존엄에 대한 존중대신 복종과 굴종을 원한다. 갑질은 우리 사회가 신분사회로의 퇴행이자,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가 되자는 사회, 노예적 노동이 가능한 사회가 됐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갑질의 진정한 해결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수직적 권력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존중의 관계로 돌릴 때 가능하다. 모든 관계에서 민주주의를 확보하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제도적으로 비정규직을 없애는 일이다. 그래서 최소한 권리와 의무의 쌍방관계가 있는 사회를 회복시켜야 한다. 나아가 일터에서 민주주의가 만들어져야 한다. 노사관계에는 평등이 없고 회사 안에서 공평이 없는 한국의 기업문화에서 민주주의가 티끌만큼이라도 가능한 것은 노동조합의 존재다. 대통령도 의원도 뽑는 우리가 회사의 과장 부장은 뽑을 수 없다. 회사 문 앞에서 멈춘 민주주의를 회사 안으로 진입시켜야 한다. 그것은 바로 노동조합 할 권리의 보장이다. 모든 산업과 사업장에 ‘민주’노조 활동의 자유로운 보장이 있어야 탐욕의 화신 자본의 광란의 질주를 막는 최소한의 제동 기능, 최소한의 자정 기능이 유지된다. 


촛불이 광장을 이루고 정권마저 교체하면서 사회적 과제로 대두된 것이 ‘적폐청산’이다. 한국사회 적폐는 한국 현대사 자체다. 일제 매국노와 부역자들을 고스란히 부활시켜 독립 운동가들을 배척한 미국의 분단 정책 이후, 박정희식 군사독재, IMF 경제난 이후 승자독식의 헬 조선을 만든 돈의 독재, 그 사이를 부정부패와 반칙과 특권으로 촘촘히 엮어 이득을 챙긴 ‘정경유착’된 지배자들, 그들 중 최고의 부정한 힘은 재벌이다. 재벌은 한국형 적폐의 심장이다. 그래서 박근혜 권력을 끝장냈듯이 재벌이라는 적폐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재벌은 우리 사회 만악(萬惡)의 근원(根源)이다. 재벌은 경제 영역에 남은 유신정권의 몸통이다. 개혁이나 개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해체가 필요한 대상이다. 우리 경제는 재벌이 대단해서 유지된 것이 아니다. 반대로 반칙과 특권의 재벌과 부패 지배 세력의 패악질에도 버텨온 우리 노동자 민중이 대단한 것이다. 박정희가 없으니 한국은 발전했다. 마찬가지로 갑질의 몸통, 경제계의 박근혜, 적폐의 본산, 재벌을 없애야 민주와 인권이 확보된다. 재벌 해체가 정도다.공사이고 그 결과는 더 치명적이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지방선거와 지도자론



6·13지방선거 일정이 다가오면서 세상은 시끄러워 지고 있다. 입후보자들이 기회를 놓칠세라 그들이 가진 온갖 역량을 동원하여 자기를 알리고자 시간을 조각내어 동분서주하고 있다. 바야흐로 세상은 입신 영달을 바라는 사람들의 희망으로 온갖 미사여구들이 마치 봄 꽃피듯 자리를 가리지 않고 피는 시간이 전개되고 있다. 

지방선거의 목적은 지역 일꾼을 뽑기 위함이다. 말이야 일꾼이라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주민들의 대표 즉 지도자를 선출하기 위한 과정이다. 주민들을 대표하는 위치인 만큼 지역일꾼은 곧 주민들의 지도자인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주민들은 그것을 알고 있고 그런 취지로 자신의 투표권을 행사한다. 

그런데 선거에 참여하여 누구를 선택해 놓고도 그들을 지도자라 하는 데는 언어적이거나 정서적으로나 저항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 선거라는 과정에서 지역 주민의 대표로 뽑았으니 지도자임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이러한 현상은 스스로 투표에 참여하고 누군가를 지지하여 투표를 하고 그가 선출되었어도 지도자로 예우하기는 부족하다고 보기 때문일 게다. 다시 말하면 자기 의사로 구의원이나 시의원 구청장, 국회의원 등을 뽑아놓고도 그들을 지도자로 보는 데는 동의가 쉽지 않는 것이다. 


왜, 스스로 참여한 선거를 통해 선출한 주민 대표를 지도자로 예우하는데 경계를 둘까? 그 답은 아마 뽑힌 자들이 지도자란 단어가 가지는 위상 즉 그것이 가지는 위엄을 부여하기는 부족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듯 지도자란 명칭은 아무에게나 쉽게 부여해서는 안 되는 단어로 이해를 하는 것이 국민들의 보편 정서다. 곧 지도자란 능력에 더하여 품격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 이해다, 후보들은 물론 기존 정치인들은 주민들이 스스로 선거로 주민대표를 뽑아놓고도 지도자로 보지 않으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이러한 세태(世態)는 그간 공직선거법에 의거 선출된 당선자들의 능력이나 자질에 대한 불신이 있다는 증거인데 이는 지방선거에 국한하지 않는다. 그럴 만큼 우리 사회에서 선거의 결과는 언제부터인가 국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은 따져 보면 후보자나 당선자의 책임도 있지만 그들을 뽑았던 자, 즉 피선거인의 책임도 없지 않다. 다시 말하면 자질이나 능력이 부족한자가 나올 수 있는 선거환경을 만든 당사자는 정치인만이 아니고 주민들도 모두는 아니지만, 저질 선거환경 조성 공동 책임자다. 

주민들은 투표하기 전까지는 후보의 능력이나 자질에 누구보다 엄격한 척 하면서도 막상 선거에 임하여서는 지금까지 견지했던 자세를 던져버리고 시류(時流)를 살핀다. 마치 게임에 이기 위해 기회를 살피기 위해 요리조리 탐색을 하는 어린이들처럼 말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합리적 판단인양 ‘찍을 마땅한 사람이 없으니 될 만한 사람을 찍겠다.’고 한다. 이러한 부류는 주로 거대정당의 후보를 선택한 사람들이 하는 상투적 언사다. 마땅히 찍을 사람이 없다는 것은 후보자를 제대로 탐색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찍을 사람을 결정해 둔 부류로 대개는 거대 정당을 지지하거나 선호(選好)하는 사람들이다. 


지지 또는 선호하는 정당이 있다하더라도 후보자가 마을에 들지 않으면 선택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용기이자 지혜다. 선거의 목적은 지도자를 뽑는 것이니 내 편보다는 모두의 편을 선택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모양이 좋기 때문이다. 동어 반복이지만, 선거의 목적은 지도자를 선출하고자 함이다. 자기 이해관계로 지지정당을 두고 있다면 달리 책할 사유는 없지만 선거의 본래 목적은, 내 이해(利害)가 있다하여 그 의의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는 사람들이 선거에 임할 때 두는 선택 기준은 대개 정당 선호도다. 지지와 선호는 구별하기 좀 그렇지만 분명히 다른 것은 선호는 상황적인 것 그러니까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선호를 이유로 거대 정당에 투표를 하는 사람을 탓하고 싶지 않지만 아쉬움을 가진다. 가볍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땅한 후보가 없으므로 거대정당을 외면할 이유가 없다’니 달리 할 말은 없지만 쉽게 공감이 안 되는 건 필자의 편견인지 모르겠다.

유의해야 하는 것은 주민들은 두드러진 후보가 없을 때 유관 후보를 찾고 그도 없을 때 대부분이 거대 정당의 후보를 선택한다. 정치꾼들은 경력자건 초보자건 이런 도식(圖式)을 알고 있다. 그들이 거대정당의 공천을 받고자 이전투구도 마다하지 않은 이유다. 

거대 정당의 존재는 정치인의 시각에서는 별 문제없다고 하겠지만 다수 국민의 눈높이에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우선 규모가 지나치게 크고 지배 구조도 기계적이라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정당으로서는 바람직하다 할 수 없다. 물론 거대정당이 존재한다하여 그러한 정치구도를 비민주적이라거나 그들이 벌이는 정치행태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신뢰를 둘 수 없다. 그간의 그들 정치행적이 그렇고 특히 인적구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인적 구성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그들 구성원의 면면을 볼 때 그렇고 특히 선거철에 보이는 기발한 후보들을 볼 때 더욱 그렇다. 그들의 후보 선정 기준에서 충성도는 중요하다. 당연한 현상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을 후보 선정 기준으로 하는 것을 합리적이라 볼 수 없다. 충성도가 높은 자들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지도자적 자질에 문제가 있는 것이 그간의 정치판 데이터다, 기발한 행동도 기회주의적 모습이고 그런것들은 눈에 쉽게 띈다. 

기회주의자는 후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말할 것이다. ‘정당에 충성을 하는 이를 배제한다면 어떻게 정당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국민이 정당에 묻는다. ‘그렇게 유지해온 정당이 얼마나 견고하고 민주주의를 실천했는가?’ 거대정당을 싸잡아 비난하고자 함은 아니지만 지금과 같은 정치 풍토에서 지도자를 찾는 것은 무척 어렵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다. 그런 한편 선거에 임하여서는 투표를 제대로 하자는 것인데 선거의 목적은 지도자의 선출임을 유의해야 함을 말하고 싶어서다. 이제 지도자 이야기를 해 보자.

 지도자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가르쳐 이끄는 사람’이다. 남을 가르치려면 지식이나 능력이 있어야 하지만 그에 앞서 갖추어야 하는 것은 도덕성이다. 재능이 있다하여 도덕성을 결여한 사람을 남을 가르치는 위치에 두는 것은 도둑에게 도덕교육을 담당하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식이 많고 능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도덕성을 결여한 사람은 남을 가르치거나 이끄는 위치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은 정의(正義)의 편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덕성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우리는 사회 보편성 즉 사회적 가치를 이야기 하면서도 이를 행동하거나 지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렇듯 정의의 실천은 보통사람으로서 쉽지 않은 과제다. 도덕성 그것은, 고도의 객관성이 확보되어야 비로소 실재(實在)를 동의할 수 있다. 

지도자에게 요청해야 하는 것은 ‘사회적 가치의 실현’이다. 그것은 도덕성을 갖춘 사람이라야 창출해 낼 수 있는 가치로 ‘그 사회의 다수가 동의하는 어떤 본질적 가치’다. 그것이 존재해야 그 사회의 통합성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선거의 목적을 지도자의 선출로 이해해야 한다. 그들은 정의로움에다 도덕성을 갖추고 능력도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가치 창출 능력이다. 유념해야 한다.(♣2018.04.25.)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탄자니아 통신] 성공하려면? 난 글렀네.





페이스북 최고경영자 마크 저크버그의 미의회 청문회 참석 기사는 질의응답보다 그가 입고 있던 옷에 더 초점을 맞춘 듯했다. 매일 회색 티셔츠에 후드티, 청바지 차림이었던 그가 짙은 남색 양복에 푸른색 넥타이를 매고 나왔으니, 신선하기도 하고 예의를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옅은 회색 반팔 티셔츠 9벌과 짙은 회색 후드티 6벌이 걸려 있는 자신의 옷장 사진을 공개한 후 그의 패션이 더욱 화제가 되었는데, 사소한 일상의 선택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대신 사업에 전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멋진 남성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회사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선택을 늘 강요당하는 최고 경영자로서의 고뇌가 느껴지기도 한다.  

성공한 사람들 중엔 한 가지 스타일 옷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하는데, 그 효시로 스티브 잡스를 꼽는다. 특별한 경험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일본 소니를 방문했던 그에게 제복을 입고 일하는 직원들의 모습이 큰 감동을 주었고, 그것이 회사와 사원을 하나로 묶는 매개라고 판단했다. 그는 즉시 일본의 유명 디자이너에게 애플의 유니폼용으로 100벌의 검정 터틀넥을 주문했다. 하지만, 직원들의 반응은 시큰둥했고, 그것들은 오로지 그만의 차지가 되어 죽을 때까지 입었다니 재미있지 않은가. 


이곳은 대학을 제외한 모든 학교에서 교복을 입는다. 여학생들의 경우 거의 발목까지 오는 긴 주름 스커트에 흰색 블라우스, 그리고 카디건을 덧입는다. 색상만이 다를 뿐 대동소이하다. 머리는 빡빡 밀어야 한다. 여학생도 예외는 아니다. 푸석한 곱슬머리를 기르면 솜처럼 뭉치기에 가시 땋기를 하고 가발을 덧대어 멋을 낼 수도 있지만, 학생들에겐 금기인 것이다. 현지인의 말에 의하면, 현대통령 마구풀리는 치마의 길이가 짧으면 찢어 버리라고 했다니 그 분위기를 알만하지 않은가.

며칠 전, 마르티나 카얀다 수녀님이 교장 선생님으로 재직하고 있는 ‘제임스 상구 여자 중학교’에 다녀왔다. 그곳은 베이지색이다. 그러나 주말이 되면 봄 향기 가득한 화사한 빛깔의 원피스로 갈아입는다. 일 학년은 꽃분홍색, 이 학년은 하늘색, 삼 학년은 바다색.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그 나이만이 누릴 수 있는 감성을 허락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 예쁜 원피스를 입고 뽐낼 곳은 없다. 시내에서 약 11킬로미터 떨어진 시골 마을이라는 물리적인 거리도 있지만, 방학 외에는 학교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는 교칙 때문이다. 그녀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놀이는 잔디밭에 삼삼오오 앉아 수다를 떠는 일.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무채색의, 멋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교복을 입었다. 남들이 보면 그게 그 옷이었을 텐데, 우리는 모양을 낸답시고 매일 다림질을 하고 새하얀 칼라로 바꿔달았다. 재킷은 최대한 몸의 곡선을 살려야 한다며 수선했고, 선생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학교 밖에서는 스커트 허리 다트를 접어 기장을 짧게 했다. 머리는 귓불이 보여야 하는 단발이었는데, 조금만 길어도 수시로 가위를 들고 나타나는 선생님에 의해 잘려 나갔다. 대범한 아이들은 휴일이 되면 가발을 쓰는 위험(?)도 감수했다. 가지 말라는 곳은 또 왜 그리 많았던지. 제과점이나 영화관도 출입금지였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금기를 어기면서 오는 쾌감을 우리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삼았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던 나이였으니 말이다. 대학에 가면 뭐든 할 수 있다는 희망이 공부를 하게 하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던 시절이었다. 

민주주의가 정착되며,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교복이 개성을 말상 시킨다는 여론과 함께 한동안 자율화로 가나 싶더니, 다시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으로 변신을 거듭하더니,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으로 탄생하기도 했다. 


이곳 사람들은 특별한 행사나 기념식이 있으면 화려한 색상과 패턴의 키텡게나 캉가라고 하는 천을 공동 구입해 옷을 맞춰 입는데, 디자인만은 개인의 취향이나 체형에 따라 각자가 선택한다. 아프리카에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라 생각해, 나도 성당 교우들을 따라 원피스를 만들어 입어 본 적이 있다. 생각보다 디자인이 예쁘게 나와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은 한복을 입듯 입곤 했다. 외국인이 한복을 입고 있으면 신기하고 예뻐 보이는 것처럼, 그들도 내가 자기들의 전통의상을 입어 주는 것을 굉장히 기뻐하며, 아낌없는 칭찬을 해 준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다. 


그러나 사실 나는 획일화 된 것들이 참 싫다. 조직에 속해 있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입어야 하는 상황이 오는데, 행사가 끝나면 누구보다 먼저 잽싸게 벗어던진다. 장시간 입고 있어야만 하는 때는 초반에 슬쩍 흉내만 내다, 더워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옆에 벗어 놓는 꼼수를 쓴다. 그래서 이렇게 떠도는 삶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인생이 지루하다는 느낌이 든다. 중요한 일에 참여할 만큼의 역량이 없으면서, 사소하고 반복되는 일상에서조차 잔재미를 찾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는 성격 탓도 있지만, 유목민의 생활 방식을 선택한 이상 최대한 단순화 시키며 사는 것이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이라도 자주 바꾸어 기분 전환을 하고 싶다. 그러나 이곳에서 쇼핑은 언감생심. 헤어스타일 역시 마찬가지. 어정쩡하게 인도 미용사가 잘라놓던 머리도 길러서, 땋는 것으로 해결하고부터는 더 변화가 없어졌다. 선택에서 오는 피로, 그것이 때론 그립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에겐 작은 변화마저 삶의 원동력이 되는 까닭이다. 성공하지 못해서 일까? 그래서 성공하지 못한 걸까? 


2018.04.28


 탄자니아에서 소파아

 “나는 네 마음을 알고 싶어”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병원 생활을 하고 있다. 입원 기간이 길어지면서 전혀 모르던 사람들을 만나고 싸우고, 때로는 친하게 지낸다. 간호사나 간병인들을 상대하는 게 어려운 일인 이유는 그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해서이다. 꼼짝 못하는 할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던 간병인 아주머니, 쉬는 시간에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이 아파지고 할머니들을 함부로 대한다기보다는 할머니들이 참 힘들게 하는 것을 확인하고나니 내가 판단하는 게 참 얄팍하구나 싶었다. 

<헬렌이 올 때까지 기다려>를 빌려와 뒤쪽에 써 있는 글을 보고는 놀랐다. 이 책의 내용이 유령이야기라고 써있어서였다. 유령, 귀신 이런 이야기는 별로 즐기지 않는데다가 부드러운 이야기라 생각하고 요즘 황폐해진 마음에 위로가 될까 해서 읽으려 했건만, 유령 이야기라니...그러나 단숨에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의 전개가 시원스럽고 잘 읽히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은 유령 이야기가 아니구나 싶어서 더 좋았다. 이야기는 내 마음을 알아달라는 어떤 아이의 이야기였고, 네 마음을 알고싶다는 또 다른 아이의 이야기였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새아버지를 맞게 된 몰리와 마이클, 그리고 새아버지의 딸인 헤더의 이야기이다. 이들은 시골의 교회로 거처를 옮기게 되고, 새 가족으로 거듭나고자 하지만 그것이 잘되지 않는다. 특히 헤더의 행동은 정말 옆에 있다면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헤더와 한편이 된 유령의 이름은 헬렌이다. 헬렌은 오래전 죽은 아이인데 헤더에게 나타나 자신과 같이 가기를 종용하고 몰리는 모든 상황을 알게 되어 헤더를 구해낸다. 

 알고 보니 헤더는 자신만의 큰 상처가 있었고 그것은 어찌하지 못해 새 가족과도 화합하지 못했던 것이다. 헤더는 그것을 고백하고 헬렌을 거부하고, 결국은 새 가족을 받아들인다. 아니 이들은 새로운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 된다. 

 헤더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 원했지만 방법을 알지 못했다. 언니인 몰리는 헤더의 행동이 밉고 싫었지만 헤더의 마음을 알고 싶어 했고 헬렌을 부르는 사건으로 인해 정답을 찾게 되었다. 간절히 원하고 행동하니 헤더의 마음이 보인 것이다. 

“나는 네 마음을 알고 싶어” 라고 몰리의 심정으로 제목을 쓰고 나니 이 말은 요즘 내가 우리 어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이구나 깨닫게 되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어머니도 헤더만큼 상처가 있었겠지 이해하지 못할 아픔이 있었겠지 생각해본다. 

“어머니 그래도 유령은 만나지 마세요. 그저 딸 구박하면서 오래오래 같이 있어요...”

 어머니와 내가 몰리와 헤더처럼 새로운 의미의 가족으로 탄생하게 될 것인지는 기다려보면 알 게 될 것이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민경아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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