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커뮤니티센터에서 논다


소소한 탐구; 페이스페인팅




 어른들보다 아이들의 얼굴에 페이스페인팅용 물감이 잘 먹힌다. 아이들의 얼굴에 보송보송한 솜털이 나 있어서 그런가보다, 한다. 얼굴에 그리는 게 보통인데, 아이들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편이 더 좋은지, 열에 일곱은 손등에 해달라며 손을 내민다. 손등에 판박이 스티커나 어디선가 받아온 도장이 찍혀있으면 팔에다가 해달라고 소매를 걷어붙인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붓이 간지럽다며 몸을 배배 꼬기도 하고, 물감이 차갑다며 웃기도 한다.

 아이들의 주문을 받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것을 그려놓은 종이에서 고르게 한다. 피카츄, 고양이 수염, 아기공룡, 토끼와 고양이, 하트 여왕, 꽃은 종이에 그리고,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한참을 고민한다. 친구랑 같을 걸 하고 싶어 하는 아이도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색으로 해달라고 하는 아이도 있다.

 가장 인기 있는 건 피카츄다. 순위를 매기자면, 아마 다 공동 1위일지도 모른다. 페이스페인팅을 하러오는 아이들 중에 딱 하나만 하고 가는 아이들이 적기 때문이다. 왼쪽 손에는 피카츄, 오른쪽 손에는 꽃, 얼굴에는 고양이 수염을 그려달라는 주문이 들어오면, 거절할 수도 없다. 한꺼번에 해달라고 하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에, 하나를 하고 갔다가 또 해도 되냐고 찾아오는 아이들이 있다. 때로는 물놀이를 하다가, 실수로 만져서 지워졌다며 다시 해달라고 찾아온다. 얼굴에 물감이 번져있는걸 보면 웃기기도 하고, 자국을 없애려고 물로 씻고 왔다고 종알종알 말하면 그게 또 귀엽다.

 가끔 한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아기를 데리고 찾아오는 부모님들이 있다. 아기들은 뭔지 몰라서 하기는 싫은데, 엄마가 하고 있으니 궁금해서 막 덤벼든다. 아기들이 페이스페인팅을 받을 때면 부모님들은 옆에서 “아구, 예쁘다~!“를 쉴 새 없이 말하신다. 아기들은 막 움직여서 그리기 어려운데, 다 끝나면 부모님들이 더 좋아하셔서 흐뭇해진다.

 아이들에게 페이스페인팅을 다 해주고 나면 부모님이나 할머니, 할아버지들 모두 사진을 찍는다. 기분이 좋아진 아이들은 한껏 멋진 포즈를 취하는데, 페이스페인팅을 받은 부분이 반드시 보이게 한다. 이것도 흐뭇하지만, 가장 기분 좋고 뿌듯한 건 “고맙습니다.”하는 인사인 것 같다. 페이스페인팅이 끝나면 아이들도 부모님도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해주시는데, 인사를 받을 때마다 뿌듯해진다. 2년 전부터 금천 어린이 큰잔치 때마다 하던 페이스페인팅이었는데, 어느새 커뮤니티 센터의 화들장에서도 하게 되었다. 농부 직거래장터인 화들장에 놀러오는 아이들이 항상 페이스페인팅을 받으러 오니까, 화들장에서 만나면 항상 반갑다. 페이스페인팅을 하러 줄을 서 있는 아이들 반 이상이 장터에서 파는 옥수수나 과일주스를 들고 있다. 선생님도 먹으라며 내게 옥수수 반 토막을 주기도 하고, 부모님이 사준 주스를 나눠주기도 하는데, 고맙고 참 대견하다.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봉사활동도 할 수 있는 화들장에서 앞으로도 계속 일하고 싶다.


얼티(EarlT) 한지수

[책]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설흔 작가의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는 조선의 문장가 이옥과 김려의 우정과 삶에 대한 탐구이야기이다. 필자는 어떤 위협 속에서도 자신의 문체를 포기하지 않은 이옥보다 바람 앞에 등불처럼 흔들리는 마치 변절자라 할 김려에게 더욱 마음이 끌렸다. “왜 변절자의 삶을 산 김려에게 더 애착을 보일까?” 란 물음에서 답을 찾기 위해 다시 책장을 넘겨보았다. 

정조시절 성균관 유생이었던 김려와 이옥의 두 문장가는 서로를 존중하며 깊이 있는 글쓰기를 하였다. 특히 이옥의 글은 가히 천재라 할 만큼 멋진 문장과 문체였고 김려는 그런 이옥의 글을 닮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들이 썼던 글은 패관소품체로 나라에서 금지 하게 됐고, 문체반정으로 이옥이 정조로부터 형벌을 받자, 김려는 형벌을 피하기 위해 소품체를 버리고 정조가 원하는 고문을 따르게 된다. “이옥에게는 미안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되려 문체를 바꾸지 않고 고집한 이옥이 바보같다. 글이 대체 뭐라고.” 문체를 바꾸지 않는 이옥을 비난하며 김려 본인은 안전하다고 생각했지만, 임금은 김려를 이옥과 한패로 보고 북쪽 땅 부령으로 유배를 보낸다. “이 모든 게 다 이옥 때문이다! 이옥만 아니었으면 내가 유배를 당할리가 없다.”

이옥과 임금을 원망하며 유배길에 올랐지만, 김려를 진정 고통으로 내몰은 건 자신을 인간취급하지 않는 양반들과 아전들이었다. 그들의 추악한 행태는 이루말 할 수 없을 만큼 잔혹했다. 추위와 배고픔, 멸시와 환대를 받으며 지내는 유배 생활은 김려의 마음을 갈갈이 찢어놨다. 그런 그에게 따뜻한 손을 내민 건 온갖 핍박을 견디며 뼈만 추스린채 살아나가는 가련한 백성들이었다. 권세가들의 탐욕스런 욕망에 살점이 뜯기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백성들에겐 세상은 한(限)으로 들끓는 세상이며, 죽음이 항시 옆에서 도사리고 있는 삶이었다. 성군이라 할 임금의 치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임금의 눈치만 보며 울고웃고 한 자신이 어리석음을 죄인이 되어 백성들의 옆에 서보니 깨닫게 되었다. “아, 나는 도성안의 개구리였구나!”

김려는 그들의 고통스런 생활을 글(이야기)로 표현해 주었다. 백성들에게 글이란 별천지와 같은 것인가. 그들은 자신들의 글(이야기)을 듣고 울고 웃고 하며 위로를 받았다. 글이 대체 무엇이길래 ‘글’로 인해 형벌을 받고 또 ‘글’이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인가... 김려는 백성들을 보며 가슴을 죄는 무언가를 느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왕이 되었고, 최고권세를 누리고 있는 김조순(김려의 친구)의 배려로 김려는 논산의 현감이 되었다. 유배생활의 끔찍했던 과거는 깨끗이 잊어버린 듯 평안한 삶을 살며 벗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게 이옥의 아들이 찾아와 이옥의 ‘글’을 넘겨준다. 정조 형벌 앞에서도 문체를 바꾸지 않았던 이옥의 글이다. 김려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이옥의 글을 읽는다. 이옥의 글은 집요하게 묻는다.

“나는 여기 있다. 너는 어디에 서 있느냐?” 

유배시절, 백성들과 서로 힘이 되어주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젠 내 한 몸의 평안을 위해 그 백성들을 등지려 한 것이다. 이옥을 등지고 이번엔 백성들마저 등지려하는 자신의 나약함에 김려는 한없이 어깨가 웅크려졌다. 속수무책으로 자신의 비겁함이, 졸렬함이, 거침없이 까발려짐을 느낀다. 그들을 등진채 언제까지 희희낙락 거릴 수 있을까, 이젠 뒤돌아서서 자신의 과거를 마주보아야한다. 고통스럽더라도 끌어안아야 한다. 김려의 글은 백성들과 함께였을 때, 가치(價値)의 꽃을 피웠다. 

“마음이 담겨있는 글이 진정 나의 글이 아니던가.” 그래서 김려는...

귀밑머리 희끗한 나이에 여행길에 오른다. 이 여행길은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는 일이자, 본연의 ‘나’가 되기 위해 떠나는 길이다. 도망치고 싶었던 과거, 영원히 잊고 싶었던 과거와 마주하기 위해 ‘김려’는 떠난다.

필자가 고심 끝에 마주한 답은, 누구나.. 나 역시 ‘변절자’ 김려처럼 감추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 것이 있고 그곳으로부터 등돌린 과거가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것이었다. 김려를 마주하며 우리 모두는 비겁하고 비참한, 부정하고 싶은 어리숙한 시간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늙은 나이에 변절자라는 껍질을 벗고 김려는 상처깊은 과거와 대면을 했고,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찾아나간 사람이다. 그 어리숙함을 인정하고 끌어안고 가야만 한다는 걸, 김려를 마주한 책상 속에서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마흔쯤에 또 다시 깨닫는 부끄러움을 덤덤히 받아들이며, 나와 같은 부끄러움을 마주할 이들과 함께 그 ’길’을 걸어 가보고 싶다. 

지난(至難)한 시대를 살았던 이옥과 김려가 우리들에게 말한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 이렇게 멋진 것이 없었다면 이렇게 와 보지도 않았을 게야.”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박연진

꿀잠의 꽃잠




잠은 휴식이다. 잠의 휴식은 피로에 대한 자연적 욕구다. 잠은 그 사람의 상태를 직접 표현한다. 단잠, 그러니깐 달게 곤하게 잤다는 것은 기분 좋은 피곤과 적정한 시간, 편안한 공간과 상태를 함께 말해 준다. 깊게 들지 못하는 잠, 즉 ‘겉잠, 개잠’에  중간에 깜짝깜짝 깨는 괭이잠이라도 자면 자도 잔 것 같지 않는 상태가 된다. 겁에 질려 깊고 길게 잘 수 없는 노루와 같다 하여 노루잠이라고도 한다. 잠이 편하지 않으면 밤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다음 날이 더 괴롭다. 피곤과 짜증은 쉽게 우울과 분노로 변한다. 반복되는 잠 못 이룸은 사람이 당하는 최고 강도의 ‘고문’에 다름 아니다. 자기를 자기가 조절할 수 없는 착란의 시간이 일상이 된다. 


우리는 단잠이 사라진 시간을 살고 있다. 기업형 인간이 되기 위해 인간적인 삶을  희생시킨다. 이른바 스펙 쌓기가 대표적이다. 예전에는 ‘어학연수 자격증 취득, 사업적 기능의 습득’ 등 업무에 대한 구체적 기능의 습득도 기업이 제공하는 의무였다. 우리는 성실하고 또 천재는 아니어도 아둔하지 않으면 됐다. 그런데 지금은 회사의 의무가 개인의 몫으로 됐다. 회사의 비용과 책임과 부담이 개인에게 전가된 것이다. 예를 들면 인터넷뱅킹이니 카카오은행이니 참 편리하다 하는데 실은 은행이 감당해야 할 사무기능의 몫을 소비자인 우리가 대신해 주고 있을 뿐이다. 일해주고 돈까지 내는 바보 같은 짓이 편하다고 말이다. 이전에는 한 사람의 일자리였을 그 일을 뺏는 것인데도 말이다. 결국 웃고 있는 것은 자본이다. 편하다고 웃지만 피땀을 빨리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다. 그러고 보니 편리함은 24시간 내내 기업을 위한 노동시간이자 노동 대기 시간을 만드는 만능 주문이다. 아니면 실직. ‘과로사로 죽을래, 굶어 죽을래.’라는 질문 앞에 죽음만을 답으로 말해야 한다. 질문 자체를 부정하는 전복의 꿈을 잃은 세상, 적응과 순응 아니면 고립 배제뿐인 세상에서 사자 앞에 노루가 된 우리 노동자 민중이 노루잠 아니면 무슨 잠을 잘 수 있을까?      


일하는 사람들에게 단잠을 뺏어간 계기는 IMF환란과 정리해고 비정규직이다. 그것은 ‘안정적 일자리, 좋은 일자리’를 용인할 수 없다는 돈의 독재의 선포였다. 총칼이 강제한 강제적 복종이 은밀하고 내밀화된 돈 중독의 자발적 복종으로의 전화였다. 돈 독재의 특징은 민중들에게 ‘꿈도 꾸지 마라’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절은 지났다.” “부의 세습” “금 수저 흙 수저” “3포, 7포, N포 세대” “헬조선”이라는 유행어들은 꿈의 종언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것은 더 나은 세상, 질 좋은 삶을 꿈꾸지 말라는 돈과 권력의 치명적인 협박의 결론이자, 존엄을 꿈꾸는 개인들의 생, 인간 본연의 공동체적 사랑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한시적이고 특별한 형태라 안정과 복지는 없지만 일급은 아주 높았던 것이 임시직 일자리였다. 그래서 장기적인 인간적 삶의 고려 없이 초단기적 초과 착취를 해대는 형태가 바로 임시직 일자리였고 그 대표적인 형태가 이른바 ‘노가다’다. ‘모든 노동자의 노가다화’는 정리해고 비정규직 경제 논리의 핵심인데 문제는 더 높은 일당을 반값 일당으로 강제한 것이다. 그 결과, 특권과 반칙이 일상다반사가 되고 빈곤과 차별이 당연한 세상이 되었다. 


보이는 대로 남이 원하는 대로 살면 노예다. 숨겨진 것, 감추는 것을 보며 불의에 맞서는 것이 인간의 영역이다. 현실과 다른 다음을 꿈꾼다는 의미에서 ‘저항’은 다양하다. 또 다른 지배자를 만드는 과정, 나만을 위한 과정, 모두가 함께 잘사는 방향에서 역사적 사회적 구조에 맞서는 과정 등등. 따라서 저항도 그 지향에 따라 결과가 천지차이다. 노동자 민중의 가장 큰 존재적 특징은 ‘개인의 저항도 전체의 좋음’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 민중은 저항을 통해 특권을 강화하지 못한다. 최근 노동자 민중의 투쟁에 독을 뿌리는 가진 자들의 보검이 ‘특권 귀족 강성 노조론’이다. 비판의 초점인 기아차나 현대차 노조의 경우도 그것은 강성이 문제가 아니라 노조가 투쟁과 연대 대신 실리와 고립을 선택한 결과다. 그러니 특권 귀족 강성 노조가 있다면 그것은 돈과 권력에 본성을 잃고 매수된 노조의 어용화의 결과다. 노동자 민중의 투쟁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강성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저항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불의에 대한 저항을 통해 함께 사는 평화로운 공동체를 꿈꾸는 것이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다. 투쟁의 과정에서 분열과 배신과 패배는 돈의 회유와 생계의 협박이 만든 결과다. 특권을 대표한다는 민주노총 위원장은 정의와 연대를 외치면 구속을 당한다. 현장에서 민주노조는 아직도 해고를 당할 각오다. 구속과 해고를 끼니 때우듯 당하는 귀족이라니, 터무니없다. 예수님 석가님 수준의 인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지경으로 노조를 만들어 놓고, 인간 존엄의 최저 기준인 노동법이라도 지키는 힘을 유지하면 귀족이니 특권이니 난리는 치니 기가 막히다. 그러니 아직도 투쟁에 나선 노동자 민중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군이요 군사독재시대의 민주투사다. 그래서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들은 한뎃잠을 잔다. 덕석잠이고 칼잠이다. 선잠의 시간을 견디고 견디는 삶이다. 


발칫잠이나 말뚝잠을 자며 개인의 정규직화가 아니라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꿈꾸던 이들이 있다. 그들이 비록 365일이 아니라 364일 한뎃잠 발칫잠을 자다가 하루 이틀이라도 편하게 ‘귀잠 속잠’ 발편잠을 자자는 제안을 해서 만들어진 공간이 꿀잠이다. 장기 투쟁하는 비정규직 정규직 노동자들, 우리 사회를 연대라는 사람으로 만드는 무수한 마음 선한 사람들, 평생을 불의에 저항하여 삶 자체가 모든 이의 의지처인 백기완 선생과 문정현 신부님, 자발과 헌신과 봉사가 만든 ‘내일을 함께 꿈꾸자는 손내밂이다. 그 꿀잠이 오랜 준비 끝에 8월 19일에 정식으로 문을 연다. 꿀잠의 자자는 ’하룻밤의 단잠‘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깊게 새겨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역사가 있다. 높아지고 강해지는 것만 추구하다 남의 삶만 파괴하는 세상에서 꿀잠의 꽃잠(신랑 신부가 첫날밤에 자는 잠. 첫잠)은 손길은 자체로 아름답다. 꿈은 우리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는 다는 것을 확인하는 희망의 한 모습이다. 함께 나비잠이든 갈개 잠이든 함께 자고 ‘돈이 아니라 사람이 행복한 세상’의 꿈을 꾸자.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소장

소피아의 탄자니아 통신-24

탄자니아의 농업박람회 '나네나네'




오늘은 음베야의 한국인 소풍날이다. 나네나네라 불리는 농업박람회가 열리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행사기간 팔 일 중 다 같이 함께 할 수 있는 하루를 잡았는데 그게 오늘이다. 

한국인이라고 해봐야 선교사 가족 네명과 학교에서 근무하는 사람 넷, 달랑 여덟명이었는데 최근에 선교사님을 도우러 온 미래씨가 합류해 아홉명이 되었다. 선교사님 가정이 구심점이 되어 가끔 만나 서로의 안부도 묻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하는데, 큰 행사가 있는 날은 예외없이 우리의 축제일이 된다. 


느즈막히 점심을 먹은 후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곧 차가 서며 미래씨가 손짓을 한다. 김 선교사님은 니엘과 나엘이 갑자기 열이 나서 동행을 하지 못하고 강목사님과 미래씨만 오게 되었다고 한다. 얼마 후 신자씨가 합류하고, 마지막으로 창우씨와 학섭 선생님이 합류한다.

나네나네 버스 정류장을 지나자 곧 행사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자, 길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부스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잡기 위해 분주하다. 

이 행사는 이곳에서 일년 중 가장 큰 행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국민의 80퍼센트가 넘는 인구가 농업에 종사하는 곳이니 너무나 당연하다. 4개월 전부터 농작물을 재배하고 준비를 시작해 행사 기간에 선을 보인다. 마치 우리나라의 꽃 박람회 같다고나 할까? 


농업 박람회라고 하기에 무색할 정도로 다양한 제품들의 부스가 운영되고 있었는데, 초입에는 가전용품들이 자릴 잡고 있다. 우리에게는 오래전부터 사용되던 제품이지만 이곳에서는 첨단 용품이 되어 진열되어 있고, 옆에서는 제품 시연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신기한 듯 구경만 할 뿐 구매로 이어지지는 못하는 듯하다. 

나의 관심을 끈 것은 화덕이다. 어느 건축가의 아프리카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제법 유명세를 타던 그가 어느날 아프리카로 왔고, 열악한 부엌 환경 때문에 병에 많이 걸린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위생적이며 간편한 화덕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그 당시만해도 돌 세개를 삼발이처럼 놓고 그 안에 숯불을 피워 조리를 했기에 실내 공기를 더럽히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후 한국으로 돌아갔다 다시 방문한 그는 화덕을 잘 사용하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마을을 돌아보았는데 정작 화덕은 장식품이 되어 있었고 예전의 생활 방식으로 돌아가 있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많은 노력 덕분인지 지금은 화덕을 모두 사용하고 있을 뿐더러 진보를 거듭해 다양한 모양과 방식으로 변해 애용되고 있는 것이다.


 소와 돼지, 닭, 토끼 등도 있었는데, 나의 호기심을 끈 것은 동물의 분비물에서 발생하는 메탄가스를 이용해 등을 밝히는 시스템이었다. 나처럼 문외한도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게 그림을 겹드린 설명을 읽으며 신기해 하고 있었더니 학섭 선생님은 우리나라에서도 간혹 사용되고 있다고 하신다. 

약재도 있었는데, 건강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 중 하루 한 두개의 열매만 먹으면 당뇨에 효과가 있다는 식물이 특히 인기가 있어 한국의 가족들을 위해 샀다. 

견과류 코너와 유제품 부스도 우리에겐 좋은 쇼핑 장소였다.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마카다미아와 치즈 등을 살 수 있었으니 말이다. 


뭐니 뭐니 해도 박람회의 꽃은 오래전부터 공을 들인 농작물들. 나름의 방식으로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 시선을 끌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먹음직한 딸기를 보며 하나 따먹으면 안 되겠느냐고 너스레를 떨었더니 진심으로 하는 소리로 듣고 순진한 아가씨는 난처한 표정을 짖는다. 농담이라고 하자 다행이라는 듯 얼굴이 환해진다. 

파, 마늘, 양파, 상치, 무우, 당근, 양배추 등을 비롯해 다양한 야채가 재배되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눈길을 잡는 것은 쌀포대에 흙을 담고 중간중간에 구멍을 뚫고 다양한 종류의 채소 모종을 심어 실내 농장용으로 꾸며 놓은 것이다.


전시장을 돌아보느라 피곤해진 우리는 향토 음식이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음식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이곳의 국민음식이랄 수 있는 칩시 마야이(튀긴 감자에 계란물을 부어 빈대떡처럼 부친 음식)와 꼬치구이, 음료수와 맥주가 전부였다. 농업 박람회답게 각 지방의 특산물로 만들어진 향토 음식이나 음료수, 손으로 빚은 전통술 같은 것이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바나나나 사탕수수 등으로 빚은 술이 있다고 들었던 까닭이다.

조금 실망스럽긴 했지만, 잠시 쉬어갈 겸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단체관람을 온 듯한 중고등학생들이 떼로 몰려와 우리를 에워싼다. 한국 배우 이름을 대기도 하고 한국어 몇 마디를 건네기도 한다. 그들 사이에 이민호가 인기가 있는지 너무 멋지지 않냐고 묻는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자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거나, 언젠가는 꼭 한국에 가보고 싶다는 등 다양한 반응을 보며 이곳의 한류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우리나라 상사가 직접 진출해 있지는 않지만 삼성이나 엘지 등의 가전제품이나 스마트 폰은 수입상을 통해 많이 들어와 있고 한국 제품은 이곳에서 높은 가격으로 팔리지만 굉장히 인기가 있다. 비싼만큼 제값을 한다고 믿을 뿐 아니라, 한국의 제품을 쓰고 있는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마저 느낀다. 아직은 몇가지의 제품에 한정되어 있지만, 값싸고 질좋은 화장품이나 생활용품들도 많이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생각하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  



8월14일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개헌을 논하다




내년(2018년) 6월 지방선거가 치러진다. 광역 및 기조단체장의 선출과 광역 및 기초의회 의원(단순 및 비례 대표), 교육감 선거가 치러지고 이 때 개헌 투표도 함께 진행될 예정이라 한다. 물론 개헌은 정치권의 합의가 있어야 하지만 합의가 될 경우 국민들은 한꺼번에 8장의 투표용지를 받게 된다. 이렇게 동시 투표를 하는 것은 유익한 면이 있다. 비용 절감도 그렇고 생업에 바쁜 국민들의 사정도 살피는 것이 되는가 하면 정치적 파장을 최소화함으로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도 줄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 이러한 일괄 동시 투표는 유익한 만큼의 문제점도 있다. 우선 한꺼번에 여러 대상의 투표로 국민들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있을지 의문이다. 그리고 단체장이나 의원 선택에서 집중도가 떨어질 수 있고 결과적으로 부실 선출이 우려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30년 만에 하는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가 그것이다. 만약 예정대로 개헌용 국민투표가 동시에 시행된다면 이야 말로 우려의 극치다! 


지방선거야 정해진 일정이니 문제제기 여지가 없지만 개헌은 그 필요성의 인정에도 지방선거와 함께 그것도 7종의 다른 선택과 함께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하면 개헌은 정치인의 선출과는 다른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데 이를 경시한 시행으로 보는 것이다. 국가존립의 근거인 헌법을 개정하는 만큼 신중한 판단이 요구되고, 그 선택 주체가 정치 비전문가인 국민인데 대한 고려가 없기 때문이다.. 

 

투표율도 걱정이다. 그간 국민들은 정치권에 대한 불신으로 선거참여에 소극적이어서 1987년 개헌 이후 지금에 이르는 선거에서 투표율이 50%를 상회하는 경우는 많지 않는데 특히 지방선거가 그랬다. 투표율은 일반 선거에서도 중요하지만 개헌의 경우 더욱 중요하다. 만약 개헌을 위한 국민 투표율이 50% 이하가 된다면 그 결정은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헌법은 국민적 총의에 의해 마련될 때 비로소 권위가 확보된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에 더하여 다른 걱정도 있다. 정치권의 그 동안의 행태를 볼 때 정파 간의 이해를 절충한 나눠 먹기식 개헌 개연성을 배제하기 어려운 것이 그것이다. 국민들의 이해는 아랑곳없이 정파 간 타협안이 마련되고 그것을 저조한 투표율(50%에 미달한)에 의해 결정이 된다면 비록 절차상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헌법의 지위와 기능을 감안할 때 정통성 문제가 제기된다. 정통성이 결여된 법령과 제도는 국민 불복종과 같은 저항을 만날 수 있고 또한 정치권의 정쟁 유발 요인이 되어 국가혼란을 야기하였던 것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사실, 개정 도마에 올라 있는 현행 헌법은 지난 개헌 당시(1987년) 정치권의 타협에 의한 졸속 결정이었다. 비정상인 유신헌법의 개정 당위는 공감을 이뤘지만 완고한 기득권의 벽을 넘지 못해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하는 것으로 여타의 불완전 요소를 수용하는 것으로 타협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민주사회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 이를테면 제왕적 대통령제를 포함한 비민주성을 가진 규정들을 갖게 된 것이다. 

개헌을 하지말자는 것도 미루자는 것도 아니다. 가급적 내년 중에 하되 다만 헌법 개정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지방선거와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지방선거는 대체로 투표율이 낮았던 것이 그간의 사례다. 국민들이 이해할 시간도 만들고 더불어 투표율도 고려하여야 한다. 

정치권이 준비하고 있는 개헌 흐름을 보자. 이번 개헌에서는 통치행태, 권력배분, 자치 분권을 다루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를 포함하여 국민주권 관련  규정 등 개정하고자 하는 내용을  자세히 살펴 그 당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래서 정치권이 준비한 개헌안을 꼼꼼히 살펴 과거와 같은 졸속결정이 되지 않게 국민들이 필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기성 정치인들은 대통령제를 선호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권력구조를 논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이 지향하는 가치를 두고 시비할 것은 없지만 변화를 기피하는 것으로 보여 신뢰가 주어지지 않는가 하면 현실에 안주하려는 소극적 자세로 보여 거부감조차 든다. 대통령제를 고집한다 하여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다. 변화가 두려운 그들이 펼칠 구태의연한 정치행태가 재연될까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대통령제의 폐해는 건국이후 현재에 이르는 동안의 우리 정치사의 부끄러웠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정치인인 뿐 아니라 기득권 세력들도 대통령제 선호가 대세다. 문제가 되고 있는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개선을 전제로 보완책을 강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대통령제가 부인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간의 우리 헌정사를 볼 때 대통령제로 인한 부작용이 많았고 인권유린과 같은 반민주적 행태조차 잦았다. 그렇듯 우리의 대통령제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고 그 실질적 사례가 최근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사건이고 그로서 개헌필요성은 더욱 고조되었다. 그런데도 정치인과 기득권자들은 대통령제를 고수하려한다 이유가 무얼까?

가장 쉬운 추론은 대통령제 정치관행에 젖어있기 때문으로 본다. 즉 이 체제가 현재의 권력자들이 유리하다고 보는 것이다. 정치권력을 가진 자는 그 지위 유지와 영향력 행사에 유리한 제도를 고수하려 하고 그것이 대통령제를 지키려 하는 이유이다. 다시 말하지만, 기득권자들은 변화가 두려운 게고 그래서 변수가 많은 다양성의 정치판을 기피하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인 대부분의 국가는 권력 분산과 책임제적 임기를 가진 의원내각제 등 비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공통점은 대부분 정치·경제 선진국이다. 이러한 국가들의 국민성향을 보면, 단원제 보다는 양원제, 단순 대표제보다는 비례대표제, 양당제보다는 다당제, 단독정부 보다는 연립정부를 선호한다. 획일성보다는 다양성을 즉 변화가 풍부한 정치체제를 선호한다. 대개의 유럽의 선진국들은 이런 정치구조를 가지고 있다. 서방 선진국 중 미국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지방분권이 잘 되어 있어 우리 대통령제와 같은 범주에서 보아서는 안 된다. 


주지하다시피 국민투표는 OX 게임이다. 즉 정치세력 등이 준비한 안을 놓고는 국민들에게 찬성과 반대 표현만 요구하는 형식이다. 문제는 이러한 구도는 반대보다는 찬성이 많은 것이 과거의 사례고 국민들은 이런 구도의 시나리오에 익숙해 있는데 당국자는 이번 개헌도 그런 흐름을 기대하는 것 같다. 경솔한 유추일 수 있으나 개연성이 풍부하다!


물론 국민투표는 OX 밖의 방법은 어렵다. 다만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개헌안은 정치인들과 국민들이 함께 하는 방법으로 준비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국회나 전문가들 등 특정 계층만의 장이 아닌 국민 대 토론장을 열고 공론화를 통해 ‘개헌시안’을 마련하고, 그것을 객관적 신뢰성을 가진 시스템에서 ‘개헌안’으로 확정하여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것이다. 그래서 정부구조나 권력배분과 같은 정치 사안에서부터 보건, 후생, 복지 교육 등 국민들의 관심사들이 아우르는 안을 만들어야 한다. 중요한 게 또 있다. 개헌투표는 독립적으로 즉 지방선거와 분리하여 시행해야 한다.


내년 개헌 국민투표에서는 우리 선거 체제를 과거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행동 하자. 개헌안은 국민들이 공감하는 내용이 되어야 하고 국민투표로서 손색없는 투표율이 확보되는 방법으로 해야 하는 것이 그것이다. 맺음을 하자. 우리 선거체제는 혁신적으로 바꾸어져야 한다. 선거를 포함한 정치 패러다임의 대전환도 이루어져야 한다!(♣2017.08.15)


장제모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금천학부모모임에서 진행하였던 ‘사춘기 중딩과 학부모가 함께 하는 민주시민교육’이 지난 두달간 진행되었습니다. 교육이 끝난 후 학부모와 자녀가 보내온 후기글입니다.







학부모 김태희, 아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며


사춘기 중딩과 엄마가 함께하는 민주화 교육을 알고 난 후 처음에는 고민을 했었다.

아이가 중학교 입학 후 처음으로 기말고사란 것을 보는데 공부를 시켜야 하나, 아님 민주화 교육을 받으러 갈까?  남편에게 물어 보았더니 살아가는데 기말고사보다는 민주화교육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듣고 신청을 하였다.  임승수님의 자본론 교육을 받으며, 내가 학교에서 졸았나, 왜 새롭지? 하는 생각을 했다.

사회생활하면서는 귀를 막고 살았다는 것을 새삼 느끼면서, 정말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문재훈 남부노동상담소 소장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몇 년 전까지 나 스스로 사무직노동자로 살면서 노동자는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고, 사무직은 노동자가 아니라는 착각 속에 사측의 입장에 세뇌되어 ‘나는 그들과 다르다’라고 생각하며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살아 왔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5.18 광주항쟁지로 역탐을 갈 때는 날도 더운데 한편 가기 싫었다. 하지만 지금 아니면 평생 못 가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이들에게 많이 졸라서 따라갔다.  내가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던, 민주화를 위해서 노력했던 많은 사람들을 보며, 그들 때문에 우리가 지금 조금더 민주화 된 나라에서 살 수 있는데, 그런 사실을 외면하고 살았다는 것에 반성하게되었다. 초등학생 5학생 고은이가 자신의 엄마한테 “전두환이 살아있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라고 질문을 할 때 어른으로서 조금은 창피하였다.  

마지막 날 하자센터의 이충한님 강의는 진로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아이들도 진로가 중요하지만 엄마인 어른들도 진로에 대해 생각해보고 아이들만 바라보지 않고 엄마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다보면 자식들은 부모를 보고 배워갈 것이다.  이충한님이 사춘기자녀와의 민주화교육이라는 제목과 좀 상충된다는 말씀,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교육을 참여한 것은 아니었으니, 민주화교육에 동원된 아이들은 엄마의 강압에 끌려왔다는 말씀.

그래도 우리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공부만 하란 부모보다는 이런 경험을 같이하고, 대화를 나눈 부모를 더 좋아하리라 나는 믿는다.  그리고 이런 교육을 개설해 주신 금천학부모모임의 많은 분들을 보며 우리주변에 이렇게 공공의 이익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모도 어떻게 살아야할지 방향을 설정해주는 어떻게 보면 사춘기 자녀보다 40이 넘은 나에게 더 좋은 교육이었다.



동일중학교 1학년 양지은, 518광주민주화운동 역사탐방을 다녀와서



5.18광주민주화운동 역사탐방을 원래 나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가 나를 끌고 갔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지은이도 이곳에 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역사탐방을 조금이나마 재미있게 보낼 수 있었다. 처음 금천구청에서 버스에 탔을 때에는 지은이가 없었다. 그래서 엄마와 동생을 둘이 앉게 하고 나는 혼자 앉아서 지은이를 기다렸다. 지은이가 오고 지은이와 내가 같이 앉아서 서로 자기할일을 하며 즐겁게 광주로 출발했다. 가는 도중 휴게소에 들렀다. 우리는 휴게소에서 화장실에 갔다가 같이 간식도 먹었다. 그리고 다시 출발을 했다. 나는 계속 노래만 듣는 것도 심심해서 지은이와 장난을 치며 놀았다. 그리고는 차를 타고 계속해서 가다가 점심을 먹었다. 이 짐들을 가지고 아직도 숙소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좋지 않았지만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밥을 먹었다. 별로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그래도 고기는 맛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5.18기념관에 가서 추모를 하고 무덤에 가서 사람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실내로 들어가서 5.18관련 영상을 보고 박물관 비슷한 곳에 가서 5.18때 어떤 것들로 생활했는지 어떤 것들로 정부와 싸웠는지를 보았다. 그리고 시간은 계속 흘러서 산인가 언덕? 그런 곳을 올라가는 곳이 있었는데 나랑 엄마는 힘들어서 그냥 차 안에서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왔는데 결국 막혀있어서 못갔다고 했다. 그리고 시간이 또 흘러서 숙소에 왔다. 숙소에서는 삼겹살을 먹고 옥수수도 먹었다. 그리고 노래방기계로 노래도 부르다가 귀찮아져서 그냥 지은이랑 계속 학교에서 있었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뭐 그런 이야기들을 했다. 그리고 계속 이야기 하는데 어떤 언니도 있어서 언니도 같이 이야기 하고 계속 그랬다. 근데 지은이랑 언니 둘이 하는 이야기는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세계의 이야기여서.. 만화에 대한 이야기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재미는 있었다. 그리고 막 지은이랑 화장실도 같이 들어가서 같이 옷 갈아입고 누워서도 계속 이야기 하구 그래서 혼났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는 밥을 먹고 수영장에 갔다. 그리고 차를 타고 가다가 휴게소에 가서 점심을 먹고 다시 버스에 타서 금천구청에 도착해서 헤어졌다. 뭐 그래도 친구랑 놀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기고]자치분권을 이야기 해보자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협치(協治), 자치(自治), 분권(分權) 등 민주주의를 표현하는 용어들이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그것의 사실화를 증명하듯 중앙정부를 비롯한 지방정부 등 통치기관의 관련 행정행위들이 바쁘게 전개되고 있다. 바람직한 모습들이고 기대되는 바도 크다.

사실, 자치와 분권은 이 땅에 민주공화국 즉 대한민국 정부수립 때부터 제도로 도입되어 국가 통치차원의 삼권분립을 비롯한 행정행위에서 사실적 또는 형식적 시행이 있었고 그래서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국민들에게는 그것의 사실적 이행 여부에 관계없이 알 수 있는 용어인가 하면 그에 대한 보편적 이해도 가지고 있다고 본다.



1987년, 유신에 이은 군부독재에 의한 비정상 헌법이 개정되고 대통령 직선제로 바뀌면서 자치와 분권은 헌법에 근거가 마련되었지만 법률 등 후속 장치들이 준비되지 않아 실제적 시행은 없었다. 그러다가 개헌 7년 이후인 1994년 통합선거법인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1994. 3) 시행에 따른 지방의회 구성과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실시(1995.6.27)로 실질적인 지방차치(민선1기)가 시행되었고 이를 계기로 자치와 분권은 다시 국민들의 관심사가 되기 시작했다,

제도에 의한 자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지방자치는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고 그 행태도 실질적인 모습을 갖추어 갔으며 오늘에 이르러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분권은 자치의 진전과는 달리 과거의 형태인 중앙집권적 체제가 견고히 유지되고 있는가 하면 다분히 권위적인 정권행태를 견지하는 것으로 이 제도의 취지에 역행하고 있다.

현행 제도에 의한 지방자치단체는 헌법 규정(117조 1항)에 따라 주민의 복리에 관한 ‘사무처리권’, ‘자치입법권’, ‘재산관리권’을 가지게 되어있다. 그러나 지방자치정부는 이러한 권한의 합리저 행사를 못하고 있고 특히 재정 자립도 낮은 기초자치 정부는 자율적 예산운영조차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으로 기초자치정부는 물론 광역자치정부 조차도 중앙정부에 의존하는 재정구조를 가지므로 자치정부로서의 면모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지방정부 단체장의 독주나 역량부족으로 인한 자치의 왜곡현상과 전시행정 등 예산낭비현상조차 빈발하는데 따른 통제 필요성으로 중앙정부의 간섭을 자초하고 있기조차 하다.

그렇듯 현재의 지방자치제도는 자치에 따른 행정행태는 그런대로 갖추고 있으나 통치기관으로서 갖추어야 할 권한은 억제되어 있어 사실상 제대로 된 자치는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자치의 모양은 갖추고 있으나 그에 부응하는 권한은 가지지 못하고 있는데 이유는 헌법이 규정하는 지방분권이 하위 법령에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방분권]이란 중앙집권에 대응하는 용어로 일정의 지역주민과 그 정부(광역 및 기초)의 대표자가 결정권을 확충하는 것, 즉 지역의 정치행정에 자기 결정과 자기책임의 원칙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부가 갖는 기능 중 중앙보다 지방측이 상대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지방자치의 질이 높은 상태를 가리킨다.(검색에 의한 외부자료) 

최근 문재인 정부의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공개한 ‘100대 국정과제’ 가운데 ‘획기적인 자치분권 추진과 주민 참여의 실질 화’를 제시하고 있다. (74번 항목). 지방자치를 확실하게 하겠다는 의지로 본다. 여기서 말하는 ‘자치분권’이란 아마 ‘지방분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곧 ‘통치 권력이 중앙정부에 집중되지 아니하고 지방자치단체에 분산되는 것’으로 본다.

김부겸 행정자치부 장관도 후보자 신분으로 국회 인사청문회 때 ‘지방분권 강화’를 말했고, 장관 인준 후인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에 대한 업무보고에서도 ‘지방분권’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어진 정책기획관의 상세보고에서는 ‘자치분권’을 언급했다. 이후 공개된 ‘100대 국정과제’에서는 공식 용어가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으로 바뀐다. 김 장관은 25일 새 정부의 조직개편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이라는 용어를 썼다. 행자부는 부서 내 기존의 ‘자치제도국’을 ‘자치분권국’으로 고쳤다. 이는 당국이 ‘지방분권’을 ‘자치분권’으로 내부 정리한 것을 이해하게 한다.

‘자치분권’이던 ‘지방분권’이던 그것의 문리(文理) 해석에 관계없이 문재인 정부의 방향은 지방자치의 완전한 시행에 포인트를 두고 있다고 본다. 2017년 4월 공개된 <더불어민주당>의 대선공약집에 ‘지방분권 강화 및 균형발전’(129쪽)을 적시하고 있는데 곧 중앙정부의 권한을 지방정부로 이양하고 지방의 자치역량을 강화하는 등 지방분권을 실현하겠다는 약속으로 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란한 제시에도 자치분권 시행 우려는 불식할 수 없다. 핵심인 재정분권에 대한 확실한 담보가 없기 때문이다. 분명한 자치분권을 하려면 여러 보완이 필요하다. 가장 핵심은 자치정부의 재정문제 즉 중앙과 지방세수의 균형이다. 현행 8 대 2 수준인 국세와 지방세의 비율을 학계 등에서 제기되는, 최소한 6대 4 는 되어야 한다 생각한다. 현재와 같은 세수 구조로는 지방정부는 정부의 영향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다른 문제도 있다. 국가정책의 중요 분야인 복지와 교육이 그것으로 시행 대상 및 내용을 볼 때 자치정부가 담당 또는 기존 당국과 협조 체계를 갖는 것이 바람직하고 특히 일선행정을 담당하는 기초자치정부와 협조는 절대필요하다. 유의해야 하는 것은 이 분야는 지방정부의 관여가 제외되어있고 협조체계도 원만하지 않은데 국민들의 행정 수요(민원)는 많다는 점이다. 

우리사회는 생활보호가 필요한 절대 빈곤계층이 있는가 하면 상대적 빈곤으로 불만을 가진 계층이 많다. 이러한 대상들을 함께 포용하기 위한 국가 복지정책이 필요한데 현행 제도로는 효과적 시행이 어려운데다 불합리성조차 가지고 있다. 여러 요인이 제기되지만 일선행정 수행 기관인 기초자치정부가 정책 관장(管掌)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함에도 시행에 따른 민원처리 등 책임이 집중 요구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선행정을 담당하는 기초자치정부는 이와 관련하여 유효한 어떤 조치도 할 수 없는 것이 현재 체계다.

교육부문도 유사한 상황이다. 정책 특성상 전문성을 가진 기관이 관장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대민행정이라는 측면에서 일선행정 기관인 기초자치정부의 관여는 필요하고 따라서 이를 배척하고 있는 현 제도를 합리적이라 할 수 없다. 비록 교육정책이 가지는 특수성이 있지만 상대가 주민인 만큼 대민행정 이를테면 학교급식이나 안전문제와 같은 행정수요에 기민한 대응을 하지 못하는가 하면 지역 자원의 효율적 운영도 기하기 어렵다. . 

정리를 하면. 실질적인 대민 행정 수요 처리는 대부분을 기초자치정부에 부여해 놓고도 관련 권한은 중앙 및 광역자치 정부나 교육청이 가지고 있는 것이 현행 구조다. 이런 구조를 견지한다면 문재인 정부의 자치분권은 결국 말잔치로 끝날 뿐이다. 실질적인 분권이 되도록 진중(鎭重)하고도 면밀한 접근을 기대한다. 

 내년 2018년은 민선7기가 시작된다. 국민들은 지방자치단체의 장이나 의원을 뽑을 때 이러한 사정을 개선할 능력자를 선택 하여야 한다. 차제에 분명히 이해하여야 하는 것은 기초자치정부의 권한은 초라하다는 점이고, 권한 없는 지방정부의 행정은 제도적 민주화를 약화시켜 중앙정부의 독재를 부르게 된다는 점이다.(♣2017.7.29.)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Under The Sea


곧추세운 몸이 위로 서서히 떠오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빛의 알갱이들이 늘어나며 주위는 점점 밝아온다. 드디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윤슬이 눈부시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을 사랑해요.”

그는 미소 짓는다.


대학이 긴 방학에 들어갔다. 나도 덩달아 배낭을 꾸렸다. 다르에스살람에서 잔지바르행 페리를 타면서도 이곳이 여행의 종착점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동북 지방을 돈 후 종단해서 돌아오는 게 원래의 계획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스쿠버다이빙은 꼭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었다. 실행력 하나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는데, 물에 들어가는 것만은 늘 미적거리게 되는 나를 알기에 이번에는 기필코 하며...

트럭을 개조한 버스를 타고 도착한 능귀 해변. 인도양의 진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석고 가루를 개어놓은 듯 희고 고운 모래. 모래톱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고 깨끗한 물. 그 모든 것을 축복하듯 쏟아지는 햇살. 그것들이 한데 버물어져 비취색 물결을 빚어내고 있다. 저 멀리 검푸른 물결은 하늘로 이어져 있다. 머뭇거리기만 하던 나를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나를 탐하라고, 결코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다이빙 포세이돈’. 그가 운영하는 다이빙 숍이다. 안정감 있어 보이는 중년의 남자 베른하르드. 오십이 되며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어, 그동안 해오던 일을 접고 호주에서 이곳으로 온지 육 년째라고 했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활동이므로 그는 매우 신중했다. 기본 교육 후 테스트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사인을 하고야 계약을 마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프랑스인 커플과 미국인 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수는 둘 씩 짝을 이뤄하는 스포츠로 나는 베른하르드와 팀을 이뤘다. 준비를 마친 후 차례차례 물로 뛰어들었다. 두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처음 짊어진 산소통과 익숙하지 않은 호흡기가 나를 긴장하게 했나보다. 균형을 잡지 못한 몸이 뒤뚱거리며 바닷물이 목구멍을 통해 들어가자 정신이 아득해진다. 지금은 이렇게 우아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그를 붙잡고 발버둥 쳤을 내 모습을 상상하면 지금도 창피하다. 어쨌든 그의 도움으로 겨우 우스꽝스런 사태를 수습하고 서서히 하강을 시도했다. 그러나 곧, 귀에 강한 통증이 인다. 수압에 적응하기 위해 몇 차례 올라오고 내려가기를 반복한 후에야 밑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오직 내가 내뿜는 숨소리만 들리는 공간에서 호흡에만 집중하는 절대적 순간. 인간의 손이 가지 않은 태고의 신비와 마주하는 일은 지금까지 경험해 본 그 어떤 일보다 나를 전율케 한다. 

새하얀 모래 바닥에 몸을 곧추세우고 있는 실뱀들. 산호초 사이를 들락거리며 숨바꼭질하거나, 하늘거리는 말미잘 사이를 노니는 빨간 물고기들. 바위틈에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고 모여 있는 밤송이 같던 성게들. 조류에 몸을 맡기고 부유하는 해마. 그 곁을 유유히 헤엄치는 형형색색의 물고기 떼. 산호초 동산 위를 떼 지어 날아다니던 작고 투명한 물고기들, 그들은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는데,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듯하다. 터져 나오는 감탄사를 어쩌지 못하고 우우, 소리만 뱉어 낼 뿐이다. 그 아름다움을 어떻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횟수를 더해 갈수록 나와 바다는 하나가 된다. 때론 나를 위해 물길을 열어주기도 하고 때론 자신의 공간에 가두려고 한다. 우리는 밀당을 하며 조금씩 서로에 길들여지고 있었다. 

마지막 다이빙, 최고의 다이빙 포인트로 코렐 마운틴이라고 했다. 

이곳은 사뭇 다르다. 두 개의 세계로 극명하게 나뉘어져있다. 한쪽이 산호초 산이라는 밝음이라면, 다른 한쪽은 검푸른 어둠이다. 한 번 빠지면 절대 되돌아 나올 수 없는 크레바스 같은. 

두 세계는 똑 같이 나를 유혹한다. 저 알 수 없는 깊은 세계로 들어가 보고 싶은 어두운 욕망과 아름다움을 더 탐하고 싶은 욕망.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못하며 양쪽을 곁눈질한다. 엄마가 한눈을 파는 사이 신기한 것들을 쫓아가다 길을 잃는 어린아이처럼 나도 눈앞에 펼쳐지는 욕망을 쫓으며 길을 잃으려는 찰라, 그는 손목에 찬 눈금을 가리킨다. 더 이상 내려가지 말라는 사인이다. 나는 고개를 있는 힘껏 저으며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향해 강하게 내리 꽂는다. 좀 더 내려가 보고 싶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다. 


나의 휴가는 두 개의 욕망 사이를 오가며 모두 소비되었다. 이제 남은 건 새로운 바다를 꿈꾸는 일. 그게 무엇인지, 어떠한 모습일지는 나도 모른다.


7월29일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no. 151


7.27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7월 27일 정전협정을 맺은 65년 째(64주년) 되는 날이다. 평화와 통일은 오지 않고 평화와 통일을 위해 실천하다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던 선배는 돌아가시고 티브이 뉴스에선 평화대신 미국발 전쟁의 살기가 뭉쿨뭉클 피어난다. 오! 고난의 한반도. 돌아보면 열전 3년에 휴(정)전 65년, 지금 한반도는 68년째 전쟁 중이다. 미군정 3년 일제 강점기 36년, 1984년 청일전쟁 이후 을사늑약 강제 합병까지 16년을 합하면 120년이 훨씬 넘게 한반도엔 평화가 없었다. 그 사이에 민중들은 나라를 뺏기고, 식민지 노예로 살다 외세에 의해 분단이 삶을 강요받았다. 분열과 증오와 혐오로 철조망을 세운 남북은 정상적인 삶을 누리지 못한 채 군사독재, 재벌독재, 가난과 차별이 판치는 헬 조선을 살아야 했다. 이제 정말 평화가 절박하다. 무기가 지켜주는 평화, 전쟁이 만든다는 평화 말고, 함께 살기 위해 일을 하고, 더불어 즐기기 위해 공부를 하며, 전쟁은 기미도 없는 자유로운 사람들의 공동체가 구현된 한반도가 필요하다. 

[정전협정 64주년인 27일 오전 서울 세종로 광화문 세종대왕동상 앞에서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주최로 정전협정 64주년즈음한 한반도 평화협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출처 민중의 소리]



1953년 7월 27일은 정전협정에 불행히도 당사자 남한이 빠졌다. 이유는 이승만이 북진 통일을 고집하며 정전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속내를 보면 이승만과 그 지배무리들이 스스로의 힘으론 민주주의를 통한 정권 유지가 불가능함을 알고, 안으로는 남북 간의 전쟁이 뿌린 피가 만든 증오를 통한 폭압지배 이데올로기를 확보하고, 밖으로는 정권과 친일분단체제의 물리적 안전판으로 미국(군) 주둔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先)한미방위조약을 요구하며 정전협정에 불참한다. 그 결과 지금도 남한은 평화협정의 당사자가 되지 못하고 있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말하지 못하고 다자 평화체제를 말하는 남한의 옹색한 외교적 입장도 여기서 기인한다. 군사 작전권의 외국군 이양과 정전협정 참여 거부는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외교국방전략 실패의 대표사례다. 전쟁을 끝내려는 북한과 전쟁을 지속하려는 남한, 누가 더 평화적인 모습일까? 그래서 그런지 정전협정이 체결에 대해 남과 북의 시각은 완전히 다르다. 북은 7.27은 전승일이다. 남은 당사자가 못되니 평화를 말하면서 전쟁을 기리는 6월 25일 에 무게를 둔다. 그러다 2013년에 갑자기 ‘유엔 참전의 날’이라 했는데 생뚱맞다. 


6.25 전쟁의 결과는 기묘하다. 승패가 없는 전쟁이다. 2차 대전 후, 소련의 압도적인 전공(戰功), 사회주의 체제의 세계적 수립은 영국의 뒤를 이은 자본주의 패권국 미국을 당황케 했다. 당혹한 상황에 대한 돌파를 안으로는 메카시 광풍으로, 밖으로는 소련(스탈린)을 악마로 만들며 냉전체제의 수립으로 대응한다. 그 과도기에 체제대립을 세계적으로 만든 것이 한국전쟁이다. 과도기의 위태로움이 강제한 불안한 타협이 정전협정이다. 미국은 6.25를 통해 전략적으로 냉전체제의 수립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안정시킨다. 동북아의 체제대립을 통한 긴장유지가 미국 패권에 유리하다고 보고 그 체제를 유지한다. 그 결과 세계사에 유례없는 정전만 65년이라는 작금의 상황이다. 


상식으로 봐도 정전협정을 종전-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정전협정에도 ‘협정 효력이 발생한 후 3개월 내에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문제들을 정리하자’고 되어있다. 하지만 미국과 이승만 정권은 이런 상식적인 수순을 거부한다. 3개월은커녕 60년이 넘어도 한반도 내 유일한 외국군대인 미군은 오늘도 전력만 강화하고 있다. 남북이 동포가 아니라 원수로 대립을 하고, 민(民)들의 복지보다는 군사무기에 돈을 쓰며, 심지어 외국군을 반세기 넘게 주둔케 하는 역사적 치욕이 유지되고 있다. 이 한국 현대사의 비참한 비극의 토대가 적대세력이 존재함을 확인하는 정전체제다. 뉴스에서는 오늘도 북한의 호전성 도발 등등의 단어로 마치 모든 잘못은 북에 있다고 하지만 놀랍게도 한반도에서 평화협정을 반대하는 세력은 북한이 아니다. 오히려 북한은 "동서고금의 국제관계사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정전상태가 매우 비정상적인 사태"며 지속적으로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했다. 한반도를 전쟁의 불구덩이로 만들거나 불구덩이를 유지하려는 것은 역설적으로 미국과 남한의 분단으로 이득을 얻는 사대 수구 기득권 측이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을 대체하고 남한이 포함된 새로운 형태의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어 내는 것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최선의 길이다. 실상 한반도에서 평화협정 체결이 어려운 것은 미국의 이해관계 때문이다.(미국의 이해관계로 규정되는 남한, 이것이 남한 현대사의 비극이다. 미 의회가 개성공단 재개 불가 법안을 미국 내 법으로 만든다는데 그것이 내정간섭이라고 비판하는 정치인이 단 한사람도 없는 남한 말이다.) 아울러 정전협정은 낡은 냉전 세력들 이승만 박정희 유신 파쇼적 지배의 존립 토대다. 최근에 남한과 미국이 한반도의 긴장을 북핵 미사일 탓으로 돌리고 있지만 북이 핵 미사일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시절에도 평화협정은 추진되지 않았다. 평화협정은 냉전체제의 궁극적 해소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미군의 한반도 존재 이유를 소멸시킨다. 한미일 군사동맹 체제의 필요를 부정한다. 평화협정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손상 없이 유지되고 있는 미국의 동북아 지배체제 축이 붕괴되는 셈이다. 냉전을 통한 정치 군사적 지배 및 군사 무기 분야의 경제적 이득 구조가 사라진다. 결국 미국에게 한반도의 평화는 미국의 손실이요 실패다. 이런 미국이 한반도 평화를 원할 수 없다. 미국이 평화를 위한 위대한 여정의 동반자라는 현 정권의 대미의식이 끔찍한 이유다.


갈라진 한반도는 체제 모순과 대립, 항상적인 전쟁 위험, 가난과 차별 불평등, 민족 분열과 대립을 악용한 정의롭지 못한 정치체제를 가능하게 했다. 그 결과 남북 민중은 항상적 고난의 행군을 했다. 동포간의 화해할 수 없는 증오와 혐오를 부추겨 온 세월이 벌써 65년, 이제 그 지독한 악의 고리를 끊자. 전쟁을 말하기 전에 남 탓을 하기 전에 재작년에 왔던 교황의 충고를 듣자. "북한사람들과 대화하세요. 그들은 형제자매입니다.” 미사일 탄두 무게나 사드 따위에 국가의 안보와 평화를 떠밀지 말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가게 하여 전쟁 없는 한반도를 만들자. 대화로 평화(平和) 가자. 평화통일을 이루자.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소장

[은행이의 책소개] 사는게 뭐라고




오래전 강승숙 선생님의 책을 찾아 읽고 참 훌륭한 분이구나 감탄을 했다. 선생님의 책에 소개 되어있던 수많은 그림책들은 처음 보는 책도 많아서 공부할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백만번 산 고양이>는 강선생님이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 해서 얼른 찾아보았다. 그런데 내용이 참...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고, 좋아하는 이유도 분명 있겠지만, ‘대중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누구나 다 읽고 다 좋아할만한 책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개성이 강했다. 자기 자신이 아닌 누구의 고양이로 태어난 그 고양이는 자신의 삶을 팽개치다시피 한다. 삶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고 되는대로 살다가 죽고 다시 또 누군가의 고양이로 태어난다. 그러다가 사랑을 하게 되면서 자기 삶에 진정한 애착을 갖게 된다는, 그래서 다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중학생들과 이 책을 읽었는데 아이들은 ‘살고 싶어야 살게되는게 당연하다’고 입을 모은다. 파격적인 내용이지만 ‘삶이란 살고 싶어야 잘 살아진다’는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를 쓴 것이다. 특히 이 책은 아이들을 객관화된 대상을 보여주어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하도록 만든다. 삶의 주인이 자신이 아닐 때, 사람들은 절망하고 의욕이 없다는 것을 아이들 스스로 찾아낸다. 

 이 책을 쓴 사노 요코, 난 이 분에게 완전 빠져버렸다. 사노 요코의 에세이인 <사는게 뭐라고>를 읽고 곧 <죽는게 뭐라고>와 <하나님도 부처님도 없다>를 찾아 읽었다. 가장 마음에 든 <사는게 뭐라고>를 잊지 못해 다시 빌려 조금씩 아끼며 읽고 있다.

 사노 요코는 이혼을 두 번했다. 다 큰 아들이 하나있고, 수술 마치고도 집에 와서 담배를 피는 골초이다. 그는 먹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사람이 밥을 먹으며 사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한류열풍이 거셀 때 욘사마에게 반했다가 김승우한테 반하고 다시 이병헌한테도 반한다. 아픈 몸에 너무 한쪽 방향으로 티비를 보다가 턱이 돌아갔다. 병이 몸을 꼼짝 못하게 하자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데 죽음이란 나 외에 다른 사람에게 올 때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자신은 언제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죽으면 일을 안 하니까 참 좋을 것 같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는 죽었다. 2010년의 일이다. 

 나는 그가 죽은 것이 속상했다. 살아있었다면 편지 한 번 보내고 싶었다. 그의 글은 그의 일상을 적어둔 것인데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그래 산다는 것은 이런 거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싫어하는 책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지시하고 하면 안 될 것들, 해야만 하는 것들을 늘어놓는 책들과는 아주 다르다. 사람이 성공하려면 이렇게 저렇게 하면서 늘어놓는 것이나, 자기만 옳다고 이야기하는 책과는 다른 것이다. 난 이렇게 살았다 는 것을 보여주기만 한건데도 위의 그림책의 고양이를 봤을 때처럼 나 자신을 보게 되고, 그래 사는건 이런거지 하면서 찬찬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과 제일 먼저 절교하고 싶다’ 자기혐오가 강했던 사노 요코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이 사람을 마음에 들어하는 이유는 자신을 잘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때로는 주변에 자신을 너무 몰라서 다른 이들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다. 뭐든지 자신만만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일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

 책을 읽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겸손과 자신을 돌아봄, 그러니까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책을 읽고 나면 주인공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그러면서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사노 요코의 책이 그렇다. 정말 책 내용으로 보면 이혼 두 번에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살 수 있고, 성격 안 좋고, 다른 이들의 흠도 넘어가지 못하는데 본인한테는 뭐라 못하고 집에 돌아와 머리카락 쥐어뜯는 그런 성격.. 어찌보면 본받을게 하나 없는 할머니인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책이 참 좋다. 앞 쪽에 있는 사진( 암치료 중에 깎은 머리가 살짝 자란 모습)을 보면서 한번 쯤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소개한 많은 글들은 사노 요코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내 느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을지 모르나 이 사람은 삶을 사랑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삶은 찬란하지도 황홀하지도 않았지만 주어진 것을 그저 열심히 밥을 해 먹으며, 때로는 남과 싸워가며, 무엇보다 자신을 직시하며 살아갔다는 것, 그것이 사노 요코가 자신의 삶을 사랑한 증거다. 그래서 그 고양이처럼 이 분은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옮긴이의 말처럼‘ 상쾌한 바람’ 같은 사노 요코... 답답하기만한 일상에 그의 책과 그의 생각이 나를 위로해주는 것에 큰 고마움을 느낀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민경아

[기고]마을목공소를 지켜주세요



<아이들이 직접 만들어 설치한 의자>



저는 한울중학교에서 근무하는 1학년 부장 업무를 맡은 교사 이명남입니다. 한울중학교에 온지 벌써 2년 6개월, 오랫동안 구로에서 마을 분들과 마을결합형 학교의 모델을 만들다 2015년 처음 한울중에 와서는 마을결합형 학교를 어디서 어떻게 시작하나 고민되고 낯설고 어색했지만, 마을 투어를 함께 하며  마을에서 활동하시는  선생님 여러분들을 만나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2016년에 자유학기제를 처음 시작한 한울중은 마을선생님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마을결합형 학교 봉사 활동과 2, 3학년 시험 기간 중에 실시한 직업 체험에는 그야말로 마을 선생님들의 아낌없는 지원이 있었습니다. 

금천교육네트워크(현, 사)마을인 교육) 까페 ‘자리’, 꿈씨어린이작은도서관, 은행나무도서관, 금천숲생태포럼, 산아래문화학교, 교육나눔협동조합, 아이쿱생협.....


여러 기관을 열거하다보니 다시금 감사함이 솟아납니다. 올해도 아이들의 많은 활동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학교 바로 앞 남부여성발전센터 운동장 한 켠에 자리잡은 건강한농부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마을목공소와 나무텃밭은 거리로도 가장 가까운 이웃이어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우선 마을결합형 학교로서 마을에 뿌리내리는 데 큰 힘이 된 ‘학부모 노작 동아리’ 운영과 학부모 목공동아리‘를 운영하면서, 학교의 생태 텃밭도 조성하고 텃밭 옆에 평상과 의자를 학부모들께서 직접 만들어서 설치해주셔서 학생들뿐 아니라 교사들도 아주 좋아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또한 자원봉사활동시간에 학생들과 학부모가 협동하여 호암산 등산길에 등산객들이 길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이정표를 만들고 쉴 수 있도록 벤치를 만들고, 학생들이 고개 마루까지 나무들을 직접 나르고, 함께 설치했습니다. 이정표 벤치에서 한울중학교 이름을 발견한 분들이 반가움의 인사를 해주시는 것이 참으로 뿌듯합니다. 


 그리고 2016년 한울중 모란제 축제일에 맞춰서 동네 분들과 처음으로 ‘새재미 마을축제’를 진행했습니다. 적은 예산으로 진행하다보니 당시 무대를 쌓았지만 무대 배경 예산이 없어서 난감할 때에 ‘마을 목공소’에서 학교 운동장의 축구골대를 활용해서 무대배경을 만들어 주셔서 ‘새재미마을축제’를 성황리에 마칠 수있었 습니다. 마을축제에 참여했던 학생들도 재미있었는지, 올해에는 한울중 모란제와 ‘새재미마을축제’를 함께 진행하자는 의견이 많아 올해는 마을과 학교가 어우러지는 축제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들이 성공적으로 치러질 수 있었던 것은 학교 근처에 가까이 ‘마을목공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마을목공소’ 터는 남부여성발전센터 공용주차장 옥상의 빈 공간으로 건강한농부협동조합이 남부여성발전센터에서 운영하는 여성창업지원센터에 입주했다가, 빈 공간을 활용해서 ‘마을목공소’를 만들자고 구청과 센터를 설득해서 만들 수 있었는데, 건물도 합법적인 건축물로 신고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2017년 올초부터 이사에 대한 얘기가 오가고 저는 그때마다 잘 해결되기를 바랬습니다만 ‘건강한도시농부협동조합’이 이전하였고 이제 오는 7월 10일 감사를 앞두고 ‘마을목공소’ 마저 이전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쉬움과 ‘마을목공소’는 넓은 공간이 필요한 곳이라서 한울중의 이기적인 욕심이 아니라 만약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 공간이 넓은 곳으로 가야하므로 마을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금천교육복지센터의 별별철학원에서 운영하는 학교부적응 학생 돌봄 뿐 아니라, 학부모 동아리 활성화나 학생들의 직업 체험 및 마을결합형 봉사활동은 전혀 할 수 없을 거라 생각되어 아쉬움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올해도 학부모 노작동아리가 이어져 텃밭의 빈 공간에 탁자와 의자를 만들어 기증해주시기로도 했습니다.

 그동안 금천구청과 서울시청, 그리고 이훈 국회의원을 찾아다니며 호소하고 이해를 구하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결과적으로 아무도 책임 있는 말을 듣지 못하고 이사를 가라는 최종 통보를 들었다고 합니다. 빈 터에 목공소를 설치할 수 있도록 동의를 받아내고, 그리고 자체 예산으로 벽면을 설치하고 기계를 구입하고, 마을과 함께하는 다양한 활동을 했는데, 이제 와서 나가야 한다는 것은 마을결합형 학교 (민간거버넌스)의 취지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나 아직 마을학교라는 인식이 덜 된 열악한 환경에서도 마을을 지키고 마을에서 버텨온 자생적 마을 기관과 마을선생님들이 설자리가 더 좁아져 마을결합형 학교 실현은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특별히 이용할 목적이나 ‘마을공작소’의 흠이 없는 한 나가야 한다는 결정은 다시 한번 재고되어야 할 처사로 보입니다.


 ‘건강한농부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마을목공소’, ‘나무텃밭’이 이후에도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금천구청과 남부여성발전센터, 서울시에 부탁을 드립니다.


 올해에도 텃밭의 탁자와 의자가 새로이 또 놓이고, 학부모들이 ‘마을목공소’에서 노작동아리를 이어가도록, 마을 축제에서 작년처럼 무대를 만들며 마을과 함께할 수 있도록 공간 이용이 지속적으로 가능하도록 도움을 주시면 정말로 고맙겠습니다.

 학생들이 마을에서, 마을학교에서 꿈을 찾고 마을살이를 할 수 있도록 관심있는 관계자 여러 선생님들께 다시한번 진심으로 도움을 요청드립니다.


이명남(한울중 교사)

죽음이 임박한 순간, 그들은 무얼 예감했고 무얼 그렸나?

19인의 예술가가 남긴 마지막 명작 이야기






가톨릭 성직자들 묘지 입구에는 라틴어 “Hodie Mihi, Cras Tibi(호디에 미히, 크라스 티비)”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해석하자면 “오늘은 내가, 내일은 당신이”라는 뜻이다. 수수께끼처럼 들리겠지만, 이 말은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격언이다. 오늘은 내게 죽음이 드리워져 이렇게 누워 있지만 내일은 바로 당신의 차례라는 것이다.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여기 ‘기억하고’ 싶은 죽음들, 하지만 죽음조차 그 예술혼을 사그라뜨릴 수 없어 시공간을 초월해 ‘기억되는’ 화가들이 있다. 

그림을 다리 삼아 세상을 통과해온 미술 저술가, 이유리는 예술가들이 남긴 빼어난 예술작품, 그중에서도 유독 ‘화가의 마지막 그림’에 마음을 빼앗겼다. 생의 끝, 가장 아름답고 치열한 시간에 화가의 손끝에서 피어난 그림 한 점엔 쉬이 껴안지 못할 삶의 진실이 녹아 있으리란 생각에서다. 실제로 화가의 마지막 그림 안에는 죽음이 임박한 순간, 그들이 무얼 예감했고 무얼 목격했으며 무슨 메시지를 최후로 남기고 싶었는지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속설에 따르면, 백조는 평생 울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 단 한 번 아름답고 구슬픈 울음을 뱉는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백조의 노래’는 보통 ‘예술가의 마지막 작품’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백조들이 토해낸 마지막 울음 같은 작품들을 정성스럽게 선별하고 묶은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예술가들이 남긴 마지막 명작집’이라고 할 만하다. 


반 고흐는 자살하지 않았다? 화가의 마지막 그림에 얽힌 놀라운 이야기들 


화가가 생을 마감하기 전 최후로 남긴 작품이라 하면 으레 비장감과 비극성 혹은 무력감과 덧없음이 깃들어 있을 것이라 짐작하기 쉽다. 실제로 책에서 다룬 19인의 예술가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비극 속에서 화가들이 길어올린 작품에는 생에 대한 에너지와 열망, 끝끝내 놓을 수 없었던 희망과 염원의 메시지가 가득했다. 또한 일반에 널리 알려진 내용과 전혀 다른 놀라운 반전도 있었다.  


▶ 반 고흐의 진짜 유작 <나무뿌리>가 말해주는, 반 고흐 죽음의 진실 

많은 이들이 반 고흐가 마지막으로 그린 작품이라 믿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반 고흐의 진짜 유작이 아니다. 그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완성한 뒤에도 그림을 더 그렸다. 죽음 직전에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한 <나무뿌리>가 바로 그것. 반 고흐의 동생 테오의 큰처남이 남긴 편지에는 반 고흐가 마지막까지 그리고 있던 그림에 대해 “죽기 전 그는 나무 덤불을 그렸다. 햇빛과 생명으로 가득한”이라고 언급돼 있다. 실제로 이 그림은 채색이 덜 되어 스케치가 그대로 보이는데, 한번 잡은 작품은 끝을 내고야 마는 반 고흐에겐 이례적인 일이다. 채 완성하지 못한 이 그림은, 반 고흐의 죽음이 알려진 대로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었다는 데 무게를 싣는다. 반 고흐에게 총상을 입힌 용의자인 10대 소년 세크레탕과 반 고흐의 악연. 자살로 오해받은 총상 사건의 전말이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의 두 연구사, 노스캐롤라이나대학 교수, 하버드대학 교수, 미국 내 총상 분야 최고전문가의 생생한 증언과 논쟁으로 펼쳐진다.



▶ 이중섭, 잔 에뷔테른, 에곤 실레… 운명의 거친 옹이에 사랑을 맡기다

운명의 거친 옹이는 수줍던 연인들을 비극으로 물들여 애달픈 유작을 남기기도 했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화가 이중섭, 그는 일제강점기에 야마모토 마사코와 국적을 뛰어넘는 열병 같은 사랑에 빠졌다. 가난 때문에 헤어진 연인을 그리며, 중섭은 그 유명한 ‘중섭의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허나 척박한 현실은 재회의 희망마저 꺾었고, 그렇게 살아갈 이유를 잃은 이중섭은 연작 <돌아오지 않는 강>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그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사랑하는 모딜리아니가 결핵으로 끝내 숨지자 9개월 된 뱃속 아이와 함께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 잔 에뷔테른, 아내와 아이를 스페인독감으로 잃은 후 장례식 화환이 채 시들기도 전에 그들 뒤를 따라야 했던 에곤 실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들이 비극 속에서 보여준 능동적인 사랑의 방식은 우리에게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라는 사뭇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이외에도 시시각각 죄어오는 나치의 수색에 숨이 막힐 것 같은 상황에서도 여전히 ‘나는 살아있다’는 증거의 표시로 붓을 놓지 않은 유대인 화가 펠릭스 누스바움, 생때같은 아들과 손자를 연달아 전쟁터에서 잃은 후 ‘전쟁 반대’ 메시지를 새긴 작품을 줄기차게 생산한 케테 콜비츠, 세상이 반대한 사랑을 했다는 아픔을 기어이 숭고한 작품으로 승화시킨 미켈란젤로 등 다채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ㅈ

커피 (하)





손수 가꾼 재료로 만든 홈메이드 빵과 커피. 혀끝에서 출발해 온 몸을 타고 흐르는 부드럽고도 감미로운 느낌이 가슴까지 닿는다. 어찌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시골 생활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소소한 일상이다. 그런데 나는 뭔지 모를 평화로움과 충만함으로 가득하다.

요셉은 수확기의 바쁜 일정을 잠시 뒤로하고, 나를 위해 시간을 할애한다. 넓게 펼쳐진 뒷마당에는 달콤한 과육을 벗어 던진 커피콩이 일렬로 늘어선 목판위에 누워있고, 정원 한 편에서는 어린 묘목들이 비닐봉지에 담겨 커가고 있다. 가공 공장에는 건장한 청년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크기별로 나누어진 커피콩은 물속에서 2~3일 발효과정을 거치며 과육을 모두 떨어버린 후, 인부들에 의해 여러 번 씻기고, 뽀득뽀득 해진 알몸으로 마당의 건조대로 옮겨지고 있는 것이다. 

농장으로 나오자 빨강, 노랑, 파랑색 커피콩을 단 나무들이 사방 어디에서 봐도 일직선을 이루고 서있다. 나무를 심는 데도 규칙이 있어 한 쪽 고랑은 넓이를 3미터로 해서 트랙터가 지날 수 있게 하고, 반대쪽은 1.5미터로 나무가 자라기에 최적의 공간을 확보한다. 고랑은 멀리 소실점으로 이어진다.

농장을 크게 돌며 초입에 이르자, 빨갛게 잘 익은 커피콩만을 골라 따는 사람들이 보인다. 열 살 남짓한 소녀에서 오육십 대 아주머니, 아저씨까지 다양하다. 보수는 일당이 아니고 수확한 양으로 계산된다. 보통 네다섯 바구니를 따는데, 우리나라 돈 3500원 정도. 

공정무역 대상이자, 아동 노동력 착취로 거론되고 있는 것 중의 대표적인 농작물 커피. 요셉이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는 여러 종류의 잡지를 구독하고, 인터넷 뉴스를 모니터링하며 바깥세상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소피아, 내가 재배한 커피 1킬로그램 출하가가 2~2.5유로야. 그런데 소비자가가 얼마인지 알아? 16유로가 넘어. 그 중간의 돈은 누가 다 가져가는 거야?”


커피도 곧 전 공정을 기계로 처리할 것이란다. 이미 브라질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으며 자신도 자동 시스템으로 바꾸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단다. 전 국민의 80퍼센트 이상이 1차 산업에 종사하는 현실에서 시골마을 사람들에게 그나마 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인데 그마저 없어지는 것이다. 노동력 착취의 원흉으로 지탄 받지도 않겠지만, 학비를 벌던 학생들이나 생활비를 위해 일하던 아낙들의 일자리도 함께 가져갈 것이다. 

나도 그들 사이에 끼어 커피 따는 아낙이 되어 손으로는 커피를 따며, 상상력은 사십여 년 전 오늘로 거슬러 올라간다.  

옥수수 가루처럼 뽀얀 얼굴을 가진 농장주가 일손을 구하고 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곳으로 왔다. 헬렌도 언니들을 따라 왔다. 낯선 얼굴이 보인다. 키가 껑충하게 크고 어른스러워 보이는 청년은 농장주처럼 피부가 뽀얗다. 소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에 대한 호기심으로 곁눈질을 한다. 그러나 무섭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그러나 헬렌은 달랐다. 자그마한 키에 날렵한 몸매, 총명한 눈빛을 가진 그녀의 호기심을 누를 건 어디에도 없다. 학교 수업시간에 배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머나먼 미지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숨기지 못한다. 또한 소녀로서의 호기심으로 자신이 그동안 봐왔던 주변 남자와는 다른, 이 멋진 청년에 대한 관심 역시 누를 수 없다. 나와 얘기 도중,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어느새 쪼르르 요셉에게 달려가 물어보고 오는 그녀의 어릴 적 모습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시골마을에서 학교에 다니는 소녀가 드물었을 뿐더러 당돌하고 적극적이던 그녀가 요셉의 눈에도 들었을 건 불을 보듯 훤하다. 세월이 흐르며 헬렌은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장해 갔을 것이고, 노총각이던 요셉에게 좋은 배필이 되었을 것이다. 23년 전, 그들만의 꿈이었던 농장주가 되어 지금에 이르면서, 사십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한 것이다. 

여기 저기 보물찾기를 하듯 움직이는 동선에는 캐롤리나도 있었다. 헬렌의 조카로, 태어나면서부터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거둬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쳐다보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다가도, 짐짓 내가 모르는 척하면 다시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조금 나와 낯이 익자 팔을 펼쳐 보이며 얼굴을 붉혔는데, 새 옷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다음에 갈 때는 그녀를 위해 예쁜 머플러라도 한 장 사야겠다.

저녁 무렵이 되자 요셉은 오한이 나고 미열이 있다고 한다. 어제 이런 저런 얘기로 늦은 잠자리에 들었고, 종일 일을 하며 힘에 부쳤던 모양이다. 그에게는 오랜만에 찾아온 낯선 손님과의 대화가 즐거웠던 모양이지만, 내가 미안한 마음을 비치자 그는 말했다. ‘노인네가 조금 몸이 아픈 것은 당연한 거예요. 전혀 심각한 게 아니에요.’ 

삶에 있어 그에게 엄살은 없다.  


 6월9일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새 주민자치 제도 시행에 대한 기대


‘주민자치’ 정책의 변화가 있다고 들었다. 내년(2018)부터 전국의 모든 자치단체가 일시에 시행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도가 바뀐다고 한다. 이러한 제도 변경의 법 근거는 “지방분권 및 지방행정체제개편에 관한 특별법”으로 이미 2014년에 공포되었는데 그에 따른 진행으로 알고 있다. 아직 부속 입법(시행령, 조례 등)은 잘 준비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법률이 정한 바에 따를 행정체계는 순차적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이번 변경은 그런 과정인 것으로 알고 있다.

새롭게 구성되는 읍·면·동의 주민자치 조직의 명칭은 과거의 ‘주민자치위원회’를 ‘주민자치회’(법 제 27조)로 하고 위원 선임도 과거 읍·면·동장이 가진 위촉 권을 기초자치 단체장(시장, 군수, 구청장)이 행사하도록 하고 있다. 그대로 이해를 하면 주민자치회의 구성원 선임에 보다 신중을 기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명칭을 ‘주민차치회’로 이름을 바꾸는 것과 그 구성원 선임을 격상 차원으로 바꾸는 것은 현 제도가 원래 취지에 부합하지 못한데 따른 쇄신적인 수정 즉 개혁적인 방향으로의 진행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듯 명칭을 바꾸고 구성원 선임 방법을 과거와 달리 하는 것은 현재의 주민자치제도의 변화를 기한다는 정책의지로 이해한다. 

사실, 우리나라가 민주화의 도정에 들면서 풀뿌리 민주주의는 세간의 중요 화두가 되었고 따라서 그에 따른 연구나 학술활동들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분위기에도 그것의 생산적인 진행은 빈약했고 성과물도 별로 없었다. 그런 면에서 일선 행정단위인 읍·면·동의 주민자치위원회 구성과 운영은 평가할만한 성과이기는 하지만  본질 즉 풀뿌리 민주주의를 말하기에는 여러 면에서 부족하다.



이러한 현상은 누구의 실책이라 말하기는 그렇지만 행정당국의 정책 일관성의 부재로 인하였다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것의 정책 수립 때 목표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통한 실질적 민주주의를 시현하고자 함인데 그 후 과정에서 이의 추진 동력은 약화되었고 결과적으로 그 진행은 불규칙한 모습을 보였는데 특기할 것은  정권에 따라 그 정도에 차이가 많았다. 

각설하고, 이제 새 제도를 시행한다하니 나름의 의견을 개진해 보자. 이미 상당한 수준의 준비가 되었겠지만 운영 과정에서 보완을 위한 참고 여지는 남겨 두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평소 생각해 두었던 방향을 제시한다. 

먼저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주민자치회 구성원(이하 ‘자치위원’)의 선임이다. 법령에는 기초 자치단체장(시장·군수·구청장)이 위촉 권을 행사하게 되어 있는데 이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직급이 격상된 점에서 과거에 비해 자치위원 선임의 객관성이 진전된다는 기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즉 위촉권자의 직급이 격상되었다 하여 자치위원의 선임이 합리성을 갖춘다는 기대는 성급하다. 위촉권자의 직급에 상관없이 과거의 관행인 이른바 “끼리끼리 추천”은 없다는 보장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면, 객관적 데타에 의한 인재풀을 작성하고 그에 따라 신뢰성을 갖춘 검증절차를 거쳐 자치위원을 선임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친다면 최소한 일정 수준의 인선이 가능할 것이다. 인재풀의 마련은 선행사례나 신뢰성을 둘 수 있는 자료를 구하면 되는 만큼 행정당국이 의지만 있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다하여 취지에 부합하는, 역량 있는 자치위원을 선임할 수 있다는 기대는 성급하다. 능력을 가진 사람은 대개 일자리를 갖고 있거나 지향하는 목표를 두고 있어 무보수 명예직인 자치위원에 대한 흥미가 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자치위원의 직무 수행 능력 가능자 중에는 생활 방편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많지 않고 설혹 있다하여도 복무능력이나 참여 정도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주민들에 의한 행정참여 영역에는 대개 주부나 노령자들이 많이 분포하는 것이 현실인 것이 이에 대한 설명이다.

이러한 사정은 그간 주민자치 위원회를 비롯한 주민참여 의한 행정운영에서 당국이 인지한 사실이므로 이번 제도 개편에서는 나름의 대안이 마련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국가 행정운영구조 상 한계가 있을 것이므로 만족할 만한 결과를 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과거와는 차별되는데 따른 성과를 기대할 수 있고 따라서 운영의 묘를 찾는다면 기대치는 높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자치위원은 주민대표인 만큼 선임은 그런 취지를 충족하는 방법으로 하여야 한다. 주민자치를 한다면서 그 구성원이 주민 대표성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을 자치라 할 수 없다. 진정한 주민 자치는 민주주의적 과정에 의해 구성되어야 비로소 명분을 갖추게 된다. 이런 면에서 자치위원은 행정구역인 통(리) 주민의 대표가 되어야 한다. 국회의원은 물론 시의원이나 구의원이  관할 행정구역의 주민대표인 것과 같은 이치다. 

통(리)의 주민 대표 선출을 어떤 방법으로 할 것인가는 행정 당국자와 전문가의 몫이다. 다만 앞에서 제시한 인재풀과 연계하여 운영하여야 하고 그럴 경우 운영상 만날 수 있는 난점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의할 것은 이런 선임은 두 가지 긍정성을 구할 수 있다. 하나는 주민대표성 확보에 따른 민주성의 확립으로 주민자치의 명분이 분명해지고, 다른 하나는 기 시행 중인 통장의 보수를 활용할 수 있어 자치위원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보상)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이 있다. 주민자치는 제도적 장치에 의한 행정행위인데 따른 운영이 보장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독립된 예산에 더하여 부대되는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처럼 예산독립도 권한도 없이 과제만 수행하라는 것은 자치를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행정 전문가가 아니라 법리 설명을 명쾌히 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주민자치는 그에 따른 행정행위로 이해될 수 있는 제도적 운영을 할 때 비로소 완전하다 할 수 있다.

최근의 화두는 협치(協治)다. 행정영역에서 민과 관(공), 민과 민이 임무를 나누자는 취지다.  임무를 나누려면 수평적 관계가 되어야 한다. 권한과 책임의 공유다. 주민자치를 하는 것은 협치를 하자는 것이고 그것은 곧 완전한 민주주의로의 도정이다.(♣2017.06.29)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칼럼]너희가 민주노총의 6.30 사회적 총파업을 알어?



 

새 정부가 들어서며 기대가 높아졌다. 박근혜 정부를 심판 한 것은 광장의 촛불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은 정권의 심판을 주도한 결과가 아니라 그 부산물이다. 당선의 힘이 더불어 민주당에 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많은 기대를 안고 출발했다. 촛불이라는 이름 앞에서 미증유의 과감한 혁파가 새 정권의 의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이전과 다름없다. ‘기다려라. ‘가만히 있어라가 아니라서 다행일까? 그런데 민주노총의 총파업에 대한 반응을 보니 이건 뭐 더 한다. 반백년을 넘게 살면서 노동자들의 총파업 환영 보도를 제대로 본 적이 없지만, 경제가 어려운데, 북의 위협이 가중되는데 웬 파업이냐 식의 터무니없는 구박, ‘가뭄이 들었는데 웬 파업이냐는 조동중식 시비도 못해 이제 새 정부 아래서 웬 파업이냐라는 말까지 듣고 있자니 말이다.

 

파업은 헌법적 기본권이다. 애초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의 단결과 교섭과 파업을 다 불법 범죄라고 했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발전은 노동자들의 주장이 인간 존엄의 최소한의 기본권으로 만들었다. 자본주의가 즉 민주주의가 아님을 잘 말해 준다. 민주주의는 결국 노동자 민중의 투쟁의 결과라는 것도 함께 보여 준다. 노동자들이 불법 불온 범죄 취급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투쟁을 해온 과정이 민주주의와 인권이 발전한 역사다. 그런데도 아직도 노동자들의 투쟁은 현실에서 불법 불온으로 몰려 탄압을 받는다. 민주노총의 6.30 사회적 총파업에 대한 부정은 현실을 지배 중인 과거가 미래의 희망을 탄압하는 것이다. 특권과 반칙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능멸하는 것이다. 그 탄압과 능멸의 명분이 노동계가 새 정권 하에서 욕심을 쏟아 붓고 있다니 기가 막히다.

사람들은 630일에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한다는 것만 알고 있다. 파업의 내용에 대한 관심은 없다. 6.30 사회적 총파업에 돌입하는 노동조합은 최저임금 노동자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그래서 민주노총의 6.30 총파업은 최저임금 총파업’, ‘비정규직 총파업이다. 민주노총은 민주노총 역사상 최초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앞장서는 파업이라 하고 있다. 이른바, 돈과 권력이 말하는 노동귀족의 배부른 요구가 아니다.

 

6.30 총파업 요구는 최저임금 1만원, 비정규직 철폐, 노조 할 권리 보장이다.

비정규직은 나와서는 안 되는 제도다. 인간을 일회용 소모품 취급하는 노예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박한 비정규직 철폐다. 노조 할 권리는 이미 헌법이 권리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민주 노조를 한다는 것은 왕따에 폭행에 해고를 당할 결심을 해야 한다. 단식, 농성, 고공, 거리 노숙... 무수한 고난에 대한 감수다. 박근혜 정권에 맞서 투쟁하다 유일하게 자기 조직의 대표를 구속시킨 민주노총인데 민주노총을 숟가락 얻는 세력으로 폄하한다. 그러니 투쟁하는 민중들에 대한 따듯한 위로가 아니라 백남기 열사를 죽인 폭력을 동원하여 노동자 민중의 투쟁을 현실에서 도려낸다. 헌법 속에서 유산된 노조 할 권리가 절박한 이유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6.30 파업은 최저임금 파업이다. 630일은 다음 해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법정 한도일이다. 최저임금위원회가 최저임금을 가지고 해 온 노사정 교섭의 정점의 순간이다. 그 날 제대로 된 최저임금 인상을 위해 온 노동자가 힘을 모으자는 것이 6.30 파업의 시기적 의미다. 이것은 정권의 신구 유무과 무관하다. 비정규직 최저임금 노동자들의 생존이 걸린 절박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의 최저는 사람이냐 짐슴이냐를 가르는 마지노선이란 말이다. 그 이하는 인간이되 인간 취급을 안 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 존엄의 최저 기준을 상향하자는 것이 노동의 요구다. 자본은 인간 존엄의 기준을 하향하자고 한다. 그러니 자본 논리의 승리는 인간 존엄의 파괴고 노동의 승리는 인간 존엄의 상승이다. 자본의 승리는 결국 인간의 사회를 개돼지의 세상으로 만드는 폭거다. 민주노총의 6.30 파업은 인간존엄을 수호하는 숭고한 파업이다. 이기심을 벗고 함께 살자는 고귀한 투쟁이다. 누가 이겨야 하는가? 박근혜와 촛불의 투쟁에서 촛불이 이겨야 하는 것만큼 뚜렷한 이 모습을 왜 보지 못할까? 민주노총의 6.30 총파업의 반대는 스스로를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애국이라 외치는 망령 난 늙은이로 만든다. 최저 임금이 모든 임금이 되어버린 더러운 나라 대한민국에서 인간존엄이 보장되는 삶의 최저 기준을 조금이라도 올려 보자는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하는 것이 옳다. 그것이 진정한 촛불정신이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최저임금보다 많은 임금을 받는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을 노동귀족이라 욕했다. 그들이 자기들의 임단협 투쟁에 나서면 이기주의라고 비난했다. 이제 민주노총이 최저임금의 인상을 가지고 전체 노동자가 사회적 연대 정신으로 파업을 선언했다. 필자는 당연히 민주노총을 비난하던 이들이 민주노총을 칭찬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인간의 존엄성을 올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헌법적 기본권인 노동 3권을 보장하는 것이 새 정부 1년차에 발목 잡는 파업이 되었다. 문재인 정부는 인간 존엄에 발목을 잡히는 정부인가, 문재인 정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외면하는 정부인가? 궁금하다.

 

한미 FTA 협상 반대가 광우병 촛불로 번졌다. 그 이후에 한미 FTA에서 미국이 한국에 충분한 양보를 얻지 못했다는 미국 내 비판에 대해 미국 정부는 더 양보를 받고 싶어도 한국 내 촛불 시위 때문에 할 수 없었다고 답했다. 한미 FTA에서 한국 측 교섭 단은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작자들이라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말 협상은 결국 잘난 정부대표의 외교관들이 아니라 거리에 나선 국민이 했던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사회적폐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그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민()을 관객이 아니라 주인이 되게 해야 한다. 적폐의 뿌리는 언제나 돈과 권력을 지닌 자들이다. 그들과의 투쟁을 위해서라도 촛불은 거리를 지켜야 하고 노동자 민중들은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요구를 선명하게 들어야 한다. 요구를 든 이들을 적극지지 연대해야 한다. 그래야 촛불은 비로소 세상을 바꿨다 할 것이다. 민주노총의 6.30 파업에 대한 반대는 광장의 촛불을 사유화 하거나 변질시키겠다는 지독한 탐욕이다

이 땅의 모든 오광명들아~ 힘내라!!




초등학교 4학년이 딸은 학교 도서실에서하루에 두 권씩 책을 빌려온다. 재미없는 책은 두 번 다시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재미있게 읽은 책은 나에게 가져와 “엄마 이저 재미있어요.”라고 한다. 읽어보라는 것이다. 언젠가 한번 딸이 권한 책을 재미있게 읽은 뒤로는 딸이 읽어보라는 책은 꼭 읽어본다. 이번에 소개해준 책은 제목만 봐도 흥미로운 <잘한다 오광명>이다. 오광명이라는 이름도 왠지 웃기지만 뭘 얼마나 잘하길래 잘한다고 했을까?

이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도 소개되어 있는데 이름들이 한나같이 왜 이렇게 웃긴지... 시작부터아이들이 참 좋아할 만하다. 친구를 썩은 떡이라고 놀리다가 그 별명을 갖게된 ‘썩은 떡’, 수시로 똥을 누러 가는 ‘황반장 똥반장’, 황반장과 함께 오광명을 놀리는 ‘임진수’, 광명이 짝궁 ‘김준’, 주인공 ‘오광명’, 그리고 그 아이들의 담임교사 ‘털보 선생님’ 이들의 이야기가 아주 특이하고 유쾌하게 그려진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유치하지 않은 문체와 표현으로 그려졌다. 

초등학교 2학년이나 된 녀석이 선생에게 과자 달라는 둥 ‘선생님 사탕 한 개 만’이라고 애교를 떠는 모양새가 영 거북스러워는데 읽다보니 어느새 적응이 된다. 털보 선생님은 광명이가 사탕 한 개 만 달라며 찾아와도 전혀 나무라지 않는다. 어찌 보면 광명이만 주려고 애쓰는 것 같기도 하다. 공평하지 않은(?) 선생님의 모습이 짜증이 나게 할 때 쯤 광명이가 다른 아이와 싸우고 선생님께 혼난다. 광명이는 하루 이틀 싸우는 것이 아니다. 날이면 날마다 싸우고 게다가 못생기게까지 했다. 한마디로 아이들이 꺼려하는 비호감이다. 그런데 그 아이를 멀리 하지 않는 아이가 단 한 명 있는데 짝궁 김준이다. 얼핏 보면 어른이나 아이들 모두 싫어 할 것 같은 광명이에게도 나름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고 가끔은 광명이도 착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때 준이가 이런 광명이의 착한 마음 다 알아 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같은 반 친구들도 조금씩 바뀌어간다. 아니 사실은 다른 아이들도 원래 그렇게 착한 마음을 가진 아이들이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아이들에게 어쩐지 아빠 같기도 한 털보선생님도 너무나 멋진 선생님이지만 광명이의 슬픔을 함께 느끼고 도움을 주려하는 반 아이들도 무척 귀엽고 멋지다. 그리고 광명이의 진짜 마음을 볼 줄 알았던 준이도 멋지고, 무엇보다 이 글을 쓰신 송언 선생님은 더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책 뒷부분에 지인이의 말을 읽으니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된 광명이가 얼마나 학교 다니는게 힘들었으면 4년전 담임 선생님에게 전활르 다했을까 싶다. 그런 광명이에게 송언 선생님은 조금만 참으라고, 힘들어도 참으라고 한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선생님이랑 한번 만나자고한다.

얼마전 끝나 TV프로그램 K팝스타 마지막회에서 심사위원 박진영이 6년간 심사를 하며 느낀 소감을 이렇말로 대신했다.

“K팝스타 우승자 6팀 중에 한국에서 중고등학교 정규교육을 똑바로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대부분 가정에서 교육을 받거나 자유로운 환경에서 꿈을 그리고 자기 세계를 펼쳤고 이 대회만큼은 노래 잘하는 친구들을 뽑지 않았어요.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자기 목소리로 노래하는 사람을 뽑았어요. 누가 대통령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이 한 명 한 명 특별한 아이들이 놀라운 창의력을 가지고 커갈 수 있게 교육제도를 잘 만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박진영 심사위원의 마음에 머금은 눈물 한 방울을 본 듯하다. 아마도 송언 선생님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 송언 선생님은 오광명을 통해 아이들의 마음 속에 동심의 하느님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 책을 읽는 아이들이 오광명의 마음 속에서 깨끗한 동심을 발견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아이 같은 마음씨만 이 땅에 희망을 꽃피운다고.

송언 선생님은 학교 다니기 힘들어 초등학교 2학년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13살 광명이에게 힘내라고, 잘한다고 진심으로 응원해주기 위해 이 책을 썼나보다. 아마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요즘의 모든 아이들에게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모든 아이들이 힘을 내면 좋겠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모든 어른들이 이 땅의 모든 오광명에게 진심으로 응원을 해주면 좋겠다. 이 책이 2008년에 나왔으니 오광명은 지금쯤 스무 두어 살 쯤 됐겠지? 송언 선생님은 어른이 된 오광명을 만났을까? 궁금해진다. 이 책의 주인공 오광명을 나도 만나고 싶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조혜진

마을에서 증여와 선물로 살아가는 생활체험기-6


자원봉사, 사람과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선물 



\“볼런티어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웃사랑을 위해 신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대, 너희들은 단순히 오늘 4시간, 자원봉사 시간을 때우러 온 게 아니야, 오늘 자원봉사하는 4시간이 오늘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몰라, 또 지역사회가 좀더 나아지도록 하는데 조그마한 영향을 끼치는 일이라면 너무 대단하고 멋진 일 아니겠니?”

독산3동 꿈꾸는 녹색장터 자원봉사를 하러 온 고등학생들에게 한 말이다. 자원봉사는 내가 사는 지역사회,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이라 할 수 있다. 내 재능과 시간을 아무런 대가없이 제공함으로써 지역사회를 변화시키고 만나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매월 두 번째 주 토요일에 핸드드립 도구를 싸매고 꿈꾸는 녹색장터에서 ‘꿈다방’을 운영한 지 4년이 되어간다. 5년 전 어쩌다 배우게 된 바리스타 교육, 교육 이수 후 나의 목표는 1년에 나의 몸무게만큼의 원두를 내려서 사람들과 함께 마신다였다. 사정이 가능하다면 핸드드립 도구를 가지고 다녔다. 회의를 하거나 사람들을 만날 때 원두를 갈고 꿈꾸는 녹색장터, 해노리장 등에서 드립커피를 판매했다. 물론 그 수익은 그 사업 목적에 쓰여지도록 전액 기부를  해왔다. 사실 살을 빼지 않는 한 1년에 55키로 내외의 원두를 내려서 사람들과 같이 마시는 게 쉽지 않았다. 아마도 30~40키로의 원두로 커피를 내리지 않았나 싶다. 5월 13일 꿈꾸는 녹색장터 꿈다방의 첫손님은 70대의 어르신이었는데 공짜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방법이 있지만 좋은 일 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굳이 여기에 와서 핸드드립 커피를 마신다고 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신이 나서 꿈다방의 수익금은 독산3동 중학교 아이들의 교복지원에 쓰여진다. 

또 옆에서 파는 살구회 떡볶이, 김치전 등은 어르신에게 무료 제공하는 따뜻한 밥집 운영비로 쓰여진다. 이렇게 홍보하면서 나는 단순히 2,000원짜리 핸드드립 커피 한 잔을 팔고 있는 게 아니다. 나의 핸드드립 자원봉사와 어르신의 핸드드립 커피 한 잔의 소비가 독산3동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원두를 갈고 커피물을 끓이고 드립을 하면서 전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에게 우리가 왜 자원봉사를 하는지 이야기하고 그가 따뜻한 밥상에 둘러앉은 어르신들과 새 교복을 입게 되는 중학생 누군가를 상상하게 하는 것이 자원봉사자의 소명이다

  자원봉사는 불특정 다수에게 주는 선물이다. 시간과 재능을 대가없이 주는 것, 나와 관계없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그 도움으로 그가 좀더  행복하게 변화되는 것, 이런 무수한 선물들로 지역사회가 좀 더 행복하게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 하나의 사례로 금천구의 여러 단체들이 십여년 동안 진행해온 어린이날 큰잔치를 들 수 있다. 지역의 많은 단체들과 중학생부터 대학생까지 학생들의 재능과 시간이 모여 어린이날 큰잔치가 매년 치러진다. 어린이날 큰잔치의 자원봉사자 수가 100명 이상은 될 것이다. 전 어린이날 큰잔치에서 맘껏 놀았던 아이들이 커서 자원봉사자로 참여하여 동네의 동생들과 놀아주고 있다. 큰잔치에 참여했던 초등학생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게 되는 이러한 사람의 변화, 어린이날 큰잔치가 십여 년 진행돼오면서 지역의 전통으로 자리잡는 지역사회 변화는 십여 년 동안 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대가없이 시간과 재능을 제공하는 자원봉사가 없었으면 이런 변화를 이루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성의없이 주는 선물은 선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자원봉사도 마찬가지다. 허드렛일이라도 볼런티어 정신을 생각하면 이미 허드렛일이 아니게 된다.  아무리 작은 선물이라도 절절한 진심이 담겨있으며 기억에 남는 선물이 된다. 매일, 매주 또는 매월 자원봉사를 하게 되지만 우리는 마음에 새기고 있는가? 내 보잘것없는 재능과 나의 자투리 시간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지역사회를 변하시키는 일이며 이것은 신의 부름에 응답하는 나의 결단이었음을. 




김현미

독산3동 주민

경호가 필요 없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총리로 내정된 이가 경호를 살살 하라는 말을 대통령이 했다고 전했다. 대통령은 경호의 매뉴얼을 넘어 주민과 만나는 모습이 보여 준다. 긍정적인 변화다. 게다가 새로운 대통령은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광화문으로 옮겨 광화문 시대를 연다는 공약도 했다. 그래서 문득 든 생각이 이 글 제목이다.


우리는 촛불을 들어 광장을 이루고, 광장의 촛불은 흘러 역사의 큰 강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강은 ‘청와대’ ‘대통령’ ‘경호’라는 댐에 막혔다. 물은 흐르는 것이다. 자연에서 봤을 때 폭력은 흐르는 물이 아니라 막아 선 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폭력에 저항하는 반(反)폭력'으로서의 댐을 넘으려는 촛불의 강을 폭력이라 낙인찍었다. 역사를 고인 물로 만드는 논리는 거대했고, 물고를 트는 촛불대신 물고를 막는 댐이 법과 질서, 평화 시위, 민주주의가 되었다. 만약 우리가 그때 그대로 주저앉았다면, 촛불은 사회의 불평꾼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새로운 대통령도 못 봤을 것이다. 


한국에서 대통령이 떴다 하면 그 주변 천지사방이 삼엄하고 민생은 공포로 멈춘다. 대통령이 민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민폐의 축(軸)이 된다. 민폐가 법과 질서의 제일 원칙이 된다. 범죄자가 숨은 청와대 압수수색을 막은 것도 법과 질서였다. 흑과 백을 뒤집는 원칙은 종종 ‘무관용의 원칙’이 되는데 그것은 국가의 폭력화 선언이다. 그래서 수천 년 전에 노자도 공자도 법치(法治)는 덕치(德治)만 못하고 덕치(德治)는 무치(無治)만 못하다고 했다. 법 없이 사는 삶이 법대로 사는 삶보다 착하고 평화로운 이치다. 본시 경호는 보호에 있지 격리에 있지 않다. 그런데 한국의 경호는 보호 대상을 대중으로부터 단절시킨다. 경호가 아니라 격리고 배제다. 경호가 단절과 배제로 된 이유는 한국의 지배자들이 정치적 정당성이 없는 독재자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가 죽는 모습으로 자기가 죽을까 두려운 이승만, 쿠데타의 폭력에 중독되어 민중을 가까이 할 수 없는 박정희 군부독재, 광주의 피를 먹은 전두환, 이들은 백성을 개돼지 아니면 자기를 해칠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볼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보호가 아닌 격리라는 극단의 경호가 된 것이다. 


찾아보니 경호의 일반원칙은 경호 대상자를 근접 중간 외곽으로 구분하고 경호를 하는 3중 중첩 경호의 원칙이 첫째요, 돌발적 상황에 대한 순발력과 창의력이 동원하며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두뇌 경호의 원칙이 둘째요, 공격이 아니라 방어가 목적이어야 한다는 방어 경호의 원칙이 셋째요, 경호를 하고 있음을 보호 대상도 대중도 가능한 한 느끼지 못하게 하는 은밀 경호의 원칙이 넷째라고 한다. 근데 그 동안 한국의 경호는 창의력이 없으니 방어 대신 공격, 은밀 대신 으스대는 위력시위의 경호를 했다. 삼업한 경호보다 자연스런 경호, 자연스런 경호보다 경호를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는 경호가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경호가 유지되는 한 대통령과 민중 사이엔 언제나 건널 수 없는 강과 벽이 놓여 있게 된다. 역사를 보면 대통령의 위해는 밖이 아니라 안에서 왔다. 그런데 한국의 경호는 밖으로 위세를 떤다. 군사독재의 문화, 일제 군국 식민주의 잔재의 문화다. 그리고 그런 악습은 승용차를 몰고 기차역 플랫폼까지 밀고 가는 황교안식 괴물을 만들었다.  


이제 새로운 대통령은 광화문시대를 연다고 공약했다. 여기서 광화문은 촛불의 광장으로 광화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관행이 그대로 유지 된다면 대통령의 선의와 무관하게 광화문은 감옥이 된다. 광장이 만든 대통령이 광장 자체를 부정하고 말살하는 비극이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왜냐면 대통령과 그 집무실은 집회 절대 금지 구역에 심지어 축제도 안 되는 금단의 영역이 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망국 매국의 역사가 친일 친미로 이어지는 것을 한탄하며 분단과 증오의 현실에서 “껍데기는 가라”고 호통 쳤던 신동엽 시인은 대통령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고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 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는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곤가 불리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하지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기지도 탱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 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 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경호가 필요 없는 나라는 국민을 적대시 하지 않는 정치로 가능하다. 태극기 휘날리며 미국기에 애국하는 껍데기들이 청산된 나라, 빈곤과 차별, 분단과 전쟁이 증오를 낳지 않는 나라가 필요하다. 사드를 죽어도 반대하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 그 나라에 살고 싶다. 대통령이 아니라 백성의 삶이 경호되는 나라 말이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민주주의의 꽃 탄자니아에도 피어나다




재외국민투표가 4월 25일부터 6일간 치러졌다. 

월요일이 마침 공휴일이라 주말을 끼면 삼일 연휴다. 아프리카에서 치르는 대선, 그 특별함을 놓칠 수 없다는 결연함도 있었지만, 이번 선거는 여느 대선과는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기에 다소 무리한 일정이 되겠지만 강행하기로 했다. 새벽 여섯시에 출발해 덜컹거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 14시간 만에 다르에스살람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음트와라에 있는 루나가 나를 맞는다. 얼마 후 송게아에서 출발한 우리의 프린세스, 와니가 16시간을 달려와 합류한다. 마지막으로 필리가 도착했고, 반주로 맥주 한 잔씩을 겹들인 저녁이 시작되었다. 간단히 안부를 주고받은 후, 자연스레 화제는 선거로 무게 중심이 옮겨간다. 각자의 개성만큼이나 정치적인 성향도 다르다.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와니에서 진보 성향이 짙은 루나에 이르기까지 후보에 대한 선호도는 극명하게 갈렸다. 그러나 더 나은 사회를 지향하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었으므로 쉽게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며 다양한 시각을 나눌 수 있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우리는 대사관을 향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나부끼는 태극기가 보인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가지만 대사관을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다. 이국(異國) 하늘 아래에 휘날리는 태극기는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19층에 내리자 투표소를 향해 뻗은 군청색 화살표가 가장 먼저 우리를 맞는다.


현재 탄자니아에는 약630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는 데, 그 중 300명이 국외부재자투표 신청을 했다고 한다. 내가 210번째 투표자. 

선거인명부를 확인하고, 투표용지를 받아들었다. 기표소 뒤, 창문 너머로 파란 바다가 한가득 안겨온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도 저렇게 파랗고 맑았으면 하는 희망을 가슴에 담으며 기표소에 들어갔다. 잠시 망설인다. 사표 방지 심리가 발동한 탓이다. 당선 가능성이 있는 후보에게로 저울이 기운다. 최선이 없으면 차선, 차선도 없으면 차악을 선택하라고 했지.  화룡점정(畵龍點睛)하는 마음으로 도장을 꾹, 누른다. 용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 잘 봉한 후 투표함에 넣는다. 


선거 자원봉사를 하고 있던 20대 여성에게 물었다. 어떤 기준으로 후보자를 선택했으며, 새 대통령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던 그녀는 재외국민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펼치실 분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 투표했다고 했다. 

단기 파견근무로 나와 있다는 김 동희 씨는 부정부패를 청산하고 불공정한 사회구조를 개선해 살맛나는 사회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신을 코이카 단원이라고 밝힌 현주 씨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사람 사는 사회가 아니었느냐고 짓궂게 묻자, 진짜 말도 안 되고 상식이 안 통하는 사회에 사느라 힘들었단다. 정권교체를 염두에 두고 선택했지만, 누가 되든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면 무조건 지지하고 응원하겠단다.    

 

작년 11월부터 4개월 가까이, 주말마다 박 근혜 전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1300만 명이 넘게 참여했다고 하는 촛불집회. 손에 손에 촛불을 든 장면들을 친구들은 인증샷이라며 이곳으로 전해 왔다. 외신을 통해 이런 소식을 접했던 이곳의 동료들은 나를 걱정하며 말했다.


“소피아, 너의 나라 괜찮은 거야? 매일 데모하던데...”


나는 그럴 때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겠느냐며 웃곤 했다. 

4개월에 걸친 집회에서 단 한 건의 폭력이나 불법 행위도 없었고, 강제 진압이나 연행 역시 없었다고 하니 말이다. 또한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모인 광화문 광장에 다음 날 쓰레기 하나 없었다고 하니 대단하지 않은가! 혹자는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저항 정신을 이렇게 완벽히 구현한 사례는 이전에 없었다고 평하기도 한다. 또한 프랑스 정치학자 토크빌은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걸 맞는 정부를 갖는다’, 라고 했다. 촛불 시위는 우리 국민의 수준을 확인시켜 주고 진정한 민주주의란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 아닐까? 

이 글이 신문에 실릴 즈음이면 청와대는 새 주인을 맞이했을 것이다. 장미대선이란 아름다운 이름에 어울리는 지도자가 새 주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장미대선을 있게 한 힘, 촛불 시민 혁명을 성공시킨 유권자들의 힘을 믿는 까닭이다. 



 5월8일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장제모 칼럼]이 땅의 보수(保守),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19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이번 선거는 임기가 남은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데 따른 보궐 선거라 세인들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은데 비해 선거 기간이 짧은데다 다자 경쟁 구도가 되어 치열한 선거전이 펼쳐지는 등 역대 다른 대선과는 여러 모로 다른 선거 행태를 보였다. 특기할 것은 유력 후보들이 보수와 진보를 내세워 상대를 공격하는 등 어느 때 보다 격렬한 이념 논쟁을 펼친 선거였다


보수를 내세우는 후보들은 자기 논리로 재단한 이념으로 진보성향의 상대 후보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였는데 그 기세가 여간 당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른바 촛불 민심이 탄핵국면을 끌어내었고 마침내 결정이 되었는가 하면 범죄로 인정되어 그 책임당사자인 대통령이 법정 구속까지 되었는데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보수를 자처하는 시민들은 촛불민심에 맞불작전의 대응으로 탄핵 된 그들의 대통령을 옹호하는 충성심을 보이는 등 그들이 스스로 정의한 보수이념을 유감없이 행동하였다.


그런 반면 진보로 보는 세간의 시각을 굳이 부정 않는 측에서는 자기정체성의 표현을 보수 측과 비교할 때 다분히 소극적이다. 이는 아마 현재 우리 사회의 보수 정서를 감안한 전략적 접근으로 보인다. 더 정직하게 말하면 표 관리를 하고자 몸조심을 하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앞으로도 정치를 계속하려면 이런 상황에서도 자기 신념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용기와 지혜를 갖추기를 권한다. 진보를 내세우는 곳에 우유부단은 격이 맞지 않는다.

보수 이야기를 계속하자. 보수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선입견을 가진다는 오해가 수 있지만 이번 선거에서 표출된, 보수를 자처하는 몇 후보자들의 논리는 수용은커녕 듣기조차 역겨운 경우가 있었다. 대통령의 탄핵 결정을 불법이라 하는가 하면 도리어 그러한 결정을 한 당사자들을 범법자로 몰아세우는 것이 그것이다. 시민들은 광장에서 촛불을 들어 의사를 표현하였고, 국민의 대의기구인 국회가 이를 수용하고 탄핵 결의를 하였으며, 국민들이 헌법적 권위를 인정한 헌법재판소가 그 결정을 완성 하였는데도 이를 부정하는가 하면 그러한 결정이 있게 한 모든 시스템을 친북 좌파로 매도하는 상식 밖의 행동을 했다. 




보수든 진보든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자기주장을 해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진실은 진실이고 거짓은 거짓이다. 정치적 목적이건 개인 신념이건 진실을 호도하는 것은 자기기만이 될 뿐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이런 모습은 행위자의 소양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배경이 된 국민정서가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는 것은 이 땅 민주주의의 수치다.  


유의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정서는 그 숫자가 많지 않다 하더라도 지속적이 되면 공동체의 평화에 위협이 된다는 점이다. 국민 밑바닥 정서의 안정을 흔들게 되기 때문이다. 다중(多衆)은 작은 충격으로도 폭풍을 생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수가 지향하는 가치인 안정(安定)은 이런 상황에서는 제 모습을 가질 수가 없다. 분명히 말하건 데 이런 사고(思考) 즉 진실과 거짓을 자기 스스로 혼동하는 자들이 정치가로 행세하는 곳에는 발전도 어렵지만 안정을 기대할 수가 없다. 철학 없이 보수를 주장하는 이들은 명심하여야 한다. 


이런 철학부재의 보수주의자들 있다 하여 보수 이념을 주장하고 그것을 지키려는 세력을 나쁘다 하지 않는다. 누가 보수의 가치를 재단한다 하여 그것의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보수의 궁극 지향은 평화이고 그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재삼 말하지만 보수를 싫어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사고에 의해 생성된 세상의 보편가치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려하는 것은 이 땅의 보수 세력을 자처하는 자들이 자기 재단에 의한  논리로 보수를 치장하고는 사실을 왜곡하여 혼돈을 부르게 되면 보수의 본질이 감춰지고 그것은 곧 평화를 해치게 됨을 경계하는 것이다.


보수를 이해해 보자, 보수(保守, conservatism)의 사전적 의미는 ‘전통적인 것의 옹호’이다. ‘전통’이란 특정 공간(국가, 지방)의 구성원들의 사회생활에 의해 형성된 질서가 관습이 되면서 이루어진 보편개념이고 그것을 존중하는 자를 보수주의자로 보는 것, 곧 보편개념을 존중하는 자가 보수주의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보편개념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가? 특정 공간 구성원들의 사회성에 의해 형성된 그것은 그 구성원들에 의해 가치로 이해되어 구성원들이 긍정하는 이념과 사상의 배경인 것, 곧 지켜야 할 가치라 이해를 한다. 


그런데 유의해야 하는 것은 보편개념은 보편개념일 뿐이다. 즉 시공(時空)의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우기가 잦은 곳(때)과 반대로 가뭄이 심한 곳(때)의 물을 보는 사람들이 가지는 가치는 다른 것이 그것이다. 사회성에 의해 생성된 가치를 불변으로 하는 것은 오류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사회성에 의해 생성된 가치가 곧 진리는 아니라는 것, 과거의 선(善)이 오늘에도 항상 선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렇듯 인간의 사회성에 의해 형성된 가치는 인간에 의해 부정당할 수가 있다. 그러나 보수를 주장하는 모든 이를 이런 사례를 앞세워 질책하고자 함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을 했지만 보수의 본질은 안정이고 그것은 평화가 기조(基調)이기 때문이다. 


공자님 말씀 중에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말이 있다.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안다.’(논어 위정편<爲政篇>)는 뜻으로, 과거의 가치를 이해하여 오늘에 이르러 그 가치를 존중하면서 새로이 생성되는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은 지혜라고 이해를 한다. 과거의 가치를 지키는 것만이 선이라 고집하는 사람은 새겨들어야 할 경구(警句)다. 인간은 사유(思惟)하는 동물인 만큼 유연한 사고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교훈이 아니겠는가?


다시 현실을 본다. 엄연한 사실, 즉 사안의 본질이 객관적으로 증명된 것을 자신이 설정한 논리나 이념에 반한다 하여 그것의 사실성을 부정하는, 이번 선거에서 보수를 내세우던 자들의 본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분명 자기 이해에 배치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이들은 진리라 해도 자신의 이해와 충돌을 하면 부정하게 될 것이다. 진리는 부정한다 하여 그것의 가치가 변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진리는 영원이 속성이다. 그러나 관습 곧 인간의 사회성에 의해 생성된 보편개념은 진리가 아니므로 영원할 수가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좀 엉뚱한 사례를 들어본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에 사람의 생활권에서 먼 곳에서 말(馬)을 뺏는 것은 교수형의 죄로 하였다. 광막한 광야에서 말을 뺏는 것은 곧 사람을 죽이는 행위로 보아 살인죄를 적용하는 것이다. 인간의 보편가치인 정의가 그 배경이 된 것으로 이해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그것의 정당성은 과거와 같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정리를 해보자. 보수든 진보든 인류의 번영과 평화를 구하고자 하는 수단 일뿐 그것을 진리라 하는 것은 오류다. 두 이념은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깊은 성찰을 통해 보면 서로를 보완하는 일방이다. 보수든 진보든 인간의 사회성에 의해 생성된 이념이고 그것은 각각의 영역에서 가치를 가지지만 그것으로 진리가 되지 않는것이다. 그러나 다른 두 이념 곧 보수와 진보가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 것은 진리라 보아 무방할 것이다! (♣2017.05.12.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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