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양이 등 반려동물로 인한 이웃 간의 다툼이 가끔 언론 매체에 보이더니 드디어 온 국민이 경악할 사건이 터졌다.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길고양이를 돌보던 주부가 누군가 던진 벽돌에 머리를 맞아 사망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고의에 의한 사건이라고는 아직 단정할 수 없지만 정황을 살 필 때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비정한 우리사회 이웃의 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슬프기도 하고 화도 난다.


내가 싫은 것을 남이 하면 화가 나는 것은 인간들의 보편적 모습이다. 이런 일들로 이웃 간의 갈등이 있게 되고 그것이 발전되어 폭력으로까지 연결되는 경우를 보도 등을 통해서 접하는 것이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이 요즘의 세태다. 생각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그래서 갈등이 일고 다툼으로 발전되는, 바야흐로 다양성으로 인한 갈등의 사회가 오늘의 우리 사회이다.


사람들 간에 갈등이 이는 것은 서로 다름(異)을 인정하지 않음이 중요한 이유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것을 다른 이도 동의해 주기를 바라고 그러지 않을 때 반감을 갖고 그것을 행동함으로 갈등이 일고 다툼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의 ‘캣맘 사건’을 볼 필요가 있다. 즉, 나는 길고양이가 싫은데 당신은 그것을 좋아하는가 하면 집까지 만들어 주는 데 화가 나고 그 화를 행동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사람을 죽이고자 돌을 던진 것은 아닐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길고양이를 챙겨주던 한 평범한 주부가 그로 인해 사망을 했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죽게 된 이번 사건을 그러나 이런 논리에서 조명하는 것은 이번 사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고 따라서 유사한 사태 재발 방지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유(思惟)하는 인간에게 싫고 좋아함의 공식을 두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좋다고 항상 좋아하지 않고 싫다고 영원히 싫어하지도 않는다. 변화무쌍한 감정을 소유한 동물이 사람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반려(伴侶)동물이라는 단어가 회자되더니 이제는 어린아이들까지도 그 말뜻을 알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사람들의 생활에 개나 고양이와 같은 동물들이 어느덧 함께 사는 사회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의 삶에 이러한 동물들이 반려자가 될 수 있음은 인류의 오랜 역사이고 따라서 그것을 따지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다. 그러함에도 반려동물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이번 ‘캣맘 사건’을 제대로 살피는 자세이다.


사람들 중에는 유난히 개나 고양이 등 이른바 반려동물을 좋아하여 같은 취향의 사람들에게 조차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들이 있다. 예를 들면 값비싼 장식으로 동물을 치장하거나 사람들이 보는데도 지나치다 할 정도의 애정표현을 하는 등의 행위가 그런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평소 반려동물에 대한 반감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도   저항감을 갖게 하는 이유가 되는가하면 동물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혐오감을 갖게까지 한다. 


그런가 하면 유난히 동물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서워서 그러거나 그들이 내는 소리들이 싫어서 그런 경우 또는 본능적으로 동물을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캣맘’과 같은 사람은 친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고 심한 경우에는 혐오(嫌惡) 대상이 된다. 더욱이 싫어하는 모습들의 반복, 예를 들어 듣기 싫은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밤마다 듣게 되면 그런 환경을 만든 자에게는 혐오를 넘어 증오의 감정으로까지 발전할 수도 있다. 이번 사건은 그런 상황에서 조명되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 장에서의 문제의 본질은 사람이 죽었다는 결과이다. 그가 사회 통념상 비난받을 행위를 하지 않았는가 하면 어떤 면에서는 선의적인 행동을 했는데도 그것이 이유가 되어 공격을 받았다. 다시 말하면 동물을 싫어하는 사람이 겪는 저간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상적 결과, 즉 사람을 죽게 한 것은 어떤 형태로든 이해될 수 없다는 점이다.


유의해야 하는 것은 이런 사태는 재발될 수 있는 점이다. 그럴 만큼 우리사회에서 반려동물은 위험 요소를 가지고 있는가 하면 그 수위도 상승하고 있다. 더욱이 세상은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그로써 상식으로 이해될 수 없는 사건들이 하루가 멀게 일어나고 있다. 반려동물은 그런 현상의 원인이 될 개연성을 풍부히 가진다.


주변에 반려동물을 가지는 가정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바야흐로 인간의 행복추구 욕구라는 명제로 이는 인간 삶의 질의 한 우월적 표지인양 오해되기기 조차 한다. 이에 편승하여 동물애호 인식도 상승하고 있고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도 소요되고 있다. 문명화 과정의 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를 아름답게만 볼 수 없다. 그 곳에는 간과해서는 안 될 위험요소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계층 간의 간격을 사실화함으로 일수 있는, 사람들 간의 갈등이 그것이다. 


반려동물에 포함하기는 좀 그렇지만 길고양이도 이런 범주에 들게 됨으로 사회적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이번 ‘캣맘 사건’은 좀 특이하지만 그런 사회상의 한 한 단면이다, 필자의 집 근처에도 길고양이들을 쉽게 볼 수 있고 가끔이지만 발정기에 이른 길고양이들의 음산한 울음소리로 밤잠을 설칠 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어린 손녀는 길고양이가 꿈에 보여 무섭다며 공포에 질린 모습조차 보인다. 이런 현상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동물애호를 앞세워 이해만 요구하는 것은 안일한 발상이다. 적절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캣맘 사건’은 반면교사다  (♣2015.10.14)1)

                                       장제모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하

고 있으며 다양한 마을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러시안 소설> 신현식




 러시안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잘 설계되어 있는 작품이다. 영화 속 주인공인 강신효는 별다른 능력도 없고, 사람과 대할 때 필사적이게 자신을 보호하려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소설가였고, 영화는 그의 소설적 감성을 마치 소설처럼 얘기하는 독특한 전개 방식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강신효가 가지고 있는 나름의 낭만주의와 주변에 대한 묘사, 끝으로는 허무맹랑한 사건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무능력한 소설가였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의 소설을 표현한 영화 역시 조금은 무능력한 연출을 보여주었다.

 작품 초기부터 끝까지 거론되던 '흥미'라는 골치 아픈 문제거리는 영화에서도 빠짐없이 드러난다. 작품에서 흥미란 얼마나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는 걸까? 영화는 전반부에 내놓았던 소설스런 분위기 모두를 깨부수며 상업적이면서도 독특한 반전을 펼쳤다. 하지만 우리는 흥미란 무엇인지 곰곰히 살펴봐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과도하게 집착하는 그 흥미가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조차 흩으러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안 룰렛은 소설을 표현하려 했지만 사실 나는 대본을 드러내놓은 연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그것에 어떤 이야기를 담든 작가 한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적어놓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좀더 많은 사람의 생각이 함유되고, 그것은 독단적인 감성보다는 좀더 다채로운 감성을 표현한다. 영화에서는 감각적인 문장들이 쭈루륵 늘어지면서 우리의 눈을 현혹시켰지만, 한 사람이 쓰는 글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개인의 감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공인 강신효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굉장히 낭만적인 삶을 보냈고, 격동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나름대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이야기를 소설에, 그리고 영화에 담았다. 우리는 나 자신의 이야기를 책처럼 펼쳐볼 수도 있고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도 있다. 내 주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 영화는 영화스럽게 좀더 과장되겠지만, 이야기란 겨우 그런 단조로운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싶다.


광명공업고등학교

2학년 김예준

역사적 퇴행이 거침없다. 부정으로 권력의 칼자루를 쥔 무리가 미친 망나니처럼 칼질을 해 댄다. 저들이 이기면 지옥이고 저들이 망해도 대한민국을 진흙수렁이다. 

하지만 저들은 진짜 미친 것이 아니다. 외려 치밀하다. 매국과 독재의 유전자가 빨간 정당을 만들기도 한다. 경제민주화를 외치고 국민행복을 외친다. 그러니 민주화 다 됐다는 이들, 저들이 집권해도 민주주의 퇴행이 없다던 이들, 모든 움직임을 체제 안에서 가능하다는 이들, 이들의 유약함과, 자본주의가 만든 노년 복지의  황무지와 파탄과 사회적 소외를 마치 민주화의 후과로 보는 늙은 세대의 무지와 광기를 숙주 삼아 1970년 박정희 시대를 만들겠다는 집념이 광적이다. 

결과, 평화라는 상식은 전쟁으로 퇴행했고, 통일이라는 염원은 증오와 분열로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니 헬 조선이다.


저들의 광란이 치밀한 것은 누군가 제대로 히틀러의 집권 과정과 지배 과정을 배워 작동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토대부터 상부구조까지 그들은 사실과 진실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곰팡이가 햇빛 싫어하듯 기피하면서 치밀하게 유신의 복제를 준비했다. 그 결과 현재 우리는 그들이 완성하는 매국 수구 반동의 세상을 목격하고 있다. 재앙을 개혁이라 부르는 무지의 세상, 역사 왜곡을 역사바로세우기라고 우기는 맹목의 세상을 보도 있다. 아름다운 새마을 정신에 빛나는 한국적 민주주의 유신체제가 복제된 세상 말이다. 참으로 성실하게 도둑, 강도 사기를 쳐서 보람차다는 암흑 세상 말이다.


유신체제의 복제를 완성하기 위해 저들은 두 가지로 방책을 쓰고 있다. 하나는 토대 차원에서 유신화다. 개혁이라고 쓰고 재앙이라고 읽어야 하는 이른바 노동개혁의 추구가 그것이다. 본심은 우리 사회 근간으로부터 저항의 핵을 제거하겠다는 의도다. 그 중심엔 탈도 말도 많지만 조직된 노동자들, 즉 민주노조가 있다. 민주노조의 힘을 거세하기 위해, 회사의 주구가 되는 친일파 같은 노조만 남겨 놓기 위해 그들은 단체협약을 죽이고 사장이 맘대로 하는 취업규칙을 강요한다. 노동권과 노동3권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짜노동을 강요하고 세대 간의 이간질을 하는 패륜적인 임금피크제가 밀어붙인다. 근로기준법을 송두리째 도려내는 일반해고제를 강제한다. 헌법이 사라진 곳에서 노예의 노동을 감수하지 않으면 죽어 버리라는 것인데, 이 패악이 본심은 민주주의 마지막 힘을 제거하고야 말겠다는 유신표 욕망이다. 


두 번째는 국민을 노예의식으로 지배하겠다는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역시 부일 매국 친미 군사독재, 자본의 살인적 독점을 부정하는 이들은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낙인하려는 유신표 욕망이다. 영구집권을 정신적 차원에서 보장하는 길이자, 당장 증오를 통한 정치적 승리를 만들겠다는 의도다. 조선의 말과 역사를 씨 말려 조선민족의 정체성을 영구히 제거하려는 일제시대 식민지 지배정책의 부활이다. 이로서 조선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야끼의 저주담긴 예언이 실현된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데, 조선민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한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부일 매국의 적자, 후손들이 만드는 남한의 역사는 일제가 다시 역사의 지배자 현실의 권력자가 되었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그만큼 미친 세상이라 정말 분하다. 

이들에게 국민은 말 그대로 황국신민의 준말이다. 이들에게 국민은 주인으로 받들고 봉사하는 대상이 아니라 잠재적 범죄자로 감시하고 지배하는 대상이다. 그러니 먹고 사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못하는 가축의 모습으로 국민을 만들기 위해 노동재앙을 밀어붙인다. 처음부터 식민 노예 정신을 주입시켜 다른 생각을 못하게 만드는 노예적 국민을 만들겠다고 한다. 우리는 퇴행의 완전체를 보고 있다.  


자본주의는 사람을 신분의 굴레에서 해방시켰다. 하지만 그 해방은 임금노동이라는 경제적 굴레로의 대체였다. 반면에 신분 굴레의 해방은 인간 개성의 해방, 이성의 해방, 정치적 주체로서 민(民)의 각성이었다. 이런 모순적 처지를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사슬에 얽매여 있다.”라고 요약하고 있다. 이런 역사를 요약한 말이 “신민(臣民)에서 시민(市民)으로”라는 말이다. 신민과 시민의 차이는 통치와 정치, 복종과 권리라는 이름으로 대별된다. 시민은 사회와 관련한 교양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 즉 자신이 나라의 주권자임을 자각하고, 인권을 중시하고 인권을 보장 받고 실현하려는 사람을 말한다. 시민은 인민과 같은 말이다. 사회계약의 주체로 ‘무엇에 구속되지 않은 원래의 사람(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다. 반면에 신민(臣民)은 군주국에서 관리와 백성을 함께 가리키는 말이다. 군주국의 주권은 군주에게 있으므로, 신민은 주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저들은 지금 우리에게 당신은 시민인가 신민인가를 묻고 있다. 민주공화국의 성원인가 파쇼권력의 노예가 될 것인가를 묻고 있다. 역사왜곡 수단인 교과서 국정화에 많은 이들이 즉각 반대 행동을 한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노동재앙을 막아내는 길이다. 역사적 왜곡을 막는 것이 금강산 구경이라면 노동재앙을 막는 것은 식후경의 식(食)이다. 다행히 우리는 대한민국 헌법 1조를 발휘하자는 제안을 받고 있다. 우리가 대한민국의 주인이라는 것을 확인하자는 “을들의 국민투표 제안”이 그것이다. 투표 순간에만 주인이고 그 외에는 머슴인 잘못된 체제에서 국민이 신민이 아니라 시민이 되는 길은 쉼 없이 돈과 권력의 반칙을 감시 수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민으로 주권을 발휘하자는 것이다. 당신은 시민인가 신민인가? ‘을들의 국민투표’를 통해 답을 해 보자. 무지하고 포악한 정권의 역사적 심판의 엔진을 달아보자.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결혼 초,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을 해야 한다는 시어머니의 말을 듣고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순종이란 단어가 조선시대 여자나 쓸 것 같은 말이기도 했고, 밭일이든 부엌일이든 금방 금방 척척 남자들처럼 시원하게 하시는 어머님과 순종이란 단어가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님은 아버님께 순종을 하면서 내게 그런 말씀을 하시나? 그 뒤로 시어머니를 유심히 지켜보는데, 어머님은 정말 순종을 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거나 큰 소리를 내지도 않았고, 아버님이 화라도 내시면 비위를 거스를까 눈치를 보다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셨다. 내가 보기에 참 답답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조용히 사시는가 싶었는데 요사이 몇 년 어머님이 가끔 화가 나서 못 살겠다는 푸념을 하신다. 그 때마다 며느리, 딸이 모여 어머님에게 남편에게 사랑 받는 법이며, 편하게 사는 비결, 싸움의 기술을 전수하겠다고 나서는데, 어느 것 하나 별 효력이 없었는지 요즘 들어 어머님이 부쩍 힘들다는 말씀을 하신다. 결국 아들, 딸들이 모여 두 분을 따로 계시게 하자는 가족회의를 할 지경까지 갔지만 그때마다 어머님은 그러면 너희들이 힘들어서 안 된다며 자식들의 제안을 거절하셨다. 그런 어머님께 감사하면서도 불쌍한 마음이 들어 어떻게 하면 어머님이 좀 편하게 사실까 고민을 했는데,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읽으니 자연스레 어머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인공 작은 나무의 할머니 보니 비처럼 지혜로운 어머님과 주인공 할아버지 웨일즈처럼 고집스럽고 꽉 막힌 아버님, 두 분의 조합이 그들과 너무나 닮았는데, 두 분도 그들처럼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살면 얼마나 좋을까?

  추석 연휴, 시댁에 갔더니 역시나 아버님에 대한 어머님의 푸념이 한 차례 이어졌다. 그리고 어머님 보다는 좀 낫게 사는 두 며느리의 마음 편해지기 비법 전수 시간이 돌아왔다. 둘째 며느리인 동서는 이제 아버님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 말씀 하시고, 놀러도 다니시고, 하고 싶은 일을 좀 해보시라고 한다. 만날 하는 뻔한 조언이고, 뻔히 되지 않을 일들인 줄 모두 안다. 드디어 내 차례다. 

  “어머님, 제가 드디어 사랑받고 사는 비결을 찾았어요.”

의기양양하게 큰소리를 치니 어머님도 솔깃해 하신다. 

  “어머님, 그러지 말고 그냥 아버님을 이해하세요.”

 그러자 어머님이 발끈하신다.

  “여태 내가 이해했으니께 지금까지 살았지, 이해 못했으면 이렇게 살겄어? 내가 그냥 죽겄어! 징글 징글 햐 ~ ”  

 “어머님, 그런 이해 말구요. 왜 화를 내시는지 물어 보고, 이야기를 들어 주시라고요. 피하지 마시구요. 이 비결은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가 가르쳐 준 건데 제가 공부도 많이 하고 책도 열심히 읽어서 알게 된 거예요. 이해를 해야 사랑할 수 있는 거래요. 그냥 혼자 참는 이해 말구요. 아버님이 화를 내시면 그냥 얼마나 몸이 괴로우면 저렇게 불퉁거릴까 걱정해 주시라고요. 어머님 만날 속으로 ‘당신만 아퍼, 나는 더 아퍼!’하시잖아요. 그러지  마시구요. 마음으로 진짜 이해하려고 해 보세요. 불쌍히 여기고 진심으로 이해해주려고 하면 아버님도 어머님 힘든 것 이해하시고 잘 해 주신다니까요.”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미 어머님은 그냥 내 이야기를 흘려버리는 눈치다. 책을 읽고 사랑하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라는 말에 백 배 공감을 하고, 자신을 반성해서 남편과의 오랜 불화와 갈등을 이겨낸 며느리가 생생한 경험담을 전수하건만 이번엔 시어머니가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가져야 한다. 사슴을 잡을 때도 제일 좋은 놈을 잡으려고 하면 안 돼 … 꿀벌인 티비들만 자기들이 쓸 것보다 더 많은 꿀을 저장해 두지 …그러니 곰한테 너구리한테 뺏기지 … 하지만 그들도 자연의 이치를 바꿀 수는 없어. (26p)

 

  책을 읽는 내내 노부부의 사는 모습과 손자에 대한 가르침을 보며 체로키 인디언들의 삶의 철학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다. 자연도 사람처럼 봄이면 출산의 진통을 겪는다고 생각하는 체로키 인디언들.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자연 속에서 지혜를 얻고 그들도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아간다. 자연에 감동하고 감사할 줄 아는 그들의 삶만큼 고상하고 아름다운 삶을 어느 문학작품에서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 역시 이 소설에서 만큼 강한 인상을 주는 작품도 본 적이 없다. 어쩌다 책장에 꽂힌 책의 제목만 보아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속삼임을 들으며 잠드는 작은 나무의 모습과 서로 사랑하는 노부부의 모습이 떠오를 정도다.


어느 늦은 밤 할아버지가 “I kin ye, Bonnie Bee" 라고 말하는 걸 들었을 때, 나는 할아버지가 "I love you"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말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그랬던 것이다 …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는 사랑과 이해는 같은 것이었다. 할머니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랑할 수 없고, 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더더욱 없다, 신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 할머니는 세월이 흐를수록 이해는 더 깊어진다고 하셨다. 할머니가 보시기에 그것은 유한한 인간이 생각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것들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이었다. 두 분은 그것을 'kin'이라고 불렀다 (69p)


  어머님과 아버님도 이들처럼 서로 kin하면 얼마나 좋을까? 세월이 갈수록 서로를 더 많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에서 톨스토이가 말했던 사랑, 불쌍히 여기는 마음 보다 훨씬 더 쉽고 상호작용이 확실한 사랑을 전수하건만 어머님은 이제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어머님, 아까 그 책에서 그러는데 개든 사람이든 자기가 아무데도 쓸모없다고 느끼는 건 아주 안 좋대요. 이런 저런 모든 일 혼자 하지 마시고 아버님 하실 수 있는 일은 좀 맡기세요.”

하고 덧붙이려다 그냥 입을 닫았다. 대신 아버님께 기차역까지 태워달라고 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자연 속에서 사시지만,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체로키 인디언들과 달리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는 분들에게 인디언의 지혜가 무슨 설득력이 있겠는가? 그저 용돈이 든 봉투를 드리면 저절로 두 분 모두 편안해지지 않을까?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 보니 금방 기차역이다. 열차를 타러 승강장 출구로 나서는데 아버님이 5만원 지폐 한 장을 불쑥 내미신다.    

 “차비햐 ~ . 쪼금 밖에 못 줘.”

 “아휴, 됐어요. 요즘 며느리 돈 잘 벌어요. 다음에 제가 용돈 더 드릴게요.”

돈이 많네 적네 받네 못 받네 실랑이를 하고 돌아서는데 왈칵 눈물이 나려했다. 맞다. 몸이 사는 데 필요한 마음을 꾸리느라 나도 아버님의 마음을 보지 못했다. 먹고 사는 핑계를 대며 한껏 쪼그라들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한다.  

‘아버님, I kin ye, 제가 아버님을 kin할게요. 어머님 힘드시니 화 좀 내지 마세요.’


사람들은 모두 두 개의 마음을 갖고 있다. 몸이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을 꾸려가는 마음과 영혼의 마음.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욕심을 부리고 교활해지면 영혼의 마음은 밤톨보다 작아진다. … (중략)… 몸이  죽으면 몸을 꾸려가는 마음도 죽지만 영혼의 마음은 그대로 남는다. 영혼의 마음은 근육과 비슷해서 쓰면 쓸수록 커지고 강해진다. 마음을 더 크고 튼튼하게 가꾸는 비결은 오직 상대를 이해하는 데 마음을 쓰는 것뿐이다.

(본문 104쪽) 



                                                               

      2015.10-1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동화 읽는 어른모임


이와이지 감독의

        <4월 이야기> 




 영화를 볼 때 가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말이 없다고 느껴지는 작품이 있다. 영화는 때로 고요하다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한 사람의 이야기를 차분히 따라간다. 4월 이야기는 그런 영화였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주인공 우즈키의 사랑이 시작하기 이전 전초의 감정이다. 하지만 이보다는 우즈키 본인이 중얼거리듯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표현이 걸맞고, 그 서툰 대학 첫날 자기소개 시간의 연장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그녀의 이야기는 어찌 그리도 서툰지 맥락조차 미미했지만,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한다. 덕분에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우리는 조마조마했고, 위태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영화는 사랑이 시작하기도 이전에 끝나버렸고, 우리는 그녀의 친구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시작도 못한 사랑이 그토록 여운으로써 우리에게 다가오는 걸까? 사실은 그녀가 그저 중얼거리는 자신의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남을 대하는 게 일상인 우리들은 자신도 모르게 감정의 울타리를 세워두고 만다. 그래서 나에게 다가오는 남을 그토록 막아서지만, 허전해지는 마음은 또다시 누군가를 원하고 있다. 변하고픈 마음은 욕심이다. 욕심은 우리를 허위의 길로 안내하려 하지만 가끔은 새로운 인연, 문화와 마주하게도 해준다. 때로는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지만 그럴 때마다 어색한 웃음만이 만연하고, 또 누군가에게 말 한 마디를 건내고픈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는 건 늘 일상이다. 가끔 차오르는 이유 없는 설렘에 마음이 고조되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외로워지기도 한다. 그녀는 그런 우리들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건내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녀의 시작에 가슴이 설렌다. 그 시작은 언제까지나 그녀만의 시작은 아니기 때문이다.


광명공업고등학교

2학년 김예준


참 제목이 의미심장합니다. <삶이 보이는 창>에서 나온 이 책은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아시아 인권문화연대의 대표인 이란주씨가 5년 동안 진보생활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에 썼던 이주노동자들의 생생한 이야기입니다. 노동력이 필요할 때는 불러들이고 경제가 나빠지니 찬밥 신세가 된 이들의 이야기는 그동안 우리가 가까이서 만났던 소위 다문화가정과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등록이든 미등록이든(불법이라는 말을 가능하면 쓰지 마셔요. 사람이 존재하는 건 법으로 따질 일이 아니지요) 이들은 우리 경제의 최전방에서 어려운 온갖 일은 다 하면서도 제대로 보상 받지 못하고 불안에 떨고 가정을 지키는 것 조차 힘겨울 뿐 아니라 멸시와 천대를 온 몸으로 받아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들에게 '노동'만을 강요했을 뿐 인간으로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를 못 본 척하고 우리 일자리 뺏는 이들로 멸시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더 평등과 행복의 문제로 이들과 연대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우리들이 되었을까요?

불행하게도 이 책에서는 이들과 연대하고 함께 하는 이들이 너무도 적고 인간이하로 취급하는 이들이 많이 나온답니다.

책을 읽고 조금 아쉬웠던 것은 이 책의 편집이 주제별로 되어 있어서 지금 현재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이 어떤지 잘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 지금의 법 문제나 해결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이들이 겪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고 무엇을 도와야 하는지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이 없어 큰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산업연수생이라는 말이 사라진 것은 알겠는데 그 후에는 어떻게 법이 바뀌고 했는지 나와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지은이는 먹고 사는 문제를 가장 크게 생각합니다. 일테면 버마의 정치 상황은 매우 심각해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이들은 버마에 투자하지 말았으면 하지만 지은이는 그것으로 인해

그곳 사람들이 공장이 문을 닫고 일자리를 잃는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지요.

이런 것들 때문에 민주화 운동을 하는 이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들의 노력과 연대의 수준은 참 대단하다고 봅니다.

우리도 다문화 가정 뿐 아니라 이주노동자들이 주변에 있고 그 아이들이 교육문제로 고통받고 있다면 적극 도왔으면 합니다. 결국 사람을 살리는 것은 '사람'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함께 읽었으면 하는 책은 역시 아란주씨가 쓴 <말해요, 찬드라> 입니다. 중학생 정도면 읽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5.9-2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동화 읽는 어른모임




헌법은 노동권을 보장한다. 노동권은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의무가 국가에게 있음을 말한다.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보장하지 않는 나라는 민주주의도 공화국도 아니라는 엄숙한 선언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 일자리가 없음은 국가와 사회가 나에 대한 의무와 약속을 져 버리고 있음을 말한다. 국민의 4대 의무는 국민의 4대 권리로부터 나온다. 나라가 먼저 애민을 할 때 사람들은 나라와 공동체에 대한 자긍으로 애국을 한다. 사치와 향락과 도박이 엉클어진 스포츠에 열광하고 평화와 통일 대신 분열과 증오를 애국으로 착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람이 아니라 짐승으로 퇴행시키는 자포자기다. 


한국에서 민주와 인권이 신장되고 함께 살자는 희망이 넘친 것은 87년 6월 항쟁과 이어진 7,8,9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형성된 힘이다. 이 힘이 다시 권력과 돈에게 잡혀 먹고 만 것은 인간에 대한 가장 잔인한 테러인 신자유주의를 강제한 IMF 환란 이다. 그로인해 한국은 실질적 완전고용시대(직장 이전이 임금 인상의 계기가 되고, 장기근속에 금반지 상을 주던 시대)가 끝장나고, 정리해고 비정규직 고실업 이라는 헬 조선이 열렸다. 인간이 그저 도구이자 수단이고, 타인이 그저 승자독식의 적인 시대가 열렸다. 오직 나만이라도 살자는 스펙의 시대가 열렸다. 스펙이 늘수록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빠져드는 수렁임을 알지 못했다. 백만 중에 하나 있는, 그것도 미친 언론들의 분장된 성공신화에 운명을 맞기며 한 걸음 한 걸음 하루하루 헬 조선을 만들었다. 


민주공화국에서 시민(市民)은 신민(臣民)임을 거부해야 한다. 시민은 정치의 주체다. 비판과 감시의 중심이다. 하지만 돈과 권력은 언제나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하인 머슴을 원한다. 거지가 공주 걱정하듯 가난한 자, 실업자가 돈의 정치를 하고 오욕의 역사를 만드는 굴종의 정치를 원한다. 이런 사람들은 시민이 아니라 신민이다. 신민은 노예일 뿐 민주공화국의 성원이 아니다. 극단의 이기주의와 극단의 배타주의가 만든 것이 지금 우리가 만나는 헬 조선을 실체다. 3포(연애, 결혼, 출산)가 8포(연애, 결혼, 출산, 집, 인간관계, 꿈, 희망, 자아포기)가 되고, 빈부격차가 심해져도 평화와 진보를 종북으로 모는 정신병에 오염된 세상이 헬 조선이다. 


실업청년들이여,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자본주의가 만든 지겨운 일자리는 소외된 노동이라 부른다. 노동의 다른 말이 활동이다. 먹고 살기 위한 활동만 노동이 아니다. 보람 있게 사는 일상, 더 아름답게 관계를 만드는 연애까지 모두가 사람이 잘 먹고 잘 사는 모든 활동이 노동이다. 함께 구상하고 함께 만들며 그것을 함께 누리는 모든 과정이 노동이다. 그래서 진정한 노동은 놀이와 같다. 하지만 우리는 이 즐거운 보람 찬 삶 전체를 이윤의 굴레에 빼앗기고 말았다. 지금 우리가 두렵고 괴로운 진짜 이유다. 가끔 그 고통이 솟구쳐 가늠할 수 없는 분노가 된다. 원인 제공자 대신 사회적 약자나 무차별 대중에게 심화가 폭발한다. 인간을 퇴화시키는 진정한 악의 뿌리는 돈 중심의 사회 구조다.


자본주의에서 실업자는 사회적 생명을 거세당한 존재다. 아프다. 하지만 통증은 가장 지혜로운 경고라고 하지 않던가. 이 아픔을 새로운 계기로 만들기 위한 분투가 필요하다. 화를 복으로 바꾸는 지혜가 필요하다. 나는 권한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자. 자기와 가족만을 위해 남과 남의 가족을 외면하는 죽음의 일자리를 잃은 김에, 그런 일자리 조차 얻지 못하는 김에, 아예 거부하자. 영혼도 존엄도 없는 비정규직 좀비 노동, 살아남기 위해 남에게 이리 늑대가 되어야 하는 정규직이라는 사탄의 노동을 타파하자. 신나고 신성한 노동을 되찾는 일을 시작하자. 나가 아니라 우리를, 개별 가족이 아니라 사회를 행복하게 하는 진정한 노동, 거대한 노동을 시작하자. 


눈을 들어 이웃을 보고 세상을 보자. 재벌들의 곳간엔 수백조의 재산이 쌓여도, 저들은 평생 비정규직으로 부모와 자식 간 싸움만 부추긴다. 좋은 일자리 대신에 청년 일자리 펀드를 만든다니, 거기에 월급을 적선한다는 대통령은 우리의 고통의 해결자가 아니다, 우리의 절망을 조롱하고 능욕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프면 아플수록 그것은 세상이 썩고 퇴행했다는 말이다. 생각하라. 더 가지고 다 가지려, 특권과 반칙과 세습과 부패를 일삼는 돈과 권력은 결코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다. 저항하는 자가 있어야 변한다.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 여기서 피땀을 흘리는 사람들이 지금의 고통을 바꾼다. 만약 저항하지 않고 준법 질서만 지키는 사람들이었다면 인간은 아직도 노예시대에 살고 있을 것이란 말을 잊지 말자. 


나를 바꾸는 노동 일터를 바꾸는 노동과 함께, 사람이 할 가장 힘 찬 노동은 세상을 바꾸는 노동이다. 지금 우리가 지금 할 일은 내 몸과 마음을 가둔 골방을 박차고 거리로 나서는 일이다. 민주주의를 다시 만들고 역사를 바로 세우며 사람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든 실업자에게 보편적으로 실업수당을 지급하라고 데모를 하는 일이다. 실업자기에 더더욱 절실하고 또 가능한 일이며 역사와 세상의 주인임을 확인한 신성한 노동,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서로 함께 안전하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우리시대 독립군이 되는 일이다. 


빈부 격차와 불평등의 가속화 되고 있다. 굶어 죽거나 아니면 노예가 되라고 한다. 평생 비정규직으로 머슴으로 살라는 악법을 만들면서 개혁이라 한다. 그 사이 실업자게에도 세금을 걷는 간접세 서민세는 늘고, 부자들의 감세는 커진다. 나도 모르는 사이 과태료니 벌금이니 1조 단위로 물고 있다. 이 파렴치한 세상을 멈추게 하지 않는 한, 사람 사는 세상은 없다.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를 공격하는, 마름들이 더 흉폭한 야만의 세상이 커진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우리가 거리로 나와 세상을 바꿀 필요는 절박해 졌다. 청년실업자들이여 저항하라. 저항하는 당신들의 시대의 주인이다.

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센터장

나 너만을 영원히 사랑해…  


만일 인간이 그토록 염원하는 불사의 삶을 살게 된다면 인간의 삶은 어떻게 될까?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독일의 미래학자 마티아스 호르크스의 책 『위대한 미래』 후반부를 보면 조금은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월터 베전트의 1888년 작 『이너하우스』라는 작품을 인용하고 있는데 잠깐 소개하자면 이 작품은 캔터베리에 있는 24,000명의 죽지 않는 사람들의 집단을 묘사한다. 이들은 생물학적으로는 불사의 인간이지만 사고가 나면 죽을 수 있는 존재이다.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이들은 생물학적 불사의 능력 때문에 신경증적인 현실도피자들이 되어 화재가 발생할까 공포에 떨고, 여행도 피하고, 그저 집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런 존재들에겐 공동체가 위기에 처해도, 전쟁이 나도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영원히 살 수 있는데 누가 위험에 맞서려 하겠는가? 아마도 공동체는 둘째치고 모든 인간관계도 소멸될 것이다. 

또 다른 상상을 해보자. 이번엔 인간이 어떤 경우에도 죽지 않는 영생의 존재라고 상상해보자. 과연 그 안에서 인간 본유의 창작의 행위나, 사유, 학습의 행위들이 일어날까? 자유와 정의, 평등, 사랑 이러한 가치들이 과연 온전할 수 있을까? 인간사회에 내재하는 여러 가치들은 인간이 유한한 삶을 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인간이 영원히 사랑한다고 자신이 있게 약속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의 삶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의 영원성은 유한한 시간 속에서만이 가능해지고 유의미해진다.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등장하는 이반 일리치는 누구보다 성실한 삶을 살았으나 불치병에 걸린 이후 자신이 토할 정도로 껍데기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죽음에 맞서서야 비로소 삶과 화해를 하고 자기 본유의 삶을 찾고자 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은 영원히 살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산다. 죽음이나 고통은 다른 사람들의 일이라 생각한다. 비로소 자신도 죽음의 여정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고,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되돌아 본다. 평판이란 삶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유한한 삶을 자각했을 때이다. 물론 자신만은 영원할 것이라는 이런 인간의 부정본능(일종의 착각이)은 인류가 문명을 만들고 사회를 지탱할 수 있도록 한 측면도 있지만, 부정본능은 인간의 고유한 삶의 가능성을 찾고 영위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 『소유냐 삶이냐』의 서문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대수술을 요하는 중병이라는 진단이 내려질 것이 싫어 검사를 받기보다 차라리 위험을 무릅쓰려는 것 같다. 마치 현실을 부정하여 혹시나 신이 기적을 보내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사는 것 같다.” 라고 말했다. 이런 부정본능은 집단적으로 닥친 위기도 감지하지 못하게 한다. 바로 설마 전쟁이야 나겠어? 정말 지구가 멸망하겠어?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유대인의 비극이 일어났고,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6.25가 일어났고, 세월호 참사도 일어났다. 우린 늘 누군가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란 착각에 산다.

인간 삶이 영원하지 않듯이 어떤 공동체도 영원히 존속되지 않는다. 한 때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폴리스가 영원할 줄 알았고, 로마 역시 자기들의 공동체가 영원할 줄 알았다. 그러나 모두 사라졌다. 마찬가지로 어떤 공동체도 유한한 시간성 속에서만 존재한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도, 금천이라는 우리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금천구가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유한할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아무런 근거 없는 낙관)은 금천의 고유한 삶을 묻고 자각하는데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우린 그 착각 속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며 살고 있다. 

하이데거는 모든 존재는 세계와 시간성 속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 그 존재의 본질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물론 수학적 진리와 같은 비시간적인 존재와, 신과 같은 초 시간적 존재의 영역도 존재하지만 말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존재도, 그리고 인간들이 만들어낸 공동체란 존재들도, 결국 어떠한 시간성 속에 어떤 세계, 어떤 존재와 함께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 그 존재의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 정말 그런가? 지면관계상 관계의 측면만을 보자. 생물학적으로 꽃은 그냥 꽃이지만 사랑을 고백하거나, 탄생을 축하하거나, 죽음을 애도하거나 이렇게 인간과 관계를 맺으면 다른 존재가 된다. 그리고 보통 우리는 누군가를 특정할 때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남편이며, 누구의 오른팔이며, 어떤 회사에 다닌다고 표현한다. 어른들에게는 “누구의 아들이야”하면 대부분 다 통하고, 정치인이나 조폭에게는 ”누구의 오른팔이야”하면 다 통한다. 그렇기에 신출내기 정치인들은 유력한 정치인이랑 찍은 사진을 늘 대문짝만하게 만들어서 전면에 홍보하고 다니지 않던가. 이처럼 존재는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본질이 드러난다. 

아울러 존재의 의미는 “누구와” 관계 맺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말하자면 그것들이 우호적 관계인지 적대적 관계인지, 또한 가까운 관계인지, 먼 관계인지 말이다. 이렇게 존재는 비록 어떻게든 관계 속에서 존재하지만, 존재의 양식에 따라서 그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그 관계들 속에서 어떤 소통이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어떤 가치가 나오는지가 달려있다.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우리 공동체가 구성원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국가와 인류와는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우리는 인류의 보편적 염원과는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등등에 따라 존재의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유명한 개미연구가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은 그의 책『통섭』과 『지구의 정복자』에서 인간이란 그리고 인간이 만든 공동체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 존재인지 그 존재의 본질을 진화의 과정에서 찾았다고 다소 당차게 선언했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인간이 발견한 지식을 이용하고 재 구성해서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존재라는 노자의 언명을 망각했다. 인간의 본성이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은 이미 뇌 과학이나 신경학에서는 증명된 사실이다. 아예 포르투갈 출신의 신경과 교수였던 안토니오다마지오는 그의 저서 『데카르트의 오류』에서 인간은 생각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함으로 존재하는 존재라고 선언했다. 또한 러시아의 철학자 미하일 바흐친 역시 “존재한다는 것은 교류한다는 뜻이다.”라고 표현했다.(공감의 시대. 제레미리프킨) 그 외에도 뇌과학자, 철학자, 언어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 들도 오래 전부터 인간의 본성을 관계 속에서 재구성해왔다. 이렇게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본성이 만들어지고 정체성이 결정되어 왔다.

우리는 그리고 우리 공동체는 지금까지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어왔고, 또 그렇게 21세기란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공동체의 삶이 보다 의미 있는 삶으로 충만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보다 노력을 경주해야 하지 않을까? 하나의 공동체가 이룰 수 있는 경이, 우리는 그것을 너무도 오랫동안 경시해 왔던지, 아니면 사적 성공이라는 늪에 빠져 자각하지도 못해왔다. 누구를 탓할 필요도 없다. 국가와 서울시를 탓할 필요도 없다. 

언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인류의 보편적 염원과 관계를 맺으려 했고, 언제 우리는 시류에서 벗어나 공동체가 주는 경이로움을 단 한번이라도 의식적으로 만들려 한적이 있었던가? 하이데거는 타락한 실존에 대해 말하면서 타락한 실존이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매 순간 자신의 결단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시류에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고 하였다. 

우리의 공동체가 비록 타락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저 시류 속에 자신의 모습도 망각하고, 그냥 주어진 대로 존재하는 공동체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서울시에서 하니까 주민참여예산제가 운영이 되고, 환경위원회가 있어야 하니 운영해야 하고, 거버넌스가 시류이니 만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고 무언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새로운 것들을 묻고 개척할 수 있어야 한다. [9면에 계속 ]

 [8면에 이어 ]

인간도 그 무엇도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은 채 현실 속에 던져졌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진 존재이듯이, 우리의 공동체도 (그리고 무언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위원회들 역시)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의 의미조차 물어보지 못해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은 단지 우연히 지구별에 도착해서 행복하게 놀다 가면 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지금 어디에 서있는지” 알아야만, “어디로 가야하고” 또 “누구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존재들이다. 

여담이지만, 요 근래 서울시에서 각 구마다 하고 있는 생활권계획에 토론에 참여하고 있는데, 대다수 만들어진 마을의 비전이 이름만 다를 뿐 거의 대동소이하다. 그것들이 어떻게 그 마을의 고유한 각각의 정체성을 담은 비전이라 할 수 있을까? 바로 이런 것들은 몰개성의 개성일 뿐이다. 한나아렌트가 현대 문화의 위기로 지적한 것 말이다. 어느 고장에서 축제를 하고 인기를 얻으니 너도나도 축제들을 만들고, 어느 고장에서 어떤 특산물이 유명하다고 하니 너도나도 나서서 특산물을 만든다. 이젠 아예 울진과 영덕은 대게를 가지고 다툰다. 이젠 축제가 없는 동네가 없고, 특산물이 없는 동네가 없다. 그것이 마을의 본유는 아니지 않는가. 이명박이 자전거 도로에 드라이브를 걸으니 아무 필요 없는 곳에도 자전거 도로를 만든다고 너도나도 난리였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다고 폄하하는 것도, 그리고 공직자와 구성원들의 그러한 노력과 고단함을 비판하고자 함은 결코 아니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공동체가 세련되어야 구성원들이 천박해 지지 않듯이, 공동체가 고유한 존재의 삶의 방식들을 찾아 나갈 때, 그 구성원들도 고유한 존재의 삶들을 찾아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박한 공동체에서 세련된 구성원이 나오기 어렵겠지만 천박한 구성원들 속에서 세련된 공동체가 나오기는 더욱 어렵다는 것을 우린 인정해야 한다. 결국 답은 구성원들이 내와야 한다. 아무리 기성 정치인들에게 숱하게 기만을 당해왔던 아픈 기억이 있다 해도, 그럼에도 결국 우리들의 몫이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할 수 있어도, 먼저 그런 정부를 구성해야 했던 우리들의 무능을 겸허히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 공동체에 참여해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 공동체가 우리에게 간절하게 손을 내밀 때도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공동체와 관계를 맺으려 했는지 함께 되돌아 보아야 한다. 새로 출범한 비전위원회도 단지 그럴듯한 평판과 시류 속에 묻어가려는 답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본원적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는 그런 답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누가 하더라도 우리는 그에 대해 답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우리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존재이듯이, 그렇게 우리가 우리 공동체의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을 때, 공동체가 이룰 수 있는 그 경이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윤로

독산고등학교 학부모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 고령 인구(65세 이상)는  610만여 명으로 전체 인구의 12%가 넘어서고 있다고 한다. 바야흐로 고령화 사회로 넘어 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고령사회란 인구 중 노인의 비중이 일정 비율 이상이 되는 것으로 나라의 경제사정 호전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긍정적 현상으로만 받아들일 수가 없다. 노인 비율이 높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젊은 층의 인구 감소가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이고, 그런 사회는 생산성 문제에다 노인복지예산 수요조차 늘어 국가살림에 주름살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이라 당사자인 노인들은 자신의 장수(長壽)가 미안하기조차 하다. 이래저래 고령 사회는 걱정이 많다.

그러나 고령사회는 사회의 선(善) 흐름으로 받아들여 필요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생애의 긴 시간을 가정과 사회에 봉사하며 쌓은 연륜이고 이제 그 뒤 끝에서 보람을 보게 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이를 보장하여야 한다. 노인들이 많아지는 것은 국가의 자랑이지 경계하여야 할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고령사회가 되는 것은 노인들의 책임이 아니지 않는가?

나라의 경제사정이 나아지면서 노인복지제도가 활발하다. 기초생활의 보장은 물론 건강부문도 향상되고 있으며 문화생활의 기회도 넓어지는 등 노인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노력들을 볼 수 있다. 바람직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긍정적 포인트는 한계를 가진다. 여러모로 노인들을 챙기고 있지만 아직도 채워야 할 공간들이 많다. 예를 들면 가족 관련 법령의 경직적 운영으로 열악한 삶에도 기초노령연금과 같은 사회보장 제도 밖에 있는 노인들이 있는가 하면, 물질적 지원도 완전하지 않은데다 정서적 어려움에 방치된 노인들도 있는 것이 그런 사례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당국이 알고 있고 개선점을 찾고 있지만 아직은 만족할만한 결과를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 이밖에도 챙겨야 할 사각지역은 여러 부문에 산재한다.  

사각지대라 하기는 좀 그렇지만 가까운 곳에서 노인들의 불만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경로당 운영행태이다. 경로당은 우리사회가 풍요해 지기 이전부터 있었던 아름다운 사회공동체적한 모습으로, 갈 곳이 마땅하지 않거나 생활 속의 삶이 고단한 노인들이 즐거움이나 위로를 구할 수 있는 곳이다. 이런 긍정성으로 마을 곳곳에 경로당을 열어 노인들의 욕구를 감당하고 있는데 이것이 운영에 문제점을 가진 곳이 많다. 경로당은 그 공간이 위치한 주변의 노인들이라면 누구든지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다른 자치구는 살펴보지 못해 알 수 없지만 금천구에는 이런 경로당, 즉 주변에 사는 노인들이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경로당들이 있고 그런 현상은 오래전부터 지속되고 있는데도 경정되지 않고 있다. 이런 사실은 구청 당국자들도 알고 있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고들 한다. 참으로 딱하다.

경로당은 가고 싶은 노인들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이는 아파트 단지와 같은 사적 영역의 곳은 적용하기는 그렇지만 그런 곳도 오는 이웃노인들을 못 오게 하는 야박함은 우리 미풍양속에 어긋난다 할 것이데 하물며 공공시설인 경로당에 가고 싶은 노인들을 못 오게 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경로당을 선점한 노인들이 뒤에 오는 노인들을 못 오게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공간이 비좁아 사람들이 많으면 모두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으로는 경로당의 설치의미를 살릴 수가 없다. 노인들이 무료함을 달래고 위로와 평안을 구하고자 오는 곳에서 따돌림에 다름 아닌 소외를 맞게 되니 그렇다. 못 오게 하는 선점 노인들을 비난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가 그래서 나온다. 

그렇지만 이런 현상을 그대로 두는 것도 정상이 아니다. 우선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헌법취지에 어긋난다. 자유민주주의 공동체에서 지켜야 하는 핵심가치는 형평성이다. 국민들은 사회적 신분에 불구하고 법과 제도 밖에서 차별을 받는 일이 없어야 한다. 국가는 이를 챙겨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녹녹치 않다. 비정상을 해소하려면 경로당의 수를 늘려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회적 약자인 노인과 관련된 것을 그대로 두는 것도 문제다, 방법이아 전문가들의 몫이겠지만, 공공 경로당의 경우 순환제로 하면 어떨까 싶다. 즉 시간(오전, 오후)과 요일을 나누어 지역(통, 반)을 할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용할 수 있는 다른 공공 공간을 활용하여 공급을 늘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물론 이는 근본적 해결방안은 아니지만 현재의 비정상을 완화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적을 때 해결방안은 공급을 늘리는 것이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 대안은 “나눔”이다. 내 몫을 조금씩 내 놓으면 수혜 대상이 늘게 된다. 발상을 바꾸면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해결책을 만날 수 있다. 

차제에 경로당 문화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경로당의 이미지는 단순하다. 노인들이 모여서 장기나 바둑을 두고 화투치기로 무료함을 달래는 곳 정도다. 그것이 좋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보다 건강한 곳이면 어떨까 하는 의견이다. 유의할 것은, 이런 문화는 현재와 같은 배타적 모습이 있게 하는 원인이 된다. 경로당 붙박이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살펴보면, 경로당 이용 노인들은 아침에 가서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수가 많고 결과적으로 특정 소수가 독점함으로 공급 부족현상을 초래한다.

경로당에 노인들을 위한 정서적 신체적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 운영을 해야 한다. 취미나 건장증진에 더해 일자리면 금상첨화다. 어떤 프로그램이 좋은가는 전문가의 몫이다. 다만 첨언을 하면 “나눔”을 이해하는 프로그램이면 좋겠다. 나눔은 우리민족의 미풍양속으로 그로써 공동체가 화합한 역사들이 있다. 그리고 노인들을 사회적 약자로 두기 이전에 사회의 원로로서 역할을 주문하는 것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럴 때 노인들은 몸소 나눔 실천 동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신설되는 경로당이 있다고 한다. 이곳은 “나눔”을 볼 수 있는 경로당이기를 기대한다.(♣2015.09.21)

                                       장제모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하

고 있으며 다양한 마을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치면서 약자와 빈자들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비정상적 정치를 하는 것이 현 정권이다. 원체 집권부터 관권 부정선거를 한 비정상적인 정권이라 그런지 국민행복이 재벌행복이라 믿는 이들이다. 국민행복이 빈부격차의 극대화, 서민생활의 파탄이다. 최근에는 노동개혁을 한다고 한다. 노동개혁은, 또는 노동자들은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개혁의 수혜자여야 한다. 하지만 현 정권은 수백조 재벌 곳간은 더욱 채우라 하면서 평생 근속한 땀의 대가이자 허리띠를 졸라매면 빛 볼 날 씨종자인 퇴직금마저 털어 먹자고 나선다. 퇴직금을 임금 피크제 전에 정상하면 3천만 원 이상 이익이라 하는 보도를 봤는데, 그것은 외려 손실액을 말한다. 정언유착과 종편 패악에 의해 이제 사기꾼의 언어가 정론(正論)이라 한다. 그래서 말이 바로서야 하는데 세상 참말로 망조다. 


이런 기괴한 현상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동북아에도 태풍처럼 몰아치고 있다. 대통령의 방중을 둘러 싼 외교 관계도 비정상의 정상화가 판을 친다. 그들의 명분도 이른바 일상국가 정상국가 관계로의 전환이다. 남북에게 일본과 중국이 보여주는 모습이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수정을 하자는 것이다. 


당장 발등의 불은 일본의 정상국가화 모습이다. 일본의 2차 대전 이후 체제는 좋게 말하면 전쟁을 포기한 평화헌법 체제다. 하지만 그 속내는 2차 대전의 패배에도 천황제를 유지하며 경제적 부흥을 가능케 한 미국의 기지국가 체제다. 그러니 일본으로서는 패전국의 멍에를 벗고 국제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확보하는 전후체제의 탈각이 절실하다. 그런 표현이 “일본의 정상국가화” 주장이다. 하지만 이것은 한반도에서는 그동안 전범자이면서 반성도 생색만 내는 일본이 노골적으로 전쟁 침략을 하는 국가로의 전환, 즉 군국주의로의 복귀로 들린다.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대일 대한반도 정책은 기만의 극치다. 그들은 처음부터 한반도의 독립은커녕 일본의 자본주의적 체제로의 온존과 한반도의 분단을 획책했다. 영토를 분할한다면 당연히 일본 본토가 되어야 하는데 한반도의 허리가 잘린 진정한 이유다. 그러면서 전범국가 체제 유지를 전제하데 침략을 하지 않겠다는 국제적 약속이자 핑계가 바로 평화헌법이었다. 만약 일본이 제대로 정상국가화를 하려면 천황제를 먼저 단절해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결국 일본의 비정상의 정상화는 역사로부터 성찰 없이 군국주의만 하겠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정상적 국가 관계론은 북중 관계이다. 시진핑 옆자리에 선 대통령의 외교적 승리를 찬양하는 언론들을 보면 저 뼈 속까지 분단 적이며 사대적인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난다. 시진핑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는 것에 환호하는 모습이 바로 사대주의 속성이다. 하여튼 북중 관계가 좋지 않다. 그럴 수 있다. 북도 중도 자기들의 나름의 행보가 있고 이것이 충돌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 눈엔 노무현 정권 때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마치 세상 망할 것처럼 난리를 치던 한국 언론과 비교하면 의연한 북 중이 부럽다. 북 중 사이가 안 좋은 것은 북한이 중국의 의도대로 하지 않고 부딪쳤기 때문이다. 전략 핵무기의 문제, 장성택 처형과 함께 부정부패의 고리로 중국 통들의 퇴진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실제 중국은 북한의 경제적 개발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존심과 고집만 센 북한의 모습이 항상 거북했다. 그렇지만 북 중은 혈맹이다. 한미처럼 한쪽을 은인이라 생각하는 일방관계가 아니다. 항일 항 국민군 투쟁에서 먼저 피를 내 준 것은 북이다. 그 독특한 역사가 “혈맹”이라 불렸다. 하지만 체제 대립 체제에서 이른바 G2라 불리며 세계를 경영하려는 중국에게 북과의 특별한 관계는 부담스러운 일로 되었다. 그래서 북은 그 동안 해온 양국 간의 관계의 연장으로 대우와 요구를 하지만 중국은 북 중도 다른 나라와 다를 것 없는 일반적 관계로 전환시키자고 한다. 이것이 또 다른 중국의 북에 대한 비정상의 정상화다.


중국의 전승절 전후한 동북아의 외교전의 승자는 당연 시진핑이다. 미국이 반대하는 방중을 관철시켰다. 그것은 중국의 위상이 미국의 가장 쉬운 통제 국가 한국을 미국의 반대에도 방중을 관철시킨 실제적 힘을 가지고 있음을 과시했다. 남한도 돈독한 효과를 받았다. 무엇보다 한중일 정상회담의 연결고리로서 역할은 눈부시다. 미국은 떨떠름할 것이고 북한은 자기들만의 우려와 걱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면 일본과 중국의 정상국가화 담론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일까?

 

일본의 변화는 그들의 경제적 침체와 함께 해서 더욱 위험하다.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부추기는 미국의 의도도 수상하다. 마치 카쓰라테프크조약이 부활하는 느낌이다. 왜냐면 그들의 추구하는 중심관계가 한미일 군사 동맹체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남북한의 분단과 준전시체제의 영구 유지를 말하는 것이고, 중국을 전략적으로 포위 하려는 새로운 군사적 대립체제의 심화를 말하기 때문이다. 어떤 조건에도 적어도 동북아와 한반도의 평화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방향이다. 


중국의 변화는 북에게는 배신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일본의 역사적 수정이 과거로의 복귀라면, 중국의 역사적 수정은 냉정한 국익론의 연장이다. 이 두 가지 다 국가주의적 책략이 있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에게 패권적인 모습이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역사적 외교적 수정은 동지가 아니라 경쟁자, 상위 중개자가 되겠다는 선언이고 그것은 북한 체제에 대한 모독이 된다. 물론 북미간의 군사적 대립에서 중국이 남한과의 관계를 이유로 중립자가 되는 것은 북한으로서는 유리할 것이 없다. 하지만 북은 북의 힘으로 체제와 평화를 지켜온 만큼 또 다른 차원에서 일본과 중국의 움직임을 읽고 대처할 것이다. 그 와중에 얼굴마담으로 왔다 갔다 하다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해 한국의 자주적 외교의 새로운 차원에서 모색이 필요하다. 외교와 통일을 그저 국내 쟁점 회피와 지지도 올리기로 좁히는 남한의 현실에서 막막한 기대지만 말이다.  



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센터장



여운이 생각보다 오래간 책 한 권...그림책은 왜 이렇게 다양한 매력을 주는지. 웃기는것 웃기는대로, 심각하고 진지한건 또 그 나름의 매럭이 있다. 오래전부터 함께 공부한 사람이 중국으로 이사를 갔는데 얼마전 카톡으로 <마지막 거인>을 소개했다. 아이들과 함께 봤는데 성인으로 성장한 아이들이 아직도 이 책 이야기를 한다고.

이 책을 도서관에서 찾는데 분명 아무도 빌려가지 않았다는데 책이 없었다. 몇 번을 뒤진 끝에 큰 책들 사이 안쪽에 박힌 듯 한 권의 책이 손에 들어왔다. 그 작은 책이 <마지막 거인>이다.

180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지리학자인 아치볼트가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한 늙은 선원에 게서 거인의 이를 사게 된 그는 거인들이 살고 있다고 추정되는 곳으로 탐험을 떠난다.

어려움끝에 혼자 살이남은 그는 드디어 거인들을 만나는데 그들은 아홉 명의 남녀 거인으로 피부가 마치 이야기를 하듯 만물의 영향을 받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피부에는 문신과 같은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에는 그들이 생각하거나 사랑하거나 하는것들이 담겨있다.아치볼트가 그들과 함께 지내며 친구가 되자 아름다운 거인 안탈라의 등에는 아치볼트의 모습이 저절로 새겨진다. 이들이 하늘의 별을 향해 부르는 노래는 정말 아름다워서 천상의 음악과 같았다.

하지만 인간의 세상으로 돌아온 아치볼트는 거인들을 세상에 알렸고 다시 거인의 거취를 찾아들어간 그가 본 것은 아름다운 거인 안탈라의 잘린 머리였다.

아치볼트는 모든걸 버리고 거인들과의 우정을 배신했다는 자책에 세상을 떠돌게 된다.  몇 번을 계속해서 읽고 그림을 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거인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정말 작은 크기라 자세히 보려면 오래 걸린다. 책이 수줍은 듯 숨어있는듯 보인다. 글이 좋기도 하지만 이 책은 그림책이다. 그림이 없이는 그 느낌이 살질 않는다. 특히 거인들을 묘사한 그림들은 정말 아름다워서 지독한 근시인 난 안경을 벗어놓고 천천히 보고 또 보게 된다. 모든 것을 피부에 담고 사는 거인들, 별을 향한 그 노래의 울림이 아름답고, 무엇보다 낯선 작은 사람을 잘 보살피고 친구가 되는, 그래서 헤어질때에도 그 큰 눈으로 눈물을 흘리는 거인들...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알려지고 난 결과는 아름다운 거인의 잘린 목  그것이다. 


사람처럼 어리석은 것들이 또 있을까. 사람만큼 이기적인 것들이 또 있을까

거인이 '자연'을 뜻한다는 단순한 분석도 일리가 있겠다. 하지만 인간이 배신한 것이 어디 자연 뿐이겠는가. 사람답게 사는것, 남을 배려하는 것, 따뜻한 마음을 갖는 것, 다른 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것, 그리고 진정한 노래를 부르는것...거인들의 행동은 모두 인간이 잃은 그 무엇인 것이다.

휴~~왜 이리 이 책이 마음에 걸리는지, 여운이 이토록 오래 가는지 그래, 모르지 않는다. 난 알고 있다. 나도 거인을 배신하고 있음이 틀림없는 것이다.

                                2015.9-1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동화 읽는 어른모임

   2014 인문책 쓰기 동아리11명의 독산고등학교 학생들의 엮은 산문 모음집 중 홍승원 학생의 글을 소개합니다


  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가면 엄마가 나를 반겨주신다. 어느새 11월 중순, 엄마는 쌀쌀해진 날씨로 차가워진 나의 손을 감싸며 따뜻한 이부자리로 들어오라는 듯 팡팡- 곁을 두드리셨다. 전업주부이신 엄마는 내심 늦게 들어온 딸내미가 반가우셨던 모양이다.

  오늘은 공부를 열심히 했냐고 물어보시는 엄마의 말씀에 웃음을 흘리며 말을 흐렸다. 나를 향해 눈을 흘기시는 엄마께 내일부터 열심히 할 것이라며 애교를 부렸다. 엄마는 ‘나는 어렸을 때 하고 싶어도 못 했어!’ 라며 내게 핀잔을 놓으셨다. 왠지 모르게 엄마의 표정에서

아쉬움이 잔뜩 묻어났다.

“엄마는 어렸을 때 공부를 할 기회가 별로 없었나요?”

  엄마는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물어보시냐며 당황해 하셨다. 사실 나도 당황했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옛날부터 부모님이 어떻게 살아 오셨나 궁금했던 나이기에, 이번이 내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글쎄……. 어렸을 적에는 오히려 공부할 기회가 많았지.”

“어렸을 적? 그럼 커서는 공부할 기회가 적었나요?”

“그렇지. 이 얘기를 하려면 많은 얘기를 같이 해줘야 하는데…….”

“해 주세요, 너무 듣고 싶었어요!”

  다소 적극적인 나의 반응에 엄마는 당황하시다가 이내 웃으시며 ‘어디서부터 얘기해줘야 하나’ 라고 하셨다. 당신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주시니 내심 기쁘셨나 보다.

 “내가 어렸을 적에 너희 외할아버지가 사업을 크게 하셔서 상당히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단다. 그 당시 잘 볼 수 없었던 냉장고라든지 세탁기와 같은 가전제품도 집에 있었는데, 가끔 친구들이 집에 오면 이게 무엇을 하는 기계냐고 물었어.”

“그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기분이 어땠냐고? 참 당황스러웠지. 어렸을 때 난 모두가 그런 생활을 하는 줄 알았거든. 또 개인 교습으로 영어, 피아노, 발레, 미술 등 다양한 수업을 받았는데 내가 다방면으로 재능이 있었나봐, 하하. 경향신문 미술 대회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고, 항상 발레 선생님한테 잘 한다고 칭찬을 받았거든. 그래서 그런지 당시에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했어.”

“왠지,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엄마가 그림도 잘 그리고, 피아노도 잘 치셔서 신기했어요! 어렸을 적에 공부할 기회가 많았다는 것이 그런 뜻이었나요?”

“그렇지. 하지만 제 2차 석유 파동으로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지자 배우던 것을 몽땅 할 수 없게 되었단다. 또한 어린 나이였지만, 많은 생각을 했어. 우리 집이 잘 살 때 나를 대하는 태도와 판이하게 달라진 게 눈으로 보였거든. 당시에는 그게 무섭기도 하고 서럽기도 해서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어. 그 때 아마 나는 ‘돈은 사람에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그래서 너희한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라고 하는 거란다.” 

“그럼 그때부터 공부할 기회가 적어지신 건가요?”

 “응. 집이 어려워지고 나는 인문계 진학을 포기하고 실업계 고등학교로 갈 수 밖에 없었어. 하지만 착실하게 자격증을 따고 졸업할 때 즈음 은행에 취업을 했지. 교대를 가고 싶었지만 그 때 아버지가 편찮으시기도 했고 미국에서 생활하는 오빠의 생활비를 보내줘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어. 그래도 공부에 대한 꿈을 접어놓고 열심히 일하다가 동생이 학자금 대출로 대학을 갔단다. 공부를 하고 싶은 만큼 하지 못한 아쉬움도 컸고, 나도 학자금 대출이 있었다면 대학에 갔을 텐데 하는 생각에 상실감이 컸었어.”

“그 때 당시 힘드셨을 텐데 그럼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내가 한창이었을 때, 고속버스에서 넘어질 뻔 했어. 그걸 어떤 잘생긴 남자가 잡아줬거든. 

그게 너희 아빠야. 그 때를 계기로 서로 대구 사는 것도 알게 되고, 전화번호도 교환하고,

그러다가 연이 닿아서 결혼하게 됐단다. 결혼하면서 기댈 사람이 생기고 너희 언니도 낳고 

하면서 저절로 이겨낸 것 같아.” 

“그럼 결혼하시고 은행은 그만두셨어요?”

“그만뒀지.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너희 아빠 때문이기도 했고, 우리 큰딸이 일찍 생겨서 어쩔 수 없었어.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일을 계속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대다수의 여성들이 결혼하면 자신의 일을 포기했던 보수적인 분위기와 은행에서 얻을 수 없었던 성취감 때문에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랬던 것 같아.  시간이 지나고 오빠도 낳고 너도 낳고 보니, 문득 내가 하고 싶은 걸 했던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물론 너희들이 크는 모습을 보며 기뻤지만 나는 공부도 더 하고 싶었고, 할 수 있었다면 우리 딸내미들 데려다가 모델로 세워놓고 쇼핑몰을 운영해 보고 싶기도 했었거든. 하지만 현재는 지금 우리 큰 딸, 아들 모두 성인으로 잘 자랐고 작은 딸내미도 잘 자라고 있어서 참 뿌듯함을 느껴. 그냥 나는 신문이랑 책도 많이 읽고, 나중에 너희랑 같이 공연도 많이 보러 다니고 여행 다니고 하면서 다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나중에 엄마랑 같이 여행 다녀야해, 우리 딸?”

   나는 마지막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빠가 돌아오셨다는 것을 알리는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아빠께 다녀오셨냐는 인사를 드린 후 씻고 나오실 때까지 천천히 기다렸다. 아빠와는 평소 이야기를 해본 적이 거의 없지만, 오늘 엄마와 했던 것처럼 용기내서 아빠와도 대화를 해보려고 한다. 그 때 달칵 하고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는 어떤 어린 시절을 보내셨나요?”

  다짜고짜 질문을 던지자, 영문을 모르시는 아빠께서 엄마를 쳐다봤다. 글쎄 오늘 얘가- 하며 말문을 여시는 엄마. 이야기를 모두 들으시고 아빠는 뭐 그런 걸 물어보시냐며 쑥스러워 하셨다. 하지만 평소에 말을 하지 않는 무뚝뚝한 딸이 당신의 이야기, 당신의 삶에 궁금증을 느낀다는 사실을 대견스러워 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아빠도 천천히 말문을 여셨다.

“사실 나도 너희 엄마처럼 어렸을 적에는 집이 부유해서 편안한 생활을 했어.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쯤 우리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그 뒤로 쭉 어려운 시절을 보냈지. 가끔씩 너무 어려울 때는 육성회비를 못 낼 때도 있었단다. 그 때 그 시절이 너무 힘들기도 했고, 어마무시하게 우리 어머니가 많은 고생을 하셔서 그 때부터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부모님께 효도 해야겠다.’ 라는 생각을 한 것 같아. 그래서 공부를 계속하려고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돈을 빨리 벌기 위해 학업을 그만두고 일을 찾게 되었단다.”

“그럼 공부를 계속 하셨다면 무슨 공부를 하고 무슨 일을 하셨을 것 같아요?”


“음, 사실 나는 상경계열을 전공해서 고시를 보고 싶었어. 하지만 안 그래도 좁은 집에 형제들도 많아서 제대로 공부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고, 경제적 여유도 없어서 일을 시작해 대학교에 다닐 시간도 없었단다.”

“일을 하시면서 제일 힘들었던 점이 무엇인가요?”

“멀리 타지에 가서 가족과 떨어져 일을 했는데 연말이라든지, 몸이 아플 때라든지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더라. 결혼하기 전까지 그런 생활을 지속했어. 그땐 제대로 교통도 발달되어 있지 않았고 임금수준도 낮아서 찾아뵙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거든. 그래서 결혼하면 아이를 많이 낳을 것이라는 다짐을 했지. 결혼 후에 아이를 낳고 너무 바쁘게 일했지만 내 자식들이 그걸 알아주지 않을 때, 서운함을 느껴. 하지만 내가 바쁘게 일해서 너희가 원하는 만큼 교육받고 공부할 거란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좋아. 현재는 딱히 너희한테 바라는 건 없어. 그저 맏딸, 아들은 좋은 일 있었으면 좋겠고 작은딸은 빨리 컸으면 좋겠어.”

  대화를 끝내고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렸을 적, 고집스러운 막내딸이었던 나는 ‘우리 부모님은 과연 나를 사랑하실까’ 하는 발칙한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자란 지금, 당신들의 넘치는 사랑에 괜히 벅차오르는 걸 느낀다. 

부모님 세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힘들었던 세대이다. 자식들에게 자신의 고생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부모님들은 자신의 청춘을 태워, 우리의 세상을 밝혀주기 위해 항상 참고 열심히 일하실 뿐이다. 자식들이 조금만 부모님이 살아오셨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현재 자신의 삶에 만족하게 되고, 그들을 더욱 이해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한다. 

  나는 앞으로 부모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해주셨던 것처럼, 부모님을 제 0순위로 생각하며 살아갈 것이다. 우리 형제들을 위해 젊음을 불사른 엄마, 아빠가 내 눈에는 제일 아름답고 멋져 보이는 밤이었다.


독산고등학교 

                                    홍승원 











취재를 나갔을 당시는 한참 찌던 여름이였는데요. 어느새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되었습니다. 금천구청 로비에서 뵌 김혜숙 대표님께선 첫 취재라 잔뜩 긴장해서 쭈뼛쭈뼛 다가간 저를 상냥하게 맞아주셨습니다 ( 직접 시원한 녹차까지 내주셨어요 )


Q1.간단한 소개 부탁

민들레워커 협동조합의 대표를 맡고 있는 김혜숙 이라고 합니다. 여자구요(ㅎㅎ)사실 조합의 이름에 민들레가 들어가면 1차 산업과 관련된 곳이라 착각하시는 분들이 간혹 계셔서. 민들레추출물이나 가공된 거 뭐 있냐고 전화주신적도 있어요. 저흰 그런 사업을 하는게 아니고 민들레 꽃 하나에 200개의 새로운 꽃송이가 들어있다고 해요. 그만큼 많은 씨앗을 널리 퍼트린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민들레에 네트워크의(network)의 워크, 함께 일하는 사람의(worker), 함께 걷는 사람의 (walker) 같이 복합적인 의미의 워커를 붙여서 민들레워커 협동조합 이라고 합니다.

 저희의 비전은 행복한 3터 만들기에요. 3터는 사람이 살아가는 터, 즉 일터,쉼터, 삶터를 말해요. 그 세가지 터가 모두 행복할 수 있도록 조합원 모두가 노력하고 있고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가진 행복을 공유하자-를 슬로건으로 삼아서 ‘희망의 경작자 행복의 공유자’ 민들레 워커협동조합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Q2.‘민들레워커’하면 ‘암탉 우는 마을’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하는데요. 둘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제가 원래 민들레워커를 만들기 전부터 숲지기 강지기라는 환경단체에 속해 있었어요. 숲지기 강지기는 취약계층한테 환경교육도해주고 환경적으로 취약한 곳에 가서 환경개선도 해주는 단체인데 2011년도에 시흥5동이 독거노인들도 많이 사시고 환경적으로 상태가 좋지 않다고 들어 두 달가량 모니터링을 시작했어요. 골목은 사람한명도 다니기 힘들만큼 비좁고 어두웠고 금간곳 깨진 곳은 한참동안 방치되 있는데다 3~40년은 된 폐자재랑 쓰레기들이 묻히다 못해 쌓여있는 실정이였죠.


처음에는 몇 십년동안 이런 것을 어떻게 바꾸느냐 방관하시던 주민 분들도 사람들이모여서

쓰레기를 치워내고 돌을 나르고 하니까 마음을 열어주시고는 동참해주셨습니다. 그 후엔 학생 자원봉사자들도 와서 벽화도 그려주고 식물도 심고 함께 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꾸준히 진행했더니 어느새 살기좋은 곳으로 탈바꿈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일자리를 나눌 수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통 경력 단절된 여성들이 곧바로 일에 복귀 할 만큼 믿을 수 있는 건 자기의 손 재주더라구요.마침 저희 숲지기 강지기가 리싸이클물건 만들기 교육을 5,6년 동안 해온 경험이 있었어요, 기술들은 나눌수록  쌓이는거지 사라지는게 아니잖아요. 그 기술들과 생각을 바탕으로

암탉 우는 마을의 할머님들과 지역여성분들이 함께 모여서 민들레워커 협동조합을 만들게 된거죠.


 Q3.상품의 종류가 굉장히 다양해요. 제작과정이 어떻게 되나요?

저희제품이 전부 수공예품이니까 엉성하면 안 되거든요.일단 조합원 분들께 모든 기술을 교육해드리기 때문에 전부 하실 수는 있으세요. 염색이나 재봉 같은 것들 전부다요. 처음에는 다 비슷비슷하지만 몇 달가량 지나면 각자의 솜씨가 발휘되는 분야들이 파악되거든요. 특히 염색을 잘 하시는 분, 손바느질을 잘 하시는 분- 그러면 이제 이 분야는 이 분이, 저 분야는 저분이 이런 식으로 역할 분담을 하고 있어요

제작은 공방에 모여서 같이하는 경우도 있고 여러 제작 단계를 필요로 하는 물품의 경우엔 나눠서 집에서 해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원예는 저희가 취약지에 나무도 심고 양로원에 실내정원을 만들기도 하면서 절로 익히게 된 기술이에요. 여기 금천구청 지하에있는 수세미도 저희가 한 거에요. 관리도 암탉 우는 마을에 계신 할머님들이 계속 해주시고 계시구요. 오늘아침에도 들렸다 가셨어요.


Q4.판매루트나 손님관리는 어떤 식으로 하고계신가요?

판매만하는 항시 오프라인 매장은 따로 없구요. 보통 온라인을 이용하고 있죠. 주문하셨던 상품을 찾아가시기도 하십니다. 최근에 서울시 마을기업연합회가 생겨서 작년부터 마포늘장이나 시민청같은 공동매장에 참여하고 있어요. 사실 그런 장터에 참여하는 것은 거리문제도 있고 수익적인 측면과는 멀지만 조합의 홍보나 함께 한다는 것에 더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오늘같은 구청판매행사도 한달에 두 번 둘째,넷째 주 수요일에만 나오는데 근 한달간은 메르스 때문에 판매장을 열지않다가 오늘(24일) 처음 나온 거에요. 게다가 장소가 구청이다보니 구청에 사람이 많이 오가는 날엔 수익이 많고 적은 날엔 적고, 날씨에도 좀 민감한편이라 수익이 고르진 않은편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지역 여성들이 모여서 워커즈를 열수있다는 것을 보여줄 기회도돼구요 교육을 받으러 찾아오시는 주민들도 간혹계십니다.

또 저희는 한번 구매 하신 분들은 좋은 소재를 쓰시는걸 알기 때문에 단골 손님 분들이 계셔서 올해부턴 민들레워커 통장을 개설해서 구매 하실 때 마다 포인트를 적립해 드리기도 합니다

 

Q5디자인중에 새가 많이 나오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아무래도 암탉 우는 마을과의 관련 때문에 우선 암탉들을 많이 디자인하는 편이죠 (ㅎㅎ)또 저희 제품 소재들이 친환경적인 것들이 많기 때문에 이왕이면 자연을 넣자 해서 숲이나 나무를 넣다보니 자연스럽게 새들이 많아진 것 같네요. 

Q6.위기가 있었던 적이 있나요?

다들 사업이 진행되면 3년째가 가장 힘들다고 얘기들 하는데 저희가 올해가 딱3년째에요. 지역의 문제점을 해결하기위해 노력하는 기업을 마을기업이라고 하잖아요. 비록 남는 것은 적을지라도 일자리를 나눠서 즐겁게 일하기를 유지하는 것이 저희들의 목표인데, 그러려면 인건비가 가장 중요하죠. 물건자체가 수제품이라 대량생산이 힘든 면도 있지만 수요가 있으면 공급자체는 얼마든지 할 수 있거든요, 더 많은 사람들이 만들면 되니까요.

하지만 대량생산품들보다 가격이 높아서 그런지  이것이 더 좋은 것 인줄은 아시는데 막상 사는 것은 망설이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 인식들이 조금 힘들고 사업을 계속해서 유지해나가는 것이 겪고있는 위기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Q7.힘든 위기가 있었다면 이번엔 기억에 남는 좋았던 순간이요

막 이렇다 할 만한 사연이나 그런 건(ㅎㅎ) 잘 모르겠지만 사업을 하면서 남는 것이 있으면 조금이더라도 지역에 있는 아이들을 도와주기도하고, 이번 경우엔 지역에 아토피를 심하게 앓고있는 아이가 있어요. 아토피는 좋은걸 먹여야하는데 아이가 할머니랑만 살아서 약값이나 병원비만 해도 비싸니까 좋은걸 먹이기 힘드시잖아요. 그래서 생협에 좋은 식재료들 잉여분이 있으면 지원해 줄 수 있을까 연락을 넣어본 상태구요. 그 외에도 다른 기관에서 지원받아야할 아이들이 있나 물어오면 연계해주는 역할도 하고 있어요. 그런 일들을 계속 할 수 있는 것이 저희들의 즐거움인거죠


Q8.마지막으로 앞으로의 목표는 뭔가요? 

저희 자체매장을 갖는 것이 목표에요. 공방에서 판매도 같이하고 있긴 하지만 그런 곳은 아는사람만 오고 새로운 소비자들을 만나는 게 어렵잖아.요 길거리에 있는 가게들처럼 가볍게 들러서 ‘아, 이런 걸 파는 곳도 있구나’ 하기도 하고 민들레워커자체도 알리기 쉬워지니까요

 또 다른것으로는 꾸준히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을 개발하는것입니다. 일명 킬러상품이라고하죠

현재로서는 약50종정도의 상품이있는데 그 종류를 줄이고 저희만의 매력적이고 독자적인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요. ‘민들레워커하면 ooo‘ 할만한 상품이 없는 거죠. 주력 상품이 생긴다고해도 금방 카피가 될 테니까 계속 고민해야할 중요한 과제죠. 아마 만들게 된다면 생태계와 관련된 쪽으로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요. 결국 최종적인 목표는 사업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이 되겠네요 플러스가 아닌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가 되는게 저희의 이상향이에요 플러스가 되면 그만큼 사람을 더 고용해서 제로로 만들고, 눈에 보이는 결과는 제로더라도 저희에겐 제로가 아니게 되는거니까요


인터뷰를 마치자 손님들이 오셔서 상품들을 친절히 소개해주시는 대표님을 보며 저도 틈바구니에 살짝 껴서 부엉이 한마리를 분양받았습니다. 같은 디자인의 부엉이더라도 안에 들어간 천의 디자인이 전부 제각각 이기 때문에 따로 주문제작을 넣은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 하나뿐인 물건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꼭 자체매장이 생겨서 더 많은 사람들이 민들레워커의  예쁜 수공예품에대한 매력에 빠졌으면 좋겠습니다.


금천사회적경제지원센터에서 만드는 뉴스레터의 기사를 협의해 

공유합니다.

우리(금천)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대체 우리(금천)의 발전이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그런 물음은 있었는가? 


인간은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묻는 존재이다. – 하이데거

나만 그렇게 느끼는지는 모르겠다. 뭐냐면 아역배우가 연기하는 것을 보는 데는 불편함이 없는 데, 2-30대 연기자들을 보노라면 꼬집어 말하긴 그래도 왠지 어색하고 답답하다. 그러다 4-50대 이상의 연기자들을 보면 어떨 때는 감탄사까지 나올 정도로 대단하다 느낄 때가 많다. 왜 그럴까? 나는 그 중 하나가 사회적 평판에 대한 예민함 때문이라 생각한다. 말하자면 아역은 부모와 사회의 울타리가 있기 때문에 사회적 평판에 그다지 눈치를 보지 않고 극중인물에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지만, 그에 반해 20대는 극중인물에 대한 몰입보다 사회적 평판에 보다 염두를 두다 보니 때로 오버도 하게 되고, 때로는 경직되어 어색해 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비로소 평판의 덫에서 벗어난 중년의 연기자가, 작가의 의도를 넘어 오히려 극중인물을 재탄생 시키고 승화 시키는 것 같다. 

인간에게 평판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인간은 사춘기를 넘어가면서, 주변의 평가에 아주 예민해진다. 이성에 눈을 떠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서라는 생물학적 견해는 둘째치고, 생존 그 자체를 위해서라도 평판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수 만년 동안 인간은 혼자서는 사냥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함께 사냥하는 동료집단에 참가하기 위해서라도 인간은 더 용맹한 척 해야 했고, 분배에 있어서는 좀더 너그러운 척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굳이 사냥뿐만 아니라 농사도, 잦은 재해와 외침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인간은 협력할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평판은 수 만년 동안 공동체를 유지해올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부족사회에서 추방은 곧 죽음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은 때론 이기적이고 악하더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눈에 이기적이지 않고, 악하지 않은 위선으로 가장할 필요가 있었다. 좀 더 겸손한 척하고, 아량이 넓은 척하고, 보다 더 친절한 척하는 이런 행위는 단순히 개인의 생존을 넘어서, 하나의 부족사회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에 빠지지 않고 나름 평화를 유지하게 했을 요소였다. 이렇게 평판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 요소였다. 오죽하면 지금도 잠을 자다가 누가 내 이야기를 하면 귀가 번쩍 뜨이고,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남들의 뒷담화엔 부쩍 과민해지지 않던가? 조선시대 사관이 끈질기게 왕의 행실을 기록한 것도, 왕으로 하여금 역사라는 평판에서 자유롭게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권력자의 자의적인 행위나 일탈행위를 규제하기 위함 이었다. 여담이지만 정치인은 이런 평판이란 덕목을 먹고 산다. 철학자나 과학자가 누구와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와 사실이라는 영역에서 존재한다면 정치인은 바로 이런 평판이란 영역에서 존재한다. 그러다 보니 별 시덥잖은 언론사 기자도 정치인들의 그런 점을 알고 때론 협잡하기도 하면서, 기껏 공적 권력자와 맞먹었다고 우쭐대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동체를 유지시켜주는 사회적 평판의 유의미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평판은 한 개인의 본유, 즉 본질적 삶에 대한 자각 자체에 대한 의문조차 제기하지 못하게 하며, 자기의 본유적 삶, 주체적 삶을 찾고 영유케 하는데 방해를 하기도 한다. 루소는 그의 저서 “불평등기원론”에서 사회적 평판이 사적 소유와 함께 인간사회의 불평등이 나타나게 된 요인이라 하였다. 그는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세상의 평판을 보다 중요시하고 자기보다는 타인이 판단해 주는 것에 오히려 행복을 느끼고 만족하게 되었으며,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타인의 판단에 의거하고 있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인간은 언제나 수많은 철학과 고매한 격언, 그리고 인간애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언제나 “우리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타인에게 던지되 스스로에게 묻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기만적이고 경박한 외관, 지혜 없는 이성 그리고 행복 없는 쾌락만을 낳게 되었는가라고, 그것은 결코 인간의 본원적인 상태가 아니라고 힐난하였다. 다른 차원이지만 공자 역시 사회적 평판에 대해 바라보는 눈은 비슷하였다. 공자는 사회적으로는 누가 보아도 아주 그럴듯한 존재인, 사회적 평판으로만 똘똘 뭉쳐있는 향원을 가장 경계했다. 공자는 향원을 물불을 안 가리는 광자나 극도로 소심한 견자보다 오히려 군자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하였다. (지면관계상 향원, 광자, 견자에 대한 설명은 “맹자의 향원”을 검색해 보길 바랍니다. 검색해 보면 향원은 어떤 존재인지, 공자는 왜 그렇게 향원을 경계하고 기피하려 했는지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평판은 그렇게 모든 사람을 몰개성으로 만들고 본유의 정체성을 드러나지 못하게 한다. 요즘 젊은이들의 모습이 개성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온존한 자기 개성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 정체성과 개성보다는 오히려 나를 좀더 봐주기를 원하는 투정에 가깝다. 인간은 사회적 평판에서 자유로워야 비로소 좀더 개성적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평판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평판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평판을 존중하되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판을 무시하면서 얻는 자기 정체성은 유아기로의 퇴행된 정체성 다름 아니다. 마치 부모와 사회의 울타리 속에서 무엇이든 자기는 이해 받기만을 바라는 그것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평판은 무시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의 대상이어야 하며 또한 진정한 본유를 찾기 위한 극복과 초월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위의 지루한 말들과 금천(공동체)의 존재의 의미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말하자면 공동체도 인간과 같이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인가 하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 중 하나는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묻는 존재라 하였다. 그의 말이 옳다면 인간의 사회가 동물의 집단들과 다른 이유는 인간의 사회는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묻는 존재라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이 과장일까? 다소 논리적 비약 같지만 칸트는 1794년 영원한 평화라는 저서에서 국가도 인격을 가진 존재라 하였다. (서울대 백종현교수 열린연단) 또한 김구 선생님은 나의 소원에서 우리의 나라가 부국강병보다는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기를 바랬다. 우리의 선배들이 그토록 자주독립을 염원하였던 것, 그리고 김구선생님이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기를 바랬던 것은 공동체에도 그 나름의 존재의 의미를 있다는 것을 암시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국가에 인격이 있다는 말은 그것이 국가든 기업이든 마을이든, 공동체에도 본연의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타인의 뒤담화에 예민하듯이 자신이 속한 국가나 회사나 공동체에 대한 폄하나 뒷담화에도 예민지지 않던가? 그렇게 공동체 역시 존재의 의미가 있으며, 공동체도 사회적 평판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상 그에 매여 그 공동체 본유의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평판은 개인만을 구속하지 않는다. 간단한 예로 요즘 신문이 하는 대학평가를 보자. 언제부터인가 일개 신문이 대학을 평가하기 시작하더니, 요즘엔 대학들이 자신들의 본원적 역할인 진리를 탐구하기보다, 신문이 만들어 놓은 평가요소에 더 민감해지기 시작했다. 때로는 대학이 신문 담당자에게 로비까지 한다는 소문은 이미 널리 퍼져버린 사실이다. 아무리 평가요소들이 정당하고 객관적이라 하여도 그것만으로 본질을 규정될 수 없다. 마치 이는 사람이 몇 가지 평가요소로 평가될 수 없다라는 말과 같다. 대학의 취업율, 논문수, 학생당교직원수 등등의 그런 평가요소로 대학의 본질을 평가해서야 되겠는가? 그럼에도 신문의 대학평가라는 미명에 의해 대학은 본유의 역할도 잃고, 개성도 잃고, 주어진 평가요소에 따른 서열다툼만 남게 되었다. 그렇게 대학은 신문 평가담당자들의 “을”이 되었고, 그렇게 신문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평판이란 그런 것이다. 

구청이라고 다를까? 일 때문에 가끔 다른 구를 방문하면, 행정분야 서울시 0위, 친절도 0위, 청렴도 0위, 민원행정 0위 등등 나름 우수한 평가가 나온 것들을 현수막으로 때론 시트지로 구청 건물이나 입구에 붙여 홍보하고 있는 것을 자주 보고는 한다. 물론 상황과 처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그런 좋은 결과에 사심 없이 박수를 보내지만, 한편으로 이는 구청도 평판에 대해 스스로 갇혀있고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라는 반증의 다름이 아닐 것이다. 금천구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작년 세월호 현수막 철거 등의 문제로 옥외광고물을 담당하는 간부를 만난 일이 있었는데 (기억이 완전치는 않지만) 그분의 말은 이랬다. “우리 부서직원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아는가? 인원도 부족하여 그렇게 고생하고도 툭하면 강남구 등이 받아가는 그 흔한 인센티브를 한번 받지 못했다. (여기서 인센티브는 개인이 아닌 구에 내려오는 인센티브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분은 지금은 다른 곳으로 전근 가신 분 입니다.) 그런데 왜 유독 금천구만 말이 많은가?” 라고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은 했지만 서로 다른 대화를 한 것이다. 결코 공직자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지만, 결국 이런 저런 경험으로 볼 때 자치단체 공직자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더욱 평판에 약한 것 같다. 물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우리는 또한 이해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금천은 평판을 극복할 수 있을까? 대학이나 기업 등 다른 사회와 다르게, 마을의 주요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 정치인이며, 정치인들이란 바로 평판이라는 영역에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과연 우리 금천은 이러한 평판의 무게를 극복할 수 있을까? 

얼마 전 금천구에 비전위원회가 떴다. 반가운 소리다. 나이로 따지면 금천구는 이제 만 20년, 사춘기를 넘어 성년에 들어선 나이다. 철없는 바램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금천구 비전위원회가 평판이란 껍데기를 극복하고, 우리마을의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를 재고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세계적인 경영학자이자 전략가인 게리해멀은 “경영의 미래”에서 인간은 스스로 만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고 하였다. 결국 금천이란 공동체는 타자들이 만들어 놓은 평가요소가 있음에도,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의 문제를 만들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만든 그 문제를 묵묵히 해결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 가치와 존재가 드러날 것이다. 기껏 만든 비전위원회가 안전도 0위, 일자리 창출 0개, 주민복지 00위 이런 것에만 집착하지 않기를 바란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의도에서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그냥 거버넌스란 미명하게 만든 옥상옥에 불과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궁극적 이유는 공동체가 자유로워야 그 구성원들도 진정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온갖 공동체가 국가나 언론이나 또는 그 무엇이 만들어 놓은 것들에 매몰될 때 과연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자유로워 질 수 있겠는가? 물론 이 물음에 대한 궁극적인 답은 시민들이 내어놓아야 하겠지만, 비전위원회가 만들어진 이상 그 역시도 나름의 고민과 답을 내어 주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의 공동체가 겉으로는 고매하고 그럴듯한 향원과 같은 존재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지면 관계상 우리는 왜 존재의 의미를 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혹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다름으로 미루고자 한다. 


이윤로

독산고등학교 학부모


필자는 기고문을 본 지에 보내면서  다양한 토론이 진행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본 지는 금천구의 여러 분야에 대한 다양한 토론과 논의가 촉발되길 바란다.

이 글에 대한 반론도 좋고, 새로운 제안도 좋다.  다양한 의견이 도출되기를 희망하고 건강한 토론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의견은 gcinnews@gmail.com 02-859-1320/010-7750-2431로 보내면 됩니다.





올해 초에 세월호로 알게된 분이 저에게 물었어요. 리본 공작소로 나오기 전에는 뭐하셨어요? 저요? 설거지하다가 나왔어요.

흔히 세월호 이 전과 이 후는 달라져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 건지는 잘 몰랐습니다. 전 결혼하고 집에서 설거지하면서, 내 가족이 잘먹고 별탈없이 지내면 잘사는 줄로만 알고 살던 주부였어요.

사회에 참여해 본 일은 광우병사태 때 한번 나가보고, 가톨릭신자로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한미사에 몇번 나가 보긴 했지만, 사회 참여라는 것이 저에게는 그 정도까지여서, 국정원 댓글조작사건 때도 마음으로는 '저것은 아닌데...'하면서도 현장으로 나올 생각을 못했어요.


그런데 세월호사건이 나고 배가 침몰되는 것을 동영상으로 지켜보면서, 또, 한 명도 구조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충격에 빠졌고, 세월호 참사 2-3개월이 지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더욱놀랐어요.(이때 즈음, 저는 내가족의 일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로도 나와 내 가족이 아프고 힘들수 있구나, 내 일상이 뒤엎어질 수 있구나 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타인의 일이라는 것이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결코 남의 일이 아님을 알게되었어요) 

그러면서 아이들이 수학여행가서 잘 놀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부모님들의 하늘이 무너졌을 것 같은 그 심정이 조금이나마 공감이 되면서, 뭐라도 내가 할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는 생활협동조합에서 서명전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 일을 하게 되면서, 동네촛불모임도 알게되어 촛불을 들게 되었고,  광화문 문화제에 나가면서 공작소를 알게되어 리본도 만들게 되었어요. 

나와보니 리멤버0416,엄마의 노란손수건과 같은 분들이 이미 4.16 유가족들과 함께 하고 계시더군요. 그들 대부분은 집에서 살림하다 나온 분들이셨지요. 그분들을 보면서, 전 이렇게 아줌마들이 대거 장시간 행동하는 것을 처음 봤어요.

그런데도 300일이 다 되어가도 뭐하나 달라지는 것이 없는걸 보면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달라져야 할 것들이 많은것 같아요.(제 이야기만썼어요)


이렇게 300일에서 500일을 맞이한 저는 요즘 외출할때 ((잊지말자 0416))이라고 새겨진 노란팔찌를 자주 잊어버리는 저를 발견하면서 지난 해 5월에 처음팔찌를 차면서 했던 다짐(세월호의 진실이 밝혀질때까지 외출할때는 꼭 차고다니자)을 다시 떠올리며,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이란 문구를 다시금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윤정수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기를 원하는가?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도 좀 더 나은 사회, 좀 더 공정한 사회에 살기를 원하고 우리가 후세대에 물려줄 사회는 이땅에 사는게 행복하고 복된 좋은 사회, 이런 사회를 물려주는 것이 우리 선배세대들의 몫일을 것입니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 몇 명이서 만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기존의 사회제도가 우리 사회에,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작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치가 우리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요? 정치영역은 그들의 영역이기 때문에 나와 상관없는 문제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야 말로 우리 생활에 가장 가까이 가장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심을 더욱 가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는 선거제도 우리가 관심을 가지지 않을 때 그 피해는 우리 국민들의 몫입니다.

우리 사회는 힘있고 빽 있는 사람만 사는 공간이 아니라 보통 평범한 사람, 그리고 사회적으로 보살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함께 공존해야 하는 사회이고 함께 살아가야할 공동 공간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 가고 있는 사회의 제도들이 공정해야 되고 우리 사회를 이끌고 나가는 사람들은 자기를 희생할 줄 알고 자기의 기득권을 내려 놓을 줄 아는 그런 사람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정치권에 그러한 기대를 해도 될까요? 희망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러한 방향으로 되길 강력히 바라면서 기대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요즘 한창 선거제도 개혁에 대해 여러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용어들이 낮설고 어렵습니다. 일반국민들은 그러하기 때문에 더욱더 관심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이번에 정치제도개혁으로서 선거제도 개혁은 한마디로 말해서 투표로 얻은 만큼 국회의석수를 배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합당하고 정의에 부합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10%의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면 10%만큼 국회의원 의석수가 배당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의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현행 국회의원 300명을 가정하고 A정당이 국민으로부터 30%의 지지를 받았다면 A정당의 국회의원 수는 90석(300명의 30%)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역구에서 60석을 얻었다면 비례대표의 수는 90석에서 지역구 의석 60석을 뺀 30석을 비례로 할당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현재 선거제도상으로 보면 정당이 득표를 얻은 것보다 훨씬 많은 의석수를 가지고 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새누리나 새정치는 잘못된 선거제도, 애초부터 잘못 설계된 선거제도로 인해 득표수 보다 훨씬 많은 의석수를 가져가게 되어있고 지금까지도 그 혜택을 계속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수의석을 만든 당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진 제도이죠. 그래서 이것을 올바르게 고치자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불평등하게 된 것들이 이것 하나 밖에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많은 것들 많은 제도들이 우리가 인지 못하게 불평등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지역구를 늘리느니 비례대표를 늘리느니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 국민들에게 당장 피부에 와 닿지도 않고 그냥 국회의원 늘리는 것은 싫다라는 의사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정치에 대한 불신이 크다는 반증이겠죠.

사실 이번 선거제도 개혁에 대해 안을 내놓은 것은 야당이 아닌 중앙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결과 우리 사회의 지역주의 문제, 소수자 보호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한 가장 합리적인 안이라고 생각하고 제안을 했을 것입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제안한 안에 대해 저희 정의당은 적극적 찬성을 보이며 지지하고 있고 대다수 시민단체들도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성명을 발표한 바도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사회의 기득권을 쥐고 있는 세력들만 자기의 기득권을 뺏긴다면 저항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사회의 양당구조 모순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양당이 서로의 이익에 배치되는 것을 하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계속 자기의 주장만을 하고 있고 시간끌기만 하고 있습니다. 이러다 그냥 논의만 무성하다 없었던 걸로 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그럴 가능성도 농후합니다.

지지 받은 만큼만 의석수를 가지게 하자는 것이 그리 어려운가? 이것이 잘못된 내용이던가? 우리 국민들도 곰곰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잘못된 것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된 것에 눈을 감고 있을 때 누가 우리 사회를 좋은 사회로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감시가 곧 권력입니다. 관심이 곧 권력입니다. 우리 국민 한명 한명이 정치권에 대한 관심이 있을 때 사회는 변합니다.

우리 사회를 좀 더 공정하고 좋은 사회를 만들어 우리 후세대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정치권에 우리의 이야기를 제대로 합시다. 이것이 곧 민주주의입니다.


정의당 금천구위원회 

위원장 공병권




민선 지방자치정부의 연륜이 쌓이면서 ‘주민을 앞세우는 제도나 정책’들이 경쟁하듯 하다. 일찍부터 행정 동 사무소는 ‘주민자치센터’라 불리고 ‘주민자치위원회’라는 기구가 운영되고, ‘주민감사청구제도’등이 보이더니 멏 년 전부터 ‘주민참여예산제도’, 마을공동체 사업의 한 유형인 ‘주민참여 주거재생 사업’에다 ‘찾아가는 주민 센터’까지 등장했다. 다른 광역자치단체의 사정은 어떤지 몰라도 서울시는 이런 점이 아주 활발한 것 같다. 주민, 곧 국민이 주인인 것이 우리 헌법 정신이니 이러한 현상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일 뿐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모습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들이 “그들만의 잔치”라는 표현들도 회자(膾炙)되고 있어 그것들이 본래 취지하는 바의 달성에 의문이 들게 한다. ‘주민’을 앞세우지만 아직은 소수의 주민들만 참여하는 제한적인 행태가 현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다수의 주민들은 이러한 제도나 정책을 아예 모르거나 알고는 있지만 그 구조나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나 관심이 덜하다. 주민을 앞세우면서도 아직은 친주민적인 시행이 되지 못하는 것이 ‘주민을 앞세우는 제도나 정책’의 현주소이다. 

지방정부들이 의욕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이른바 ‘주민 정책’을 표방하는 현재의 제도나 정책들이 잘못되었다거나 실패했다는 지적이 아니다. 현재의 모습들에 국가정책으로는 아직은 부족한 면도 보이고 또 개선의 여지가 있음을 지적함으로 그것이 본래 취지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도록 자극하고자 함이다. 이러한 접근은 ‘주민 정책’을 긍정적으로 보는, 국민 곧 주민이 국가 공동체의 주체임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듯, ‘주민을 내세우는 제도나 정책’들은 주권재민(主權在民)을 정체(政體)로 하는 대한민국 헌법 정신으로 그 표지(標識)인 민주주의의 실현이 목적이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금천구는 서울은 물론 전국에서도 앞선 기초 자치구 중의 하나이고 특히 2011년부터 시행한 “주민참여예산제도”는 전국의 자치구 중에서 앞서 시행한 자치구군(群)에 포함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구정(區政) 시현이라는 찬사를 붙여도 괜찮을 정도다. 비록 액수는 적지만 예산 편성에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발전된 행태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을 금천구가 앞서 시행한 것이다. 이러한 찬사는, 그러나 지금은 좀 거북하다. 처음 시행과 그 운영은 평가할 만 했지만 그 후의 진행이 이 제도가 취지하는 바에 부합한다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금천구의 주민참여예산제도 평가와 연계하여 서울시의 제도를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금천구는 이 제도 도입 초기(2011년) 자체예산으로 이 제도를 시행하였고, 비록 부족한 면이 있었지만 제도가 취지하는 바에 가까웠다. 그러나 2013년 서울시가 이 제도를 시행하고 산하 자치구들이 참여하면서 취지가 흐려지기 시작했고, 2014년(2015년 예산)에 이르러서는 이 제도가 존치를 생각해야 할 경지에 이르렀다. 기초자치구간의 담합으로 서울시가 의도한 주민참여예산 시행취지가 훼손되었는가 하면 ‘주민 참여’ 의의도 실종되었다. 기초자치구의 공무원들이 예산확보를 위해 주민을 앞세운 예산획득 경쟁 장(場)이 되었기 때문이다. 금천구를 포함한 다른 자치구들이 이 제도의 취지를 훼손하는 접근을 하였고, 서울시가 빌미를 만든 것이다. 

2015년의 시행(2016 예산편성)에서는 서울시의 자각(自覺)으로 작년과 같은 기초자치단체간의 담합은 감소하였으나 주민을 앞세운 기초자치구 공무원들의 예산 획득전략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각종 정보를 가지고 있는 만큼 서울시 ‘주민참여 예산의 선정가능성이 있는 자기 구의 숙원사업들을 주민을 앞세워 경쟁하듯 ‘예산획득 작전’을 수행한 것이다. 이런 현상, 즉 공무원이 주민과 연합(?)하여 예산획득을 위한 활동을 잘못이라 할 수만은 없다. 기왕에 마련된 제도인 만큼 가능한데로 상급 기관의 예산을 많이 가져와 예산부족을 채움으로 민원 해결 등 당면과제를 풀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합리적(合理的)이다 할 수는 없다. ‘주민참여 예산제도’가 취지하는 바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제도의 설치 목적은, 그 동안 권리 밖인 예산 편성에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주민 눈높이에서 필요욕구를 충족케 함으로 시․구정(市․區政) 참여의의를 구하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함이라 이해한다.  

문제는 또 있다. 이런 절차로 확보된 예산 내용이 그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이번 예산(2016년)으로 금천구의 서울시 접수금액은 총 58건 2,158,925천원이고 부서검토에 의한 조정액은 1,980,050천원으로 금액으로 볼 때 서울시 25개 구 중 중상위권에 해당하는 실적(?)이라 한다. 그러나 상당부분이 건설, 수리(修理), 물품구입과 같은 하드웨어분야로 이는 이 제도 설치취지에 부합하는 모습이 아니다. 건설 등 하드웨어는 가급적 기본예산을 주(主)로 하고 주민제안 예산은 주민생활과 밀접한, 소프트웨어 쪽이 많은 것이 바람직한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각종 정보를 가진 자치구 공무원이 참여를 주도한데 따른 결과이다. 이를 문제 삼는 것은 예산 비전문가적 시각일지 모르지만 이 제도의 설치취지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국가의 예산정책 수립은 국가경영이라는 큰 틀 아래서 각 분야를 균형 있게 조화하고 이러한 구도에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광역자치단체), 그리고 지방정부와 기초자치단체의 예산 운영 구조와 방향이 마련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서울시의 “주민참여예산제도”는 이러한 조화를 수행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일 것이다. 차제에 서울시는 물론 금천구를 포함한 다른 자치구들은 그간에 보인 불합리를 반복하지 않기를 주문한다.

문제가 있지만 주민참여예산제도는 계속되어야 한다. 이 제도가 가지는 긍정성을 살려 개선을 통하여 더욱 발전시키는 것은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대로(大路)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주민, 곧 국민들이 직접 국정에 참여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원형(原型)이고, 그것을 제도로 마련하고 바르게 시행하는 국가가 곧 선진국의 모습이다. “주민참여예산제도”를 포함한 ‘주민을 앞세우는 정책’들을 더욱 발전시켜 기왕에 마련된 관련 정책들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그래서 이 땅에 한 걸음 더 나아간 민주주의가 시현(示現)되기를 기대한다.(♣2015.09.08) 

장제모


경제적으로 힘들어도 행복한 금천구가 되었으면


류은무 서울마을지원활동가!

이름이 익숙하다. 금천구의원으로 12년간 3선을 지냈으며, 부의장까지 한 류은무 전 구의원이 마을활동가로 활동을 하고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게다가 박원순 서울시장의 마을공동체사업에 대해 비판적인 새누리당 소속이다.

반대로 마을활동가들 중 의원출신은 보기 힘들다. 몇몇 명망있는 시민활동가들의 경험은 있지만 소위 보수정당 출신은 본 기자는 생소했다. 어떤 생각일까 궁금증을 안고 지난 8월27일 류은무 마을활동가를 만났다.


어떻게 활동을 시작하게 됐나?

의정활동하면서도 새로운 것에 있으면 도전해왔다. 취미로 축구를 하면서 감독도 해보면 새로운 선수를 기용도 많이 했다. 개인적으로 색다른 시도를 많이 하는 편이다. 그리고 마을공동체사업은 필요한 사업이다. 이우재 전 의원도 도시농업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고, 나도 본회의장에서 표현한 바 있다. 도시농업이 잘되어 있는 것이 쿠바다. 고립된 가운데 도시를 유지하는 한 측면이 도시농업이다. 그리고 나이 든 분들도 상자텃밭 재배를 통해 생산자로 변모할 수 있다. 고령사회라고 이야기를 하고 걱정을 많이 하지만 도시농업만큼 실천적인 대안은 아직 없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정책이라고 하지만 구민이 원하고 주민이 필요하면 빨리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해왔다.

사람과 사람의 활동과 관계는 마을 속에서 이뤄진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람들 속에서 이뤄져야한다. 그래야 사람의 이익을 끌어낼 수 있있다. 당의 색깔과 마을공동체가 안 맞다고도 한다. 당원이지만 당의 개념보다는 주민들의 실생활에서 의정활동을 해왔고 우리 당이 아니라고 ‘몰라’,‘안해’라고 하지않았다

금천구에서 하는 마을공동체 이웃만들기 공모사업을 해 70만원을 지원받아 해봤다. 직접 해보니 마을공동체의 흐름을 할게됐다. 그 이후  서울시마을지원활동가 활동에 참여해 56시간의 교육을 이수했고 사회적경제교육 등 많은 교육을 받았다.


하고 싶은 활동은?

 초반에는 당의 신분을 배제하고 구의원했다는 것도 잘 밝히지 않았는데 교육의 특성상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진행이 될 수 없었다. 분임토의와 토론 속에서 다 드러나게 된다. 마을공동체사업은 진실 속에서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져 하는 사업이다.

괴리감은 거의 없었고 개인적으로 좋다. 의정활동이나 당 활동에서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묘미가 있다. 젊은 애기엄마들도 만나고 새로운 세대층에서도 배우고 있다. 대화를 하면서 솔직히 ‘수준 안되는 구의원활동을 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생활패턴에서 주부들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집요하고 꾸준하다. 기회가 되면 이런 부모들과 자기아이만 잘 기르겠다는 생각을 양보해야한다는 부모교육을 하고 싶기도 하다. 아이들을 혼자키우려 하지 말고 3세대가 모여서 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부모커뮤니티사업이나 공동육아, 자녀돌보미 사업들에서 몇 십만원으로 큰 만족을 하고 있다. 그 맛을 본 사람과 가족들이 행복진다. 자녀들과 같이 하는 공동체, 함께 변화하는 공동체로 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예를 들면  내 손주를 가만히 보면  나랑 참 닮았다. 성질도 그렇고. 그래서 이놈이 빽빽 거리며 울면 애기엄마는 몰라도 난 이해가 된다. 한 아이에 대한 폭넓은 참여가 이뤄지는 것이다. 

 


구의원과 마을활동가의 다름

계층간을 보면 구의원을 할 때 만난 민원은 대부분 건물을 가진 사람들, 중산층 이상 이거나 아니면 아주 저소득층, 의료수급대상자 들이었다. 마을활동은 주로 자녀를 키우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대화가 다르고  차이가 많이 난다. 금천구에는 공동육아, 교육과 관련한 사업이 많다 문화부문이 좀 뒤쳐진다.


구의원을 지내면서 행정의 습성에 대해서 이해가 남다를 것 같다. 민관거버넌스를 위한 제언을 해달라.

관이 집념을 가지고 참여해야한다. 주민센터, 특히 주민이 주인되는 형태로 새롭게 위촉받는 주민자치위원이나 시니어 상담가들과 유대관계를 가져야한다. 민간이 관에 끼어드는 것을 거부할 만도 하지만 그럼에도 조화를 만들어야 한다. 관에서 공무원들에 대한 교육을 잘해야 한다. 마을공동체 사업이 4년차 된다고 하지만 서울시 인구 중 1%만 참여하고 있다. 5%정도가 되야 마을속에서 역할을 확산시키고 참여한 사람들의 사기를 높여낼 수 있다.

근본적으로 마을공동체가 좋기는 한데 예산 뒷받침이 너무 약하다. 생계에 도움이 될까하고 들어온 사람은 흥미를 잃고 금방 사라진다. 활동하는 사람도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데 정작 중요한 돈 이야기를 잘 안한다. 배가 든든해야 연구도 하고 그런 속에서 주민들의 신뢰를 얻는 것인데 그 부분이 가장 미진하다고 볼 수 있다.


금천구 마을활동, 특징이있다면

금천구에는 열심히 하는 활동가들이 많다는 것이 큰 자산이다. 생각하는 지적수준도 수준급이다. 마을공동체의 기본 취지가 더 확산되서 서민이 많이 사는 금천구가 삶의 활기가 돌았으면 좋겠다. 정치적으로만 보지 말고 시민들의 삶, 평등한 삶을 추구하는 것에서 행복이 한발짝 오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경제적으로 뒤쳐지지만 행복지수는 가장 높은 금천구가 됐으면 좋겠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이준익 감독의 <소원>


 이 작품 얘기할 때, 나는 분노를 힘껏 토해낼 수도 있고 느꼈던 감동을 얘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좀더 이성적이게 얘기해보자. 격심한 문제를 다루는 작품일수록 우리를 꼼짝달싹 못하게 한다.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드는 힘, 그것은 불편함이다. 우리는 아동 성폭행이라는 현실과 직면해 아주 불편하고, 힘들었다. 그리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분노를 범죄자들에게 토해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영화적인 입장에서 불편함을 전초의 과정이라고 본다면, 틀림없이 이 영화는 그 불편함을 통해 무언가를 이끌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여러 가지가 있었다. 죄악, 분노, 공포, 용서, 그리고 치유. 먼저 분노란 인물들의 갈등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감정이고, 그 감정은 또한 죄악으로 향한다. 치유는 주인공과 관객들이 나아가야 할 길이고, 용서란 그 가장 끝에 있다. 그만큼 <소원>은 한 마디로 핵심을 요약하기 힘든 작품이었다. 

 영화 <소원>이 하고 싶어했던 얘기는 많았지만, 명백한 작품의 핵심을 얘기하자면 나는 비참한 소녀가 스스로를 치유시키는 과정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작품 특유의 인간미는 우리로 하여금 그래도 사람을 치유시키는 것은 사람이라고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영화가 어떻게 끝날지 항상 머릿속으로 그려보곤 한다. 이즈음 엔딩의 막이 오르면 좋을 거라고 취향대로 해석한다. 이것이 뭘 의미하냐면, 영화가 얘기하는 바가 끝났다 싶으면 나는 멋대로 그 이상은 부연이라고 판단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소원>은 소녀를 치유해주는 과정을 통해 우리들도 치유해주려고 한 작품이다. 그렇기에 죄악을 심판하는 사법부의 그 무능한 작태를 연출하는 것은, 결국 영화를 애매하게 만드는 꼴이었다. 물론 감독 나름의 사회를 비판하고 싶은 소신이 있었겠지만, 애초에 이 영화를 통해 우리를 치유시키고 싶었다면 치유로 끝냈어야 했던 것이다. 영화 곳곳의 어정쩡한 사회적 문제 때문에 안타깝게도 우리는 어정쩡한 치유로밖에 이 영화를 끝맺음 하지 못했다. 안타깝다.


광명공업고등학교

2학년 김예준


옛이야기의 매력은 어디서 올까?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옛이야기는 다른 어떤 이야기들 보다 아이들을 이야기 속으로 흠뻑 빠지게 하는 매력이 있다. 왜 그럴까 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그 매력을 알 것도 같다.

맨날 똑같은 말과 똑같은 일상을 보내는 할아버지, 무슨 일이 있어도 "Could be worse!" 라고만 한다. 할아버지는 왜 그 말밖에 안하냐며 심심해하고 지루해할때 할아버지가 아이들에게 "Guess what" 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얘들아, 있잖아. 내가 어젯밤에" 할아버지가 어찌나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꾸몄는지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은 산전수전 겪고 돌아온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가 매일 쓰던 지겨운 말 could be worse!를 외칠 수밖에 없다. 

할아버지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아이들 말로 표현하면 거짓말이고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허구가 할아버지 이야기의 재미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빠져 속아넘어가는 아이들을 보는 게 이 책의 재미다. 이 책을 보자니 옛이야기의 매력은 황당무계한 것 같은 거짓말과 그런 거짓말에 언제든지 속아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아이들과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모아져 만들어진 듯하다.

현실과 허구를 분간 못하게 정신을 뺏어가는 옛이야기의 매력을 우리 옛이야기 그림책이 아니라 원서 그림책에서 찾게 된 이유는 뭘까?

아마도 could be worse가 무슨 말일까 짧은 영어실력으로 고민하다보니 생각지 못한 답도 얻게 된 듯하다. 

Could be worse! 다행이다!

 

                                                                 

      2015.8-2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동화 읽는 어른모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