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소통을 위해 비정규노동자의 말을 들어라 



요즘 언론을 보면 민주노총이 공공의 적이다. 민주노총에 대한 적개심이 얼마나 강한지 똥오줌 가리지 않고 정부의 딴죽만 걸던 자한당비대위원장 김병준 조차 "대한민국이 민주노총의 나라가 되고 있다. 난장판을 만들고 있다. 민주노총과 단호히 결별하고 국민과 함께 개혁을 이루겠다는 대통령의 용기 있는 결단을 하면 어떠한 정치적 의도를 품지 않고 민주당보다도 오히려 더 강력한 우군이 되어 드릴 것"이라 공언한다. 민주노총 전위원장이자 진보정치를 대변한다는 정의당 김영훈, 국내 진보학자의 자존심 교수 김동춘, 진보언론이라는 한겨레 경향까지 민주노총만 사라지면 대한민국이 갑자기 천국이라도 될 기세다. 

왜 이 난린가? 그것은 협치, 숙의 민주주의를 한다는 이른바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민주노총이 조합원들의 동의를 얻지 못해 불참한 탓이다. 내용을 보니 노동자에게 “탄력근로제 개악”과 “광주형 일자리”를 강제하려는 것이다. 탄력근로제는 특정 기간(3~6개월) 주 80시간을 일을 해도 시간외 수당을 지급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성수기 비수기가 있고, 신상품 발매, 밀어내기 수출 등 특정한 시기에 일과 이윤이 몰리는 기간을 장시간 값싸게 부려먹겠다는 말이다. 이것은 대부분은 IT 전자전기 통신 자본의 이익을 채워준다. 광주형 일자리는 현재 비정규직보다 임금 노동조건이 낮은 정규직 일자리로 현대 차 광주 공장을 짓겠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삼성, 엘지, SK, KT와 현대-기아차 자본의 이익, 결국 재벌을 위해 노동자들을 과로사 시키자는 의도다. 

김병준이 난장판이라 부른 행위는 빈곤과 차별과 고통의 당사자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죽음에 죽음을 더하는 사기 대화가 아니라 진짜 대화를 하자는 몸부림이었다. 노동자들은 오래전부터 진짜 사장과 진짜 대화를 원했다. 권리와 의무를 일치시키자는 아주 상식적인 요구다. 하지만 진짜 악당은 뒤에 숨고 조무래기만 설치는 조폭처럼, 인신매매 포주인 파견업체 사장, 하청 사장 급조된 자회사라는 ‘바지’들만 설쳤다. 진짜 책임자와 진짜 아픈 자들이 직접 만나, 진정한 문제해결을 하자는 노동자들의 절박함은 가진 자들에겐 그저 ‘난장판’이다.

다른 한편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통령의 직접 면담 대화를 요구하는 것은 문재인 정권에 대한 충고다. 지난 1년, 우리는 민생적폐 청산의 골든타임을 잃었다. 외려 현 정부는 본격적으로 가진 자들의 이익에 근거한 길을 가기 시작했다. 이런 갈림의 시기에 비정규 노동자들은 대통령과의 직접 면담을 통해 ‘온 길에 대한 평가와 갈 길에 대한 민의 소리’를 알리려 했다. 경제가 어려운 진정한 이유, 우리 사회 생활적폐의 진정한 걸림돌에 대해 말이다. 경영자들이 지나친 규제와 민생 우선 정책, 강성 노조의 존재로 투자의욕을 잃어 경제가 어렵다는 거짓을 근본에서 타파하자는 것이다. 김대중~문재인까지 20년을 넘게 없애고 풀고 혁신했다는 규제라는 것이 사실은 이윤과 탐욕에 쓰러진 안전 보건 복지이자 사람에 대한 존중이었을 뿐이다. 작금의 경제위기가 노동자 민중의 눈에는 대부분이 경제적 적폐청산을 거부하고 복지적 제도 정책을 파탄시키려는 ‘자본의 사보타지, 파업’에 의한 허풍이다. 그 결과 1987년 6월 항쟁, 789노동자 대투쟁, 1997년 총파업에서 재작년 촛불항쟁까지 한국 민중의 민주주의는 ‘잠시 이기고 길게 지며 적폐들의 변태와 잔존과 부활을 보는 피눈물 나는 좌절과 허무의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음을 경고하려 했다. 경제위기라 불리는 지금의 모습이 한국사회 적폐 기득권들의 은밀하면서도 총체적인 반동 쿠데타이자 저들이 짠 ‘물구나무 선 촛불반란’임을 알리려는 것이다. 

민주노총 집회라고 조중동 등이 난리를 쳤지만 국회 법원 검찰 청와대로 이어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행진은 이미 민주노총을 넘어서 있다. 그들은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를 부르며 끝내 어린 여성 노동자 옆에 선 오늘날의 전태일이다. 한국의 정치 학계 언론들이 가진 자들의 이익을 위해 대화니 소통이니 민주주의를 팔 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청와대로 가면서도 손에 수능을 치른 학생들에게 나눠 줄 갑질 예방 노동수첩을 들고 있었다.(사진) 헬 조선에 빠진 지금 젊은이들이 전태일의 어린 누이다. 촛불이 피어난 곳, 촛불의 처음이자 끝이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4박5일의 노숙 면담 요구 투쟁은 촛불 민주주의가 현 정권에 보내는 마지막 충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문재인 정권과 더불어 민주당은 적폐의 품에 안겨 민주와 인권의 무덤을 파는 길을 멈추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말에 가슴을 열어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대화 소통하는 길이 촛불의 길이다.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빵은 사랑이다 X 유니콘 베이크샵 


금천문화재단_금천문화링크 빵Lover의 첫 번째 금천 여행지, 유니콘 베이크샵 



금천문화재단_금천문화링크 Love는 금천의 LOVER들이 마음껏 LOVE 할 수 있는 금천을 꿈꾸는 금천문화재단_금천문화링크 LOVER는 다양한 취향의 시선으로 금천의 곳곳을 담아보려 합니다. 덕후란 일본어 오타쿠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오덕후'의 줄임말로, 현재는 어떤 분야에 몰두해 전문가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아마추어 : 아마추어(amateur)란 라틴어로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amor)에서 유래된 말로 아마추어는 전문적 권위나 승진과 관계없이 진정으로 그 일을 사랑하는 사람, 스스로 좋아하며 그 일을 즐기는 사람을 뜻하지요. 하지만 소위 전문가로 자칭하는 사람들이 등장한 후, 아마추어는 상대적으로 얕보이는 단어로 변질됐습니다. 

이제 본격 '덕후', '아마추어(애호가)'를 위한 금천문화링크 시리즈!




빵을 사랑하는 빵Lover가 빵집따라 금천을 여행한다! 빵Lover의 첫 번째 금천 여행지, "유니콘 베이크샵 UNICORN BAKE SHOP“입니다. '유니콘 베이크샵'은 9월 27일에 정식오픈한 따끈따끈한 빵집입니다. 운좋게도 오픈 전에 이 곳을 알게 된 빵Lover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빵 사진을 보고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잠시 가라앉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유니콘 베이크샵'의 빵을 맛본 날! 깜파뉴, 포카치아, 식빵, 파운드, 타르트, 마들렌, 스콘, 쿠키 등등등...노오란 조명을 받고 있는 빵들이 아담한 매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빵Lover라면 고통스러운 순간이죠. ‘다 맛있어보이는데 무얼 먼저 먹어볼까...’ 오랜 고민 끝에 빵Lover가 선택한 빵은?! 빵Lover's Pick, 바로 생바질 치아바타 입니다! 부드러운 치아바타 속 더 부드러운 치즈와 바질의 만남이 입 안을 가득 채운 그 느낌, 놓치지 않을거에요... 직접 느껴보셔야 해요.




또 인상적이었던 것! '유니콘 베이크샵'은 테이블까지도 '빵'같았습니다. 마치 데니쉬식빵 같죠? 이는 빵Lover의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입니다. 사장님의 의도와는 다소 다를 수 있습니다.커피와 빵을 주문하니 덤으로 크림치즈파운드도 주셔서 함께 맛볼 수 있었습니다. 다음엔 너로 정했닷. 과연 끝까지 생바질 치아바타와 고민했던 메뉴답게 기대를 저버리지 않더군요.

'유니콘 베이크샵'은 두 청년이 운영하는 빵집입니다.일을 하며 만나게 된 두 청년이 서로 마음이 맞아 함께 빵집을 준비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단순히 '제빵사' 와는 조금 다른,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 으로 스스로를 생각한다는 사장님답게 명함에도 'Artist' 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금천문화링크 빵Lover가 먹은 빵은 Artist 가 만든 빵입니다 ^^ 수원부터 서울 이곳저곳을 알아보았지만 금천구만큼 미래성이 보이는 곳은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청년사장님에게서 금천구의 밝은 미래를 볼 수 있었는데요. '유니콘 베이크샵' 이름처럼 개성넘치는 빵집으로 자리잡기를 기대해봅니다.다음에는 빵Lover의 두 번째 빵 여행지, 독산역 인근 빵집 이야기를 들려드다릴게요.금천문화링크의 또다른 시리즈가 궁금하신 분들은 ‘우리마을 문화통장 네이버 포스트’로 놀러오세요~ 마지막으로 유니콘 베이크샵 명함에 적혀있는 명언으로 빵Lover는 이만 인사드립니다. “빵은 사랑입니다.”



유니콘 베이크샵   

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113-139

영업시간 : AM 11:00 – PM :30 / 일요일 휴무

SNS : 카카오톡 플러스 친구&페이스북페이지 유니콘베이크샵



이수역 폭행사건에 대해서






 음. 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구나. 진짜 언제적 편가르기 하는건지 모르겠다. 저번에도 말한거 같은데 여자 남자 편가르기는 나 초딩 때 했던 짓이다. 근데 이게 페미니즘 이라는 있어보이는 이름을 방패 삼아 점점 확대되고 있는 거 같다. 페미니즘이란 훌륭한 사상을 더럽히는 행위인 것을 사람들은 모르는 것 일까. 이젠 누가 맞고 틀린지 모르겠다. 그저 대한민국의 페미는 썩었고 피해자 분들이 잘 되길 바랄 뿐이다.

 이 사건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11월 13일날 술집에서 여자A씨와 친구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근데 다른 테이블에 커플이 자꾸 자기들을 기분 나쁘게 쳐다 보고 있었고 A씨 일행이 뭐라고 하자 다른 남자B씨 일행 5명 정도가 합세해 “숏컷한 얼굴 좀 봐라”, “메갈들 실제로 처음본다” A씨를 욕하기 시작했고 A씨 일행은 신고하겠다며 나갈려고 하자 남은 남자들이 자신을 찍었다고 생각하고 찍지 말라고 하면서 몸싸움이 되었고 A씨 일행이 이걸 찍으려 하자 남자가 핸드폰을 뺏으며 밀쳤고 그대로 쓰러졌지만 남자들은 이를 조롱 하였다고 한다. 경찰에 신고한 A씨를 보고 급히 나간 남자일행들을 A씨는 붙잡았지만 남자들은 발로 찼고 그대로 계단 모서리에 박아 A씨는 뒤통수가 크게 다친다. 그리고 A씨가 어떤 사이트에 자기 상처 사진을 올리며 사건은 확산 되었고 남자들을 처벌하라는 청원도 올라왔다. 근데 여기서 cctv영상이 퍼지면서 밝혀지는 사실들. A씨 일행이 먼저 커플을 보고 “한남이 여자 만나려고 꾸미네”, “돈도 없어서 이런 곳이나 왔네” 등 먼저 시비를 걸어서 마찰이 생겼고 거기있던 남자들 일행까지 합세해 일이 커졌다고 한다. 그리고 남자들만 욕만 한 게 아니라 여성들도 “때릴거면 때려봐라”,“너 게이냐?”등등 모욕적인 말을 뱉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건은 아직 진행중이며 경찰에서 조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근데 여기서 마친 게 아니였다. 래퍼 산이가 이수역 폭행사건 동영상 이라며 새로운 동영상을 올린 것. 사람들은 잘했다 다 2차 가해자다 라고 의견이 갈리고 있는 가운데 16일, [페미니스트] 라는 곡을 냈다.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여성들을 사랑해. 근데 니네도 군대 안가고 우리가 데이트 비 다 내는데 불만만 말하지 말고 자기만 불평등 하다고 하지마. 그리고 워마드 메갈 이런거 다 없어야 된다” 뭐 이런 내용이다. 이 곡은 엄청나게 화제가 되었고 조회수가 178만회가 넘었다. 근데 이걸 들은 래퍼 제리케이가 디스곡을 냈다. 내용은 대략 “가부장제로 피해 본 건 인정 할게. 근데 책 한권 읽고 그렇게 나대는 건 좀 아니지 않냐? 마치 군 면제 당한 애가 군 얘기 하는 거나 똑같애” 실제로 산이는 미국국적으로 군 면제를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리케이 옹호와 산이 옹호로 갈리는 와중에 디스를 참 좋아하는 산이가 재빠르게 맞디스곡을 냈다. 제목이 6.9cm. (이 뜻은 뭐. 알 사람은 다 알거라고 생각한다.) 이 곡에서 산이는 화려한 랩스킬과 더불어 “설명 할 시간 줘서 고마워. 돈 벌려고 페미에 끼어 든거지? 워마드 메갈이 얼마나 나쁜 건지 설명해줄게. 니는 던말릭(같은 소속 래퍼였지만 가짜 미투 때문에 회사에서 방출 됨.) 한테 억지로 사과문 쓰라하고 내쫒았잖아. 너의 사상이 워마드 메갈이런거라면 뭐, 난 리스펙 함.” 이런 내용을 담았다. 근데 또 디스곡이 나왔다. 이번엔 제리케이와 같은 회사 래퍼 슬릭의 디스곡이었다. 내용은 대충 “우리나라가 뭐 OECD 들었갔느니 더치페이 라느니 무슨 니 할머니가 할말을 하고 있냐. 역시 너도 한남이다” 이런 내용이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사람들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산이는 인스타에 “미안해. 오해가 조금이나마 풀렸음 좋겠어” 라며 사과문과 설명문을 올렸다. 자신의 오랜 팬이 노래를 듣고 실망해서 이런 글을 올린다며 설명문에 보면 [페미니스트] 곡의 화자는 자신이 아니며 겉으로는 페미니스트라고 하면서 하는 말은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은 사람이고 그 사람들을 비판한 노래라고 써 놓았다.(근데 솔직히 나도 몰랐음) 이 글을 본 사람들은 “결국 이렇게 사과 할 거 였으면서” “반말로 사과하는 게 리얼 힙합이냐” 등등 싸늘한 반응이 많다. 이 디스전 또한 진행 중이며 아마도 산이가 또 맞디스 곡을 내지 않을까 싶다. 

 디스전은 재밌어야 하는데 이건 누가 맞는 말한건지 모르겠다. 페미도 일베도 메갈도 워마드도 마찬가지다. 그냥 자기가 재밌는 거 선택해서 편들으시면 될 듯 하다.


한줄 평: 다 똑같음. 

"엄마가 미안해“ - 쇠제비갈매기 가족의 슬픈 이야기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포구 모래밭에 알을 낳고 살아가는 쇠제비갈매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쇠제비갈매기는 도시에서 필요한 모래를 마구 퍼가서 낮아진 모래밭에 알을 낳았습니다. 장맛비가 내려 알들은 물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새끼 갈매기 세 마리와 어미 갈매기가 살고 있었는데 어린 새끼들은 비를 맞으며 엄마 품속에서 떨고 있었지요. 쏟아지는 빗속에서 새끼들을 구하기 위해 엄마 갈매기는 멀리 떠내려가는 널빤지를 밀어 오려고 합니다. 세차게 출렁이는 강물 때문에 쉽게 새끼에게 널빤지를 가져올 수가 없었습니다. 부리가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엄마는 포기하지 않고 힘을 냅니다. 한 마리씩 한 마리씩 널빤지 위로 올린 어미 갈매기는 안전한 곳으로 널빤지를 밀어보려 하지만 점점 힘이 빠집니다. 강물에 떠내려가는 새끼들을 보아도 어미갈매기는 날개만 푸드덕거릴 뿐 날아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새끼 갈매기 한 마리가 강물에 휩쓸려 금세라도 강물로 떨어질 것만 같자  어미는 죽을힘을 다해 날개짓을 합니다. 가까스로 날아오르는 순간 세찬 강물이 새끼 갈매기들을 덮쳐 새끼 갈매기들은 흔적도 없이 강물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거센 빗줄기가 그친 포구엔 다시 포크레인이 모래를 파헤치고 그 모래밭에는 쇠제비갈매기 어미만 혼자 남겨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엄마는 새끼를 낳고 천적으로부터 최선을 다해 새끼를 보호하고 길러냅니다. 성체가 되어 둥지를 떠나도 스스로 먹이를 구할 때까지 엄마는 새끼들을 위해 헌신하지요. 이 책에서도 몸이 부서져라 새끼를 구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런데 제목이 왜 엄마가 미안해 일까요? 재빨리 날아 널빤지가 뒤집어지지 않도록 못 한 게 미안 한 것일까요? 잠시 어미쇠제비 갈매기가 되어보았습니다.

모래밭이 낮아진 걸 모르고 그곳에 둥지를 튼 게 미안해집니다. 다주어도 아깝지 않지만 다 주어도 늘 부족하게 해 준 것 같은 엄마의 마음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모두 같은가 봅니다. 


얼마 전 공영방송에서 안동호에 살아가는 쇠제비갈매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습니다. 

누군가는 생태계 파괴엔 관심이 없고, 누군가는 안타까움으로 추적, 연구하고 그것을 알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어미 쇠제비갈매기가 미안해하지 않도록 우리는 그들의 삶의 터전을 지켜줘야겠습니다. 우리만 사는 지구가 아니니까요.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최경영


[창간7주년 기념 좌담회] 청년, 마을신문에 바란다


삶에 대해 깊이 이야기하는 신문이 되길



이번 호는 창간 7주년 기념호이다. 2010년 11월 창간준비 1호를, 2011년 5월12일에 창간호를 내놓았다. 그리고 만 7년이라는 시간이 꽉차고 넘쳤다. 지방선거 국면으로 11월말에 되어야 창간기념호를 내놓게 된 만큼 신문에 대한 새로운 제안들이 받고 싶어졌다.

모든 사람들은 종이신문은 사양산업이라는데 이견은 없다. 하지만 AI시대에서 뉴스 생산량은 급격히 늘어나고 있고 인터넷과 모바일에서의 뉴스 소비 역시 늘어나고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대부분의 승패를 다루는 기사는 모두 AI알고리즘이 작성했다. 요즘 우리가 보는 프로야구나 축구 등 스포츠 기사 역시 대부분은 AI알고리즘이 쓰고 있다. 

이런 시대에 마을과 지역의 미디어, 지역신문이 어떻게 고민하고 접근해야 할까라는 주제로 11월21일 금천구에 살고 있는 젊은 주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패널은 금천구에 살며 일하는 엄샛별(엄), 임영지(임), 곽승희(곽), 금천구가 일터인 김인주(김), 박새솜(박) 씨를 만났다. 이들은 모두 30대로 금천구에 살거나 금천구와 연관된 일을 하고 있다.





 평소 뉴스 소비 형태?

곽: 예전에는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많이 봤는데 내 성향의 뉴스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네이버나 다음을 찾아본다. 알람 앱 중에서 퀴즈를 풀어야 멈추는 앱인데 뉴스도 보여주고 있고 그런 것을 활용한다. 요즘엔 팟캐스트를 많이 듣는다. 

엄 :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많이 본다. 친구들이 추천하고 공유한 것들을 보는 경우가 많다. 친구들이 애써 추천한 것인데.(웃음). 이동할 때 포털 검색어를 본다거나 이슈가 되는 주제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들을 찾아보는 경우가 많다.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서 양 측의 입장을 살핀다. 서로의 입장이 다르니까 내 의견과 다를 수도 있어 그런 부분을 살핀다. 

김: 아침에 잠결에 네이버 나 다음에서 뉴스를 보고 출퇴근 버스에서는 얍티비를 볼 때가 많다. 버스에서 얍티스는 참 재미있다.  회사에 와서 짬짬이 포털을 본다.  페북도 이용하다가 한쪽 의견만 보는 경우가 많아서 어느 순간 보지 않는다.

임:  아침 출근 준비하면서 TV뉴스를 보고, 출근해서는 네이버와 다음 기사를 다 훑는다. 관점이 다르다보니. 그리고 퇴근하면 TV뉴스를 보면 아침과 저녁의 일들이 정리된다.


동네 소식은 어떻게 듣나?

이 질문에는 직업적 특성이 반영된다. 관내에서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인주, 샛별 씨는 ‘사람을 통해서’ 듣거나 밴드나 페이스북을 통해서 듣는다고 답했다. 대부분 스치듯이 소비하고 필요한 정보가 있을 때 검색하는 경우가 많다.

엄: 마을신문이 마을 소식에 대해서 좀더 깊게 알게 되는 것 같다. 어떤 행사나 단체 등에 대해서 알고 싶을 때 온라인 홈페이지를 들어가서 검색하기도 한다. 

곽: 요즘에는 신문대신 팟캐스트를 많이 듣는데 지역소식을 꼭 들어야한다거나 재미가 있지는 않다. 


청년, 마을과의 연결

김: 지금 사는 곳은 다른 동네로 잠만 잔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소식을 접하기는 쉽지 않고 관심을 갖는 것조차 어렵다. 오히려 일하는 곳에 대한 현황을 더 잘알게 된다.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에 대해 알고 싶다는 심리적, 시간적 여유가 없다.

곽: 시간이 나면 찾게 된다. 나도 퇴사를 하고 나서 동네의 공간이 보이고 많이 가게 됐다. 내가 사는 곳에서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알고 싶고, 살고 싶다는 욕망이 없다면 찾기 어렵다. 오히려 다른 곳에서 취미생활을 찾는다. 요즘 우리세대는 만나서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 같다.

박: 회사를 구로로 다녔을 때 어떻게든 동네에서 활동을 해보려고 했다. 주민자치위원이 돼서 회의 참석하기 위해 반차를 내기도 했는데 그 괴리를 좁히기 어려웠다.

임: 삶터와 일터가 금천구라는 것이 큰 행복인 것 같다. . 다른 청년들은 자기 스스로 회사 다니기도 바쁘기 때문에 하고 싶어도 못할 것 같다.


마을신문에 바라는 점

곽 : 사진 등의 이미지가 중요한데 그 부분이 많이 부족하다. 사진이 더 많이 들어갔으면 하고 텍스트보다는 내용을 정리한 이미지를 활용했으면 한다. 시상식의 경우도 굳이 그 사람이 궁금하지는 않다. 지역의 소식 중 밴드나 카톡에서 봤던 내용을 굳이 다뤄야하나? 누가 상 받고 어떤 대회가 있었다는 것을 굳이 다룰 필요는 없는 것 같다. 특이한 동네 뉴스를 찾는  것이 어떨까? 청년들을 접근시키기 위해서는 게임, 롤, 입사, 퇴사 등 트렌드에 맞는 관심있는 키워드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깊이 있고 특색 있는 신문이 되었으면 좋겠다. 마을 활동을 안하는 사람들, 마을에 애정이 없는 사람들에도 관심이 가는 컨텐츠가 필요하다.  

엄 : 마을의 작은 이야기부터 구 행정의 이슈들까지 모두 필요한 것 같다. 새로 들어온다는 도장공장 이슈 같은 것을 꾸준하게 파줬으면 한다. 모두가 궁금한 문제이기 때문에 깊게 이해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곽: 도장공장 집회에서 중앙방송에서 온다고 더 많이 가야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을신문이 그런 동네 주민에게 가장 곁에 있는 언론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안되는 것 같아 아쉽다.

김: 지금의 시스템이 속보와 정보를 주는 것에는 느리고 무리인 것같다. 오히려 사람 사는 내용은 바탕으로 삶에 대해서 깊이 이야기하는 살펴보는 이야기가 있으면 좋겠다. 친근하고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기사들이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기사를 카드뉴스나 동영상으로 재 가공하는 방식도 필요해 보인다. 이미지로 필요한 정보를 간략하게 보는 것이 좋다. 아니면 뉴스타파처럼 미친 듯이 파고 들거나. 일단 신문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딱딱하다. 뭔가 앉아서 읽고 해석해야 할 것 같다. 금천인은 신문의 느낌보다는 마을의 느낌이 강했으면 좋겠다.

임: 금천구의 다른 단체나 기관의 소식을 알 수 있어 찾아보게 된다. 금천구에 살고 일하지만 몰랐던 내용을 알게 된다. 그런 역할을 좀더 충실히 하면 좋겠다. 그리고 ‘맛집’탐방이나 청년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한 욕구조사를 통해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장제모칼럼] 서울 뉴딜일자리



최근 우리 사회의 최대 이슈는 일자리 문제인 것을 부인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특히 청년들의 일자리는 더욱 큰 문제로 특단의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국가 위기를 이야기해야 할 정도의 사회 빅 이슈가 되고 있다. 그간 청년 실업을 포함한 일자리로 정부는 물론 지방자치권역에서 이런 저런 대책을 마련하였지만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아 국민의 한 사람으로 걱정이다. 

이런 시기라 서울시가 시행하고 있는 뉴딜일자리는 관심을 갖게 한다. 서울시 뉴딜 일자리는 2013년부터 시작한 일자리 지원 프로그램으로 미취업자에게 공공서비스와 관련된 일자리를 제공하고 직무교육 등을 통해 민간 일자리에 취업하도록 도와주는 사업이다. 즉 시민들을 위한 공공서비스를 찾아내 일자리로 만들어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취업 준비생, 경력 단절 여성 등에게 제공하고, 참여 기간 중에 직무교육 등을 진행해 이를 통한 경력을 바탕으로 민간 일자리에 취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초기 참가자들의 근무 태도 불량과 행정조직 체계 미비로 인한 진행 차질로 사업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 등 도입초기부터 파행을 겪고 있다. 서울시는 이러한 문제를 초기적 부작용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마땅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어 기대를 두고 있는 시민들 특히 취업을 갈망하는 청년실업자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문제인 것은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인데도 이 제도는 아직도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지 못한 체 계속되고 있는 점이다. 

서울시의 뉴딜일자리가 기대한 효과를 내지 못한 데는 앞에서 언급한 참여자의 불성실한 대응도 문제였지만 사업을 관리하는 행정에도 문제가 있었다. 즉 이 사업을 추진해 나갈 책임을 져야 할 중간 관리자가 없었던 것이 그것이다. 서울시는 일자리 참여자들이 겪는 고민과 업무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 등을 담당하기 위해 뉴딜매니저를 관리자로 두어 운영하고 있으며, 이들은 참여자의 급여·출퇴근 등 근무 전반을 살피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참여자 수에 비해 관리자 즉 뉴딜매니저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고, 이들 역시 뉴딜일자리 사업을 통해 선임된 계약직 신분이라 부여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데는 한계가 있은 것이 중요 이유다. 

구직 중인 청년 등에게 업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겠다며 의욕적으로 추진한 ‘서울 형 뉴딜일자리’가 당초 도입 목적과 달리 운영에 난맥상을 드러내면서 시간 때우기 식 단순 아르바이트로 전락했다는 지적은 특히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해마다 1000억 원 가까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는 사업인 만큼 중간관리자 충원 등 제도정비를 통해 도입 취지를 살려야 한다는 지적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서울시에 따르면 2013년 4079명이던 뉴딜 일자리 참여자는 2015년 1730명까지 줄었다가 5294명으로 증가했고 2016년에는 2160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사업 수 역시 2013년 29개 2014년 27개 2015년 45개 2016년 77개 등 완만한 증가세를 유지하다 266개로 급증했으며 2017년 사업 수는 279개로 전년보다 13개 늘었으며. 예산도 856억원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2018년 현재 뉴딜 일자리 참여자 수는 총 3,954명이라고 하는데 사업장별로 수시로 대상자를 뽑고 있고 현재 모집이 진행 중인 것을 고려하면 이 해 뉴딜일자리 참여자 수는 4,600명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금년도 선임된 뉴딜매니저는 76명으로 매니저 한 사람이 50명이 넘는 참여자를 관리하는 실정이다. 뉴딜매니저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에 의하면 관리 대상자는 사업장 별로 차이가 많은데 십 수 명을 담당하는 사람도 있지만 300명을 넘는 인원을 관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관리자 즉 뉴딜매니저는 모두 뉴딜일자리 사업에 의해 선임된 계약직이라 업무 연속성도 불안정한데다 사업 이해정도가 일반 참여자와 별로 다르지 않아 기대하는 관리가 되지 않는 경우가 잤다.

뉴딜일자리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뉴딜매니저가 없어 일자리 참여를 하였지만 임무 부여가 없어 두 달 동안 맡은 일도 없어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즉 담당 뉴딜매니저가 공석이라 임무 부여 등 지시하는 사람이 없어 놀다시피 하면서도 급여를 받았으며 결국 다른 매니저가 임시로 맡아주었으나 기존의 자기 일에 몰두하느라 제대로 된 일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일자리를 받아 출근을 했으나 업무를 배정받지 못하고 있다가 3개월이 지나서야 업무를 배정받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듯이 서울시의 뉴딜일자리는 그 목적의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운영차질로 긍정성을 바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이지만 서울시는 뉴딜일자리를 계속하여 확대해 나갈 방침을 세워 2019년에는 972억을 투입해 5,500개 일자리를 창출할 계획이라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뉴딜 일자리는 한정된 시간의 일자리라는 점이다. 즉 규정 시간이 지나도록 다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다시 실직자 신세로 돌아가야 한다. 물론 이러한 질서로 시행된 제도이기는 하지만 다시 실직자 신세가 되는 사람들에게는 실망으로 인한 고통을 주게 되고 이러한 결과는 또 다른 사회 문제로 발전할 수 있는 점은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서울뉴딜일자리는 계속되어야 한다. 일자리 확충이 필요하고 처음부터 성과를 크게 기대할 수 없음은 예상했던 일이다. 그간에 만난 시행착오를 살펴 성과 있도록 추진해 나가야 하며 이에는 당국자는 말할 것도 없고 참여하는 국민들도 사업의 취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등 사명감을 가지고 동참해야 한다. 일자리를 만드는 일이 아닌가!

 (♣2018.11.21)



[기고] 종로구 고시원 참사를 보면서

 

싸늘한 가을비가 내리던 11월 9일 새벽어쩌면 당신은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며 조금만 더조금만 더 하며 누워 있었을지도 모른다비가 와서 일을 쉬는 사람이 많았다던 고시원의 그 사람도 무척 추웠던가 보다너무 추워서 켜놓고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발생한 전열기 복사열이 원인 이라는게 현재까지의 분석이다.

 

어떤 이는 고시원이라고 해서 젊은 사람들이 많을줄 알았는데 사망자 대부분이 40대에서 60대여서 놀랐다고 한다이제 고시원은 고시공부를 위해 잠시 머무는 공간이 아니다고시원은 가난한 노동자의 주거지이고거리 생활로 밀려나기 전 마지막 주소를 둘 수 있는 집 아닌 집이다.

 

최근 발표한 국토부의 주거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3695백 여명이 비주택(고시원여관여인숙판자집비닐하우스일터의 일부 공간, PC만화방기원찜질방 등)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중 15만 명이 고시원이 거주한다고 한다고시원은 주택이 아니라서 즉주거시설이 아니라서 주택법에 명시된 최저주거기준을 지킬 필요가 없다오래된 고시원(2009년 이전설치)은 개정된 소방법 적용도 받지 않기 때문에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도 없다하지만 그곳엔 사람이 산다. 10년 이상을 한 고시원에 살았다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살고 있어도 원래 사는 곳이 아니므로 법을 적용하지 않겠다는 게 말이 되는가무려 15만 명이다당장 국가와 지자체는 고시원등 다중이용시설에 스프링클러 등 화재예방시설을 설치하도록 해야 한다그리고 주거시설도 아닌 고시원에 살게 할 것이 아니라 이들 취약계층을 위한 임대주택 공급을 늘려야 한다.

 

이번 화재 때 창문이 없는 쪽의 거주자가 주로 희생되었다고 한다창문이 있으면 40만원창문이 없으면 35만원주거복지센터에서는 주거위기 가구에 고시원비를 지원할 수 있는데 월 한도액이 35만원이다지난달 35만원 한도액을 지키기 위해 창이 없는 고시원 방으로 들어가게 했던 사람이 떠올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금천주거복지센터 윤정선

 







 

 

 


금천구 행정을 산재 사고의 공범자로 만들지 말라!






한때 포항제철과 현대중공업에서 무재해 달성 몇 년이라는 자랑 광고를 보고 경악한 적이 있다. 듣고 아는 산재 사망만도 몇 건인데 어떻게 저런 거짓말을 하냐는 분노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하청 노동자들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산재와 사망은 제외시킨 결과다. 더럽고 위험하고 어려운 일은 하청 위탁 비정규화 즉 외주화시키고 거기서 일어나는 사고와 죽음은 자기와 무관하다는 저 악랄한 악덕을 버젓이 자랑까지 해되는 모습에 서럽고 분하고 참담했다.


지난 호 금천인 일면 톱뉴스에 금천구 청소용역노동자들의 산재 소식이다. 1년에 3명 중 1명이 다쳤다고 한다. 최근 1년 중 다친 사람들이 전체 일하는 사람들 중 32%가 된다는 것이다. 32%라는 수치 앞에서 잠시 사고가 멈춘다. 우리가 무심코 버린 쓰레기에 묻은 노동자들의 피가 선연하다. 만약 저 수치가 노동자가 아니라 사장들이었다면, 무슨 박사 교수 전문가들이었다면, 하물며 청소 용역을 관리하는 공무원들에게 닥친 수치였다면 세상은 이렇게 조용할 수 있을까?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산재 위험직종 실태조사’ 보고서(2014)를 보면 일터에서 다친 조선·철강·건설플랜트 하청노동자 343명 중 산재 처리가 된 사람은 36명(10.5%)에 그쳤다. 개인이 비용을 부담하거나 아예 치료를 받지 못했다는 사람도 122명(35.6%)이나 됐다. 나머지 185명(53.9%)은 원·하청업체의 비용으로 처리(공상)됐다. 산재처리를 하지 않은 이유는 “원·하청업체의 불이익을 우려해서”라는 응답이 39.6%, “원·하청업체가 산재보험 처리를 못하게 해서”(29.4%)와 “산재보험 신청 절차가 복잡해서”(9.5%) 등이었다. 다친 사람을 위한 나라 법 행정이 미미하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산재율은 낮다고 한다. 심지어 독일 제조업이 2.65%(2011년 기준)에 비해 우리나라는 같은 해 0.65%였다. 수치로 보면 독일보다 노동환경이 더 안전한 셈이다. 근데 산재사망률을 보면 독일은 10만 명당 1.7명이었다. 우리나라는 10만 명당 7.9명이었다. 일하다가 다치거나 아픈 노동자는 독일의 4분의 1 수준인데, 죽는 노동자는 4배가 더 많다. OECD 평균과 비교해 봐도 우리나라 산재율은 0.59%로 전체 평균(2.7%)에 한참 못 미치지만, 산재사망률은 10만 명당 6.8명으로 압도적 1위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다치거나 병에 걸리는 과정 없이 졸지에 돌연히 죽는 특별체질을 가지고 있는 건가? 이 격차의 비밀은 은폐다.  사망에 이르러 더 이상 감출 수 없기까지 감추는 기업과 그것을 방관하는 행정이 만든 참사다. 


산재 은폐율이 높은 것은 물론 산재 은폐를 부추기는 여러 제도적 허점과 고질적인 원·하청 구조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가장 쉬운 이유는 아마 산재보험료 산정 방식이다. 산재가 많이 발생하는 업종과 사업장에 산재보험료를 더 많이 부담하는 현 제도는 기업에게 산재에 대한 노력이 생명과 안전이 아니라 비용의 증가로 보게 만든다. 우리가 산재를 사적 보험이 아니라 공적 보험 사회적 보험으로 제도화한 것은 산재 위험도가 큰 부분에 안전을 더하기 위해서인데 안전대신 비용과 부담만 더하는 꼴이다. 비근하게 건강보험만 하더라도 질병 발생 위험이 큰 가입자에게 보험료를 더 많이 부담시키지 않는다. 그러니 현 산재보험제도 자체가  사회보험의 연대적 원리와 보편적 가치를 위배하고 있다. 더 웃긴 것은 산업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에서 산재 보고의무를 위반했다가 적발됐음에도 산재 처리가 이뤄지지 않은 경우가 절반이 넘는 다고 한다. 고용노동부 자료에도 최근 5년간 산재 보고의무를 위반해 적발된 건수가 4,549건이지만 이 중 산재 처리가 된 경우는 2,003건에 그쳤다. 위반을 확인하고도 그 위반을 시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 정치 행정의 현실이 산재를 은폐하고 위험을 방조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경우 노동행정과 관련된 부분만 제대로 잡아도 대부분의 문제가 예방되거나 쉽게 해결된다. 예를 들면 공공서비스 노동에 대한 과도한 착취는 민영화 또는 민간위탁의 결과다. 금천구 청소용역노동자들에게 강요된 짐승의 일터도 결국 사회적 공공적 업무를 민간 위탁했기 때문이다. 민간위탁은 이윤논리에 공공적 기능을 희생하는 공공업무 사유화 상업화 정책이다. 시민들에게는 공공서비스 비용과 부담의 증가 및 안정적 서비스 제공의 불안화이지만 기업에게는 손쉬운 세금 따먹기이고 공무원들에게는 행정을 ‘봉사’기능에서 관리 감시 ‘갑질’ 기능으로 돌리는 신간 편한 제도다. 그래서 공공기능의 민간위탁은 가장 큰 인권적 패륜행정이다. 노동자들이 직접 고용을 요구하는 것은, 그 방법이 세금을 줄이고, 안전을 만들고, 책임을 키우고, 무엇보다 일하는 사람들의 인간 존엄의 높이를 올리기 때문이다.  


산재를 줄이는 정말 필요한 사회적 대책은 결국 민주주의다. 산재가 은폐되지 않고 산재가 예방되기 위해서 반드시 산재의 고통 당사자인 노동자들의 능동적 참여가 필요하다. “아무리 강력한 법과 정부의 관리 감독도 노동자의 일상적인 감시체제를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일터에는 노동자의 참여가 집단적으로 가능한 노동조합이 필수다. 노동조합이 없는 회사는 그 자체로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 노동권을 부정하는 것이자, 실은 자기들의 일터에서 사람에 대한 존중과 존엄을 부정하여 인간 이하 짐승의 일터를 강요하는 꼴이다. 영국 등에서는 고의적 산재로 사망이 발생하면 살인죄를 적용한다. 이른바 ‘기업살인법’이다. 최근에 한남상운에서 무리한 운행을 강요한 행정에 의해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행정살인법도 필요할 지경이다. 


금천구의 행정이 산재 다발의 공범이자 산재 사망의 사주자가 되지 않기 위해 행정상관행이나 기업탐욕이 아니라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들의 말을 수용하고 즉각 시정하는 행정을 펼쳐야 한다. 하룻밤에 10톤에서 15톤의 쓰레기 무게를 감당하는 노동자들의 피땀을 새롭게 더 위로하기는커녕 외면하는 행정이 지속된다면 무슨 수사로 금천을 치장해도 여전히 우리 노동자들에게는 헬 금천의 지속일 뿐이다.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책] 나 원래 공부 못해




 누구나 ‘난 이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돼.’라고 하는 것이 한 가지쯤은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악기를 다루는 일 혹은 뜨개질, 바느질 아니면 기계나 전기 다루는 일... 방금 배워도 금방 잊게 되는 그런 일, 분명 다른 사람들보다 노력은 더 하는데, 다른 사람들만큼 결과물이 좋지 못한 그런 일이 누구나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아이가 ‘나 원래 공부 못해’라는 말을 한다면 어떨까? 이 책을 보기 전에 난 분명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원래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돼!! 노력하면 되지 안 되긴 뭐가 안 돼!! 더 노력해봐!!” 그리고는 아이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학원을 돌리든 집에서 내가 끼고 공부를 시키든 아이가 공부를 잘 할 때까지, 설명한 부분을 이해할 때까지, 가르치고 또 가르쳤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나 원래 공부 못해’라는 말을 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이 책에는 시골 학교에 부임한 열정 넘치는 연희샘과 원래 공부 못하는 우찬이 그리고 또래보다 성숙하고 공부 잘하는 진경이가 나온다. 연희샘은 공부는 못하지만 마음씨 착하고 성격 좋은 우찬이를 좋아한다. 그래서 우찬이를 공부시키기 시작한다. 하지만 우찬이는 공부에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공부를 잘하게 되지 않는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연희샘은 실력이 늘지 않는 우찬이가 안타깝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진경이는 선생님이 답답하다. 선생님은 이런 저런 방법으로 우찬이를 공부 시켜보지만 우찬이는 ‘난 원래 공부 못해! 난 할 일이 있어!’라며 교실을 뛰쳐나간다. 사실 우찬이는 공부는 못하지만 농장일을 어른만큼 잘 하고 가축을 몹시 좋아하는 아이다.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던 선생님은 우찬이네 농장을 찾아가 보고 나서야 우찬이를 이해하려고 마음을 돌린다. 

 서울 아이들에 비해 여러 환경이 미치지 못하는 시골 아이들을 안타까워하며 열정 넘치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연희샘의 모습이 마치 부모들의 모습처럼 보여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공부 엄청 잘해서 엘리트는 아니어도 남 하는 만큼은 따라가 주길 바라는 부모들, 우찬이가 다른 아이들처럼 구구단은 외우고 알파벳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연희샘, 둘이 꼭 닮아 있다. 공부를 시키는 부모나 따라가는 아이들이나, 누구를 위한 공부인지도 모르고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둘 다 힘들다. 그런데 부모나 아이들은 왜 이렇게 공부에 매달려 있을까? 사실 우찬이처럼 국어 수학 영어가 아닌 농장일을 더 잘하는 아이들이 분명히 있다. 요리를 더 잘하고 청소를 더 잘하고 만들기, 정리, 놀기, 걷기, 뛰기... 공부가 아닌 다른 것을 잘하는 아이들이 분명히 있는데, 부모들은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한다. 아니 보아도 못 본 척 하는 건지도 모른다. 어른인 부모들의 잣대는 오직 공부라는 잣대 하나 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아이의 입에서 ‘난 원래 뱀은 못 키워.’라고 말하는 것은 인정 할 수 있어도 ‘난 원래 공부 못해’라는 말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원래 뱀을 못 키운다고 뱀하고 더 친해지려고 노력해 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왜 원래 공부 못하는 것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우찬이는 농장의 가축 기르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농장일을 할 때 행복하다. 우찬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공부를 해야 할 때는 행복하지 않다. 아무리 노력해도 뱀이 무서운데 뱀을 키워내라고 한다면 난 행복할까? 아무도 그렇지 않을 거다. 아이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공부를 포함한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을 매일 매일 더 노력해서 해내라고 한다면 아이들은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인 부모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알아야 한다. 공부를 포함해서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나 원래 못 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야 우리는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해야 우리 모두는 행복해질 수 있다. 아이들이 행복한 어른으로 자라길 바란다면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나 원래 공부 못해’라는 말을...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박세영


[16살시선] 윤창호 씨 사망사건에 대하여 




 실수란 게 참 무섭다. 실수로 인해서 성공과 부를 불러올 수도 있고 실수로 인해 인생이 쪽박날 수도 있는 것 이다. 하지만 실수 할 거 같아서 실수를 하면은 그건 실수가 아니다. 고의지. 사람이 누구나 실수를 예견할 수 있으면 인생의 질이 달라질 것 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실수를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겠지. 무조건 실수는 안한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면 안 되는 것이다. 

실수할 상황을 만들어놓고 자신만만하게 안한다고 지껄여놓고 해버리면 그것 또한 고의가 아닐까 싶다. 아마도 이번 사건도 이런 ‘고의’가 만들어 낸 것이다. 음주운전으로 인해 의식불명 상태 였던 윤창호 씨가 사망한 사건이다.

 사건의 전말은 9월 25일 부산 해운대에서 만취한 채 BMW를 몰던 박A의 차량으로 인해 윤창호씨는 의식불명에 빠졌다. 그리고 45일만에 사망을 하신 것 이다. 가해자는 무릎 골절로 인해 움직일 수 없다고 치료가 끝나는 시점에 최대한 빨리 체포 영장을 집행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발의된 ‘윤창호 법’은 조만간 본회의에 상정 될 거 같다.

내용을 일부분 보면 음주운전 가중처벌 기준을 3회 위반에서 2회 위반으로 바꾸고 음주운전 수치는 최저 0.05~최고 0.2%이상에서 최저 0.03~ 최고 0.13% 이상으로 강화하고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죽였을 때 1년 이상의 유기징역이지만 일반 살인죄처럼 사형이나 무기징역, 최소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바꾼다는 내용이다.

윤창호 씨는 22살이었다고 한다. 진짜 인생 시작 될 쯤에 돌아가셨다. 진짜 안타깝다.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고는 예전에도 많았다. 아니 많을 수 밖에 없다. 술에 취하면 걷기도 힘든데 운전은 더하겠지. 그래서 예전부터 음주운전 하지말라고 많이들 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이 “나는 안 그러겠지” “이정도면 괜찮지~” 하는 마음으로 음주운전을 하고 계시는 거 같다. 

그러고서 죽여놓고 “아 X바..” “아 실수였는데..” 이러지. 내가 아까 말했지만 자기가 그런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실수를 하는 것도 고의에 포함된다고 했다. 

이건 실수가 고의라고. 일반 살인죄로 처벌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가뜩이나 살인죄도 모자랄 판에 음주운전이라고 봐준다고? 난 음주운전이랑 살인죄랑 다른지 처음 알았다. 당연히 평등하게 처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심신미약이다, 음주운전이다 뭐 이딴 핑계로 감형이 되는 것은 진짜로 아니라고 생각이 든다. 이런 이유로 일반 살인죄와 다르게 처벌을 하는 국가도 똑같다. 공범이냐? 돈주고 죽이라고 시킨건가? 진짜 강화가 절실하다. 이러니까 음주운전이 줄어들지가 않지. 국가와 사람들은 음주운전한 사람들을 욕하고 깔보지만 정작 실질적으로 고쳐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사고만 안나면 된다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다. “사고만 안나면 괜찮다”.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 가지고 사고 내는 거라고. 음주운전 사고 일으킨 사람들은 사고 내고 싶어서 낸 건가, 다 낼 줄 모르고 낸 사고다. 실수라는 이름의 고의다. 이 사람들 욕을 한다면 자신도 그런 행동을 저지르지 말아야 욕할 자격이 있다. 그래놓고 똑같은 짓을 한다면 자신도 살인자가 된다. 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된다.


16살 김강현

마을 축제 그리고 약속



가을이 되니 마을마다 축제로 떠들썩하다. 마을마다 축제들이 열리고 있는 것은 주민 공동체들이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니 좋은 현상이다. 축제란 그것이 펼쳐지는 공간의 사람들이 함께 기릴 희망을 펼치는 시간인데 막상 그것이 끝난 뒤 그런 의미를 퇴색시킬만한 유감스러운 일이 있는 경우가 있다. 인간들의 삶이 그렇듯이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 항상 만족할 수는 없는가 보다.


행사의 유형에 따라 다르겠지만 행사 뒤끝에 행사주최자들이 서운함을 넘어 화가 날 정도의 경우가 있다. 행사의 진행에 차질이 있는 등 문제가 있어서도 그럴 수 있지만 그런 경우는 주최자의 책임이니 주체들이 서운은 하겠지만 화를 낼 사정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주최자의 책임이 아닌 외부 요인에 의해 마을 축제가 기대했던 효과가 감하는 것은 물론 축제가 의도했던 의미가 퇴색되는 경우도 있다. 축제를 통해 기대했던 효과 이를테면 관중과 함께 가꾸고자 했던 희망의 메시지가  축소되거나 모호해지기조차 하는 것이 그런 경우다. . 


마을에서 축제를 열게 되면 그 마을을 관장하는 행정책임자나 그런 위치 또는 영향력을 가진 직분에 게신 분들 즉 구·시의원, 구청장 국회의원 등 이른바 지역의 지도자들을 초청한다. 통상의 질서이기는 하지만 잔치에는 손님들이 와야 하고 이왕에 마련된 기회라면 공동체의 공통적 기대나 다짐과 같은 것들을 이런 분들과 함께 할 때 시너지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축제와 같은 행사에서 준비되는 이런 순서는 의례적이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목표 달성 추진 효과를 구하기 위해서도 그 효용성은 인정된다. 마을의 일은 민과 관이 함께 할 때 성과를 거두기가 용이하고 그런 기회를 만드는 것도 축제의 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이런 기회를 통해 그간의 성과를 살피는 한편 그것 또는 그것과 어울리는 마을의 희망을 만들기 위한 다음 순서를 마련기도 한다. 이러한 지향은 축제의 의의를 분명히 한다. 

물론 이런 축제라 해서 주민들이 선출한 행정 책임자 등을 꼭 초청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의미를 두는 것은 주민에 대한 예우 때문이다. 그들은 주민들에 의해 직분을 부여받았으니 주민잔치에는 당연히 그들이 나와야 하고 주최 측은 이러한 질서를 수행해야 알 책임을 가진다. 주민들이 선출한 지도자들인 만큼 주민이 주인인 마을 축제에 그들이 있어야 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예의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펑크를 내는 경우가 있다. 솔직히 그들이 없다하여 마을 축제가 축소되거나 의미를 잃는다 하기는 그렇지만 오기로 한 그들이 오지 않으면 김이 빠지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더욱이 이들의 참석을 미리 주민들에게 약속을 해 두었다면 더욱 그렇다. 주민들은 그런 질서를 당연하게 여기는 데 그들이 불참을 하면 주민들이 서운해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배신감조차 가진다. 심할 경우 그들에 대한 반감조차 가지게 되어 향후의 유사한 행사에 영향을 끼칠 수가 있다.


이런 분들은 대부분이 스케줄이 많으므로 시간을 두어 통지를 하고 다시 참석 확인을 한 후 행사 진행순서를 만들어 공식행사 순서로 준비를 하는 것이 상례다. 그런 경과를 가졌는데도 통고도 없이 참석하지 않는 것은 주최 측을 무시하는 것도 있지만 그 이전에 그 축제에 참여하는 주민들 곧 자신을 선출한 주민들을 무시하는 행위다. 이런 모습들은 물론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어떻든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사정이 있어서 그럴 수야 있겠지만 어떤 사정에도도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그들이 그곳에 있어야 하는 것은 주민이 지워준 지도자로의 최소한의 도리를 지켜야하기 때문이다. 약속을 지킬 수 없다면 사정을 알려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것이 그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평범한 사람도 비난을 받아야 하는데 하물며 지도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그런다면 여간 실망스럽지 않겠는가!. 


별것 아닌 일, 있을 수 있는 평범한 일을 두고 법석을 떤다고 핀잔을 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그런 질서로 세상을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고 따라서 논쟁을 사양한다. 약속이란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데 그것을 가볍게 보는 자와의 논쟁은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약속을 절대적이라 말하지 않는다. 더 급한 일 등 사정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사람들의 생활이다. 그렇듯 사람이 하는 것이라 불변의 원리에 묶지 않는다. 사람이 만든 것은 사람이 바꿀 수가 있는 것이 사람에 의해 경영되는 세상사이기 때문이다. 다만 약속의  존중이 아름다운 것은 불변의 원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마을 축제는 미래 약속의 장이고 그것은 즐거움에 더하여 희망을 전제로 할 때 의의를 가진다. 함께 하는 이들 모두가 중요한 구성원이어야 하는 이유도 그래서 제기된다. 따라서 시행 주체이던 초청인이던 단순 참여자이던 그 지위나 역할에 관계없이 참가한 모든 이는 그 장으로 만들어진 약속의 무거움을 동의해야 한다. 그런 한편 마을 축제는 그것을 동의하는 사람들에게는 즐거움의 시간이어야 하지만 보다 더 큰 의미를 두어야 하는 것은 소통의 시간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즐거움은 함께 공감할 때 의미를 갖게 되고, 그곳에 같이 하지 않는 이들과도 소통이 확대될 때 그 축제의 의미는 더욱 빛날 것이다.


소통이 부족한 축제에도 즐거움이 있겠지만 그것은 완전한 즐거움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즐거움이란 그것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고 이들 모두가 공감할 때 비로소 완전한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가 함께 하는 장에서의 약속의 무거움을 유념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서 필요하다.(♣2018.11.07) 





시흥3동에 거주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있다

[16살의 시선] 피시방 살인사건에 대하여


말 그대로 10월 14일 날 강서구의 한 피시방에서 30살 김성수라는 남자가 20살 알바와 피시방 청소상태 등 그런 이유로 싸우다가 김성수는 나갔고 상황이 진정되는가 싶었는데 집에서 칼을 가지고 와 그 알바를 무자비하게 찔러댔고 끔찍하게 살해당한 사건이다. 증거 중에는 김성수의 동생이 살해를 도왔다는 증거가 나오고 점점 확실시 되고 있는 추세다. 이거만 봐도 얼마나 심각한 사건인지 짐작이 가고 당연히 죄목도 무거워 질 거라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 흔한 핑계면서 다 통하는 핑계. 심.신.미.약. 김성수가 심신미약이라는 이유로 감경 될 수 있다는 거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사실을 접한 국민들은 당연히 분노했고 이런 사실로 청원글이 올라와 10월 17일에 시작해 11월 16일에 마감 예정은 글은 23일 오후 7시 20분에 동의가 100만을 넘어가고 있다. 하루만에 20만 이상이 동의를 했고 이 글은 난민법 폐지 글을 누르고 최다 동의 글이 되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꽃다운 청년을 무참하게 살해해놓고 정신이 이상하다고 감경을 한다는 건 진짜 어이없는 일인 것 이다. 싸우면 당연히 화가 나는 것 이다. 집에 가는 거도 이해가 된다. 근데 칼을 가지고 다시 오는 건 뭐지. 진짜로 또라이 아닌가. 그냥 말다툼 한 걸 그렇게나 마음에 품으시다니 대체 얼마나 마음이 약하신 겁니까. 그리고 그 분노를 이런 식으로 표출 하시다니 정말 심신미약 이신 거 같아요. 일상생활이 가능하신 지부터가 궁금하네요. 정신병원에 사시는 게 좋을 듯. 


 암튼 현대에 들어가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많아진 듯하다. 이른바 ‘분노 조절 장애’ 라는 것 일거다. 뭐 원인은 여러 가지 있겠지. 사회의 갑갑함, 돈의 권력, 사람과의 마찰, 폭력적인 게임, 뭐 여러 가지가 있다. 화내는 게 나쁜 건 아니다. 당연한 거다. 오히려 화가 안 나면 그 사람도 장애다. 하지만 그것을 참지 못하고 있는 대로 분출 해버리면 정말 답이 없다. 이성의 끈이 탁 끊어지면서 ‘악마’ 가 되어 버리는 것 이다. 


일곱 개의 대죄 중에서도 분노가 있고 악마 중에 최강이라 일컫는 사탄도 분노의 악마 이며 헐크가 되어서 건물을 박살 낼 수도 있고 초 사이언이 되어서 지구를 박살 낼 수도 있다. 분노라는 감정은 당연함과 동시에 악마로 변신 시켜주는 것 이다. 지금 이 사건을 보면서 “어휴 정신병자들.” 외치며 보는 당신도 그 정신병자가 될 수 있다는 소리다. 사실 이것도 귀에 잘 안 들어온다. 하지만 철창 가서 이 말을 보았을 때도 같을까.



  한줄 평: 분노는 악마의 상징이지만 인간의 기본 감정에 포함 되어 있는데 그러면 인간이 악마 아니야? 


16살 김강현

부동산, 아파트 - 우리 시대의 아편 




부동산-아파트에 대한 집착이 중독에 이른 사회다. 아파트 값 불패의 유지는 이제 정권의 사활이 걸린 문제에 이르렀다. 거기에 개혁과 적폐에 차이가 없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우선 주택(아파트)이 가지는 ‘한국적 의미’가 특별해서다. 산업화=도시화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아이들에 대한 교육열과 두 다리 쭉 뻗고 맘 편히 잘 수 있는 자기 집의 존재는 가장 위력적인 ‘복지’의 실현이자 사회적 안정이다. 그러나 내 집 마련은 쉽지 않다. 강남개발로 상징되는 부동산 불패신화는 관료와 결탁한 투기세력과 상류층의 몫이었다. 부동산 투기를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그 대열에 동참할 기회를 잡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등감으로 악착같이 저축을 했지만 그것은 또 부자들의 넉넉한 돈 놀음에 밑천 대주기였다.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저축자산은 실질소득 증대로 귀결되기가 어려웠고 그러다보니 인상만 하는 실물가치인 내 집(주택)을 마련하는 게 가장 현명한 경제적 선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 집 마련’을 위한 대중의 열망은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1987년 6월 민주화가 문을 열고 789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등장한 민주노조가 기반이 된 분배 투쟁이 그것이다. 바람직한 역사적 전개가 되었다면 정치적 민주화와 산업적 재분배의 힘이 새로운 사회체계와 질서를 만들어야 했지만, 형식적 민주주의 유지에 급급한 정치세력들에 의해 돈과 권력을 쥔 지배계급은 ‘중산층 만들기’ 신화로 사회변혁의 힘을 물 타기 했다. ‘자가용과 자기 집의 소유’ 요구가 그것이다. 노태우 정권이 내건 ‘200만호 건설’, 일산과 분당에 신도시 건설은 노동자 민중의 계급적 문제 해결 대신 ‘신도시는 새로운 중산층으로 민주와 복지를 누리는 신세대 라이프스타일’을 상징했다. (이만큼 산다는 것이 실은 박정희 덕이 아니라  박정희 전두환에 대한 시대적 정치적 사회 구조적 ‘부정과 극복’에서 시작된 것임을 잊지 말자.)  


이른바 386세대가 지탄의 대상이 된 2차 부동산 - 아파트 광풍이 불었다. 2000년대 중반 전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부동산 거품과 맞물리면서다. 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확산된 신자유주의적 부채-자산 경제가 대중들에게 ‘빚 권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당시 외환위기 극복 명분으로 시행된 경기부양 대책들은 가계를 내수부양의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국가복지가 전무했던 시절을 겪었던 대중들은 외환위기를 경험하면서 더욱더 사회안전망을 대체할 노후대책 수단으로서 주택소유에 집착했다. 이런 자산형성에 기댄 복지체계가 ‘빚 권하는 사회’와 만나면서 부동산 시장이 폭발한 것이다. 노무현 정부 주도로 2003년부터 건설된 신도시들은 이런 수요를 감당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택소유가 절대적인 재산 유지 증대 및 노후 대비 복지수단일 수밖에 없었던 경제적 현실과 부동산 불패가 만든 주택자산 대한 투기적 욕구의 결합으로 불치에 중독 병이 된 것이다. 중독 증세가 정도가 어느 정도인가의 사례가 아파트 값을 이유로 장애인 특수학교 건설을 막은 이들, 아파트 값을 올리고 지탱하기 위해 기꺼이 투기 범죄 작전세력이 되는 이들의 모습이다.  


서울 아파트의 중위가격이 7억 원이 넘었다. 중위가격이란 가장 비싼 1등부터 가장 싼 100등까지 줄 세웠을 때 50등의 가격을 말한다. 7억 원을 순전히 주택담보대출로 받았을 때, 원리금 균등상환방식으로 갚으면 한 달에 연리 3%로 매월 360만원을 30년 동안 갚아야 한다. 착실하게 월급쟁이로는 요즘은 천연기념물보다 희귀한 정년을 마쳐도 갚을 수 없는 액수다. 그러니 편법 불법이 동원된다. 무수한 재테크 방법이 동원되고 무수한 선진 금융기법이 활용된다. 그 결과 소수는 웃지만 현실은 주택 보급률이 100%를 넘어도 주택 보유는 50%도 안 되어 현실, 다수는 우는 헬 한국이 되었다. 수단이 좋고 운이 좋아 돈을 버는 이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 자본주의 경제란 누군가의 이득은 누군가의 손해다. 누군가의 행운은 심지에 불붙은 폭탄 돌리기 같아 누군가들에게 불운을 몰아주기 한 결과다.      


사람을 전면 상품화한다는 것은 노예가 된다는 것이니 불가하다. 그래서 사람이 일할 능력을 특정한 시간에 빌려 주는 것에 한에 상품화 한 것이 자본주의다. 땅도 사람과 함께 아주 특별한 조건에서만 상품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추가 공급이 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재부를 사적으로 독점하면 공평한 사회적 조건은 성립조차 할 수 없다. 누구는 소유했다는 것만으로 돈을 벌고 누구는 피땀을 넘겨준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런 특권과 반칙을 누리는 이윤이 지대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는 지대추구가 '사회 구성원 다수를 희생시켜 특정 세력에게 이익을 몰아주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부동산 투기는 지대논리의 극대화인데 아파트 값에 대한 지금 우리의 기본적 태도는 이른바 불로소득의 성역화일 뿐이다. 


토지공개념이 필요하다. 최소한 택지 국유화 방책이 서야 한다. 토지에서 발생하는 이익인 지대는 국가가 전액 조세로 환수하고, 토지공공임대제로 민간에게 임대하는 법 체제가 서야 한다. 주택은 살 것이 아니라 살 곳으로, 인간이 토지와 자연자원에 대한 평등한 권리로 사회적 이해가 확립되어야 한다. 투기 세력, 지대 세력, 금융자본 건설자본의 굿판인 지금의 토건구조를 혁파해야 한다. 모든 민중이 쾌적하고 안전한 주거생활을 확보한 이후에 사치적 소유가 누진적 세금 체제 위에 허용되어야 한다. 


사람이 중독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기의 인간적 존엄성을 되찾는 일이다. 자기의 생각과 생활을 소시민적 욕심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확장하여 가치와 의미가 있는 삶을 재구축하는 길이다. 아파트 값을 올리고 유지하는 것이 1가구 1주택을 넘는 다면 그것은 결국 집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이들을 더욱 가혹하게 쥐어짜는 것에 불과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이들의 피땀을 빠는 것이다. 부동산 아파트 그 중독에서 벗어나기 우리 스스로 특단의 자존심을 마련해야 한다. 물들의 부실은 점검되고 있는가?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16살의 시선 - 추석에 대하여




 추석. 추석. 벌써 추석까지 온건가. 빠르게 흘러간 거 같기도 하고 그럭저럭 적당히 흘러간 거 같기도 하다. 이제 올해도 3달 정도 밖에 남지 않은건가. 하아아. 

시간이 흘러가는 게 너무 싫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내가 점점 커간다는 거고 커간다는 거는 내가 어른이 된다는 거다. 우와, 진짜 싫다. 돈은 어떻게 벌어먹고 살아야 되지 하는 생각부터 온갖 불안한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물론 어른이 되면 좋은 점도 많아지겠지. 하지만 좋은 점만 있는 세상은 이 세상이 아니다. 아마 저 우주에 존재하지 않을까. 음, 진짜 우주에 존재한다면 부자들은 당장 로켓타고 갈 거 같은데, 그러지 않는 걸 보니 아마 우주에도 그런 세상은 존재하지 않나 보다. 

책임이란 게 어떻게 보면 편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거 같다. 책임지면 될 거 아니냐고 하고 싶은 거 하는 건 좋지만 하고 싶은 짓에만 책임이 따르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정말로 장점 단점이 극단적으로 존재 한다. 어째서 인생은 청소년에서 멈추지 않는 걸까. 

어째서 다시 한번 없을 꽃다운 청춘을 이리도 괴롭게 고민하여 보내야 되는가. 어째서 커가는 것을 점점 두려워해야 되는가. 나이 먹은 사람들이 부럽다. 올바른 일자리가 있으니까. 노인분들이 부럽다. 끝을 슬그머니 보고 있으니까. 오히려 끝이 더욱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섭다. 너무나도 두렵다. 끝이 편할 거 같다고 하면서 그 끝에 다다르는 길이 무섭다고 하다니, 정말 모순된다. 나는 대체 언제 고민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고민이란 것은 행복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괴롭기도 하다. 앞으로의 설레는 미래를 고민해 본다면 행복하겠지만 만나고 싶지 않은 미래를 고민하면 어우, 때려치고 싶다. 추석도 마찬가지라 보면 될 것 같다. 나 같이 추석을 쉬는 날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빨리 오라고 몸부림을 치는데 추석이라는 이름의 중노동과 약탈이 밀려오는 사람은 생각만 해도 몸부림을 칠 것 이다. 솔직히 나는 추석과 설날과 다른 명절들이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솔직히 이름만 다르고 다 똑같은 거 같다. ‘쉬는 날’. 그래서 아주 좋아 한다. 명절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다. 제일 좋거든.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아마 나 같은 학생들이나 몇몇 남자들일지도 모른다. 그 외의 사람들은 추석이라는 아주 좋은 쉬는 날에 되고 싶지 않은 요리사가 되어버리고 꿈도 꾸기 싫은 ATM이 되어 버린다. 추석하면 송편부터 떠오르는 음식이 되게 많다. 그 동시에 추석 때 벼락 부자가 되어버리는 애들이 많다.(정말 부럽다.) 하지만 그 뒤에는 울상이 되어있는 어른들의 모습이 보일 것 이다. 

 어째서 이 즐거운 명절에 일을 해야 하는 것 일까. 이 명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 하는 가. 뭐, 나는 안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용돈을 주시면 나는 정말로 세상에서 정말 행복하긴 하다. 하지만 이게 꼭 의무가 되어버릴 필요는 없는 것 이다. (없는 것 인가.... 없는 거냐고...) 

추석이란 본래 달빛이 가장 좋은 날이란 뜻으로 그냥 이거 기념해서 파티 여는 날이다. 그러면서 조상님한테 절도 하고 뭐 그런 날인 것이다. 파티는 원래 즐거워야 되는 것 인데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 까. 일단은 제사 때문인 것 같다. 솔직히 요리하는 거 우리 먹을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제사상에 올릴려고 하는 거 아닌가? 물론 끝나고 우리가 먹긴 하지만 그래도 맨 처음은 제사상에 올린다. 집안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데 밥과 김치 하나만 바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 되었는지 조상님에게 잘 보이려고 엄청 화려한 음식들을 한다. 평소엔 먹지 않는 음식들이다. 그래서 이렇게 할머니 집으로 가서 몇 시간 죽치고 프라이 팬 앞에서 기름 튀기면서 계란물에 담그면서 만드는 것 이다. 

하나만 만드는 게 아니다. 엄청 많이 만든다. 다 먹지도 못하면서 일단 많이 만든다. 왜일까? 도대체 이유가 뭘까.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사고는 매우 특별한 것 같다. 근데 이렇게 이유도 모르면서 만들고 싶지도 않고 그냥 추석이니까 억지로 만드는 음식을 조상님들은 맛있게 먹고 정말 즐거워 할까. 부모는 자식의 행복이 제일이고 자기 때문에 자식이 불행해지면 마음이 매우 아프다는데 조상님들은 안 아프십니까. 맛만 있으면 된다 이겁니까. 뭐 될 수도 있지. 용돈도 마찬가지이다. 선물 세트도 마찬가지지. 내가 행복하기 위한 날인데 왜 내가 돈을 내야 되냐 이 말이다. 물론 나는 돈을 안 내지만 나라면 되게 짜증날 거 같다. 명절이 돈 빠져나가는 날이 될 거 같다. 엄청 짜증날 거 같다. 와, 생각하면 할수록 진짜 짜증나는데? 쉬는 날에 뭐 잘못 했다고 애들 머릿 수 만큼 만원이 넘어가는 거금을 뿌려야 되는 거지? 근데 돈을 안 뿌리는 입장은 너무 행복해서 죽을 지경입니다. 감사합니다 어른분들. 


 한줄 평: 조상님들은 편하시겠어요.


16살 김강현



내 이름은..





3학년인데도 공부는 고사하고 공기놀이조차도 잘 못하고 자기 이름도 잘 못 쓰는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이름도 잘 못써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공기놀이 때도 따돌림을 당하자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공기돌을 만지작거리다 선생님께 들켜 벌을 서다가 결국엔 교실 밖으로 쫓겨나서 혼자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동화책 상상 속에 빠져 교문 밖으로 나오게 되고 공기돌을 놓으며 어느 골목길 허름한 문방구의 옥상에 올라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주인 할머니를 만나 할머니께 공기놀이 하는 법을 배우고 그 공기돌로 이름까지 쓰게 되는 내용입니다. 공기놀이 하나라도 잘 하고 싶어 하는 아이의 집념과 노력을 보고 열심히 하면 할 수 있게 된다는 걸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할머니께 자기의 이름을 공기돌로 써서 가르쳐준 순덕이 할머니도 글을 몰라 당신의 이름을 쓸 줄 몰랐지만 소녀와 이름이 같았기에 당신의 이름 글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름의 글자 이야기는 내 이름의 사연도 있습니다. 나에겐 이름이 세 개가 있습니다. 집안 돌림자를 넣어 지어진 이름 병례, 또 내가 태어난 후 편찮으시던 할머니께서 미음도 못 드셨었는데 미음을 드시고 기력을 회복하셨다고 지어진 이름 복희, 6.25 전쟁 때 면사무소가 폭격으로 불에 타는 바람에 경황이 없던 면서기 아저씨가 잘못 알아들어 지어진 이름 경애. 돌림자 이름은 한 번도 불려본 적이 없고 아버지 말씀으로만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입학 전까지 불렸던 이름은 지금도 친정 쪽 식구들에겐 복희라고 말해야 얼른 알아듣는 이름입니다. 

딸아이가 중학교 다니던 때의 어느 날

“엄마, 잘못 온 전화 같애. 안복희 찾아서 없다고 했는데도 자꾸 말해. 누군지 알아?”

“응, 엄마야.” 

“엄마 이름은 안경애 아니야?”

“엄마 어릴 때 이름이야.” 하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중학교 들어간 이후에 불리워져 지금까지 불리고 있는 경애는 한자풀이를 하면 아주 나쁜 이름이랍니다. 학교 다닐 땐 성을 붙이면 안경애 그러니까 ‘안경’이라고 놀려대서 정말 싫어했던 이름입니다. 

이젠 안경의 필요함과 고마움을 느끼고 내 스스로 별명을 ‘안경’이라 말할 수 있지만 학교 다닐 땐 정말 싫었던 이름입니다. 이름을 잘못 알아듣고 적은 면서기 아저씨 원망도 했었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지어진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이름은 안 경 애.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안경애

우리동네 대표시인 - 허은숙의 문학산책




라디오금천의 마음의 양식을 담당하는 프로그램 ‘허은숙의 문학산책’은 우리동네 대표시인이란 수식어가 아주 잘 어울리는 은숙씨의 자작시를 매회 낭독하고 있다.

누구나 소녀시절엔 꿈을 꾼다. 설령 그 꿈이 현실에서는 이루지 못할 불가능한 꿈일지라도 막연히 동경을 하게 되고 나름대로의 상상의 세계를 구축해간다. 미완의 꿈들은 수많은 책을 통해 완성된 후에 어느 정도 만족을 하면서 성숙한 것 같다는 은숙 씨 

은숙씨는 책을 읽으며 독후감쓰기나 편지쓰기를 좋아했고 결혼하고부터는 ‘시’에 접근하면서 가을이면 곳곳의  백일장대회, 전국주부 편지쓰기대회, 동서문학상 등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글 쓰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면서도 본인이 살아가는 유일한 버팀목이 되곤 한다. 

은숙씨는 우연히 라디오금천을 알게 되었고 문학을 주제로 프로그램을 진행해보고 싶은 마음에 그동안 틈틈이 써 온 자작시와 유명시인의 시 한편 그리고 문화와 관련된 소식을 겸해서 알려주고 있다. 문학산책의 차분한 방송을 귀담아 듣는다면 멘트 하나하나가 다 시어로 이루어져서 벌써 많은 고정팬이 생겼다. 


은숙씨는 오랫동안 지역신문기자로 활동을 해왔다. 마당발처럼 여기저기 나다니는 것보다 살금살금 행사장을 찾고 인물들을 찾아내며, 알음알음 아는 사람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주부로 살아오며 시를 쓰고, 지역신문기자로,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것을 눈여겨본 구의회 의원 한 분이 ‘윤명숙의 사랑채’에 소개를 해서 게스트로 출연하게 되었고, 녹음을 마치고 나서 윤명숙 대표에게 ‘라디오 진행을 한 번 해보고 싶다’고 이야기한 인연을 시작으로 방송을 시작했다.

방송을 할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날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떨렸던 기억을 전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져 한참동안 글 쓰는 것에 게을러지고 있었고, 감성도 많이 메마르고 책을 읽는 일도 거의 없었죠. 그런데 라디오프로그램 대본을 준비하려면 하루 종일 노트북을 펼쳐놓고 뭔가를 써야만 했습니다. 단순한 글자의 조합이 아니라 글에 색깔을 칠하고 나만의 감성을 입혀야 했죠. 그래야만 한 편의 대본이 완성이 될 수 있죠. 한 편 분량의 대본을 쓰기 위해 다시금 글 속으로 나를 강제하는 일, 다시금 나를 화들짝 일으켜세우는 고통스러운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무엇인가에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라며 라디오 프로그램을 하면서 변화된 점들을 얘기했다. 


그리고 언젠가 녹음을 다 마치고 나서 팟빵과 라디오금천 밴드에 녹음파일을 올리는데 전 회분 파일이 올라갔던 아찔한 에피스도도 있다. 당시 기술을 봐주고 있던 담당 피디가 부랴부랴 라디오 사무실로 다시 가서 상황을 수습했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일로 꼽았다.

지난 25화에서는 게스트로 세 사람을 초청해 기타연주를 들려줬는데 스튜디오가 좁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진행이 되어서 다행이라면서 라디오금천이 지금의 장소를 벗어나 제대로 시스템이 갖춰진 근사한 스튜디오에서 방송을 하고 싶다는 것과 “스스로에게 지치지 않고 오랫동안 방송을 진행해서 명품 DJ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라는 바람을  전했다.


열악한 스튜디오 환경과 주파수도 없고 다소 덜 알려진 팟캐스트 라디오를 하는 이유를 물어보니 “기술적인 부분은 물론 사람이 조종을 하지만 까딱 잘못하면 언제 어느 때 기계가 묘수를 부릴 수도 있는 일이죠. 잘못하면 다시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기술적인 부분보다는 스스로가 완성도 높은 대본과 함께 매끄러운 진행을 한다면 그것처럼 멋진 일이 어디있을까요, 멋짐 뿜뿜...그게 제가 라디오를 하는 이유입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거나 혹은 잃어버리고 무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산소 같은 프로그램“허은숙의 문학산책” 

단순히 전달 기능이 아니라 내면의 숨죽이고 있던 감성을 일깨워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까지 깨닫게 해주는 인문학의 산책, ‘허은숙의 문학산책’ 

삶이 지치고 힘들 때,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을 때, 찻잔을 마주할 때, 계절의 변화와 함께 나이듦의 시절들이 속절없이 느껴질 때 ‘허은숙의 문학산책’이 속삭이듯 많은 위로를 해줄 것이다.



김진숙 기자





* 라디오금천 프로그램을 듣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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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왔다




2018년 여름은 정말 더웠다. 계절이 여름이니 더운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당연하다는 말에 저항이 들 정도로 정말 무더운 시간들이었는데 이제 그 힘든 시간이 끝나고 있다. 참으로 계절의 순환은 신비롭기만 하다. 감동이 따로 없다. 

여름이 한창이던 여느 시간의 아침 가을을 느끼게 하는 싸한 바람을 맞으면 한편은 반가우면서도 다시 한 해가 저물고 그래서 모진 겨울이 온다는 사실에 공연히 우울해 지던 지난 시간의 기억들이 있었는데 이번 여름 뒤끝에는 그런 생각은 사치로조차 여겨진다. 그렇듯 이번 여름은 견디기 어려운 시간의 연속이었다. 

여름이 끝난다는 것은 가을이 옴을 말한다. 가을은 한 해의 결실을 보는 시간이라는 기대에다 계절 특유의 넉넉함과 여유로움으로 사람들에게 희망에 더하여 낭만도 갖게 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반갑고 또 희망을 두고 싶은 가을이 오고 있다. 

그런데 이번 가을은 여느 가을과는 다른 시간이 기대된다. 우선은 혹독했던 여름의 고통이 끝나는 데 대한 안도감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맞게 되는 필연적인 결과라 감동이라 할 것은 못 된다. 이 가을이 반갑고 또한 기대를 가지는 것은 평화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어느 때보다 높다는 점이다. 그 기대가 너무 커 온 몸을 전율케 하기 조차 한다. 한 민족이자 역사와 문화를 같이하는 한반도의 남과 북이 그간에 두었던 미움과 증오의 시간을 접고 화해와 소통의 시간을 만들고 있고 그것을 이제 평화라는 이름으로 갈무리를 하는 시간이 이 가을에 마련되고 있으니 어찌 감동이라 하지 않겠는가!

이해 벽두 남과 북의 정상이 얼어붙은 땅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파격적인 만남을 가졌고, 이어 열린 평창올림픽에서 남과 북은 한 개의 상징인 한반도기를 들고 보란 듯이 세계를 감동시켰다. 그리고 봄이 오던 시간 남과 북의 청춘들이 두렵기조차 했던 각각의 하늘아래서 노래와 춤으로 ‘우리는 하나’를 외치면서 한 핏줄임을 자랑스럽게 세상을 향해 소리높이 외쳤다.

그 시간이 감동이었던 것은 그렇게 서로가 어울렸던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시 만나자는 약속이 있었던 때문이다. ‘봄이 온다.’고 남쪽이 외쳤더니 그에 답하듯 북에서는 ‘가을이 왔다’고 외치고 싶다하였는데 그 바람이 이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3차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행 비행기에 올랐다. 언론에 의하면 판문점 선언에 대한 후속조처와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이 교착상태에 있는데 대한 대안마련이 목적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자든 후자든 평화가 주제이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구하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기대가 크다. 문대통령은 북에 가는 것을 ‘불가역적이고 항구적인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출발 전 국민들에게 말했던 것이 그것이다.

평화는 모든 인류들이 염원하고 있지만 그것을 구하는 것이 이슈가 되는 것을 보면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들이 세계 도처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평화를 모두가 바라는데 평화추구가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더욱이 한반도에서는 그것의 필요성은 남북의 모든 사람들이 절감하고 있는 최대의 과제이기도 하다. 

한반도에서 평화가 최대 이슈인 것은 달리 말해 전쟁 발발 우려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을 두고 북을 탓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 북한이 핵을 개발하고 있고 이제는 상당량을 보유한 채 남쪽은 물론 세계 최강 국가인 미국까지 위협을 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상황인 것이 그것이다. 다시 말하면 북은 핵폭탄을 만들어 두고는 남쪽을 비롯하여 그들을 적대하는 세력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살펴야 할 게 있다. 북한이 왜 이러한 상황을 전개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해가 그것이다. 그들이 힘이 있고 그것을 이용하여  패권세력이 되고자 이런 상황을 초래하였다는 데 동의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적대세력에 의해 고립되어 있고 언젠가는 체제가 붕괴된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되어 이에 대한 방책으로 핵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이는 필자만의 주장이 아닌 것은 저간의 한반도 사정을 아는 이들은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의 전개는 그들의 책임이라는 지적을 피할 수는 없다. 솔직히 말하면 스스로 자초한 면도 없지 않다. 그들이 세운 전통에 의해 수립된 체제를 옹호하기 위하여 비인도적인 인권문제를 야기했고 이러한 사정으로 민주국가가 주류인 서방진영과의 마찰로 긴장상태가 전개되면서 체제 위협을 받게 되는 경지로까지 발전되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그들의 체제를 무조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인류 보편의 가치를 기준삼아 문제로 볼 수는 있다 해도 그들의 선택인 만큼 전후 사정을 무시하고 외부에서 힘으로 강제해서는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지향은 그들을 달래고 설득하여 인류보편 가치를 존중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곧 평화의 지향이고 지금 남과 북은 그 도정을 함께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글이 읽혀 질 무렵 남과 북은 몇 차례의 정상회담을 했을 것이고 어떤 형태든 합의를 하였을 게다. 그것은 당리당략에 가치인 정치꾼이나 남북이 가까워지는 것이 싫은 세력들이 ‘그것 봐라!’며 신나하는 결정일 수도 있고, 그 정도는 아니지만 미국 등 보통사람들이 원하는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남북이 다 함께 ‘가을이 왔다’를 합창할 수 있는 수준이면 이번 두 정상의 만남은 성공이다. 우리는 그로 인해 울려질 평화의 메아리를 기대하여야 한다. 그것은 이미 울려진 평화의 서막을 확인하고 이제 본 막을 열게 하는 과정이다. 부족한 것은 시간을 두고 채워나가도록 양방이 노력하면 된다. 

평화, 그것은 갈망하는 대상들에게는 그 보다 더 큰 가치를 둘 만한 것이 없다. 진정한 평화는 누구도 배척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배척당하지 않는다. 모두를 자유롭게 하는가 하면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게 한다. 이 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진 것이 없는 것은 그것을 제대로 누리다가 잃었던 사람들은 다 안다. 평화가 전제된다면 그것을 추구하는 모든 행위는 존중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래서 설득력을 갖는다. 지금 한반도에는 그런 행위들이 일고 있고 남북의 정상이 그 주역을 담당하고 있다. 이들의 행보는 그러나 아직은 힘이 들어 보인다. 그들 탓이 아니다.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버거운 외압들이 있어서이다. 그것들은 외견 상 평화를 주조로 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신뢰 문제가 있다.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어려운 조건들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원하는 당사자들 밖에서 공연한 논리를 만드는 세력들이 있다면 평화는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평화의 추구에 필요한 논리들은 진실에 바탕 하여야 하는데 그것이 불완전할 수 있고, 그런 바탕에서 이룬 평화는 한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 봄 북에 간 남측의 일꾼들이 ‘봄이 온다.’고 시작을 마련하였더니 북측의 일꾼들은 남쪽에 가서 ‘가을이 왔다’를 같이 노래했으면 좋겠다고 했고, 이제 그것을 현실로 드러나게 할 시간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봄은 시작을 마련하는 시간이고 가을은 그 시작의 결실을 거두는 시간이다. 우리는 바란다. 판문점의 봄이 평양의 가을로 이어지고, 그래서 풍성한 결실이 있는 가을이 왔음을 남북이 함께 노래할 수 있기를.(♣2018.9,19)


시흥3동에 거주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있다


[기고] 국민들 믿고 좀 더 과감한 개혁 시행하라! 

무늬만 개혁인 세제개편안


우리 사회에 가장 중요한 과제가 무엇이냐고 묻는 다면, 그리고 그동안 우리사회가 가장 심하게 몸살을 앓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다면 아마 많은 수의 사람들이 부동산 문제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불평등의 가장 큰 원인도 주저 없이 그것이라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기회는 평등할 것이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라는 문구를 우리는 지난 대통령 선거기간에 많이 들어봤을 것입니다. 우리가 촛불을 든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앞으로 그 희망을 결코 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하위 20%의 소득은 8% 줄고 상위20%의 소득은 9.3% 늘어났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아마 최상위 몇%의 소득은 엄청나게 많이 늘어났을 것이다. 안 봐도 뻔한 것이 아닌가? 아마 통계상으로 세세히 구분하면 그 결과는 아마 더 충격적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될까? 임금소득 격차가 늘어나서 이러한 소득격차가 계속 늘어나게 되는 것인가, 실업이 일시적으로 증가하게 돼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인가? 나는 위의 통계를 세세히 분석해 보면 어느 정도 그 원인이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하게 되고, 잘 사는 사람들은 계속 더 잘살게 되는 구조가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과감히 고치려는 시도가 있어야 했는데 그동안 우리 사회는 이것을 적당히 개혁 흉내만 내고 넘어갔다. 이번에도 대통령 직속 정책기회위원회 산하 재정개혁특별위원회를 만들어 개혁을 시도했지만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해 왔고, 노동의 가치를 숭상하면서 땀의 정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최저임금, 최저시급제를 열띠게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정작 땀의 정의, 노동의 가치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부동산 불로소득에 대해서는 너무 관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히려 노동의 가치, 땀의 정의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사회의 불로소득에 대해 먼저 해결을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요. 그래야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 노동의 가치가 존중되는 사회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동산은 일반재화와는 달리 한번 소유를 하게 되면 대대손손 물려받게 되고 특히 토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치도 지속적으로 상승하게 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인구는 많고 땅 면적이 좁은 경우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또한 부동산은 지역개발을 통해 가격이 상승하면 그 상승의 효과는 오로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소유자에게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 여유만 있으면 개인이든 기업이든 부동산을 소유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 불로소득과 다름 아니다. 그런데 자본에 대해 우리는 왜 이렇게 관대하게 대하는 가? 땀 흘려 열심히 일하는 사회와 배치되지 않은가?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하는 수 없다고만 이야기 할 것인가.


아직까지 우리나라 국민 절반이상은 자기 소유의 주택을 소유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토지의 불평등 문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소수가 부동산을, 특히 토지를 독점하고 그 혜택은 오로지 부동산 소유자에게 돌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매년 부동산 불로소득이 대략 300조 이상 된다고 합니다. 그러한 막대한 소득이 부동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몫이고 땅 한 평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은 그 돈은 그림의 떡인 것입니다. 가격이 상승할 때마다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계속 손해를 보고 불평등은 더욱더 심회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번 세제개편안에서는 보유세 등 근본적인 개혁은 손도 못 대고 종합부동산세 일부 세율인상, 공정시장가액비율 매년 5%씩 해서 90%까지만 인상,  3주택자 이상 다주택자에 대해서 추가과세 등 무늬만 개혁인 세제개편안을 내 놓았습니다. 


우리나라의 부동산 보유에 대한 세부담은 국제적으로도 낮은 수준입니다. 부동산 자산총액 대비 보유세 비중(보유세 실효세율)은 OECD의 평균(0.33%)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0.18%이며 GDP대비 보유세 비중도 OECD 평균(1.1%)에 미치지 못하는 0.8%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 부동산 부자들은 보유세에 대해 극도의 저항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부동산 가격이 많이 올랐습니다. 그러니 그 정도 세금이야 충분히 내고도 남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한 해 몇 억씩 가격이 오르는데, 즉 부동산을 가지고 있으면 손해 볼 일 이 없는데 누가 부동산을 팔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어지간한 정책을 내 놓아도 눈 하나 꿈적하지 않습니다. 


조금 씁쓸한 이야기하나 더 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현재 최저임금, 최저시급이 얼마니 최저시급이 만원이 되면 자영업자가 다 망하니 경제가 엉망이 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앞에서 통계에서도 나왔듯이 하위계층 소득이 점점 줄어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전체노동자 중 절반이 월 200만원도 못받고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정말 생계까지 걱정해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뼈빠지게 일해도 한달에 월급 200만원 – 300만원 정도 밖에 못 받는 사람들이 대다수 인데 동네 어지간한 큰 건물 하나 가지고 있으면 비용을 다 제하더라도 그것도 매달 임대료 수입으로 수백, 수천만원이 나오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우려스러운 것은 이게 적은 숫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물주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달리 나온 것은 아닙니다. 우리 젊은이들의 희망이 건물주라고 한 것도 일응 이해는 갑니다. 많은 건물들이 자기노력을 통한 것보다 물려받은 것이 더 많다는 게 더 씁쓸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부동산 불패신화가 깨지지 않은 이상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부동산을 소유만 하기만 하면 장기적으로 손해는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누가 부동산을 소유하지 않으려고 할까요? 모두 다 여기에 뛰어든다면 우리의 미래는 불 보듯 뻔한 것이 아닌가? 


우리 사회는 그동안 수많은 부동산 정책을 펴왔습니다. 대다수가 단기대책으로 시장에 충격을 주는 수법을 통해 땜질식으로 처방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만 우리 사회의 부동산 정책을 이끌어 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동산 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유세 강화이다. 즉 부동산에 대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유세에 대해 일관성을 가지고 정책을 시행할 때 부동산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부동산을 어떠한 시각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 그 정책도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부동산을 일반재화와 같이 일반물건으로 보아 시장기능에 맡기게 되면 다 해결될 것이라 믿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부동산은 일반 재화와 달리 공적기능이 강한 특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토지는 우리 공동체가 같이 사용해야 할 특수한 재화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토지 공개념 강화가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현 상황을 그대로 인정하고 사회를 바꿀 방법은 없습니다. 개혁을 통해 이룬 결과가 나중에 또 이전과 같은 결과로 불평등이 더 심화되었다는 이야기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이 정도 세제개편안 개혁으로는 앞에서와 같은 결과를 얻을 게 너무나 자명합니다. 무엇을 위한 개혁이고 개편인지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 정부는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고 탄생한 정부이기도 합니다. 국민들의 기대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촛불의 민심으로 돌아가 과감한 개혁을 통해 좀 더 공정한 사회, 다 함께 같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주길 진심으로 기대해 봅니다. 



정의당 금천구위원회

 위원장 공병권

[기고] 코르셋에서 벗어나자




코르셋(corset)은 미적 목적 또는 의학적 목적으로 몸통을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입는 것이다. 19세기에 여성의 몸매 보정 속옷이라는 의미로 코르셋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요즘 SNS에서 자주 보이는 탈코르셋 운동은, 여성들에게만 강요되는 메이크업, 옷차림 등에서 벗어나자는 운동이다. 여성들은 코르셋처럼 신체뿐만 아니라 정식적으로 자신들을 억압하는 꾸밈노동을 거부하고 있다. 집 밖에 나가기 위한 메이크업,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관리해야 하는 몸매, 김치녀 또는 촌스럽게 안 보이려는 옷차림... 이 모든 것은 사회가 '여자는 항상 아름답고 예뻐야 한다'는 이유로 여성들에게 꾸밈을 강요하는 코르셋이다.


 사람들이 갑자기 탈코르셋을 하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 운동이 시작되면서, 또는 그 이전부터 여성들 사이에서 "모든 여성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꾸밀 수 있어야 한다."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 중 여성이라면 누구든지 경험했을 일들이 이유다. 친구들, 직장, 심지어 가족들이나 처음보는 사람들까지 외모에 대해 품평을 한다. 특히 타인에게 관심이 지나치게 많은 대한민국 사회는 누군가가 짧은 치마만 입어도 "머리 비어 보인다.", "어울리지도 않는데 왜 입냐."라는 식으로 쑥덕거린다. 사회의 외모 품평질 때문에 많은 여성들에게 꾸미는 것은 큰 스트레스이다. 살이 조금만 쪄도 "너는 게으르다", "살찐 모습이 부끄럽다" 라고 하는 가족들의 말이 상처가 되고, "여자답지 못하다", "여성스러움이 없다" "바지가 뭐냐, 치마를 입어라"라는 타인의 말에 짜증이 솟구친다. 자신의 신체 중 일부가 콤플렉스여서 또는 사고로 다쳐서 성형수술을 하면, "수술하니까 더 예쁘다.", "역시 돈이 있어야 한다." 등 수술에 보태준 것도 없으면서 멋대로 평가를 한다. 


 탈코르셋을 하는 사람들은 "꾸밈노동은 나에게 스트레스다.", "여성은 화장과 여성스러운 옷차림이 기본이라고 강요하는 사회의 여성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탈코르셋은 여성의 권리를 되찾아오는 운동이다." 라고 말한다. 립 제품이나 마스카라 같은 화장품으로 '탈코르셋'이라고 적은 종이를 찍고, 숏컷이나 삭발을 한 자신의 모습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것으로 '탈코르셋 인증'을 한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20대만이 아닌 10대도 탈코르셋 운동을 하는 것을 보면, 사회의 외모억압은 어린 청소년들에게도 해당된다는 뜻이다.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학생이면 학생답게 외모에 신경쓰지 말라고 지적을 했으면서, 대학생이 되면 어른이니 화장을 안 하는건 죄악이라고 강요를 하는 한국사회의 이중잣대가 끔찍할 정도로 노골적이다.


 하지만 탈코르셋 운동이 오히려 역코르셋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탈코르셋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며 탈코르셋을 해야 한다고 강력히 권유하는 사람들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결국 탈코르셋 운동도 사회와 남자의 시선을 의식하는 행동이다.", "코르셋의 억압되어 있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탈코를 하라는 건 강요에 불과하다.", "억압이 아닌 나의 만족감을 위해서인데, 강요하지 말라." 라고 목소리를 냈다. 게다가 인터넷 매체들은 탈코르셋을 한 사람들과 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탈코르셋을 둘러싼 여여 갈등'이라면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다)식의 분쟁을 일으키려고 한다.


 아직 탈코르셋을 하지 않은 또는 원래부터 노메이크업과 숏컷을 추구하던 여성들은 어떻게 해야하는걸까? 나의 옷장에는 허리선이 들어가 있지 않고 소매가 짧지 않은 남성용 티셔츠가 많다. 다리털, 팔털을 제모한 적이 없으며, 외출시에는 멋지고 예쁜 옷을 입되 내가 입고 싶은 옷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나도 탈코르셋을 해야하는 걸까? 끝이 갈라지지 않게 에센스만 바르는 머리칼을 자르고, 잘 쓰지도 않는 파운데이션과 피부 건강을 위해 매일 쓰는 썬크림을 버려야 하는 걸까?

 탈코르셋이 무조건 옳다, 옳지 않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모든 여성들은 이미 수 세기 동안 수 많은 코르셋에 억압되어 왔다. 억압에서 벗어나 선택권을 되찾으려는 탈코르셋 운동이 또다른 억압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지수 기자

gcinnews@gmail.com

신뢰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이 있었고 전국동시 지방선거가 끝났다. 두 국내외 사건 모두 한국인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들이었다. 결과는 사람들에 따라 의견이 각색이겠지만 필자의 시각에서는 발전적이고 그래서 생산적이라 평가를 한다. 가장 우선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의 위협을 막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두 사건의 외형이 각각 다르게 보이지만 그것이 그리고 있는 그림은 평화라는 하나의 상징으로 집약이 된다.

먼저 북미정상회담을 보자. 모두가 알고 있듯이 남북 정상회담의 연장이고 회담의 목적은 평화 지향이다. 북한이 벼랑 끝으로 모두를 몰아가다가 생각을 바꾸어 새로운 국면을 만들면서 남북이 만났고 그 연장선상에서 미국과 만난 것으로 그 명분은 평화였다. 결과적으로 일촉즉발이던 한반도는 전쟁 분위기에서 평화 모드로 바뀌어 가고 있다. 

그리고 전국동시 지방선거에서 여당의 승리는 현재에 일고 있는 평화의 기운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국민들의 염원의 표출이다. 다시 말하면 누구를 지지하고 아니하고의 차원이 아닌 모처럼 도래한 평화의 기회를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강력한 시위다. 즉 눈에 보이는 평화의 기운이 철학은 없는 채 당리당략으로만 보려는 정치세력들로 변질되지 않도록 잘라버린 것이다.

그렇듯 평화는 이제 멀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평화가 빨리 오도록 챙겨야 한다. 이 땅에 살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도 이 대열에 동참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남과 북 그리고 국가와 국민 간의 신뢰의 확보다. 국가의 평화보다는 자기세력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치세력들과 이들과 부화뇌동하는 사이비학자들의 엉터리 논리들로 어렵게 마련된 평화 모드가 작동을 멈추게 되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인간 간에 다툼이 있게 되는 것은 서로의 이해가 충돌할 때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의 기초는 대개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 데서 비롯한다. 믿지 못하면 오해가 생기게 되고 그것이 발전하여 싸움이 되며 집단적이 될 때 전쟁이 되는 것이다. 물론 전쟁은 이러한 이유 밖에서도 발생하고 있지만 그것의 단초를 살펴보면 서로에 대한 불신이 이유인 경우가 많다.

지금 남과 북은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평화무드가 가뭄에 내리는 단비처럼 한반도를 적시고 있다. 통일을 이야기 하기는 아직은 이르지만 그간에 있었던 적대적 상대들이 서로에게 가지는 적개심(敵愾心)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지친을 만나는 것과 같은 상황들이 보이기조차 한다. 얼마나 보기 좋은가! 

남과 북의 정상이 손을 맞잡고는 분단의 상징 벽을 이쪽으로 넘어오고 또 저쪽으로 넘어가면서 서로가 한 민족임을 보여 주던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래서 이제 서로를 믿기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것을 행동하는 일을 하도록 하자. 남과 북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양 정상은 평화를 약속하는 문서를 작성하고 보란 듯이 두 손을 맞잡은 것도 몰라 뜨거운 포옹을 하였던 것을 가슴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것은 서로를 신뢰하고 싶다는 아름다운 염원이다. 

신뢰(信賴)의 사전적 의미는 ‘믿고 의지함’이다. 신뢰는 규범이 가지는 강력한 규제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두 당사자 간에 신뢰관계가 형성되면 서로 상대의 기대를 벗어나는 행위를 억제한다. 또한 서로 신뢰하는 당사자들은 그것으로 상대의 행위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 독일의 사회학자 N. 루만(Niklas Luhmann)은 신뢰는 상대의 행위를 예측할 수 있게 할뿐만 아니라 예기(豫期)할 수 있게 한다고 하였다. 즉 신뢰하는 당사자는 서로를 알고 함께 해야 할 일과 그것의 때도 알 수 있게 한다. 

내가 누구를 신뢰한다는 것은 그가 나의 존재를 인정해준다는 것을 나 자신이 확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인용하면 남과 북이 서로 신뢰를 하는 것은 서로의 현상을 인정하는 것으로 평화가 있게 된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유의할 것은 남과 북은 각각의 가치질서를 서로 존중하여 자기를 기준하여 상대를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 물론 이러한 질서는 궁극적으로 보편타당성의 확보가 전제여야 한다. 즉 서로 신뢰의 목적이 평화라면 그것의 본질에 맞갖은 질서 형성을 함께 추구해야 한다.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한반도의 북쪽에 정부(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가 수립되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적대적 상대로 대립하던 북한이 그들과 국가 간 협의를 위한 정상회담이 열린 것이다. 그들이 만난 목적은 평화인 것은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두 사람은 서로를 신뢰한다고 하였고 그것으로 이곳에서의 만남은 일단 종료되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잘 된 회담이라고 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당초 기대했던 것에 못 미치는 결과라며 실망했다는 평을 하였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강경일변도이던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만족한다고 하였고,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도 같은 취지로 기자들에게 소감을 밝힌 만큼 전자의 평이 옳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적대적 상대로 회담 수일 전까지 서로를 혐오하는 발언을 무차별적으로 하던 두 정상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악수를 하고 보도진들 앞에서 서로를 신뢰한다고 하였는데 바깥의 평가들은 그 성과를 절하하는가 하면 어떤 평은 아예 실패한 회담이라고 하는 이유는 왜 일까? 언론 보도에 의하면, 당초 미국과 그를 동조하는 세력들 그리고 남쪽 일각에서 요구했던 CVID, [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 이른바 ‘완전하고 검증할 수 있고 되돌릴 수 없는’이란 조건이 공동발표문에서 빠졌기 때문이란다. 즉 북한의 핵 시스템을 일거에 완벽하게 제거할 것을 북한이 약속하는 것이 미국 측의 목표였는데 그것에 대한 표현이 불완전하고 그래서 이 회담은 기대 밖을 넘어 실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그토록 강경하던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만족한다 하면서 언론 등의 의구심 표명에 성공적 회담이라며 적극적인 자세로 대응을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분명한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그의 대답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을 신뢰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는 점이다.

정상회담의 목적은 대개 서로에게 민감한 현안을 최고 결정권자가 협의하여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결과를 얻고자 함이다. 그런 회담에서 양 정상이 만족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문서로 작성하여 대외적으로 공포하였다. 다시 말하면 양 정상은 회담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여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에서 합의를 하였다. 따라서 회담의 성공여부는 전적으로 당사자들의 판단이다. 그런 결과를 두고 제 삼자들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양 정상의 이 회담 목적이 평화 지향이고 서로가 만족할만한 결과를 거두었다고 발표를 하였다. 일각에서는 부속합의서가 있을 수 있다는 추정을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궁금하겠지만 공개하라고 채근 할 일이 아니다. 회담 당사자인 양 정상이 서로 신뢰한다는 말을 했으니 그들의 말을 존중하고 그에 따른 후속 진전을 지켜보는 것이 예의다.

서로 신뢰하는 것은 아름다운 구속이다. 두 관계는 오랫동안 서로를 혐오를 넘어 타도의 대상으로 두고 지내왔던 사이다. 그런 두 당사자가 지난 날 그들이 취했던 과격한 행동이 민망할 정도로 서로를 추켜세우기까지 하고 있다. 그들의 신뢰를 믿어보자.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가 있는 한반도에 평화를 오게 한다 하지 않는가!(♣2018.06.20.)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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