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자종합선물세트?  종합과자선물세트? 과자 선물 세트? 정확한 명칭이 뭐지? 고유 명사인가? 그럼, 띄어쓰기를 해? 말아?’  잠깐의 고민을 안겨주는 바로 그것.  검색 엔진을 가동 할까 하다 말았습니다.  이런 작은 유년의 추억까지 요즘 문명에 의지 하고 싶지 않은, 조금 지난 세대의 자존심이랄까요...아무튼 예전에 그런 게 있었지요.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생일 등등 특별한 날에나 받아 볼 수 있었습니다. 일단 크기로 시각적인 만족감을 주었던 커다란 과자상자 말입니다.

  부푼 기대감으로 포장을 뜯고 열어 보면 여러 가지 과자가 들어 있었어요.  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런 선물세트 같은 책을 소개해 드리려고 해요.  영국의 작가 엘리너 파전의 <작은 책방>입니다.  여러 동화를 모은 작품집인데요, 1955년 작가가 자신의 작품 가운데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들을 손수 골라서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다양한 이야기 중에는 옛이야기의 구조를 착실하게 따르는 것도 있고 실소를 야기하거나 교훈을 담은 우화도 있고 잔잔한 감동을 주는 것도 있습니다.  

상자 안에 선택 받지 못하고 계속 굴러다니는 과자가 있듯이 별다른 느낌이 없는 이야기도 물론 있을 겁니다. 저는 그 중에서  <달을 갖고 싶어 하는 공주님>을 들려드리고 싶군요. 달이 갖고 싶어 궁전 굴뚝에서 눈물을 흘리는 공주님 때문에 온 나라가 한바탕 소동을 겪는 이야기입니다.  

공주님이 안 보이자 유모는 임금님에게 달려가지요. 그리고 말합니다. 은그릇 닦는 사내가 공주를 데려 갔을 거라고. 어떤 직접적인 단서도 없이 추측 만으로요. 임금님은 범인을 잡기위해 대장을 부르고 공주를 찾기 위해 탐정들을 고용합니다.  그런데 일이 좀 이상하게 진행 되어 가네요.  대장은 군대 소집 전에 병사들에게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고 오라며 일주일간 휴가를 주고 자신은 서재에 틀어박혀 치밀한(?)작전을 구상합니다.  탐정들은 그 신분을 감추기 위해 무엇으로 변장할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지요.  그들은 서로 다르게 변장하려다가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기도 합니다.  

강도로 변장하고 싶어 하는 사람 셋, 곰 인형으로 변장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다섯이나 되었으니까요.  자, 드디어 탐정들이 그들의 본업, 공주님 찾기에 나서는군요.  음, 탐정들의 귀와 눈은 정말 예리한가 봅니다.  감옥에는 ‘수상쩍은 구석이 있다’고 의심받아 잡혀온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갑니다. 

 게다가 그들은 사월 첫날까지 자신이 죄가 없음을 스스로 밝히지 못하면 목이 달아날 처지입니다. 임금님은 이 모든 상황이 아주 만족스러웠어요.  대장과 탐정들은 유능해 보였고 용의자가 수천 명이니 4월 첫날이면 사건은 해결될게 분명하니까요.  한편,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온 병사들 사이에서는 뭔가 큰일이 일어 날거라는 소문이 돕니다.  이를테면 전쟁같은....그런데 다른 나라의 염탐꾼이 이 말을 엿듣게 됩니다.  

그리고 온 세상의 왕들은 병사들을 모아 놓고 사월 첫날 달을 갖고 싶어 하는 공주님의 나라로 쳐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렸답니다.  전쟁이 정말 일어났을까요?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공주님이 달을 갖게 되었을까요?  작가는 마치 할머니가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합니다. 

 하지만 어쩐지 그것이 먼 나라의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지만은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세상과 비슷한 모양새로 보이는 것은 저 혼자만의 생각일까요? 


                         2016.03-2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동화 읽는 어른모임

박지선  글

 뉴욕탈출

1981년작   SF  감독:  존 . 카펜터





B급의 명장!  B급의 명품.

1980년대 당시 한 사람의 감독이 B급 선언을 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가장 슬퍼햇던 사람들은 헐리웃의 메이저 사장들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헐리웃은 스필버그를 능가할 감독으로 두 사람을 꼽았었다고 하는데요,   한명은 제임스 카메룬 (에이리언, 타이타닉, 아바타) 이고 또 한명이 바로 존.카펜터감독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헐리웃의 대자본주의 체제(자본주들의 간섭)가 싫었던 카펜터는 B급 영화감독을 선언하고 이렇게 해서  그의 5번째 장편영화이자 당시까지 그의 영화가운데 최고의 제작비가 투여된 영화가 바로 이  ‘Escape from New york'입니다. 아름답고 예쁘장하게 미화된 것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다소 어색한 분위기 ’밴티지‘와 ’그로데스크’로 포장한 이 영화에서 그는 당시 자본주의의 상징이자 아메리칸 드림의 본체인 미국의 뉴욕을 핵무기와 온갖 비밀로 추잡하게 으스러진 음침하고 퇴패 범죄도시로 규정하고 자유의 여신상의 모가지를 쪼개서 땅에 떨어트렸습니다.

 닉슨 정부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겪은 후에 그가 느낀 감정을 S.F로 옮겼다는 이 영화는 전 미국의 범죄율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정부는 뉴욕의 맨해튼 섬 전체를 거대한 장벽으로 두르고 도시와 연결된 다리마다 폭탄들을 설치해서 누구도 맨해튼을 탈출할 수 없는 완전 고립된 거대한 교도소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범죄자들을 그곳에 내동댕이쳐놓고 자기들끼리 알아서 생존하도록 감시만 할 뿐이라는 설정인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핵 문제와 관련된 중요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 대통령이 타고 있던 에어포스원이 과격한 해방 전선 단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추락한 것인데, 하필이면 추락한 지점이 바로 맨해튼 섬 한복판중범죄자들만 모아서 가둔 특별교도소였습니다.    이 거대한 맨해튼 도시 교도소는 현재 듀크라는 대악당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는 대통령을 볼모로 잡고 전 수감자들을 풀어 줄 것을 요구하므로 정부는 이에 맞설 전설적인 용사이자 현재 연방은행 강도죄로 수감 중인 전설 애꾸눈 용사(람보보다 앞선) 스네이크 플리스킨 (커트 러셀)을 침투시켜 24시간 안에 대통령을 구하도록 명령을 내리기로 합니다. 하지만 스네이크 역시 무시무시한 대 범죄자이므로 만약 스네이크가 대통령을 구하지 못할 경우에는 자폭하도록 24시간 후에 폭발 하는 시한폭탄을 그의 목걸이에 같이 세트해버리는데요. 이런 설정은 이후 다른 영화들이 두고두고 써먹습니다.   아무튼 한정된 공간에서 주인공과 범죄자들이 힘을 합쳐 거대 외부세력 (정부)에 맞선다는 내용은 또 다시 (존 카펜터가 숭배하는) 하워드 혹스의 ‘리오 브라보’를 연상하게 하는데 ‘뉴욕 탈출’은 한마디로 B급 영화가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B급 영화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메인스트림이 다루길 꺼려하는 어둡고 칙칙한 배경, 열광할만한 안티-히어로, 캠피한분위기, 그리고 적절한 정치적 풍자까지. 영화에 캐스팅된 배우들도 매력이 철철 넘치는 개성 있는 조합인데, 찰스 브론슨이나, ‘타미 리 존스’를 캐스팅하길 원했던 제작사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존 카펜터는 처음부

터 스네이크 역할에 어울리는 배우는 오직 '커트 러셀' 뿐이라고 믿고 그를 캐스팅했는데, 지금까지도 [뉴욕 탈출]은 커트 러셀이 가장 사랑하는 자신의 출연작으로 손꼽는 작품이기도 합니다.(몇년전부터는  러셀이 아예 리메이크하겠다고 카펜터를 설득하고 있었고 결국 헐리웃의 유명 제작자 저엘실버가 3부작으로 리메이크한다고 최근에 발표했는데요, 

 그 외에도 맨해튼 교도소를 총괄하는 경찰 책임자로는 최고의 컬트 배우인 리 반 클리프가, 맨해튼에서 스네이크를 돕는 지인들 역할로 어네스트 보그 나인, 해리 딘 스탠튼, 그리고 존 카펜터의 당시 아내였던 에이드리언 바보우가, 대통령 역으로는 [할로윈]의 루미스 박사이자 존 카펜터의 페르소나인 도널드 프레즌스가, 그리고 악당 듀크 역할로는 [쉐프트] 의 영화 음악으로 흑인 문화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소울의 대가 아이작 헤이즈가 출연합니다. 존 카펜터가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역시 범죄자들의 주거지가 된 뉴욕을 표현하는 것이었는데, 특히나 영화 속 맨해튼은 절반쯤 폐허가 된 죽은 도시로 전기도 통하지 않는다는 설정이었습니다.  존 카펜터가 이렇게 맨해튼을 도시 속 정글로 묘사하고 싶었던 것은 ‘찰스 브론슨’이 주연한 ‘데스 위시’ 때문인데, 이 영화는 평범한 시민이 도시 범죄자들에 의해 아내와 딸이 강간, 살해당한 후 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 본인이 직접 나서서 범죄자들을 처단한다는 마초 영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잘 알려진 작품인데요, “테이큰, 아저씨” 등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찌됐든 폐허가 된 맨해튼을, 특히 열 블록 넘게 도시의 전기를 차단해야 한다는 영화 설정 상, 뉴욕에서의 촬영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존 카펜터는 프로덕션의 로케이션 담당자에게 특명을 내렸는데, 그것은 바로 영화 속 맨해튼을 묘사할 수 있는 미국 내 최악의 도시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발견된 곳이 바로 일리노이즈의 세인트 루이스였고, 그곳의 낙후된 환경 덕분에 존 카펜터는 무사히  ‘Escape from New york' 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놀라운 B급 영화의 전설은 총 제작비가 6백만 불 정도라고 하는데,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5천만 불 이상의 극장 수익을 올렸으니까 ‘Escape from New york' 의 묵시록적인 분위기는 영화뿐만 아니라 문화적인측면에서 여러 나라에 다양하게 후세에 직,간접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사이버펑크의 태동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뉴로맨서]로 사이버 펑크의 지평을 연 윌리암 깁슨이 바로 [뉴로맨서]에 영향을 준 작품으로 [뉴욕 탈출] 을 손꼽고 있는데요, 또 다른 사이버 펑크의 한 축인 [블레이드 러너]에 사용된 어둡고 컴컴한 도시 세트가 바로 [뉴욕 탈출]의

것을 재활용한 것이기도 하다면 두 작품 모두 사유화된 사회가 개인을 통제한다는 공통된 모티브를 가지게 되는데, 존 카펜터가 [뉴욕 탈출]을 쓴 계기가 닉슨 정부의 도청사건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참으로 재미있는 연관성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역시나  전설의 범죄자 애꾸눈 '스네이크'는 정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대통령을 무사히 구출해내지만. 그동안  주인공은 겉으로는 뉴욕의 죄수들과 싸워 대통령을 구출해내야하고  속으로는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목에 폭탄 목걸이를 장치해놓은 정부와 심리전도 벌려야합니다. 특히 뉴욕탈출의 마지막 장면은 그 옛날 30년 전에 만든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명장면입니다.  도널드 플레전스가 연기한 비열한 대통령이  겁에질려 소리를 지르면서 기관총을 쏘아대는 장면이나 폭탄목걸이를  푸르고 백악관 정문을 나서는 주인공 스네이크가  대통령이  발표할  '세계 제 3차 대전' 이 일어날만한 단서가 녹음 되어 있는 카세트 테이프를 쭈욱 뽑아버리며 “세계 3차 대전? 그런 건 개나 줘버려!” 하며 쓰레기 통에 던지는 장면은 정말 통쾌했습니다.  덕분에 대통령이 연설할 세계 제 3차 대전 어쩌구 하는 부분에서는 철지난 컨트리쏭이 확성기에서 흘러나와 대통령은 물론 그 자리에 모인 많은 와신기자들과 백악관 관계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영화에서처럼 권력이 사유화된 정부의 공무원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보다는 사유화된 권력의 이해에 충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2015년 7월 서울 구로 노인복지관을 방문할  당시 의전을 위하여 엘리베이터를 잡아두고서 노인들은 계단을 사용하게했다는 사진이 올라와 논란이 되었던 황교안 국무총리가  이번엔 또 다른 과잉의전 때문에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2016년 3월 21일 황총리는 세종시 공관으로 가기위해 KTX171 편을 탈 예정이었습니다.  황총리는 서울역에서 열차를 탈 예정이었는데 다른사람들과 같이 걸어서 온 것이 아니라 차를 타고 플랫폼까지 들어왔습니다. 서울역 플랫폼 일부 공간에는 차량이 진입할 수 있는데 이 공간으로 황총리를 태운 총리실 소속 공무차량 2대가 진입하여 황총리를 내려주고 되돌아갔습니다.  총리실에서는 경호차원에서 한 조치라고 해명했지만 이런 갑질이 어디있을까요? 이처럼 특정집단의 이익에만 철저히 사유화된 권력의 "도둑정치"는 한국 사회의 윤리와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와 시민들의 참여 시스템을 무너트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같은 서민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날이 다가옵니다. 4월 13일 대한민국 20대 국회의원 선거,, 차마 입에 담지못할 지저분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우리모두 선거에 참여하여 부패한 권력에게 따끔한 국민의 힘을 보여주었으면 좋겠숩니다. 

                               


영화감독 홍두완 

[기고]시민과 신민, 그리고 (노동자) 민중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을 시민(市民)이라 부른다. 봉건 왕조의 구성원은 신민(臣民)이다. 봉건 시대에서 근대로의 이행의 중요한 지표 중의 하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등장과 함께 신분제가 사라진 것이다. 신분제가 사라진 것, 그 표현이 신민에서 시민으로이다. 그래서 전근대(봉건제)에서 근대(민주제)로의 전환을 정치적으로는 “신민(臣民)에서 시민(市民)으로” 전환이라 한다. 물론 경제적으로는 농노(農奴)가 노동자가 된 것이다.  


신민과 시민의 차이는 통치와 정치, 복종과 권리라는 이름으로 대별된다. 신민은 통치의 대상, 즉 다스림의 대상이다. 그들은 사회의 주인도 아니고 주권도 없다. 봉건 왕조 시대의 백성이나 일제 강점기 식민지 노예가 바로 신민이다. 무능하고 무식하여 이끌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로 천시 당하다가 조금이라도 역사와 사회에 관심을 기울이면 역심을 품고 언제 주인의 목에 칼을 들이댈지 모르는 잠재적 범죄자로 감시와 관리를 해야 하는 대상이 신민(臣民)이다.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고 간섭하고 관리해야 정상이라고 믿는 정치행위가 통치다. 통치를 위한 반민주적 법이 있다. 일제의 치안유지법으로 시작된 희대의 악법 국가보안법과 이번에 만들어진 테러방지법 등이 통치법이다. 통치는 권력을 가진 자는 의무가 없고 백성들은 권리가 없는 정치다. 자기들은 치외법권으로 살며 아랫것들은 준법에 무관용원칙으로 적용하는 정치가 통치다. 모든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박근혜씨의 행동이 전형적인 통치다. 그 통치에 순종하는 것은 시민이 아니라 신민이다. 


반면에 시민은 사회와 관련한 교양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 즉 자신이 나라의 주권자임을 자각하고, 인권을 중시하고, 인권을 보장 받고, 인간 존엄을 실현하려는 사람을 말한다. 시민은 사회계약의 주체로 무엇에 구속되지 않은 원래의 사람이다. 국민을 주권자로 봉사하는 국가 체제가 민주공화국이다. 국민을 통치의 대상으로 보고 법과 질서를 앞세워 특권과 부정을 감추고 국민들에게만 엄격한 나라를, 독재 국가라 한다. 담배 값은 올리고 법인세는 내리는 등, 소수의 부자를 위해 다수의 국민을 쥐어짜는 체제처럼 다수를 소수의 이해에 종속시켜 다스리는 정치가 통치다. 통치 국가가 즉 독재 국가다. 


그래서 시민과 신민의 근본적인 차이는 복종하는 존재냐 저항하는 존재냐의 차이다. 신민에서 시민으로 전환을 선언한 최초의 문건이 미국의 독립선언서인데 거기서 인간의 기본 권리를 “생명(생존), 자유(주), 행복 추구권”을 가진 존재로 선언한다. 우리가 말하는 인권(人權)의 구체적 요약이다. 이어 미국의 독립선언에서는 만약 이런 기본권리를 부정하는 정권은 타도되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국민의 저항권, 집회 및 시위가 헌법의 기초권리가 되는 이유다.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가 전체 인권의 기준이자 민주화 운동이 되는 이유다.   


이제 한 달도 안 되어 우리는 또다시 대한민국에서 시민인지 신민인지를 결정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선거다. 시민은 이의를 제기하고 불의에 맞선다. 돈과 권력의 부당한 힘에 복종하고 그들의 전횡을 묵인 순종하는 것은 신민의 특성이다. 선거를 보는 것에도 시민과 신민은 뚜렷이 다르다. 시민은 평가하고 단죄하고 그리고 선택한다. 신민은 묻지마 투표를 한다.  


대통령이 한정 없이 관권 부정선거를 하고 있다. 공권력의 선거에서 중립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 자체가 엄청난 부정 편파선거가 되는데 지난 대선에서 우리는 국정원의 부정 관권선거를 제대로 응징하지 못했다. 그 결과 도둑이 매를 드는 적반하장의 참사를 경험하고 있다. 노동자들과 노동자들의 기본권리는 기득권이 되어 뭇매를 막고 감시와 통제의 눈길은 테러방지법이라는 희대의 악법으로 합법화되고 있다. 얼마나 오만하고 불손한지 대통령에 대한 충성도로 즉 시민의 모습이 아니라 신민의 모습으로 애국심을 재는 시대가 되었다. 애국의 타락(墮落)이다. 공주를 걱정하는 거지들이 입에 침을 물고 세월호 유가족을 몰아치는 천인공노의 범죄가 국가의 보호아래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일본 놈보다 더 설치는 친일파들의 모습이 바로 저런 모습이다. 


시민으로 선거는 우선 낡은 것과 부정한 것과 잘못에 대한 엄정한 평가와 심판이 전제된다. 노동자 민중을 탄압하고, 부익부 빈익빈을 조장하며, 민주와 인권을 부정하는, 친일 사대 매국 분단 전쟁세력에 대한 응징으로 이번 총선을 치르는 것이 시민으로서의 의무이자 권리다. 나아가 시민적 정치를 넘어 노동자 민중이 직접, 정치의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꿔야한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 유명한 사람이 국민을 대신하는 것은, 절대다수이자 이 사회의 주인인 대중들의 처지와 조건을 왜곡하고 이해와 요구를 뒤튼다. 선거 때만 주인이고 다른 때는 머슴인 세상이 된다. 그래서 선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선거는 벌써 불법화 됐을 것이라는 말은 슬픈 진실이다. 


노동자 민중이 행복하기 위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우리 노동자 민중이 직접, 정치의 주체 주인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주체를 요구하는데 지본주의를 극복할 새로운 주체는 오직 일하는 사람들만이 가능하다. 아니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한다. 지금은 비록 시민으로 살지만 내일은 노동자 민중의 이름으로 세상을 접수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지난 시기 민생을 파탄 낸 세력에 대한 심판의 기능을 살리는 선거를 치러야 한다. 누가 우리 노동자 서민들의 벗인가? 신민의 눈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 확연한 선택을 하자. 이번 총선이 신민에서 시민으로 거듭나는 계기로 삼자. 오염되는 역사, 퇴행하는 민주주의, 가중되는 전쟁과 분단의 광기를 막아내는, 우중(愚衆)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民衆)이 되어 집권여당 대표도, 전 원내대표도 독재라고 하는 지금 세상을 바꾸자.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노스트라다무스

1994년 프랑스 감독: 로저 크리스티안  장르:  드라마



이번 영화는 세계의 종말을 예언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 의 생애를 그린 영화‘노스트라다무스’ 입니다. 1503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미셸 노스트라다무스는 철학, 문학, 역사, 의학에 정통했고 연금술, 점성술을 배우며 불어로 된 4행시 12 예언시집들을 출간했습니다.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아래 이루어진 당시의 중세시대에 그는 과학과 실험정신을 굳게 믿으며 진정한 진리를 찾고자 힘썼던 진보적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페스트가 전 유럽을 휩쓸던 그때 따뜻한 마음으로 환자를 대하며 ‘신 앞에서 만인은 평등합니다.’ 를 외치며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성직자의 병까지 치료해주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어쩌면 그가 인류를 위하는 예언능력을 갖게 된 것도 온갖 어려움에 맞서 진정한 진리를 추구하는 인도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때는 페스트가 전 유럽을 초토화시킨 16세기 초의 중세 말, 거대한 재앙으로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을 멈추게 하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조금씩 신앙에 의혹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런 사회정치의 분열속에서 교회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 화형에 처하면서 그들의 마음에 공포심을 조장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시키는 이른바 ‘마녀사냥’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노스트라다무스 (체키카료) 는 자신을 키워준 유모가 마녀로 몰리면서 길거리에서 화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처음으로 기독교 윤리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진지한 의구심을 갖게됩니다.

       

그리고 12년 후, 노스트라다무스는 ‘몽벨리에’ 대학에서 의학을 배우지만 교수들이 언제나 고대 문헌에만 집착했고, 환자 개개인의 상태를 들여다보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교수가 강단에 서서 문헌을 읽으면, 학생들은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적는 중세의 수업방식에도 의혹을 품었는데 문헌을 그대로 줄줄 읊는 교수들도 문제지만 학생들이 그것을 아무 비판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진보적인 ‘노스트라다무스’ 에게는 개개인의 독창적인 실험정신이 결여된 ‘몽벨리에’ 대학의 수업방식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 같아서 이런 교육현실이 안타까왔습니다.

   

그러던 도중에 한 교수가 갑자기 쓰러지는데, 노스트라다무스가 상태를 보니 흑사병이었습니다. 흑사병은 중세 유럽 사회를 붕괴시킨 커다란 원인 중 하나일 만큼 당시에는 큰 재앙이었고 그래서 길거리에는 사람들의 시체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의사이기도했던 노스트라다무스는 사람들에게 위생을 강조함과 동시에 장미꽃잎으로 제조한 자신의 환약을 주려고 했지만, 성직자들과 교회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지하지 않고 의학에 의지하는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며 "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에 어찌 자네가 손을 대는가? " 라고 반문합니다. 


이 때 노스트라다무스를 이단으로 몰던 성직자가 페스트에 감염되고 노스트라다무스는 그를 치료하던 중, 우선 감염을 막기 위해 먼저 그의 옷을 태워버려야 한다고 말하자 감히 신성한 성직자의 옷을 태운다는 그의 생각은 기존의 기독교인들은의 거센 반발에 부딪힙니다. 게다가 페스트에 감염된 성직자는 "십자가에 입을 맞춰 보시오. 당신은 악마요. 그러니 당신의 입술은 타버릴 거야. 만약 당신의 입술이 타지 않는다면 나를 치료해도 좋소! "  라고 말하고 노스트라다무스는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그를 치료해줍니다.

상황은 악화되어 한시라도 빨리 치료를 해야 하는 시점에서 성직자는 노스트라다무스도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루터파인데 당신은 어떤파요?’ 그러자 노스트라다무스는 ‘ 저는 카톨릭입니다.’ 라고 답합니다. 중세 말, 조금씩 분열의 조짐을 보이던 교회가 ‘루터파’와 ‘칼뱅파’ 로 나뉘었던 시점입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대학을 졸업한 후, 당시의 저명한 과학자였던 ‘스캘린저’ 박사 밑에서 공부를 하게 되는데 어느 날, 스캘린저 박사는 노스트라다무스에게 자신의 저택 지하를 보여주고 거기에는 당시 입에만 올려도 이단으로 몰려 처형당할만한 금기 서적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물론, 현재는 위대한 자연과학계의 서적들로 여겨지는 것들이었지만 아무튼 스캘린저 박사의 조수였던 ‘메리’ (어섬터 세너 분) 와 결혼한 노스트라다무스는 혼인 후 메리에게 지하실을 보여주게 되고 메리는 과학서적에 푹 빠져 결국 스캘린저 박사와 노스트라다무스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게 됩니다.

       

중세의 유럽은 거의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했고, 때문에 신앙과 이성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과학이라는 학문은 객관적이고 올바르게 논의될 수가 없었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과학은 이단, 금기시되었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노스트라다무스의 과학과 실험정신은 언제나 억압받았고, 교회가 ‘아니다’ 고 할때는 어떤 과학도 입에 담을 수 없었습니다. 흑사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치료할 때도 기독교 때문에 반대에 부딪혔고 이런 속에서 노스트라다무스는 점점 불안한 미래를 예측하게 되는데 당시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앙리 2세의 죽음과 여러 왕족들의 죽음을 미리 예측해서 맞추자 사람들은 그에게 예언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두려워서 ‘사탄’ 이라며 없애버리려고합니다. 하지만 야심많은 캐서린 왕비는 그를 구하고, 그녀의 후원아래 자연과학과 의학 연구를 계속해서 1000여편의 예언시를 수록한 ‘예언시집’ 12권을 출간하게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그는 ‘나는 인류의 미래를 보았다’고 말하는데요, 그의 예언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예언보다 더 궁금한 것은 노스트라다무스가 과연 ‘인간 이성의 역사’ 에 있어서 암흑기나 다름없던 중세에 태어나 죽음 앞까지 몰고 가는 위기 앞에서도 도대체 무엇을 지키려고 그토록 피를 토하며 움켜쥐었던 것일까요?  

페스트로 도시가 사라질 만큼 매일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고 그러자 기독교 지도부에서는 이 불안을 극복하고자 마녀사냥을 통한 공포정치를 시작하는데 공포정치는 지도자의 불안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나라도 수순이 기가막힌 것이 황교안 국무총리가 어느 날 느닷없이  애국을 말하더니 박근혜 대통령은 일언지하에 개성공단을 갑자기 중지한다고 발표합니다. 얼마나 큰 피해가 생기는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 피해보다도 더 중대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는 사드를 배치 해야한다고 날뛰기 시작합니다.  오히려 미국은 북한의 핵만 포기시킬 수 있다면 한반도의 사드배치는 백지화 할 수도 있다고 발표해서 우리 정부를 멀쓱하게 만듭니다. 


아무튼 정부는 총선을 앞두고 국가위기 상황이라며 국가가 테러위협에 처할지도 모르니 테러방지법이 필요하다면서 대통령은 국회의장에게 직권상정을 합니다. 결국은 공포분위기를 조장해서 테러방지법이라는 명목으로 국정원에 더 강력한 힘을 실어주기 위한 일련의 수순같은데  국정원이 어디입니까?

서울시 공무원이던 유씨를 간첩으로 몰아세우기 위해 그의 여동생까지 협박했던 곳입니다.

이 사람이 간첩으로 적발이 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무죄가 선고되었고, 이때 검찰이 증거로 제출한 유씨의 중국과 북한 사이의 입출경 기록은 국정원이 조작한 서류라고 중국정부가 밝혔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는 선거에 개입했다고 의심받던 국정원 해킹팀 직원이 자살하는 소동까지 일어났었습니다. 이런 곳에 더 힘을 실어준다면 이들이 할 일이 무엇일까요? 

테러방지법의 주요 내용은 국정원장이 국정원 소속의 테러통합대응센터를 운영하며 정부 소속 테러대책상임위원장까지 맡게 됨에 따라 대테러 활동을 총괄하는 사실상 국정원이 대테러 활동을 모두 가져가게 되는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대목입니다. 세월호 사건 이전이 국정원 최대의 위기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런 점에서 세월호 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국정원 일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경제자문회의에서 희생, 불안,위기 세단어를 힘주어말햇다고합니다. 불안과 공포는 박근혜 대통령을 설명하는 키워드입니다. 그런데 공포정치는 사람들의 불안의식을 정치적 자원으로 삼아 사람들의 순응을 유도하므로써 목적을 실현하고자하는 정치를 뜻 한다고 합니다.  바로 중세시대의 암흑기처럼 말이지요, 


영화감독 홍두완 



<햇살도서관>  김혜연 글 / 최현묵 그림 / 비룡소


 2013년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15기 신입회원(2016년 현재는 18기 모집 중)들과 함께 ‘한책보기’로 처음 만난 동화책으로 10년이 넘게 도서관 활동을 하던 나를 돌아보게 했던 햇살 책을 2016년 싹이 움트느라 지지게 펴는 봄날에 금천작은도서관협의회 회원들과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며 우리 작은도서관들의 상황과 위치, 그리고 그 속의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해준 ‘햇살도서관’은 우리에게 방향성을 다지게 한다. 

  평생 혼자 살던 김밥할머니는 교사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꿈을 어려운 형편의 진숙씨 담임선생님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며 이룬다. 그 인연은 담임선생님을 통해 사서가 되고 싶었던 진숙씨 꿈으로 이어진다. 김밥할머니의 나눔이 어린소녀들의 실질적 꿈을 이뤄주고 ‘이금례도서관’ 햇살도서관까지 연결되면서 따뜻한 햇살은 번지어 나간다. 

  코끼리 사서 진숙씨는 도서관 이용자들을 살피고 무엇을 도울지 찾아 슬쩍슬쩍 책 한 권씩을 건넨다. 책을 잘 알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고. 사서가 할 수 있는 참 멋진 역할이기도 하다.  

진숙씨가 조용히 전한 책 ‘마틸다’는 외톨이 여섯 살 진주에게 용기가 되고. ‘박지성, 멈추지 않는 도전’은 키가 작아 걱정인 정호에게 축구선수가 되고 싶은 꿈을 다시 꾸게 하고. 식구들이 몽땅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넉넉하지 못한 고독한 수정이에게 ‘몽실언니’는 가난보다 외로움이 더 무섭다는 것과 자신의 존재감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고. ‘빨간머리 앤’은 말더듬이 진주엄마 명혜씨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치유하게 한다. 

 또한 도서관에서 만난 ‘프레드릭’을 읽어주는 아줌마, 거기에 따듯하게 이끌리는 진주는 햇살을 모아 친구를 만나려는 희망과 용기를 갖는다. 말을 더듬는 엄마에게 이 책을 읽어주고 또 엄마가 읽어주게도 한다. (엄마가 말을 더듬지 않는다. 말더듬이 엄마 명혜씨는 수다쟁이를 꿈꾼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도서관을 매개로 꿈을 갖게 되거나 꿈을 이루게 된다. 도서관은 아이와 어른 모두를 꿈꾸게 한다.

골목에서 늘 마주쳐도 인사조차 없이 살아갔을지도 모를 사람들이 도서관을 매개로 관계를 맺어가는 이야기 과정은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읽거나 책을 빌리는 곳이 아니라 사람과 책이 만나는 곳,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 사람과 세상이 만나는 곳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햇살도서관’은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금천의 도서관은 햇살 번지는 도서관이고 그 곳 도서관에 코끼리 아줌마 진숙씨가 있다.^^


                 2016.03-2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동화 읽는 어른모임

시미선  글

역(逆) ‘깨진 유리창’론 - 왕따는 범죄다



왕따는 집단 괴롭힘을 일컫는 은어다. 장난으로 던진 돌에 맞아죽는 개구리를 만드는 행위로 심하면 한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악질 범죄다. 그잖아도 소극적이고 자신감과 붙임성 없는 이가 왕따의 대상이 되고, 왕따이기에 고립에 고립을 부른다. 이상하다 느껴져 왕따가 된다지만 대부분은 왕따가 이상한 사람을 만든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재수 없다며 희생양이 된다. 이유가 있어도 살펴보면 왕따가 된 후 왕따가 될 만한 이유가 만들어진다. 일진회가 있다. 학교 내 폭력 집단이다. 처음에는 그저 불량학생들의 주먹질 순서였지만 언제부턴가 부유한 이들의 자식들이 돈이 만든 권력아래 일탈과 유행을 주도하다 왕따의 주체가 된 무리다. 한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지만 수만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는 더러운 격언이 현실로 존재하는데 힘으로 쭉수로 약자를 괴롭히는 왕따체제 그것이 바로 제국주의 국제질서다.


그리고 ‘깨진 유리창 이론’이 있다. 미국의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처음 소개한 개념이라고 한다. 내용은 누군가 돌을 던져 상점의 유리가 깨져 있다. 그런데 1주일째 깨진 유리창이 그대로 방치돼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물 주인이나 관리인이 건물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깨진 유리창 앞에 쓰레기가 쌓이기 시작한다.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해 두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하면 큰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제로 톨러런스(zero tolerance) 또는 무관용 원칙(無寬容 原則)을 내세운다. 사회적 구조가 빚어내고 있는 빈곤과 차별과 그로인한 고통을 개인적 책임으로 돌리고 법을 들이댄다. 공권력이 폭력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사소한 규칙 위반으로 헌법적 권리를 부정하는 한국 경찰의 현재 모습이 그 전형이다. 일진무리가 사람을 왕따시킬 때 그들은 대부분 한 사람에게 돌을 던져 유리를 깨고 그로인한 혼란을 이유로 또다시 왕따시키는 이유로 삼는다. 완력과 돈과 무리를 이룬 이들이 한 개인을 바로로 만들고 왕따를 시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그런 증오와 분노의 적으로 찍혀 고생하는 곳은 많다. 대표적으로는 이른바 IS다. 그 못지않게 고립과 왕따와 비웃음과 압박을 당하는 곳이 북한이다. 남한에서 보는 북한은 흉악, 불쌍, 경멸의 대상이다. 가난하고 또 몽매하며 무식한 존재다. 그런데 그 작고 약하고 이상하고 불쌍한 나라에 대해 전 세계 돈과 무력의 태반을 쥐고 있는 미국이, 북한보다 수십배 잘 산다는 남한이, 유럽이 유엔을 통해 고립 왕따를 시킨다. 자기들이 해 대는 핵시험, 미사일 개발, 위공위성 발사는 문제가 없는데 북한이 그것을 하면 어마무시한 문제가 된다. 자기들의 해 대는 매년 엄청난 군사훈련을 아무것도 아닌데 북한의 움직임은 갑자기 괴물들의 난동이 된다. 이 공평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는 이른바 국제질서라는 것을 축소하면 바로 일진이 소심하고 약한 아이를 왕따 시키는 논리 그대로다. 문제의 책임을 왕따를 하는 가해자가 아니라 당하는 피해자에게 돌리는 것과 터럭만큼도 차이나지 않는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창문을 깨고 창문을 주인이 수리를 하면 두 개 세 개 더 깨며, 수리를 하는 행위를 방해 협박하고 거기에 쓰레기를 투기하고 나서, 세상을 더럽히는 책임을 창문 주인에게 묻는 이 거대한 억지가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되고 있다. 세계 언론은 인자한 얼굴의 히틀러인 미 제국주의의 괴벨스가 되어 경멸과 증오를 배설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내거는 불관용의 원칙, 그것이 바로 도둑이 매를 드는 적반하장의 현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역 깨진 유리창론’이다.  


남한 사회는 명백하게 퇴행 중이다. 민주주의는 곰팡이가 슬었으며 법과 제도는 독재의 흉기가 되고 있다. 박정희의 적자가 여당이 되고 있고 전두환의 시종이 야당이 되고 있다. 진보 세력과 그들의 사상은 소시민적 겁쟁이의 늪에 빠져 있다. 남한의 퇴행을 아무런 역사적 구조적 맥락 없이 북한에 비교하며 비웃는 소위 진보지식인들의 말과 글이 그 증거다. 왕따에 겁먹어 왕따에 굴종하는 무수한 이진 삼진들이 야당이 진보정당을 자처하고 있다. 작금의 한국의 슬픈 현실이자 반지성주의의 본질이다. 


기업이 직원을 쫓아내기 위해서 매 처음 하는 것이 왕따다. 그 왕따를 쉽게 하겠다는 것이 이른바 박근혜의 노동개악 중 쉬운 해고다. 수직적 위계질서 속에서 힘을 가진 이가 아랫사람을 바보 왕따를 만드는 것은 정말로 쉽다. 그리고 희생물을 만들고 끝내 제거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래서 학교 안에서든 직장 안에서든 왕따는 범죄다. 인간의 존엄을 부정하는 가장 반인간적 범죄다. 스스로 짐승에 불과한 존재라는 고백이다. 자기 자식의 왕따는 분노하면서 제국주의 큰 힘들의 범죄는 외교적 현실이라 침묵하면서 약소국에 대해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에 함께 열광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비겁하고 비열하고 잔인하고 또 더러운 짓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쉬운 북한에 대한 비유와 매도와 멸시의 근간은 실은 분단 반공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보여 주는 가장 천박한 행위다. 회사의 편에 서서 해고자를 두 번 죽이는 행위와 같다.


해고자는 직장에서 왕따다. 지금의 북한의 실정과 왕따를 당하는 학생, 해고를 당한 노동자의 처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왕따에 맞서 항복하지 않고 주눅 들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이들은 결코 정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무수한 해고자들의 투쟁이 그것을 증명해왔다. 비록 아직도 가끔 이기고 많이 지지만. 현실에서 더 큰 문제는 왕따 놀음의 광기에 취한 사이에 평화와 통일과 민주와 인권이 퇴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전반핵의 평화는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다. 6.15 10.4로 이어진 평화의 길은 문제를 호미로 막자는 것이었다. 지금은 어느새 가래로도 막지 못한 꼴이다. 우리만 더 힘들고 아프고 괴로운, 사대 예속 전쟁의 길만 커지고 있다. 우리가 북을 왕따 시키는 사이에 말이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no. 118

개성공단


2월 7일 북한의 우주로켓 발사 이후 모든 정세가 변했다. 사드배치 실무협의 발표(7일), 개성공단 전면중단(10일), “미국 전략자산의 6개 핵심전력인 B-52 전략폭격기, B-2 스텔스 폭격기, 핵추진 잠수함, 핵추진 항공모함, F-22 스텔스 전투기, 해상사전배치선단(MPSS)의 지속적 투입”, “북한붕괴, 흡수통일” 공개 발언(16일), 중국 관영언론(환구시보)의 “한국과 미국이 38선을 넘어 북침하면 중국도 관여할 것”이라는 논평 등 한국전쟁 당사자들 간 전쟁의 냄새가 담긴 말과 행동이 충돌하고 있다. 나치의 괴뵐스가 울고 갈 수준의 한국 언론들은 일제히 모든 책임을 북에 돌린다. 북한의 수소폭탄과 우주 로켓이 국제질서를 어지러뜨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유심히 과정을 살펴보면 한반도의 전쟁 먹구름의 진원지는 북한의 우주로켓발사가 아니다. 진정한 위기의 시작은 박근혜정부의 개성공단 폐쇄였다. 


2월 7일 대통령이 주재한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도 개성공단 전면 중단은 결정하지 못했다. 같은 날 한민구국방장관은 국회 국방위 긴급현안 보고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개성공단 폐쇄 문제를 들은 바 없다”고 확인했다. 개성공단은 지난 10년 동안 남측이 열 배가 넘는 이익을 남긴 장사다. 유엔안보리대북제재위원회가 단 한 번도 개성공단을 제재대상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 게다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남과 북의 하나가 될 수 있는 시공간이요, 최후의 소통의 공간이 개성공단이다. 그런데 개성공단이 실제로 폐쇄된 것은 북의 수소탄이나 우주선 발사가 아니라 박근혜와 오바마 아제 3자간의 긴급 통화를 한 후라고 언론은 전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9일에는 오바마 미 대통령, 아베 일 총리와 연이어 통화했다. 그런 뒤 나온 게 개성공단 중단 결정이었다.”(중앙일보 2월 11일) 북의 ‘우주로켓 발사 때문에’ 개성공단이 전면 중단된 게 아니라 ‘북의 우주로켓 발사 이후 있었던 미일 정상과의 통화 때문에’ 개성공단은 전면 중단된 거로 보인다. 그렇다면 개성공단의 중단은 북이 원인이 아니라 미국의 어떤 이익을 위해 설정된 조치다.


개성공단의 중단과 더불어 박근혜정권이 동시적으로 추진한 것은 사드의 남한 배치다. 이 과정을 통일 전문가들은 '위험천만한 선전포고'라고 한다. 반면에 미국은 어떤 이익을 보았을까? 미국은 사드배치를 통해 경영난에 빠진 로키드마틴 등 군수기업의 숨통을 틔운다. 경제적 실익이다. 사드 배치를 통해 중국의 전략적 균형의 체계를 감시하고 방해할 수 있다. 군사 전략상 대 중국 전선에 최대 쾌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북과 거래하는 제3국의 개인과 기업 등을 미국이 직접 제재하는 세컨더리보이콧을 포함한, 유례없이 강력한 독자제재 법안을 유례없는 속도로 통과시켰다는데 그 결정적인 장애물이 개성공단이었다. 그래서 분단 전쟁이 아니라 평화 통일을 추진한 전 정부들이 개성공단을 남북 공유로 만들고 민족내부거래로 본 것이다. 미국의 일방의 결정이 자칫 한반도 평화는커녕 동북아의 안정을 파괴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다. 개성공단은 남북의 숨통을 넘어 동북아 평화의 거대한 안전핀이 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개성공단을 눈엣가시로 봐왔고 차제에 가시를 빼버린 꼴이다. 


그래서 북한은 이 번 조치를 "이번의 도발적 조치는 북남관계의 마지막 명줄을 끊어놓는 파탄 선언이고 력사적인 6.15북남공동선언에 대한 전면 부정이며 조선반도 정세를 대결과 전쟁의 최극단으로 몰아가는 위험천만한 선전포고이다." 라고 한다. 

"요컨대 박근혜 정부는 "끝장 결의"를 추진한다는 구실 아래 아무런 실익도 없이 너무나 중요한 우리의 자산을 "끝장"내 버렸다. 개성공단 전면 중단을 통해 남북공영의 현실적 실험장을 "끝장"내버렸고, 오직 3면 바다만으로 오늘을 이룬 한국 경제가 새로운 도약을 위해 기회의 창으로 삼은 남북경제공동체와 '북방경제'의 꿈을 "끝장"냈으며, 개성공단 덕분에 지난 10여 년 간 일체의 교전이 멈춘 서부전선의 군사적 안정을 "끝장"냈다.(한겨레 이종석 칼럼)


작금의 동북아 평화의 파괴는 북한의 탓이 아니다. 크게 보면 미국과 중국의 고래싸움에 남북한 새우등이 터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결국 안전의 파괴의 진원은 개성공단의 중단과 함께 밀려온 한반도 사드배치 결정에 있다. 알려지기로 사드의 중요부품인 엑스밴드 레이더는 그 탐지범위가 2천 킬로미터라고 한다. 이 탐지 영역 안에는 한반도는 물론 중국이 미국, 일본과 전략적 군사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축적한 각종 미사일들이 고스란히 놓여있다. “그러니 중국의 미사일의 배치와 운영은 물론 시험 발사되는 미사일의 궤적 등을 미국은 빠짐없이 차곡차곡 기록, 분석하게 된다. 그 모든 작전의 궁극 목표는 중국 미사일에 대한 실질적 요격능력이다. 미국이 그런 능력을 착실히 쌓아 나가는 자체가 동북아 전략적 균형의 붕괴이며, 그런 능력의 발전은 중국의 국가적 재난이다.” (통일뉴스)


반면에 미국은 2014년 크림반도 사태를 통해 우크라이나라는 쐐기로 러시아와 유럽을 화해가 아니라 긴장으로 내몰았다. 유라시아 경제권의 발달은 미국 지배의 약화이자 소외로 보는 미국은 대 중국 포위를 통해 전략적 방해를 하고 있고, 사드배치를 통한 소동은 결국 박근혜 정권이 동아시아의 우크라이나를 자처한 꼴이다. 동아시아에서 유라시아 대륙의 교류 및 통합을 가로막겠다는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굴복한 것이다. 이것이 개성공단과 사드배치 사태의 본질이다. 북이 남은 미국의 식미지란 조롱이 터져 나온 이유다. 결국 개성공단의 전면중단은 평화와 통일을 향한 국제적 균형을 깨고, 경제발전의 길을 스스로 폐쇄한 짓이다. 평화 통일이 멸공 북진통일로의 퇴행된 것이다. 전쟁과 분단에서 이익을 찾는 세력이 집권한 결과다. 하지만 평화보다 중요한 안보란 없다. 그러니 개성공단의 슬픈 운명이 지금 우리들의 운명이다. 우리가 평화와 통일의 이성을 찾지 못한다면 말이다. (한국 몰래 북과 평화협정 협상을 미국에 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미국 놈 믿지 말라는 말이 생각난다. 남한의 종미주의가 너무 심하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정든 금천구를 떠나며


독산누리사회적협동조합 워크숍(2016.1.12.~1.13) . 앞 줄 맨 오른쪽이 홍태숙 교사


독산고교 홍태숙 선생님이 6년의 근무를 마치고 올해 다른 지역으로 전근을 가게 됐기에 인사를 담은 기고글을 부탁했다. 흥쾌히 부탁을 받아주신 홍태숙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편집자-

 사실 독산고등학교에 근무하기 전까지는 금천구가 굉장히 낯선 동네였습니다. 낯선 만큼 제가 가르칠 아이들이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가늠도 안 되는 상태에서 독산고로 발령을 받았죠. 독산고를 1지망으로 신청했지만 어떤 아이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지 2월 동안은 기대보다는 걱정이 컸습니다. 

그런데 3월 첫날 복도에서 만나는 모든 선생님들한테 웃는 얼굴로 스스럼없이 인사하는 아이들을 보며 독산고 아이들에 대한 경계심이나 걱정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행복한 마음으로 시작했던 독산고에서의 6년 생활을 마치고 이제는 떠나야 합니다. 떠나기 전에 이 자리를 빌어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 보고 싶습니다. 

 교사로서 아이들을 잘 알고 많이 이해하는 선생이라고 나름 자부하고 있었는데, 독산고 아이들을 만나며 세상을 제대로 볼 줄 안다고 여겼던 자만심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고 아이들로부터 더 많이 배우고 아이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더 가까이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더 가까이에서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아이들로부터 배우며 좀 더 겸손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첫해 담임을 맡았던 저희 반에는 어려운 아이들이 참 많았습니다. 37명 중에서 교육비지원을 비롯해 각종 장학금, 급식비 지원을 받았던 아이가 19명이나 되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그해 저희 반은 전교에서 가장 수업 분위기가 좋은 반으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그때 저희 반에서 본 독산고 아이들의 숨겨진 장점은 6년 내내 일관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독산고 아이들은 머리를 염색하거나 담배를 피우고 때로는 침을 뱉기도 하는 등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모범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며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독산고 아이들과 부대껴 보면 우리의 편견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6년 내내 가까이에서 지켜본 독산고 아이들은 예의가 바르고 인성이 착한 아이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선생님을        진심으로 선생님으로 받아들이는 점을 으뜸으로 내세우고 싶어요. 이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교사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낯설었던 이 곳에서 6년 동안 근무하면서 애정이 많이 생겨 정말 떠나기가 싫습니다. 이런 제 마음의 밑바닥에는 6년 동안 가르쳤던 독산고 아이들과 학교협동조합을 함께 했던 학부모님, 그리고 금교넷을 통해 교류했던 금천구 지역주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 밖을 벗어나 좀 더 일찍 금천구 지역 속으로 들어가 교류했더라면 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항상 따뜻한 시선과 마음을 주신 금천구가 참 좋습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교직생활을 마치기 전에 꼭 다시 한 번 금천구로 돌아오고 싶습니다. 그때쯤이면 금천구가 더 살기 좋은 동네로 변해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벌써부터 행복한 마음이 드네요.


독산고등학교 교사

 홍 태 숙


몬스터 (2003)

감독: 페키 젠킨스


 " 옛날 옛날에 아주 어여쁜 공주가 살고있었답니다. 공주는 그녀의 미모를 질투하는 왕비의 미움을 받아 독사과를 먹고 깊은 잠이 들었는데 어느날 숲속을 지나던 백마 탄 왕자님의 키스을 받고 잠에서 깨어....... "

이 영화는 실화이며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 이야기입니다. 좌절에 빠진 한 창녀와 그녀에게 다가온 레즈비언 소녀의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인 동성애, 그리고 무차별적인 살인 이야기, 델마와 루이스’ 같은 화려한 결말이나, 의중을 벗어난 반전을 기대하는 관객이라면 

'뭐 이래? 할 수 있는, 한 여자가 자신의 불운한 운명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비참하게 죽었다는 아주아주 상투적인 건조하고 뻔한 내용,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묘미는 바로 이런 무미건조함 속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감독은 왜 하필이면 세기의 미녀인 ‘샤를로즈 테론’ 을 세기의 추녀로 만들었을까요?

 어쩌면 감독은 그런 지루함속에서 처음부터 그런 여자들의 뻔~한 인생이 숙명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닐는지? 뭔가 색다른 반전과 화려한 이야기를 기대하는 영화형식에 길들여진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감독의 낯선 문법때문인데요, 하지만 무엇보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바로 ‘샤를리즈 테론’의 캐스팅입니다. 연기를 잘하는 못 생긴 배우라면 얼마든지 있을 텐데 감독은 왜 하필이면 모든 남자들의 선망의 대상인 세기의 요정, 샤를로즈 테론을 20kg 더 살찌게 하고, 20살은 더 늙은 분장을 시키며, 20배는 더 추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런 질문을 해 봅니다. 과연 여자의 미모는 누구를 위해 필요한 것 일까요?

자 자신을 위해서?  아니면 남자들을 위해서? 젠키스 라는 여성 감독의 눈에 비친 남자들  이란 가부장적 사고로  예쁜 여배우만 나오면 그저 어쩔 줄 모르는 발정난 수캐들이고,   여자들이란 그런 남성 이데올로기의 혜택에 빌붙어 스스로 노예의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백설공주와 신데델라의 후예들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그런 세상, 혹은 그런 미국사회의 남성이라는 상징에 총알을 박아 넣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영화 속 ‘린’ (샤를로즈 테론) 은 남자들을 하나씩 거세해 나갑니다. 하지만, 감독은 그 곳에 머물지 않고  ‘샤를리즈 테론’이라는 절세 미녀를 보기 위해 영화를 찾은 남자 관객들까지도 거침없이 거세합니다. 세기의 미녀 ‘샤를로즈 테론’ 을 추녀로 만든 이유는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감독은 '테론' 을 남자들의 연인이 아닌  모두의 '엄마' 로 만들고 싶었던 겁니다. 우연히 ‘린 (샤를리즈 테론)’ 에게 나타나 유일하게 그녀의 친구가 된 동성애자 ‘셀비 (크리스티나 리치)’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려 클럽에서 만난 뒤 서로 위로해줍니다.  호기심으로 시작된 그 만남이 린에게 최초의 살인이 된 쇠몽둥이 사건이 있은 후, 린은 셀비에 게 비정상적인 집착을 보입니다. 젠킨스 감독에게 쇠몽둥이와 살인은 어떤 의미이길레 그 사건 이후로 ‘린’ 은 ‘셀비’ 에게 그토록 강한 집착을 보이는 걸까요? 린에게 있어 셀비는 동성애자가 아니라 다만 그녀가 13년 전에 자신의 부모에게서 잃어버린 보호받아야할 자신입니다. 동시에 쇠몽둥이로 상징되는 남성의 성적 폭력에 의해 잉태된 자신의 딸이기도 하지요. 그때의 유린으로 인한, 린의 각성은 그녀를 폭력이 있기 이전,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지치기 이전 상태인 최초의 아기를 임신했을 때로 되돌려 놓았고, 당시에 방치했었던 어머니로써의 본능을 발동시키게 됩니다. 

비록 폭력에 의해 수태된 자식일망정,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셀비와 그리고 그 절체절명의 어미로써의 의미가 그녀의 정신세계를 채우기 시작하는데 그래서 그녀의 사랑은 결코 동성애적인 문제가 아니라 어미와 자식 간의 보호의 대상이자 애절한 집착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린은 셀비라는 새끼를 밴 암캐입니다. 새끼 밴 암캐에게 다가가 본 적이 있나요? 암캐는 자신과 새끼의 공간에 발을 들이는 누구에게나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심지어 누구라도 물어뜯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린의 남성 살해는 남성 사회의 폭력에 대한 적극적인 반격이 아니라, 새끼를 보호하기 위한 여성으로써의 공격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화에서 린은 셀비를 수태한 이후로 남성들과의 섹스를 철저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린은 자신을 위해 집을 나온 상처 입은 '셀비' 를 위해 폭력이 철저히 배제된,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을 제공하기를 원했고, 그 목적을 위해  스스로 몬스터가 되어갔습니다.  그러므로 백설공주는 몬스터였습니다!  

옛날 옛날  아주 특별한 <백설공주> 에서 사실 백설공주의 구원은 남성 권력에 순종한 보상이며, 반대로 마녀의 멸망은 여성에게 주입된 남성 권위에 저항한 ‘징벌’ 이라는 이야기 . 

린은 쇠몽둥이로 당하는 그 순간, 모든 것을 깨닫는데요. 어릴 적에는 자기가 공주가 될 줄 알았고, 왕자가 나타나 자기를 데려가 줄 줄 알았지만, 삶의 결과는 단지 5달러에 스스로 옷을 벗어야 하는 창녀가 되었습니다. 레즈라는 이유로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셀비와, 여자라는 이유로 아버지로부터  도망나온 린은 그렇게 세상을 등지고 서로를 이해했지만  현실에서 쎌비는 경찰들에게 린을 팔아넘겼습니다. 냉혹한 현실 앞에 쎌비는 스스로  살기위해 린을 배반했지만 그걸 알면서도  끝까지 쎌비를 지켜주려는 린을 보면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진정 의지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대체  인간을 지탱하게 해주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 일까요?  하지만 반대로 말한다면 대체 무엇이 우리의 눈을 멀게 만드는 것일까요? 

허구와 현실. 세상의 온갖 그럴듯한 구호들이 사실은 그 속에 추한 리얼리티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엄마의 본성이 성모마리아의 그럴듯한 아가페적 모성애가 아니라, 때로는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미친 암캐처럼 이빨을 들이대는 괴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사랑, 이성, 희망 따위의 단어가 갖는 진정한 의미가, 때로는 몬스터라는 불편한 진실을 깨달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서 원빈의 엄마인 김혜자는 아들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들대신 살인자로 잡혀 온 한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만 봅니다. 엄마의 자식에 대한 절대사랑이 누군가에게 괴물이 되는 순간입니다. 

 

얼마전 황교안 국무총리가 국가공무원법 개정안의 공직가치 조항에 민주성·다양성·공익성 을 삭제하고 ‘애국심’ 등만 넣으라고 지시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고 있고있습니다. 손석희 앵커는  28일 JTBC <뉴스룸>앵커브리핑을 통해  헌법이 정한 국민의 4대 의무(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를 다하느라 군대에 가고, 세금 꼬박꼬박 내고, 교육을 받고, 지금 이 시간에도 열심히 일하는 우리들에게 누가 애국을 말하는가 ”라고 반문했습니다. 각종 위장전입과 해괴한 질병으로 군면제를 받고 자녀들 병역논란에 진 땀 흘리고 있는 그들이 과연 애국을 말할 자격이 있을까요? 그들이 말하는 애국은 애국을 위해 어느 정도 사소한 희생은 감수해라! 그것이 충성이고 애국이야! 라고 말 하고 싶은 것일테고 이것 역시 “의도된 희생” 을 말하는 ‘괴물’ 이라고 보기에 충분 할 것입니다. 

 이번엔 한반도에 사드를 들여온다고 난리인데 어느 지역 할머니가 ‘나라를 팔아먹어도 박근혜를 밀어준다’ 고 말하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박근혜를 밀어주든, 새누리당을 밀어주건 상관은 없는데 당신 손자, 손녀들이 밥 굶고 직장 못 구해 힘들어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느냐고, 박근혜를 밀어주는 것이 당신에게 어떤 혜택이 돌아가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결국 백설공주란 한낱 남성들의 편리한 노리개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을 깨달을 때, 누군가에게 계획되어진 사랑, 희망같은 단어들이 때로는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몬스터라는 진실을 받아들일 때, 영화 <몬스터> 는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영화감독 홍두완 



복지를 생각한다



금천구청에서 한 주민이 방화를 하는 등 난동을 일으켰다는 보도를 보았다. 기초수급자 자격 상실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 하는데 연유를 살피기 전에 이런 과격행위는 정말 잘못된 행동이고 따라서 자제되어야 한다. 아무리 딱한 사정이라 하더라도 그와 같은 행위는 공동체적 질서를 깨트리는 것은 물론 불특정 다수에게 위해를 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근간에 이르러 민원인에 의한 위와 유사한 과격행동 등 비정상적 행위들을 보도를 통해 자주 접한다. 민주주의의 신장에 따른 시민의식의 신장으로 이해하는 측면이 있는데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이러한 모습은 어떤 상황에서든 용납되어서는 안 되고 더욱이 민주주의운운은 가당치 않다. 민주주의란 나와 남을 귀중한 존재로서 함께 인정해야 하는 원리가 아닌가!

  

그러나 유의해야 할 게 있다 이런 상황, 즉 과격한 행위의 민원제기를 전적으로 현재의 법제도에 구속되어 살피는 것과 같은 경직적 접근은 문제가 있다 할 것이며, 그것은 또한 역설적이지만 민주주의적 자세도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은 감정을 가진 동물로 항상 상식의 틀 안에서만 행동하는 것이 아닌 것이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과격한 행위라도 용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있게 된 동기에 대한 사회정의차원의 이해는 있어야 하고 사회는 이를 살펴보아야 하는 책무가 있으며 행정의 수행에는 그런 목적의 장치마련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사실 민생과 관련하여서는 국가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지만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모두가 넉넉하게 살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이를 국가가 챙겨야 하는데 예산 등 사정이 이를 지지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오늘 우리사회가 과거에 비해 월등하다 할 복지 환경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것을 정책에서 우선으로 두고 있지만 아직은 그것이 취지하는 본질을 만족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럴 만큼 우리사회는 아직도 국가의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 많고 그 양태(樣態)도 다양하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말은 그래서 있는가 보다


냉정히 살펴 볼 때 우리나라의 복지제도는 상당한 진전을 하였다. 물론 이는 어려웠던 과거를 경험한 세대들의 견해일 수 있지만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이 땅의 지난 시간은 복지를 이야기할 형편이 못 되었고 그래서 힘든 삶을 영위하여온 세대들이 있고, 그런 상황이 현재에까지 연장되고 있는 층도 적지 않다. 현재의 복지제도가 이런 대상에 대하여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는가가 앞에서 본 사태를 이해하는 단초가 되지 않을까? 


기초수급자 제도는 글자그대로 기초생활의 보장 즉 최소한의 삶을 영위하고 그로서 자기 삶을 스스로 개선하는 기회를 가지도록 국가가 보살펴 주는 제도이다. 이 제도를 우리나라 보다 잘 사는 국가와 비교하는 것은 그렇지만 긍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지원을 현재적 가치로만 살피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이 제도를 기초로 하여 스스로 자기 삶을 개선할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형편이 나은 이웃과 비교하면서 제도를 비판하거나 부정적으로 폄하하는 층이 있다는 점이다. 


일반론이겠지만, 국가는 국민들을 보호해야 하는 제도를 운영해야 하지만 자기 삶의 개선이 가능한 사정인데도 노력은 하지 않고 국가에 의존하려는 자를 지원하는 제도를 두어서는 안 된다. 국가의 책무는 정말 어려운 계층의 삶의 개선을 위한 정책이 우선이여야 한다. 사람의 생활은 가변적이라 지원필요 계층이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가 이 제도를 두는 것은 이러한 현상에 대한 대처여야 하지 한번 결정한  대상에 대한 항구적 지원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번의 금천구의 사태를 그런 면에서 생각해보는가 하면 다른 면에서도 살피고자 한다. 우선 수급자 자격의 소멸을 본다. 이는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에 따른 결정일 것이고 따라서 이를 결정한 행정조치를 잘못이라 해서는 안 된다. 원칙은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 다른 면에서 본다. 현재에 적용하는 기준이 합리적인가, 즉 이 제도 설치의 본래 목적 부합여부 이다. 기준이란 정형(定型)을 가지는 것이 타당하지만 그것이 목적에 부합하는 완전성을 갖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가장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자. 수급대상자가 노령자일 경우 부양자인 자녀의 소득이 기준 이하였는데 이것이 초과되면 탈락하게 된다. 문제는 그 자녀들이 피부양자를 돌보기는커녕 인연조차 끊고 살고 있다면 과연 이것이 합리적인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이런 사정을 상정하여 대안적 제도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완전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듯 우리의 법제도 중에는 아직도 결함을 가진 것이 없지 않다. 이번 금천구청의 사건은 이런 사정으로 살펴야 할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국가의 제도가 국민의 삶과 관련한 가변적 상황을 완벽하게 커버하는 것은 어렵다는데 동의한다. 그러함에도 하고 싶은 말은 적어도 사람의 기초적 삶과 관련한 제도에서는 제2, 제3의 방편을 두어야 한다. 그것이 복지정책의 존재 이유이다. 행정을 수행하기 위한 기준이 엄격한 것은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 잘하는 것은 그 기준이 취지하는 본래 목적을 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어려운 과제이나 이를 유념해야 한다. 그것이 참 복지 행정이다.

(♣2015.02.26)

장제모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기고]민중적 입장에 서야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


1. 입장의 동일함이 관계의 최고형태 


노동자 민중의 스승들은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 했다. 반추해보면 계급적 관점을 갖추지 못하면 역사가 바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를 보는 눈은 다양하다. 독립군의 눈으로 보면 지옥이고, 일제

의 눈으로 보면 천국이며, 친일의 눈으로 보면 비굴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생존이다. 그러니 서 있는 자리마다 달라 보이는 현실에서, 즉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계급적인 관점이 담기지 않는 눈과 글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방법일 수 없다.


일전에 귀천한 신영복 선생은 이런 말을 남겼다.[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사물 파악에 냉철하되 사람에 대한 사랑은 열정적이야 하며, 열정은 속에 남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관찰은 관심과 사랑으로 사랑은 실천과 연대로 나가야 하며 그 중심엔 노동자 민중의 입장에 서서 동지가 되는 것이 사람됨의 최고라고 설파한 것이다. 입장의 동일함. 이것이 바로 계급적 관점의 최고의 형식이다. 


최근 우리는 입장의 차이가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생생한 역사의 시간을 살고 있다. 이른바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는 현 권력이 서 있는 지금의 입장, 그들이 계급적 관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일본은 일제 강점기 그 군국주의 시대를 서국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한 것으로 본다. 자기들의 만행 - 침략 수탈 착취 학살 강간 -을 반성 사죄는커녕 대동아공영을 위한 노력이라 치장한다. 남을 더욱 심하게 착취하고 지배할수록 남에게 더더욱 봉사했다고 믿는 것이다. 그 일제에 빌붙어 개인의 영달만 채우고 조국과 민족을 배신한 매국노들은 처음에는 자기들의 잘못을 감추려고 반공을 내세우다, 전쟁의 피 칠을 통해 친일 매국을 반공 애국으로 돌려치기 한다. 그리고 이제 와서는 아예 일제 강점기 친일 행위를 근대화의 노력이고 반공 분단을 건국행위로 강변하며 진실의 은폐를 넘어 역사 자체를 왜곡하여 친일 매국이 정당하다는 지경에 까지 이르고 있다. 이 또한 그들의 계급적 입장이다. 


전체 노동자 민중의 피땀으로 일군 경제를 한사람의 독재자나 재벌에게 공로를 돌리고, 그래서 이만큼 산다는 주장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재벌의 부가 는 것은 민중의 피땀의 그만큼 빼앗겼다는 말이다. 독재가 경제 건설을 통해 민주주의를 만들었다는 것은 강도가 범죄를 통해 방범의식을 신장한 최고 공로자란 만큼 뻔뻔한 주장이다. 독재가 자유민주가 되고, 불통이 애국이 되는 시공간에서 사람들이 제 머리로 제 정신을 가지고 주인답데 판단하고 행동하기에는 정말 힘들다. 특히 요즘처럼 언론 매체가 발전된 세상이라 엄청난 거짓이 배설되고, 기만의 선동이 홍수라 똥과 된장을 가리는 것도 벅차다. 그래서 더더욱 세상을 바로 보기 위해 노동자 민중의 입장에서 보는 계급적 관점은 절박하게 필요하다.  


2. 적대 모순과 비적대 모순 엉킨 사회


세상은 모순적이다. 그래서 현인들은 진실을 알기 위해 현실 사회 모순의 다양한 존재와 측면을 고찰했다. 기본모순과 주요모순을 구별하고 모순의 주요 측면과 부차적 측면을 나누어 성찰했다. 그래서 “모순의 해결은 주요 모순을 우선 해결하면 차요 모순이 다시 주요 모순이 되는데 이를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결하는 것이 전략 전술이다.”라고 했다. 또한 모순을 적대 모순과 비 적대모순으로 분류하며 차이에 의해 형성된 모순, 즉 민중 내부의 모순은 시비를 가리고 그 과정에서 교양과 설복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옳고, 적대적 모순 즉 적과 아의 모순은 생과 사의 판가름으로 해결되기에 결사투쟁을 통해 적을 안팎으로 와해시키는 것 외에 다른 해결책이 없다고 했다. 이렇게 적아를 구분하지 못하고 소통이니 공존이니 화합이니 하는 것은 일제 강점기 친일파가 되자는 말과 같다. 지금 정권이 보여주고 있는 반북 반공 전쟁불사 분단의 모습은 평화와 통일 민주와 인권 민족 상생과 완벽하게 다른 편에 서있다. 지금의 정책 흐름을 반전시키지 않는 한 한반도의 전쟁 정세는 풀리지 않는다. 


3. 진정한 공동체를 위해  


그러면 우리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애국을 하나 된 공동체일까? 계급적 이해가 다른 계급사회일까? 이에 대한 나의 소견을 말해 본다.

공동체는 지향과 입장이 같은 이들이 마음을 모아 이룬 단결체다. 존중과 존경 이외 지배와 피지배의 강압으로 공동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자와 빈자, 지주와 농노, 노자간이 진정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는 이유다. 예를 들면 기업은 공동체로 보이지만 이익체다. 한 가족이라 떠들다가도 회사가 어려워지면 정리해고를 하고, 그 자리에 이등 삼등 머슴 비정규직을 고용하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함께 살고 함께 죽는 것이 공동체라면 이익이 있으면 뭉치고 없으면 흩어지거나 아예 잡아먹는 것이 이익체다. 이익체에는 의리나 진실이 없다. 오직 힘에 의한 지배관계, 싸늘한 이해관계만 있다. 그래서 공동체는 구성원 존재자체가 목적인데 이익체는 서로가 서로에게 수단이자 도구일 뿐이다. 노자 간에 이해가 함께 할 수 없는 근본적 이유다. 


현 정권은 경제위기에 맞서 국민적 단합을 말한다. 그런데 그 정책을 보면 노동자 민중을 더 값싸게 고용하고 더 오랜 시간 부려서 재벌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넘겨주겠다는 것 이외에 없다. 결국 현 정권이 국민행복을 말할 때 그 국민은 재벌이고, 현 정권의 단합을 말할 때 그 단합은 부자들이다. 결국 현 정권의 계급적 입장은 부자들의 편에 선 것이다. 민주노총이 모든 민중과 함께 민중생존과 민주주의를 요구하자 단 한 번의 집회 및 시위를 이유로 수천 명이 구속 수배 연행 조사를 받고 있다. 민주와 인권을 외쳤다고, 수억 원의 손배를 때린다. 수갑과 돈으로 가난한 노동자 민중의 입을 틀어막고 손과 발에 족쇄를 채우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대한민국을 하나의 공동체로 보는 것은 허위와 기만에 불과하다. 지금의 사회 구조에서 애국이라는 이름의 묻지 마 공동체란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민족의 단결을 외쳤다.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상황에서, 전체 민족이 식민지 노예를 강요당하는 조건에서 ‘저항적 민족 단결체’가 절박했기 때문이다. 약자 피해자의 입장에서 강자의 폭력에 저항할 때 단결은 가능하다. 애국주의 탈을 쓴 극우 민족주의가 반동인 이유는 그들이 특권을 위해 노동자 민중을 동원하는 강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단시대를 살고 있다. 분단은 남북 지배층에게 지배와 통치의 전제가 되었다. 특히 친일매국을 분단 반공으로 가려야 했던 남한 지배층들에게 분단은 지배의 가장 큰 무기다. 이런 상태에서 분단은 노동자 민중에게 가장 가혹하게 피땀을 요구하는 체제가 된다. 그래서 통일은 노동자 민중의 생명 줄이다. 만약 우리 사회가 진정한 공동체를 향한다면 한편에서 노동자 민중의 편에서 분단을 극복하는 통일의 길에서 만들어 질 것이다. 나아가 모순을 극복하고 억압을 타파하는 과정에서 진보적 인류는 진정한 공동체를 만들어 갈 것이다. 


4. 신자유주의 시대 우리들의 관점 

기업하기 좋은 나라, 비즈니스프랜들리, 규제 없는 사회... 등등 뭐라 부르든 거기에는 오직 돈 중심의 세상에서 돈 가진 자들의 이득만 챙기겠다는 강도의 논리가 숨어있다. 그래서 빈부격차는 커지고, 민생은 자살이라는 죽음의 길로 내몰린다. 이런 세상을 자본주의 중에서도 고삐 풀린 자본주의, 시장근본주의 승자독식주의 정글자본주의.. 다양한 이름으로 말해지는 최악의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라 부른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여기서 자유란 민주와 인권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오직 돈과 부자들의 자유, 착취의 자유다. 그 속에서 노동자 민중의 피와 고름으로 가득한 삶을 살 뿐이다. 그러니 여기에 무슨 민주주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 사회는 총칼이 독재가 돈의 독재로 나아갔다가 돈의 독재가 대공황이라는 늪에 빠지자 다시 총칼의 독재로 회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퇴행을 변화 발전이라 믿고, 정치적 경제적 독점의 강화를 다원주의라 파악하는 것은 현재의 권력에 대한 비과학적 분석이 아닐 수 없다. 독재와 독점에 의한 지배의 강화는 노동자 민중의 저항의 파괴이자 다원주의 뿌리를 절단하는 것이다. 다양 다원화가 불가능한 조건에서 이를 외면하는 것은 지성적 자세의 부족이다.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 사람들은 선거가 민주주의 꽃이라고 하지만 제비뽑기나 사다리타기가 아닌 선출은 오직 권세와 백 있는 자, 돈 많은 자, 유명한 자라는 현대판 귀족들의 잔치일 뿐이다. 오직 투표하는 3분만 주인이고 나머지는 머슴이자 구경꾼이 대의제 선거 제도는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제도로 작동되지 않는다. 게다가 사회 모든 영역을 돈이 장악한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선거란 종종 유신시대 선거나 히틀러 나치즘을 만든 선거처럼 악용될 뿐이다. 대한민국은 집권당이 나라를 팔아먹어도 지지한다는 층이 30%라고 한다. 돈과 권력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언론의 목줄을 쥔 상태에서 진실과 진리를 허위와 거짓으로 돌려 조작과 선동을 맘대로 하고 있다. 눈앞에 현실을 뒤트는 것을 지나 역사적 진실마저 조작하겠다고 나선 정도다. 그러니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믿으며 사회 전체적으로 소통과 화합을 말하는 것은 저들의 왜곡과 폭거를 비판은커녕 인정을 넘어 굴복하고 마는 것이다. 


반 신자유주의, 반 분단주의에 맞서 돈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인 민주와 인권, 평화와 통일이라는 분명한 기본 정치노선이 모색되는 것이 옳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노동자 민중의 계급적 입장을 먼저 세우는 것이다. 그 기반아래 진정한 민주주의 민족 통일과 평화 번영을 위해 나가야 한다. 

이런 전제 없는 중도 공존 소통 화합은 그 화려한 표현 속에 텅 빈 공허가 놓여있다. 


신문에서 지속적으로 연재된 이윤로씨의 글을 보며 느낀 소회지만 젊을수록 원칙은 종종 낡아 보이지만 ‘한 결 같이 지키되 나날이 새롭게’ 연구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견해도 전적으로 나의 견해이고 여러 견해 중 하나일 뿐이다. 누구에게 나의 견해가 강압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들의 생각과 견해가 조금 더 깊어지길 바라면서 강호제현의 비평을 기대한다.            


우영흠  시흥3 동   주민



[영화이야기] 인랑-1999년   감독: 오키우라 히로유키



늑대들이 한 소녀를 발견하고 달려갑니다. 빨간 두건의 소녀, 후세를 사랑하는 .... 더 정확하게는 후세의 외로움을 사랑하는 ‘아마미아 케이’.

 철창이 그녀와 후세를 막아서고 늑대들은 그녀를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옷과 살을 잔인하게 뜯어 금새 지하를 흐르는 물은 핏빛이 되는데 아마미아가 후세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결코 올 수 없어요." 어디에 올 수 없다는 것일까요?  후세를 막아선 철창 너머, 아마미아가 있는 그곳이 어디이기에 그녀는 울부짖는 후세에게 당신은 결코 올 수 없다고 하는 걸까요? 후세 카즈키는 수도경의 주력 부대인 특기대의 정예 요원입니다. 특기대의 임무는 과격한 도시 게릴라인 '섹트'를 진압하는 일이고 그래서 '섹트'의 폭탄을 운반하는 빨간 두건의 소녀를 발견하자 쫒아가서 총을 겨누지만 막상 자길 보고 자폭하려는 소녀에게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왜? '라고 묻습니다. 그 짧은 물음은 철갑으로 무장되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집단으로부터 극도의 공포감에 떨던 소녀가 대답 대신 도리질치며 폭탄 끈을 잡아당기게 하는데 주목할 것은 빨간 두건의 소녀가 폭탄을 운반하며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과정 속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무표정'입니다. 인형같은 무표정 속에서 운반된 폭탄이 데모 진압군 내로 떨어지고 수많은 자치경 사람들이 죽는데 '죽음'을 운반했던 소녀의 무표정은 사실상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며 죽이고 싶었던 특기대원들의 철갑 속 무표정과 동일한 의미를 갖습니다. 특기대원들의 철갑. 그것은 인간의 형상과 감정과 사고의 다양성을 차가운 쇳덩이 속에 가두어버리고 철갑이 둘러 채워진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특기대라는 '늑대의 무리' 속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늑대가 됩니다. 그처럼 '빨간 두건'의 무표정 역시 특기대 의 철갑과 같은 맥락을 지니는데,  빨간 두건이 둘러 씌워진 순간 소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라 섹트라는 '늑대무리' 속에서 소녀의 형상으로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한 마리 늑대일 뿐입니다. 이 영화에서 인간늑대는 소수를 핍박하는 권력집단인 후세와 자치경, 수도경 사람들만이 아니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에게 저항하는 빨간 두건의 소녀 역시 인간늑대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소급되는데요.   ‘ 늑대란 무엇인가?’


후세가 '왜'라고 묻자 소녀는 도리질을 칩니다. 후세가 '왜'라고 묻는 것은 '왜 자살해야만 하는가, 왜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조직을 지켜야 하는가?'일 테지만 그러나 그 '왜'는 후세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는 왜 소녀를 죽여야 하는가? 왜 섹트들을 죽여야 하는가? 영화는 섹트의 이상이나 특기대의 당위는 부각시키지 않고 이렇듯 인간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후세를 특기대로부터 구원해내고 소녀를 섹트로부터 구원해 냅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해답이 될 수 없겠지요. 그 해답에 대한 탐색이 이 영화 전체의 몫이니까요! 소녀의 도리질은 자신이 왜 자살해야 하는 지 알 수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폭을 멈추지 않겠다는 부정의 표시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소녀의 죽음이 진정 그녀가 원하고 스스로 택한 결단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소녀는 도리질이 아니라 그녀가 알고 있을 섹트의 목적과 이상을 '왜' 라는 질문의 답으로 말했을 테니까요.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이념이 자신의 의지나 이념과 무관하게 자신을 규정한다는 이 비극적인 의미는 이 영화 전체를 통해 확산되며 집단 속에서 부속품에 불과한 한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  그는 그 집단에서 가장 불온하고 위험한 인물이 되어 버린다는! 그러나 그 의문을 제기하는 철학적인 이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고귀한 순간임을 확인시키는 영화, 인랑에서 우리들은 늑대로써의 인간이고 고독으로서의 인간입니다.

후세는 박물관 안에 박제된 늑대들을 응시하며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어째서 나는 인간의 형상이면서 늑대들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그들과 같이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것 일까?

늑대는 '집단'을 상정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집단'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섹트와 자치경, 수도경, 특기대의 비밀 결사 조직인 인랑, 모두가 포함됩니다. 그 모두가 '집단'으로서의 늑대이고 집단은 집단의 일원을 '독립된' 개체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그래서 후세의 '왜'라는 질문과 아마미아의 사랑은 모두 다 집단속에서는 불온한 것이며 이러한 집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개인의 감정과 사상은 비극적인 결말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고 영화는 말합니다.

후세가 철창에 갇혀 갈 수 없었던, 아마미아가 후세에게 '당신은 결코 올 수 없어요' 라고 했던 그곳은 '집단(늑대)'이 아닌 '인간' 이 살고 있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지요, 어둡고 축축한 지하의 세계 속에서 아무리 울부짖는다 해도 후세가 포함된 세계, 혹은 그 세계 속의 후세는 아마미아를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세계는 인간, 개인의 이름을 허락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한 때, 빨간 두건이었던 아마미아는 체포된 후 포섭되어 수도경의 공안부가 시키는 대로'뭐든지' 했다고 고백합니다. 심지어 한때 자신의 동지였던 이들이 죽고, 사랑하는 남자가 죽게 되더라도 그렇게 했다는 말인데요. 그건 죽음이 두려워서가아니라 삶에 대한 어떤 집착도 없기 때문으로 묘사됩니다. 자폭했던 빨간 두건의 소녀와 아마미아의 동일성을 확인시켜주는 이 장면에서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으므로 시종 무표정으로 지금의 무의미한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잔인한 집단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 갈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마도 개인으로써의 '외로움' 때문이겠지요. 외로움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고 집단 속에서의 희생을 무릅쓰게 만듭니다. 아마미아가 후세를 사랑하는 것도, 후세에게 집단과 거리를 두며 생겨나는 (즉, '왜'라는 질문과 동시에 생겨나는) 외로움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외로움에 대한 동질성이야말로 사랑의 기원이 아닐까요? 하지만 후세는 결국 늑대의 무리 속으로 돌아가고 마는데,아마미아의 사랑을 확인하고 후세는 결국 그녀를 총으로 쏘며 늑대의 가면인 철갑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맙니다. 동시에 영화 속에서 그토록 집요하게 병치되던 빨간 두건의 동화는 결국 이렇게 완성됩니다.  ‘엄마, 이빨이 왜 이렇게 커요?’ 빨간 두건의 동화에서 희생자는 빨간 두건일까요? 영화는 늑대와 빨간 두건은 동일하다고 해석합니다. 비록 늑대가 꼬이기는 했지만 빨간두건은 왜 그것이 엄마의 살과 피 인지 의심하지 않았을까요?  이 엽기적인 잔인성은 '무지'라는 이름으로  제외되어도 되는 것 일까요? 엄마 늑대의 이빨만 큰 게 아니라, 빨간 두건의 이빨 역시 크고 잔인한 것은 아닐까요?  아니, 정작 우리 자신의 이빨은 어떤가요. 누군가를 물어죽이기에 충분히 크지 않은가요? 또 나를 향한 세계의 이빨은 어떤가요? 결국 아마미아는 '엄마 왜 이렇게 이빨이 커요'라고 부르짖으며 죽어갔고 ' 늑대 엄마'인 후세는 고통으로 일그러지며 쓰러지는 그녀의 죽음을 끌어안고 이렇게 되뇌입니다.  ‘ 


당신은 결코 올 수 없어요!’ 


국민의 당의 창당준비위 공동위원장 한상진교수는 성찰적 진보라는 개념을 발제했습니다. 이른바 계파정치, 패권정치,486의 권력화등 낡은 진보를 대치하자는 의미입니다. 한상진교수는 1890년대에 ‘중민’이라는 중산층과 서민등, 보다 광범위한 국민과 대중들의 역할을 중요시한 비교적 온건하고 점진적인 비혁명적 개혁주의를 말했었습니다, 중민개념은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어떨까요? 중산층과 민중을 합쳐 만든 중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와 부를 쌓았으면서도 민중적 가치관과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의식을 지닌 계층을 말합니다. 트위터나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정치,경제,권력에 대한 견제를 활발히 펼치는 계층 역시 상당수가 중민이라는 것인데 특정 이념을 바탕으로 한 개념이 아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계층인 이들 중민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계층이라고 기대하는 것 입니다. 이제는 그런 중도개혁의 스펙트럼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필자는 그래서 합리적 중도가 극우보수를 대체하고 진보에게는 성찰의 변화를 요구하는 대한민국이 탄생하기를 기원해봅니다. 


결국 집단으로써의 늑대는 개인인 인간에게 다가올 수 없다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어둡고 축축한 지하의 물 속에서 오열하며 죽어가는 아마미아의 투명한 눈물을 보여주는데요, 시종 영화의 배경이 되는 지하의 어둡고 축축한 물이 죽음과 암울함을 상징한다면 아마미아의 눈물은 따뜻한 생명과 희망을 상징하는 것이겠지요. 너무도 도식적인 결말과 달리 뜨거운 감동으로 다가오는 애니메이션 ‘인랑’은 3년의 제작기간과 80억 원이 넘는 제작비, 그리고 1천여명의 인력이 투입된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표적 작품입니다.  

 


홍두완 감독





Bradly Chalkers sat at his desk in the back of the room - last seat last row. No one sat at the desk next to him or at the one in front of him. He was an island. 


He was an island. 

이 이야기는 브레들리네 반에 제프라는 전학생이 온 날부터 시작됩니다. 전학 온 친구를 어디 앉힐까 고민하던 선생님, 결국 제프를 브레들리 옆 빈 자리에 앉게 하는데, 반 아이들이 모두 브레들리 옆은 안된다고 말립니다. 브레들리 자신도 짝이 생기는 게 귀찮고 싫다는 듯이 '내 옆에 안 앉는 게 좋을 걸' 하며 제프를 노려봅니다. 하지만 제프는 무슨 상관이냐는듯 브레들리 옆자리에 앉고, 심지어 Hi 하며 인사를 건냅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 인사를 받아 본 적이 없는 브레들리는 이런 상황에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라 겨우 한다는 말이 "너, 일 달러 내놔. 안 내놓으면 그냥 너한테 침을 뱉어 버릴테니까?" 하네요.

브레들리 모습이 어떨지 상상이 가나요? 

관계가 서툴러 안스러운 것도 잠깐, 교실 맨 가엣 줄, 맨 뒤 구석에 앉아 수업시간에 낙서나 하고 공책을 찢고, 선생님께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보면 문제아도 이런 문제아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브레들리의 속마음은 친구도 만들고 싶고 선생님께 상도 받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항상 마음과 반대로밖에 행동을 못하는 열한 살 소년, 

결국 담임 선생님은 브레들리의 엄마에게 전화해 브레들리의 상담을 제안합니다. 상담 선생님은 늙은 마녀 같을 거라고 상상하고 억지로 상담실에 갔는데, 상담 선생님이 젊고 예쁜데다 마침 전학온 제프도 상담 대상자입니다. 그런데 그 제프가 어느 날 실수로 여자 화장실에 들어 갔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브레들리는 제프가 너무나 부럽습니다.


Actually, Bradly never had been inside a girls' bathroom. It was something he'd always wanted to do, but he'd never had the courage even peek into one. ? He was dying to know what they look like.

He imagined they were carpeted in gold, with pink wallpaper and red velvet toilet seats. ?They(toilets)'d probably be more like fountains, with colored water. (43p)


여자화장실은 금으로 된 카펫에 분홍벽지, 변기엔 벨벳 시트가 있고, 변기는 색색깔 물이 솟는 분수 같을 거라고 상상하는 브레들리, 그 또래의 친구들이 정말 이런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지요. 여자 화장실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죽을지경(he was dying)인 브레들리는 과연 제프처럼 운 좋게 여자 화장실을 구경하게 될까요?


말썽꾼 브래들리가 상담 선생님을 만나 선생님과 친구가 되고 전혀 다른 새로운 브레들리가 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결국 상담 선생님은 학교에 상담 선생님이 왜 필요하냐? 선생님 일년치 급여 정도의 인건비라면 전교 교실마다 컴퓨터를 놔줄 수 있다는 학부모들의 주장에 따라 학교를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슬픔마저도 이길 정도로 쑥 자란 브레들리.


그렇게 아이들이 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책을 검색해보니 5학년용 도서고, 원서로 읽는 친구들이 많아 번역본보다 원서가 더 많이 팔리는 책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원서로 읽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물론 영어로도 공감과 감동은 충분히 느껴집니다. 쉽고 재미있는 원서 동화책을 읽고 싶어하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습니다.


참고로 이 책은 <못 믿겠다고?> 라는 제목으로 바람의 아이들에서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 있습니다.


                                                              

      2016.01-1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동화 읽는 어른모임



공직자의 부정과 비리,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현역 금천구 구의회 부의장이 알선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이 되었다 한다. 법원의 최종 판결이 있기까지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함으로 아직 범죄자로 단정하기는 이르다. 그러나 현역 구의회 부의장이라는 신분에도 사전 구속영장이 발부되고 사무실과 집에 대한 압수 수색까지 당한 것을 보면 그 혐의는 매우 짙은 것으로 보인다. 같은 구민의 입장에서 안타깝기도 하지만 실망감도 크다. 며칠 전에는 전직 합참의장이 재직 중 뇌물 수수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고 또 현역 국회의원 2인이 역시 뇌물수수죄가 확정이 되어 의원직을 박탈당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공직자에 의한 부정 비리 뉴스는 날이 새기가 무섭게 들리니 가히 공직자 부정비리 공화국 소리를 들을 만도하다.


공직자의 부정과 비리는 우리 사회에서 아주 흔한 범죄유형인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선 공직자로 나선 사람들의 품성과 자질문제로 지적할 수 있겠지만 모두를 그렇게 볼 수는 없다. 게 중에는 선한 품성과 존경할만한 자질을 갖춘 분들도 많기 때문이다. 무엇이, 누가 이런 이들조차 범죄자의 길로 들게 하였을까? 그 답은 우리 사회의 구조에서 찾을 수가 있다. 쉽게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우리 사회는 물질 만능 풍조에 매몰된 지 오래 되었다. 정말 조심해서 해야 할 말 이지만 이 땅의 권력자와 가진 자들의 도덕성에 대해서 제대로 평가할만한 수가 얼마나 될까하는 의문은 필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그들 중 상당수의 권력과 부(富)는 끊임없는 자기 계발과 신성한 땀으로 이룬 결실이기보다는 위선과 기만 등 부정적인 행위로 인한 것이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슬픈 것은 이 땅의 상당수의 재산가들은 옳지 않은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고는  그것을 무기로 온갖 부정적 가치를 만듦으로 오늘과 같은 가치 혼돈의 사회가 되게 하였다는 점이다. 그들로 인해서 나라의 경제가 흔들리고 정치판조차 난장판이 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더욱이 이들의 부는 세습되면서 부모 자식 간, 형제자매 간의 볼썽사나운 재산 싸움까지 벌이고 있어 우리 사회의 선량한 풍속조차 해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여러 경로들을 통해 설득력을 가진다. 그전에도 종종 있었고 최근에도 이른바 특정 재벌의 형제간 재산싸움이 빅-뉴스가 되었듯이 그들의 부정적인 면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오래 전 부터이다. 우리나라 굴지의 재벌의 경우 그 자손들에 의한 재산싸움은 대를 이어 3세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그들의 가치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는 것과 같이, 이 땅의 재벌들 중에 과연 온전한 이가 있는지 궁금한 것은 필자만이 아닌 보통사람들이 함께 가진 의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부자가 되는 것은 선(善)이고 가난 한 것은 악(惡)으로 정의되고, “부자가 되라”는 말은 덕담(德談)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이러한 세론(世論)은 사람에 따라 공감도가 다를 수도 있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렇듯 우리 사회는 부(富)는 평가를 하면서 가난은 아름답게 보려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보통사람(?)들은 어떠한가. 부자들의 돈벌이를 추잡한 작태(作態)라고 질타할 만큼 도덕적인가는 함께 생각해볼 과제다. 다시 말하면 양식(良識)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오늘의 우리 사회의 가치는 무엇이고, 나는 어떠한가를 자문(自問)해 보자는 것이다. 경쟁력이라는 미명하에 “이기는 것”이 곧 선(善)인 것이 오늘의 사회 가치이고 그러한 흐름에 자신이 합류하고 있지 않는가? 내 자식은 좋은 환경에서 교육을 받아야 하고, 세금은 안 내거나 숨겨서 적게 내는 것이 지혜이고, 이익이 된다면 상대가 누구이고 어떤 일이든 상관 않는가 하면, 도움이 안 되거나 손해가 된다면 그 대상이 무엇이고 누구이든 외면하는 것이 오늘 내 모습이 아닌가를 되돌아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는 불의(不義)한데다 무능하기까지 한 정치 지도자들에 의한 통치로 인해 형성된 구조, 즉 비민주적이고 불합리가 만연한 사회구조가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것도 한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상기에 이르도록 그것을 자기 가치영역에서 씻어내지 못한다면 스스로 양식을 가진 자의 대열에서 비켜서야 한다. 과거의 기조, 곧 잘못된 가치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자는 이야기이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가 되면서 과거와 같은 무지막지한 비리나 부정은 사라지고 있지만 공직자 특히 국회의원이나 시·구의원 등 선출직 공직자의 부정과 비리는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민선 공직자는 그들을 선택하는 국민의 수가 많아야 자리를 얻고 또 연속하여 유지할 수 있는 데도 왜 표를 깍는 행위를 할까? 이유는 간명하다. 그들은 투표권자인 국민의 선택을 받기 위한 자기 어필을 최고 가치로 삼고는 그것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게 되는데 문제는 국민들은 이런 자를 분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권력이 있는 곳에 이권이 있게 마련이고 이를 구하려 국민들은 공직자를 유혹하고, 공직자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의 거래라 판단되면 마다하지 않음으로 마침내 부정과 비리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의 선출직 공직자와 관련된 생태계이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번 금천구의회 부의장 사건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 싶은데 바람이 놔두지 않는다.”는, 역사에서 보았던 세태(世態)의 한 단면처럼 그도 여러 유혹을 받았을 것이고, 또한 그 유혹들은 보안이 된다는 자기 판단으로 그런 행위를 했을지 모른다. 그를 이해하자거나 변명해주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그를 선출한 주민이라면 공직자의 선출에 임함에 가졌던 자기의 가치를 생각해보라는 말을 하고자 함이다.


선출직 공직자들이 부정과 비리를 저지를 생태계는 주민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데 생각을 깊이 해야 한다. 위생환경이 좋은 곳에서는 세균이 번식하지 못하고, 생각이 건전하다면 불건전한 자들을 만날 일이 생기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추락하지 않도록 주민들이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곧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이번 사건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선거에 임할 것을 당부한다.(♣2015.12.24.)

                            장제모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장제모칼럼]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 당부


19대 국회가 정기일정을 모두 마쳤다. 국민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들의 마지막 정기회의 모습은 오늘 우리 국회의 존재를 다시 생각게 한다. 국회시스템의 비정상은 어제 오늘에 제기된 것이 아닌 만큼 탓을 하고 유감을 표명하는 것으로는 국회의원들에게는 자극을 줄 수 없고 피해의식으로 가득 찬 국민들에게도 카타르시스가 되지 못한다. 그렇듯 오늘 우리 국회는 민주주의 산물인 의회주의의 의미를 손상시키고 있다. 



문제 제기를 위하여 우리 국회시스템을 살펴본다. 살펴야 할 게 워낙 많으므로 지난 시간의 국회는 두고 지금, 곧 제 19대 국회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그들도 자기들의 행적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는지 마지막 정기국회에서 무려 114개의 법안을 무더기로 상정하고는 이를 불과 3시간여 만에 처리했다. 참 대단들 하다. 114개의 법안이 어떤 내용들인가를 굳이 살피지 않더라도 그 수의 법안들을 불과 3시간 만에 처리한 것은 과히 초인적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을 따져 보니 한 개의 법안을 단 1분 50초 만에 처리하였다. 참 놀라운 일이 아닌가! 국회가 법률을 제정하려면 그 제안에서부터 의결에 이르기 까지 갖추고 지켜야 할 절차가 있고 그것은 그들에 의해 제정된 법률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1분 50초 만에 그 법률에서 규정하고 있는 절차를 지키면서 진행 할 수 있었겠는가! 국회는 법률을 만들면서 그들 스스로 법률을 위배하거나 법률이 취지하는 바를 경시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국회에서 제정된 법률은 국가 규범으로 우리나라 국민은 물론 대한민국 주권이 미치는 영역의 외국인에게까지 구속력을 갖는 국법(國法)으로서의 위상을 가진다. 그런 권위를 가지는 국법인 만큼 어떤 내용의 법이든지 제정은 합당한 절차를 거쳐서 완성이 되어야 비로소 공신력을 확보할 수 있다. 공신력을 가지지 못한 법률의 권위가 어떠했는가는 암울한 군사독재 시대를 살았던 시민들은 잘 알고 있다.


오늘 우리 국회의 저열(低劣)한 모습은 두말할 것 없이 국회 구성원 즉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을 가진 자들의 책임이다. 그들 중에는 직분에 충실하고 도덕성도 갖춘 분이 없지 않지만 그 공동체의 실체가 아름답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으니 그들의 모습은 감추어질 수밖에 없다. 그 공동체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과거는 잘 몰라도 현재 국회의원들 중에는 능력과 자질을 갖춘 분들이 많다. 객관적으로 인정할만한 학식과 경륜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역량도 상당한 분도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국민들이 직접 선출한 이른바 선량(選良)이다. 그런 자원들의 구성체인 국회가 왜 국민의 질책 대상이 되어 있을까? 


다시 말하지만 국회의 오늘과 같은 모습은 전적으로 그들의 책임이다. 그들은 보통시민과는 차별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런 신분에 맞갖지 못한 행동으로 오히려 보통시민들보다 격이 낮은 모습조차 보였다.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으로 갖게 되는 권리는 양껏 향유하면서 부과된 임무는 게을리 하는가 하면 그 권리를 앞세워 탈법이나 범법조차 한 사례들이 그런 것이다.


국회의원들을 질책하는 데 반론을 펼 시민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그들을 선출한 국민들도 그들의 비정상 행위에 대한 책임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시민들은 그들을 물질우선의 가치에 빠지도록 유도하는가 하면 도덕적 해이(解弛)로 조차 몰아갔기 때문이다, 사례를 들면, 우리 고장으로 지하철이 지나야 하고, 그 역(驛)은 우리 마을에 있어야 하는가 하면, 쓰레기 소각장이나 납골당 같은 혐오시설이나 장애인, 노인 요양소와 같은 기피(?)시설은 절대 들어오지 못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또 있다. 우리 고장의 그린벨트는 가급적 많이 풀고 건축물의 용적 율은 최대화하고 건폐율(建蔽率)은 최소화하도록 정치력(?)의 발휘를 요구하였고 그 성과정도로 능력 잣대질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은 이런 주민들의 욕구에 충실하고자 그들의 능력을 활용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양심조차 덮어버리게 하여 오늘과 같은 우리 국회의 모습이 있게 하였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이 있다하여 국회의원들이 저지른 과오를 관대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는 국가공동체적 권위가 주어진데 따른 사실적이고 도덕적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 과오를 따질 때 인과(因果)를 살펴야 한다는 점에서 그들을 그렇게 몰아간 행위자들인 시민들도 책임을 비켜가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다. 좀 과한 예가 되겠지만, 국회의원이 범죄자라면 그들을 그렇게 몰아간 시민들은 교사자보다 더한 공동정범(共同正犯)의 지위다. 결론을 하면 둘 다 책임이 있는 당사자들이다. 


내년 4월이면 제 20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기회를 맞게 된다. 누구를 뽑아야 하는 것은 선거권을 가진 유권자 곧 시민들의 선택이고 그것은 권리다. 권리를 행사하는 자는 그 권리 행사에 따르는 책임이 있음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지난 시간처럼 자기 의지대로 뽑아 놓고는 나중에 질타를 해대는 위선적인 모습을 재연해서는 안 된다. 통속적이고 진부한 지적이지만 학연이나 지연, 친분 등이 선택의 표지가 되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후보의 자질과 능력을 면밀히 살피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 그것은 나라의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내 소중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일인 만큼 가치를 둘 수 있다. 그리고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내가 세운 기준에 부합하는 인물이 없다하여 투표를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점이다. 그것은 민주시민의 자세가 아니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찾는 것은 삶의 지혜이다. 


끝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국회의원은 국사(國事)를 고민하고 대안을 만드는 임무자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마을 일은 기초자치 의원에게, 고장의 일은 광역자치의원에게 요구하고 ,국회의원에게는 오로지 국가를 위한 비전 제시를 요구하자. 20대 국회의원 선거는 선택이 지혜롭고 그래서 결과가 아름답기를 기대한다.(♣2015.12.11)


  장제모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주택 기초소방시설 설치,

화재에 대처하는 ‘기본 중의 기본’ 입니다


구로소방서 이동석

최근 한 어린이집에서 소방안전교육을 받기 위하여 소방서를 방문한 바 있다. 소화기 사용법을 한참 설명하고 있던 중 한 어린이가 손을 들더니 “저희 집에는 소화기가 없어요.” 하는 말을 듣고 어린이들에게 “우리집에 소화기가 없는 어린이 또 있나요?” 물으니 다른 아이들도 하나 둘씩 손을 들기 시작하여 놀란 적이 있었다.

  최근 3년간 서울시 전체 화재 통계중 화재로 인한 사망자의 73.4%가 우리가 일상에서 거주하고 있는 단독주택에서 발생하였다

  단독주택, 연립주택 등의 화재시 인명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대표적인 소방시설은 무엇일까? 바로 ‘단독경보형감지기’와 ‘소화기’이다. 소화기란 화재 초기에 불을 끄기 위해 사용하는 소화기구이며, 단독경보형감지기는 열과 연기 발생시 강한 신호음을 전파하여 실내 거주자에게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소방시설이다.

  미국이나 영국, 일본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주택용 단독경보형감지기 설치를 의무화 하여 전체적으로 40%의 인명피해를 줄였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지난 2012년에 ‘소방시설 설치 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제8조’ 를 개정하여 신축 주택은 소화기구 및 단독경보형감지기 등 기초소방시설을 설치하도록 의무화하였으며 이미 건축이 완료된 기존 주택의 경우에도 오는 2017년 2월 4일(5년간 유예)까지 기초소방시설을 설치하도록 했다. 다만, 공동주택 중 아파트 및 기숙사 등은 이미 법정 소방시설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의무대상은 아니다.

  단독경보형감지기는 구획된 실(침실, 거실, 주방 등) 마다, 소화기는 세대별, 층별 비치하여야 하며 소화기 구매는 인터넷 매장 또는 대형 할인점, 인근 소방기구 판매점 등에서 구입하면 된다.

  나와 내 가족의 생명을 화재로부터 지킬 수 있는 소화기와 단독경보형감지기를 설치하여 소방안전교육을 받으러 오는 아이들에게 “집에 소화기 설치된 곳이 있나요?” 물었을 때 아이들 모두가 손을 드는 날이 올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천년은행나무 살리기에 온 마을이 나섰다

서울시민 1,000개 스토리 발굴을 위한 마을이야기 공모전의 글입니다




금천구는 이제 20년이 된 서울시의 막내로 변방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천년의 세월을 살아온 시흥동 은행나무가 위치에 있는 곳은 인근 영등포,구로,관악, 경기도광명시와 안양시의 중심 이었다. 이곳은 관아와 정종능행시 머무르던 시흥행궁과 향교가 있었다. 현재 관아와 시흥행궁 그리고 향교의 터만 남아있다,

그렇지만 천년의 세월을 한 자리에 버티고 있는 3그루의 은행나무가 있다, 그런데, 최근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은행나무의 잎이 말라가고 있어 주민들의 걱정거리였다,이를 보다 못한 주민들이 나서 천년은행나무 살리기로 하였다, 마을공동체들이 힘을 모아 9월8일 천년은행나무 주민네트워크를 조직했다. 주민네트워크는 성년을 맞이하는 금천구청과 함께 이제까지 돌보지 못하고 방치한 과거를 반성하고 이제부터라도 민과 관이 함께 천년은행나무를 돌보기로 하였다,

10월14일 천년은행나무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당고사를 자내고 천년은행나무 지킴이를 구성하고 발대식을 진행하였다. 주민대표인 천년은행나무 지킴이단장과 금천구청 공원녹지과장이 함께 선언문을 낭독하면서 24만 금천구민 전체가 금천구의 상징인 천년은행나무 살리기에 모두가 나설 것을 약속 하였다. 

그리고 매년 정월대보름에는 주민주도의 천년은행나무 당고사가 많은 주민들이 참여로 진행되고 있다. 

이제 시흥동천년은행나무를 민과 관이 함께 아끼고 돌보면서은행나무가 천년의 세월을 살아보면서 보고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소중한 금천의 문화자산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민상호

삼형제 엄마 쓰리현의 무한~도전

서울시민 1,000개 스토리 발굴을 위한 마을이야기 공모전의 글입니다



가산디지털단지에서 20년 가까이 생산직에서만 일한 내가 뉴딜일자리를 통해서지만 처음 마을미디어를 알게되고 그중 가장 쉬울거 같아 라디오를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쉬울거 같았던 라디오는 생각 보다 어려웠다,기획하기,대본쓰기,진행하기,오퍼레이터,그밖에 미디어교육까지 생소한 용어들도많아 나만 못알아듣는거 같고낯선곳에서 낯선사람들과 교육받는것조차 힘들어 포기할까 고민중 “엄마가 라디오를 한다고 상상도 못했는데 이렇게 열심히 배우고 라디오도 하니깐 신기하고 대단해요. 존경합니다.”라고 말해준 삼형제 울아들들과 남편과 금천아이엔 대표님의 격려속에 조금더 해보자 하는 맘에 버티니 지금은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9월엔 라디오 강의를 통해 좋은 사람들을 만나 저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들과같이하니 일하는게 즐겁습니다. 배철수씨 만큼이나 해박한 팝송이야기 ‘포포즈의 음악여행’ 뿡뿡이 보다 신나고 쉽게 아이랑 노는 ‘엄마는 충전중’ 내얘기같은 리얼 ‘윤맘의 다이어리’ 컬투보다 더 시끄러운 ‘마을수다라디오,마수라’ 중국어로 전하는 한국생활 ‘팡팡씨의 한국에살자’ 지역신문을 쉽게 풀이하는 ‘들려주는 신문’ 다른 방송국에 비해 적은 프로그램이지만, 지역라디오를 시작한지 얼마안된 저에겐 대형방송국 부럽지않은 소중한 보물들입니다. 생산직에서만 일해 온 저에게 공동체라디오는 새로운 도전이었고 앞으로 더 금천구민들과 친근하게 즐겁고 신나게 라디오금천을 같이할수있도록 공부하고 지치지않게 버티고 노력할겁니다. 삼형제 엄마 쓰리현의 무한~도전.


김진숙

우리 동네 멀티플레이어

서울시민 1,000개 스토리 발굴을 위한 마을이야기 공모전의 글입니다.



6학년에 올라가 새친구들과 어색하던중 여름방학때 엄마가 접수한 어린이기자단 수업은 첨엔 별기대없이 엄마에게 잔소리 듣기 싫어 출석만하자 했는데 뉴스제작과정을 배워보니 평소 안보던 뉴스를 보며 특색,구성,영상편집,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등을 파악하는게 점점 재밌어 졌다. 재미를 느낄 때 아쉽게 개학과 동시에 수업은 끝났다.

수업이 끝나고 나의 관심도가 떨어질때쯤 또다시 엄마는 청소년대상 영화제작프로젝트“레디액션”수업에 접수를 하셨고 토요일 수업이라 난 더 하기 싫었는데 어린이기자보다 더 많은 충격을받았다(좋은쪽으로) 영화를 보면 단순히 배우는 연기만 잘해야된다고만 생각했는데 그장면을 보여주기위해 배우와 수많은 스텝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 조금 알수있을거 같다.“레디액션”을 통해 단편영화를 같이 만들면서 영화대본,촬영,편집,연기,등 다양하게 해보니 만화가만 생각한 내 꿈에 영화감독이 추가되었다.

남들과 금방친해지기 힘든 나에게 요즘 학교친구들과 선생님이 많이 밝아졌다며 칭찬도 해주고 부모님도 다양한경험을 통해 자신감이 많이 생겼다며 좋아하신다.

무엇보다 내 스스로가 많은 변화가 있다는걸 느낀다.

금천구 가산행복학습센터에서 두가지 수업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행복과꿈을 주었습니다. 앞으로 우리동네 뿐 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릴 김강현이 되겠습니다.


김강현 군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근대의 위대한 약속, 그 자유롭고 평등한 여정으로의 무한한 진보를 약속했던 근대는 모든 근대인들에게 진보에 대한 희망과 신념을 제공해 왔다. 과연 그 진보의 약속은 지금도 유의미한가? 그것이 위기라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서구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진보라는 추상적 용어가 등장한 이래 그에 대한 개념적 정의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다. 아마도 이는 진보에 대한 개념이 사랑이나 정의(正義)에 대한 개념만큼이나 입장에 따라 제 각각이고 또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고 접근되기 때문인 것 같다. 오죽하면 정의(正義)라는 추상적 명사 하나만을 가지고도 존 롤스와 마이클 센델이 수백 페이지의 책으로 설명을 했어도 부족하다고 할까? 더구나 한국적 상황은 진보에 대한 개념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던 역사적 과정이 있었고 아직도 그 혼란은 현재 진행 중이다. 그런 진보에 대한 정의를 짧은 생각에서 정리해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제논의 역설처럼 비록 완전히 다다르지는 못하겠지만 좀더 그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마저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진보에 대한 다원적 해석이 아직 한국사회에서는 유의미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일정 정도 개념적 정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혼란은 지속될 것이고, 혼란의 지속은 또한 많은 비용을 초래할 것이다. 나는 지금이라도 진보에 대한 개념적 정의를 내리고자 하는 사회적 차원의 노력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글은 진보에 대한 개념적 정의 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글은 아니지만 진보에 대한 조금은 다양한 시각 중 일부로 받아 들여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각설하고 사회에 있어서의 진화와 진보의 차이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화가 자연발생적인 변화와 발전이라면 진보는 인간의 목적의식적인 활동을 통한 변화와 발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발생적인 변화가 보수이고 목적의식적인 변화가 진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시장은 진화하지 진보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본도 진화하지 진보하지 않는다. 누구는 사회를 진화한다고도 표현하고 누구는 사회를 진보한다고 표현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장과 다르게 사회는 자연발생적으로 진화하기도 하고, 또 목적의식적으로 진보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자본도 시장도 사회가 만들어낸 사회 속의 내재된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가 진보만 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한 사회의 진보와 진화는 그렇게 때로는 진화가 진보를 견인하기도 하고, 진보가 진화를 견인하기도 한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말이다. 때로는 조화와 균형을 갖기도 하고 때론 부조화하고 균형이 깨지기도 한다. 

당면한 진화와 진보의 현실을 다른 표현으로 정리하자면, 사회와 역사가 돈이 이기는 편으로 가느냐 아니면 사람이 이기는 편으로 가느냐에 대한 물음일 것이고, 아울러 사회와 역사가 돈이 이기는 편으로 가야 하느냐 아니면 사람이 이기는 편으로 가야 하느냐 하는 당위 차원의 물음으로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한 사회의 자연발생적인 진화를 인간의 의식적 활동인 진보가 제압하고 제어를 할 수 있느냐, 아니면 제압당하느냐의 구절로도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대표적인 신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하이에크는 자연발생적 사회질서를 강조했다. 인간이 자연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연에 개입하게 되면 오히려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되는 것처럼, 인간사회도 자연적인 질서가 스스로 형성이 되는데 인간이 개입해서 그 질서를 임의대로 바꾸게 되면 예측하지 못했던 문제가 생겨 결국 그 이상의 비용을 치르게 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사회를 보면 비록 선의에 의해서 출발했다지만 다시 되돌리기까지 너무나 많은 피와 비용이 들어간 것을 보면 하이에크의 말에도 나름 설득력이 크다고 할 것이다. 그에 비해 많은 지식인과 학자들 예컨데 사민주의 학자들이나, 케인즈, 존롤스, 하버마스 등의 수많은 학자들은 사회에 대한 인간의 인위적인 개입을 없이는 당면한 불평등 뿐만 아니라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이 위기가 극복될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제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 보자. 모두 알다시피 이미 현실은 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자본의 쉼 없는 자기 증식 등으로 인간의 목적의식적 활동인 진보가 사회의 자기발전적인 진화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격차가 벌어져 있다. 더욱 암담한 것은 시장과 자본에 의한 공론장의 왜곡과 무차별적 파괴 등이 인간의 목적의식적 합의와 진보 자체를 끊임없이 방해하고 교란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무엇보다 당면한 큰 문제는 자본과 시장의 파괴적인 힘과 그 요인들은 늘어나면 늘어났지 결단코 스스로 줄어들 것 같지 않다는데 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진보와 진화 사이에 불균형이 지속되는 한 사회는 위험해질 수 밖에 없다. 

사회가 일방적으로 진화하는 것은 치명적인 위험들이 따르게 되어 있다. 전쟁무기까지 예를 들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자전거는 바퀴가 빠져 사고가 난다고 해도 당사자만 다치면 그만이지만 비행기나 고속열차는 특정한 나사 하나만 잘못되어도 재앙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는 그만큼 사회에 촘촘하게 참여하고 있는 구성원들 하나 하나의 힘 또는 위력이 그만큼 커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멀리 해외로 나가지 않아도 그 예는 수없이 많다. 2003년 사망자 192명 실종자 20여명을 내었던 대구지하철 참사의 범인은 조직도, 기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마어마한 거구도 아닌, 평범한 57세의 지적 장애인 한 사람 이었다. 그리고 2008년 대한민국의 국보 1호를 전소시킨 범인 역시 평범한 70대 노인 한 사람 이었다. 1991년 세간을 뒤 흔들었던 여의도 묻지마 사건도 사회에서 소외된 20대의 불행한 청년 단 한 사람이 일으킨 재앙 이었고, 또 얼마 전 한 세미나에서 고교생이 사제폭탄을 만들어 그 세미나 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적이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단 한 사람의 힘이 점점 더 나라전체를 마비시킬 정도로 위력을 가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고, 무엇보다도 앞으로 그러한 위력은 더 커질 것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희생자들이 우리와 상관없는 외계인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주변의 동료 시민들 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자각해야 한다. 그렇다고 국가가 통제의 힘을 발휘한다고 해결이 될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역사의 미래’로 유명한 아놀드 J 토인비는 지금은 절판된 『세계사 – 인류와 어머니 되는 지구』에서 지구는 탄생이래 지구가 낳은 수많은 생물들 중 어떤 한 종에 의해 최초로 파멸될 수도 있는 처지에 처했다고 근대의 현실을 지적했다. 어머니인 지구가 인류를 낳았지만 그 근대의 인류가 자신들 뿐만 아니라 어머니인 지구 전체까지 파멸시킬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이미 1952년 오슬로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인간은 초인이 되었다. 그러나 초인적 힘을 갖게 된 이 초인은 초인적 이성(理性)의 수준에 오르지 못했다. 그의 힘이 커지는 만큼 인간은 더 가련해진다. 초인이 될수록 자신이 더욱 비인간적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양심을 일깨워야 한다.” 라고 말이다. 

때로는 자본과 시장을 아예 없애야 한다는 일부의 철없는 주장이 목소리를 키우기도 한다. 그러나 시장과 자본은 신봉해야 할 선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애야 할 절대 악도 아니다. 시장은 그냥 시장일 뿐 도덕적 가치의 부여 대상이 아니다. 불과 같이 제대로 사용하면 인류에게 유의미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 도구일 뿐이다. 화재가 났다고 세상의 모든 불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시장이 그리고 자본이 많은 해악을 끼친다고 자본자체를 없애자고 한다는 것은 개가 사람을 물었다고 모든 개를 없애자는 말과 같다. 시장과 자본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일 뿐이고 이를 어떻게 이용할지는 인간의 몫이다. 세상의 모든 시장을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의 시장의 위기는 인간이 시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그냥 방치했기 때문에 생긴 위기 이다. 개를 방치했다가 괴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문제는 사회와 시장이 기술의 발전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급속한 진화를 하는 동안 인간의 목적의식적인 활동인 진보가 그 진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불균형이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자본은 인간의 울타리를 벗어나 통제가 안될 정도로 괴물이 되어 있기 때문에 어쩌면 이는 요원할지도 모르겠다. 자본뿐만 아니라 기술도 인간이 통제하지 못하면 재앙이 될 수 있다. 이미 시장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국가라는 울타리를 벗어났고, 기술 역시 자본을 등에 업고 국가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인간의 목적의식적 활동인 진보의 울타리는 국가라는 한정된 울타리를 고집하는 데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 국가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계시민과의 공론장을 형성하고 세계시민과 연대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혜를 짜내야 이미 세계화된 자본이라는 괴물을 비로소 통제할 수 있는 것 이다. 진보가 시급히 각성하고 진화와의 사이에서 적절히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한 근대가 약속한 위대한 진보의 여정은 계속해서 위기에 시달릴 것이고 그 끝은 암담할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말을 끝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그는 1976년 자신의 저서 『소유냐 삶이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믿기 어려운 사실은 이 무서운 인간 운명의 마지막 선고로 생각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아무런 진지한 노력도 행해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개인생활에 있어서는 미치광이가 아니라면 우리의 존재에 대한 이런 위협을 보고도 아무 대책도 없이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공적인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상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으며, 그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위임한 사람들 또한 그 담당자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지도자들이 파국을 피하기 위해 효과적인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그럴듯한 여러 행동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도를 하고 있는 자나 지도를 받는 자나 모두 갈 길을 알고 있는 척,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척함으로써 그들의 양심과 생존에 대한 소망을 마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 체제가 낳은 이기주의가 지도자들로 하여금 사회적 책임보다는 개인적 성공에 더 높은 가치를 두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라고 그는 당면한 이 위기를 지도자나 공직자들이 해결해주지 않을까 하는 우리 모두의 착각에 대해서도 이미 우려를 표현했다. 

헤겔과 맑스가 무엇인가를 해 줄 것이라는, 아직도 우리 주변을 떠돌고 있는 그 유령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한 이러한 위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각하고 극복하지 못하는 한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할 수 있다는 근대의 위대한 약속은 스스로 물거품이 될 것이다. 


이윤로

시흥4동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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