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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no.198

 

강남역 한복판 교통 탑에서 30일이 넘게 고공 단식 농성중인 해고 노동자가 있다. 김용희다. 온몸을 구겨 넣어도 두발이 허공중 매달리는 좁은 곳에서 폭염과 장맛비를 고스란히 감내하는 사정은 상식으로 짐작도 못할 것이다. 지난 7월 10일은 그의 생일이었다. 회갑 생일인데 삼성에서 정년나이란다. 삼성에서 노조를 만들려 했다는 죄로 그는 납치, 회유협박, 테러, 해고, 해외유배를 당했고 그 과정에서 부인은 성폭행을, 부친은 자살을 당했다. 지옥 같은 24년을 끝장내기 위해 단식고공농성을 시작한지 한 달이지만 삼성은 ‘입장이 없’고 마지막 일터였던 삼성물산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생일 날 진행된 문화제에서 그는 ‘24년, 암흑 터널을 헤맸다. 나에게 유일한 희망의 힘은 여러분이 거기에서 들고 있는 촛불하나 핸드폰 불빛 한 점이었다.’며 절박한 외로움을 토로했다. 
경부고속도로 서울 요금소 옥상에는 여성노동자들이 10일이 넘게 고공 농성을 하고 있다. 이들은 대법원에서 확정된 정규직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와 도로공사는 일자리를 쪼갠 근본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용역회사를 자회사로 돌리고 자회사로 전직하라고 한다. 대법 판결도 소용없는 횡포를 막고 정상적인 정규직화를 요구했지만 청와대는 ‘불가’하다고 하고 사장 이강래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불가능하다는 말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이다. 대안도 없고 어쩔 수 없다며 자행된 신자유주의 시장 횡포, 자본의 광란 정리해고 비정규직이 처절하게 파산시킨 말이다. 사실 이런 말은 언제나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말이다. 물론 불가능한 일도 있다. 종교나 신의 영역이야 인간이 도저히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일찍이 공자님은 자기가 성의로 할 일과 경이원지(敬而遠之), 즉 ‘삼가되 멀리하라’는 영역을 구별했다. 귀신의 영역과 사람의 영역을 말이다. 하지만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어쩔 수 없고 불가능한 영역을 만든다. 이기심 탐욕 경쟁 빈부격차 ... 최근에 제4차산업혁명이라는 공갈협박 주술까지 사람이 새롭게 만들 수 있다는 억센 희망 대신에 귀신의 세상을 만들어 공포에 떨며 순응 적응 굴종을 요구한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언제든지 가능하지만 사람을 존중하고 살리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세상이 된다. 사람이 일회용 휴지가 되는 이런 자본주의 체제가 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지금이 행복한 이들이야 지금이 변화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싶겠지만, 지금이 아픈 우리들에게 오늘은 보다 나은 내일로 가는 여정, 사람의 영역에서 어제의 모든 불가능은 오늘과 내일엔 가능으로 전환되고 전환 시켜야 한다. 
그러고 보면 일본 아베정권도 한일 간의 협정, 박정희와 박근혜가 맺은 그 치욕적인 협정의 시정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헌법을 파괴하고 아예 헌법을 조작했던 박정희와 헌법을 농단 유린했던 박근혜은 존재 자체가 반민주다. 그런 반민주가 만든 역사에 대한 테러, 가해자이자 매수자 그리고 군국주의 일본만 편한 불의를 시정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사람을 위한 약자를 위한 한발은 언제나 지금의 기득권자들에게 불가능하다는 낙인을 찍힌다. 아베와 삼성과 도로공사는 낙인을 찍는 ‘샴 세쌍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시대의 슬픈 등대, 강남대로에서 김용희의 죽음을 태우는 절박한 호소는 단지 개인의 구제가 아니라 삼성이 대표하는 그 특권과 반칙과 부정부패와 고문과 유린에 대한, 돈 중심 체제에 대한 강력한 항거다.

문재훈 소장
남부노동상담센터

책이야기 197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 한 권을 읽었다’기 보다 성인 동화 애니메이션 한 편을 본 기분이다. 위기의 순간도 있지만 잔잔한 분위기가 책 전반에 흐르고 선한 마음, 따뜻한 마음, 착실함으로 살아가야만 할 것 같은 동화적 판타지 감성이 피어오르는 그런 책이다.
그리고 한편으론 책이 만들어져 판매되기 위한 다양한 활동들에 대한 설명, 책 블로그에 대한 묘사는 사실적인 부분도 있어서 도서 관련 업무를 하고 있는 나로서는 흥미롭게 읽혀졌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백화점 대형서점에서 일하는 잇세이는 어린 시절 가족을 잃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조용하고 성실한 청년이다. 
어느 날 잇세이는 책을 훔친 아이를 뒤쫓았고 도망가던 아이는 차에 치이는 사고가 난다. 이 일로 아이를 뒤쫓은 잇세이는 비난의 대상이 되고 결국 서점을 그만 두게 된다. 10년 동안 일해 온 서점을 그만둔 후 힘겨운 시간을 보내던 잇세이는 작은 시골마을의 ‘오후도 서점’을 찾아간다.
오후도 서점의 주인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오후도 블로그’ 주인.
오후도 블로그의 주인인 할아버지는 병으로 입원상태이고 어린 손자가 책방을 지키고는 있으나 운영은 어려운 상태. 오후도 주인 할아버지는 잇세이에게 서점운영을 부탁하게 되고 잇세이는 고심 끝에 수락한다.
잇세이가 오후도 서점을 맡으면서 서점에는 활기가 띄기 시작하고 잇세이 또한 삶의 기운을 다시 느낀다. 다니던 서점에서 기획 중이던 신간 책을 오후도 서점에 들여놓은 과정에서 옛사람들과 인연도 다시 이어지고 잇세이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행복감을 느낀다.
다소 진부한 줄거리이긴 하다. 그러나 이 책의 제목(오: 벚나무 앵, 후: 바람 풍)처럼 벚꽃 날리는 봄밤 같은 편안함과 책이 있는 공간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이야기여서 물 흐르듯 읽어진다.
올 초 구로구에 있는 ‘인공위성’이라는 이색 서점을 방문한 적이 있다.
건축설계사가 대표인 이 서점은 콘크리트 벽, 검정 철재 선반, 기다란 원목 테이블, 간접 조명들과 커피, 차를 만드는 공간까지 서점이라기보다 카페 분위기에 가까웠고, 판매 도서들의 선정도 특별했다.
기증자들에게 받은 책만을 판매하는 이 서점은 기증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질문을 만들고 흰색의 새 덮개에 그 질문으로 해시태그(#)를 달아 도서를 판매 한다. 일종의 해시태그북이라고 해야 하나...이렇게 만들어진 질문들엔 누군가의 번뇌가, 또 누군가의 희망이 담겨 인공위성에서 쏘아 올려지는 것인가...본 책과 함께 인터뷰 책자도 함께 판매하는 이 서점은 도서를 판매한다기보다  사람 이야기, 삶의 이야기를 판매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후도 서점이야기를 보면서 이 ‘인공위성’서점 생각이 계속 났던 건 왜일까?언제부턴가 책을 접할 수 있는 공간이 대형 서점, 국공립도서관의 큰 규모에서 작은 규모인 작은 도서관으로, 이젠 더 작은 공간인 서점과 책방으로  각각의 색깔과 개성을 가지고 생겨나는 것은 너무도 반가운 일인 듯 싶다.
각자의 취향에 맞는 공간을 찾아가는 것은 개인의 몫이지만.
문득 나도 나만의 색깔의 분위기의 책방이 하나 갖고 싶어진다.
아직 나만의 색깔을 찾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숙제이긴 하지만...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이혜숙

 

무라야마 사키 지음 / 류순미 옮김 / 출판사 클

일본이 드디어 문제를 만들었다. 그간 그들이 하는 행동으로 보아 무슨 일을 벌일 것으로 예견은 되었으나 그 결정이 우리 산업에 치명적이라 충격적이다.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는 우선 그들의 비열한 행위에 울분을 가지겠지만 침착하게 사실을 보게 되면 ‘이럴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고 나라가 처한 현실에 불안감조차 가지게 될게다
일본의 이번 행위는 그들의 기술력과 경제력을 앞세워 한국의 요구에 대한 거절을 거칠게 표현한 일종의 보복이다. 즉 한국 대법원의 ‘일본 징용자에 대한 배상결정’에 대해 강한 거부감과 함께 부당성을 주장하고 그 효력을 무력화하고자 그들이 가진 기술 우월성을 공격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가진 자가 가지지 않은 자를 상대로 하는 치졸하고도 비열한 행위로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무역정신에 반하는 것은 물론 외교 관례상으로도 납득되기 어렵다. 그들이 한민족에게 저질은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대해 최소한의 요구에 이렇게 적반하장(賊反荷杖) 식 공격을 하니 분통이 나기도 하지만 새삼 우리의 부족함도 보게 되어 슬픈 마음이 든다. 
일본이 초래한 행위에 한국 국민 다수가 분개하고 있지만 그것을 덮을 만한 대안마련이 쉽지 않다. ‘절 싫으면 중 떠나면 된다.’ 식의 ‘서로 안 보기’로는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가 하면 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더욱이 국가 간의 문제에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항간에서는 헤어짐을 전제로 강경대응을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렇게 감정적 접근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고 국제적 신뢰에도 흠이 된다. 국민감정이야 카타르시스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에 따른 부담이 크다. 주지하다 시피 그들의 공세에 공세로 대응하거나 무시를 하게 되면 결국 피해의 정도는 한국이 더 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속이 끓지만 냉정을 찾자는 이야기다. 침착한 대응으로 현실적 피해를 줄이는 지혜를 구해내자는 이야기다. 일본은 미운 나라이지만 지리적으로 이웃 나라인 것을 부정할 수 없지 않는가!
그나저나 대책이 어렵다. 다툼 원인이 서로가 양보하기 어려운데다 그곳에는 쌍방의 감정도 깊게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미 대법원의 판결이 난데다 민감한 위안부 문제와 연관이 되는 터라 정부의 운신이 어렵고, 일본 정부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정이 어렵다. 그들 역시 국민감정을 의식해야 하는데다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어 물러서기가 어렵다. 
결론을 말하라면 문제가 잘 풀리지 않을 경우 서로 피해가 있지만 더 큰 피해자는 한국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공격 무기를 삼은 것은 한국의 주력 수출품인 메모리 반도체의 핵심소재와 일부 생산 시스템 수출 중단이고 이의 공급에 문제가 있게 될 경우 생산 차질을 불러 한국의 경제는 어려운 경지를 맞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도 피해가 있겠지만 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현재로서는 어떤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가? 최선은 어떤 형태로던 주력 수출품이자 한국경제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메모리 반도체 생산에 차질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차선은 우리 경제가 입을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이다. 
말은 쉽지만 선이던 차선이던 방안 마련이 어렵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타협점을 찾기가 현재로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이 철회를 하는 것이 최선인데 이는 그들 정권의 자세로 볼 때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궁한 쪽이 한발 물러서야 하는데 그 당사자인 한국이니 답답하기만 하다. 결국 얻고 잃을 것에 대한 고도의 판단을 두고 고민해야 하는 것이 한국정부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물론 이는 비전문가이자 정치 외인인 필자 개인 의견이라 이의 논쟁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대안을 만들어야 하고 이를 가지고 국민들이 차선으로라도 공감하는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달리 선택이 없을 경우 현실성이 가진 조건으로 하되 이를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로 삼는 것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선인들이 말하는 지혜다.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국가경영자와 정치일선의 몫이므로 더는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국민의 한 사람으로 차제에 제의 할 게 있는데 그것은 당면 사안과 직접 관계된 자들과 정부가 가져야 할 책무다. 즉 메모리반도체 사업으로 돈을 벌고 기업을 키워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게 된 기업과 이들에게 그런 기회를 부여한 정부는 현재의 상황을 교훈삼아 마땅한 대책을 세워달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정부는 소재산업 등 기초산업 육성 정책을 수립하고 이에 반도체 메모리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삼성을 비롯한 메모리 반도체 기업 3사에게 상당하는 책임을 묻는 의미의 동참을 끌어내어야 한다. 
메모리 반도체 생산 기업들이 그간에 쌓은 성과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냉정히 살펴 볼 때 그간의 그들 경영행태를 볼 때 그것을 사회적 가치 범주에 둘 수가 없다. 그들이 이룬 성과를 부정적이라 말하지 않지만 그렇게 본다. 그들과 정부는 오늘과 같은 상황발발을 예견할 수 있었음에도 마땅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고, 이는 그간의 관련 보고서들이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 이에 대한 설명이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체계적인 대비를 해 주기 바란다. ‘늦어도 하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다 나은 것’은 초등생들도 들어서 알고 있는 교훈이다. 함께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묘수를 기대한다.(♣2019.07.10.)

시흥3동에 거주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있다

글·그림 17살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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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no.197

 

민주노총은 노동자 민중의 염원을 담은 조직이다. 한국전 이후 분단 증오 세상에서 그 싹마저 잘린 상태에서 민주와 평등의 꿈을 부활시킨 불씨, 전태일 열사 이후 구로공단의 박영진 열사를 비롯해 무수한 열사들의 한과 꿈이 만든 역사적 결실이다. 반독재 민주화의 상징인 1987년 6월 항쟁이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졌고 그 힘이 그나마 우리를 이만큼 살게 했다. 민주화가 형식이 아니라 민중이 행복한 실질적 민주화가 되기 위해 평등한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역사의 물길이 흐르는 곳이 바로 민주노총이다. 그래서 민주노총은 ‘과거가 천국인 자유한국당식 수구’나 ‘현재가 천국인 민주당식 보수정치’, 현실 유지, 지금의 안정이 최선인 권력과 돈을 쥔 세력에게 가장 아프고 거북하고 거추장스러운 대상이다. 

민주노총은 2000만 노동자의 대표조직이다. 그 대표성은 역사 속에서 투쟁으로 쟁취한 피 묻은 산물이다. 자유한국당이나 더불어민주당이나 언제나 정권의 편에서 빛 속에서만 사는 가장 지독한 기회주의 적폐인 한국노총이, 그 한국노총의 손을 잡은 1번이든 2번이든 어떤 정권의 힘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그래서 1991년 전노협 출범에서부터 지금까지 이토록 지독한 정치적 물리적 탄압과 사회적 수난, 언론 등에 의해 온갖 오물과 욕설을 들어도 새로 노동조합을 만드는 노동자들에게 유일한 선택지가 민주노총인 것이다.    

그 민주노총이 구속됐다. 현 정권과 끊임없이 대화를 원했고 청와대에서 국회에서 손을 잡고 만나던 김명환위원장이 구속이 됐다. 검찰은 국회 앞 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김명환 위원장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법원은 ‘도주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김 위원장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자발적 출두를 반대했다. 하지만 ‘도주의 우려가 있다.’는 불명예를 받지 않겠다고 출두한 민주노총 위원장은 바로 그 이유로 구속됐다. 불법 파견으로 인신매매를 하고 있는 현대기아 정몽구나 정의선 부자는 멀쩡하고, 구속된 들 풀려나 권력의 품에서 빛이 된 삼성 이재용과 구속된 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 이 선명한 비교는 우리사회 법과 질서와 정치의 불의(不義)함을 아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민주당 정부 하에서 민주노총 위원장이 구속된 것은 김대중 정권에 이어 두 번째다. 지난 2001년 김대중 정부는 취임 약 3년 만에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 등을 이유로 당시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을 구속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5월 민주노총 조직쟁의실 간부 3명을 구속했다. 민주노총 간부 ‘줄 구속’은 박근혜 정부와 비슷하다. 하지만 사건의 정도를 보면 2015년 민중총궐기는 전면적 저항으로 이번의 구속사건에 비하면 그 엄중함이 ‘새 발의 피’다. 민주노총에 대한 현 정권의 ‘적대감과 참을성’이 박근혜정권보다도 훨씬 못하다는 말이다.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위원장 비롯해 8명에 달하는 민주노총 임원과 간부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조합원에 대한 광범한 압수수색을 하고 있다. 작금의 사태는 유례없는 노동을 대상으로 한 공안정국의 조성이자 혹독한 탄압이다. 

그런데 민주노총은 언제 탄압을 받을까? 현대중공업 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조직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실익이 아니라 비정규직 미조직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비정규 미조직 노동자들을 더욱 절망으로 모는(노동법 개악)타협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귀족노조 이기적 노조라고 맨날 욕을 먹지만 민주노총이 구속되고 탄압받을 때는 언제나 전체 노동자들을 위해 나설 때였다. 민주노총 위원장의 구속은 민주노총이 권력의 입맛에 맞추지 않고 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자, 문재인 정권이 더 본격적으로 돈의 입장에서 권력의 단맛을 추구하겠다는 선포다. 

새로 청와대 경제 정책을 책임 쥘 자가 서슴없이 ‘앞으로 기업이 괴로울 일이 없다.’며 삼성 이재용을 만날 것이라 한다. 삼성 이재용은 풀어주고 민주노총 김명환은 잡아넣는 지금의 장면만큼 한국적 정치의 적폐성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문재인 정권도 명심할게 있다. 김대중정권도 공기업 민영화와 손배 가압류로 가장 많은 노동자를 죽인 노무현도 민주노총으로 대표하는 우리 사회 미래와 적대하는 순간 정치적 폐족의 길을 걸어갔음을 말이다. 

문재훈 소장
남부노동상담센터

 

 

이경혜 글, 이은영 그림 바람의아이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올해 초 큰딸이 할아버지 전화를 차단시켜버리는 일이 생겼다. 토익 시험을 준비하는 손녀를 위해 80이 넘은 할아버지가 토익 문제집을 사오고, 시험 일정을 안내하고, 공부를 어디서 하느냐 잘 되느냐 맛있는 거 사줄까 등등 전화를 하셨다. 아이는 집중해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지나친 관심에 짜증을 내다가 결국은 전화를 차단하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을 즈음 「새를 사랑한 새장」(이경혜 글 이은영 그림, 바람의 아이들)을 읽게 되었다. 
  겨울을 맞은 넓은 초원, 자작나무에는 텅 빈 새장이 매달려 있다. 새장은 춥고 외로워하던 터인데 길 잃은 홍방울새가 날아들어 잠이 들었다. 새장은 나무의 정령에게 마법의 힘을 빌렸다. 하지만 새가 새장을 떠나면 마법의 힘은 사라기 때문에 새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자물쇠로 잠가 두었다.새장은 홍방울새에게 폭신한 깃털 이불, 장미꽃잎이 둥둥 떠 있는 목욕물, 맛있는 벌레 요리까지 준비해주고 편안하게 지내도록 한다. 맛있게 먹고 난 뒤 홍방울새가 숲에 가서 한 바퀴 돌고 올 테니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해도 새장은 홍방울새가 돌아오지 않을까봐 새장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새장 안에 모든 걸 갖추어 주었으니 편안하게 새장에서 지내라는 것이다. 한동안 홍방울새는 새장이 온갖 정성으로 돌보는 것을 기꺼이 즐기면서 행복에 겨워 노래까지 부르며 지낸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다시 봄이 왔는데 홍방울새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온몸이 펄펄 끓고 맛있는 벌레 요리도 먹지 않는다. 새장은 온갖 정성으로 돌보았지만 소용이 없다. 
  어느 날 까마귀가 와서 자물쇠를 부숴주면서 얼른 새장 밖으로 나오라고 한다. 그 안에 있다가는 병들어 죽는다고. 홍방울새가 막 문을 나서려고 할 때 새장은 슬픈 목소리로 무엇이든 다 해줄 테니 떠나지 말라고 한다. 그 소리에 홍방울새는 차마 떠나지 못하고 새장에 남는다. 
새장은 밤새도록 홍방울새를 돌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새장은 나무의 정령에게 홍방울새를 살려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나무의 정령은 “하늘을 나는 새가 날지 못해서 생긴 병은 나도 어쩔 수가 없단다.” 라고 한다. 밤새도록 찢어지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린 새장은 다음날 홍방울새를 내보낸다. 날아갈 힘도 없던 홍방울새는 날개가 저절로 활짝 펴져 멀리멀리 날아갔다. 
  홍방울새가 날아간 새장은 덜커덕덜커덕 흔들리며 춥고 외로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건강해진 홍방울새는 다시 새장에 들어와 잠을 잔다. 다시 마법에 걸린 새장은 자장가를 불러주고 편안하게 쉴 수 있게 해 준다. 달라진 것은 새장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는 것이다. 

  새장과 홍방울새 이야기는 지극 정성으로 자식을 키우는 부모와 닮았다. 어렵고 힘든 일은 내가 다 해 줄 테니 너는 편안하게 내 울타리 안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해라. 아이의 생각보다는 내가 더 많이 살아봤고 경험이 많은 내가 더 많이 알고 있으니 내 말을 다 믿고 넌 나만 따라와 하는 듯하다. 새장 안에만 있던 홍방울새처럼 자신이 날개가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새장이 해주는 대로 있다가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시름시름 앓게 될지도 모른다. 

  새는 하늘을 날아야 행복한 동물인데 그것을 하지 못하게 하니 새장 안에서 병이 들게 된 것이고, 아기였던 손녀는 이제 성인이 되어 자기 앞 가름을 해 나갈 수 있는데도 할아버지식대로 사랑을 주게 된 것이 손녀와 사이가 멀어지게 된 이유였다. 

  새나 식물이나 사람이나 그것을 돌보는 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자기 삶을 스스로 펼쳐 나갈 수 있게 도와주는 일 뿐이다. 적·당·한·거·리를 두고서 말이다. 
 「적·당·한·거·리」(전소영, 달그림) 이 책은 식물들 돌보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 “딱 내 책이네~.”하면서 왔다. 식물들의 특성을 잘 파악해서 물을 주어야 할 때, 겨울이면 밖에 두어도 될 식물, 안으로 들여놔야 할 식물, 햇빛을 좋아할 식물, 그늘에 두어도 될 식물 등등 그 식물의 특성에 맞게 도와주어야 한다. 
  물을 가끔 주어야 할 식물에게 물을 너무 많이 주어서 뿌리가 썩게 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또 물을 자주 주어야 할 식물이 목말라 하지 않도록 잘 관찰하고 그 특성에 맞게 도와주는 일 참으로 어렵지만 잘만 하면 아주 기쁘고 행복한 일이 된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

 

*시흥5동 금천마을공동체지원세터 1층에 마련된 기록관에는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展(전)이 6월21일부터 7월19일까지 진행됩니다. 17살이 된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지난 이야기들과 기억속의 사람들, 기록물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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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 형 사립고를 보다. 
자율 형 사립 고등학교(‘자사고’) 문제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것의 효용성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인 것 같다. 즉 그것의 현실적 필요성은 인정되지만 운영에 문제가 있고 그래서 존재에 대한 다툼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 세대들로서는 생소하기만 한 이 제도 즉 ‘자사고’는 그러나 젊은 세대들에게는 필요한 현실적 시스템이자 선호하는 대상으로 알고 있다. 그렇듯 ‘자사고’는 오늘 우리사회 교육의 중요한 현장이고 문교 정책에서도 중요하게 취급되는 정규 중등교육 시스템이면서 또한 사회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 시스템은 이명박 정부시절이던 2010년에 수립된 문교 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교육제도로서 학생들에게 다양한 교육 환경을 제공할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사립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먼저 시작하였는데 수업 일수가 탄력적이며 수업 과목도 자유롭고 능력에 따라 학년 구분이 없는 등 학교가 학사 운영을 자율적으로 결정하여 시행한다고 한다. 공립 자율고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립 자율고와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제도는 2014년 경 전국에 49개 고등학교가 지정되었으며 이러한 유형을 공교육으로 도입한 것은 다양한 교육환경을 제공함으로 변화하는 시대상황에 맞춘 인재양성이 목적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하면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산업구조와 신지식 환경에 부합하는 인적자원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한 선진형교육정책의 한 모습으로 보인다.
이러한 교육 모습은 그러나 그 시행이 경제 환경의 변화에 따른 대응책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즉 현실 상황에 따른 국가 교육정책이기는 하지만 그런 교육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사회적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사회의 유난하다 할 교육열에다 한 둘밖에 없는 자식들에 대한 교육욕구는 공교육으로는 부족하여 지나치다 할 사교육 수요를 불렀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문제들 이를테면 과도한 교육비 부담, 학군제에 따른 부동산 문제 등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고, 더욱이 이런 구조로 계층 간 갈등에 대한 어떤 형태의 국가적 정책이 필요한 데 따른 결과로 본다.
그러나 이 제도는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한 대안인가에는 솔직히 공감이 되지 않는다. 그것으로 기대되는 것 보다는 오히려 폐해로 볼 수 있는 점들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편견인지는 모르지만 우선 접근에 한계가 있다. 즉 모든 고등학생들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지 않는 제도이므로 보편성 문제가 있다. ‘자사고’는 그 특성 상 학교도 학생도 일정한 기준이 요구되고 그런 면에서 차별이 불가피하게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학생의 입장에서는 누구나 입학할 수 있는 학교가 아니고, 학교의 입장에서도 원한다고 누구나 이러한 학교 시스템을 운영할 수 없다. 요지를 말하면 이 제도는 그 진입에 일정한 조건이 있고 그것은 기존 제도와  차별인가 하면 불공정성조차 제기된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하는 교육기회의 장에 제한이 있는 것은 바람직한 교육제도라고 볼 수 없다. 그러함에도 현실에 존재하는 상황을 이유로 필요가 인정되어 만든 시스템일 것이므로 그 존재 이유를 부정하지 않지만 모두에게 평등이 요구되는 교육기회라는 대의(大義)에서 볼 때 차별은  바람직하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육의 기회는 헌법에서 국민들에게 권리와 더불어 의무로 규정해 두고 있는 것은 그 중요성의 정도를 말한다. 모든 국민에게 교육은 권리이기 이전에 의무로조차 규정한 것은 사람에게 배움은 최고 가치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던 교육 기회에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되고 더욱이 공교육 즉 국가의 교육정책에서는 더욱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현실적인 사회문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일정한 제한을 두는 제도를 반대하지 않지만 교육 기회의 경우 그것도 공교육에서는 이를 허용하는 것은 생각해 볼 과제다. 그것은 국민의 역량 키우기에 국가가 제한을 두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듯 우리 사회에서는 현실 문제에 대응한다며 원칙이 모호한 정책들이 많다..
아무리 사회적 문제에 대응하기 위함이라 하지만 소수를 위하여 다수가 차별을 받는 제도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결국 강한 자와 약한 자에 대한 차별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가 비전문가라 현재 문제를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현재와 같은 ‘자사고’ 제도는 결국 그런 유형의 제도로밖에 볼 수 없다 
‘자사고’ 제도는 사회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만부득이한 제도로 보편성 문제가 있지만 최소화했다는 주장을 반박하지 않는다. 그런 주장의 이유들이 존재하는 것이 현재의 우리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이 제도의 시행에 긍정적 견해를 둘 수가 없다. 그것은  비사회성을 최소화하는 장치를 두었다 하지만 그것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고 오히려 당초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들조차 시간이 흐르면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평등을 중요한 가치로 두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어떤 형태로던 차별을 인정하는 제도를 두어서는 안 된다. 비록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 이로움이 있다 해도 평등에 반하거나 경시되는 국가의 정책은 절대 옳은  정책이 아니다. 영재를 찾는다고 그 찾기에 제한을 두는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도 그렇지 않는 것도 보석이라면 그것은 같다 .  
‘자사고’ 제도를 당장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잘 못된 제도라도 이미 그것이 사회의 제도로 도입되어 시행됨으로 그에 연루된 인구를 무시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제도의 시행 상 불가피하게 가지게 되는 차별이 이해될 수 있는 대안 강구, 예를 들면 현재의 부정성을 상쇄할 수 있는 제도나 그것을 갈음할 만한 사회적 가치 창출을 함께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 부모들의 교육열은 세계에서 상위그룹에 속할 정도로 유난하다. 이는 가난한 시절이던 과거에도 그랬는데 그 때보다 살기가 좋아진 현재에는 어떠한가는 다른 설명이 필요가 없다. 사실 이런 전통은 이 땅에 유능한 인적자원을 풍부하게 함으로 부족한 부존자원에도 경제선진국의 대열에 오르게 된 결과를 도출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런 역사와 전통은 우리 사회의 교육 기회의 보편성에서 기인했음을 알아야 한다. 
 최근 지방의 몇몇 ‘자사고’가 인가를 취소당해 일반고로 전환하게 된다는 보도를 보았다. ‘자사고’가 가지는 사회적 문제로 인가도 어렵지만 유지도 어렵다는 것 곧 ‘자사고’가 가지는 사회적 책임이 중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현상이라 이 제도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다소 위안이 된다. 그러나 당국의 조치가 미덥지 않아 이 사태는 오히려 더 고약한 상황을 만들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우선 배제된 학교와 재학생을 둔 학부모들의 격렬한 반대가 있는데 그 이유에 객관성을 찾기 어려워 공감이 되지 않는다. 더욱 걱정인 것은 이런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는 정치인들의 비상식적 접근이다. 그들은 목소리가 큰 편의 쪽에 서서 주장을 보태는 이른바 포퓰리즘적인 대응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의 정치인 중에는 이런 분 즉 기회주의적인 분들이 여·야당 가리지 않고 많이 분포한다.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는 알고 싶지 않다. 다만 당국이 이 제도를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가 있어 반갑다. 재삼 강조하지만 국가의 정책은 어떤 경우에도 평등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교육의 목표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행복하게 사는 사회 환경 조성이 목표이어야 하고 그런 폭표의 지향에 차별을 두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2019.06.24.)

시흥3동에 거주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있다

 

[장제모]

 판검사는 개천에서 용 난 가장 확실한 증표였다. 돈과 권력이 특권과 반칙으로 똬리를 틀다 못해 문드러진 세상에서 공부하는 머리와 엉덩이 짓무르는 노력으로 돈과 권력의 세상에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하고 유력한 길이였다. 또한 법을 통해 진리와 진실을 파고들고 응징하는 가장 빛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래서 판검사들은 이중적이다. 출세에 대한 욕망과 세상 부조리에 대한 분노가 겹쳐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적 타락과 사회의 마지막 진실에 대한 용기가 함께 섞였다. 하지만 이런 이중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출세에 대한 욕망과 타락으로만 남게 된 것은 놀랍게도 ‘민주화’ 탓이다. 
80년대 까지 판검사는 말 그대로 ‘어용’이었다. 80년대 필자에게 전달된 공소장과 판결문은 오탈자까지 동일했다. 판검사들이 독재정권의 흉기일 뿐이었다. 독재정권의 유지가 가능한 것은 돈과 권력이 언론과 검경을 장악하고 사법부(司法府)를 사법(邪法, 死法)부로 만들어 민심을 뒤틀 수단으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에 판검사들은 잔인하고 뻔뻔하고 양심 없는 흉포함은 있어도 ‘사회적·도덕적 권위’를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민주화와 함께 법질서를 지키면서 주장이 개진되고 세상이 바꿀 수 있다는 기대는 합법적 제도적 틀 내에서의 행위만 요구했다. 법 밖에서 법을 넘어서는 ‘진보’의 길은 다시 한 번 불온과 무질서가 되었다. 문제는 그 법질서를 만들고 유지하고 판단하는 (국회·검경·재판부) 그 어느 곳도 ‘새로움’이 없었다. 결과, 민주화가 독재의 흉기 검경 판사들에게 도덕적 권위마저 부여한 횡액이 되었다. 『법원사』의 공식기록에 따르면 1945년 10월 11일 미 군정청은 전국의 일본인 판검사 전원을 일시에 퇴진시키면서 조선인 판사 39명과 검사 23명을 임명했다. 그런데 퇴진시킨 일본인 판검사와 새로 임명한 조선인 판검사가 중복이었다. 예를 들면 민복기는 ‘이와모토’로 퇴임하고, 조선인 ‘민복기’로, 이영섭은 ‘다케히라’로 퇴임하고, 조선인 ‘이영섭’으로 신임판사가 된다. 친일파들이 부활하는 마법의 순간이며 판검사들이 영원히 권력의 빛 속에서 칼자루만 쥐는 자리가 되는 순간이었다. 청산은커녕 반성도 없는 일제 지배 도구들이 미군정과 이승만, 박정희와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분단 독재 부패정권의 가장 강력한 국가폭력의 집행자들이 된다. 이 폭력에 민주주의라는 권위마저 입혀버렸으니 그들의 타락은 개인적 탐욕을 넘어 구조적 집단적 타락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승태와 그 일당들의 타락, 특히 대법원의 양아치화는 대한민국 헌정에 대한 최종적 유린이다. 이들의 타락은 박근혜의 무지·무능에 의한 농단보다 그 역사적 죄가 크다. 그리고 버닝 선 사건에서 경찰, 김학의 사건에 대한 검찰의 모습은 그들의 개 같은 타락과 부패가 얼마나 구조화·성역화 되어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권세만 부리는, 선출되지도, 심판받지도 않는 무도한 권력의 무한한 타락. 여기에 무슨 민주공화국의 법이 존재할까? 게다가 그것을 구조적으로 보호하고 무마하는 작금의 판검사들의 더러운 카르텔, 모든 판검사들이 개가 된 것을 자처한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적폐의 슈퍼 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판검사들의 고위급 인사들은 80년대 전두환 밑에서 민주주의에 고문을 가한 당사자들이다. 민주화로 치장된 지난 30년은 고문·조작을 해대던 권력 괴물들의 권력 상층부화 과정이기도 했다. 이들에게 개혁을 맡기는 것은 자기가 자기들에게 면죄부를 주라는 특권을 용인한 것이다. 부정부패 특권 반칙 타락의 세상에 중심은 결국 ‘정치권력’이다. 그 정치권력 중 원래 그런 놈들인 ‘자유한국당’ 부류보다 민주주의를 오염된 법 제도 체계에 가두고 그 특권에 취한 역대 민주당 정권의 안일과 오염과 무엇보다 ‘단호함’의 부재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본다. 이들이야말로 독재정권의 흉기들에게 법 제도적 권위를 그대로 넘겨주어 오만한 권력의 괴물로 덧나게 만든 당사자들이기 때문이다. 청산·제거해야 할 것들과 협치를 말한 책임은 온전히 문재인 정권과 집권여당의 몫이기 때문이다.  

 


문재훈 소장
남부노동상담센터

 아이들이 몰려와 책을 보고 잠시 두런거리다가는 다시 훅 나가버린 어느 오후, 갑자기 찾아온 적막에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아 한참 서성거렸지만 이런 기회가 쉽게 오는 게 아닌지라 얼른 새로 들어온 책 코너에 가보았다. 그림책 하나가 바로 꽂히지 못하고 옆으로 누워있다. 
 그림책 <할아버지 집에는 귀신이 산다>의 표지에는 한 할아버지가 작은 집 앞에서 역시 작은 마당을 쓸고 있고 푸른색을 전신으로 입고 있는 투명한 느낌의 사람이 마주 서 있다. 
 50년을 넘게 혼자 살아온 할아버지는 언제부턴가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결국 모습을 드러내는데 다름 아닌 귀신이었다. 일본인이었던 이 귀신은 자신의 비석을 찾으면 유골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신문기사에 흥분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귀신을 알아보게 되자 당장 자신의 비석을 보여주겠다고 한다. 자신의 비석이 있는 곳에 할아버지가 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집 가스통 받침으로 쓰던 비석은 귀신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그의 것이 아니었다. 죽은 날짜가 다르다고 했다. 침통해하는 귀신이 불쌍해진 할아버지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귀신은 자신이 숨겨둔 은을 찾게 해주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비석을 함께 찾아줄 것을 부탁한다. 할아버지는 아주 힘들어하면서도 일단 동네를 뒤진다. 
 도저히 더 이상은 찾을 수 없다고 하자 귀신은 풀이 죽는다. 할아버지가 왜 이 땅에서 죽었는지 묻자 귀신은 자신이 100년 전에 고향 대마도를 떠나 돈을 벌러 부산에 정착한 이야기를 해주면서 병이 들어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자신은 열다섯 살에 전쟁으로 피난을 가야했는데 장남인 자신을 먼저 보내고 따라오겠다는 부모님은 영영 만나지 못했고 고향인 연백은 북한땅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귀신과 할아버지는 이제부터 열심히 귀신의 비석을 함께 찾기로 마음먹었다. 마지막 그림에서는 같은 그림에서 도드라지지 않았던 할아버지네 댓돌이 보인다. 그 댓돌에는 한자로 뭔가 잔뜩 써져있다. 아마도 그것이 귀신이 찾던 비석이 아닐까 싶었다.
 책의 뒤쪽에 작가가 쓴 이야기를 읽고서야 이 내용이 이해가 되었다. 부산 아미동은 일본인들의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자료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시절에 우리나라에 있던 일본인들의 무덤이라고 했지만 작가는 조선시대 무역을 담당했던 초량왜관에서 일하던 일본인들의 무덤도 이 곳에 섞여있다고 했다. 책에 나온 귀신도 그런 사람이었다. 
 일본인들은 무덤 앞에 비석을 많이 쓰는데 3층으로 짓는 경우도 많았다. 전쟁이 나고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면서 천막조차 칠 곳이 없던 이들이 일본인 공동묘지터에 있던 비석을 주춧돌 삼아 집을 짓기도 하고 비석을 이용해 담벼락도 만들고 했다. 죽음에 대해서는 엄숙함을 갖고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도 전쟁의 날벼락 속에서는 그런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는지 비석들은 뒹굴거나 벽으로 이용되고 가스통 받침으로 지금까지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관련 사진을 보고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일본사람들의 공동묘지라면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에 있던 사람들이고, 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과 잘 지내기보다는 뭔가 군림하던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그럼에도 이들의 비석이 거리를 뒹굴고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고 심지어 유골항아리들이 훼손되는 경우도 많았다니 그것이 바른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시는 이곳을 비석문화마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자는 뜻으로 홍보를 하고 있다. 마을에는 관광객을 위한 것인지 작은 인형들도 만들어놓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도깨비라고 만들어놓은 것이 일본의 요괴 오니의 형상이었다. 일부러 일본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은 아마도 아닐 것이다. 다행인 것은 주민들 중 일부는 일본인들의 영혼을 위해 향을 피우며 죽은 넋을 위로하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니 아이들은 슬픔과 위로를 이야기한다. 슬픔은 다른 색으로 두 사람에게 있고 위로는 두 사람이 다 필요하다고 했다. 고학년이라 생각이 의젓하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그림은 말없는 위로를 느끼게 한다. 
 비록 우리를 아프게 하고 억압하던 이들이라도 죽음의 세계로 떠난 이들은 적절한 존중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터에 자리를 잡아야 했던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은 더 존중되어야 한다. 어떻게 그것이 실현되어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양쪽 다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활동가 
민경아 

이영아 글·그림/ 꿈교출판사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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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일상에서 막말로 그간에 쌓았던 정(情) 등 인간관계에 균열이 있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해(利害) 문제나 의견차이로 인한 것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화해가 되거나 잊어버리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로 인해 지속적으로 소원한 관계가 되는가 하면 심지어는 원한관계가 되는 경우조차 있다. 
막말의 부정성은 그 결과를 볼 때 당사자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보다 그렇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혹자는 카타르시스를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잠시잠깐의 자기만족일 뿐 대개는 편치 않은 결과가 된다. 즉 미안함에 더하여 부끄러움조차 가지는 자괴감을 갖게도 한다. 그런가 하면 책임을 져야 하는 결과조차 있어 막심한 후회의 사유조차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듯 막말은 사람들과 관계에서 대개는 나쁜 현상을 만드는 소재가 된다. 
막말을 하게 되는 동기는 무얼까? 그에는 분명 사연이 있을 게다. 대개는 자존에 관한 것 예를 들면 모욕을 당해 그것을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은데 따른 반사적 언어행동이다. 물론 다른 경우도 있다. 말하는 자의 소양 문제 로 인한 경우도 있고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의 삶에 막말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상황에 따라 누구도 할 수 있으니 이를 무조건적으로 나쁘다할 수만은 없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 하지 않는가? 그러함에도 막말은 선의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것은 역시 보통사람들의 일반적 반응이고 그것은 내용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물론 분노와 증오조차 일게 하는 원인이 된다. 막말이 가지는 해악이다. 
막말을 할 정도의 상황을 맞으면 그것을 행동하는 것을 어쩌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당사자를 불쾌하게 하고 자신에게도 불편한 현상을 초래한다. 그렇듯 막말은 그것이 연루된 인간관계에 부정성을 끼치는 만큼 이를 삼가고 자제하는 것을 보편 가치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런데 막말을 앞에서 살핀 것과 다른 경우가 있다. 다시 말하면 막말이라는 단어의 의미로 볼 때 같은 범주로 보기 어려운 것이 그것으로  막말이 가지는 부정성의 극치다. 즉 경쟁상대 등 특정인을 공격하기 위해 사실이 아닌 것을 왜곡하여 저질적 표현을 하거나, 사실이기는 하지만 비약하여 표현을 하고는 비열한 비교로 상대를 자극하는 경우다. 이는 대개 정치인이나 대중이 알만한 지명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다.
최근 언론 보도를 보면 정치인들의 막말을 자주 접하는데 이들의 모습 중에는  이와 같은 행태들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모습을 보이는 당사자들을 모두 잘못되었다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들 나름의 신념을 표현하는 것으로 소신으로 이해되어야 할 게 있고, 비록 특정 상대를 비난하는 표현이이기는 하지만 경청할만한 내용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다양성이 존재하고 그것을 존중해야 하는 사회가  아닌가!
그런데도 정치인 등 이른바 사회 지명인들의 이런 유형의 막말은 듣기도 거북하고 수용이 어려운가 하면 저항조차 일게 한다. 그들의 현재 위치에 대한 신뢰에 대한 기대치 때문일 게다. 그들의 언사는 진실이나 정의를 말하기 보다는 자기의 이익만을 위한 가공된 목표가 있고 그것을 노골적으로 행동한다. 사회 지도자가 되고자 하면서 보편가치에 반하고 품격 문제조차 있는 언행을 일삼는 자들이 득세를 하는 사회는 정의 사회라 말 할 수 없다.
유의하고자 하는 것은 내년이 총선이 있는 해고 그래서 국회의원 후보가 되고자 튀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자들 그러니까 건전한 사회 지도자로 기대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 체 대중영합적인 행동으로 자기를 알리려는 자들이 보인다. 이런 자들은 국민의 대표가 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런데 유감인 것은 상당수 국민들은 이러 자들이 국회의원 또는 후보가 되는 것을 부정적으로 말하면서도 선거 때는 백지로 한다.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 후보로 공천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질이나 능력보다는 현재 결과 즉 정당공천 결과를 판단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의리로 봐야 할지 무지하다할지 모르겠다.
세태가 이렇고 총선을 앞둔 시점이라 정치인들의 막말 퍼레이드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그들의 소양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자들이 생겨나고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은 주권을 주장하면서 그것의 본질을 망각하는 국민들의 책임이다. 요약을 하면 불량정치인이 생성되고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준 장본인은 국민이다.  이러한 지적에 자유로운 국민의 수는 많지 않다. 
막말은 비판의 목적으로 행해질 수 있고 그것이 가진 자극성은 사회의 경종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렇듯 의미를 가지는 표현은 사회 정의 구현이 목적일 수 있는 등 긍정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런 기능이 있다 할지라도 막말 성 표현 방법은 삼가야 한다. 공손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표현으로도 의도하는 효과를 충분히 구할 수가 있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이 그런 의미가 아닐까? 
정치 지망생 등 사회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이 유념해야 하는 것은 막말로 치부되는 표현은 어떤 목적에서든 긍정성보다는 부정성이 더 크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듣기 좋은 말로도 얼마든지 상대방을 자극하고 다수자에게 공감을 갖게 할 수 있다. 2020년 총선에 나서려는 이들은 경청하기 바란다.(♣2019.06.08.)

 

시흥3동에 거주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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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날 수줍음 가득 미소를 가진 여인이 도서관에 들어오며 ‘염소 시즈카’ 그림책이 있는지 묻는다. 처음으로 우리도서관을 방문 하셨다고 한다. 시즈카(しずか)- 일본 말로 ‘조용함,- 다시마 세이조 책을 소개 받았고, 함께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을 소개 받으셨다고 한다. 수줍음 가진 여인은 ‘시즈카 그림이 참 좋네요’ 그림책을 보며 좋아하신다. 다시마 세이조의 순수한 그림과 자연 사랑을 닮은듯한 이분은 책을 빌려 본인의 화원(꽃과 생활)에  그림책을 전시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인연이 되어 알게 된 ‘염소 시즈카’ 그림책은 학교에서 책읽어주기 활동을 할 때마다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책이 되었다. 200페이지나 되는 긴 그림책인데도 아이들은 이야기 속에 쏙 빠져 들어온다. 노랑 바탕의 표지에 가느다란 다리로 커다란 몸을 무겁게 지탱하고 있는 염소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귀여워 아이들은 책장을 쉽게 넘기곤 한다. 또한  글이 세로쓰기로 쓰여 있어 옛 책처럼 책장을 반대방향으로 넘기는 느낌은 아이들에게 더욱 새로움을 경험하게 하는 그림책이다.
 단순한 그림과 다양한 각도로 바라 본 자연스러움의 조화, 역동적인 이미지와 천진함이 어우러진 표현은 책을 읽는다기보다는 그 속에 들어가 있는 듯 빠져들게 한다. 한숨 돌려 다음 시간에 읽어주겠다 하면 아이들은 ‘지금요 지금요’을 외친다. 시즈카의 그 다음 사건이 너무도 궁금하다고 한다.

 아기 염소 시즈카의 봄부터 겨울, 다시 봄이 올 때까지의 시간을 그리며 엄마 염소가 되기까지의 이야기- 나호코 가족과 시즈카가 친해지는 이야기, 말썽을 피우며 자라고,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새끼를 낳고, 스스로 선 새끼를 본인처럼 홀로 떠나보내는 이야기, 가족의 양식이 되는 시즈카 젖을 짜는 아빠이야기, 다시 말썽을 피우는 시즈카 이야기 -일곱 편이 한 권의 책 안에 들어 있다. 

 어린 시절에는 들판에서 풀을 뜯던 염소들을 무섭게만 여겼었는데 시즈카 이야기는 읽는 내내 미소를 짓게 한다. 
 ‘염소 시즈카’ 책을 알게 해준 여인, 지금은 도서관 독서 동아리에 참여하여 책을 읽고 있다. 그분께 ‘염소 시즈카’ 그림책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만남부터 하고도 아직까지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 봄이 가기 전에 마음을 나누어야겠다. 조용히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활동가 
시미선 

 

다시마 세이조 지음 / 보림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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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여러 의혹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장자연 사건’은 이제 그 막을 내리는가 보다. 검찰 발표에 의하면 고인의 사망은 자살이지만 그런 사태의 원인이 존재하고 그에 대하여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상대도 있지만 공소제기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유는 공소시효가 완료되었기 때문이란다. 다시 말해서 가해자가 있고 그 범죄사실도 밝혀졌지만 처벌을 할 수 있는 법적 효력이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공소시효는 법률운영의 한 유형으로 일반적 이해가 되는 실정법(형법)상의 규정으로 이를 적용한 결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법리에 반한다. 현행 실정법을 부정하는 것으로 ‘법적 안정성’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이 이론은, 법의 과제는 ‘질서의 평화’이고 이는 설득력을 지니고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독일 법 철학자 ‘구스타프 라드브루후’는 “법은 공동생활의 질서이기 때문에 개인 의견의 다양성에 맡겨질 수 없으며, 모든 사람 위에 위치하는 하나의 질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파하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이런 법 이론에도 공소시효를 앞세워 이 사건이 마무리 되는 것은 승복이 되지 않는다. ‘정의(正義)의 실종’, 아니 ‘정의의 사망’을 보는 것 같아서다. 법은 무엇이고 정의란 무엇인가? 법의 사명에 대한 일반적 이해는 ‘정의의 실천’이 아닌가? 분명한 사실, 즉 진실이 존재하는데 이것이 부정되는 것은 정의의 부정이다. 법적안정성의 중요성을 말하는 ‘라드브르후’는 이런 이론도 폈다. “실정법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의와 심각하게 충돌할 때는 그 자리를 정의에 내어 주어야 한다.” 즉 실정법이라 하여 정의를 무력화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이해를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정의’ 와 ‘법적 안정성’은 서로 모순이 될 때도 있다.
현존하는 법질서인 공소시효가 가지는 규범을 동의한다. 그것이 가지는 본래의 취지를 존중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차제에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절대 진리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법 원리에 대한 이견이 아니고 어떤 경우라도 진실이 부정되는 법 운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라드브루후’가 법의 3요소로 ‘정의’ ‘합목적성’ 그리고 ‘법적안정성’을 이야기 해놓고도 ‘정의’가 법의 최후의 보류여야 한다는 이론을 편 것은 이런 배경일 게다. 
정의의 본질은 평등이라 배웠다. 즉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되는 것으로 법리 기본이고 이는 우리 헌법에서도 존중되고 있다. 따라서 평등이란 기준에서 볼 때 이번의 결과를 승복할 수 있는 사안인가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래서 정의에 부끄럽지 않다 할 수 있는가를 묻고 싶다. 공소시효 원리에 대한 반감이 아니고 그것을  빙자하여 정의를 실종시키는 법 권력에 대한 반감이다. 우리 행형(行刑)사에 이런 사례가 많았던 것은 아는 사람을 다 안다. 한 마디로 정의가 실종된 부끄러운 역사고 그것은 오늘에 이르도록 그 추한 모습은 연장되고 있다.  
법은 정의의 바탕에서 운영되어야 한다. 즉 정의의 본질인 평등에 저해되는 운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그 대상이 권력자 비권력 자에 관계없이 진실에 바탕 하여 처리되어야 한다. 공소시효가 남용 오용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더 하고 싶은 말은, 법적 안정성의 이론 뒤에 숨어 사실을 감추거나 왜곡하여 시간을 끌고는 공소시효로 정리하려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본론을 말한다. ‘장자연 사건’을 그대로 묻어서는 안 된다. 분명 가해자 실체가 있고 그것은 객관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다.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거나 그 전말을 상세히 아는 사람의 증언과 물증으로 볼 수 있는 증빙(장자연의 유서 등)도 있다. 그런데도 이것이 부정되는 것을 용인하는 것은 앞에서 제기했듯이 정의의 부정이다. 진정성을 가지고 이 사건을 살펴보면 공소시효라는 실정법의 장막을 걷어낼 수 있는 물리(物理)도 있는데도 이를 찾으려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외면을 하는 것은 불의를 비호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간의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이 사건은 당시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진실이 감춰지고 변조 왜곡되는 등 사건을 축소하고 감추기 위한 온갖 행위들이 더해져 오늘과 같은 상황이 있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책임을 져야 하는 책임 당사자(가해자)는 말할 것 없고 수사에 참여한 당국자를 포함하여 그것을 호재로 삼아 상업화에 열중했던 일부 언론권력들도 알고 있다. 
다시 말한다. 이번 일은 절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가해자는 분명히 존재하고 지금까지 드러난 현상으로 범죄 구성요건도 완벽하다. 다만 현재라는 시점에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법제도적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상황이 인정되어야 하는가는 앞에서 언급한 “-- 실정법이 정의와 심각하게 충돌할 때는 그 자리를 정의에 내어 주어야 한다.”는 ‘라드브루후’의 이론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물론 고매한 법학자가 제시한 이론이라 그것이 절대성을 가진 진리와 같은 규범이라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존재하는 법이 그 취지에 반하는 규정을 가진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 하는가를 함께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실정법을 빙자하여 자신을 방어하는 책임 당사자는 미워할 뿐 어찌할 수가 없다.  이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자들의 자기 합리화에 대해서도 비난이 고작이다. 다만 양자 모두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자기 내면을 두드리는 양심의 소리가 들리면 지금이라도 진실의 마당에 나와 주기를 당부한다. 
끝으로 경고를 던진다. 힘없는 자라 무시하는 사회는 민주사회가 아니다. 민주사회를 열망하는 시민들은 그것을 구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가는 광화문을 태웠던 촛불혁명을 상기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은 유념하기 바란다. (♣2019.05.24.) 

 

장제모

시흥3동에 거주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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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no.194

 

전 한남상운, 현 신운운수는 6번 마을버스를 운행하는 회사다. 마을버스에서 노조가 만들어지고 해고를 당하면서도 투쟁을 포기하지 않아 마을버스의 막장실태를 폭로하였고 작으나마 변화를 가져온 회사다. 거기서 일하시는 분들이 금천구청에 낸 진정서를 봤다. 그리고 금천구청과 구청장에 대한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어 이 글을 쓴다. 
한남상운은 현실에 맞지 않는 배차로 기사들이 충분한 휴식은커녕 제대로 된 식사시간은 물론 대소변을 볼 시간조차 보장받지 못했다. 그래서 무수한 탄압과 해고를 감수하면서 시민의 안전과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가 가능한 노동조건을 요구했고 그 중 하나로 배차 시간 조정이다. 긴 투쟁 끝에 요구가 받아들여져 1회당 60분이었던 운행을 65분으로 늘렸다. 그런데  2018년 8월에 회사가 갑자기 1회 운행시간을 53분으로 축소한다. 이전의 60분보다도 훨씬 줄어든 엄청난 개악이다. 항의하니 구청의 지침이란다. 이유를 들으니 버스 운행 기록을 통해 ‘실 운행 시간의 평균’을 낸 결과 53분이 나왔다며 버스회사에 통보를 했고 버스회사는 이것을 받아 개선 전의 조건보다 무려 7분이나 줄어든 운행 조건을 시행한 것이다. 기사들은 첫차 막차의 경우 40분 내외이고 가장 바쁜 시간인 출퇴근 시간에는 70분이 넘는데 이를 평균한 53분을 일률적으로 적용하라는 것이 구청의 지침이다. 이런 막무가내 행정을 항의 하니 구청 교통행정과장 최상원씨는 “기계보다 더 정확한 것이 없다.”며 정당성을 강변했다. 그 결과 보장된 10분의 휴가시간이 사라졌고, 조금이라도 쉬기 위해서, 밥이라도 체하지 않고 먹기 위해 신호위반 급출발정지 난폭운행, 붙어 다니고 밀고 다니는 편법운행이 만연되었고 사고는 늘고 대형화 됐다.  
통계를 내고 평균치를 설정하는 것은 기준을 잡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것을 기계적으로 작용하면 그것은 사람의 일을 기계의 짓으로 만드는 바보다. 아주 유명한 우화다. 밤에 강을 건너 기습을 하려는 군대의 장군이 강의 깊이를 물었다. 강물의 수심은 평균 150cm, 병사들의 평균 키는 165cm라는 수치를 믿고 장군은 공격을 결정했고 병사들은 모두 익사했다. 평균이란 수치가 최소와 최대, 최저와 최고의 분포가 있고 상황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모른 결과다. 이와 동일한 오류를 금천구청은 범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실사구시가 없는 탁상행정을 하거나, 행정 자체가 일하는 사람들의 입장, 즉 백성의 편이 아니라 이명박근혜 정권처럼 부자 강자들의 편, 기업의 이익에 복무하는 행정만 하기 때문이다. 
통계와 수치가 통치의 수단이 될 때 ‘한 사람이 발은 화로위에 머리는 냉동실에 있어도 평균 온도는 인간이 살 수 있는 적정온도가 된다’는 멍텅구리 통계학에 빠진다. 그들이 수치로 적정온도를 선전할 때 일하는 사람들은 불타죽고 얼어 죽는다. 현 금천구청 교통행정과장 최상원씨가 단호하게 주장하는 이른바 기계의 과학은 금천구청의 행정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로 만든다. 사람에게 침대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침대에 사람을 맞추어 아무도 행복할 수 없는 폭력행정 말이다. 요리하는 사람이 행복한 요리가 먹는 사람에게 행복한 맛을 준다. 노예의 노동은 노예의 결과를 가져다 줄 뿐이다. 사람이 아니라 오직 이윤과 버스 운행의 형식적 관리만 유지하여 운전기사에겐 죽음을, 구민들에겐 사고의 위험을 주는 이 반민(反民)적 행정 앞에서 묻는다. 이런 입장은 유성훈 금천구청장의 행정 방침의 결과인가, 적폐적 관습에 찌든 일개 부서 관료의 독단인가? 이러고도 유성훈 구청장의 ‘동네방네 행복 금천’은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 구청장의 현답을 요구한다.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표지와 시간상자라는 제목이 맘에 들었던 그림책이었다.
모래사장을 연상시키는 면지를 지나 바닷가에서 모래놀이를 하고 있는 소년의 모습에서 그림책은 시작된다. 
글자가 없는 그림책이라 더 흥미로웠고, 글자가 없지만 글자가 있는 그림책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었다. 소년이 파도에 떠내려 온 오랜 시간 바다에 잠겨 있었을 것 같은 수중카메라를 발견하면서 그림책은 시작된다. 
‘영화 주만지‘의 주인공 아이들이 그림책을 발견 하는 장면과 오버랩 되면서 왠지 나를 미지의 세계로 이끌어 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바다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것 같은 환상 속에 점점 책에 빠져 들어가게 된다. 페이지 하나하나마다 숨겨져 있는 비밀들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아 오랜 시간 페이지 구석구석에 머물게 했다. 읽고 났을 때는 마치 영화 한편을 보는듯한 착각을 하게 만드는 그림책이었다. 이 책을 시작으로 ‘데이비드 위즈너’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게 되었고, 나는 ‘데이비드 위즈너’의 팬이 되어 버렸다.
나에게도 시간 상자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어릴 적 아버지가 어렵게 장만하셨던 카메라는 항상 나와 동생을 따라 다녔고, 소풍이나 나들이를 갈 때면 항상 아버지의 가슴에서 자랑스럽게 빛나곤 하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핸드폰 액정이나 디지털화된 화면을 통해 바로 볼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고, 사진관에 필름을 맡기면 사진인화를 통해 잘나온 사진, 이상한 사진들을 한꺼번에 받아서 잘나온 사진만 앨범에 꽂아두던 시절이었다. 읍내에 나가 사진을 찾아와서 함께 보고 내사진이 잘나왔네 못나왔네 웃고 장난치던 기억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까만색 투박한 시간 상자를 생각하면 아버지가 떠오르고 이제는 내 옆에 안 계시는 아버지가 너무나 보고 싶다. 잦은 이사를 하며 앨범을 통째로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때의 사진들을 지금은 볼 수 없어 많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그때의 추억들은 내 가슴속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시간 상자를 만들고, 가끔씩은 꺼내보고 때로는 위로를 받는다. 어떤 이에게는 시간상자는 추억으로 소중함으로 기다림으로 그리움으로 간직될 것이다. 그런 이유로 모두에게 아름다운 시간 상자를 선물하고 싶다 이 책을 통해.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활동가 
윤 숙 

 

 

데이비드 위즈너 / 베틀북

 

강렬한 빨강색에 카메라 렌즈 같기도 하고 물고기의 눈 같기도 한 표지가 눈길을 끄는 데이비즈 위즈너의 <시간상자>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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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수도권 주택공급 확대 일환으로 고양 창릉지구와 부천 대장 지구를 3기 신도시로 추가 지정하는 ‘제3차 신규택지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경기도 고양 창릉(813만㎡)에 3만8천호, 부천 대장(343만㎡)에 ·2만호 규모의 주택 지구를 조성하고 서울 등지에 중·소규모 택지도 37곳을 만들어 모두 15만 5천호가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수도권에 16만호에 가까운 새 주택을 짓겠다는 것이다.
최근 부동산 과열을 억제하기 위한 강력한 정책으로 주택 시세는 하향 보합세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와 같은 계획은 부동산과 관계가 없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인다. 집값도 안정세라는데 무슨 주택을 이렇게 많이 짓는지 모를 일이니 말이다.
정부가 이러한 대규모 주택정책을 수립하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은 수긍을 한다. 가장 큰 문제는 무주택자들에게 내 집 갖는 기회 확대를 위한 것이고 이는 그럴만한 충분한 명분을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내 집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많고 특히 신혼 부부 등 사회에 첫발을 디디는 젊은 층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정부의 주택정책에 공감을 못한다. 내 집 갖기 기회 확대는 바람직하지만 꼭 수도권 그것도 서울과 가까운 곳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물론 수도권에 인구의 40퍼센트가 몰려있고 비례하여 무주택자들 또한 많은 만큼 대책이 필요한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새 주택 건설이 무주택자에게 기회도 되지만 수도권 과밀을 심화시키는 부작용은 이런 이해를 흐리게 한다. 
서울이나 서울에 가까운 곳에 집을 가지려는 것은 여러 혜택을 기대할 수 있고 그 중에는 질 높은 교육기회에다 취업, 재산 증식 기회를 만나기가 지방보다 유리하기 때문일 게다. 이런 욕구를 잘못되었다 할 수 없다. 부자가 되고 싶고 행복 하고 싶은 것은 인간적 욕망인 것은 상식이고 그러니 기회가 보이는 곳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이런 기회의 장을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에 집중하는 정책을 잘 한다 할 수 없는 것은 필자만의 주장이 아닐 것이다. 
주택 곧 생활의 근거가 되는 주거 공간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3요소 중의 하나이고 따라서 그것을 챙기는 국가정책을 탓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당위에도 불구하고 못마땅함을 넘어 저항감조차 갖게 되는 것은 그 공간을 수도권 위주로 하는 것이 그 동안의 국가의 주택정책이고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정도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방에서도 주택공급을 위한 정부(지방자치권 포함)의 시책이 없는 것은 아니나 지향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경우는 드물다. 우선 공급과 수요의 밸런스가 맞지 않다. 그래서 민간업자들은 흥미를 가지지 않으므로 정부 등 당국이 나서게 되지만 결과는 좋지 않다. 쉽게 말해서 성과를 내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정부의 지방에 대한 주택공급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이 된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의 수도권 집중은 너무 지나치다. 그래서 그간의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시책을 마련하기도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은 해를 거듭할수록 모든 것이 넘쳐나는 공간이 되고 반대로 지방은 나날이 인구가 줄어 빈집이 늘고 경작지조차 유휴지가 되는 등 황폐화되고 있어 국토의 균형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운 과제가 된 것이 현실이다.
그간 이런 문제 즉 수도권 집중에 따른 국가적 폐해는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에 의해 여러 방향으로 제기되었고 기대되는 이론들이 보이곤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런 문제의 해결을 현실화하는 정책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중에 제기된 노무현 정부의 수도의 이전은 놀랄만한 발상이고 그에 대한 반론도 있었지만 그것을 압도할만한 국민적 기대는 더 컸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이 위대한 발상은 끝내 정책이 되지 못하고 다수 국민들의 한탄을 자아내며 해프닝으로 끝났다.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 판정을 받으면서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수도를 옮기는 국가정책을 위헌이라 판단한 것이 과연 옳은지 지금도 의문이다. 수도의 과밀로 수도를 옮긴 다른 나라에서 위헌 결정을 한 것을 보지 못했다. 솔직히 기득권자들이 지배하는 정치권 등 이른바 국가 지도층의 이기주의적 판단의 결과라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권력자를 비롯한 사회 기득권층의 이해에 반하는 데 따른 반격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반국가적 가치관에 젖은 인간들의 상당수가 지금껏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그것은 곧 대한민국의 현실이고 비극이라는 생각을 지금도 거두지 못한다.
그러나 비록 현실이 어렵더라도 국토의 균형발전 정책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수도권의 밀집은 그간에 보아왔던 수많은 사회적 문제 발생 원인으로 작용하고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명절 때와 같은 연휴는 말할 것 없고 휴일 전후에 수도권 일대는 극심한 교통체증을 일으키는 것은 이러한 인구 집중 현상 부작용의 한 사례다. 아무리 도로를 확대하고 선진화하여도 수도권 인구집중이 해소되지 않는 한 결코 대안이 되지 못함을 유념해야 한다. 
수도권 집중은 주택부족에 대한 현실적 대안도 되지 못하면서 오히려 미래의 대 재앙이 될 수 있음을 위정자들은 물론 사회지도층에서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바탕에서 현재와 같은 수도권 집중 주택정책을 지양하고 국토 균형발전을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또한 국민들도 개인적 이기심을 버리고 국가의 미래를 위한 주택정책 수립 요청에 동참할 것을 강력히 제의한다.(♣2019.05.14.)

<장제모-시흥3동에 거주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있다>

5월 25일부터 1박 2일간 ’5월 광주 민주주의의 봄과 시련이라‘는 제목을 가진 프로그램으로 광주에 내려가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역사적 현장들과 흔적들을 만나보았다.
 가장 기억에 남고 가슴이 아팠던 것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 겪으신 분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신 김상호님는 나와 같은 나이인 고등학교 1학년 17살이었다. 살면서 사람을 향해서 실탄이 발사되는 소리를 듣는다는 상상을 해보긴 했을까. 바로 눈앞에서 사람이 칼에 찔리듯 위협받고 끌려가는 것을 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 생각보다 많을 수도 있지만 그게 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지 않았을까.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말씀하시던, 땀이 삐질하던 그분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제주 4.3사건이라던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같은 사건들을 공부하다 보면 사망자의 숫자에 익숙해지고 무감해지는 느낌이 든다. 의자에 앉아 책 위와 동영상에 나오는 하양, 검정 숫자들을 읽을 때면 사람의 목숨이 마치 종잇장처럼 가볍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당사자가 아니니까 라는 가벼운 마음을 갖고 과거만의 일로 치부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당사자분들의, 피해자분들의 경험담을 직접 듣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그분들이 본 역사의 현장은 책 위에 기록의 아주 일부분일 뿐이지만, 그분들의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전해질 때 사람들에게는 더욱 크게 울렁이며 다가온다. 김상호님의 이야기를 들은 나에게는 그랬다.
 제주 4.3과 광주민주화운동은 비슷한 부분이 많다. 사건 당시 외부와 차단되었던 것, 대부분의 살상은 국가의 경찰과 군인들이 저질렀다는 것, 도민들과 시민들이 피해를 감수하면서도 끝까지 저항하며 싸운 것 등 대부분 상황을 절망적으로 볼 수 있게끔 하는 요소들이 비슷하다. 특히 국가를 지키는, 국민을 지키는 의무를 가진 군인과 경찰이 국민을 총과 칼로 위협한다는 것은 세상에 배신당한 것과 같은 의미이지 않을까. 그런데 말이다, 과연 이 사건들에서 누가 피해자이고 가해자인지 가를 수 있을까? 당연히 아무 죄 없이 죽어 나간 사람들은 명백한 피해자들이자 희생자들이다. 하지만 사람들을 죽이던 군인들과 경찰들 모두가 개인의 의지를 가졌던 완벽한 가해자일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데에 과연 아무런 감흥이나 슬픔이 없었을까. 그들의 살상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모두가 상처입는 새드앤딩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이 사건들의 전말은 깔끔하게 밝혀질 수 있을 것인가? 이 두 사건은 결국 누구를 위한 사건이었을까. 답을 알아도 찜찜하다.

 

기고 김온화 

 

<복원 중인 전남도청 건물 >

 

<광무 구 묘역 모습 >

 

최저임금에서 최저라는 말의 의미는 그것이 인간 존엄의 마지노선이라는 의미다. 그럼으로 최저임금을 준수하지 않는 것은 내가 힘들고 어려워서 불가피하게 주지 못하는 어떤 사정이 아니라, 내가 일하는 사람을 인간 이하 취급하면서 학대(虐待)를 하고 있다는 의미다. 최저임금을 올리는 것은 그 사회 민주와 인권의 기준을 높이는 것이다. 최저임금의 상승을 반대하는 것은 결국 민주와 인권을 반대 켠에 내 생업이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2년간 최저임금 인상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우리사회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자가 5이하 사업장, 영세 중소 자영업자쯤으로 안다. 문재인 대통령도 최저임금 인상을 자제하자면 노동자에 자영업자를 대치시킨다. 중소 영세업자들에게 고용된 최저임금에 목 메인 ‘노동자’들이 있음을 잊는다. 누구는 을들의 전쟁이라지만 노동자들은 을도 되지 못하고, 원청(갑)-하청(을)-중간관리자(병)-정규직(정)-비정규직, 영세중소기업 노동자(무)쯤 되어 고통 받고 있는데 말이다.      
노동법의 기본원리는 약자를 우선 보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괴하게 우리사회는 가장 약한 처지의 노동자인 5인 이하 사업장 노동자들의 경우 노동권이 없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5인 이하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해고를 당해도 그 이유를 따질 수 없고, 구제신청을 할 수도 없다. 그나마 5인 미만 노동자들은 몇 년간 겨우 해고수당을 받았다. 헌재가 취업 기간에 따른 해고수당 미지급을 평등권을 침해한 차별이라 위헌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 판결이 편의점, 음식점 등 영세한 5인 미만 사업장들을 어렵게 한다고 일용, 기간제, 수습, 월급제 근로자 등 고용 형태를 불문하고 3개월 미만이면 해고예고 없이 해고가 가능하다는 법을 새로 만들었다. 명색이 노동 상담을 하는 나는 헌재 판결을 믿고, 앞으로는 누구나 부당한 해고에 대하여 그 부당함을 따질 수 있거나, 아니라면 수당을 받을 수 있게 법이 정비될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상담했다. 하지만 시흥 3동 유통 상가에서 해고를 당한 시흥동에 사는 20대 청년 노동자에게 해고수당이라도 받으라며 상담을 했다가 창피를 당했다. 어느 독재 정권이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 빈민을 학살했다던데 한국의 수준이 그 지경이다.  
지난 번 글에서 언급한 한남상운 노동자들의 진정에 금천구의 답변을 봤다. 구청은 우린 그저 평균 운행 시간만 도출해 알려주었을 뿐이고 운영은 회사 자율이라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마약을 제공하면서 먹고 말고는 당사자 문제니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만큼 무책임하다. 그 무책임한 행정은 한남상운 마을버스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인간적 존엄과 시민 안정 확보 투쟁의 작은 성과마저 졸지에 백지로 만들었다. 풍찬노숙을 하며 피눈물을 삼키면 투쟁한 시간과 생의 의미를 송두리째 지워버렸다. 그 결과 자본가들에게 노동조건의 퇴행을 조장하고 혹독한 근무조건의 강화 유지의 명분을 주었다. 그런데 책임이 없다고 하니 이것은 무책임이 아니라 돈의 편에서 노동자를 학대하고 시민들 안전을 파괴하는 부정한 교활함이다. 적폐행정의 전형이다. 이렇게 밍기적 거리다 적폐의 도구가 될 것인지 유성훈 구청장의 직답을 요구한다.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4월입니다. 올 해도 어김없이 그날이 돌아옵니다. 벌써 5주기라니 세월이 참 무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별히 관련된 이가 없어도 4월은 힘이 드는 달입니다. 도서관에서도 한 켠에 추모의 뜻을 담아 관련 책을 전시하고 노란 종이배를 접어보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이 주로 어린아이들인지라 내용은 잘 모르고 어설프게 종이배만 접어서 벽에 붙여 놓지요. 조금 더 자라면 알게 될 일이라 억지로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내용도 모르고 <우연한 빵집>을 읽어보려 집어든 날이 마침 4월 16일인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겠지만 읽다 보니 그날이 지나고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한적한 동네 주택가 뒷골목에 빵집이 하나 있어요. 간판도 가게 이름도 없이 그저 자그마한 빵집입니다. 빵집 주인은 소설가가 되려고 방황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남긴 레시피와 빵집을 물려받습니다. 그 덕에 오래전 친구를 만나게 되지요. 그 친구는 결혼을 앞두고 그 배를 탔어요. 약혼자를 남긴채...
유난히 빵을 좋아하던 윤지는 태환이와 진아의 친구입니다. 학교가 다른 두 아이는 윤지를 보내고 마음을 잡지 못하지요. 이 작은 빵집을 정말 우연히 발견하고 아르바이트까지 하게 된 하경이는 오빠가 군대에서 의문사하게 된 아픔을 가진 아이입니다. 
이렇듯 저마다의 사연은 빵집을 매개로 이어지는데요, 때로는 눈물의 빵을 씹으면서, 혹은 말랑한 빵 반죽을 만들면서요. 그리고 작은 빵집에 그들 모두를 초대하는 베이킹강좌가 열리게 되고 모두는 빵집으로 향합니다. 빵집주인은 그 뒤 뭘 할까요? 짐작하는 대로입니다. <우연한 빵집> 소설을 시작하는 것이죠.
빵집 이야기라 여러 가지 빵에 대한 이야기도 곁들여져서 읽는 재미가 있어요. 말랑한 반죽으로 하얀 속살을 가진 따끈한 빵이 나올 때면 빵순이는 그저 침이 꿀꺽하니 넘어갑니다. 가벼운듯하나 자꾸 먹먹하게 하는 책입니다. 아직 그날에 대한 일은 다 밝혀지지 않았고 오히려 정치화하는 사람들로 인해 비난도 무성하지요. 그들을 보내고 남은 사람들의 마음을 그저 돈의 잣대로 재는 이들이 더한 아픔을 주는 게 작금의 사정입니다. 
빵집의 사람들처럼 반가운 소식도 늘어갑니다. 희생자 엄마들이 모여 연극무대를 펼치고 생존 학생 중에는 유치원교사의 꿈을 접고 응급구조사가 되려는 친구도 있어요. 같이 응원합니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활동가
어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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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자치회

 


주민자치회가 주관하는 마을총회를 앞두고 금천구 10개 동이 부산하다. 이번 총회는 각 동의 주민자치회 올해 하반기 사업과 내년도 사업 계획을 수립하고 그것을 주민들에게 물어 최종 결정을 구하는 절차라고 한다. 
과거 주민자치위원회가 개정된 조례에 따른 주민자치회로 전환되고 처음 시행하는 글자 그대로 주민 자율에 의한 주민자치회 주관 마을회의의고 그곳에서 직접 마을의 사업을 결정하는 절차를 진행하는 것이라서 그런지 주민자치위원들의 자세가 그전과는 다른 모습들이다.
회의 내용이나 결정방법은 지난해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렇게 위원들이 긴장한 모습으로 진행하는 것은 사업 예산 중 일부가 주민들이 내는 세금 즉 주민세 일부를 재원으로 하는 때문이라 하니 그럴만하다. 주민이 내는 세금으로 사업 시행을 하는 만큼 편성은 물론 시행에 신중을 기해야 하니 아니 그렇겠는가.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러한 진행이 순수한 주민들 만에 의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주민자치회가 마을의제를 발굴하고 그것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주민 자율의 모양이지만 그 끝에 외부의 간섭이 보이기 때문이다.
내용을 보면, 위원이나 주민들이 마을에 필요한 사업 등 의제를 발굴하여 주민자치회에 제출하면 그 과제와 연관된 소회의인 분과회의에서 일차로 심의한 후 이를 임원회의 등의 재심의로 객관성을 확보한 후 본 회의인 주민자치총회서 의결을 거쳐 최종 안으로 하는데 이것으로 절차가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안을 행정 부서의 적격성 검토라는 과정을 거쳐야 최종안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일견 타당하고 합리적으로 보인다. 주민들이 여러 과정을 거쳐 결정한 안이지만 그것의 적격성을 시행 당국에서 살피는 모양이기 때문이다. 즉 주민이 결정한 안이라 하더라도 법령 저촉여부와 관이 수립해두었거나 시행 중인 사업과 중복이 되는지를 살피는 등 예산 운영 규정에 적합한가를 판단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과정이 순수하게 보이지 않는다. 우선 그 결정의 시기가 마땅치 않다. 주민자치라는 면에서 이해해 볼 때 이러한 시기의 문제는 사업의 선정과 예산 편성이 진정한 주민자치적인 진행이 아니라 보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준비한 의제가 행정 등에 문제가 있다면 주민자치회의 일련의 과정이 진행되기 전에 제기되어 그에 따른 조치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관의 관여는 주민 안이 상당한 진전이 있기 전에 있어야 하고 그것도 적부의 단정과 같은 경직적 운영을 하는 것은 주민자치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유의해야 하는 것은 주민들이 여러 과정을 거쳐 마련한 최종안을 두고 관이 적격성 여부를 따지는 것과 같은 개입은 그 장치 운영이 가지는 안정성보다 주민자치 의미 손상이 더 크다. 
다음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은 행정이 미련하였거나 시행 중인 사업과의 중복을 이유로 삼는 것이다. 이 역시 표면적으로는 수긍이 되지만 내용에 따라서는 다소 무리가 있거나 심지어는 그런 지적에 의구심조차 든다. 비록 당국의 정책에 준비되어 있거나 시행 중인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의 실효성 문제가 있기 때문에 주민 제안이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정책이 있지만 그것의 시행이 되고 있지 않거나 시행을 하지만 그 성과기대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주민 안이 나온 것이라 보는 것이다. 시행 중이거나 시행을 앞두고 있는 일을 알면서도 주민들이 안을 만들었겠는가? 모 동의 주민 제안에 부적격 판정을 한 사례를 보고 느낀 소회다. 
물론 현재에 제기되는 이런 문제는 주민자치를 시행하면서 만나는 행정의 흠결로 볼 수도 있고 그래서 이를 보정함으로 주민자치 의의에 부합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민과 관이 함께 주민자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하고 특히 관에서는 주민자치 의의를 바르게 이해를 하여 이 제도가 빨리 정착될 수 있도록 진정성을 가지고 지지를 해야 한다.
주민자치위원들도 주어진 임무를 바르게 이해를 하여 제도가 취지하는 바에 충실할 수 있도록 스스로 역량을 키워나가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유념해야 하는 것은, 현재의 주민자치 성과에 따라 이 제도가 가지는 본래의 취지 달성 시기를 앞당길 수 있고 결과적으로 이 땅의 진정한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될 수 있다. 
주민자치는 발전되고 그 담당 영역은 점차 확대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 나라가 ‘민주공화국’이고 그 ‘실질적 주인’이 국민임을 규정하는 헌법이 실효성을 갖는다. 그간의 우리 헌정사를 기억해야 한다.(♣2019.04.25.)

시흥3동에 거주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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