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역사적 정통성 또는 정체성

 

지난 12일 역사문제연구소와 역사학연구소, 한국역사연구회가 주최한 `국가 정통론의 동원과 ‘역사전쟁’의 함정’ 주제의 학술회의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보수, 개혁 모두 집권 세력이 과도하게 역사인식에 개입하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선한 정치권력이라도 역사 오용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말을 고민해봐야 한다.”며 현 정부의 국가·민족주의적 역사 정책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역사적 사실과 다른 ‘임시정부 신성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다. 이것은 자칫 극우 반공주의자들의 1948년 건국설과 함께 “국가주의를 강화하는 역사전쟁”이 된다는 비판이다. 시쳇말로 ‘내로남불’하지 말자는 이야기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인들이 꼽는 존경하는 위인 1위가 백범 김구다. 상해 임시정부를 지킨 상징에 미국과 이승만의 남한의 단독 분단정권 수립 책동에 반대하여 남북 좌우를 합쳐 통일을 외친 그의 삶이 만든 힘이라 생각한다. 3.1운동 이후 민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나라 건설의 상과 평화 통일에 대한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을 온전히 보여주는 인물, 그러니깐 반공 반사회주의 분단광기를 넘는 거의 유일한 분단극복의 상징 위인이 백범이란 말이다. 
백범은 분단에는 ‘자주와 민주’도 없고, 대중은 기아에 빠지고, 가정은 이산하고, 동족은 상잔하며 심지어 세계의 평화도 없다고 갈파했다. 한반도에서 통일 독립 정부를 세우는 것은 세계평화의 초석이며, 세계평화를 우리 손으로 창조하는 영광이자, 인류의 행복이라 했다. 
실제로 친일친미의 힘으로 단선단정으로 분단을 획책한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역사적 전통성 차원에서 따지는 것은 항일무장투쟁과 김구를 포함해 좌우를 망라하고 분단반대와 통일을 외치며 수립된 북한과의 비교에서 역사적 양심을 저버리는 노릇이다. 우리 헌법에 국가 정통성의 근거를 3.1운동과 4.19로 두고 있지만 3.1의 반제자주정신과 4.19의 반독재 민주주의 정신이 2019년 대한민국 현실에서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지 살펴보면 나는 저절로 얼굴이 창백해진다. 
남한의 현대사는 정통성이 아니라 정체성을 챙겨야 한다. 3.1의 반제자주정신은 미국 등과의 관계에서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 4.19 반독재민주정신은 독재와 민주의 역사를 제대로 가르고 기리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 역사를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자세다. 그래서 나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48년 건국으로 보는 것을 반제 자주 독립의 역사도 거부하고, 반독재 민주화 정신도 목 졸라 죽이는 가장 치명적인 반역사적 행위로 본다. 무슨 역사해석의 다양성이 아니란 말이다. 분단과 독재와 부정부패, 그것에서 권세를 누리는 반칙과 특권세력의 차별에 맞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고, 여전히 대한민국이 채우지 못한 진정한 민주주의 자주와 통일을 만들어 가는 우리 민주 시민들, 노동자 민중들의 투쟁의 역사, 4.19, 6.3, 80년 광주, 87년 6월 항쟁과 789 노동자 대투쟁, 97~8년 날치기 총파업, 효순이 미선이 촛불항쟁, 광우병 촛불 그리고 탄핵촛불까지 불의의 적폐를 도려내고 불의정권을 교체하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한발 한발 전진시킨 역사가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과 정체성을 구현해 왔다고 믿는다. 48년 분단 정부수립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발전시킨 면에서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워야 한다는 말이다. 이 글을 쓰는 중에 들려오는 14년간 부당한 정리해고, 그 사법 농단에 맞선 콜텍 노동자 투쟁 승리 소식이 보여주는 ‘끝끝내 포기하지 않는 아래로 부터 약자들의 투쟁과 연대’가 대한민국 역사에서 자긍의 근거, 역사적 정체성의 고갱이라 믿는다.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기고] 현대 시장의 사람냄새



김산복님은 오랫동안 현대시장 근처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시면서 마을과 큰 인연을 갖고 계시다가 은퇴하셨습니다. 여전히 주변을 챙기시고 자주 외국 친구들을 만나러 먼 길을 떠나기도 하십니다. 안성구님과 결혼하여 신혼집을 삼림빵 근처에서 마련하신 이후 금천에서 3녀1남을 키워 분가시킨 우리 동네 어르신입니다.


이 글은  마을잡지 ‘닮다‘에 기고된 글입니다.



70년대는 격랑의 시대였다. 날마다 땅값이 요동쳤고, 개발이 회오리바람처럼 급속도로 진행되었던 시대였다. 그 때 독산동도 개발되어 지금의 주택지가 형성되었고, 이곳 시흥동도 20m 위쪽으로 그 무렵에 새로 들어선 주택단지들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현대 시장과 시흥 초등학교를 중심한 지금의 시흥 1동은 오랜 역사를 간직해 온 곳이다. 경기도 시흥시 일부가 우리 동네에 속해 있었으나 인구의 팽창으로 시흥이란 이름을 갖고 경기도로 편입되었고, 우리 시흥동은 서울 시흥동으로 그 고유한 이름을 간직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이러한  역사가 깊은 곳에 당연히 대명시장이 금천구의 대표 시장으로 불릴 만큼 버젓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20m위로 주택단지들이 들어서면서 현대 시장의 골목에 많은 유동 인구가 오가게 되면서 부터 가게가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여 오늘의 현대 시장이 되었다. 행정 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시장으로 세운 곳은 대명시장이고 이 곳 현대 시장은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곳이다. '현대' 라는 이름도 오랫동안 역사를 간직한 대명시장에 비교되는 어감으로 새로 형성되어가니까 '현대'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불렸다. 그래서 시흥의 대명시장과는 달리 시흥 사거리입구에서부터 20m 도로까지 길게 골목으로 형성 되어 있다.


 이렇게 자연적으로 형성된 곳이기 때문에 가게 주인들이 처음부터 물건을 싸게 팔았다. 그런 이유로 나중에는 현대 시장에 가면 상품이 싸고 좋다는 입소문이 주위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안양, 광명, 독산동과 다른 먼 곳에서까지 이곳으로 시장을 보러 온다. 그렇기에 현대 시장이 비록 골목 시장이긴 하지만 활력이 넘치고 언제나 사람들로 붐빈다.  


일반적으로 계획된 시장들은 4각형으로 되어 있어서 물건을 사려면 이곳저곳을 찾아 다녀야 하는 데 현대시장은 하나의 골목이어서 입구서부터 끝까지 골목을 따라 올라가노라면 의류, 채소류, 과일, 식품 등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 갖추어져 있어서 쇼핑하기에 너무나 좋다.


 현대시장은 쇼핑도 하고 구경도 하면서 시장 특유의 생동감과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면서 '사람 냄새'가 나는 정겨움을 만끽하게 되는 곳이다. 굳이 쇼핑을 안 하더라도  퇴근길에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삶의 향기를 느낄 수 있고, 다른 곳 사람들이 와서도 논스톱으로 한 번 쭉 올라갔다가 내려만 와도 활력을 얻을 수 있다.다른 곳은 쇼핑이 목적이어서 가는 곳이라면 현대 시장은 쇼핑도 하면서 사람 사는 냄새를 맡으러 가기에 좋은 곳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서울 시내에서 이런 형태의 시장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1자형 골목시장. 자연적으로 형성 된 시장. 물건 값이 싸고 좋은 시장. 사람물결이 출렁이는 시장. 가게 주인들이 친절하고 정이 많은 시장.

이런 특징이 있어 주위에 대형 마트가 들어서고, 상권이 분산되도 현대 시장은 항상 시장특유의 열기로 넘쳐난다. 날마다 삶의 뜨거움이 응집되어 솟구치는 이곳의 열기는 도시를 살리는 기폭제다.




김산복 

수필가, 여행가.

글을 잘 써 보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그러나 글은 꾸준히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해당 기사는 마을잡지 ‘닮다‘에 기고된 글입니다.>



위원회?! 


위원회는(Committee)는 수직 위계적 조직에 비교되는 수평화 된 조직을 통칭한다. 지시 명령 관철이 아니라 다수에 의한 합의결정이라는 점에서 관료적 경직에 치우치는 효율성의 세상에 다양성과 존중이라는 민주주의 제동장치로서 조직이다. 행정의 민주성과 조정력을 제고(提高)하고 전문가의 참여로 행정의 전문성을 더할 수 있는 분권적·참여적 조직이 위원회다. 주로 경제적·사회적 규제업무를 수행한다. 돈과 권력의 일방적 폭력 질주를 막는 수단으로, 유기적· () 또는 반()관료제적 조직이 위원회의 존재 이유다.

 

일전에 국가생명윤리위원회 민간위원 한양대 예방의학 신영전 교수는 위원직 사직서를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대통령소속 위원회인 국생위의 심의 의결 내용도 무시하고 향후 국생위를 우회하려는 전략 (이른바 한발 들여 밀기 기정사실화 전략)으로 국생위를 안전망이 아니라 적폐의 선한 가면, 들러리로 만들고 있다는 것에 항의하여 민간위원으로서 존엄을 걸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위원회의 본연의 본질을 뒤엎어 위원회를 관료와 권력들의 민주주의를 장식물로 삼고 있는 한국적 위원회 현실에 대한 폭로이자, 돈과 권력의 힘, 관료와 정치인들의 거수기로 삼는 것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러니깐 한국에서 위원회는 민주주의의 든든한 힘이 아니라 민심을 왜곡하고 적폐의 등뼈 역할을 한 한국 관료들의 민주주의 치장 가면이 되었다는 말이다. 최근 사회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있다. 돈과 권력은 언제나 자기 손에 피를 무치지 않고 앞잡이를 쓴다. 일본 놈들이 친일파를 육성하는 것처럼, 자본이 무노조를 하다가 노조가 만들어지면 어용화에 목숨을 거는 것처럼 말이다. 노동권의 부정을 유연 안정성이라 부르는 현 정권에서 상여금을 없애는 최저임금, 시간외 노동 수당을 없애는 탄력근로제 개악, 그리고 노동3권을 뿌리 채 뇌사시키기 위한 이 위원회의 위원장은 민주노총 금속노조 위원장이자 민주노동당 당 대표 출신 문성현이다. 자기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배신이자 치명적인 파괴 폭력임도 모르는 이 주구들은 정말 열심히 돈과 권력의 이해에 최선을 다한다. 세상에서 가장 흉측하게 무서운 존재 성실한 기회주의자로 말이다.

 

문성현은 청년 여성 비정규직 위원들(이들이 얼마나 온화한 친정부인사들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의 가냘픈 경고조차 외면하고, 위원회의 본 의미조차 배제하고, ‘합의는커녕 본 회의 통과라는 형식적 모양도 결여된 탄력근로제 합의(?)문을 국회로 보낸다며, “국회에서는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를 놓고 의제별위원회와 운영위원회 합의결과를 존중해 입법해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은 비례대표제를 아예 없애자는 자유한국당 나경원의 말만큼 처참한 민주주의 파괴 부정의 망동(妄動)이다. 한국적 위원회가 국민 눈속임 수단임의 선언이다.

 

정부의 입장을 관철하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정부의 곤혼스런 부분을 면피하게 해 준 이른바 숙의민주주의의 가면 원전 공론화위원회, 그리고 위원회의 반대에도 우회 관철한 국가생명윤리위원회까지 한국에서는 위원회가 관료들의 면피(免避)와 전문가들의 돈주머니 노릇을 하는 반()이 아닌 반() 관료조직이다. 사탄의 얼굴에 씌워진 인자한 가면이자 사탄의 손에 쥐어진 성경이 되고 만 한국적 위원회다.





문재훈 소장

남부노동상담센터


가엾어라! 고마워라! 눈물이어라!


이소선 어머니의 구수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편하게 웃다가도 나중에 가슴 한 쪽이 시큰한 경우가 많았다. 그 중에서 태일의 뜻을 잇다보니 태일이만 자식이냐는 어떤 소외감에 아픈 다른 자식들에게 소홀했다는 탄식도 있다. 전체 노동자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실제 자식들의 현실이 붕괴되는 것, 그 붕괴된 고통을 대한 자식들의 비명 신음, 사람들의 눈초리와 시비, 아주 작은 혜택으로 쉼 없이 태일이의 길을 포기하라는 돈과 권력의 유혹... 그 속에서 자식이 산 세상 시간보다 두 배를 넘게 자식의 뜻으로 산 이소선 어머니의 가슴은 얼마나 까맣게 타 문드러지는 세월이었을까? 그리고 2019년 우리는 또 이제 또 한 분의 이소선 어머니를 만났다. 태안 서부화력 발전소에서 비정규직으로 일을 하다 목이 분리되고 몸이 바스러져 죽은 김용균 열사의 모친,김미숙 어머니다.      


두 어머니의 특징은 정말 자식을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가 강고하게 쳐둔 그물을 찢고 나섰다는 것이다. 열사는 시대의 어둠을 두드리는 자명종 소리다. 새벽을 알리는 닭울음소리다. 누군가의 아침을 깨워 세상의 아침을 열자고 제 몸을 역사로 직진시킨 분이고, 죽음으로 불의 부당한 세상을 바꾼 분이다. 하지만 모든 죽음이 열사의 죽음이 되기 어렵다. 태안 서부화력에서 몇 년간 12명이 죽어 나갔다. 하지만 우리는 11명의 죽음을 알지 못한다. 알 수 없었다. 돈과 권력이 쳐 둔 그물을 찢을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용균 열사는 다행히 노조가 있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만났고, 무엇보다 자식의 죽음을 자식에 대한 진정한 사랑으로 견딘 유가족들, 특히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 상담을 하는 나는 상담을 온 분들에 대해 기본적인 느낌은 ‘고마움’이다. 우리 상담소까지 왔다는 것은 해볼 것 다 해보고도 아무것도 할 것이 없어 덮친 절망을 한 번 더 이기고 오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해고는 참 쉽다. 쉽고 흔한 해고를 법대로 하자고 하면 어려운 해고, 노동귀족, 진상 근로자(노동자가 아니다.)가 된다. 실제 해고 통보를 받은 이 중에 부당함에 구제신청을 하는 사람은 30% 미만이다. 구제신청을 하고도 외면을 받아 법원까지 가는 것은 그 30%의 30%도 안 된다. 10%도 안 되는 정말 억울하고 분한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법적 시비를 다툰다. 이것도 많다고 돈과 권력은 ‘경직된 노동시장, 귀족노조’라며 노동유연화라는 마귀의 주문을 외운다. 3% 소금물이 바다의 부패를 막 듯, 10%의 불의에 불평을 한 불편한 사람들이 자본의 탐욕 아래서 최소한의 사람됨을 지키는 힘이다. 이 힘을 만드는 사람들, 그러니깐 생의 한 용기를 낸 사람이 상담을 하러 오신 분이니 어찌 귀하고 고맙지 않겠는가? 한국인은 지배하는 생각은 참 많지만 그 중에 힘이 센 놈이 ‘비겁하게 살라’는 기괴한 사랑이다. 모난 돌이 정 맞으니 용기를 내면 너만 다치고 그도 모자라 온 가족이 피해를 받는다는 공포가 만든 것이, 사랑인 곳이 대한민국이다. 그와 함께 따라 붙는 것이 ‘목구멍이 포도청, 산 사람이라도 살자’는 지독한 현실주의다. 비겁한 사랑과 현실주의가 붙어 버리면 도대체 그 앞에서 남아나는 고귀한 것이 없다. 대의 의리 원칙 그 모든 인간적 존엄들은 그저 생존의 사치일 뿐이다. 그래서 삼성자본은 노조를 따돌리고 유가족을 꼬여 돈으로 열사의 죽음을 화장하고 시치미를 뗀다. 유가족들은 가장 슬퍼 예민한 사람들이다. 노조나 주변 동료가 죽은 이의 동지가 아니라 죽음으로 가는 용기를 만든 나쁜 이들로 원망이 앞서고, 죽음의 사회적 확장에 엄두를 못 내다가 경찰과 자본의 ‘산 사람이라도 살아라.’는 속삭임에 아주 쉽게 용기를 포기한다. 그래서 실은 열사의 죽음을 둘러 싼 투쟁은 끔찍하게 힘들다. 이 힘듦을 견딘 김용균과 그 동료 동지들, 공공운수 노조나 연대 노동사회 단체들 정말 하나하나 우리사회 속에서 고맙고 고마운 존재들이다. 


이소선어머니와 김미숙 어머니의 공통점은 자식에 대한 사람을 자식의 염원 속에서 발견했다는 점이다. 태일이가 ‘내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할 때, 헛되이 하지 않는 것이 이 깜깜한 세상에서 불빛 하나를 만들 바늘구멍 하나 뚫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 말과 약속을 생을 통해 실현한 이소선 어머니의 사랑은 태일에 대한 절박한 존중이다. 김미숙 어머니는 비정규직의 비참을 중단시키기 위해 재벌만 만나는 대통령에게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직접 만나달라는 유언이 된 한 장의 사진에서 용균이의 염원을 봤다. 그 마음으로 여전히 죽음의 조건을 그대로 유지 한 채 돌아가고 있는 죽음의 현장을 보자마자 용균이의 친구들을 죽음에서 구출하는 것이 바로 용균이의 뜻이자 용균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임을 아셨을 것이다. 자식을 가족의 울타리에 가두지 않은 용기, 그래서 돈 몇 푼에 자식의 뜻과 자식의 생이 만들 존엄을 포기하지 않는 곳에서 자식에 대한 사랑을 세운 분이라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어머니는 광화문 장례식에서 “꽃다운 아까운 청춘 가엾어라 내 아들아!” 불렀다. 저 가엾음이 저 애끓는 연민이 바로 우리 사회 어둡고 춥고 약하고 아픈 이들을 향한 가없는 사랑의 뿌리다. 고마워라! 나이 어린 우리들의 어머니, 그 사랑의 슬픈 용기여! 그 날 그 자리에 하늘은 한 없이 푸르렀지만 눈물은 그 푸름마저 다 지워버렸다. 아직 우리가 갈 길은 여전히 눈물길이라고...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빵은 사랑이다 X 뮌헨 브뢰체


 빵Lover의 세 번째 금천 여행지 "뮌헨 브뢰체"



금천문화재단_금천문화링크 Love는 금천의 LOVER들이 마음껏 LOVE 할 수 있는 금천을 꿈꾸며 다양한 취향의 시선으로 금천의 곳곳을 담아보려 합니다. 덕후란 일본어 오타쿠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오덕후'의 줄임말로, 현재는 어떤 분야에 몰두해 전문가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아마추어 : 아마추어(amateur)란 라틴어로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amor)에서 유래된 말로 아마추어는 전문적 권위나 승진과 관계없이 진정으로 그 일을 사랑하는 사람, 스스로 좋아하며 그 일을 즐기는 사람을 뜻하지요. 하지만 소위 전문가로 자칭하는 사람들이 등장한 후, 아마추어는 상대적으로 얕보이는 단어로 변질됐습니다. 이제 본격 '덕후', '아마추어(애호가)'를 위한 금천문화링크 시리즈!

빵을 사랑하는 빵Lover가 빵집따라 금천을 여행한다!  빵Lover의 세 번째 금천 여행지 "뮌헨 브뢰체"




시흥유통센터 정류장으로 많은 버스가 오고가는 시흥대로.

횡단보도 바로 옆에는 시흥3동의 맛있는 빵집을 담당하고 있는 뮌헨 브뢰체가 있다. 시흥3동, 박미마을에 갈 때마다 자주 들렸던 곳. '뮌헨 브뢰체'는 어릴 때 자주 갔던 동네 빵집을 떠오르게 한다. 오랜 시간 그 곳에서 자리를 지키며 같이 나이를 먹어가는, 동네에 하나씩 있을 법한 그런 빵집.

'뮌헨 브뢰체'는 아담한 규모의 빵집이지만 속이 아주 알찬 빵들로 가득하다. 동네 단골 손님들이 많은데 특히 모카번이 인기빵이라고 한다. 누네띠네, 마늘빵, 슈크림빵 등등 보기만해도 달달함이 떠올라 기분 좋아지는 빵들이 많다. 100% 유기농 밀가루만 사용한다는 '뮌헨 브뢰체'.





빵Lover가 빵집을 찾았을 땐 바게트가 없는 것 같았는데, 게시판에 친절하게 써있었다. 

'바게트는 화, 금만 나옵니다.' 

오늘의 빵Lover's Pick은 공갈빵과 누네띠네 그리고 모카번.

빵Lover는 가격도 착하고 맛도 좋은 빵들 중에서 특히 공갈빵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프랜차이즈가 넘쳐나는 요즘, 찾아보기 어려운 공갈빵을 만나 매우 반가웠는데 맛을 보고나니 기분이 더 좋아졌다는 후기를 전한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뮌헨 브뢰체'의 문은 활짝 열려있으니, '너무 이른/늦은 시간에 열려있을까?'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언제 가도 당신을 따뜻하게 맞이해줄 것이다. 마감세일시간인 저녁 10시 15분에서 30분 사이에는 당일제품을 할인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다고 하니 참고하면 좋겠다.






*뮌헨 브뢰체

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대로72

영업시간 : 매일 AM 8:00 - PM 11:00 둘째, 넷째 일요일 휴무


양당 담합을 깨고 다당제 현실화를! 




한국 정치에서 제3당이 발전과 혁신을 하지 못하는 근본적 원인은 경쟁을 할 필요가 없는 양당 담합 정치구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과 민주당은 두 회사가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구조와 같다. 과연 두 거대 정당이 둘 모두의 이익을 해칠 수 있는 혁신을 할 것인가? 예상 되는데로 두 정당은 혁신은커녕 끈끈한 담합을 통해 기득권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왜 그런가? 경쟁이 없기 때문이다. 유효한 경쟁, 효과적인 경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민이 정당과 멀어지고 정치인들이 서민들과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정치는 다양화 되지를 않고 시장에는 2가지 제품밖에 없어 서민들의 불만족은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제3당의 출현을 통해 양당구조를 깨는 것이 한국 정치를 바꿀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했기에 제3당에 합류하게 되었다. 총선결과 국민들께서는 야권연대가 이뤄지지 못하면 적어도 수도권에서는 야권이 필패할 것이라는 공식마저 깨버리고 전략적 투표를 통해 제3당을 만들어 주셨다.

선거제도가 바뀌지 않았는데도 양당 기득권을 깨고 3당 체제를 출범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표심을 확인한 정치권은 기존 선거제도부터 바꾸겠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고 3당 체제가 안착된 이번 기회를 살려 유권자의 표심을 정확하게 반영할 다당제를 제도적으로 뒷밤침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두 거대 정당의 담합과 기득권에 가로 막혀 있는 상황이다. 

결국 제도 개혁 없이는 양대 정당의 기득권을 깰 수가 없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절박감과 필요성이 제3당을 만들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민심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다.지방의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지방자치 현장도 예외는 아니다. 주민의 이익보다는 양당의 당리당략에 담합하는 모습을 보면 자괴감이 든다.

선거제도의 개혁 없이는 제 3당은 성공할 수가 없다. 제도로서 보장되지 못하면 제3당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협치와 소통이 구호로서 끝나지 않으려면 선거구제 개편은 반드시 필요하다. 선거구제 개편으로 다당제 근간을 만드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이다. 머뭇거리는 정치권을 압박해 선거제도를 바꾸는 것은 결국 여론이다.그 어느 때보다 국민의 관심이 필요하다.


바른미래당

금천구의원 김영섭


칭찬(稱讚)과 아부(阿附)




연말이 되면서 여기저기서 초청이 온다. 종무식이나 송년회 알림인데 가볼만한 곳을 가보니 유사한 행사들 일색이다. 마침을 마련하는 자리여서인지 그해에 수고한 구성원에 대한 포상(褒賞)이 주요 행사다. 

포상은 사람들의 사회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한 모습이다. 통념적으로 그것이 시사(示唆)하는 바를 알고 있기에 누구든지 그 시행취지에 공감과 함께 긍정성을 객관화 하는 행사인 것이 그것이다. 수고한 분들에게 응분의 보상으로 예우를 하는 것은 보기에도 아름답고, 수상 당사자가 아니라도 그 모습들이 흐뭇한 것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부정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공동체의 이러한 포상은 칭찬의 공(公)적 표현으로 그것을 다중과 함께 함으로 받는 이의 공적(功籍)을 평가하고 치하와 감사를 표하는 한편 주최자의 성과와 실적을 대외에 알리고자 함일 게다. 이러한 포상의 본질은 칭찬이다. 즉 칭찬이란 그가 속한 공동체에 보여준 성과를 평가하고 그에 따른 예우의 표현 이다. 

칭찬은 받는 이에게는 감개(感慨)를 갖게 하고 나름의 만족과 함께 더욱 정진케 하는 동인(動因)이 된다. 또한 주는 이도 이런 과정을 가짐으로 성과의 대외적 과시로 자기 홍보와 함께 더 나은 성과 기대를 가지게 된다. 그런가 하면 행사에 참여하는 이들도 감흥을 갖는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 구성원은 물론 그 외의 사람들도 그것이 표상하는 긍정성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자기 계발의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듯 칭찬은 당사자를 포함한 관련된 모든 이에게 감흥을 갖게 하고 그것은 생산성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긍정성을 인정한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누군가 말했나 보다! 

그런데 모든 포상 즉 칭찬이 그렇듯 모두 긍정성을 가진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앞에서 보았듯이 칭찬은 3박자가 화음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가 있다.  즉 받는 이는 포상에 대한 양심적 수긍이 있어야 하고, 주는 이는 그것이 객관성을 가진 결과에 의하였다는 스스로의 신념이 확고해야 하며, 보는 이들은 마음으로 공감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즉 세 요소 중 어딘가에 흠결이나 하자가 있어 동의하기 어려운 칭찬이 보인다.

이러한 지적은 받는 이나 주는 이들의 사고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 있지만 만약 보는 이들이 공감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칭찬으로 말하는 데 문제가 있다. 분명한 것은 칭찬이란 제3자인 다수가 공감하고 지지할 때 비로소 가치를 가진다. 칭찬에 조심하고 그래서 인색하자는 것이 아니다. 칭찬은 많이 그리고 자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흠을 잡을 사안이 아니다. 다만 그 칭찬이 주는 이도 받는 이도 보는 이도 모두 한마음으로 공감을 한다면 좋겠다는 뜻이다.  미리 이야기를 하면 칭찬을 빙자한 아부나 아첨이 있는데 이를 칭찬으로 포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다. 칭찬은 경우를 불문하고 자주 그리고 많이 하면 좋지만 미세(微細)하더라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때 그것은 가치를 둘 수 있지 그렇지 않은 것은 마땅하지 않다. 다시 말하면 객관성을 결여한 치적이나 성과를 두고 자화자찬 식 칭찬을 하는 것은 칭찬으로 보기는 그렇다. 미안한 표현이지만 그것은 아부(阿附) 라는 표현이 제격이다. 

공동체에서 성과가 있을 때 대표 또는 영향력을 가진 자의 치적으로 미화하는 사례를 쉽게 볼 수 있다. 공동체의 성과인데도 영향력을 가진 자를 추종하는 일부가 전후 사정을 생략한 체 그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으며 다른 구성원들의 칭찬을 유도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는 실제로 성과가 있어도 모양이 그러한데 성과는 없으면서도 전술적(?)으로 전개하는 경우는 모양이 영 그렇다. 이러한 모습을 두고 칭찬으로 보는 것은 마땅치 않다. 

황당한 사례를 본다. 사회적 지탄을 받아야 할 사안인데도 특정 세력이 현재에 영향력을 가진 자들의 응원을 받아 치적으로 미화하고는 국가포상을 하였다.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 때 민주를 외치는 시민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한 군인들에게 훈장을 준 것이 그것이다. 이 포상에 공감한 국민은 과연 얼마나 될까? 설혹 있다 해도 아마 그들은 진실을 몰랐을 게다. 그러나 주고받은 이들은 그것이 국가 포상사유가 될 수 없는, 즉 칭찬의 표상이 아님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칭찬을 두고 시비를 거는 것 같아 그것이 가진 본질에 누(累)가 될까 걱정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칭찬을 난발하지 말자는 것도, 쉽게 해서도 안 된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칭찬은 자주하고 많이 하는 것은 아름답다고 앞에서 말했듯이 그것이 가지는 긍정성은 누가 무어라 해도 변함이 없다. 다만 아부나 아첨을 위장하는 것으로  칭찬의 가치를 훼손시키지 말자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칭찬인가는 말하는 이나 듣는 이의 양심에서 살필 수 있으니 말이다. 자기 의지만으로 아부를 칭찬으로 포장하여 공동체에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유의할 것은 제3자 즉 보는 이들이 공감하지 않는 칭찬은 오히려 공동체의 화합을 깨뜨릴 수 있다는 점이다. 

칭찬이 내 신념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주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타인에게 동의를 요구할 때는 조심해서 접근해야 한다. 내 신념이 존중되어야 하듯이 타인의 신념도 존중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칭찬은 각자의 신념에서 각각의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세상을 사는 동안 칭찬할 일은 참 많다고 생각한다. 사소한 일이라도 이웃과 공동체를 챙기는 것이나 심지어는 가족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도 그렇다. 칭찬은 그냥 칭찬으로 족이다, 진정성이 있다면 무엇을 시비하겠는가?

(♣2019.01.08.)


시흥3동에 거주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있다


정리해고에 맞선 콜트콜텍 해고자들의 12년 투쟁





콜트와 콜텍은 박영호라는 자본가 가족의 절대 지배 속에 있는 기타를 만드는 회사다. 인천의 콜트에 노조가 생기자 대전에 무노조 공장 콜텍을 만든다. 그런데 콜텍에도 노조가 생기자 아예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면서 정리해고를 한다. 노동자들이 부당한 해고에 맞서 투쟁에 나선 지 4300일 넘었다. 2007년 초부터 지금까지 만 12년의 세월이다. 대표적인 장기투쟁사업장이자 부당한 해고에 더해 박근혜와 양승태의 부패한 사법거래/사법농단의 희생양임이 드러난 사건이다. 그 노동자들이 얼마 남지 않은 정년 전에 일터로 돌아가자는 마지막 투쟁을 하고 있다. 행진을 시작하면서 이인근 콜텍지회장은 말한다. “제 기억 속에서 2007년 4월9일 그날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날도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서 공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정리해고의 길인 줄은 회사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억울함을 법 앞에 호소했지만, 법마저 억울한 노동자의 아픈 마음을 보듬기는커녕, 상고법원 설치를 위한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고통분담이라는 미명 하에 도입된 정리해고 제도가 이윤의 도구가 되어 수많은 노동자들을 길거리에 나앉게 하고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가정이 파탄 났고, 해고자의 삶 또한 파탄 났습니다. 정리해고제도를 폐지시켜야 합니다.”

정리해고제는 기업이 긴박한 위기에 빠질 때 불가피하게 진행되는 인원감축을 법적으로 강하게 제한해야 한다는 취지로 논의가 시작됐다. 기업의 임의적인 잣대와 자의적 해고는 노동자들의 생계를 직접 파탄 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들어진 법은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취지는 사라지고 자본가들이 노동자에게 휘둘러대는 (사회적)살인의 흉기, 망나니 칼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해고에 대해 ‘오죽하면 자르겠나’, 투쟁을 포기하지 않으면 ‘회사가 거기만 있냐’며 비튼다. 문제는 살인의 흉기가 여전히 살인자의 손에 있다는 것, 그것을 고발하고 흉기를 제거하지 않으면 살인은 지속될 것이라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참고 굴종하다 자발적 노예가 되고, 같은 노동자들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사탄이 된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만든 헬조선에 굴복하라는 노예들의 주문이다. 투쟁을 결심하고 저항에 나선 노동자들은 단지 자기만의 생존이 아니라 우리 사회 불의 적폐와의 투쟁에 나선 이들이다. 미래는 좀 달라야 한다는 희망을 향한 가장 큰 노동이자 절박한 노동이다. 

“고용의 여력이 있어도 그들 (5명)을 고용할 수 없다. 그들은 합리적인 노조가 아니다.” 목동 굴뚝 농성을 하고 있는 스타플렉스 사측의 말이다. 어용노조가 아니기에 고용할 수 없다는 것은 노조에 대한 극단의 혐오다.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혐오하는 반 헌법주의가 한국 경영자들의 상식이라는 것이 문제다. 콜트콜텍의 정리해고도 본질은 노조에 대한 혐오다. 혐오를 감추기 위한 내세운 사유는 ‘장래에 올 경영상의 위기’. 고법에서 터무니없다했지만 양승태와 대법원관들은 ‘박근혜 정책 보위와 상고 재판소 설립이라는 실적’을 위해 뒤집었다. 

노동자 계급은 투쟁을 통해 민주공화국을 만들어 왔다. 대표적인 역사적 예가 ‘보통 자유선거’제다. 보통선거 쟁취는 실제 자본주의와 자본가들의 민주주의와 무관하다. 귀족 성직자 돈 많은 남자들의 특권 민주주의를 모든 이들의 민주주의로 만든 것은 가난한 노동자들과 소외된 여성들의 주체적 투쟁이 만든 결과다. 마찬가지로 모든 노동권에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생명을 바쳐 만든 피의 역사가 담겨 있다. 노동권은 크게 보아 ‘해고에 대한 제한’과 ‘노동시간 줄임’ 투쟁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임노동은 노동자들의 생명 줄이다. 맘대로 잘리지 않을 권리와 24시간이라는 고정된 시간 속에 남에게 팔려 소외되고 억제당한 시간을 줄여 자유롭고 인간다운 시간을 확보하여 존엄하여 행복하게 살 권리투쟁이다. 그 결과 우리는 노동자가 잘못이 없는데 자르는 것은 범죄로 부당하다는 기본권을 쟁취했다. 그런데 정리해고는 잘못 없어도 회사가 긴박한 위기라면 목을 잘라도 된다는 법이다. 노동자들에게 100년 이상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발전 시간을 박탈한 것이다. 

그런데 콜트콜텍에서 정리해고의 모든 전제인 ‘긴박한 위기’마저 없애 버렸다. 노동법 없는 시간으로 돌아 간 것이다. 노동자들에겐 어떤 권리도 인정할 수 없다는 노예화 선언이다. 100년도 아닌 200년이 넘는 노동자 민중의 민주와 인권투쟁의 시간을 도려내는 폭거다. 더 큰 문제는 폭거의 주역이 돈과 권력과 그리고 국가 제도의 야합을 상징하는 대법원의 타락이라는 점이다.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치적 사회적 공간이 붕괴된 것이다. 나라가 몇몇 권력자와 자본을 위해 사유화된 것이니 헌법에 대한 가장 지독한 모독이다. 

그러니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정리해고의 고통은 개인의 해고의 고통을 넘어 우리 사회에서 자행된 민주주의와 인권의 지워진 시간의 고통이며 민주공화국이라는 공간을 파괴당한 고통이다. 그러니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정리해고의 13년의 투쟁은 마치 댐의 붕괴를 막았다는 네덜란드 소년의 팔뚝이 되어 우리 사회 역사를 버틴 고난의 길이었다. 이 아름다운 사람들의 시간과 삶을 우리 사회는 얼마나 존중할까? 풍수지탄(風樹之嘆)이라는 것이 왜 개별적 혈육만의 문제인가? 우리 사회는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운명 속에서 사회적 역사적 풍수지탄(風樹之嘆)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역사적으로 준법자는 친일파였고 불법자는 독립투사였다. 준법을 자랑하며 법적 책임이 없다는 자본가들의 모습이야 말로 법이 가진 자들의 무기가 되어 버렸음만 다시 확인한다. 이제 그만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에게 인간의 존엄이 보장되는 일자리를 부여하자. 얼마 남지 않는 정년만은 평생직장인 공장에서 맞겠다는 저 어처구니없이 착한 주장마저 외면하면 정말 사람 사는 세상이라 할 수 있겠는가?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조재범 코치 사건에 대하여




 벌써 1월이 3분의 1가량 지나가 버렸다. 이제 방학 끝나면 바로 졸업식이고 한달도 안되는 2월이 지나면 고등학교를 가게 된다. 와우. 3년이라는 시간이 영원히 지나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정신 차려보니 여기까지 와버렸네. 그리고 또 정신 차리고 나면 난 성인이 되있겠지. 진짜 좋아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모르겠다. 진짜 장단점이 반반 인거 같아서 말이다. 하지만 뭔가 안좋은 점이 더 많을 거 같은 건 기분 탓인가.. 그래도 3년이란 시간이 마냥 짧은건 아니다. 일단 과학적으로도 그렇고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다른거 같다. 의미없이 놀기만 하며 보냈다면 나처럼 느낄 것 이고, 보람차게 보냈다면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고통스럽게 보냈다면 하루하루가 1년 그 이상 같겠지.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의 간판 선수가 3년을 훌쩍 넘는 시간 동안 고통을 받아 왔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자랑이 이런 수모를 겪고 있었다니 빛만 받으며 살아야 되는 사람이 권력이란 쓸데없이 큰 그림자의 의해 고통을 받고 있었다. 심석희 선수 폭행 사건이다. 

 심석희 선수가 어떤 선수인지는 잘 알 것 이다. 그러니 소개는 패스 하고 이 유명한 선수가 폭로를 했다. 자신이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올림픽 전 까지 자신의 코치인 조재범 코치에게 상습적인 성폭행을 당했다고 말이다. 당연히 이 폭로는 화제에 올랐고 실검 1,2위를 다투는 상황이 되었다. 심석희 선수는 팬의 편지로 인해 밝히자고 결단을 내렸다고 하셨고 라커룸 같은 곳에서 “운동 계속 하기 싫냐”며 폭행을 당했다고 하셨다. 저번에도 심석희 선수 폭행 사건이 밝혀 지면서 뇌진탕 까지 갔었다는 얘기를 들은거 같은데 이번엔 성폭행 까지 추가로 폭로가 되었다. 조재범 코치는 성폭행은 안했다고 주장하며 라커룸 같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어떻게 하냐고 주장한다 한다. 그리고 추가 피해자는 나오고 있다고 하며 이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미국에서 일어난 레리 나사르 사건(체조 국가대표 주치의인 레리 나사르가 30년 동안 300명이 넘는 어린 선수들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사건)은 징역 360년이던데 과연 자랑스런 대한민국은 어떻게 해결하실련지 모르겠다. 

 댓글 보니까 화학적 거세까지 하라고 난리던데 그거까진 노코멘트 하겠다. 이런 문제는 끊임없이 일어났었다. 체육계에서 일어나는 폭행 사건.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수도 있다. 아주 체육계에 뿌리깊게 박혀있다. 권력이라는 아주 불평등한 권리의 의해 일어나는 폐해. 다 너를 위해서 라며 혹은 운동 때려치고 싶냐고 협박하며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코치가 잡힌다해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복귀하거나 복귀해서 좋은 성적을 내면 영웅이 된다. 이 폭행은 코치 뿐 만 아니라 선배나 나이가 많이 먹었다는 이유로 당연하게 행해지는 경우도 다수다. 체육협회들은 이를 은폐하고 덮어두기 마련이고 선수들의 고통만 더 커져가는 추세다. 한마디만 하겠다. 선수들이 맞고 싶어서 체육하냐? 운동을 좋아하고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인권을 유린당해도 되는건가? 이건 선수들의 간절함을 제대로 이용하는 것이다. 이런일을 당해도 운동을 계속하는 이유는 그만큼 좋고 간절하기 때문인데 그 간절함을 꽃피우게 해줘야 되는 사람들이 꽃의 영양분을 빨아먹는 진딧물이 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아름다운 장미지만 속은 진딧물로 인해 완전히 썩어있는 상태란 거다. 누구보다 밝게 빛나던 심석희 선수가 이렇게 몸과 마음이 망가져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도대체 이런 전통은 대체 누가 만들어 논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체육계만이 아니라 온 방면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얼마전에도 무슨 기업 회장이 직원 폭행한 사건도 그렇고 여기저기 미투가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을 보면 보인다. 김연아, 박태환, 이상화, 박지성, 손흥민, 심석희등 뛰어난 선수들을 배출하고 요번에 아시안 게임 우승과 올림픽에도 금메달 5개와 아시아 최초로 컬링 은메달에 빛나는 성과를 이뤄낸 대한민국은 선수 한 명의 인권조차 지키지 못하는 나라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태극기를 걸면서 자랑스럽게 애국가를 부르는 게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태극기를 버리고 그 선수의 사진을 걸고 애국가를 버리고 그 선수만을 위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 영광을 나라에게 돌리지 말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돌려야 한다는 거다. 과연 지금 대한민국이 영광을 돌리고 자부심을 가질만큼 좋은 나라일까. 


한줄평: 김구 선생님은 지금의 한국을 보고 만족을 하실까.. 


김강현

책도둑



    



책도둑/ 마커스 주삭 / 문학동네


등과 팔…늘 이들을 혹사하면서도 고마운 줄 모르고 생활하다가 이들이 아픔으로 비명을지를 때 낯선 곳에 누워 각종 검사를 하고는 뒷목을 갈라 목에 붙어있던 놈을 떼어냈다. 힘든 일이어서 다시는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았지만 다시 밥을 먹고 산책을 했다. 누군가에게 많이 고맙고 되도록 착하게 살아야겠다 싶었다. 소개하려는 책 '책도둑'은 병원생활을 한 달 넘게 하던 때에 읽었던 책이다. 

마음도 힘들 때였지만 사실은 몸이 말을 안 듣던 때였고, 무엇보다 난생 처음 겪는 이 일이 낯설고 무섭게만 느껴졌을 때였다. 누운 채로 팔을 이용해 간신히 읽어 본 이 책, 다 읽고 난 후에는 뜨거운 국물이 빈 속을 타고 가듯 마음에 한줄기 자국을 남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사람답게'라는 지극히 평범한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책도둑'은 무거운 이야기지만 소설 전체에서 따스함이 느껴진다. 죽음의 신이 화자가 되어 잔잔한 이야기를 한다. 유대인이 핍박받는 이야기가 주되었던 2차 세계대전 이야기지만 책도둑은 그 시절을 살아낸 독일 사람들 이야기이다. 가해자로만 나오지만 무심한 눈길의 주인공이던 독일사람들... 대부분의 문학작품에서 이들은 그런 모습이었다. '책도둑'은 책을 도둑질하는 소녀의 이야기이면서 전쟁을 겪어내는 독일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전쟁을 일으킨 그들이지만 사실은 '그들'이라고 할수 있나싶을 정도로 평범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다.전쟁은 누구도 행복하게 하지 않았다. 이들도 공습과 굶주림에 직면했고 힘들게 살아간다. 주인공 리젤의 상황에서 책이란 미지의 세상이기도 하고 현재의 방공호이기도 했다. 글을 떠듬거리며 읽을 정도로 서툴렀던 리젤은 차츰 책을 알게 되면서 다른 불안을 느끼는 주민들과 방공호에서 책을 읽는다. 그 내용이 무엇이건 주민들은 리젤의 책읽기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리젤의 양아버지는 은혜를 입었던 유태인 친구의 아들을 돕는다. 

이런 사람들이 있었을까 의심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전쟁의 책임이 옅어질 수 있다는 조바심도 나올 수 있지만 나는 이런 사람들, 상황이 분명 있었을 것으로 믿게 되었다. 사람의 생활, 평범한 이들의 삶과 사랑과 우정은 어디에서든 존재하기 때문이다. 각종 전쟁 영화나 문학작품에 나오면서도 늘 박제화 되어 있던 독일사람들을 모처럼 숨결을 지닌 모습으로 만나게 되어 기뻤다.이 책의 장점으로 꼽을 수 있는 건 문장이 간결하고 아름답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내용에서 그대로 영화장면이 떠오를 정도다.(이미 영화로 나왔는데 깡마르고 이지적인 리젤을 상상했던 나는 지나치게 예쁜 주인공에 조금 실망..) 유대인과 우정을 나누고 은혜를 갚는 독일인.. 작가는 실제부모님이, 끌려가는 유대인에게 빵을 주고 채찍을 맞던 독일인의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사람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이들, 작가는 그것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책과 말이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 사는 모습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말한다. 히틀러의 '마인 캄프(나의 투쟁)'이라는 책과 공습에 사람들의 불안을 덜어주었던 리젤의 책읽기는 같은 말과 글이지만 얼마나 다른지…

특별한 사건과 소음이 없는듯 한데도 조용히 눈물이 흐르는 책이다. 마음을 적시는 책이다.나의 말과 나의 책들은 내 삶을 어떻게 바꾸고 혹은 가꾸고 있는가... 책을 도둑질하고 그 안에서 안식을 구하는 작은 여자아이, 그의 훔친 책이 불안한 다른 이웃들에게 어떤 위안을 주었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민경아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아쉬운 신년회




<신년사를 발표하는 유성훈 구청장 출처_금천구청>

애국가는 4절을 불러야?

올해 신년회에 애국가를 4절까지 불렀다. 물론 작년 신년회에도 4절을 불렀다. 강성만 자유한국당 금천구위원장은 단상에서의 인사말에서 애국가를 4절을 불러 뜻 깊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참석한 주민은 “무슨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냐?”고도 되묻기도 했다. 모든 행사들이 그렇지만 시간의 압박이 심하다. 그래서 축사나 인사말도 짧게 하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른다는 것이 남다른 애국심, 나라사랑의 표현의 잣대인 걸까?


주민자치회 강조했지만!

신년인사회는 크게 3마당으로 진행됐다. 사전마당을 제외하면 내외빈 소개와 구청장등의 인사말,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함께 합창으로 마무리됐다. 약 1시간 30분의 시간이 소요됐고 이 중 내외빈 소개에 30분을 넘게 할애했다. 장애인, 보훈, 봉사, 보육, 학교 등 부문별로 참석자들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런데 ‘주민자치와 주민참여를 위해 애쓰시는 분들’에 각 동 주민자치회장의 소개가 빠졌다. 주민참여예산위원장, 통장 연합회장, 주민자치운영협의회장, 금천구 의정회 회장만이 소개됐다. 이에 회장들은 집단으로 자리를 빠져 나가기도 했다.

유성훈 금천구청장은 신년사에서 “전국 최초로 전 동에 동시 출범한 ‘주민자치회’가 마을민주주의의 거점이 되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게다가 작년 한 해 동안 자치회를 세워내면서  역할과 위상이 더욱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라 아쉬움이 클 수 밖에 없다. 

물론 작년 신년인사회에서도 동 주민자치위원장이 소개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의전을 기존 관례에 따르는 모습에는 아쉬움이 든다.

조례에는 주민자치회는 ‘주민편의 및 복리증진을 도모하고자 동에 설치되고 주민을 대표하여 주민자치와 민관협력에 관한 사항을 수행하는 조직’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성호기자

gcinnews@gmail.com


불만의 겨울이 왔다. 



'불만의 겨울(The Winter of Discontent)'이 왔다. 

원래 '불만의 겨울'은 1978~79년 겨울, 영국에서 노동당이 집권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민과 중산층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서 공공 부문 노조가 광범위한 파업을 벌인 사건을 말한다. 그 귀결은 노동당 정권의 몰락과 대처의 집권이었다. 대처는 집권 후 무엇보다 먼저 노동운동을 무력화 시켰다. 기업의 이윤이 경제의 전부인 그들에게 저항하는 노동조합은 시장의 원활한 작동과 이에 따른 경제회복을 가로막는 사회악일 뿐이었다. 1978년 가을~1979년 겨울, 당시 집권당인 노동당의 소득정책(임금인상률 5% 제한)에 항의하는 파업으로 쓰레기가 거리에 쌓이는 등 도시 기능이 마비되면서 그 책임을 노조에게 돌리는 여론이 득세했다. 이명박근혜시절 ‘종북’이란 말이 죽음의 낙인이었듯이 노조를 비방하고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것은 지지율을 올리는 특효약이었다. 이런 역사적인 사례를 통해 사람들은 노동당 정권에 대한 노동조합의 지나친 요구가 대처정권을 불렀다며 투쟁의 자제를 말한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의 요구는 지나칠 수가 없다. 회사의 조건 자본의 조건에 의해 요구가 결정되고, 사회적 평균이라는 기준에 이해가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조합의 투쟁은 개악을 막거나 정리해고를 반대하거나 임금인상 제약을 거부하는 수준이다. 당시 노동당 정권은 경제적 혼란을 자본주의 구조적 위기로 보고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 복지로 풀고, 케인즈 주의 정책 기조를 포기하는 것으로, 결국 시장 만능주의에 굴복하는 것으로 나갔다. 자본의 위기를 노동의 고통을 돌리는 정책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에 대한 저항은 치열했으나 저항의 메시지에 귀를 막은 노동당 정권은 노동자 민중을 향한 눈길을 자본과의 영합으로 돌렸다. 하지만 알아야 한다. 노무현 정권의 친(親)삼성 몸부림에도 기득권에 버림을 받았듯이 이른바 우선회(右旋回)는 재앙을 부를 뿐이다. 


보수 반동적인 대처 정권이 들어 선 이후 대처는 노동조합을 철저하게 분쇄했다. 노동조합에 유리한 조직형태인 클로즈드숍(기업이 조합원만 고용할 수 있는 제도)을 법률적으로 파괴했다. 노조의 모든 쟁의는 반드시 조합원의 투표를 거치도록 법제화 했는데 그 투표용지엔 “파업에 참여하면 고용계약을 위반할 수 있다”는 경고문을 반드시 넣어야 했다. “담배는 당신의 건강을 해칩니다”는 경고 문구와 비슷한 발상이다. 노조와 노조 쟁의를 어떻게 보는지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조합원에 대한 노조의 파업 불참 징계 권한을 불법화했고, 법정최저임금제도를 폐지했다. 노동당의 무능의 결과를 노동에 대한 공격과 배제의 결과는 집권 상실이기도 하지만 인간 사회 전체가 ‘신자유주의’라는 서로에게 야수 악귀가 되는 헬 세상의 시작이었다. 

수치와 통계가 민중들의 삶을 보여주기는커녕 외려 왜곡 악화시키는 돈과 권력의 흉기라는 것은 이미 기초상식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이 수치의 마법아래 속고 속는다. 그 모습이 조삼모사를 당하는 원숭이와 같고 결과가 조삼모사의 원숭이만도 못하다는 자괴감을 가져온다. 문재인 정권이 만난 경제에서 수치의 수렁은 소득주도의 경제 정책에서 온 것이 아니다. 소득주도의 경제정책이라는 말조차 수용할 수 없는 한국 재벌의 기득권이 만든 것이다. 빈부격차가 죽음을 부를 정도라 유지조차 불가능한 조건에서 나온 자본을 위한 응급조치, 시장만능주의를 케인즈 주의적 관점으로 보완한 정도가 ‘소득주도형 경제정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자본 태업이다. 그 상징이 사내보유금이다. 논란이 많지만 결국 분배되지 않는 구조를 보여주는 사내 보유금이 이른바 개혁 정책에도 줄기는커녕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버렸다. 자본은 눈에 보이지 않는 투자 태업, 자본 식 파업을 통해 수치상의 경제를 강제했고 조중동식 과장과 엄살이 불을 지르면서 마귀가 도래한 것인 양 공포로 세상을 도색한 것이다. 그 결과 통계와 수치가 아니라 실질적인 민생을 보호하자는 문재인식 공약을 완벽하게 무력화 된다. 2018년의 한국의 내적 상황의 결론이다. 


그러니 한국식 불만의 겨울은 영국처럼 이른바 복지가 지나친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미흡한 개혁이 구조적 반동 적폐 세력들에게 잡혀 먹힌 결과로 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선한 표정으로 웃고 있을 때 구이 역에서 김군이, 제주도에서 실습 학생 노동자가 죽어 나갔다. 태안에서 김용균이 죽을 때 까지 “태안화력발전소는 정부로부터 무재해 사업장 인증을 받고 5년간 산재보험료 22억여 원을 감면받았다. 정규직 직원들에게도 무재해 포상금을 지급했다.”는 보도처럼 안정하고 깨끗한 사업장으로 보고되어 있었을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피땀 흘리다 죽은 시체 위에서 잔치를 벌이는 것이 노동존중 세상의 실체였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도 김용균 사망사건을 언급하며 “공공 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특히 위험·안전 분야의 외주화 방지를 위해 더욱 노력해주기 바란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 말에 여전히 산업재해 직접 책임자와 지휘계통의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빠졌다. 더 나아가 죽음의 진정한 원인이 위험의 외주화가 아니라 외주화 자체, 즉 비정규직화에 있음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사건에 대한 책임도 죽음을 막는 진정한 대책도 빠져 있다. 하나라도 제대로 하라. 그 하나는 무엇보다 사람의 생명에 집중되어야 한다. 노동 존중이 아니라 노동의 존엄에 인간의 존엄에 맞춰져야 한다. 우리는 대처가 죽었을 때 ‘사탄이 죽었다.’며 춤을 추며 축제를 벌인 런던 시민들의 슬픔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부엉이 바위에 선 비극을 보고 싶지 않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 촛불의 꽁무니에 섰던 그 위치, 자신들의 견해보다 두발 세발 앞섰던 거리의 촛불, 광장의 촛불에 겸손해야 한다. 문재인 정권이 가는 길은 틀렸다. 그 틀림이 불만의 겨울을 만들고 있다.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당나귀 가죽




샤를 페로 글. 페리 그림. 계몽사 어린이 세계의 동화


요즘 유행하고 있는 하얀 토끼발모자를 매일매일 쓰고 다니는 딸아이를 보니 <당나귀 가죽>이 생각이 난다. 프랑스 동화작가 샤를 페로의 동화집 중 하나인 <당나귀 가죽>은 여타의 공주님들과 조금 남다른 행보를 걷는다.취직을 하는 공주님이라니! 멋지다. 어느 나라의 왕비가 병사하자 그녀를 못잊은 임금님은 왕비를 가장 닮은 딸, 마리아를 왕비로 맞이하기로 한다. 경악스럽지만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어린이들의 정신붕괴를 막기 위해 왕비의 여동생으로 편집해놓는다.마리아의 유모는 영리해서 왕에게 시간을 느낄 수 있는 드레스, 훌륭한 달밤의 드레스, 태양의 빛을 머금은 듯한 드레스를 만들어 달라고 한다. 페리의 그림을 보면 이 드레스들이 예뻐서 입이 쩍 벌어진다. 수채화인데도 질감이 느껴지게 그리다니 이야기가 더 생생해진다.임금님은 능력자셨다. 그 어려운 걸 척척 해내셔서 마리아는 울면서 유모에게 달려간다. 유모도 만만찮다. 왕가의 보물인 귀를 흔들면 금화가 나오는 당나귀를 죽여 가죽을 달라고 하라고 시킨다. 이쯤 되면 유모는 혹시 스파이가 아닐까 싶다. 신하들의 만류를 말리고 당나귀는 가죽이 되어서 마리아에게 왔다.유모는 당나귀 가죽을 우리 딸처럼 마리아의 머리에 씌워주고 예쁜 얼굴에 검댕을 묻혀주며 이웃나라로 도망가라고 한다.그렇게 지체 높은 아가씨는 농가에 취직해서 마당청소와 돼지 먹이 주는 하녀 일을 하면서 고되게 살아가다가 우여곡절 끝에 이웃나라 왕자님을 반하게 해서 결혼을 하는 이야기다. 왕자랑 만나는 계기도 재밌지만 내용을 다 알려주면 재미없으니까 생략한다. ㅎㅎ마리아의 결혼식에는 임금님도 오셔서 자기 생각이 짧았다고 사과하면서 훈훈하게 끝난다.역시 동화다. 보통 전쟁이 나야 할 법한 상황일 텐데 쿨한 임금님께 감탄한다.우리 어린이들이 토끼 가죽(?)을 뒤집어 쓰고 이성과 썸도 타고 즐겁게 살아가는 나날이 되길 바란다. 물론 이 가죽은 흉측하지 않고 귀여움을 증가시킨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활동가

김지현



*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장제모 칼럼] 주민사업 공모제도에 대해




주민사업 공모제도 정산 시기라 공모사업에 참여한 주체들이 모두 바쁘게 보내는 시간이다. 서울시 마을공동체종합센터를 비롯하여 서울시의 실국 공모와 기초자치구의 공모사업 등 참여 주민 공동체들은 사업 마무리로 분주하다. 이러한 공모사업은 주민들이 국가(지방자치를 포함한)의 정책에 직접 참여하는 형식으로 직접 민주주의의 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서울시의 주민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는 공모사업은 언제부터 있었는지 확인하지 못하였지만 본격적인 시작은 아마 2011년 마을공동체지원센터가 발족하면서 부터가 아닐까 생각한다. 공모사업의 의의는 국가정책에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것으로, 주민들에게는 도움이 되고 그것은 민주주의 실현의 기회가 된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그로 인한 결과들이 해당 공동체는 물론 그 공동체의 이웃 등으로 파급되어 사회적 공익을 끌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니 바람직한 정책이다. 실제로 서울시와 산하 자치구에서는 이러한 공모사업들이 여러 분야에서 전개되고 있고 그로 인한 변화로 주민공동체들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더불어 마을의 발전이 진행되고 있어 이 제도의 긍정성을 객관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성에도 이 정책이 가지는 나름의 문제점들이 있고 그것은 이 정책의 미래 지향성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현재 상황에서는 여러 면에서 긍정적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미래에 이르도록 항상 긍정적일 수가 없는가 하면 이 정책의 본래 취지를 바래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듯이 이 제도는 유익한 점이 있는가 하면 그것에 의한 공익성 성과가 기대되지 않거나 취지가 지향하는 바를 충족하지 못하는 등 흠결(欠缺)을 가지고 있어 이 정책의 항구성 우려로 긍정성을 감하는 경우도 있다.

운영 당사자 등 사업 참여자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 있겠지만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제도의 규모다. 규모를 말한다 해서 ‘작다’, ‘부족하다’는 점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즉 지향하는 목적에 합당한 구조 즉 그 정책이 지향하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합당한 구성(예산 규모와 내용)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진다는 뜻이다. 규모가 지향하는 목적 달성에 부족할 경우 성과는 없는 채 예산만 낭비하게 마련이다. 역량 한계를 가진 주민을 수요자로 하는 제도인 만큼 구성이 한계일 수밖에 없는 점을 이해한다. 그렇다고 목표나 예산규모가 목적 달성 유효성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것을 잘 된 구성이라 할 수 없지 않겠는가? 다시 말하면 역량문제를 가진 주민이 대상이라 해서 그 달성목표가 추상적이거나 소극성을 당연시 하는 것은 안 된다. 주민 대상 공모사업에서 그런 경우들을 볼 수 있다.

생각해 보자. 공모사업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재원은 어디에서 조달되는가? 답은 간단하다. 국민들 곧 주민들이 스스로 생활편익을 국가제도에서 구함이 목적으로 이는 국민들의 행복 추구를 지향하는 국가정책에서의 실질 행사이다. 그래서 그 재원은 국가 예산이고 곧 국민들의 부담이다. 이러한 구조인데 성과 기대가 어렵거나 흉내만 내는 것을 허용하는 것은 본래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가 하면 공익에 반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요약 하면 공모사업의 목표달성 유효치를 분명히 제시하고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예산을 편성해야 한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공모사업의 시행은 관(官)이 하지만 그 주체와 시행영역은  민(民)의 영역인데 시행 질서가 관의 관리환경에 맞추어져 있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민 주도를 표방하면서도 관리는 관의 영역 즉 관이 마련해 둔 형식에 구속시키고 있다. 공모사업에 참여해 본 경험이 있는 대개의 주민들이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제안서 작성, 예산 편성 및 운영과 정산이 어렵고 특히 정산은 더욱 그렇다고들 한다. 

이러한 운영은 국가 감사 제도의 엄격함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라는 점에서 이해가 되지만 주민대상 정책시행이라는 점에서 재고의 여지가 있다. 물론 이 질서는 관의 전형적 구조로 잘못되었다 하지 않는다. 다만 공모사업은 민이 수혜자이자 주체이므로 민의 입장에서 준비되고 운영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제도 운영에 관의 기준을 고집하지 말고 민의 접근이 쉽도록 절충적 제도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주민의 접근도 운영도 쉬워야 하며 특히 정산은 어렵지 않도록 규제를 최소화 할 필요가 있다. 

사실 공모사업 예산 운영과 정산을 규정한 현 제도는 어렵다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이는 공모사업 경험자 등 운영에 경험을 가진 주민 기준에서 그렇지 신규 참여자는 그렇지 않다. 제안서 작성과 운영이 만만치 않은데 징구서류가 복잡다단한 정산은 더욱 그렇다. 그런가 하면 시행 처에 따라 징구서류의 종류나 적용기준이 다른 경우가 있어 경험자들조차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즉 항·비목별 예산 편성이나 적용기준이 다르고 심지어는 지급에 따른 시간적용이 다른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식비지급에서 어떤 곳은 휴일 활동이나 평일은 일과 시간 이후라야 허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개선 필요성을 당국이 인정하고 있지만 아직도 미완성이다. 유의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로 공모사업은 상대적으로 경쟁력을 가진 젊은 세대를 주축으로 하는 경험자들만의 장이 되는 것과 같은 왜곡 현상조차 있다는 점이다. . 

공모제도는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구하는 과정이자 민주주의 시행의 실제인 만큼 국가가 부단히 추구해야 하는 정책과제다. 시행결과가 관의 실적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한 수단으로서만 운영은 삼가야 한다. 물론 그것의 생산성은 실적으로 평가되고 그로서 보상 대상이 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가치 있는 성과는 사업의 취지에 부합하는 현상적 결과가 있고 그 곳에는 그 지향의 철학이 담긴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제안을 하나 해보자. 공모사업 정산내용이 사실이고 그것의 타당성이 객관성을 가진다면 형식 규제는 최소화하도록 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으로 취지하는 바의 달성이 아닌가?(♣2018.12.26.)



장제모

시흥3동에 거주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있다

강릉 펜션 사고에 대하여




 세상엔 피할 수 없거나 알지 못하는 위험들이 많다. 어쩔 수 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위험 인 것이다. 그중에 공기에 관련된 위험은 정말 어쩔 도리가 없다. 눈에 보이지 않을뿐더러 숨을 쉬지 않고는 살수가 없기 때문이다. 미세먼지 같은 거도 그러고 자동차의 매연 같은 거도 그렇다. 그리고 일산화탄소 같은 각종 가스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위험은 대게 사람들이 초래한 짓이다. 미세먼지도 각종 개발과 환경 파괴로 인해 생긴 것 이고, 공장의 매연도 사람들이 석탄을 태워서 발생하는 것 이다. 그리고 이 사건도 사람들의 나태함으로 인해 일어난 사건인 것 같다. 강릉 팬션 사고이다. 

 지난 18일날 수능을 마치고 대성고 남학생 10명끼리 강릉의 어떤 팬션으로 여행을 갔다. 하지만 이 학생들은 3명의 사망과 7명의 의식불명의 상태가 되어 버렸다. 원인은 일산화탄소 중독. 가스보일러의 연통이 어긋나서 가스가 그대로 유출해서 벌어진 사고다. 오래된 건물을 급히 팬션으로 짓는 바람에 제대로 시설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하며 가스보일러 경보기도 없었고 배수 시설 없이 가동 했다는 의문도 들고 있다. 현재는 몇몇 학생은 퇴원 했고 나머지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고 한다.  그 중요하디 중요하다던 수능을 끝내고 여행을 갔다가 이런 상태로 돌아오다니, 이건 그냥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리고 원인이 정말 어이가 없기도 하다. 제대로 잘 갖추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사람들의 무관심이 이를 초래한 것이다. 내 학교에선 3학년이 되면 뮤지컬 무대를 여는데 3등 안에 들면 팬션으로 야영을 가기로 선생님이 공약을 내거셨다. 그리고 우리는 무조건 3등 안에 들기 위해 남아서 뮤지컬 연습도 하고 대본을 몇차례 갈아 엎는 둥 온갖 고생을 다 했다. 그리고 뮤지컬 공연 하루인가 이틀 전날 이 사건이 터지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교육청에서 이 사건으로 인해 당분간 야영은 못한다.”그렇게 우리의 고생은 물거품이 되버렸다. (어차피 3등도 못해서 못 갈 거였지만) 아무튼 여러모로 피해를 심각하게 많이 준 사건이다. 일단 사망이 3명이나 되고 나머지가 다 의식 불명 상태 였다는 게 가장 큰 피해다. 수능 보고 이제 인생 필 일만 남았는데 이런 일을 겪다니, 정말 억울할 거 같다. 그리고 위험을 무심코 지나치면 안된다는 것도 있다. 진짜 이거는 어렸을 때부터 누누이 듣고 배우는 건데 이런 사고가 벌어지는 걸까. 정말로 이거는 그냥 지나쳐선 안된다. 편리함을 위해 지나쳤던 것이 자기를 삶에서 지나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한줄 평: 왜 7대죄악에 나태함이 있는지 알겠다. 



 16살 김강현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벌써 크리스마스구나. 요즘 시간이 진짜 빠른 거 같다. 이젠 2019년이고 나도 중학교 졸업이고 내년부터 새로운 위기를 맞이 해야된다. 정말 싫다. 나이 든다는 게 좋은 거 같기도 하고 진짜 싫기도 하다. 근데 요즘은 싫은 점이 더 눈에 띈다. 일단 첫 번째. 돈 버는 게 막막하고 두 번째. 친구들도 없어질 거 같고 세 번째. 미래가 안 보인다. 나는 내 진로를 내가 정했지만 불안감이 없다고는 못하겠다. 요즘 같은 시대에 예체능으로 돈을 벌겠다니. 성공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망하면 욕이란 욕은 다 먹는 게 예체능 같다. 자신 있게 이 길만 판다고 올인해놓고서 돈 한푼도 못벌고 부모님 집에 얹혀살고만 있는 삶. 죽어도 싫다. 진짜 싫다. 그런 삶은 정말로 살기가 싫다. 이것이야말로 실패한 삶이 아닐까. 나는 무조건 내 꿈을 이루고 싶다. 그렇게 해서 맨날 다짐하지만 열심히 그려봤자 돈도 안되고 언제 이뤄질지 계속 기대만 하면서 점점 게을러지는게 현실이다. 노력해야되는건 당연히 알고 있지만 손은 움직이지 않는다. 남들은 죽기살기로 하고 있는데 나는 그러지 못한다. 그냥 상황이 안되면 안되나 보다 하고 안하고, 이건 좀 아닌 거 같아서 다 때려치고 이런 상황이 계속 되풀이 될 뿐이다. 나이먹기 싫다. 실패한 삶을 살 거 같아서.

 내 푸념은 이정도로 하고 주제가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다운 얘기를 좀 해야될 거 같다. 어렸을 때는 11월 달만 되도 기대되고 크리스마스 언제되나 기대하고 살았다. 당연히 원하는 장난감을 받는데 기대가 안되겠나. 언제되나 기다리고 지금 내가 7살이었으면 그냥 설레발이 장난이 아니었겠지. 그리고 당일에는 원하는 선물을 받고 좋았다. 그게 제일 좋았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순간 크리스마스를 잊어버렸다. 지금처럼.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라고 하면 그제야 깨닫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은 뭐, 선물 같은건 받지도 않는데 뭐 기다릴 게 있나. 산타할아버지는 어린이한테만 선물을 주기 때문에 나는 제외라고. 만약에 20살까지 줬으면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을 거다. 그러니 지금은 알바가 없는 날. 커플들이 난리치는 날. 나는 난리 못치는 날이 되버렸다. 나도 난리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방에 쳐박혀있겠지. 그냥 겨울방학이나 빨리 왔으면 좋겠다. 어렸을 때 기대와 설렘의 나날이었던 크리스마스는 이제 나에게 아무 도움도 안되는 날이 되었다. 

 한줄 평: 어렸을 때 아우디나 달라고 할걸.


 16살 김강현

‘광주형 일자리’의 속내



이 글을 마무리하는데 충난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24살 젊은 비정규 청년노동자의 소름끼치는 죽음의 소식이 들린다. 민영화되고 분사화 되고 비정규직이 되다가 하청 용역에 그도 모자라 하청의 1년 계약직으로 들어간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의 일자리는 그 단계마다 목과 몸이 분리되는 죽음으로 직진하는 길이었다. 자본의 이윤은 결국 인간의 피땀이고 죽음의 대가다.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완화라는 말이 만든, 이 자본만 화려한 사람들의 ‘생지옥’을 언제까지, 어떻게 견뎌야 하는 것인지... 사는 것이 너무 욕되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현대자동차노조는 우리시대의 주홍글씨 낙인인가보다. 원래 그러려니 하는 역사와 시대의 반동·반공·쓰레기 언론들의 호들갑은 그렇다 쳐도 이제 진보 개혁을 표방하는 ‘한겨레·경향신문’의 사설에서조차 지탄의 대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 대표적인 주제가 이른바 광주형 일자리 창출이다. 광주형 일자리 공장을 정부는 ‘적정임금·적정노동시간·노사책임경영 및 원·하청 관계개선을 위해 공적자원과 민간투자가 결합된 새로운 일자리로, 지역경제 활성화, 일자리 상향균등화를 이루어 해외이전 공장의 국내 복귀를 가져올 것’이라 자찬한다. 그리고 모든 언론들이 이를 고무·찬양하며 반대하면 대역죄라도 지은 것인 양 몰아 부친다. 과연 그럴까?


 광주형 일자리라는 것을 한마디로 줄이면 새로운 ‘현대차 공장을 광주에 짓자’는 것이다. 값싼 인건비를 위해 해외로 나가는 대신 현대 자본에게 그 만큼의 대가 즉, 이윤 손실을 세금과 노동자의 피땀으로 채워주자는 것이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기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꾸며진 것이 광주시 ‘노사민정’ 테이블이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상하게도 현대자동차 공장의 직접 당사자인 민주노총 금속노조 현대차 노조는 없다. 현대자동차와 직접 상관이 없는 어용노조의 집결체 한국노총이 ‘노(勞)’의 대표가 되어 있다. 을사년의 한일 늑약도 서러운데 그 주체가 조선도 아니고 ‘미국과 일본’인 꼴이다. 그런데 한국노총조차 노사민정 테이블을 거부했다. 이유를 들여다보니 현대차 재벌의 투자의향서 내용이 기막혀서다. ‘임금·단체협약 협상을 5년간 유예’, ‘기본급과 제수당, 시간외수당까지 포함해 연봉 3000만 원’, ‘근로시간 주 44시간 보장’... 광주시는 현대차 자본의 1차 투자제시안을 공개도 못했다.  


현대자동차 투자 안은 노사단체협약의 최장 유효기간을 2년으로 제한하는 현행 노동조합법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광주형 일자리가 2021년 이후 적용되는 조건이라면 내년 최저임금 연봉 기본급이 2094만 원이니 현대재벌의 요구대로 물가인상률의 평균치로 최저임금이 인상되어도 이미 최저임금 보다 못한 금액이 된다. 게다가 이를 또 5년 간 유예한다면 광주형 일자리라는 것이 최저임금에 한참 밑도는 일자리가 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어디서 일자리 ‘상향’ 균등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현대차는 노동시간을 ‘주44시간’이라 했다는데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최저임금법에 노동 3권을 보장한 헌법을 부정하고 만든 일자리가 광주형 일자리다.  


현대 화물차 노동자들에게 빚더미를 안겨주는 것은 이른바 ‘지입차주제’다. 지입차주제는 운전기사가 운전 차량을 자기 것으로 마련하는 것이다. 버스기사에게 버스를 사와야 버스기사로 일을 하게 한다는 격이다. 그것이 이제는 화물차 회사가 운전기사들에게 차량을 ‘대여’해 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원래 노동의 3요소인 노동대상, 노동수단, 노동력 중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은 자본이 고정 투자로 제공하고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밖에 없는 노동자들은 노동력만 제공하는 것이 정상적인 자본주의지만 언제부터인가 자본의 기본의무인 노동수단조차 노동자들이 빚으로, 피땀으로 제공해야 하는 ‘기업하기 좋은 세상’이 되어 있다. 당시 이런 심각한 사기(詐欺)의 명분이 무엇이었을까? 동일한 일을 ‘노동자가 아니라 사장님’으로 일하라는 것이었다. 


광주형 일자리 이전에도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차고 넘쳤지만 대부분이 그것은 값싼 공장부지 제공이나 세금을 깎아 주거나 면제하는 것이었다. 사실 광주형 일자리가 처음이 아니다. 동희오토 공장이 있다. 기아자동차 서산공장은 모든 것이 기아 차의 소유지만 그 공장 이름은 동희오토이고, 그 안은 기아자동차 차를 만들지만 기아자동차 원청 정규직 하나 없는 비정규직 공장이다. 그래도 기아차는 부지, 시설, 기계 등에 대한 투자를 했다. 그런데 광주형 일자리는 아예 세금까지 퍼부어 현대차 부담을 광주시가 대신 지겠다고 나선 것이다. 광주시가 현대차 공장을 돈까지 바치면서 하청공장, 비정규직 공장을 만들고 있는 것이 진실이다. 노사민정이 합의한 것이 정말 적정임금, 적정노동시간일까? 2018년 8월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임금은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50.7%다. 반값임금과 장시간 노동은 비정규직 차별의 상징인데 광주형 일자리의 전제가 국내 완성차 공장 임금의 딱 절반이다. 대신에 정부와 지자체가 각종 복지 제도를 보충해준다는 것인데 기업이 사회적 책임이자 도덕적 의무로 가져야 할 최소한의 복지비용조차 세금으로 충당한다는 황당한 발상이다. 현대자동차 한 재벌의 공장을 위해 나라를 바치고 노동자를 쥐어짠다는 말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 적정 임금이고 노동시간인데 실상은 ‘적정’이란 말 앞에 자본이 원하는 ‘착취’라는 말을 뺀 것이다. 노동자들을 위한 적정임금이 아니라 자본의 탐욕을 향한 착취의 적정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광주형 일자리에 열광하는 그대들이여, 그대들이 이른바 신자유주의 ‘기업 파시즘의 광신도’다.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빵은 사랑이다 X 미소빵긋

금천문화재단_금천문화링크 빵Lover의 두 번째 금천 여행지, 미소빵긋



금천문화재단_금천문화링크 Love는 금천의 LOVER들이 마음껏 LOVE 할 수 있는 금천을 꿈꾸며 다양한 취향의 시선으로 금천의 곳곳을 담아보려 합니다. 덕후란 일본어 오타쿠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오덕후'의 줄임말로, 현재는 어떤 분야에 몰두해 전문가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아마추어 : 아마추어(amateur)란 라틴어로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amor)에서 유래된 말로 아마추어는 전문적 권위나 승진과 관계없이 진정으로 그 일을 사랑하는 사람, 스스로 좋아하며 그 일을 즐기는 사람을 뜻하지요. 하지만 소위 전문가로 자칭하는 사람들이 등장한 후, 아마추어는 상대적으로 얕보이는 단어로 변질됐습니다. 

이제 본격 '덕후', '아마추어(애호가)'를 위한 금천문화링크 시리즈!



빵을 사랑하는 빵Lover가 빵집따라 금천을 여행한다! 빵Lover의 두 번째 금천 여행지, "미소빵긋“입니다. 독산역 2번 출구에서 나와 고가차도 아래를 쭉 걷다보면 어느새 왼편에서 솔~솔 나는 빵냄새가 당신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도 있다. 사무실, 부동산이 많은 빌딩 1층에 위치해있는 천연발효 수제빵집 미.소.빵.긋 ! 빵집 이름부터 기분좋게 만드는 '미소빵긋'. 가게에 들어가 빵을 맛보면 기분이 더 좋아질 것 같다. “한번 들어가볼까?“





나의 발걸음을 이끄는 냄새의 주인공... 먹음직스러운 빵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유식빵, 흑미식빵, 마들렌, 에그타르트, 호두파이, 카라멜러스크, 쌀쉬폰, 쌀카스테라, 오렌지카스테라, 깜빠뉴, 치아바타, 휘난세, 쿠키 등등등... 밖에서 본 가게는 아담해보였는데 이렇게나 다양한 빵들을 만나볼 수 있을줄이야! 웬만한 빵 종류는 다 있을 것 같은 이 곳은 빵Lover(덕후)에게 시간가는 줄 모르게 하는 공간이다. 미소빵긋의 빵들은 천연발효 수제빵으로. 빵을 먹으면 소화가 잘 안 되는 사람들도 비교적 소화가 잘 되는 빵이라고 한다. 열심히 빵 설명을 해주시는 사장님에게서 '빵Maker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빵Lover, 잘 찾아온 것 같다.






오늘의 빵Lover's Pick은 무화과 깜빠뉴 & 치즈 브리오슈. 사자마자 맛있게 먹느라 따로 구입한 빵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빵Lover에겐 이 날 먹은 빵의 맛이 아직 남아있다. 치즈 특유의 풍미와 빵 전체에서 느껴지는 달달함이 혀를 자극해 우유와 먹으면 더 맛있을 거 같은 그 맛. 이외의 (너무나 많은 종류의) 빵들은 다 먹어보진 못했지만 정말정말 풍성했던 시식코너와 빵Maker 사장님의 겸손한 자부심(?)을 보고, 이 곳은 추천할만한 빵집이라는 믿음이 생긴 것 같다. 근처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의 고된 야근까지 책임지고 있어 오후에도 인기가 많은 미소빵긋의 빵들은 점심시간인 12시-1시에 오면 더욱 다양하게 맛 볼 수 있다고 하니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오늘 하루도 ‘미소빵긋’ 하세요.




미소빵긋 

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범안로 1130 1층 109호  (독산역 2번 출구 나와서 안양천 방향으로 약 100m 직진 후 건너편)

영업시간 : 월 - 금 AM 8:00 – PM 10:00 / 토 AM 8:00 – PM 6:30) /  일요일 휴무


(금천문화재단)


불곰에게 잡혀간 우리아빠



허은미 저/김진화 그림 | 여유당


아빠는 왜 불곰에게 잡혀갔을까? 내지를 보면 불곰이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곰의 탈을 쓴... 누군가가 있다.

첫 장을 펼치면 불곰이 누구인가 바로 알게 된다. 화가 나면 얼굴이 불곰처럼 빨개지고 아침마다 집안을 들었다 놨다 하는 엄마는 별명이 불곰이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소리치는 불곰에게 쫓겨 등교한 아이는 ‘우리 가족’이란 제목으로 동시를 짓는다. 아빠, 동생, 순덕이(고양이)가 좋은 이유는 척척 쓰지만 “엄마는 왜 좋은지 모르겠다.”고 시를 맺은 아이는 그때부터 엄마가 좋은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불곰을 묘사하는 내용이 뜨끔하다. 불곰의 모습을 보면서 멋쩍어서 웃음이 나온다.

아이들과 함께 보면 아이들의 반응은 각각 다르다. 저학년은 왜 엄마가 불곰인지 크게 공감하지 않는 듯하다. 아직까지는 이 세상 최고인 엄마가 불곰 같은 존재라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나보다. 고학년은 반응이 다르다. 불곰이 엄마인 것을 알면서부터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엄마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시기로 접어들어서 그런 것 같다. 집에 있는 엄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하다.

아빠가 불곰을 만나서 엄마와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듣고 아이는 생각이 많아진다. 아빠가 안쓰럽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 이후 외할머니댁을 가서 엄마의 어릴 적 사진 부터 결혼 전 아주 예뻤던 아가씨 시절 사진을 보게 되는 아이.

엄마도 이전에는 나처럼 아이였었고 엄마의 엄마에게서 사랑받고 자란 존재라는 것을 느낀 후 엄마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마지막에 아이는 여전히 불곰에게 쫓겨서 학교를 가지만 아이의 발걸음이 가볍고 표정이 밝다. ‘우리 가족’ 동시에 엄마의 좋은 점을 찾아서 마지막을 완성한다. 

마지막 아이의 동시 내용은 무엇일까? 엄마와 의견 충돌을 보이며 방황하는 고학년 친구들에게는 엄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 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되고, 천사표 엄마가 꿈이었지만 현실은 고함쟁이인 엄마들에게는 공감과 위로가 되는 책인 것 같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활동가 박현진


*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연동형비례대표제를 보다.



1960년 4월 혁명으로 수립된 제2공화국이 내각책임제 정권인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젊은 세대들이 주로 그런 부류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다. 유의하고자 하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 중에는 그 역사를 모르는 경우도 있고 알고 있으면서도 내각제 정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그런 사실 자체를 알려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 제도 즉 내각책임제 정부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라 할 수 있지만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더 큰 이유라 할 수 있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란 어의(語義)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게 있는데 그것은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그로 인한 혐오 또는 환멸 때문일 게다. 국민들이 왜 정치에 대해 불신을 넘어 혐오감조차 가지는가를 묻는 것은 모두가 식상해 할 일이기는 하지만 그 질문을 멈출 수가 없다. 그렇듯 우리의 정치는 정치인 스스로도 자조(自嘲)해마지 않을 정도로 후진적이다. 

정치가 이 지경이 된 것은 어디까지나 그것을 일터 삼아 나선 자 곧 정치를 하겠다고 자리를 차지한 자들의 탓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인은 국회의원을 주류로 둘 수 있지만 정치가 업(業)인 자는 그 범주에 포함한다. 물론 모두는 아니지만 도덕성에다 역량 문제를 가진 자들이 많고 그런 자들로 인해서 얼룩진 헌정사를 빚게 한 것이 우리 정치의 현대사다. 

그러나 정치의 후진성을 말하면서 정치인 탓만 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들은 유권자 곧 국민들에 의해 선출되었으니 국민의 책임도 있기 때문이다. 기량이 부족한 선수로 구성된 팀은 승리는 커녕 궁색하고 졸렬한 게임으로 그들을 선택한 자는 물론 관전자들에게도 실망을 준다. 따라서 이러한 팀을 구성한 자와 그 배경을 제공한자는 그 팀이 이룬 결과에 대해 탓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듯 우리 정치는 구성에서부터 문제가 있으니 비정상적 운영이 될 수밖에 없고 결과가 좋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함량이 모자란 소재들로 제품을 만들면 온전한 제품이 될 수 없는 원리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있게 된 것일까? 우리 민족은 누가 뭐래도 우수한 문화민족이고 그것은 숱한 환란을 겪어내고 오늘의 번영을 이뤄낸 역사가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도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인적자원이 풍부하고 그로서 비롯한 문명과 문화가 꽃을 피워 세계인의 찬탄을 받는데도 유독 정치판만 조소의 대상이 되는 연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정치판의 혼탁은 사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함께 제기되어야 할 것은 그런 사람들이 활동하게 되는 환경 곧 생태계 문제다. 비록 유능한 사람들이 있어도 그런 사람들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 못 된다면 그들의 유능함은 소용이 없다. 토양에 문제가 있다면 열매나 꽃을 피워야 할 식물은 제대로 성장할 수 없고 대신 쓸모없거나 유해한 식물만 번식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좀 미안한 표현이지만 우리의 정치생태계가 그렇다.  

이런 생태계를 바꾸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쓸모없고 유해한 정치꾼들이 판을 벌이지 못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60년 전 4월 혁명은 당시의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을 심판하자는 국민적 염원의 결집이고 결국 성스러운 승리를 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민주주의가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이 때 선택한 정치체제가 내각책임제인 것은 정치체제를 두고 논쟁하는 오늘의 현실에 시사를 던진다.

그렇다고 내각 책임제가 이상적 정치체제라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정치체제가 오랜 시간에 걸쳐 민주주의를 앞세우면서도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기 어려운 점에 대한 반성을 해보자는 것이고 그것을 비교 접근방법으로 이해를 해보자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정치판은 대통령제에다 거대 양당이 강력한 통제체계를 견지하면서 긴 시간을 이어왔고 그런 환경이 오늘과 같은 정치체제를 있게 한 점을 성찰해보자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현실 정치체제에서는 참 정치인의 출현이 어렵고 비록 나온다 하더라도 제도가 만들어 둔 한계로 단명(短命)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현장, 즉 정치판에서 유능함이란 그들이 속한 집단에서 가치로 두는 이른바 당론(黨論)의 충실도로 판단되니 참 정치인이 설 자리는 비좁고 결과적으로 국민이 공감하는 정치를 보여주지 못한다. 거대 양당체제인 우리의 정치판에서 두는 가치 기준은 충성도이고 그런 환경에서 구성원의 소신은 자해행위가 될 뿐이다. 

살펴보았듯이 현재와 같은 거대 양당체제에서 참 정치인의 출현은 어렵다. 강력한 명령체계가 견고한 만큼 합리적인 질서가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헌법적 제약도 있는데 강력한 대통령책임제가 그것이다. 이 제도는 엽관(獵官)제를 관행으로 하고 있어 인적 구성의 다양성을 기하기 어려워 권력 집중의 규범을 만들게 되고 결과적으로 일인 중심의 권력 구도가 형성되어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비민주적 상황을 빚게 된다.  

근간 정치권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 이야기가 나오고 관심을 가지는 국민들도 있다. 아직은 몇몇 소수 야당의 주장이라 그 향방을 두고 논쟁을 펼치기에는 이르지만 정치판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일단 관심을 둘 만하다. 스스로 민주시민이라 자처한다면 의미를 둘만한 과제가 되지 않을까? 우리 정치판은 변화가 요구되고 그것은 개혁이라는 표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되어서다. 

(♣2018.12.12.)


장제모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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