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책이야기 206

 

아들러의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읽기 시작했는데 아직 멀었다.
△말하기 능력은 살아가는 능력과 직결된다고 한다.  
△우리의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기수용과 상호신뢰를 전제로 하면 인간관계가 원만하게 풀린다고 한다. 특히, 아들러는 인간은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임을 강조한다. 수평관계에서 건전한 사람은 상대를 바꾸기보다는 자신을 바꾸려 하고, 건전하지 않은 사람은 상대를 바꾸려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들러의 사상을 좀 더 들여다보면
△사람이 항상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  항상 좋은 사람인 것과 진정으로 바람직한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다르다. 진정으로 바람직한  관계는 서로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도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관계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 얽매이지 않으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또한, 낙관적인 태도는 신뢰 관계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힘들기는 하지만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 위기에 몰렸을 때도 ‘나라면 이 문제를 충분히 해결 할 수 있다’라고 자신을 믿고 도전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여러 가지 상황의 경우를 볼 때 상대방의 부탁을 거절할 때, 주의를 줄 때,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 때 웃는 얼굴로 말하면 미움을 사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한 착각이라는 것이다.

△경청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공감하면서 듣기, 흥미를 가지고 듣기, 몸 전체로 듣기, 상대방의 말을 함부로 정리하지 않고 끝까지 듣기, 일방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기(내 대화가 끝나면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 호흡 시간을 준다), 호감을 얻는 맞장구, 반감을 사는 맞장구를 쳐 준다,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마음과 상대방의 주관에 끌려가지 않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

△아들러 책을 읽다 보면 분명 다 맞는 말이긴 한데... 다르게 생각하면 내가 아들러의 방식으로 현대사회를 살게 된다면 호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도 나는 아들러의 사상에 자꾸만 빠져들게 된다. 내 자신이 절대 흔들리지 않고 나에 대한 믿음과 아들러의 사상을 함께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자기수용과 타자 신뢰, 타자에 대한 공헌은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활동가 이주희

 

은행나무 어린이 도서관의 책읽기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글입니다

도다 구미 지음 ㅣ 옮긴이 이정환 ㅣ출판사 나무생각

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no.206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짜르의 장군 잘베스키는 이렇게 적었다. “일용노동자가 시장이 된다. 자물쇠 제조공이 공장주가 된다. 짐꾼이나 경비원이 갑자기 재판장이 된다. 병원의 조수가 병원장이 된다. 이발사가 관리가 된다. 상병이 총사령관이 된다. 누가 이 사실을 믿겠는가?” 
‘누가 이 사실을 믿겠는가?’ 귀족도 영주도 지주도 아닌 것들이 사회 정치 경제의 주역이 되는 세상을? 그러니깐 봉건전제가 민주공화제로 바뀌는 역사를 짜르의 장군은 상상도 못했다. 
우리는 21세기 서울에서 짜르 장군의 환생을 본다. 육군 대장 출신 박찬주다. 부모 갑질이라니, 상사 갑질이라니, 선생 갑질이라니, 그것은 세상을 지탱하는 등뼈이자 훈육의 고갱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이런 위계질서를 흔드는 것들은 당연히 ‘삼청교육대’에 보내야 하는 것이다. 
삼청교육대는 80년대 초반 전두환이 사회를 억압했던 두 가지 공포 “광주 학살”과 “삼청교육대와 백골단”의 상징이다. ‘감히 반대를 하려면 목숨을 걸어라, 까불면 다 죽는다.’는 협박의 흉기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느슨해진 심신을 다잡는 ‘극기 훈련’이라 한다. 그러니 그에게 갑질이란 말은 얼마나 터무니없는 말일까? 수직적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니, 수평적 존중으로 조직이 굴러갈 수 있다니, 아랫것들 그러니깐 천한 것들이 가진 권리라니... 이 무슨 하늘과 땅이 거꾸로 서는 소리란 말인가? 
이렇게 노골적인 것은 사실 걱정도 되지 않는다. 왜냐면 보편과 상식의 눈에 그들의 낡아 썩어 문드러진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박찬주라는 전형적인 괴물 꼰대로부터 황교안과 그의 주변, 광주학살이 구국의 결단이고, 삼청교육대가 극기 훈련이니, 고문은 아마 정신 교양 쯤 여기는 저들이 실은 친일 후예들일 뿐 아니라 독재자의 적자들임을 친절하게 되새기게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근데 여기 또 다른 낡음이 있다. 1973년 대구 태생으로 KAIST 전산학과를 나와, 게임개발사와 벤처투자사를 거쳐 스타트업을 한, “성공한 1세대 벤처기업인”으로 “소탈하고 수평적 리더십의 소유자“로 문재인 대통령 직속 4차 산업혁명위원회 위원장 장병규라는 분이다. “내일 당장 망할지 모르는데 벤처가 어떻게 52시간 지키나” “나는 20대 때 2년 동안 주 100시간씩 일했다.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다. 내 인생을 위해서 한 거다. 스타트업에는 그런 사람들이 꽤 있다. 이런 스타트업에 주 52시간을 적용하는 것은 그야말로 국가가 나서서 개인의 권리를 뺏는 거다.”(중앙일보) 이 정도면 박찬주가 전두환 시대에 산다면 이 젊은 개혁가는 박정희의 유신시대를 만들고 있다. 법과 관련된 인권적 의식은 한 200년 전쯤인데 그가 미래 혁신 혁명의 대표라니 정말 앞이 캄캄하다. 
기성의 택시에 비해 ‘타다’라는 것이 혁신인데 이를 낡은 법 의식이 가로막는다고 하고 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승객을 골라 태우는 것이 기존의 택시라면, ‘타다’는 승객이 차를 골라 타고, 원하는 대로 부릴 수 있어서 서비스의 혁신이라는 것이다. 자가용처럼 부리는 택시는 참 좋지만 그 편리함에 운전하는 노동자가 제거되어 있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새벽에 배송되는 택배의 신선함에 밤새 배달하는 노동자들의 피땀이 흥건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 소비자 중심의 사회, 생산자,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능멸, 이것이 바로 가장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옥화라는 것을 그것은 혁신이 아니라 퇴행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깐 군대장 출신 박찬주가 낡아 보이지만 이른바 “성공한 1세대 벤처기업인으로 성공, “포브스 선정 2019 한국 부자 순위 47위“ “자산 8억9000만 달러(1조 513억 원)”를 가지신 것도 모자라 청와대 핵심을 차지하신 이분이 나에게는 군내 악취가 더 난다. 과거를 고집하는 것도 아니고 미래로 퇴행을 포장한 이 교활함에 치가 떨린다. 그래서 묻는다. ‘천박한 과거’ 박찬주 황교안과 ‘미래 팔이 과거’ 장병규 문재인, 지금 누가 더 낡았는가?  

문재훈 소장
남부노동상담센터

'탐방 기고 > 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학의가 무죄라고?  (0) 2019.12.11
기부금-자비를 팔다  (0) 2019.12.11
폼생 폼사?  (0) 2019.12.02
국론(國論)분열? 국론이란 없다!  (0) 2019.10.15
삭발이 의미하는 것  (0) 2019.10.14

<탄자니아통신 시즌2>

 

나는 참 속물이다. 보여 지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을 하면서도 과정에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하지만, 결과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결과 없는 과정은 경험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나만 유독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조금 심한 게 아닐까 생각되면, 나의 속물  근성이 부끄럽다 못해 자괴감마저 든다.
큰 행사를 치를 때면 나의 고질병이 더 크게 발현되는데,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은 초대 손님. 해외에 있다 보면 한국 측에서 가장 큰 손님은 말할 것도 없이 대사. 현지 측으로는 대사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정부 관료를 선정하려고 애를 쓴다. 귀빈의 수준 여부와 행사 규모는 보통 정비례하는데, 행사 규모를 넘어서는 욕심을 부려 과한 수준의 귀빈을 모시면 행사가 빛이 나는 건 명약관화한데, 그에 비례해서 데미지를 감수해야 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끼리 조촐하게 행사를 치르면 실수도 재미로 반전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반해, 판을 키우다보면 작은 실수에도 긴장하게 되어 더 큰 실수로 이어진다. 
어제가 바로 그런 날인데, 축구리그 폐막식이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서두르다 보니 꽃꽂이용 전지가위를 잊고 나온 모양이다. 분명 챙긴 것 같았는데, 가방을 바꾸면서 빠진듯했다. 다행히 운전기사가 내민 면도용 칼을 사용해 어찌어찌 테이블용 꽃꽂이를 하고 있는 중에 우리 측 귀빈들이 속속 도착한다. 교통 정체를 고려해 일찍 나서다보니 시작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것이다. 
손님맞이 하랴, 귀빈석 세팅하랴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니 행사 시작 시간이다. 우리 측 귀빈은 모두 와서 자릴 잡았는데, 현지 귀빈들은 아무도 도착을 하지 않는다. 마음만 급해 전화를 하고 있는 중에 축구리그 PM인 베아트리스가 와서 큰일이 생겼단다. 무슨 큰일? 이것보다 더 큰 일이 또 뭐가 있어? 경찰이 왔단다. 주변학교에서 국가고시를 치르고 있으니 행사를 취소하라고 한단다. 이곳이 교육센터라 다양한 시설이 모여 있는데, 축구장 바로 맞은편에 있던 학교에서 국가고시를 치르고 있는 중이었나 보다. 우리와 파트너쉽을 맺고 있는 단체의 장이 교육센터장까지 겸하고 있기에 그가 앞서 정보를 주었기 때문에, 그동안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느닷없이 경찰이라니... 그것도 미리 파악하지 못하고 날짜를 잡은 거냐고 종주먹을 들이대고 싶었지만, 지금 잘잘못을 따지고 있을 틈이 없다.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는데 어쩌겠는가? 수습은 차후에 해야지. 경찰 병력을 몰고 오기 전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겠다는 전의로 밀어붙였다. 다행히 시간이 조금 지나자 현지 최고 귀빈이 도착했다. 주요 귀빈의 참석으로 행사는 시작되었는데, 오프닝 행사를 마치면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운동장으로 옮겨 결승전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제일 힘 있는 현지 귀빈의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다행히 그가 방패막이가 되어 주어 행사장을 옮기지 않고 침묵 속에서 결승전을 치렀다. 힘이란 좋은 것이란 걸 다시 느끼는 순간이었다. 시상식까지 마치고 식사 시간. 귀빈석 오른편 천막 아래, 잔치 음식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한 번도 드셔보지 못하셨을 현지식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식사하고 가시지요? 추억이 될 텐데.”

대사는 이미 여러 차례 만나 그분의 성정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대사 부인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기에 혹여 불편해 하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역시 부창부수. 오히려 현지 귀빈이 일국의 대사를 어떻게 운동장에서 식사를 하게 할 수 있느냐며, 근처에 있는 호텔로 자릴 옮겨 따로 식사를 하자고 한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대사도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대사부인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식용바나나 레시피를 물어보며, 늘 한국음식만 요리해 먹었는데 도전해 봐야겠단다. 대사는 점심을 먹고 가지 않았으면 서운했을 뻔 했다며, 아주 맛나게 점심을 먹는다. 
상황이 좋지 않을 때,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행사에 느닷없는 복병을 만나 초반에 우왕좌왕하는 상황이 발생했지만, 여기는 아프리카가 아니냐며 언제든 변수가 있는 곳이니 마음 쓰지 말라고 도리어 위로하고, 늘 대접 받으며 생활했을 두 분이 운동장 탁상에서 조악한 식사를 즐겁게 하며 고맙다고 말할 수 있는 거. 멋지지 않은가! 절반의 성공에 그쳤지만, 좋은 사람들 덕분에 실패했다는 자괴감을 털어버리고, 일 년 동안 애쓴 행사의 마무리에 방점을 두기로 한다. 베아트리스에게도 잘했다고, 마음고생 많았다고, 안아 주어야겠다. 그리고 나에게도 칭찬을 해주어야겠다. “폼생 폼사면 어때? 너답게 잘 살고 있어.”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탐방 기고 > 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부금-자비를 팔다  (0) 2019.12.11
삼청교육대보다 더 낡은 것  (0) 2019.12.02
국론(國論)분열? 국론이란 없다!  (0) 2019.10.15
삭발이 의미하는 것  (0) 2019.10.14
무임승차  (0) 2019.10.14

최근 한반도를 온통 갈등의 장으로 끓게 했던 시간이 있었다. 한 사람의 문제로 인한 일로는 아마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을 대단한 사건으로 생각한다. 특정인의 도덕성을 두고 펼쳐진 사건이지만 그것이 던지는 메시지가가 오늘을 사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던진 시사가 매우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알 수도 없고 또 알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공정의 문제에서 자유스럽지 못하고 그래서 사회를 들끓게 했던 것은 그가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아야 함은 이야기를 해야겠다. 한 사람의 문제가 그렇게 온 나라를 요란스럽게 했던 것은 그가 정치권에서 가지는 위치와 그간 행적에 따른 위상이 이유이기 때문이다. 평소 사회정의 곧 공정의 상징적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는데 역설적으로 공정의 문제를 따져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공정(公正)은 사회정의의 문제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그것 즉 공정의 중요성을 화두(話頭)로 삼는 것은 모두가 지켜야 하는 보편질서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성을 존중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평화를 유지하는 강력한 질서로도 받아들인다. 직접적인 대상이던 아니던 그가 연루되었다는 점만으로도 거친 반응이 일은 것은 사회에서 공정이라는 가치가 어떤 것인가를 잘 말해 준다. 
그렇듯이 공정의 문제는 보통 사람들 간의 문제도 예사롭지 않는데 하물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나 그럴만한 곳에서 발생하게 되면 사회는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그것이 국가권력층에서 있을 때면 국가적 파장을 일으켜 이윽고 사회적 변혁의 불씨로도 발전되는 것은 세계의 역사들이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국가권력 상층부에서의 공정성 문란(紊亂)은 사회를 분열시키고 궁극에는 국민들의 불행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확대되면 민중의 저항으로 발전되어 혁명적 단계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예외가 아니고 특히 근현대사에서는 주목할 만한 민중적 저항들이 있었고 그것은 정권을 바꾸는 혁명적 현상으로조차 발전한 것도 있다. 
공정의 문제는 약한 자와 강한 자 사이에서 주로 제기된다. 물론 수평적 관계에서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당사자 간 시비를 다투는 정도로 제 3자에게는 관심사가 되지 않는다. 즉 공정성의 제기는 약자와 강자사이의 문제가 주(主)다. 여기서 말하는 강자는 국가권력을 비롯한 거대 권력들과 갑을(甲乙)관계에서의 갑(甲)의 신분인 자도 포함한다. 인간사에서 약자와 강자의 존재는 필연적이고 인간은 이기적 속성을 가진 만큼 이러한 구조에서 공정성 문제의 제기는 끊임없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법과 제도의 존재는 이러한 상황의 해결 책(solution)이다. 
공정(公正)의 의미는 ‘공평하고 올바르다’로 설명하고 있다. 공평(公平)은 누구에게나 동등한 대응을 하는 것 곧 평등을 말하는 것으로 공정은 곧  평등이 본질이라 생각한다. 사람들의 집단에서 모든 구성원은 기회의 균등이 보장되어야 햐고 어떤 목적으로도 차별을 두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법과 제도는 이러한 구조를 강제하는 유력한 수단이다. 그렇다면 사회에서 제기되는 공정의 문제는 법제도로 완벽히 근절할 수 있는가? 대답은 노(No)다. 이러한 구조가 우리사회의 법체제가 만나는 딜레마다. 법 제도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고 그래서 흠결이 있을 수 있고 또 재량권을 남용한 자의적 운영도 있을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법 제도가 정한대로 시행했는데도 공정의 문제가 제기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규정이 정한대로 시행을 했지만 그 규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즉 공정성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공정성의 문제란 재량권의 범위에서 시행자가 그의 지향에 따라 자의적 시행규정을 만들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비민주적 시스템 운영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작전을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수익자가 발생하고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피해자가 나오는 불합리한 구조가 된다. 그러나 불이익 당사자의 이의 제기가 없으면 이 시행은 불공정이 감춰지거나 공정한 결과로 귀결이 된다. 그렇듯 법 제도에서 공정의 문제는 사실(fact)의 문제이기 보다는 상황의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잦다. 
최근 서울의 한 자치구에서 제도 시행을 반대하는 시민저항이 있었다. 특정 행정시행에 공정성을 결여한 것이 이유다. 시행을 위한 규정을 만들면서 특정대상의 선정과 이의 채택과정을 시행자 의지대로 할 수 있게 했다. 실정법 위배를 지적할만한 곳은 없지만 그 제도가 취지하는 바의 달성 기대는 어려운 반면 지금껏 객관적 평가를 받던 상대방이 탈락 되는 불합리한 현상 발발이 우려된다.
그런데 주목하여 살필 것은 시행자의 지향에 순수성 의심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지금껏 잘하고 있고 또 업무 특성상 경쟁 대상에 비하여 업무이행 신뢰성이 우월한 기존단체를 탈락시키고 신뢰성이 불확실한 단체가 선정되도록 환경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러한 진행은 단체장 선거 공로자에 대한 배려와 전임자의 행적 지우기를 위한 일련의 수순이라는 지적도 있는 것이 그것이다.  
단체장의 법제도적 인사권 행사와 재량권 영역에서 제도변경을 시비하지 않는다. 다만 그 시행에 공정성 결여는 용납할 수 없다. 제도 변경이 시행자가 지목한 단체 선정 목적이라면 그와 관련한 일련의 행위들은 무효가 되어야 한다. 중앙정부는 물론 서울시도 민주주의의 확대를 위한 행정에 역점을 두고 있는데 기초자치구의 비민주적 시행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책임자는 응분의 처분을 받게 하고, 재발방지를 주민들에게 엄숙히 약속할 것을 권유한다. (♣2019.11.10.)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다양한 마을활동을 펼치고 있다.

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no.205

 

조국 전 장관의 부인 정경심교수가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짓이 버젓하게 검찰과 법원의 이름으로 자행됐다. 검사의 기소장의 오타까지 벳겨 판결하던 80년대 전두환의 시간이 소환되었나 보다. 그러고 보면 최근 유성 노동자들에 대한 검찰의 보복 조치도 기가 막혔다. 회사와 어용의 지긋지긋한 탄압과 괴롭힘에 견디지 못해 화를 물리적으로 폭발시켰던 노동자들의 형기는 만기를 넘겼다. 그러고 보면 최근 유성 노동자들에 대한 검찰의 보복 조치도 기가 막혔다. 회사와 어용의 지긋지긋한 탄압과 괴롭힘에 견디지 못해 화를 물리적으로 폭발시켰던 노동자들의 형기는 만기를 넘겼다. 그런데 검찰이 상고를 했다는 이유로 만기가 지났는데도 구속 재판을 강행하고 있다.(기자회견 등으로 항의하고 언론에 보도되자 뒤늦게 구속 취소 했다 함) 식민지와 군사독재가 만든 정권의 시녀이자 노동자 민중들에겐 절대 권력인 검찰과 법원의 적폐 DNA가 한치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어 민주주의를 능욕하고 있는 꼴이다. 
그리고 여기 또 다른 본말전도가 있다. 내년 방위비 분담금을 결정하는 11차 한미 방위비 분담금 1차 협상에서 미국은 무려 5배가 넘는 6조원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는 올 최저임금 10%를 올렸다고 세상이 무너진 줄 알았다. 인상분을 실질적으로 없애는 과정을 걸쳐 2020년 최저임금 인상은 2.9%. 참으로 마른수건을 쥐어 짜 식수(食水)를 만들겠다는 심보들이다. 그런데 미국은 방위비 분담금은 무려 500%를 인상했다. 작년 분담금 협상 결과에 대해서도 트럼프는 “브루클린의 임대아파트에서 114.13 달러를 받는 것보다 한국에서 10억 달러를 받는 것이 더 쉬웠다”며 만족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이 더 많은 돈을 내는 것에 합의를 이뤘다”며 자랑했고 그 결과가 2020년 분담금 500% 인상이다. 그런데 최저임금 인상에 그리 난리를 치던 여야 정치인 우국충정의 언론들이 미국이나 미국 대사의 이런 무리한 요구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거나 구경꾼이 되어 묵인 방조하고 있다. 이 깜깜한 어둠을 찢는 새벽 닭소리가 있었다.  
지난 18일 오후 2시 50분께 대학생들이 사다리를 이용해 미 대사관저 담을 넘어 마당에 진입한 뒤 ‘미군 지원금 5배 증액 요구 해리스는 이 땅을 떠나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 방위비 분담금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가 그것이다. 이들이 넘은 담은 방관과 침묵으로 세워진 예속의 담이다. 이들이 세운 사다리는 금기와 침묵, 절망의 담을 넘은 용기의 사다리이고, 그들이 외친 구호는 가장 절박한 평화와 통일의 염원이다. 그들은 테러범이 아니다. 그들의 손에 살상의 흉기대신 평화의 구호만 있었다. 그들이 외친 것은 평화이자 자주이자 호혜평등의 인류적 민족적 요구다. 그럼으로 그들에 대한 구속은 자주와 민주와 평화에 대한 구속이 된다. 한국 대사관 담을 넘은 소위 탈북민들을 우리는 처벌하지 않는다. 지금 벌어지는 홍콩시위에 대해 그 과격 과도함을 한국 언론은 탓하지 않는다. 그들이 약자로서 고통스런 현실을 딛고 보다 인간적인 곳으로 지향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미 대사 해리스의 표현대로 그 집 고양이의 평화도 깨지 못한 평화적 항의를 두고 불구속 기소가 아니라 구속을 시키는 것이나, 무슨 배후를 캔다고 시민단체 등을 압수수색하는 것은 지나치다. 이것은 지긋지긋한 군사독재 시절 국가보안법적 인식과 그 폭력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청년 학생들은 항의한다. 1급 마약을 밀수 한 것보다 음주 운전 사고를 내고 운전자도 대체한 국회의원의 자식들보다 ‘주권침해, 혈세강탈’을 항의한 이 젊은이들이 어찌 더 큰 죄이란 말인가? 용기를 낸 학생들에 대한 처벌 구속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들이 희생을 감수하면서 표출한 예속과 굴욕에 대한 항의와 거부, 자주의식 자체다. 종미(從美) 아니면 공미(恐美)라는 우리의 부끄러움에 대한 자각이다. 우리 사회 죽비가 된 그들의 구속은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탓하는 또 다른 본말이 전도된 우리 사법 불의함의 증거다. 구속자를 석방하라. 불구속 재판으로 충분하지 않는가?

문재훈 소장
남부노동상담센터

나는 결핍된 ‘엄마 유전자’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성장 기간이 짧은 동물들이 부러웠고, 엄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각자의 길로 흩어지는 뱀을 보며 감탄하기도 했다. 아이들 대학 입학만 하면 엄마 역할은 그만이라고 결심까지 했다. 이런 내가 싫어 결혼하지 말아야 했거나, 아이를 가지지 말았어야 했다고 자책할 정도였다. 그래도 아이들은 성장했고, 나도 힘겹지만 나만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네 맘대로 하게 둘까 보냐는 듯, 작은 아이가 혼자만의 삶을 힘들어했다. 외로워하는 아이를 보며 성장기에 사랑을 제대로 주지 못한 내 탓인 듯해서 마음이 아팠다. 
아이는 강아지를 입양해야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하나의 생명을 책임지기로 한 것은 하나의 세계를 떠맡겠다는 것인데, 그 막중함을 알고 저러는지 싶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지인들께 자문을 구했다. 결코 키우는 일이 쉽지 않을뿐더러, 수명이 인간보다 짧아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중국에서 살며 포메라니온을 잠시 키웠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작은 아이는 그때도 노래를 불렀었다. 그 소리를 듣다듣다 남편이 어느 날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 들어온 것이다. 갈색의 털이 긴, 우아하고 귀티가 철철 흐르는 녀석이었다. 그때는 내게 호시절이어서 살림을 맡아 주던 아주머니가 있어 나는 이의가 없었다. 내가 돌봐 주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아이와 친구가 되어 잘 지냈지만, 알러지 때문에 포기했다. 그때 아이는 상실감으로 오래 힘들어했다. 작은 아이는 유난히 어렸을 때부터 동물에 대해 각별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다 나른 병아리, 이구아나, 토끼, 누에, 달팽이 등등, 다양한 동물들을 집에 들였다. 예쁘다고 만져 대니 며칠 못 가 죽어 나갔다. 병아리 때문에 밤에 동물 병원으로 달려갔던 일은 지금도 생생하다. 지나친 사랑은 폭력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할 나이였다. 지금도 병아리와 포메라니온 얘기를 하면 눈물을 글썽인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며칠을 고민했다. ‘현재가 중요하지. 미래는 미래에 맡기자.’ 무조건 시작하라고 권했다. 행동하지 않으면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지극히 현실적인 큰 아이는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생명을 무턱대고 입양하는 건 죄악이란다. ‘엄마는 내 딸이 더 중요해. 파양을 하더라도 우선 시작하게 할 거야.’ 라며 재갈을 물렸다. 그리고 며칠 후 입양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우처럼 생긴 녀석이다. 짙은 회색 털을 가진, 눈 주위에 흰색 반점이 있는 암컷이다. 지극히 평범한 잡종이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하더니 강아지에게도 해당이 되는 모양이다. 너무 예쁘게 생겨서 누가 데려가면 어쩌냐고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니다. 아니거든, 하고 말해주고 싶은 걸 참는다. 어떤 날은 손바닥에 놓인 하얀 물건을 유치라며 보내온다. 또 어떤 날은 경쾌한 목소리로 ‘앉아. 일어서. 손 내밀어. 잘했어.’ 하는 녹음 파일을 보내온다.  아주 단호한 말투가 숙련된 조련사다. 또 어떤 날은 강아지 공원이란다. 햇살 아래를 거니는 아이 생각을 하면 온갖 걱정이 다 없어지는 느낌이다. 그렇게 산책도 하고 움직이라고 해도 컴퓨터 앞에 껌딱지마냥 달라붙어, 모든 생활을 온라인상에서 하던 딸아이가 변하는 게 신기했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탓에 밤낮이 거꾸로 된 생활을 해오던 아이가 낮을 되찾은 것만으로도, 절이라도 하고 싶다. 카톡을 통해 소식을 전해 올 때마다, 셋째 잘 보살피라고 당부하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아프리카에 있으면서도 한국에 저당 잡힌 삶일 수밖에 없겠구나 싶다.
 내가 코이카 단원 생활을 할 때, 다르에스살람을 와야 할 때면 모로고로에서 활동하던 동료, 하영이네 집에 한 템포 쉬어갈 겸 들르곤 했었다. 그 당시 하영이에게 고양이를 입양했다는 소리를 들었고, 가끔 그녀석의 안부를 전해 듣곤 했었다. 도둑고양이처럼 밤이면 밤이슬을 맞고 다니던 녀석이었던지라, 저녁에 도착한 나는 그 녀석을 보지 못하고 잠들었었다. 그리고 하영이는 출근을 하고 나는 늦잠을 잤는데, 눈을 떠보니 까만 고양이가 내 머리맡에 누워,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보듯 지긋이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닌가?  윤기가 흐르는 새까만 털을 가진 녀석이었다. 
녀석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던 나는, 겁내지 않고 서로 바라보기를 하며 누워있었다. 그러다 내가 몸을 돌려 눕자 바람소리조차 내지 않고 내 앞으로 다시 오더니 같은 자세로 나를 지켰다. 
지금도 그날 생각을 하면 따뜻하고 평화롭다는 게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생각된다. 고양이는 거리를 둘 줄 아는 동물이라더니 정말 그렇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하영이는 엉엉 울며 전화를 해왔다. 한참을 통곡을 하더니 까망이가 죽었단다. 그 듬직한 녀석이 죽다니. 밤이슬을 밟으며 나가, 가끔은 동료 고양이들에게 공격을 당해 부상을 입고 들어온다더니 기어이 변을 당했구나 싶었다. 벼룩 때문에 약을 뿌렸는데 피부가 약한 까망이에게는 치명적이었고, 엄청난 고통 속에 죽어갔다고 했다. 죄책감과 상실감으로 어찌할 줄 모르고 울기만 했다. 하영이는 그 후 오래 힘들어했다. 나는 까망이를 만난 후, 고양이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변해, 내가 혹여라도 반려동물과 함께 하게 된다면 고양이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양이가 좋아한다는 캣닢.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것을 먹이는 게 걸려 직접 키우기로 했다는 젊은 농부 이야기, 유기견이 많아져 입양 가족을 찾지 못한 강아지를 캐나다로 입양시키기로 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쯤 되면 사람과 동물이 별반 차이가 없어지는 시대다. 애완동물이 사람까지 밀어내는 것이 아닌가 싶어 내심 불안했었다. 사회가 부자, 부자가 키우는 애완동물, 빈자, 빈자가 키우는 애완동물로 재 계층화되는 것 아닌가 걱정도 되었다. 사람이 사용해도 부족한 재화를 동물에게까지 덜어주면 어쩌자는 건가? 못마땅하기까지 했다. 그런 내가 요즘은 동물과 사람이 함께 직립 보행을 하며 함께 살아가는 동화 같은 세상을 상상한다. 보경스님의 ‘어느 날 고양이가 내게로 왔다’ 속의 삽화를 보며 든 생각이다. 나의 사고가 더 확대되어, 가족이 꼭 사람이어야만 하나?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살아야 하는 것만이 정상인가? 함께 해서 행복하고 즐겁고 편하면 되는 거지. ‘엄마 유전인자’가 부족한 것이 아니었고,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며, 내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된 듯하다.
셋째야 사랑한다.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책이야기 204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의 덕을 보고 있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손안의 인터넷서점이 그것이다. 오랜만에 문학 장르로 들어가서 무슨 책이 신간으로 나왔는지, 인기가 있는지 쭉 보다가 도서관 독서모임을 갖는 요일과 같은 ‘화요일’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제목을 다시 들여다보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제목이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
알고 보니 거의 20년 가까이 중·고등학생 추천도서에 있을 만큼 권장되고 있는 책이었다. 책의 겉표지를 리뉴얼해서 다시 출판할 정도로 베스트셀러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출판사마다 평범한 사람의 죽어가는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작가는 열한 번째 출판사에서 출판계약을 맺게 되었고 지금 이 책은 수 십 개국에 출판되어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며 여러 모임, 장례식장, 교회 등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읽혀지고 있었다. 
나는 화요일 날 독서모임을 갖는데, 작가 미치 앨봄은 몇 달 동안의 화요일동안 작가의 대학시절 교수님과 죽어가는 것의 의미를 토론하는 모임을 갖는다. 그 내용에서도 엄청난 파격과 무게가 느껴지는 이유는 삶과 죽음은 동시에 있고 우리 곁에서 멀지않음에도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멀찌감치 밀어놓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교수님은 60세가 넘으면서 근위축성측삭경화증, 즉 루게릭병에 걸린다. 내 생전에 영어로 더 쉽고 익숙한 병으로 유일하다. 얼마 전 하늘의 별이 된 앨빈 토플러도 이 병에 걸렸었다. 그래서인지 루게릭병은 천재에게나 걸리는 희귀하고 어쩌면 미화된 기억으로 있었다. 하지만 책에서 보니 몸이 아래부터 위로 녹아내려 몸 안에 몸이 갇히고 통증은 그대로 느껴진다니 정말 무섭게 느껴졌다. 그 무시무시한 병에 걸린 모리교수가 ‘생명이 있는 나를 참을성 있게 연구하시오’라고 말하니 그는 죽음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을까.
사람은 태어나면 동시에 한번 죽음을 약속한 것과 다름없다.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조차 죽음은 환상으로 아련하게 꾸며진 이미지 일뿐 전혀 현실감이 없다. 하지만 죽음의 그 순간을 알아내려고 생각에 빠지는 것은 우매한 일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신만이 알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마지막이 있는 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내는냐에 집중해야한다. 그 과정이 가치가 있다면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마라톤을 완주한 느낌처럼 해냈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 이해가된다. 교수는 우리가 달성하려는 많은 것들은 가치가 없는 것이 많다고 한다. 내가 오늘을 달리게 하는 그것은 결국에 나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문제다. 
배가 목표 없이 항해하면 비바람에 휩쓸려 외딴 무인도에 다다를 수도 있는 것처럼 인생의 항해자인 나는 다시 한 번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목표를 점검해야겠다. 경제적으로 윤택한 것이 인생의 최우선순위가 되면 결국 끝없는 사막을 걷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삶이라는 여정에는 나무도 있고 꽃도 있고 웅덩이도 패여 있지만 부드러운 잔디밭도 있는 것이다. 힘든 일이 생겨도 그러려니 하고 기쁜 일이 생기면 반갑고 감사하게 맞이해야겠다. 오늘 하루도 내 인생여정의 의미 있는 하루이길...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활동가  이명신

미치 앨봄(작가) 지음 ㅣ 공경희(번역가) 옮김 ㅣ 살림출판사 펴냄

 

'탐방 기고 > 은행이의 책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명하고 똑똑하게 살고 있나요?  (0) 2019.12.11
아들러식 대화법  (0) 2019.12.02
『트리갭의 샘물』을 읽고  (0) 2019.10.14
1초마다 세계는  (0) 2019.09.27
숲에 함께 들어갑시다  (0) 2019.09.16

정조 대왕 능행 차 재현 행사의 서울구간 중 시흥 행궁이 있었던 금천구 행사가 주민들의 열띤 참여로 성과 있게 종료된 것 같다. 작년에는 수원-화성행사와 연계한 행사라 전년도보다 더 확대된 규모로 진행하였는데, 서울 구간 즉 시흥행궁 행차 구간의 주민참여도는 행사규모에 비해 만족할만한 수준이 못 되었다고 한다. 행사 당일 비가 온 관계도 있지만 대 주민 홍보 부족으로 주민들이 행사를 알지 못한 것이 이유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행사 운영에 주민들의 직접 참여가 없었던 것도 중요한 이유라는 게 관심을 가진 주민들의 평이다. 
지역 특성을 가진 행사는 해당 지역 주민들과 관이 협력을 하여 공동으로 개최를 하거나 주민들이 주체가 되고 관은 후원을 하는 경우가 보통인데 이 행사는 시작부터 관 주도로 하고 주민들은 단순 구경꾼으로서 만의 역할로 일관했다. 이러한 현상은 이 행사의 성격으로 볼 때 적절한 시행 모습이 아니다. 그렇듯이 지난 행사는 이 행사의 본래 취지를 충족하기에는 부족하였다 생각된다. 
그에 비하면 금년 행사는 지난 해 행사에 비해 잘 된 것 같다. 우선 참관 관중도 많았고 호응도도 컸다. 이는 해마다 연속하는 행사라 주민 인지도가 넓어진 관계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연속 행사라는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이 행사에 주민들이 구경꾼으로서만 있지 않고 직접 참여한 것이 크게 효과로 나타났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구경꾼으로서의 역할만 한다면 주민 행사의 의의를 이야기할 수 없지 않는가? 
주민들의 행사 참여는 이 행사가 시사(示唆)하는 바의 본 모습이이다. 정조 임금의 화성 능행 차 목적은 억울하게 돌아가신 부친과 그로 인해 슬픈 삶을 산 모친에 대한 연민을 행동하는 것만이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조 임금의 가슴에는 부모를 생각하듯 국민을 생각하는, 즉 군주의 애민(愛民)사상으로 이는 정조 임금의 치적에서 중요한 포인트인 것은 주지하는 바다. 
정조 임금 재위 시 애민 사상은 여러 형태로 보여준다. 요점을 말하면 그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의 행동을 보면 당시의 사회적 가치관을 부정하는 것조차 서슴지 않았던 점이다. 즉 반상(班常) 신분을 따져 차별하는 당시의 사회질서를 무시해 버린 것이다. 이 행사에 주민의 참여를 의미로 두는 이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이 행사에 참여한 주민에 의하면, 이 행사는 기획 초기부터 주최 측과 별도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정조 능행 차 마중을 위한 주민모임을 만들고는 각종 준비를 하고는 행사 주최자인 당국에 알려 함께 협력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탐탁지 않아 함으로 주민 자율로 행사로 치르기로 하였다 한다. 
주민들에 의한 능행 차 환영 행사는 당국이 준비한 본 행사에 간여하지 않으면서도 행사 규모의 확대와 내용의 다양성을 기하는 효과를 냄으로 행사를 돋보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고, 그것은 당일 행사에서 그 취지하는 바를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즉 이들 주민 참여행사는 본 행사장이 있는 곳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서 능행 차 행렬을 맞아 미리 구성한 풍물패 등 주민들 동아리들과 함께 열렬한 환영으로 능행 차 일행을 맞았다. 그런 후 행렬 뒤를 따라 시흥 행궁 위치로 추정되는 은행나무 근처의 본 행사장 까지 풍악을 울리며 따름으로 본 행사를 멋있고 풍성하게 하는 효과를 내는 것으로 시행되어 주민이 주체가 되어야 하는 이 행사의 본래 의미를 들어내는 효과를 내었다.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시행한 이 행사의 모임은 금천구의 민간 역사 문화 연구기관인 ‘(사)금천문화역사포럼’이 앞장을 서고 관내 주민 동아리들이 뜻을 모아 ‘정조 대왕 능행 차 주민 마중모임’을 만들고는 기획에서 시행에 이르기까지 담당했다. 그런데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이 행사를 두고 뒷이야기들이 있다 한다. 민간영역이 행사에 지나치게 참여하므로 공공영역이 주도한 행사의 빛이 바래졌다는 불평이 그것이다. 즉 주민들이 너무 설치는 바람에 공공 주도 행사의 모양이 구차해 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평이 사실이라면 이는 비판 대상이 되어야 한다. 축제를 곁들인 지역 행사라면 공공영역이 주최하던 민간영역이 주최를 하던 주민들이 많이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고 더욱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행사를 돋보이기 위한 활동을 하는 것은 칭찬을 받을 일이지 꾸중 들을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공공영역이 준비해 둔 순서가 있고 그것의 진행을 위한 형식에 민간 부문의 순서가 간섭이 되거나 행사의 질을 떨어지게 했다면 지적되어야 하지만 당일 주민들의 참여 내용이나 지향을 볼 때 그런 모양은 없었다는 것은 다수 주민들이 동의하는 바다. 
사실, 이러한 불협화음은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행사 준비를 할 때부터 예견되었다는 것이 행사를 주도했던 주민들의 증언이다. 즉 행정 당국은 민간이 준비하는 마중행사의 예산 지원 등 도울 수 있는 부분도 인색 하게 하는 등 처음부터 민간 영역의 행사 참여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한다.
이 행사는 서울시의 주요 축제로 해마다 연속하여 진행되는 것으로 이해를 한다. 따라서 이번 행사에서 보인 민과 관 사이에 불협화음이 있었음을 서로가 겸허히 받아 들여 다음 행사에서는 민과 관이 함께 치르는 사실적인 민·관 협력 행사가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지역 축제는 그것이 가진 역사성을 살핌으로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교훈이 되고 더불어 지역사랑의 동기를 부여한다. 시흥행궁 행사를 잘 준비하여 수원 화성 행사에 비견되는 행사로 치르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2019.10.24.)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다양한 마을활동을 펼치고 있다.

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no.204

 

2013년, 박근혜 사퇴를 촉구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시국미사에서 박창신 신부가 한 발언 중 ‘NLL과 연평도’ 관련 부분만 꼬투리 잡아 당시 박근혜 대통령, 정홍원 총리, 황우여 대표에서 윤상현, 김태흠, 유승민 등등 새누리당 의원과 어버이연합과 고엽제전우회 등 보수단체들까지 집단으로 막말과 협박을 쏟아댔다. 그들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박 신부의 조국이 어디냐?”고 물었다. ‘구속시키라’는 구호는 점잖고, 성당에 난입, 화형식을 해대며 ‘즉각 사형에 처하라.’는 요구를 했다. 그때 박근혜는 “국민과 국론을 분열시키는 시도를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며 국론의 통일을 강조했다. 
국론 통일을 말하면서 견해가 다른 이들을 ‘비국민’이라 하는 것은 100% 일본 군국주의 산물이다. 이 말의 존재 자체가 아직도 한반도 남녘에 일제의 정신적 문화적 식민노예의식이 절대적 위력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한다. 다행히 문재인 대통령은 광화문과 서초동 대규모 집회를 ‘국론분열’이 아니라 “대의정치가 민의를 반영하지 못했을 때 국민들이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직접 민주주의 행위로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본다” 했다. 물론 여기서도 국론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것이나 직접 민주의 보완제도인 대의민주주의를 근본으로 보며 민주주의 본말을 전도시킨 근본적 한계는 여전하지만 말이다.
국론은 없어야 한다. 있다면 정책에 대한 정부 정당의 입장이 있을 뿐이다. 국론이 문제가 되는 것은 국론이란 말로 모든 이의 일치와 복종을 요구하면서, 이견이 있거나 따르지 않는 사람을 ‘비국민’이라하기 때문이다. 이런 낱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일제가 1930년대 후반 국가총동원법이 내리면서부터다. 조선 등 식민지를 포함한 일제 군국주의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애국심이라 선동하면서 정부를 비판하는 모든 것을 격리, 차별 증오하기 위해 만들어 낸 장치다. 국가와 정부를 일치시키고 관료체제를 국민 봉사 체제가 아니라 감시 동원체제로 만들어 버리며 국론을 분열시키는 존재를 비국민으로 만든다. 그 최근 버전이 ‘종북좌빨’이다. 국론이란 말 자체가 군국주의 파시즘이자 지독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다. 민심은 변하는 것이고 발전하는 것이며 계급계층의 이해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치사상 양심의 자유가 필요한 것이고 공화주의와 민주주의가 필요한 것이고 헌법 전문에 저항권 정신이 적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국론분열을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머릿속에 일본과 미국, 군부독재와 신자유주의로 이어지는 구조적 적폐의 축이 살아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나라당 시절에 ‘너의 조국이 어디냐’ 묻던 이들이 ‘조국 물러나라’ 하고 있고, 조국에 대한 비판이 외려 애국이라던 이들이 조국수호를 외치고 있다. 총칼을 쥔 파시즘이 광장을 지배하는 파시즘으로 야누스가 되어 출몰하고 있다. 그 결과 놀랍게도 두 광장은 출렁이는 태극기로 하나가 됐다. 저 도저한 국가주의라니... 나는 차라리 눈을 감는다. 
통일 후 첫 독일 대통령이자 법률가 출신의 보수정치인 헤어초크는 TV 토크쇼에서 “독일을 사랑하십니까?”라는 진행자 질문을 받았다. 그는 “나는 아내를 사랑하지만 결혼 제도를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답했다. 국가는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결혼과 같은 제도이고 사랑해야 할 것은 독일이라는 국가가 아니라 아내와 같은 독일 국민들이란 말이다. 사람이 먼저라고 했던 이들아, 당신들이 서 있는 광장에 고통 받는 민중, 그 사람들은 있는가?

문재훈 소장
남부노동상담센터

'탐방 기고 > 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청교육대보다 더 낡은 것  (0) 2019.12.02
폼생 폼사?  (0) 2019.12.02
삭발이 의미하는 것  (0) 2019.10.14
무임승차  (0) 2019.10.14
“평화 소녀상에 무심했던 나를 반성하는 시간”  (0) 2019.09.27

얼마 전 대한민국의 제일야당 대표가 공개된 장소에서 삭발을 했다. 이유는 법무부 장관 임명 반대에도 대통령이 무시하고 임명을 한데 대한 항의다. 누구는 잘 했다 하고 누구는 그저 그렇다 하는데 코미디라는 이도 있다. 누구 말을 앞세우고 싶지는 않지만 모양이 좋지 않다는 데 공감이 두어진다. 
삭발을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보통의 이해로는 세속인이 불교에 귀의하고는 일정 수도를 거친 후 승려가 되는 절차 때 하는 의식이고, 이런 경우가 아닌 것은 이해관계에 있는 한 당사자가 다른 당사자에게 물리적 대항이 어려울 때 자기 의지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는 대개 약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 제3자에게 자기주장의 공감을 구할 때 하는 행위이다. 
금번 야당 대표의 삭발은 후자의 경우이기는 하나 그런 패턴으로 보기는 좀 그렇다. 통념적인 관점 그러니까 삭발 당사자가 약자로 볼 수도 없고 또한 주장의 내용을 볼 때도 그렇다. 물론 정치판에서 의원 숫자가 여당보다 적은 야당은 상대방인 여당에 비해 약자로 볼 수 있지만 그런 구조를 약자로 보는 것은 통념에 비추어 볼 때 바른 표현이라 보기 어렵다. 삭발의 목적을 냉정히 살펴보면 자기 정파의 주장 관철을 위한 여론몰이로 보인다. 좀 우스운 비유이겠지만 국민들을 자극하여 동정을 구하기 위하여 벌이는 구차한 퍼포먼스에 다름이 없다. 
그간의 정치 상황을 볼 때 그들 정파로서는 어떤 형태로던 전기가 필요한 시점이고 그래서 정부 여당의 허점이나 실수를 살피고자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터다. 이런 중에 그들이 가시 같이 여기던 인사가 법무장관 후보가 되자 당력을 총집결하여 후보자의 결함을 찾았고, 일부 흠결을 발견하고는 이를 우호 언론의 도움을 받아 확대하였는데 상당수 국민들이 비판적 관심을 보이자 이를 후보자 낙마를 통해 책임당사자인 정부 여당에 타격을 주는 호재로 삼았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러한 야당의 강경한 반대에다 일부 국민들의 비판적 여론에도 후보자를 장관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러한 결정이 잘한 것인지 또는 잘못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통령의 행위는 헌법이 부여한 권리의 행사이고 그것이 법률적 하자가 없다면 이를 문제 삼는 것은 옳지 않다. 다시 말하면 현재에 대통령의 권리를 무효화할 장애가 없는데도 그 권한을 부정하는 것은 헌법 규정을 지키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번 임명이 있기 얼마 전에도 야당이 극렬하게 반대한 후보자를 임명한 적이 있었는데 그 후 별다른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으면서도 이번 임명을 두고는 죽자 살자 하며 반대를 하고 뜻대로 되지 않자 야당 대표가 삭발까지 한 것은 시국을 보는 관점의 일관성 없음을 탓하는 것으로만은 해석이 어렵다. 
추측컨대 야당의 행위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즉 문제의 당사자인 법무부 장관 죽이기를 통한 유리한 정국 이끌기가 그것이다. 과거 그들이 여당이던 시절의 적폐로 국민의 신뢰 추락으로 인한 위축된 위치와 그에 따른 국면 전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문제의 장관은 그들에게는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던데 대한 응징적 반격도 필요한 터다. 국민들의 여론에 예민한 정치인들의 속성 상 이런 호기를 놓칠 리가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모습 그러니까 제일 야당 대표의 삭발모습을 긍정적으로 보기가 어렵고 그래서 그런지 뉴스의 확대 편성에도 국민들은 비례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필자의 편견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에 대해 관심을 크게 두지 않는 이유는 그들에 대한 신뢰의 문제도 있겠지만 제일 야당 대표의 삭발이 필요한 사안인가에 대한 공감도가 낮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그의 삭발에 의미를 두기에는 그가 지닌 현실적 권력이 막강하고 그런 배경에서 품위 있는 반대 표시를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일 게다. 
솔직히 그들 정당에 대한 신뢰를 두지 못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과거 그들이 집권 주체였을 때의 적폐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있는데도 별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하면 작금에 그들이 보인 행태들이 바람직한 정치인의 자세가 아니고 더욱이 민주주의 실현 책임 당사자로서의 기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배경으로 이번 일의 의미를 평가절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에 보여주는 그들의 행태가 그들이 가진 권위에 반한데 대한 실망이다. 
비록 문제의 장관에 대한 흠결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당사자적 책임 유무를 검찰이 조사 중이고, 임명일 현재에 그가 장관이 되어서 안 될 직접적인 결함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대통령의 임명권 행사를 시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헌법이 규정한 대통령의 임명권을 부정하는 행위이므로 법치(法治)가 아니고 더욱이 민주주의가 아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총력적 반대를 하는 것은 정치 의도를 가진 행위다. 내년 총선에서 여당을 압도하는 의석수 확보고 그를 바탕으로 집권 기회를 잡기 위한 정치포석이 그것이다. 이러한 추구를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그러나 집권을 목적한다면 그에 맞갖은 모습이어야 한다. 국민을 설득을 하려면 발전적 국가 비전 제시와 그 달성에 설득력을 가진 정책 제시와 같은 모습이 그것이다.
집권을 위해 상대 당을 공격하는 것은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 제기에 상식이 결여되면 국민들은 공감하지 않는다. 공격을 위해 반대를 할 때는 상식범위에서 그리고 권위 있게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막강한 위치의 제일 야당 대표의 삭발은 그런 모습이 아니다. (♣2019.10.09.)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다양한 마을활동을 펼치고 있다.

'탐방 기고 > 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폼생 폼사?  (0) 2019.12.02
국론(國論)분열? 국론이란 없다!  (0) 2019.10.15
무임승차  (0) 2019.10.14
“평화 소녀상에 무심했던 나를 반성하는 시간”  (0) 2019.09.27
제 2의 인생  (0) 2019.09.27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책이야기 203

 

『트리갭의 샘물』은 ‘영생’을 주제로 한 우리나라 단편동화집을 읽다 추천받은 책이었어요.
그날 참 신기한 게, 같은 책을 여러 명이 읽었는데, 다 비슷한 느낌을 받았더라구요.
‘뭔가 부족해. 아이들이라고 이만큼만 쓴 걸까? 이 주제가 짧은 에피소드 같은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이야기들 말이에요. 작가들이 더 고민하고, 한발 더 나아가 ‘영생’이라는 주제를 풀어주면 좋았겠다는 아쉬운 마음을 풀어놓으며 답답해하고 있을 때였어요. 
“‘영생’을 주제로 한 책은 『트리갭의 샘물』을 읽어봐요!”
라고 한 분이 자신 있게 추천하시더라구요. 그래서 다이어리 한쪽에 크게 별표 쳐가며 ‘꼭 읽기!’ 해놨지만, 인연이 없었는지 읽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며칠 전 글은 써야 겠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글로 쓰고 싶은 책’이 없는 거예요. 그림책도 뒤적여봤고, 소설책도 뒤적여봤고, 실용서까지도 뒤적여 봤지만 마음에 오는 책이 그날따라 없었어요. 터벅터벅 도서관에 갔고, 그때 마침 반납된 『트리갭의 샘물』을 본 거예요. 어찌나 반갑던지요. ‘아! 이거 봐야겠다!’ 하고 얼른 빌려왔답니다.
그리고 오가는 버스 안에서 읽었죠. 생각보다 금방 읽었어요. 동화 같기도 하고, 옛이야기 같기도 한 분위기의 이 책을 아주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갑게, 기쁘게 읽었어요. 읽으면서 알았거든요. 이 책은 ‘좋은 책’이라는 걸 말이에요. 제게 ‘좋은 책’이란 읽고 나면 마음에 무언가가 남는 책인데, 남는 게 뭔지 명확한 책이에요. ‘뭘 남겨야 하지?’하고 고민할 여지를 주는 건 제 기준에서는 좋은 책이 아니에요.
『트리갭의 샘물』 의 줄거리는 간단해요. 한 숲에 사는 한 가족, 그 가족은 샘물을 먹고 늙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는 가족이에요. 아주 나이도 많죠. 아무도 모르게 숨어 살고 있어요. 그리고 그 숲 소유주의 딸인 어린 아이, 어느 날 이 아이와 그 가족이 만나게 되요. 그리고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되죠. 늙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가족들끼리만 숨듯 살아가야 하는 삶을 이어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말이에요. 가족은 여자 아이에게는 절.대.로 그 샘물을 먹지 말라고 하죠. 불행을 가져올 수도 있다면서요. 나중에 여자 아이는 샘물을 먹고 영생을 얻을 수 있었지만, 친구인 두꺼비에게 부어 버려요. 그리고 나중에 이 가족이 이 마을에 왔을 때 이미 여자 아이는 죽고 없죠. 샘물도 사라져 버렸구요.
이 책은 끊임없이 ‘영생’이라는 것이 행복한 삶이 될 수 없다며 가족의 입을 통해, 여자 아이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흘러가는 시간을 사는 사람들 속에서 정지된 시간을 사는 사람들은 정상으로 보이지 않잖아요. 다들 나이를 먹는데, 이 가족은 늘 그대로였어요. 그러다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느낄 때쯤 떠나는 거예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그래서 또 몇 년을 살다, 또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느낄 때쯤 또다시 떠나야 하는 거예요. 도망치듯이 말이에요. 결혼을 해도 행복할 수 없고, 모두가 늙어가고 죽어가는 가운데, 이 가족만 그대로인 거예요.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말이에요. 
그래도 읽으면서 다행이다 싶은 건 가족이 다 영생을 얻었다는 거예요. 혼자라면 너무 외로웠을 텐데, 가족 4명이 다 영생을 얻었으니 서로 의지하며 나누며 그래도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작가도 그래서 가족에게 영생을 준 거겠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문득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의 생각이 궁금해 졌어요. 
“아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아?”
“싫어. 아픈데 죽지도 못하고 계속 살면 뭐해?”
“음... 아프지도 않고 영원히 산다면 어때?”
“싫어. 늙어서 계속 사는 건 싫어.” 

 

“그럼, 지금 모습 그대로 멈춰서 아프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계속 사는 건 어때?”
“싫어. 가족들이 나보다 먼저 죽을 거잖아. 그러니까 난 영원히 사는 거 아주아주 싫어.”
『트리갭의 샘물』에서 작가가 하려던 말을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나 봐요. 아이의 마지막 말이 작가가 하려던 말이었고, 제가 마음에 남겼던 말이었거든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먼저 죽는 걸 보는 게 얼마나 괴로운 건지 아이는 그 짧은 상상만으로 이미 알고 있었나봐요.  
작가는 그래서 가족 모두에게 영생을 주었나 봐요. ‘행복하지 않은 영생이지만 그래도 옆에 함께 할 가족이 있으면 받아들이고 살 수 있다’ 고 말이에요. 동화니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 결말이 저는 마음에 들었어요. 우리는 어떤 현실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잖아요. 앞으로도 사람들은 영생을 꿈꾸겠죠?  
하지만 3학년 아이도 영생이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걸 보면, ‘영생’은 말 그대로 언제까지나 사람들의 ‘꿈’으로만 남을 것 같네요. .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활동가  안해나

 

 

나탈리 배비트 / 대교출판

'탐방 기고 > 은행이의 책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들러식 대화법  (0) 2019.12.02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0) 2019.11.06
1초마다 세계는  (0) 2019.09.27
숲에 함께 들어갑시다  (0) 2019.09.16
‘곰아, 돌아와!’를 읽고  (0) 2019.08.29

<탄자니아통신 시즌2>

 

 

 

어느 날,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말을 걸었다.
그 무렵 나는 사용 가능한 제품을 교육의 결과물로 내놓고 싶었다. 첫 시도로 앞치마를 만든 후, 실크 스크린으로 회사 로고와 아프리카 문양을 새기기로 했다. 원했던 결과물이 나오면 그것이 상품으로의 가치가 있는 지 시험해 볼 작정이었다. 실습 재료가 될 앞치마를 만들 솜씨 좋은 사람과 그 물건을 팔아보게 할 여성을 찾고 있던 때였다. 그녀는 마침 양장점을 운영하고 있었고, 나는 그녀에게 앞치마 샘플을 만들어 보라고 주문했다. 그녀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다시 만났을 때 내가 원하던 물건을 내밀었다. 손이 예상외로 야물었다. 가격도 그만하면 괜찮다. 실습에 필요한 개수를 파악해 주문을 넣었고, 약속 시간에 물건을 받았다. 테크닉만을 가르치던 예전의 수업 방식에서 한 단계 나아가 실생활에서 사용할 완제품이 나온 것이다. 이렇게 캐서린과 나의 첫 거래는 훌륭했게 마무리 되었다.  
성공스토리를 만들어 보고 싶었던 나의 바람을 이룰 수 있을까? 나는 그녀를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싶었다. 몇 번의 기회를 주고, 그녀가 주인공으로의 그릇이 될 수 있는지 보고 싶었다. 
후원자들에게 감사함을 전할 선물이 필요했다. 우리 사업지의 특산물 중에 캐슈넛을 잘 포장한다면 훌륭한 선물이 될 것이다. 캐슈넛을 담을 주머니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곳 전통 천인 키텡게로 복주머니를 만들어 보자. 우리나라 남대문 시장쯤이랄 수 있는 가리야코로 가서 아프리카 문양이 새겨진 천을 떠왔다. 겉감은 바탕색이 검정색이라 속감으로는 겉이 비치는 빨강색을 선택했다.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한 후 꽤 예쁜 수제 견본이 만들어졌다. 견본을 내밀며 똑같이 만들 수 있겠는지 물었다. 문제없단다. 그래도 미심쩍어 우선 한 개를 만들게 했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예쁘게 만든 복주머니를 가지고 왔고, 다량의 물건을 만들게 했다. 
출장자 편에 보내야 하는 데, 날짜는 다가오는 데 물건이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찌 된 건가? 여러 번 독촉 끝에 전해 받은 물건은 크기가 제각각이다. 끈이 들어가는 부분도 어떤 건 너무 넓고, 어떤 건 너무 좁아 여닫는 것마저 여의치 않다. 새로 만들 시간은 없다. 이미 약속한 것인데 건네는 수밖에. 화를 낼 수도 없고, 그저 한마디 했다. 이번 건 실망스럽다고. 그녀는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왜? 아...... 왜냐고? 정말 모른단 말인가? 
한 번 더 속아 보기로 했다. 시간이 촉박해 제대로 된 결과물을 만들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그래도 한 번은 성공하지 않았던가? 삼세판이라고 했다. 이번엔 학생용 가방 견본을 내밀며 만들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참 잘한다. 할 수 있다고. 그런데 이번엔 견본마저 전해 받지 못했다. 아프리카 생활 5년차다, 나도 알만큼 안다. 이곳을. 이곳 사람들을. 그녀에게만 목매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를 통한 성공스토리 만들기는 물 건너갔다. 그녀가 목적은 아니었으니 괜찮다. 다만, 우리가 하는 교육이 단지 새로운 경험으로 그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소득과 연결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여성의 자립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은 성공이 주위로 퍼져나가 빛이 되길 희망했다. 나도 할 수 있겠구나, 하고.
이글을 쓰며 생각한다. 나도 할 수 없었던 성공을, 그녀에게 요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나도 무임승차하고 싶었던 것일까?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날개 기자단에서 금천 평화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 강혜승 위원장님과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위원장님과 조정옥 공동대표님 두 분이 인터뷰를 하셨다) 우리 기자단은 위원장님과의 인터뷰 전 미리 인터뷰 질문을 고민하고 준비하였다. 
인터뷰 당일. 기자단 중 질문을 하는 순서를 정했는데 내가 첫 번째로 선택이 되었다. 나는 너무너무 떨렸다. ‘다른 기자 친구들이 내 질문을 듣고 수준 낮다고 수근거리거나 무시하면 어떡하지?’, ‘선생님이 내 질문에 대답을 제대로 안 해주시면 어떡하지?’ 등 온갖 생각이란 생각은 다 들었다. 
  콩닥콩닥 떨리는 마음으로 첫 번째 질문을 했다. “소녀상을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첫 번째 질문을 하고 나니 한결 속이 홀가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위원장님께서는 “2015년 12월에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 함께 한일 위안부 협상했는데 일본 정부는 위안부 할머니들께 진정한 사과는 하지 않고 10억엔 출연금으로 위안부 문제를 무마하려 했습니다. 이같은 협상으로 사람들이 위안부를 잊을까봐 그리 되지 않게 하기 위해 (평화의 소녀상을) 만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해 주셨다. 떨리는 나와 달리 차분히 대답해주시는 위원장님의 답변에 나는 힘이 나서 나머지 준비한 질문까지 잘 끝낼 수 있었다. 휴~ 나의 첫 인터뷰 성공!! 
  나의 순서가 끝나고 위원장님은 우리 날개 기자단과 인터뷰를 계속 진행하셨다. 다른 기자들은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들도 하고 위원장님은 내가 몰랐던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셨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위원장님은 우리 기자단의 질문을 잘 들어 주시고 열심히 답변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그리고 위원장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나는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소녀상에 대해 많이 배우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금천구청 앞에 세워진 소녀상을 보면서 ‘위안부 동상이네~’라고 그냥 단순 조형물처럼 생각하고, 그 앞을 무관심하게 지나갔는데 두 분과 인터뷰를 하고 나니 이 소녀상을 만드는데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열정, 그리고 기부가 들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게 되었다. 또한 아직도 일본의 사과를 기다리는 위안부 할머니들과 여러 봉사자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그동안 무관심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 소녀상은 80여개 정도가 있다고 한다. 나는 내가 사는 금천구에도 평화의 소녀상 있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내가 비록 아직 어려서 나는 평화의 소녀상 건립에 아무런 도움이 안됐지만, 이제라도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소녀상 이야기를 모르는 다른 친구들에게도 알려주고 싶다. 



장서희
 금나래 초등학교 6학년

'탐방 기고 > 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삭발이 의미하는 것  (0) 2019.10.14
무임승차  (0) 2019.10.14
제 2의 인생  (0) 2019.09.27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법적 승리를 환영한다.  (0) 2019.09.16
아마존이 불탄다는데...  (0) 2019.08.29

금천구는 광복절 74주년을 맞아 ‘구민의 역사의식을 고양하고 문화예술 향유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영화 [김복동]을 관내 ‘롯데 시네마’에서 무료상영 했다 광복절이라는 역사기념일에 마침 일본의 경제 침탈이 있던 시간이라 시의적절하고 제시한 취지에도 부합한다는 평가를 할만하다.
그런데 이 행사 개최 주체를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요지를 말하면 행사의 시행 배경이나 주민 정서를 감안할 때 민간단체가 주최하고 관은 후원을 하는 것이 모양이 좋은데 그 반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적 기념일에 의미를 가진 행사를 개최하는데 주체가 누구인가를 따지는 것도 모양이 그렇다 할 수도 있지만 막상 사정을 살펴보면 그렇게 간단하게 지나갈 게 아닌 것 같다. 평소 주민을 앞세우던 구청이 표리부동한 모습을 보인다는 지적을 경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판적인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행사의 성격상 주민 주관으로 시행하는 것이 보기도 좋고 또 그 시행 취지를 더욱 빛나게 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안부와 관련한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는 내용인 만큼 관(官)이 하는 것보다는 민(民)이 하는 것이 대내외적으로 모양도 좋고 설득력도 있다는 설명이다.
금천구에는 일본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주민이 주도한 사업이 있는데 2017년 에 주민 성금을 모아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한 것이 그것으로 이 사업을 주도했던 단체인 [금천 평화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가 시행을 담당했다면 아주 좋았을 것이라며, 이 사업에 참여했던 주민들은 아쉬움을 표한다.
비판 주민은 다른 문제도 제기한다. 행사비용에 충당한 예산 사용이 행사취지의 순수성을 바랬다 한다. 동 행사의 비용이 모두 육백만원인데 이 중 일백만원은 순수 민간단체인 ‘금천마실’이 기부했고 나머지 오백만원은 문화예술 진흥 정책의 지역 문화예술 활성화를 위한 지역특성화 사업 지원 예산 중 민간이전 분에서 전용하였다는 점이다. 즉 행사 주최를 구청이 직접 하는 것은 예산의 성격상 역시 모양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모양은 좀 그렇지만 위법은 아닌 만큼 잘못되었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민간 기부 예산과 구 예산 중 민간이전 분을 전용하여 사용하면서도 굳이 구청이 시행주체를 했어야 하는가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행사 내용을 볼 때, 민간이 시행 주체가 되는 데는 기술상 문제가 없고 오히려 관이 하는 것보다 홍보 등 동원면에서도 유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관계 주민들의 평이 수긍이 되니 말이다. 
작금에 이르러 여러 분야에서 그간 관 주도로 하던 사업들도 주민에게 위임하거나 민과 협업의 형태로 하는 것이 오늘에 추구하는 행정시행 방향인 것은 이번 시행에서 당국이 살펴야 할 대목이다. 다시 말하면, 시대는 관 주도 사업들도 가능한 한 민에게 위임 또는 함께 하는 시대인데 그에 역행하는 모습이라는 뜻이다
공무원들이 업무 성과를 구하고자 사업 시행에 욕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고 이를 탓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과 거둠은 관점을 넓게 가질 필요가 있다. 성과를 말하려면 목표의 정당성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도 그래야 한다. 그리고 성과의 창출은 단독으로 하는 것도 의의가 있겠지만 협업을 통하여 이룬 것이라면 가치를 더할 수 있고 그것이 민과의 협업이라면 더욱 빛이 날 것이다. 
민주주의적 행정시행은 법률이 정하는 범위에서 최대한 객관성을 기하고 업무 특성을 살펴 분업화가 정형이라 생각한다. 이는 다양성의 확보고, 가능한 자원의 동원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가 하면 업무 효율도 기대할 수 있다. 이를테면 민과 관, 관과 관의 협업 그리고 민과 민이 서로 협업을 하도록 관이 다리를 놓은 것 등이다. 이와 같은 행정 시행은 민주행정의 방향이지만 아직도 이에 대한 관의 이해가 더딘 것 같다.
그리고 민이 관련된 사업 시행 시 예산운영에 보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예산을 전용하여 사용할 경우 주민을 포함한 제3자가 민감하게 살피는 대상이 되어 적격성시비가 심심찮게 제기된다. 더욱이 그것이 민간이전 예산의 경우라면 여간 조심스럽게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래저래 말썽이 일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비록 위법적인 사용은 아니라 하더라도 목적성 문제를 가지는 만큼 비판이 제기될 수 있고 그럴 때 정당성 주장은 궁색해 지기 마련이다. 
이번 시행은 공무원이 성과를 거두고자 의욕적으로 진행한 것으로 이해되고 따라서 주민참여를 고의로 배제한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다만 그 시행을 두고 특정 주민단체 그것도 이 행사와 직접연관을 가진 단체를 배제한 것에 더해 모멸감조차 갖게 했다는 지적이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사과해야 한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행사를 준비하면서 매끄럽지 못한 진행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주민들의 생각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만 이번 건은 모양이 좋지 않은 것은 분명하므로 이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주민들의 비판을 겸허히 들을 필요가 있다. 
비단 이 건에 국한하지 않고, 주민과 관련한 관 주도 사업에 주민 비판이 있다면  또한 겸허한 자세로 살펴야 한다. 모두 정당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그에는 챙겨야 할 내용이 있을 수 있는 만큼 선의로 접근한다면 민주적 행정시행의 표준을 찾는 것과 같이 생산적 결과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듯 행정시행에서 주민을  동반자로 의식하고 임무를 설계하면 바람직한 민주적 행정 수행이 될 것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금천구는 민이 참여해서 성과가 거둘 수 있는 경우는 과감하게 개방하도록 하고, 제도적 문제가 있다면 필요한 조치를 해주기 바란다. 더불어 민과 관이 협업할 수 있는 분야도 확대해 주기를 기대한다.(♣2019.09.25.)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다양한 마을활동을 펼치고 있다.

<탄자니아통신 시즌2>

 

담장 없는 파란색 박공지붕 집의 현관문을 열고 그녀가 나온다. 화려한 문양이 수놓인 빨강 드레스를 입고, 함박꽃보다 더 커다란 웃음을 피우며. 앞치마를 입고 일에 열중할 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사교계의 여왕 같다.
그녀가 내놓은 사진첩 속의 흑백 결혼식 사진. 자그마한 키에 가녀린 몸매를 하고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다. 지금의 풍만하고 당당한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순백의 드레스 속에 자신감을 꽁꽁 여며 놓았으리라. 
그녀 옆에는 키가 크고 늘씬한 신사가 자릴 지킨다. 직업학교를 다니면서 만났다는 그들은 서로의 유일한 사랑이었다고 했다. 남편을 5년 전에 먼저 보냈지만,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단다. 인터뷰 중에 들어온 청년, 프랭크는 그녀와 함께 살며 대학에 다니고 있는 막내아들이다. 그가 사별한 남편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 했다. 프랭크 속에 숨어있는 그녀의 남편을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아 보인다. 말수가 적고, 부드러운 성품에, 성실했을 그의 모습을. 
내가 페트리시아를 처음 본 건, 아니, 그녀를 처음 인식한 건, 실크스크린 교육 날이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수업이 끝날 무렵,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때마침 교육의 결과물로 앞치마가 나왔고, 내가 속한 조직의 로고를 실크스크린을 이용해 프린트했던 것이다. 조직 홍보도 하고 교육생들에게 결과물의 효과도 바로 볼 수 있게 하기위해 로고가 찍힌 앞치마를 그녀에게 입게 하며 그녀를 기억하게 된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꽤 오래 살았지만 특별한 인연이나 사건이 없으면, 여전히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아 기억이 안 되는 탓이다. 
조금 식상한 질문이긴 했지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물었다. 예상한 대로 결혼이라고 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우리 조직을 만나 소액대출을 통해 사업 기회를 얻은 것이란다. 그라민 은행을 롤모델로 한, 여성의 자립을 목적으로 우리나라 돈 20만원에서 100만원 한도로 무담보·저금리로 융자를 해주는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구멍가게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돈으로 무슨 사업이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신의 집에서 물건 몇 가지를 놓고 시작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6개월 단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업을 잘만 꾸리면 빌린 돈은 자본이 되고, 또다시 대출을 일으켜 물건의 가짓수를 늘리며 사업을 조금씩 키울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가 음식배달 서비스로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된 것을 꼽는다. 우리는 많은 교육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고, 교육이 끝난 후 점심을 제공한다. 
배달 업자는 소액대출로 사업을 시작한 사람 중에서 요리 솜씨가 좋은 사람들을 골라 기회를 주기 때문에 그녀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다.
 그녀의 요리 솜씨는 단연 으뜸이어서 그녀에게 자주 기회가 돌아가고, 수입이 늘며 살림이 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인연으로 내가 사업장을 방문한 날은 특별히 내 식판에 고기를 듬뿍 넣어주곤 한다. 그녀와 인터뷰를 하며 생각해 본다. 자신도 미처 몰랐던 사업가 기질이 싹틔워질 적절한 토양이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라고.
딸 하나에 아들이 셋. 첫째 딸 빌리지니어는 그녀와 가까이 살면서 손주들의 재롱을 선물한다. 큰 아들은 다르에스살람에서 사업을 하고 있고, 밑에 두 아들은 그녀의 곁을 지키며 바쁠 때는 일손이 되어준다. 남편을 일찍 여윈 걸 빼면 복 많은 중년여성이다. 50대 초반의 그녀. 아직 젊고 에너지 가득한 그녀에게 제2의 인생이 활짝 열려, 그 어느 시절보다 힘찬 날개 짓으로 비상하길 기대하는 건 나만의 욕심일까?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책이야기 202

 

2019년을 시작한지가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9월도 다 지나고 이제 2019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월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음이 참 안타깝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것 시간! 얼마 전 서점을 들렀다. 「1초마다 세계는」이란 커다란 시계가 그려져 있는 표지가 눈길을 끄는 시간에 대한 그림책을 발견했다.
이 책은 첫 장에서 ‘1초마다 세계에서는 결혼식이 두 번 열려요.’, ‘아기 4명이 태어나요.’ 라고 시작한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간 1초에 세계에서는 수많은 가정들이 탄생하고, 수많은 아이들 또한 태어나고 있다. 물론 죽어가는 이들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세계는 탄생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다. 이런 세계에서 1초 동안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 
사십 그루의 나무가 베어지고, 그보다 여덟 그루가 작은 삼십이 그루가 심어지며, 바닷물 만 천 리터가 증발하고, 사하라 사막의 모래 육만 삼천 킬로그램이 바람에 실려 가고 플라스틱 병이 만 오천 개가 만들어지고 이중 천 육백 개만 재활용이 되고, 가정에서 쓰레기를 사천 킬로그램이 버려진단다. 이렇게 계속 가다보면 지구는 어떻게 될까? 이 책은 우리에게 대놓고 환경을 지켜야 해요라는 말은 하지않는다. 하지만 이 책 곳곳에 등장하는 문장들을 보면 불편한 마음을 버릴 수가 없다. 얼마 전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에서 한 달 이상 화재가 계속된 적이 있었다. 무분별한 개발 허가로 인한 인재로 우리는 지구 산소의 20%를 생산해 내고 있는 곳을 파괴하고 있다. 바다에 휩쓸려간 쓰레기들이 섬이 이루고,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로 전 세계 동물들이 신음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들의 삶의 터전을 조금씩 파괴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그곳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일회용품을 사용 자제, 탄소에니지 개발 등 범국가적으로 환경 캠페인을 벌이고 있으며, 늦었지만 환경을 지키기 위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지구가 원초의 모습이 될지는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조금씩 노력하고 서로 마음을 합하다 보면 지구는 언젠가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걸어본다. 
1초에 교통사고로 두 명이 다치고, 문자 메시지는 이천 건이 오가고, 인터넷으로 사천건의 물건이 팔리고, 책 열네 권과 스마트 폰 사십대가 팔리며, 무기 사는 데에 오만 삼천 오백달러를 쓴단다. 이렇게 우리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추어 인터넷의 홍수 속에 잘 못된 정보도 퍼 나르고, 대면하고 있지 않다고 칼보다 더 무서운 댓글들로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으며, 각기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저 많은 돈들을 쓰고 있다. 경제의 구조가 점점 바뀌고, 새로운 직업들도 생겨나고 없어지는 직업들도 있다. 이렇게 세계의 시계는 돌아가고 있다. 
1초. 정말 짧은 눈 한 번 깜박할 시간동안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하루에 86,400초. 1초에 벌어진 일들의 86,400의 곱으로 일어난다니, 이런 걸 생각하면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백세 시대! 앞으로 살아온 날만큼 살아갈 것이다.
먼 훗날 내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들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에 대해 생각하며 눈을 가만히 감으며 글을 마무리 한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활동가 윤숙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대법에서 최종 승소했다. 서울 톨게이트 캐노피 고공 농성을 비롯한 치열한 투쟁이 만든 결과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소송의 쟁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 노동자들이 불법 파견 여부이고, 두 번째는 불법 파견일 경우 파견근로자가 원청이 아닌 파견사업주로부터 해고를 당한 경우의 효력 여부다. 첫 번째는 누가 실질적으로 일의 과정과 결과를 지배하고 있는가의 문제였다. 형식은 도급 파견이지만 실제는 원청의 직접 지배를 받는 경우에 대한 불법 파견 여부를 묻는 것인데 이는 현대차와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 차례가 넘는 소송을 통해 불법파견임을 확인한 바 있다. 문제는 두 번째다. 불법 파견이면 그 이후 파견업체의 행위가 노동자들과 도로공사간의 근로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판결이다. 파견회사와 노동자간의 근로관계가 아닌 도공과 노동자간의 계약이 본질이란 것이다. 그동안 기업들이 다양한 형식으로 직접적 책임을 회피하고 노동자에게 이중 삼중의 덫을 놓아 징계 해고 사직을 강요하는 외주화 편법이 불법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자회사를 만들고 그곳으로 가지 않으면 지시 불이행에 무단결근 등 각종 혐의를 씌워 또 다른 징계 해고로 절망을 주고, 노동위와 법원이 형식만으로 정당성을 주던 관행이 불의, 불법하단 말이다. 
이 판결의 또 다른 의의는 기만적 비정규직 대책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문재인 정권이 공적 영역 비정규직 제로를 선포했을 때 노동자들은 환호를 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자회사로 정규직화란 이름만 바뀐, 임금 등이 외려 깎인, 눈뜨고 코 베인 결과만 남았다. 이런 기만적 개혁을 시작한 것은 서울시장 박원순이고 그것을 전국화 한 것은 문재인 정권이다. 이번 판결은 박원순과 문재인으로 이어지던 비정규직 대책인 ‘자회사 전환 정책’이 비정규직 고통을 은폐 고착시킨 부당한 짓임을 확인한 것이다. 게다가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핵심 구조도 확인했다. 도로공사 사장은 이강래다. 김대중 정권 시절 전북지사였다고 한다. 그가 이번 소송에 기용한 변호사는 김앤장, 친일파를 변호하고, 가습기 살인기업을 옹호하고, 민주노조를 파괴하며 사법농단을 주도한 특권층들의 반칙과 탈법의 집사이자 저격수 그 더러운 이름 김앤장이다. 사이비 정책으로 노동자를 기만하는 청와대, 기업가의 편에서 책임에 물 타기 하며 시간만 벌어 주는 노동부, 그리고 적폐의 전문가들, 이 삼각 커넥션이 노동적폐의 축임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하지만 자본 천국 노동 지옥 헬 조선에서는 노동자의 법적 승리는 아직 완전한 승리가 아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승리했지만 그것을 법적으로 보장받는 것은 피해를 당한 1,500명 중 소송 당사자인 300여명뿐이다. 나머지 1200명은 또 다시 2-3년이 걸리는 소송을 해야 한다. 현대차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동일 조건 동일 판정을 위해 열한번의 소송을 해야 했다. 돈과 시간이 넘쳐나는 자본과 한 번의 법률비용에도 생계가 바스러지는 노동자간의 차이가 사라진 곳에서 공정한 사회는 말은 지독한 고문일 뿐이다. 현존 법의 사각지대를 채우고 막는 것은 결국 현실 정치이고 노동조합과의 교섭 합의다. 해결의 결정권이 청와대와 도로공사가 불법을 인정하고 반성한 결과에 달렸다는 말이다. 다행히 이글은 쓰는 중에 서울대 병원 노사가 파견, 용역 노동자 전원을 직접고용 한다는 합의 소식이 들린다. 고맙다. 도로공사 노사가 가야할 길을 서울병원 노사가 한발 먼저 갔다. 새로운 희망을 개척하는 톨게이트와 서울대병원 노동자들이 보여준 힘, ‘원하청 노동자의 모범적인 공동 투쟁’ ‘소속 불문 단결 투쟁’이란 모범을 사회발전의 힘으로 제대로 살려보자. 희망이 고문이 되지 않게 말이다. 

문재훈 소장
남부노동상담센터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책이야기 201

 

아주 오래전, 동화 읽는 어른 모임을 시작할 때부터 옛이야기는 내게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옛이야기 분과에 들어가 공부를 할 때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브루노 베텔 하임의 <옛이야기의 매력>을 읽고는 이런 세계가 있었나 많이 놀라고 내용을 곱씹게 되었다. 그동안에 늘 궁금했던 것, 옛이야기에는 왜 계모가 그렇게도 많이 나오고, 그들의 악행은 왜 이리 심한건지, 아이들의 심리는 어떤 건지 등에 대한 심리분석적인 내용에 놀라기도 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옛이야기를 이론적으로 정리해주는 책을 접한 적이 없고 특히 우리 것과 외국의 것을 비교하거나 한꺼번에 설명해주지 않고, 외국의 옛이야기보다 우리 것이 훨씬 훌륭하다는 일방적인 논리에 약간 실망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김환희 선생님의 <옛이야기와 어린이책>이라는 책은 내게는 멋진 발견이었다. 거기에는 콩쥐팥쥐와 신데렐라를 같은 비중으로 두고 설명하고 있었고, 이와 같은 설화의 줄기는 각 나라에 많이 분포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우리 옛이야기의 원형을 소개하고 그림책으로 나온 원형에 충실한 것들을 소개했다. 그림은 아름답지만 이야기의 원형을 파괴하거나 의미를 염두에 두지 않는 그림책을 가감 없이 비판했다. 
세상에는 비슷한 이야기들이 돌아다니고 있고 절대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았던 그 옛날부터 내려오던 이야기들이 어떤 경우는 아주 똑같은 이야기로 아직 숨 쉬고 있다는 이론적인 틀을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옛이야기를 공부할 때부터 답답하게만 느꼈던 것들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계모에게 구박을 받고 신을 잃어버리지만 삶을 현명하게 살아가며 행복을 찾는 주인공들... 조금씩은 다른 모습이었지만(어떤 면에서는 우리 주인공들이 훨씬 훌륭하다)또 비슷한 모습이기도 했다.
신입교육에서 옛이야기 강의를 준비하며 김환희 선생님의 다른 책 <옛이야기 공부법>을 만났다. 목 뒤의 염증을 떼는 수술을 하고나서는 책을 앉아서 보기가 힘들어 누워보게 되었는데 그러자니 팔이 아파 책 한 권 읽는 것도 시간이 꽤 걸린다. 좋아하는 소설책도 아닌 이 책을 누운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엄청나게 재미있어서? 아니다. 옛이야기에 매료된 사람들은 재미있게 읽겠지만 학자인 작가의 글투와 내용은 아무래도 학술적이다. 옛이야기를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안내서의 성격인 이 책은 작가가 매료되었던 <구렁덩덩 신선비>를 중심에 두고 갖가지 해설을 해준다. 
다소 학술적인 내용이 나온 뒤에는 작가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는 그 부분을 읽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학자이긴 하지만 ‘교수’의 이름을 걸지는 못한 작가의 개인 이야기가 나온다. 사실은 굉장히 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비교문학을 공부하며 자신의 재능을 감지하고 아주 열심히 공부하며 대학에 적을 두고자 했던 그 결의는 번번이 무너졌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은 늘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나는 이 감정을 이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남편이 강사생활을 오래 했고 그동안에 펼쳐졌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가며 그 좌절감과, 이미 자리를 잡은 이들이 요구했던 부당했던 내용들이 다시 떠올랐다. 작가의 담담하면서도 빈틈없는 문장은 내 마음을 울리고 말았다. 
강의 준비를 하면서 선생님께 몇 가지 여쭈어봤던 터라 새벽 한시라는 것조차 인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보냈다. 공부를 하고 있었다며 주신 답장은 “옛이야기가 지닌 치유의 힘을 알 수 있어서 공부가 즐거웠어요.” 였다. 
열심히 공부했는데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다친 마음은 옛이야기의 숲에 들어가면서부터 조금씩 치유되었다고 한다. 아기장수와 콩쥐, 바리공주와 신선비의 색시 들을 만나면서 아무런 조건도 보상도 없이 이야기만을 남기고 사라져간 이야기꾼들에 대해 감탄한다. 그 이야기들은 탄탄한 서사의 구성을 가지고 있고 폭넓은 세계관과 철학을 가지고 있다. 
작가의 아들이 ‘상문고 사태’로 비리로 얼룩진 재단에 반대하는 시위에 앞장섰을 때에도 작가는 아기장수의 부모를 생각했다. 아기장수의 부모들 특히나 어머니들은 대부분 아기장수를 죽게 만들고 위험에 빠트린다. 작가는 이것이 세상을 바꿀 인물이 나왔을 때, 혹은 인간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을 때 ‘하지 말아야 할 행동’으로 이해했다. 아기장수의 어머니의 행동이 작가에게는 반면교사였던 것이다. 결국은 두려움은 가득 안고 있었지만 부모들도 아이들 편에 서서 비리재단을 물리치는데 함께 했다고 한다. 
깊은 공부를 하지도 않았는데 옛이야기는 나를 늪에 빠지게도 했다. 내가 좋아하던 신화인 <오늘이>에 나오는 내용이 외국의 <황금머리카락>이라는 이야기와 거의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이것을 생각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구렁덩덩신선비의 기원이 인도설화라는 것을 어디선가 본 듯 해서 선생님께 전화로 말씀드렸을 때 선생님은 “아니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라고 하셨다. 책에서도 나오지만 옛이야기는 단정적으로 확신을 갖고 말할 수가 없다. 것이 옛이야기의 주요한 매력이기도 하다. 
옛이야기의 숲은 깊고 넓다. 그것은 우리의 심신을 위로해주는 작은 샘물 같기도 하지만 삶에서 겪는 깊은 고뇌에서 우리를 끌어올리기도 하는 진정 헤아릴 수도, 알 수도 없는 숲이다. 손을 잡고 함께 가보는 것이 어떨지... 

 

김환희 지음 / 창비 출판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활동가 민경아

 

아프리카에 와서, 그것도 산골 마을에서 양성 평등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모니터링 중에 현지 직원, 마사웨가 나를 쳐다본다. 한 아낙이 내게 물어봐 달라고 한단다. 어떻게 하면 남편이 아내를 버리지 않게 할 수 있는지. 모여 있는 여자들 중 몇 명이 혼자 아이를 키우며 힘겹게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 남편이 있는 여성들도 그 고민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했다. 젊은 여자를 만나면 가족은 나 몰라라, 하고 떠나는 남자가 많기 때문이란다. 자신만의 몫으로 남겨진 아이들을 책임져야하는 버거운 삶이 기다리고 있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이국의 여인.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나에게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며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땐 참 난감하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그녀들의 눈은 모두 나를 향하고 있는데. 궁색하지만 한마디 한다. 교육이라고.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에는 여성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있는데, 경제적 자립에 역점을 둔다. 경제적으로 홀로서기가 이루어져야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소상공인이 알아야 할 기본적인 경영교육과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해 사업을 다각화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실습 교육을 병행한다. 또한 여성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남성들을 포함한 지역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필요한 인식강화 교육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주로 양성평등 교육에 포커스를 맞추고, 성감수성이 예민한 학생층을 대상으로 진행 중이었다. 


이곳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곳이야말로 양성평등 교육이 절실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남성에게 의존해야 하는 존재가 아닌, 독립적인 개체임을 스스로 인식해야 한다. 남편에게 버려질 것을 두려워하는 대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지키고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키바하 교육 센터’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오지의 여성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이 마을에만도 우리 프로그램의 피교육 대상자가 80여명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마을에서도 프로그램을 운영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내게 전한다. 결과가 좋으면 주기적으로 다양한 마을을 찾아 갈 수 있을 것이다.   

 
마사웨가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사이, 나는 마을을 돌아보기로 했다. 교육을 진행할만한 장소 여부와 임대가 가능한지 등을 파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큰길가에 위치한 레스토랑을 추천한다. 80명은 너끈히 수용할 수 있는 넓이를 가졌고 접근성이 좋다는 게 이유였다. 교회나 성당, 이슬람 사원을 빌릴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을 듯하다. 한 두 번의 교육으로 사고의 대전환이 일어나거나 삶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숙명으로 여기며 살아가기보다 자신도 한 개체로 존중받고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는 기회만 되어도 절반의 성공이 아닐까? 
내게 준 숙제다. 그녀들이.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북한의 미사일 도발에다 일본 경제 보복으로 온 나라가 시끌시끌하다. 여기에 조국 법무부장관 지명에 따른 인사청문회 관계로 정파 간의 첨예한 대립이 극한을 달리고 있고, 이에 국민들까지 찬반으로 나뉘어 거대한 담론장이 되어 한반도는 바야흐로 백가쟁명의 무대가 되고 있다. 
시국(時局)을 보는 관점은 사람마다 가지는 가치관이나 평소의 신념에 따라 다를 수 있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보편 현상이라 이를 문제 삼을 이유가 없다. 글자 그대로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다. 그러나 현재에 전개되는 사회 현상 곧 시국에 대한 견해가 표현자의 국가관으로 비쳐지는 경우도 있어 그 파장이 우려된다. 현실에 대한 의견들을 각자의 양심에 따라 표현하는 것은 문제삼을 일이 아니지만 반국가적 반민족적 언동을 하는 것은 경계되어야 한다.  시국이 어려울수록 국가관을 분명히 하여 현재에 제기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올바른 국가관이란 자신이 속한 나라의 정체성에 대한 동의가 아닌가?
시국을 말하면서 자기 신념이라 하여 국가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견해를 보인다면 그것은 다중의 동의를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이 경우는 국가의 성립이 그 구성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곳의 질서에 대해 보편타당성이 확보된 경우다. 반복되는 표현이지만, 스스로 자신이 속한 국가의 국민임을 인정한다면 그 곳에서 작동하는 제 질서에 반하는 행위는 자기 부정이고 범법(犯法)이다. 
국가관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통일적인 전체로서의 국가의 목적. 의의 성립에 대한 견해 또는 주장’이라 하고 있다. 국민은 국가의 존재에 대하여 그 성립과 현재에 시행되는 법률과 보편질서를 동의하고 존중하는 것이 곧 올바른 국가관이라 이해한다. 그런데 작금의 사태를 보면 자신의 시국관으로 국가의 정체성을 재단하는 언행들이 보인다. 이에는 여러 사례가 있지만 그 중에는 민족적 양심에서 반감이 가는 경우가 있다. 일본의 경제 침탈에 지식인을 자처하는 몇몇 인사들의 견해가 그런 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비록 신념이라 해도 스스로 국민임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그런 표현은 이율배반이므로 지식인을 자처하는 자기 부정이다.
일본의 행위를 지지하는 것은 개인의 신념이니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공공연히 주장하면서 제3자를 설득하려는 것은 이해를 같이 할 수 없다. 더욱이 자기 견해를 주장하면서 국가질서를 부정하는 표현에는 저항감조차 가지게 한다, 그런 분은 자중해야 하고 그것이 싫으면 이 땅을 떠나는 것이 마땅하다.
학자는 학설을 제기함에 있어 과학적 바탕에서 객관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학설은 이론적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그런 이론은 궤변이 될 뿐이다. 주변에는 이런 어용학자들이 있고 이들은 이른바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학자들이 그런 부류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을 두고 쏟아내는 언론들의 주장과 그들을 고무하는 인사들의 행위도 마땅치 않다. 국가의 안보를 걱정하는 자세를 나쁘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주장에 편견이 내재하고 더욱이 특정 세력의 집합을 선동하기 위한 전략이 숨어 있다면 이러한 정보는 허구이고 가짜 뉴스일 뿐이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과 최근의 원색적 남한 비방을 예쁘게 보아줄 대한민국 국민은 없을 것이다. 또한 그들 행위의 시의성을 공감하는 국민의 수도 많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내부 사정이 엄중하다해서 선의의 협력 대상이어야 할 남한국민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행위는 옳지 않다. 그들의 위협은 상황이 있을 때 항용 사용하는 상투적 수법인 것은 경험을 하여 알고 있지만 그런 표현을 접하면 솔직히 걱정도 된다. 그러나 변화를 기대하는 그들의 진심을 왜곡하는 것과 같은 보도는 삼가야 한다. 진정으로 남북의 평화를 바란다면 자중이 필요하다. 평화는 힘의 균형을 갖추는 것으로 유지될 수 있음을 동의한다면 인내해야 한다. 남북 간 평화는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유의할 것은 남북이 서로 간에 진정한 이해가 있다면 어느 쪽도 힘의 필요성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시국을 날카롭게 조망하고 간여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이기 이기도 하지만 의무로도 이해될 수 있다. 국가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제반사에 관심을 가지는 모습이고 그런 자세는 국가를 사랑한다는 표지이다. 다만 그 간여를 함에 올바른 국가관을 바탕으로 하여 행위를 해야 한다. 시국의 전개 현상이 자기 신념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여 자기 기준으로 행동하고 그것이 국가의 정체성을 흔드는 행위라면 그 주체가 누구이던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한다. 스스로 소속국가의 국민이라 자부하다면 가장 중요한 가치는 나라 사랑에 두어야 하고, 성스러운 임무는 나라를 지키는 일에 가치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국가나 사회에 불만이 있다면 약속된 질서에 따라 정의롭게 행동함으로 그것을 고쳐야 함을 동의해야 한다. 어떤 목적이던 질서에 반하는 행위는 범법행위가 되고 그것은 폭력일 수도 있다. 국가는 다양한 가치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구성원을 이루고 있다. 국민은 어떤 이유로도 국가가 정한 질서에 따른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그것의 행사에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민주주의고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조국 대한민국이다!  
이성을 가지고 시국을 보고 애국심을 바탕으로 오늘의 현상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판단하기 바란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모두가 힘을 모아 그 위기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고 그것의 행동에 동참해야 한다. 따질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 다음 순서다.(♣2019.09.04.)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다양한 마을활동을 펼치고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