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를 옥죄던 전쟁의 먹구름이 일단 멈췄다. 다행이다. 어떤 좋은 전쟁도 가장 나쁜 평화보다 못한 법이다. 전쟁을 부추기는 저열한 남한 언론들의 천박한 보도와 그들이 비웃는 북한의 보도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실제 이번 긴장격화는 합리성을 배제한 긴장이다. 이명박근혜정권 시대, 더 분명히 말하면 천안함 사태 이후 대한민국은 ‘절대적 전제의 맹목’에 빠졌다. 최소한의 합리적 의심도 배제한 보도와 주장만이 난무한다. 그것에 반하면 종북이 된다. 하지만 모든 진실과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 바로 이 맹목(盲目)이라는 괴물이다. 우리가 조중동을 기레기라 욕하다가도 북한 문제에서 갑자기 뉴욕타임즈 쯤으로 여기는 무지와 착각을 벗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체모를 지뢰 한방에 온 삶이 흔들리는 비극적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이번 사건을 보면 이전과 다른 기묘한 지점이 여럿 있다. 첫째는 지뢰 폭발의 기괴함이다. 최첨단 열감시기 설치된 고정 초소 바로 앞에서 발생된 폭발에 폭발장면은 있지만 매설 장면은 없다. 안개 때문이라는데 열 감지기 TOD는 어둠이나 안개에 구애치 않는 장치다. 둘째 그동안 남북 간에 문제에 슬쩍 비껴만 있던 미국이 처음부터 한미합동조사라는 이름으로 전면에 등장한다. 이례적이다. 셋째, 어떤 물증도 없는 포사격에 대한 주장이다. 주장만 하면 무조건 믿으라는 맹목이 전형이다. 그러면서 포를 쏘고 대북 방송을 한다. 남한이 휴전상태를 열전으로 돌린 것이다. 우리는 쉽게 대북 방송이라 하지만 우리 스스로 그것을 심리전(心理戰)이라 부르지 않는가? 그렇다. 그것은 그저 소음이 아니라 휴전을 열전으로 돌리는 전쟁의 일환이다. 남북 대치 상황의 엄중성을 배제한 남한의 일방적인 열전화가 참으로 기괴했다. 넷째는 중국이다. 중국은 자기들의 언론을 통해  북한과 한국 또는 다른 외부 세력이 중국의 열병식에 영향을 주려고 지금 도박을 하는 것인가를 물으며 “만일 열병식이 어떤 형태로든 실질적인 간섭을 받고 외부에서 보기에 악의적인 부분이 있다면 중국은 무관심하게 이를 방치해둘 수는 없다... 강력하게 대응 하겠다”고 보도했다. 북한과 한국 또는 다른 외부 세력이라고 호칭할 때 외부세력을 북으로 해석하는 나한 언론의 주장은 틀렸다. 남북은 이미 호명되어 있기에 그 대상은 명백하게 미국이다. 


이유와 과정이야 어떻든 남북이 긴장을 완화하는 대화를 하고 합의를 발표하는 것은 전쟁을 선동하는 몽매보다 백번 났다. 그런데 그 합의문도 굉장히 이상하다. 우선 긴장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포사격에 대한 언급이 없다. 지뢰 사건에 대해 포사격을 조작하고 작심하고 36발의 포탄을 남측에서 쏜 것이 아니라면 강력한 사과와 재발방지에 포사격 공방이 실종된 것이 의아하다. 두 번째로 유감이라는 표현에 대해 그것을 사과로 보는 것은 우리 어법 상 억지다. 보통 유감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쓰는 말이다. 오직 일본만이 그것을 우회적 사과라 하지만 우리는 그 말의 진정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지뢰매설에 대한 인정도 아니고 다친 것에 대한 유감을 사과로 보고, 그것을 대북 상대로 원칙의 승리로 보며 심지어 이른바 햇볕정책을 폄하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지나친 정신 승리 식 주장일 뿐이다.  


그러면 이번 사태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남한의 언론들은 북은 실리 남의 명분을 챙긴 것이라 했다. 하지만 유감이라는 말은 명분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협상 막바지 대통령이 강력한 사과 재발 방지가 전제라는 말을 머쓱하게 만든 것이 지뢰폭발에 다친 병사에 대한 유감이다. 남한 식 지뢰도발도 아니고 병사가 다친 것에 대한 유감은 텐진 항의 폭발로 고통 받는 텐진 시민들을 걱정하며 유감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실제는 오바마 미국 정부가 진행된 “전략적 인내”라는 대북 봉쇄 무시 정책이 미중관계의 전략적 충돌 속에서 포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부터 미국이 지뢰조사에 나서고 남북 발표 직후 즉각적으로 환영을 표하는 백악관의 모습은 충분히 상징적이다. 두 번째는 5.24 조치 이후 대북봉쇄를 견지해온 남한 측의 입장 변화다. 이것은 결국 북의 항복 없이는 대화가 없다는 한미의 대북 정책이 전략적이고 결정적인 전환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공은 북미 문제로 전개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것이 남한의 객관적 위치다.  


두 번째는 중국과 동북아 정세가 미묘한 전환을 하고 있다. 중국은 자기들의 변한만큼 북한의 변화를 자기들의 영향력 속에서 전개시키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북은 북 자체의 역사를 가진 만큼 쉽지 않다. 북중관계는 한미관계와 다르다. 최근에 중국의 9.4 전승절 행사를 두고 일본과 중국과 한국과 신경전 중인 미국은 그 판을 한바탕 흔드는데 필요한 카드가 한반도 긴장일 수 있다. 중국과 북한은 장성택 처형 전후로 사이가 뒤틀려 있다고 한다. 미국의 봉쇄와 중국의 견제를 건너기 위해 북은 미국 봉쇄를 러시아를 통해 뚫고, 중국의 견제를 미국과 남한의 관계 개선을 통해 극복하려는 의도가 있고 그 첫 돌파점이 이번 긴장을 활용한 전화위복 전략이라 볼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이 북의 진정한 의도로 보인다. 그러면 남이 차지한 명분은 무엇일까? 남북 간 대립으로 닫힌 문을 열 기회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아마 진정한 실리는 내정에서 현 정부의 위기를 무마시킨 것일 터. 북미 북중 문제가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고 있다.  


사족 같지만 꼭 집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 있다. 북 무력을 대표해 참석한 황병서와 김양건이 남한 언론에서는 숙청 총살 설에 올랐던 사람들이다. 그런니깐 유령이 나타나 북한을 대표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국정원의 정보력이 최소의 최소 신뢰도 갖추지 못했음을 실토하는 것이다. 오보에 대한 어떤 책임도지지 않는 한국 언론에 나와 북을 증언하는 수많은 전문가들이 실제로는 국민들을 속이려는 사기꾼에 불과함을 말해 준다. 간첩조작, 대국민 해킹 도감청, 부정관권선거의 몸통 국정원은 해체되고 근본적으로 재구성된다. 남북 합의문 식으로 말하겠다. 

국정원 참 유감이다. 나는 국정원에 사과를 한 것인가? 

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센터장



서울에는 시계(市界)를 따라 서울외곽을 잇는, 8개 코스로 명명된 총 연장 152.7Km의 둘레길이 있다. 이 중 7곳은 서울시계를 이루는 산들을 연결하고 있어 등반(登攀)과 산책을 겸할 수 있고 나머지 1개 코스는 안양천을 따라 조성된 평지코스이다. 금천구는 이 중 제5 코스인 관악산 구간(12.7Km)과 제6코스인 안양천 구간(18Km)을 함께 두고 있어 다른 구에 비해 둘레길 접근 환경이 좋은 편이다. 

그러나 관악산 구간을 살펴보면 이런 접근 환경의 장점은 의미를 잃는다. 금천구의 시작점인 석수역에서 접근하는 입구(시흥3동 시흥동 산 4번지, 천록빌라 인근)가 둘레길로 표현하기는 무리이기 때문이다. 비탈의 경사가 심해 건장한 사람들도 오르기 힘겨운가 하면 노면도 거칠어 주의를 게을리 하면 낙상사고를 만날 정도다. 

‘둘레길’의 사전적 의미는 “주거 인근이나 명소 등에 설치된 길”이라 한다. 여기서 ‘길’이란  보통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는 산책로로 이해된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금천구의 서울 둘레길 관악산 코스의 입구는 노약자 등의 접근이 어려워 등산로이지 둘레길로 부르기에는 곤란한 곳이다. 서울시의 다른 코스의 둘레길의 사정은 어떨지 다녀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유사한 사정이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렇듯 서울시의 둘레길 중에는 그 명칭에 걸맞지 않은 곳들이 있다.

서울시 등 지방자치단체들이 예산을 쪼개어 의욕적으로 둘레길을 조성하는 것은 시민들의 건강증진과 문화생활 향유 기회를 갖게 하기 위함일 것이고 그런 점에서 이러한 사업시행은 긍정적 평가를 둘 수 있다 하지만 금천구 경우와 같은 불완전성이 있다면 그 의미는 퇴색될 뿐 아니라 오히려 역 평가를 만난다. 안일하고 전시성 정책시행에다 예산 낭비라는 질책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은 둘레길 열풍이 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 등 대도시는 말할 것 없고 지방의 중소도시는 물론 한적한 섬마을에서조차 마치 경쟁하듯 하고 있다. 이러한 행태는 일견 국가의 경제성장에 따른 대 국민 복지정책의 향상으로 자랑스럽게 볼 수도 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닌 것은 아니다. 지금껏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지난 정권 때의 사대 강 개발 때 조성된 둘레길 중 효용성 비판이 있는 곳이 많은 것이 그런 사례이다.

둘레길 조성 사업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경제수준에 걸맞게 국민건강 증진과 문화 창달을 위한 당국의 투자는 바람직하고 그런 일환에서 둘레길 조성 사업은 마땅한 곳을 찾아 더 좋은 환경으로 조성하여야 한다. 다만 모든 시행은 그 사업이 취지하는 바를 충족할 수 있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시행해야 함을 이야기 하고자 함이다.

다시 금천구의 둘레길로 눈을 돌려보자. 둘레길 초입의 열악함도 그렇지만 산 중턱에 길게 조성된 길에도 둘레길로 보기에는 구차한 곳이 많다. 가파른 경사를 두고 좁은 오솔길로 이어진 길은 건장한 성인도 추락 위험이 있는가 하면 심한 경사로에다 계단이 부실하여 낙상 위험이 있는 곳도 있다. 이런 사정은 과거 등산객들의 이용으로 생겨난 오솔길을 별다른 개선 없이 둘레길 표지만 설치하여 사용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12Km가 넘는 구간에 화장실이 한 곳도 없고 악천후를 만났을 때 피할 곳도 없다. 이용자의 한계가 있는 등산로의 경우라도 이런 사정이면 문제가 있는데 하물며 다양한 계층이 이용하는 둘레길이니 참으로 딱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중에 반가운 소식을 접한다. 금천구 관내 관악산 둘레길 개선을 위한 예산이  2016년 서울시 예산에 반영될 예정이라 한다. 주민참여예산제도에 의한 3억원 확보소식이 그것이다. 이 예산으로 얼마나 개선이 이루어질지는 모르지만 현재의 열악한 사정이 일부 개선이 될 수 있다는 데 금천구 주민으로서 기대를 가진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주민참여예산제도에 의한 것인 만큼 그 시행 담보가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당국이 방관하던 것을 주민이 찾아낸 것인 만큼 반드시 시행되기를 주문한다.

차제에 당국에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둘레길 조성과 같은 친주민적 사업은 비용이 들더라도 수혜대상이 공동체적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 그것이다. 특정계층만을 위하는 결과가 되지 않는, 즉 모든 계층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한다. 더하여 이러한 사업이 지역 간에 편차가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서울시가 시행한 주민편의 사업에서 특정 (기초)자치구가 우대되고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자치구가 있다는 소문이 있다. 서울둘레길에 이런 사례가 있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주민들도 둘레길 조성과 같은 정책시행에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준비기간에는 방관하고 있다가 완성이 된 후 이런저런 불평을 하는 것은 민주시민의 자세가 아니다. 관심을 두게 되면 건설적 시행을 통한 바람직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 그리고 완공이 되면 이용에 적극성을 가져야 한다. 국가가 예산을 들인 시설의 이용도가 빈약하면 시행당국은 위축되어 다른 발전적 정책시행 기대치가 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국민의 왕성한 이용은 당국을 고무시켜 더 나은 정책개발을 자극하게 된다.  

서울 둘레길이 모든 계층이 쉽게 접근하고 이용할 수 있는, ‘둘레길’ 명칭에 걸맞은 환경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노약자나 어린이는 물론 유모차를 미는 젊은 엄마들도 즐겨 찾는 길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환경의 조성은 당국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주민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2015.08.26) 

장제모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하

고 있으며 다양한 마을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으면 위기는 깊어지고 병적 징후들이 출현한다.  -안토니오 그람시-


지금 우리 사회는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감정들과 가치들을 하나로 묶어, 성공과 긍정, 행복만이 유일무이한 인간의 삶의 주요 목적이라 강요하고 있다. 과연 그것들이 절대화 된 지금 우리는 성공했고 행복한가? 오히려 자살률은 훨씬 더 증대하고 있고, 우울증 및 강박증은 더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행복전도사라고 자처했던 분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 아이러니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젠 개인적 우울증을 넘어서 집단 우울증과 조울증의 증상까지 보인다. 행복이 가장 강조되고 있는 세상에서 모두들 불행해 한다. 아이들도 청년들도 가장들도 노인들도 말이다.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는 그렇게 왔다. 위르겐 하버마스의 프레임으로 본다면 체계에서의 이데올로기가 이제는 교묘하게 그 모습을 바꾸어 생활세계로 까지 음습하게 적셔가고 있다. 


진화는 다양성 확보의 과정이다.  스티븐 J 굴드 (풀하우스) 

당뇨병 유전자를 보유한 사람이 당뇨병이 없는 사람보다 우월한 자연적 선택을 받은 적이 있다. 그것도 짧은 기간도 아니고 인류가 탄생이래 수 만년 동안 말이다. “총 균 쇠”로 유명한 조류학자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그의 책 “어제까지의 세계”에서 풀어놓은 말이다. 말하자면 이렇다. 인류는 탄생이래 환경에 의해 굶어야만 하는 날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던 상황에서 생존을 해야 했다. 어쩌다 사냥에 성공하면 최대한 저장해야 했고, 몸은 그 음식물들을 족족 에너지원으로 저장을 했어야 했다. 상대적으로 섭취하는 모든 것을 에너지원으로 저장하지 못한 인간들(당뇨 발병 유전자가 없는 인간들)은 에너지원의 빈곤으로 오랜 생존이 어려웠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그 후손들이 성장할 때까지 그들을 보살피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랬던 것이 산업혁명 후 인류가 하루에 3끼 이상을 먹는 환경이 되다 보니, 수 만년 동안 먹는 대로 음식을 에너지원으로 저장을 담당했던 우월했던 유전자가 하루 3끼 이상 몰려들어오는 음식들을 감당하지 못해 이의 기능이 무너져 당뇨라는 병으로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파푸아뉴기니의 원주민들을 관찰하면서 알았던 사실이다. 실제로 수렵채집의 부족사회를 이루고 살았을 때는 당뇨와 관련된 아무런 질병도 없었던 원주민들이 도시생활을 하게 되면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수가 당뇨에 시달리고 있다. 물론 위의 예는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진화 생물학자 굴드는 진화를 종적인 차원에서 유전적 다양성들을 확보해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즉 어떤 재앙적 환경이 닥치더라도 소수의 종들은 남아서 다시 종의 번식을 맡을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 그것이 진화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인류의 유전적 다양성 역시 마찬가지, 말하자면 그것은 인류가 어떤 재앙적 환경이 닥쳐 절멸할 수도 있겠지만, 소수의 인간이 남아서 인류문명을 이어나가고 인류의 종을 번식시킬 수 있도록 하는 종적인 차원에서의 진화 방식을 말 한다. 굴드는 이렇게 자연계의 종이 다양성을 확보하는 그 과정이 진화의 증거라고 말했다. 즉 진화는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 미개한 것에서 고등한 것으로의 단선론적이고 목적론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과정, 그 자체가 바로 진화의 증거라고 말이다. 

자연과 같이 사회도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류가 진화해 오면서 한 사회에 다양한 가치들이 내재되어 왔듯이 한 인간에게도 다양한 감정이 사라지지 않고 내재해왔다. 말하자면 긍정, 행복감, 성공에 대한 욕심, 뿐만 아니라 사랑, 연민, 증오, 분노, 고통, 우울, 공포, 부정 등등 말이다. 이렇게 인간에게 주어진 다양한 감정들이 수많은 진화의 과정에서도 아직도 인간 내에 내재되고 존속하고 있는 이유는 그 나름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부정본능은 아지트 바르키에 의하면 인류가 문명을 일으킨 핵심적인 감정상의 이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물론 약간 뉘앙스는 다르지만 말이다.) 진화에 대한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포와 분노라는 감정 역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얼마나 필수적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인간에게 필요한 다양한 감정과 가치들은 한 인간뿐만 아니라 그 인간들의 터전인 공동체가 유지되는 데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지 못하는 사회의 치명성은 독일의 제3제국이나, 소련, 북한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양한 가치의 공존은 문명과 사회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근간이 된다. 바로 어떤 하나의 가치가 위기에 처하면 다른 가치가 나서서 그 몫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하나의 가치만이 유일한 사회에서는, (비록 한때는 그 가치 덕에 발전할지 모르겠지만) 환경이 바뀌어 버리면 그 사회는 여지없이 공황에 빠져버리게 된다. 아무리 뛰어난 가치라 하여도 그 가치가 절대화 되는 순간 여지없이 비극이 발생했음을 우린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고, 또 그 비극은 아직도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제 행복과 긍정이라는 절대화된 미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도대체 행복이란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긍정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심리학자 빅터프랭크는 행복이란 인간의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며 행복은 무언가 유의미한 삶을 살다 보면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현대인들의 많은 정신적 질병이 여기서 기인한다고 하였다. 그의 말이 맞던 틀리던, 인간에게 행복만이 유일무이한 삶의 목적이었다면 왜 우리는 위대한 성인들 예컨데 예수나 간디 또는 이순신 등과 같은 분들을 숭배하는가? 물론 행복과 긍정이라는 사고관이 인간에게 끼지는 유익성을 부정해서는 안되겠지만, 그것들이 절대화되면 한 인간도, 한 사회도 균형 잡힌 삶을 유지하긴 극도로 어려워진다. 마치 편식의 위험처럼 말이다. 

지면 관계상 성공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해악 하나만 들어보자. 일반적으로 성공을 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늘 최상의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최상이라는 이상적 선택은 가능한가? 인간의 일상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며 선택에는 후회라는 자연스러운 책임이 따른다. 그러나 성공이란 이데올로기가 개입하면 양상이 달라진다. 그 후회라는 자연스러움이 갈등이 되고 불안감이 되고 좀더 심해지면 선택을 미루고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정신적 강박증이 되어버린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상의 결과를 획득해야만 하는 성공에 대한 강박증에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말하자면 하나의 선택이 성공에 대한 장애물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빠져 결국 아무것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져버린다. 바로 현대인의 게으름은 이러한 선택의 미룸에 있다. 인간은 신이 아닌 이상, 늘 최상의 선택을 할 수 없는 존재임에도 모든 선택에 최상의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현대인의 강박증과 두려움은 바로 이런 성공이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또한 선택은 포기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인간은 시간적 공간적 한계 때문에 한가지를 선택하면 나머지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성공에 대한 집착은 포기라는 자연스러움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어찌 어찌해서 배우자를 선택했어도 무언가 잘못되면 배우자 탓을 한다. 그렇게 우리 사회의 가정은 과거와 달리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처럼 불안해진다. 나이를 먹어도 성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선택과 그에 따른 포기를 구분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공이 낳은 또 다른 비극 중 하나일 것이다. 인간은 신일 수 없다. 여러 가지를 동시에 선택할 수도, 또한 시간을 되돌려 다시 선택할 수도 없는 존재다. 그런 존재가 성공이란 이데올로기 앞에서는 스스로 착각을 하는 것이다. 공동체 입장에서 보면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공동체 입장에서, 개인의 성공이 절대화된 곳에서는 예술적 행위도 공적 정치적 행위도 모두가 무너져 버린다. 오로지 성공의 입장에서만이 위의 가치가 유의미하다면 궁극적 불멸성을 띄고자 하는 예술작품에 대한 제작행위도, 객관적인 미에 대한 탐구 및 탐색행위도 무의미해져 버리고 만다.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짓는 정치라는 행위도 윤리적 규범이나 도덕적 덕목도 개인적 성공의 유 불리에 따라 도구화 된다. 한 사회를 지탱하는 신뢰도, 권위도, 정직이라는 내재적이며 독립적 가치마저도 성공이라는 틀 안에서만이 유의미해진다면 공동체는 온전히 유지될 수 있을까? 윤리적 규범은 그렇다 치고 도덕이라는 덕목 역시 성공이라는 목적 속에서만이 유의미해진다면, 우린 무엇을 통해서 야만이 아닌 문명인이라 말할 수 있고, 도대체 무엇을 통해 공동체를 지탱하고, 무엇을 통해 이 공동체를 후손들에게 온전히 물려줄 수 있을까? 갈등을 관리하는 사회적 비용의 급속한 상승을 우린 무엇 때문이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는 다양한 가치들의 공존이라는 것을 빌미로 사이비들이 준동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다양성을 빌미로 온갖 기만과 거짓도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거짓과 기만은 공론장에서 일정 걸러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다양한 가치들의 공존을 저해하고 획일화 시키고 절대화 시키는 그 무엇에는 답이 없다. 자연계의 진화는 그렇게 이어져 오지 않았다. 만일 그렇게 이어져 왔다면 자연계는 애초에 절멸했을 것이고 인류는 아예 등장조차 못했을 것이다. 

우린 행복을 이야기하면서도 단 한번도 공적 행복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으며, 사적 성공은 이야기해도 공적 성공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의조차 진행되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금천구 역시 크게 다를 바 없다. 온갖 매스컴부터 쏟아져 나오는 성공신화, 자기개발서 등도 모자라 이젠 공적인 사회까지 나서서 사적 행복과 성공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공적 행복이 결여된 사회에서 사적 행복이란 염원이 얼마나 지속적일 수 있으며 의미가 있을까? 공유자원을 얼마까지 더 사유화 해야 이런 비 문명의 상태를 자각하고 부끄러워할까? 

이제 우리는 행복과 긍정, 성공이라는 가치가 절대화된 생활방식에서 무엇을 잃어버리고 살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늦어도 많이 늦지 않았던가? 필자 역시 없는 듯 살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우리의 고통은 그렇다 치고 우리 아이들의 삶까지 행복과 긍정이라는 그럴듯한 착각의 노예로 살게 두어서야 되겠는가?   


이윤로

독산고등학교 학부모




(왼쪽)지난 7월20일 도시텃밭조성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제공 금천구청  (오른쪽)인터뷰에 참여해 준 두산위브사람들 회원 (임정숙 , 유애란 총무, 유호진 가산두산위브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왼쪽부터))


가산동에 두산위브아파트가 있다. 이곳에 얼마 전부터 텃밭이 만들어지고 보도에는 예쁜 꽃화분이 놓이기 시작했다. 텃밭에는 방울토마토부터 상추, 가지 등이 가지런히 심겨져 있고 오가는 주민들이 흐뭇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이런 변화는 두산위브아파트 마을공동체 ‘두산위브사람들’의 활동에서 시작됐다.  ‘두산위브사람들’은 올해  두산위브아파트 내에서 서로 인사나누기와 텃밭 가꾸기, 꽃나무심기를 주요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시작은 다른 것이 없었다. 아파트에 살다보니까 세대 간의 단절이 나타나고, 층간소음 문제도 많이 발생하다보니 이런 것을 어떻게 줄일까 생각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다.

유애란 총무와 임정숙 씨는 작년 마을공동체에 대한 교육을 꾸준하게 쫓아다녔다. 서울시에서부터 금천구마을공동체지원센터까지 다양한 교육을 받았다. 그런 교육을 바탕으로 올해 금천구마을공동체 사업에 텃밭 가꾸기와 서울시 주민제안사업에에 꽃나무 심기를 신청해 지금 한창 진행 중이다.

임정숙 씨는 “교육을 받으면서 우리 아파트에 꼭 필요한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활발한 공동체를 주민들이 똘똘 뭉쳐서 만들어가고 싶었다. 성북구의 장수마을을 탐방했을 때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유 총무는 “함께 교육을 받으면서 덜 미학적이지만 더 인간적인 것들이 좋았다. 골목의 평상에 할머니가 앉아 있음으로 해서 방범도 되고 아이들의 안전도 책임지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면서 교육받을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유 총무는 “아이가 어렸을 때 서로 만나다가 아이가 크니까 만날 일이 줄어들었다. 이렇게 텃밭을 만드니 여기서 다 볼 수 있었다. 층간문제도 그렇고 세대간의 문제도 날카롭게 날이 서다가도 서로 알게 되고 인사를 하면 누그러진다.”고 활동 취지를 설명했다.

두산위브아파트는 공원을 외부에 개방하고 있다. 조경이 잘되어 있을 뿐만 이니라 주변 가산동에는 이렇다 할 공원이 없기 때문이다. 

임정숙 씨는 “점심시간에 되면 인근 직장인들이 커피한잔 들고 온다. 이렇게 아파트 내에 꽃화분과 텃밭을 만들어 놓으면 우선 주민들의 마음이 좋아지고 이 아파트를 찾는 다른 분들의 마음도 좋아진다.”고 자랑했다.

‘두산위브사람들’은 교육프로그램도 확대할 예정이다. 털실이나 아크릴실로 수세미를 만드는 강좌나 양성평등교육, 가정폭력 예방교육도 입주자대표회의와 함께 진행해 갈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는 입대위의 지원이 없으면 하지 못할 일이라고 모두 입을 모았다.

마을공동체 사업을 하면서 주민들의 변화도 만들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서로간의 소통이 원활치 않다가 공동체가 생기니까 문을 두드리는 사람도 나타났다. 아파트의 여러공간을 지역사회에 내놓고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도 그런 변화의 과정이다.

유 총무는 “아는 언니의 할머니에게 킥보드를 타고 ‘할머니’면서 달려가는 아이의 모습을 본다. 텃밭에 물을 줄 때도 자기 것만 주는 것이 아니라 옆집, 앞집의 것도 함께 준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한 할머니는 항상 얼굴에 인상을 쓰고 다니셨는데 어느 날은 너무 밝게 나가시길래 좋은일 있냐고 물으니 텃밭에 물 주러 간다고 말했다.”고 변화를 소개했다.

남자들의 적극적인 모습도 큰 변화다. 동네일에는 잘 나서지 않는 아빠들이 텃밭을 하면서 지지대를 세우고, 퇴비를 주는 모습들이 보인다. 

두산위브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이면서  두산위브사람들 회원인 유호진 회장은 “아파트에 없었던 것들이 만들어지니까 좋다. 회원들이 서로 뭉쳐서 아파트에서 무언가 하려하는 모습들 좋다. 조금 전에도 보니까 어린 아이들이 텃밭에 많이 왔었다.”고 흐믓해 했다.

인사나누기 캠페인도 이제 시작하고 있다. 이 사업은 얼마 전 세일중하교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진행했던 캠페인이었다. 2년전에 한 선생님과 아이들이 서로 인사를 하자고 어깨띠와 요구르트를 나눠주고 청소를 했다. 그때 6~7명의 아이들이 돌아다니면서 많이 바뀌었다. 그런 것을 이어 갈 예정이다. 

앞으로의 바람을 묻는 기자의 말에 텃밭이 좀 늘었으면 좋겠다는 것과 함께 주민들이 좀 더 참여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전했다.

임정숙 씨는 “아파트를 최대한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 게시판에도 붙이고 플랑도 붙여 공지도 할 것이니까 많이 참여하길 바란다.”, 유 총무는 “입주민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 같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물러서지 말고 항상 오픈되어 있으니 수시로 전화하고 참여해줬으면 좋겠다. 아파트의 불편한 사항들도 지적만 하지 말고 함께 해결해나갈 수 있도록 하자.”고 웃으며 말했다.

‘두산위브사람들’은 지난 7월20일  ‘도시텃밭 조성행사’를 개최했다.  이 행사에는 두산 A·C지역 경로당 어르신, 마을공동체 두산위브사람들 30여 명이 참여해 구청에서 지원한 12개의 베드상자(1200mm×900mm)에 유럽산 상추, 콜라비, 양상추 등을 심었다. 여기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이웃과 나눌 예정이다. 또 조성된 텃밭은 지역의 어린이집, 유치원 아이들의 도시농업 체험 장으로도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영화 베테랑은 스피드하다. 대기업과 하청업체라는 명확한 사회적 문제를 다루며, 강력반 형사인 주인공의 적은 명백하다. 묘하게 대립되는 배우들은 그들만의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그야말로 쉬지 않는 영화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 영화의 목적이 뭔지 알아야 한다. 베테랑의 목적은 조태오라는 문제의 핵심이 저지르는 온갖 악행들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그를 공공의 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들이 할 수 없는 엄벌을 주인공으로 하여금 대신한다. 영웅주의다.

 왜 이 영화는 조태오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야 했을까? 우선 제멋대로의 재벌은 사회적 문제의 핵심인지라 우리에게 적으로써 친숙하다. 그들에게 박탈감을 느끼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우리는 재벌에게 손 쉽게 맞설 수 없다. 쉽게 말해서 우리에게 멀지 않은 이야기였기 때문에 우리는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베테랑의 주인공이 당신이었다면 당신은 수천만 원의 유혹을 뿌리치며 조태오를 엄벌할 수 있었을까. 막연한 정의감이 돈이나 권력보다도 높은 곳에 있다는 신념이 당신에게는 있는가. 영화 내의 서도철 형사이기에 가능하였고, 그 덕분에 우리는 대리만족을 했다.

 즉 영화의 목적은 대리만족이다. 영화는 결코 우리의 아픈 곳을 찌르지 않는다. 영화 베테랑이 접근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한없이 무기력한 우리들에게는 묵묵부답이다. 단지 우리는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통쾌하고 짜릿함에 빠져있었다.

사회적 사건을 다룬 영화는 크게 두 장면으로 분류할 수 있다. 우리로 하여금 현실과 직면하게 해주는 장면과 현실을 초월해 우리에게 만족감을 전달해주는 장면이다. 

일반적이게 전자의 장면이 훨씬 더 집요하게 다가온다.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점을 손쉽게 외면해버리고 말지만, 실제로 그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또한 우리는 그것을 통해 뭘 얻을 수 있는지는 두고 봐야 할 따름이다. 

앞으로 우리는 영화의 목적성이 뭔지 또한 작가의 표현 욕구는 어느 선상에 놓여져있는지 얘기해보도록 하자.


광명공업고등학교

2학년 김예준


차영민 글,그림 세움출판.2012



안동안, 그 녀석은 학교에서 전설이다. 신이다. 빵둟기의 신이다.

  빵뚫기가 절대불가능한 요새로 유명한 학교 앞 슈퍼를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하루만에 뚫었다. 이 후로 녀석은 어리고 죄많은 고딩들에게 빵를 주는 자, 빵을 얻고자하는 학생들은 모두 그에게로 간다. 일학년이나 삼학년이나 모두 그를 막냇삼촌이라 부르며 매일 그를 따르고, 빵을 사달라고 조른다. 

학교 선생님들마저도 그에게 매를 대거나 벌을 주기를 어색해하고 무의식중에 존대말을 쓸 정도의 위엄이 녀석에게는 있다.

  그러나 녀석이 학교를 나오면 상황은 전혀 다르다. 녀석은 신이 아니다. 신은 커녕 범죄자 취급을 받기 일쑤다. 백오십만원도 아니고 백오십원 때문에 버스기사 아저씨에게 멱살을 잡히고 파출소로 끌려간다. 나이가 여섯 살이나 더 많은 술취한 누나를 업어서 데려다 주건만 원조교재를 하는 치한으로 오해받고, 엄마를 찾으러 노래방에 갔다가 도박꾼 누명을 쓰고 또 경찰서행이다.

  이 모든 것이 다 녀석의 이름처럼 안동안이기 때문이다. 녀석은 아직 민증도 없는 파릇파릇한 열일곱 살, 대한민국의 평범한 고등학교 1학년생이건만 눈에 띄게 큰 머리와 겉늙어 보이는 얼굴 때문에 신이 되기도 하고 범죄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눈을 가려도 나쁜 사람을 잘 가려내야 할 경찰조차도 그의 말을 잘 믿어주지 않으니 억울한테,  그 녀석의 집에는 녀석의 얼굴을  아주 잘 이용해먹는 삼촌까지  있다. 매일 집 앞 슈퍼로 담배 심부름을 보내고, 이러저러한 부모님이 모르면 좋을 사실들을 미끼로 용돈도 뜯고 별별 심부름을 다 시킨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삼촌이 급기야 자기 대신 선을 보러 가 달라고 부탁을 한다. 성적표 협박에 하는 수 없이 녀석은 선을 보러 가는데 ..

  최근 읽은 책들 중 가장 개성있고 재미있는 책이다. 읽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중고딩들도 충분히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문장이 간단하고 이야기는 흥미롭다. 작가가 사용하는 어휘나 말투가 진짜 고등학생이 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벼워보이고 툭툭 던지는 듯한 말투,  그러나 작가가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는 안동안의 얼굴만큼이나 진중하고 성숙하다.  

작가 소개를 살짝 보니 89학번도 아니고 89년생이다. 이 청년 작가 역시 이 소설의 주인공 안동안의 얼굴만큼, 아니 그보다 더 속으로 늙은 게 틀림없다.                                      

                                               2015.8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동화 읽는 어른모임



인터넷에서 “어느 인쇄업체 직원의 무 개념 회사생활”이라는 제목을 봤다. 지금 하고 있는 상담 중 인쇄공장 노동자가 있어 혹시나 해서 보니, 다른 노동자 이야기다. 내용은 근무시간 중 잠을 자거나 술을 마시고, 몇 시간씩 음란물을 본 근로자에 대한 해고 조치는 적법하다는 법원 판결 보도다. 노동자가 무 개념하다고 비판한다. 언뜻, 일을 하며 잠을 자고 술을 마셔? 음란물을 봐? 그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나쁜 노동자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노동자는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를 통해 해고는 부당하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 판결을 법원 재판부가 뒤집은 것이다. 


노동위원회 판결과 재판 부 판결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는 부서 동료들의 진술서다. 동료들은 진술서를 통해 이 노동자가 근무시간에 음란물을 봤으며, 음란물을 보는 시간이 하루 몇 시간에 이르기도 했을 정도로 길었다고 말했다. 법원은 그것을 해고 사유의 핵심으로 보고 정당하다 봤다. 반면에 노동위원회(지노, 중노)는 “근로계약서에 근로자 동의 없이 급여를 감액할 수 있는 등 근로기준법 위반 사항이 들어 있어 동료에게 계약서 작성 거부를 권유한 것”을 이유로 해고를 한 것은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우선 이미 근속 중인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처우 (그것도 임금 삭감을 회사에게 일방적으로 맡기는)를 규정한 새로운 근로계약서를 체결하자는 요구자체가 틀렸다. 불리한 근로조건에 대한 내용은 그때그때마다 당연히 동의가 필요하다. 거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인권이 회사 문에서 멈춘 대한민국 기업에서는 동의 외에 다른 답이 필요 없다. 숨 막히는 수직적 위계질서도 모자라 아예 서약으로 만들려는 그 의도가 놀부 심보다.


이 노동자가 끝까지 회사의 표적이 된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만 거부한 것이 아니라 다른 노동자들에게 권고(아마 회사는 선동)했기 때문이다. 자기만 사는 것이 아니라 불의에 항의하며 다른 이들의 불이익과 불평등을 함께 걱정한 그 마음, 그 걱정을 말과 행동으로 감히 표현했다는 그 용기가 처벌의 대상이다. 노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 이것이 한국의 기업에겐 참을 수 없는 무뢰이자 거역이다. 악의 근원이니 고립시켜 추방이나 파탄을 줘야 한다. 이것이 해고의 본질이다. 종종 순종을 거부한 최초의 주동자를 제거하지 않으면 위엄이 무너졌다고 보는 사장들은 강제 해고가 안 되면 학대해서 스스로 못 견디게 만든다. 용기가 불평불만에 개차반의 모습으로 돌려 진다. 애초 근로계약 불이익 작성 거부라는 해고 사유는 그 공공성에 의해 제거되고, 갑자기 해고사유가 사생활 문제로 돌변한다. 함께 했던 일과 시간이 오직 한 사람의 타락으로 돌려 진다. 상담하는 내 눈에는 집단 따돌림으로 한사람을 그만두게 하기 위해 회사 전체가 하루하루 피를 말리는 학대 고문을 받는 시간인데, 판사는 한 사람이 수백 명을 괴롭히는 가해의 시간으로 본 것이다.


고통 받고 있는 동네 인쇄노동자에게 물었다. 그는 “보통 인쇄 노동은 한번 작업을 하면 그 수량이 수십 수백만 장도 되기 때문에 기계 작업이 끝날 때까지 때때로 불량을 감시하는 기다림의 시간이 있다. 그 시간에 모든 이가 매달려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종종 휴가의 시간을 가졌을 것이고, 자본주의 향락문화의 중심인 게임과 야동은 아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다. 술은 아마 낮에는 불가하고 그 부서만 남은 철야 작업 시 그 피로를 이기기 위해 그 부서 사람들이 함께 야식 반주를 한 정도 일터. 요즘은 워낙 각박해져 드물어졌지만 이전에는 종종 있었던 일이다. 다 함께 하는 일상이다”라고 답한다. 문제가 되려면 이런 행위가 객관적으로 회사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다. 불량을 못 막았거나 납기일을 못 맞추거나, 그런 행위가 갈등과 폭력 등 말썽을 일으켰을 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객관적 피해는 없었다. 결국 그 회사는 한 사람을 추방하기 위해 근로계약서 개악 건을 취소하는 등 사악한 대동단결을 했을 것이다. 


재판부도 근로계약서에 근로자 동의 없이 급여를 감액할 수 있는 등 근로기준법 위반 사항이 들어 있어 동료에게 계약서 작성 거부를 권유한 것은 징계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다만 해고자의 컴퓨터에서 다수의 음란물 동영상이 발견된 것과가, 함께 해고됐던 다른 직원들은 복직돼 계약서 작성 거부가 해고의 주된 이유라고 보기 어렵다며 이 학대와 고문을 정당하다고 판결했고 언론은 그대로 받아썼다. 


노동자들은 법에 호소하는 것조차 어렵다. 그것이 돈과 시간을 뺏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에 호소하는 노동자들은 정말 억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억울함을 입증하는 것은 더 어렵다. 한 사람의 직장과 생계가 달린 용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자 측이 어렵게 한 장 진술서를 받아 제출하는 것은 용기와 옳음이 담겨 있다. 한 사흘이면 모든 직원 수십 수백 명의 진술 서명을 받을 수 있는 회사 측의 진술서는 눈치와 비겁과 비열함이 담겨 있다. 칼을 쥔 손과 칼날을 쥔 손의 차이를 보지 못하는 눈 먼 법원, 양심과 용기를 범죄로 보는 먹통 판사들의 세상이다. 


실제 이명박 정권 이래 노동위위회보다. 법원이 노동자들의 억울함을 더 많이 위로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 들어 대법원의 타락이후 법원은 진술서 속에 담기 사회적 힘의 차, 최초 문제 원인의 부당함, 다른 이를 죽여 자기만 살겠다는 더러운 이기심과 탐욕이 정당하다 우기고 있다. 노동자들이 무(無) 개념 한 것이 아니라 이명박근혜정권 시절 권력의 힘이 악(惡) 개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동네 인쇄 노동자의 처지와 그대로다. 학대와 고문을 하면서 마치 자기들이 괴롭다는 이 위선의 괴물이 대외적으로는 독실한 종교인으로 장애인 고용에 앞장서는 거룩하고 선한 기업인이다. 참 더럽다. 이 더러움을 일반화하는 것이 박근혜의 이른바 노동개혁 그러니깐 노동개악이다.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이 말은 신이 죽은 사회 근대, 신이 죽어버린 그 차가운 현실에 내동댕이쳐진 그리하여 극도의 허무함과 외로움에 방치 될 수 밖에 없었던 근대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위로하고 아픔을 함께 하려 했던 철학자 니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국내에서도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라는 책으로도 나와 있다.) 


그런데 왜 교육자가 눈물을 흘리는가? 교육이 죽기라도 했는가? 

근대 교육의 이상은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라는 계몽주의의 근대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교육적 이상이었다. 제 아무리 그것이 이데올로기 교육이 되었던,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한 숙련공들을 배출하기 위한 추악한 거짓 이상이었던 말이다. (물론 진보교육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나 푸코가 고발한 근대라는 사회의 본질로 대변되는 근대의 이중성과 기만을 극복하기 위한 저항과 비판으로서의 교육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진보교육의 담론을 이야기 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육의 위기는 단지 보수교육만이 닥쳐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동체에는 늘 새로 들어오는 사람과 나가는 사람들로 구성이 되어있다. 새로 태어나거나 외부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구성원과 외부로 나가던가, 죽어서 나가던가 결국 떠나가는 구성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럼에도 몇 세대가 바뀌어도 공동체가 쉽사리 해체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동체의 입장에서 교육이 한 공동체가 과거와 미래가 단절되지 않도록, 과거의 전통과 미래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교육의 역할이 없다면 우리는 늘 과거와 단절되어야 하고, 그 단절의 끊임없는 반복으로 인해 인류문명은 단 한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교육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본원적 역할을 부여 받았다는 말은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할 것이다. 

즉 새로 들어온 구성원들에게 과거의 전통을 학습시키는 역할과 아울러, 새로 들어온 구성원들의 재능과 고유한 이상이 미래 공동체 내에서 탁월하게 헌시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 말이다. 

교육은 전자의 역할을 통해서 한 공동체가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고 그리하여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 모두가 바뀌었다 해도 과거와 단절되는 일이 없이 공동체를 유지하고 과거 조상들의 위대한 유산들을 승계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과, 아울러 후자의 과정을 통해 공동체가 정지되거나 고착화 되지 않고 새로운 구성원들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공동체는 교육을 통하여 과거와의 단절됨 없이 미래로 변하고 발전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공동체입장에 있어서의 교육의 본원적 역할일 것이며, 따라서 교육자는 이렇게 상반된 두 가지의 과업 속에서 균형을 잃지 않고 과업을 수행할 것이다. 

바로 학습자(학생)를 연속적인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과거의 유산과 전통을 학습시키되, 또한 미래의 변화될(또는 변화되어야 하는) 공동체를 위하여 그 학습자(학생)의 고유한 아이덴티티가 훼손되지 않고 탁월하게 미래의 공동체에 실현될 수 있도록 키워야 하는 과업 말이다. 


그런데 왜 교육에 위기가 닥쳤을까? 

교육의 역할이 공간 속에서 실현되는 데에는 교육자와 학습자, 교육공간, 교재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제대로 갖추어져야 하겠지만 권위라는 요소가 없다면 제대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물론 공적권위와 학습자의 권위 등 여러 권위의 기능들 말이다. 그러나 근대에게 권위라는 개념은 타파해야 할 그 무엇으로 여겨졌다. 이는 권위주의, 또는 가부장적 권위, 권위적, 권위주의 정부, 독재, 불평등 등 억압적 의미로 주로 사용되는 쓰임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 공동체가 해체되지 않고 유지되는 데는 법률과 계약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필요하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권위이다. 권위의 역할은 하나의 공동체가 해체되지 않도록 하는 당대를 연결하는 매개와 사회통합의 역할에 기여를 하고 아울러 과거의 전통과 미래가 단절되지 않게 이어주는 과거와 미래를 통합시켜주는 역할에 기여를 한다. 

마치 지구의 인력과 같이 지구가 흩어지지 않게 단단하게 끌어당기는 역할 말이다. 이런 권위가 과거에는 주로 무력과 폭력, 이데올로기와 협박 등을 이용한 권위의 행사들로 이루어졌다. 과거 내내 주로 폭력과도 같은 권위들을 행사한 것은 아마도 목적을 이루는데 가장 빠르고 효과도 탁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해방과 끝없는 자유로의 여정을 목표로 하는 근대에서는 권위가 자연스레 타파의 대상이 되었고 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이라고 하는 근대의 언명 속에는 모두가 서로 다른 이상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며, 이 말은 각자의 이상에 의해 언제든 공동체가 해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 자체에 숙명처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권위가 사라지면 자유는 신장하나 공동체가 해체되어 결국 그 자유를 실현시킬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져버린다. 하지만 해체의 위험이 상존한다고 더 이상 과거 권위주의 체제처럼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협박이나 이데올로기 같은 권위의 행사를 할 수도 없다. 근대는 이미 자유와 평등을 전제로 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폴리스를 유지하고, 공적 업무의 원활한 집행을 위해 폭력과 기만, 설득을 제외한 그 무엇을 찾으려 했다.) 

이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종종 학부모들을 만나면 선생님이 엄격하게 지켜 서서 아이들이 게으른지 감시하고, 때론 혼을 내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한가? 그렇게 되면 근대교육이 근대를 부정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 못하니 권위 대신 하소연이 대신한다. 


물론 권위에는 다음과 같은 가능성도 내포한다. 폭력과 무력이 없고 또한 설득(이데올로기 등)등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은 채 자발적인 복종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가능성 말이다. 근대의 이성이 합리적 도구적 이성 만이 아니라, 합리적 소통이성의 가능성을 내포하듯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권위라는 말 속에는 무력과 폭력 또는 이데올로기 등만을 이용해 영향력을 끼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라, 그 폭력적 요소들을 제외하고도 얼마든지 권위의 역할을 수행 할 수 있다는 그 가능성 말이다. 그러나 권위행사의 목적을 이루는 데는 너무도 지난하고 비효율적일 것이다. 


좀 더 부연하자면 아이들은 형제들간에 다툼이 일어나면, 서로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어머니 혹은 아버지 둘 또는 둘 중의 하나의 권위에게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판단을 위임하고, 결과에 복종함으로써 그 형제들은 극단적인 해체를 모면한다. 또한 부모는 그간 부모가 이루어놓은 성과들 즉 과거의 삶 속에서의 획득한 지혜 또는 기술들을 자식들에게 전수한다. 아이들은 그 지혜와 기술들을 전수받아 부모세대와 단절되지 않으면서도 독립해서 새롭고 오유한 자식대의 공동체를 형성해 나간다. 여기서 부모가 행사하는 권위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무력과 폭력 또는 그럴듯한 거짓말 예를 들면 “말을 안 들으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준다”는 등등의 기만 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공동체에서 (서로 다른 이상을 소유함으로써 필수적으로 상존할 수 밖에 없는) 다툼이 일어나면 그 공동체 내에서 상호간 어느 정도 합의하는, 지혜롭고 존경 받는 사람 또는 그 무엇에 판단을 위임하고 그 결과에 자발적으로 복종함으로써 공동체가 유지된다. 이렇게 권위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연결하는 매개의 역할을 한다. 또한 과거 전통 속에서의 권위를 존중하고 인정함으로써 사회가 단절되지 않고 미래와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권위의 가능성은 상호간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는 무력과 폭력 또는 이데올로기, 직책이나 직위 등을 이용한 협박 등이 배제된 상태에서의 자발적 복종을 가능하게 하는 권위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바로 평등한 인간을 전제로, 자신의 자유를 보유한 채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하는 그 권위 말이다. 이는 근대의 이상과 더 이상 모순적 이지도 않다. (이는 플라톤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그 무엇이었다) 그렇지만 근대는 역사적으로 권위주의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교육에 있어서도 부당한 국가권력과 학교권력으로 대표되는 권위주의를 타파하고자 하는 일련의 행위들 속에서 버리지 말았어야 할 권위, 즉 위에서 말한 자유를 보유한 채 자발적인 복종의 가능성을 담지한 그 무엇까지 싸잡아서 버렸다.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렸다. 


교육의 역할에 필요한 요소인 권위가 상실되었다. (무언가 상실된 곳에서는 반드시 간특한 이데올로기가 그 빈 공간을 대체하려 한다. 신자유의의 이데올로기가 지금의 그 공간에 똬리를 틀고 대체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권위가 상실된 사회에서는 끝없는 분열이 일어나고, 결국엔 극단적인 외로움과 고독과 무력감이 지배하고 서로의 소통은 요원해진다. 

말은 하지만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한다. 외로움은 더해진다. 교사들에게도 오는 무력과 절망, 또한 기댈 수 있는 스승을 잃어버린 사회는 바로 이런 상실된 권위에서 비롯된다. 그렇다고 권위의 기능 중 긍정적 기능들만을 모아 이미 죽어버린 권위를 다시 살린다고 이 위기가 극복될까? 공적행복과 공적성공보다 개인적 행복과 성공을 절대시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이미 똬리를 든든하게 친 상황에서, 그리하여 국가단위의 경쟁과 개인단위의 경쟁의 이데올로기가 극심하게 판을 치는 이 상황에서 (더구나 비용 면에서 훨씬 비효율적인) 자발적 복종을 이루어낼 수 있는 권위의 행사가 설득력 있게 행사되고 받아들여 질 수 있을까?

아울러 이렇게 급속하게 권위가 사라지는 데에는 과거 권위주의를 타파하려는 노력 외에도 과학기술의 발전 그 중 테크놀로지의 급속한 발전도 한 몫을 했다. 바로 한 사회의 선생님과 어른의 경험과 지혜의 상실이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연장자들의 경험과 지혜를 필요로 했다. 더구나 그것은 그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즉 한 세대가 경험하지 못한 극심한 가뭄이나 홍수 등이 벌어졌을 때나 외적의 침입 등 위기가 발생했을 때 그 과정을 경험하고도 의연히 생존한 연장자의 경험은 그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위대함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교적 전통사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곳에서의 연장자가 높은 권위를 담지 한 이유다. 그러나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삶과 생존에 관한 무엇들을 교사나 부모 또는 연장자에 묻지 않고 테크놀로지에 묻게 만들었다. 놀라운 지식정보의 바다에 연결된 환경에서 연장자의 경험은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잔소리를 넘어 넋두리 취급을 받게 되었다. 더구나 테크놀로지의 정보를 흡수하고 또한 조작하는 데 훨씬 익숙한 어린 학습자들이 오히려 연장자에게 이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게 되지 않았던가? 이제는 연장자가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 학습자들에게 이의 사용법을 배워야 했다. 이 놀라운 역전현상을 유발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한 사회에 필수적인 권위를 근간에서부터 흔들어 놓았다. 


근대라고 하는 이성적 사회가 담지 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테크놀로지가 발전된 모든 근대사회에 권위와 교육에 위기를 불어넣었다. 이것이 근대교육이 가지고 있던 근원적 딜레마 중 하나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교사는 권위를 담지 한 교육자가 아니라, 학습자를 어르고 달래야만 겨우 교육공간을 유지할 수 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 교육 행위가 가져올 수 있는 환희에 찬 미덕과 교육에 대한 교사 및 학습자의 윤리는 더 이상 찾기 어려워졌다. 

교사뿐만 아니라 교육의 행위 자체도 권위를 잃어버렸다. 일상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젠 교육현장에서조차 학생이 교사에게 “당신이 뭔데?”라는 말들이 적지 않게 들리고,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수업 중 아예 잠을 자버리는 교육의 모습은 이미 흔해졌다. 교사는 말을 하지만 학습자는 다른 언어로 듣고 있다. 그렇게 교사는 자신의 소중한 경험을 이어 줄 제자를 잃었고, 그렇게 학습자는 기대고 의지해야 할 스승을 잃었다. 절망과 자포자기 속에 교육의 윤리는 사라지고, 교육자는 윤리를 포기하고 기능으로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함께 모여있지만 서로 다른 필요에 의해서 모여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교육을 포기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혹시 교육의 역할을 단지 시험을 대비하고자 하는 지식의 전달(학원과 같은)만으로 축소할 것인가 아니면 그 역할과 위상과 윤리를 대대적으로 새로 수정해야 하는 것인가? 


물론 교육의 위기가 권위의 상실에서만 기인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이러한 분석도 논리적 비약이 있을 것이라 판단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이미 맞닥뜨린, 과거에는 결코 경험해보지 못했던 이 위기가 근대교육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일지, 아니면 권위주의를 타파해 나가는 과정 속에 거쳐야 할 잠깐의 필연일지는 아직 모른다. 교육자는 여기서 눈물을 흘린다. 설혹 그것이 어떻다 하더라도 이 무력하고 외로운 교육의 공간 속에서 극도의 허무함과 외로움에 내동댕이쳐진 현실의 구성원들을 어떻게 치유하고 위로할 것인가? 과연 새로운 대안이 있을까? 

그럼에도 교육자는 여기에 반드시 답을 해야 한다. 위기는 기회라고 강변한다 해서 죽은 신이 살아올 수 없겠지만, 우리는 여하튼 상실된 권위의 시대에서 새로운 그 무엇을 찾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교육자들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여하튼 우리에게 던져진 그 책임의 무게를 회피하지 않고자 노력 하는 것, 그래도 우리가 한 사회의 어른이라고 아이들에게 욕먹지 않을 이유일 것이다.


교육자도 전문가도 아닌 일개 학부모가 이런 의견을 말한다는 것도 과연 가당하기나 한가 모르겠다. 모쪼록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던 아니던 금천구가 교육혁신지구로 선정된 마당에 다시 한번 교육의 본원적 가치와 의미, 그리고 지금의 위기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윤로

독산고등학교 학부모






필자는 기고문을 본 지에 보내면서 교육에 대한 다양한 토론이 진행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본 지는 금천구가 교육분야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고 또 교육혁신지구로 선정되어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는 상황 속에서 금천구의 교육의 혁신을 위한 다양한 제안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에 대한 반론도 좋고, 새로운 제안도 좋다. 그 간 금천구 교육에 평가도 좋고 자신의 느낀 바를 적어도 좋다.  제한없이 교육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도출되기를 희망하고 건강한 토론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의견은 gcinnews@gmail.com 02-859-1320/010-7750-2431로 보내면 됩니다.

호암산성, 시흥동 은행나무... 

안식과 지혜를 나누는 유적으로 가꿔야

내가 ‘서울’이라는 주제를 붙들고 씨름하기 시작한 건 2009년 4월 서울시민연대 대표직을 맡으면서다. 그동안 서울시정을 모니터링하는 일부터 예산 감시 활동, 최근 현안이 되고 있는 서울역고가 공원화 문제 등 이러저러한 현안에 대해 관심을 갖고 활동해 왔다. 지난 5년 능력에 부치기는 했지만 나름 보람을 느낄 수 있었지만 보람과 함께 재미가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서울답사는 보람과 재미를 함께 느끼게 하는 일이었다. 나의 서울답사는 2009년 12월 경복궁옆 서촌탐방이 그 시작이었다. 지금은 수성동 계곡이 복원되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지만 당시만하더라도 철거 직전의 옥인시민아파트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서촌답사를 시작으로 기회 닿을 때마다 서울의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 한옥의 처마 곡신이 아름다운 북촌, 일제의 식민지배의 본거지였던 남산자락, 시인 백석과 자야 김영한의 애절한 사연이 깃든 성북동 길상사, 조선의 수도 한양의 권위를 상징하는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과 성곽을 비롯하여 지난해 봄엔 157km에 이르는 서울둘레길을 완주하기도 했다.

답사하면서 느낀 소감은 서울은 뿌리가 깊고, 매력적인 도시라는 것이다. 서울은 조선의 수도 한양이 천도한 때로부터 6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다. 더 서슬러 올라가면 900년 전 고려의 남경이 자리한 고도이기도 하고, 백제의 시조 온조가 위례성(한성)에 도읍한 2000년 역사도시이기도 하다.

우리가 서울답사를 통해 만나게 되는 서울의 옛 모습은 대부분 근현대 유적들이다. 경복궁, 창덕궁 등의 궁궐도 3~4백 년 전의 건물이다. 그러나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서울의 지층(地層)을 한 꺼풀만 벗겨보면 아주 오래된 역사의 흔적과 만나게 된다.

송파구 풍납동 토성은 2천 년 전 백제 유적이다. 서울 광진구와 구리시의 경계에 있는 아차산 보루는 1600년 전 고구려가 남겨 놓은 흔적들이다. 북한산 비봉 꼭대기에 세워진 비석(진흥왕 순수비)은 신라 진흥왕이 555년(또는 568년) 지금의 서울지역을 둘러보고 세운 것이다.




금천구에도 오래된 유적들이 많다. 호암산에 위치한 호암산성은 신라시대의 유적이다. 또한 금천구는 정조가 화성(수원)으로 행차하면서 쉬어갔던 행궁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시흥동에 위치한 은행나무는 서울의 노거수들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나무로 서초동 도로 한복판에 서있는 향나무와 함께 천년의 나이테를 자랑한다.

마른장마가 한창이던 지난 7월 17일 금천역사포럼이 주최한 호암산성 답사에 참여하였다. 이날 답사를 통해 독산이 호암산 자락의 산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호암산성 안에 위치한 한우물의 석구지(石拘池) 표지석과 석구상의 설화도 처음 접한 금천구의 역사였다.

호암산성 답사는 금천구의 역사를 알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지만 한편 아쉬움을 느꼈다. 호암산성의 위치와 역사를 알려주는 제대로 된 안내판 하나 없었다. 문득 몇 년 전 늦가을 시흥동 은행나무를 찾았을 때의 느꼈던 아쉬움이 떠올랐다. 시흥동 은행나무는 인도와 도로 한복판에 내몰려 있었고, 나무 옆에 줄지어 선 비석들은 방치해 놓은 듯 표정 없는 모습이었다.

면적과 인구로 따지면 금천구는 서울 25개 구 중 작은 구에 속한다. 그러나 역사와 전통만큼은 어느 구와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오래된 유적을 제대로 보존하고, 활용하고 있느냐이다. 호암산성, 시흥동 은행나무, 행궁터 등의 유적을 금천구청과 주민들이 애정을 갖고 보존하여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안식과 지혜를 나누는 살아 있는 유적으로 가꾸어 가면 좋겠다.


전상봉 

서울시민연대 대표



일천년 은행나무가 죽어가고 있다!



금천구는 옛 시흥군의 중심인 시흥읍(始興邑)을 포함한 부근 일대가 서울시에 포함된 행정권역이다. 면적으로는 과거 시흥군의 작은 일부이지만 그곳의 요지(要地)가 현재의 금천구인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이 고장 상징의 상당수가 현재의 금천구 관내에 있는데 그 중에는 수령 1000년(기록상으로는 830년 여)으로 회자(膾炙)되는, 주민들이 마을의 신령수(神靈樹)로 삼고 있는 은행나무가 그것도 한 그루도 아니고 세 그루나 있다. 장구한 세월을 이어온 이 고장 역사의 산 증인이자 자랑이다. 


그런데 이 은행나무가 고사(枯死) 직전에 있다. 세 그루 중 한 그루는 다소 덜하지만 두 그루는 육안으로도 그 생육상태가 심각함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이 나무들이 이런 모습이 될 것은 지금부터 십 수 년 전부터 예견되었다. 나무들의 주변 환경이 아주 고약하게 번천 하였기 때문이다. 나무들의 뿌리는 이곳을 흐르는 하천을 복개하면서 식물로서의 생육의 제한을 만났고, 주변 건물들이 무분별하게 건립되면서 또한 뿌리의 상당수가 난도질을 당했다. 그에 더하여 나무들 사이로 도로가 형성되면서 밤낮으로 자동차들이 매연을 뿜어대어 나무들은 숨 쉬기조차 어렵게 된 것이다.


전국에는 국가가 제도를 두어 관리하는 노거수(老巨樹), 노목(老木)들이 있으며 이곳의 은행나무도 그런 범주에서 서울시가 관리하고자 지정한 보호수이다. 그런데 오늘과 같은 운명이 된 것은 과연 이런 제도가 실효적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보호수란 글자 그대로 보호를 해야 할 나무이고 따라서 그에 부합하는 현실적인 조치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여 오늘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록을 보면. 이곳 세 그루의 은행나무가 서울시 지정 보호수가 된 것은 1968년 7월이다. 지금부터 47년, 근 반세기 전이다. 당시 이곳을 흐르는 개천은 복개되지 않은 채 맑은 물이 흘렀고 또 지금과 같이 은행나무의 뿌리를 잘라야 하는, 나무의 아주 가까이에 자리하는 건물들도 주변에 없었다. 그런 시기에 보호수로 지정해 놓고도 오늘에 이르러 이렇게 나무들이 대형버스가 다니는 도로의 한 가운데와 가장자리에 있게 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은행나무 주변은 의미심장한 이 고장 역사적 사연이 있는 곳이다. 쇠락한 은행나무와 함께 도로 한가운데 처량하게 서있는 비석들이 말해주듯 조선왕조의 관아(官衙)가 있었고, 조선후기의 정조(正祖)가 부친(사도세자)의 능(陵)인 장릉 참배 도정의 숙박지인 시흥행궁도 있었다. 후기 조선의 현군(賢君)인 정조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게도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임금이었기에 그의 행적에는 문화사적 가치를 가지는 것이 많은 것은 주지하는 바로 수원시에 마련된 그의 행궁이 오늘날 국내외의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된 것이 그 설명이다. 그가 이곳에서도 머물면서 역사들을 엮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의미의 역사도 만나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봉건왕조에서는 생각할 수 없던 양민(良民)들의 정치적 욕구 분출, 즉 민주주의의 한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 이 지역에서 양민들에 의한 국가에 대한 저항, 곧 ‘시흥민란’이 있었고 그 연루자들의 재판장이 이 곳 관아에 개설된 것이 그것이다, 이런 현장들은 그런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문화사적 가치를 가지는 것은, 문화선진국들이 그들의 역사의 현장을 어떻게 보존 관리 하는가를 보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다시 은행나무 이야기를 해보자. 서울시에 등록된 보호수는 216 그루(2014년 현재)이고 그 중 최고 수령은 830년으로 모두 은행나무이고 네(4) 그루가 있는데 그 중 세 그루가 이곳의 은행나무이다. (한 그루는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즉 이곳의 세 그루 은행나무는 서울시 보호수 중 최고령 수목으로 그것만으로도 이 나무들의 보존가치는 중분하다.

자료에 의하면, 보호수란, 번식이나 풍치 보존이나 학술 참고를 위해서 보호하는 나무로. 즉 노목(老木)·거목(巨木)·희귀목(稀貴木) 중 보존 및 증식의 가치가 있는 명목(名木)·보목(寶木)·당산목(堂山木)·정자목(亭子木)·호안목(護岸木)·기형목(畸型木)·풍치목(風致木) 등을 말한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이러한 나무들을 제도를 두어 챙기는 것은 그것의 현실적 가치에 더하여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취지가 이러한데도 서울시의 최고령 보호수인 이곳 은행나무가 퇴물처럼 방치되어 이제 운명을 다할 지경이니 이를 두고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이런 중에 한 가닥 희망을 걸만한 소식을 접한다. 은행나무가 소재한 행정 동인 시흥5동의 주민자치위원회와 이곳 주민들로 조직된 문화단체인 (사)금천문화역사포럼이 협력하여 이 나무들의 보존 책을 마련하고자 여론 형성을 하고 있고, 이에 금천구청도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상황으로 보아 이들의 노력에 대한 결과에 기대를 두기가 어렵다. 그럴 만큼 나무들이 처한 환경이 열악하다. 다시 말하면 나무를 살리려면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데 그것이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그럼에도 기대를 포기할 수가 없다. 역사는 상징이 있음으로 비로소 생동감을 가져 사람들을 자극하여 문화를 창출하고, 그것들은 건설적 변화를 일궈내어 공동체를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선진국들이 문화자산의 보존을 국가의 자부심으로 삼아 가꾸고 행기는 것을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고장의 역사의 산 증인이자 자랑인 은행나무를 살리자! 이 활동의 전개는 곧 우리가 문화국가의 구성원임을 스스로 자부하는 자랑스럽고 건강한 행동이다. 사람들이 뜻을 모으고 힘을 합하면 못할 일이 없다.(♣2015.07.23)  



장제모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다양한 마을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금천 주민 여러분 안녕하세요. 

인사드리겠습니다. 2015년 7월 정의당 동시당직선거에서 정의당 금천구위원회 위원장에 당선된 공병권입니다. 저는 당원들로부터 높은 투표율로 지역위원장을 다시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뛰고 노력하겠습니다.

최근에 저희 정의당은 당대표부터 지역대표까지 뽑는 선거를 치루었습니다. 이번 당대표선거는 후보가 4명이나 나와 선의의 경쟁을 통해 언론에서도 정의당이 새로운 선거문화를 만들었다 할 정도로 좋게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정의당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비록 아직까지는 국회의원 의석수도 적고 힘이 약한 정당이지만 어떠한 정당보다 투명하고 성장가능성이 높은 정당임을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좀 더 공정하고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더불어 함께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어가고 있고 우리 사회에 정의를 이야기 하면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사회가 되었다는 그 자체가 서글퍼집니다. 이것을 누군가는 해결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역할을 우리 정의당이 하고 있고 잘 해나가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정의당은 이름에 걸맞게 우리 사회의 정의를 가장 선두에서 이야기 하고 있고 사회적 약자 곁으로 가서 그들과 함께 하기로 하고 있는 정당입니다. 정의당이 성장해야 우리 사회가 맑고 투명한 사회로 바뀝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87년 이래로 양당이 우리사회를 거의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좋은 면도 있으나 소수의 의견은 거의 묻히고 두 당만 합의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사회구조입니다. 특히나 요즘 같이 다양한 가치들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소수의견들을 받아들일 세력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사회는 보수와 진보 모두 함께 공존해야 되고 그렇게 되어야 정상적인 사회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우리 진보정당들이 우리 사회에 이루어 놓은 성과들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대중 곁으로 가지 못하고 우리들끼리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이제 정의당은 좀 더 대중들과 호흡하고 시민 곁으로 다가가 그들과 함께하는 그러한 정당을 만들어 가야 하고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저도 지역에서 우리 정의당이 추구하는 가치를 충실히 실행하고 시민들과 함께 하고 특히 사회적 약자들과 그들의 고민들을 함께하는 그러한 역할들을 해나가겠습니다.

 

금천주민 여러분

우리 정의당 금천구위원회는 지역에서 조금씩 조금씩 그 역할을 넓혀 나가고 있습니다. 당원들도 많이 늘어났고 참여도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이제 정의당도 원내 제3당으로서 지역에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기존의 진보정당의 모습에서 벗어나서 좀 더 재미있고 시민들도 함께 할 수 있는 그러한 정당 문화를 만들어 가고자 노력도 하겠습니다.

우리 금천주민 여러분께서도 저희 정의당을 아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많은 지지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5. 07. 13

정의당 금천구위원회 위원장 공병권 드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그리스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악당이 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평소 선량한 척 살다 나그네를 보면 집에 초대하여 극진히 대접한다. 그의 집에는 침대가 하나 있는데 주인의 호의에 감사한 마음으로 침대에 잠이 든 손님들은 사지가 결박된다. 그리고 침대보다 작으면 잡아 늘려 침대 크기에 맞추고 침대보다 크면 큰 만큼을 잘라버렸다. 이 신화는 자신의 잣대로 모든 것을 꿰맞추려 하거나 판단하는 독단을 그린 비유다. 그리고 이 독단의 결과는 생명을 죽인다. 


메르스라는 낯선 이름이 일상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그 공포의 진원지가 삼성이다. 삼성은 지난 십수년 한국 경제의 상징이다. 보이는 곳에서 경제의 국가대표인 양 삼성의 어마어마한 매출과 순익 숫자로 대리 만족했다. 환상이 우리들의 영혼을 태운 것이다. 그 사이 삼성의 제일주의와 다 바꿔 주의는 승자독식의 괴물이 되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삼성은 더 큰 힘의 소유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권력이 삼성에게 넘어 갔다고 탄식을 할 정도다. 그들의 인맥, 로비력, 금력에 의한 대한민국의 어둠속 지배는 삼성 아닌 이들에게 공포 자체다. 저항 자체를 포기할 정도다. 그 삼성이 차세대 돈줄로 상정한 것이 의료영역이다. 의료영역을 사유화 민영화하여 의료를 이윤의 숙주로 삼겠다는 것인데 그 중심에 서울삼성병원이 있다.


어떤 기독교인의 바람대로 메르스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신의 심판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을 돈벌이 수단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의 삼성에게 재앙이 되고 있다. 메르스를 못 막은 주체는 박근혜정권이지만 그 비극의 주관자가 삼성병원이기 때문이다. 메르스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결정적 작용을 한 14번 환자는 5월 27일에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그리고 5월 29일까지 응급실에 있었다. 일주일 전에 1번 환자 확진이 있었고, 평택이라는 같은 지역, 같은 병원, 같은 층 병실에 있던, 비슷한 증세의 환자이었는데 말이다. 송재훈 삼성 병원장은 환자가 말을 안 해 몰랐다고 한다. 거짓이 아니라면 최소한의 문진도 생략하는 끔찍한 무능이다. 부산의 한 내과의원은 환자가 삼성서울병원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바로 메르스를 확진했다. 일개 의사도 할 수 있는 일을 왜 거대독점병원은 하지 못했던가? 안했던가? 

이유는 간단하다. 영리와 명성이라는 마약에 취했기 때문이다. 삼성서울병원은 5월 29일 이후에도 응급실을 전면 폐쇄하지 않았다. 6월 13일까지도 응급실 폐쇄조차 하지 않았고 병원은 “아무 잘못이 없었다”, “국가가 뚫린 것”이라며 언중유골의 발뺌만 했다. 삼성이 곧 국가라는 속셈 말이다.


삼성의 힘은 가히 대단하다. 정부로 하여금 메르스 노출 병원의 발표를 미루게 했다. 서울시장의 요구에 자료제공을 거부했다. 자료공개를 거부해 진실을 은폐한 한 것이 이번 메르스 확산에 결정적 원인이다. 삼성의 탐욕과 삼성만 바라보고 있던 정권의 무능의 합작이다. 더 이상 진실을 감 출 수 없자 삼성병원장과 국무총리 직무대행이 6월 7일 오전 11시에 동시에 발표를 했는데 간발의 차로 삼성자본이 먼저 발표를 했다. 삼성이 정부를 앞섰다. “국가는 자본가 계급의 위원회”라는 비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메르스의 사회적 본질은 삼성 자본을 살리기 위해 정부가 민의 건강권을 포기한 것이다. 서민 생계에 치명타를 가했다. 이런 삼성자본의 진실 은폐는 역사적인데 ‘삼성노동자 백혈병’, ‘태안반도 기름유출 사건’ 등이 그거다. 모든 권력을 동원하여 삼성자본의 명성과 이윤을 지키는 과정은 그 과정 자체가 바로 인간의 존엄과 생명에 반하는 짓이다. 피도 눈물도 없다. 그러나 보자. 이윤을 향한 의료행위는 공공 의료 예방 의료에 얼마나 취약한가? 아니 오히려 전염병의 수퍼 전파자가 되지 않았나. 우리가 이성과 상식과 인간 존중의 머리가 있다며 메르스의 교훈은 의료민영화니 영리병원이니 하면서 우리들의 생명과 건강을 돈 귀신과 흡혈의 악귀들에게 맡기는 미친 짓을 막아야 한다는 점이다. 메르스의 수퍼 전파자가 되고도 원격진료라는 전략적 잇속을 챙기는 삼성, 정말 무섭지 아니한가? [참세상 손미아(강원대 예방의학)님 글 참조함.]


반면에 열악한 상황에서도 수많은 노동자가 사회적 책임감을 잊지 않으며 위험한 일을 해내고 있다. 이 노동자들은 재난을 예방하거나 최소화시키며 대중의 안전과 생명을 지킬 수 있는 당당한 주체다. 메르스에 고통 받는 환자의 많은 부분이 의료 노동자다.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력이 모든 생명의 토대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는 여전히 비정규직이다. 삼성이 사악한 것은 서울병원 하나에만 비정규직을 3천명을 고용하고 있었지만 이들에 대한 방호 조치는 없었다는 점이다. 자본에게 비정규직은 조금 적게 받고 일하는 이등 노동자를 넘어 그저 투명인간이나 유령일 뿐임을 보여 준 것이다. 그렇다. 비정규직은 바로 이런 문제다. 인간 자체를 부차화 수단화하여 인간성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비정규직은 차별을 줄이는 존재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해야 우리가 비로소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 비정규직 문제다 우리시대 가장 큰 민주와 인권의 문제인 이유다. 


세월호도 메르스도 문제가 발생한 그 자리에 노조가 있었다면, 자본이 돈이 아니라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최소한의 브레이크인 민주노조가 있었다면 비극과 고통의 크기는 훨씬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건 대처 이후 권력을 지닌 세력은 여야를 막론하고 노동조합 존재를 헌법적 기본권이 아니라 이윤추구의 걸림돌로 보며 분리 배제 파괴를 했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거대한 자본이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누인 신세가 됐다. 침대의 이름은 삼성이고 프로크루스테스는 박근혜 정권이다. 안전한 일터, 안정된 일터, 대중의 안전과 생명을 지킬 수 공공의료 확충, 무상의료와 지역 주치의에 의한 예방 의료가 파괴되고 있다. 우리가 권력과 자본의 탐욕과 무능의 침대를 걷어차지 못한다면 우리의 내일은 오늘보다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센터장




88년 아니면 89년에 나는 작은 사무실을 얻어 <지역사회탁아소연합회>의 간사 일을 하고 있었다. 지역운동과 여성운동을 모두 아우르는 일이라 어려움도 많았다. ‘지탁연’의 이사님들을 모시는 자리에 이오덕 선생님이 오셨는데 마른 체구에 깐깐한 인상이었다. 일단 앉자마자 ‘지탁연’ 이라는 말이 잘못 되었다고 하셨다. 그것은 영어 약자 표기 방법이고 우리말 우리글에서는 줄여 부르되 그 뜻이 드러나야 한다며 ‘탁아연’ 으로 부르기를 권하셨다.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했지만 그때 받은 인상은 참 강해서 그 일이 잊지 못할 일이 되었다.

어린이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오덕 이라는 이름을 다시 보았고 나는 이 분을 내 스승님으로 모시기로 했다. 쓰신 책을 열심히 읽었고, 때로는 지나치게 철저한 그 태도에 조금 반감이 들 때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선생님의 평론이나 주장은 내 마음에 와닿았다.

이번에 도서관 식구들 덕분에 읽은 새 책 <나는 땅이 될 것이다>는 선생님의 평소 모습처럼 깐깐한 주장만이 담겨있지 않았다. 인간 이오덕의 아픔과 정겨운 우정과 시퍼런 자기성찰이 들어 있어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나기를 여러 차례였다. 권정생선생님과 한 간고등어를 나누어 먹고 나란히 누워 나눈 인간적인 이야기들, 광주항쟁 당시 문인협회에서 시 낭송회를 연다고 개새끼 같은 연놈이라고 욕을 하기도 했으나 가장 가슴이 찡했던건 그 난리가 났는데도 나는 살겠다고 감자와 좁쌀을 샀으니 내가 인간인가 짐승인가 하고 스스로를 후려치는 그의 진솔함과 자기성찰이었다.

돌아가시기 이틀전까지도 일기를 쓰시고, 자신의 병과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삶이 자신에게 주었던 외로움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이 일기를, 내가 이렇게 볼 자격이나 있는가 마음이 힘들어진다.

권정생, 이오덕 이 두 분과 친한 벗이라해서 또 알게된 전우익 선생님까지 조금 더 우리 곁에 있다 가셨으면 참 좋았겠다 싶지만 사라진 것을 그리워하고 기억할줄 아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도 오늘은 무척 고맙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 은행나무도서관 책이야기는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금천 문화프로젝트를 제안하며



서울시민들에게 금천구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곳 중의 하나인 것 같다. 구세(區勢)가 빈약한데다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관심을 둘만한 곳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챙길만한 곳인 ‘가산디지털단지’가 있으나 ‘구로공단’이라는 과거의 그늘이 너무 짙어 이마저도 주(主)가 아닌 부(副)일 뿐이다. 

금천구의 약점은 다양하다. 우선 고등교육의 불모지다. 종합대학은커녕 단과대학이나 전문대학조차 없는데다 전통을 얹어 명성을 이야기할만한 고등학교나 중학교도 없으며, 젊은이들의 입에 오르내릴만한 경제적, 문화적 요소도 빈약하기 그지없다. 그런가 하면 그 흔한 종합병원도 없는데,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메르스(Mers)’ 사태에 이름이 거론되는 거점 병원도 없는 것과 같은, 역설(逆說)이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듯 경제와 사회 그리고 문화를 말할 때 금천은 대한민국의 중심이라는 서울을 앞세우기가 민망하다.

물론, 서울시에는 금천구와 유사하거나 오히려 못한 자치구조차 없지 않다. 그럼에도 금천의 현실을 두고 마치 차별받는 지역인양 이야기하는 것은 필자가 금천사람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이기적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과장을 보태면서까지 사실을 들추는 것은 문제제기를 하고자 함이고, 그것은 금천의 변화를 구하고자 주민들을 자극하기 위함이다. 

금천구의 상대적 낙후는 국가의 제도가 만든 상황인 것은 사실이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곳만의 사정은 아니다. 그럼에도 현상을 문제 삼는 것은 이 지역 주민들의 상황인식이다. 현상 개선을 통해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려 노력하기보다는 기회가 되면 떠나려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를 방치하면 그 마을공동체는 희망을 만나기 어렵다.

구청은 이러한 현상의 타개를 위해 여러 노력을 하고 있고 그것은 부분적으로 효과를 내고 있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유사한 사정인 다른 자치구는 물론 사정이 나은 자치구에서도 하고 있는 것들로 평가대상이 못 된다. 다시 말하면, 현상극복을 하려면 다른 곳과 차별이 되는 정책이 필요하다.. 

다른 곳과 차별이 되는 정책의 정의는 의외로 간단하다. 주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금천의 자원(資源)을 알려주고 그것을 생활로 연결하게 하는 것이다. 주민들이 지역의 자원을 이해하는 것은 그 자원의 활용에 흥미를 갖게 하여 가치창출의 동기부여를 하게 된다. 

금천이 보유한 자원은 솔직히 다른 곳과 차별을 둘만한 것이 많지 않다. 대개의 자치구들의 자원 환경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의 측면에서 보면 사정은 다르다. 문화는 그 지역의 역사가 배경이 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들이 일궈낸 삶의 모습들이라 나름의 특색을 가지는데 금천은 그런 면에서는 다른 곳과 차별이 될 수 있는 장구한 역사가 숨 쉬고 있는 고장이다.

금천은 멀리 원 삼국시대부터의 역사 기록을 가진 고장이다. 고구려 때의 행정지명인 ‘잉벌노현(仍伐奴縣)’ 기록에다 현실적 물증(物證)인 신라 산성(山城)인 호암산성이 있고 인근에는 선조들의 삶을 살필 수 있는 여러 유적들이 있다. 조선 건국설화에 얽힌 호압사(虎壓寺)와 석구상(石狗像)과 한우물이 그것이다. 그런가 하면 마을에는 보다 구체적인 삶의 흔적들이 사실이나 기록으로 남아있다. 수령(樹齡) 천년을 말하는 세 그루의 은행나무가 고단한 자세지만 지금껏 주민과 함께 숨 쉬고 있고, 조선 전기의 재상(宰相)인 강희맹(姜希孟)의 농사 행적에다 조선 후기 임금 정조(正祖)의 사부곡(師父曲)의 한 현장인 시흥행궁 스토리를 만날 수 있다. 그에 더하여 근대사와 현대사적 기록들로 흥미를 가지게 한다. 민족 자주(自主)와 민주주의를 조명할 수 있는 ‘시흥민란’, ‘녹동서원’과 ‘단군전(檀君殿)’ 스토리가 있는가 하면, 대한민국의 경제사와 사회상을 살필 수 있는 가리봉 수출(3)공단과 시흥동 계곡(시흥2동)의 서울도심 이주민의 애환(哀歡) 등 현대사이야기거리도 있다. 이러한 역사들은 확실한 가치를 가진 문화소재들이다. 이들을 공연프로그램화하고 문화 콘텐츠(Contents)로 활용한다면 다른 곳과의 차별모습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찾아보면 이 밖의 다른 영역에서도 지역발전 동력을 구할 수 있는 소재들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주민들이 지역자원에 대한 관심도이다. 당국은 물론 금천의 유력자들은 이점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곳 특유의 문화자원의 활용은 금천이 앉고 있는 현상극복 계기를 마련하는 강력한 에너지 원(源)이 될 수 있음에 유의하자는 것, 곧 금천 문화 프로젝트(Project)의 추진 제안이다. 마침 서울시는 마을공동체 형성을 통한 지역의 발전을 구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고 그를 통한 성공사례들도 보이고 있다. 이런 기회들을 잘 활용하여 우리 마을, 금천이 문화도시로 거듭나게 함으로 주민들이 금천의 주민임에 자부를 갖는 계기를 만들어 보자.(♣2015.06.25)


장제모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하며 있으며 다양한 마을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구로동맹파업 30년, 당시 대우어페럴 사무국장

강  명  자



30년 전 1985년 6월24일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동맹파업이 금천구 가산동(당시 가리봉동)에서 일어났다.

현 현대아울렛의 자리에 있던 대우어패럴 노동조합의 김준용 위원장과 강명자 사무국장이 22일 구속조치가 파업의 발단이었고  6월 23일 비상대책회의를 열어 대우어패럴에 대한 탄압을 <민주노조탄압의 신호탄>으로 인식하고 동맹파업을 결정했다. 6월 24일 대우어패럴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는 것을 신호로 효성물산·가리봉전자·선일섬유가 즉각 파업에 돌입했고, 25일에는 남성전기·롬코리아가, 28일에는 부흥사 노조가 동맹파업에 가담함으로써 참여 노조 숫자는 총 10개, 노조원 약 2천 5백여 명에 달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당시나 지금이나 구로공단이 있는 금천구는 한국현대사의 굵직한 획을 그어갔고 그 사람들도 아직 여기에 살아가고 있다.

30년 주년을 맞아 당시 대우어페럴 사무국장이었던 강명자(54세) 씨를 만났다. 인터뷰를 하는 날이 일요일에도 불구하고 구로구 고척도서관에서 진행하는 공단 탐방코스를 안내하고 난 후였다.

구로동맹파업은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역사에서 배울 건 배우고 버릴 건 버려야한다. 70년대 노동조합이  정권에 의해 제각각 깨져나갔다. 그 경험 속에서 동맹파업이 만들어진 것이다. 대우어페럴 조합이 깨지면 효성이, 효성이 깨지면 가리봉 전자로 이어졌을 것이다.” 

“나는 동맹파업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잘 모른다. 나와 김준용 위원장이 구속된 것을 기점으로 발발했으니까. 밖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상태로 경찰서에 몇일 있으니까  대우어페럴 조합 식구들이 유치장에 우르르 들어와서 알게 됐다. ‘이년아 너 구하려다 들어왔다’는 말과 함께.”

 명자 씨는 2~3년전부터 구로공단의 역사탐방의 종종 하고 있다. 평일에는 미싱을 하고 주말에 가끔 신청이 들어오는 하는 정도로.

“교과서적인 것은 안한다. 내가 겪었고 보았던 것을 알려준다. 가리봉5거리의 나포리다방, 일주일에 100시간,120시간일을 하기 위해 티이밍을 사먹었던 구림약국을 지나고 왜 우리가 노동조합을 건설할 수 밖에 없었는지 이야기해준다.”

현재 가산동 두산아파트이 있는 예전 삼립빵 공장이 있던 자리를 지날 때는 “그 배고픈 시절에 진동하는 빵 냄새가 어땠을까?” 물어보기도 하고, 바로 돌아 기륭전자의 공장을 지날 때는 현재도 진행되고있는 노동조합의 싸움과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구로공단의 굴뚝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아파트형공장빌딩 숲이 들어섰지만 그 속에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마리오아울렛 제3관에는 상징적 굴뚝 앞을 지날 때 명자씨는 “빌딩 숲에 비정규직이 넘쳐나고 있다. 당시에는 생산하고 만들어 냈던 이곳이 이제는 쇼핑몰이 됐다. 내가 젊은 날 살았고 숨 쉬고 있던 곳이 쇼핑몰로 되어 여기에 오려면 쇼핑을 하러 와야하고 돈이 있어야 올 수 있는 곳이 됐다.”고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한다. 

지금의 현대하이힐 들어선 대우어페럴 자리에 지날 때는 첫 인상을 알려준다. “언니가 대우어페럴에 다녀 면회를 왔는데 4~5월인가 장미가 만개해 있느 곳에  점심 때는 하얀스카프에 하늘색 가운을 입고 삼삼오오 웃는 모습이 그렇게 좋아보였고 간절히 오고 싶었다.”

그 간절함으로 82년 입사했지만 화려한 겉모습의 속내는 화려하지 않았다. 기숙사생 600명이었고 외출과 외박이 안됐다. 그러다 ‘어느 청년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이라는 책을 보게 됐고 밤새 울면서 읽었다. 그려면서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84년에 조합을 만들고 85년에 구속당한다. 


수출의 다리 앞을 지날 때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노동자의 생존권을 박탈당하고 밥 줄이 끊겼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한다. “85년 대우어페럴에서 구속된 후 86년 4월 석방돼 86년 5.3인천항쟁에 참석하고 계속해서 노동조합 건설 활동을 했다. 그리고 좀 더 조건이 좋은 ‘서광’에 입사하려고 했는데 블랙리스트라서 안된다는 것이다. 그때 블랙리스트라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봤다.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을 팔아서 먹고 살아야하는데 그럼 무엇을 먹고 살아야하나 싶어 이 수출의 다리를 건너오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 

명자씨는 블랙리스트로 공단과 운동에서 떠났지만 여전히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노동운동할 때는 미싱엔 관심이 없다가 이제는 어떻게 하면 빠르고 예쁘게 할까 고민한다. 미싱은 나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했다.”

독산동에는 조그만 봉제공장이 밀집해 있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봉제전문인력사무소가 위치해있는 곳도 독산동이다. 예전에는 공단에서 옷이 만들어졌지만 이제는 독산동에서 옷을 만들어 물류창고를 거쳐 공단에 있는 마리오나 W몰로 들어간다. 봉제노동자들은 예전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게 됐다. 당시 공돌이 공순이의 이름을 이제는 비정규직이라고 부른다. 명자 씨는 “20미터 도로의 몰려있는  봉제아줌마들 위한 무엇인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 봉제를 배우는 사람도 없다.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보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트루디 루드위그 글 패트리스 바톤 그림 천미나 옮김 책과 콩나무


<보이지 않는 아이>는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에 생각나는 책이다. 어떤 담임 선생님을 만날까? 어떤 친구들을 만날까? 내 짝꿍은 누굴까? 설레는 것들도 많은 3월이지만 한편으로는 친구들 사귀는 문제로 걱정이 앞서는 아이들과 부모들도 많다. 

조용하고 소극적인 딸한테 "너 오늘 학교에 왔었다는 거 선생님이 아시니?" 하고 물어본 적도 있다. 그냥 존재감 없이 다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새학년이 되어 내가 아는 애가 있는지 어떤 애랑 같이 다닐지 간을 보는 시기가 바로 3월이다. 친한 애들끼리 그룹이 만들어지면 거기에 끼고 싶긴한데 끼어도 될지 말지 망설이는 아이도 있다. 딸아이가 요즘 그러고 있다.

  <보이지 않는 아이>에 나오는 브라이언은 목소리 크고 툴툴대는 아이들 틈에서 선생님 눈에 띄지도 않고, 발야구 할 때 친구들한테 뽑히지도 못하고, 생일파티에 초대 받지도 못해 대화에 끼지도 못하는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아이다.

  그래도 브라이언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있어서 안심이 된다. 바로 그림 그리기 놀이를 한다. 보이지 않는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이 혼자서 하는 그림 그리기였을지도 모른다. 브라이언은 그 그림그리기에 재능이 돋보이는 아이다. 그런데 아무도 알아봐주지 못한다. 투명인간이기 때문이다. 

  브라이언의 재능을 알아봐 준 것이 저스틴이라는 친구다. 저스틴은 전학 온 학생인데 점심으로 불고기를 싸와서 친구들한테 놀림을 당한다. 이때 브라이언은 ‘놀림을 받는 게 더 나쁠까, 투명인간이 되는 게 더 나쁠까?’ 생각한다. 아마 투명인간인 자신과 놀림을 받는 저스틴과 어쩌면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거 같다. 

 브라이언은 저스틴에게 쪽지를 보내는 용기를 낸다. 저스틴은 늘 혼자서 그림 그리면서 놀고 있는 브라이언을 발견하게 되고 “정말 잘 그렸다”란 칭찬도 하게 된다. 그러면서 흑백이었던 브라이언은 저스틴의 관심을 받게 되면서 점점 칼라로  바뀌게 된다. 바로 ‘관심’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게 한 것이다.

  고학년 아이들과 ‘투명인간이 되는 게 더 나쁠까? 놀림을 받는 게 더 나쁠까?’ 로 이야기 나눠봤는데 놀림을 받는 것은 그래도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니 좋은 것이고, 관심도 못 받는 투명인간이 되는 게 더 나쁘다고 말하는 아이가 있다. 또 내가 혹시라도 누군가를 보이지 않는 아이 취급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는 아이도 있다. 

  브라이언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 몸 색깔이 흑백이기도 하고 조금 칼라로 바뀌기도 하고 완전한 칼라로 변하기도 한다. 환전한 칼라로 변했다는 것은 투명인간이 아니라 친구가 생겼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 면지에 보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취향대로 로켓을 그려주기도 하고 천사도 그리고 나비도 그려서 다른 아이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나온다. 끝까지 보고 나서야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다. 

  얼굴은 본 듯한 아이, 처음 보는 아이, 목소리 큰 아이, 장난꾸러기 아이, 얌전한 아이 등 여러 아이들이 섞여 있는 교실에서 이리저리 부딪치면서 친구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장제모칼럼]

남부도로사업소 이전이 주는 교훈


시흥3동 주민 간 첨예한 갈등을 야기했던 서울시 남부도로사업소 청사건설이 최종 결정되었다. 서울시가 배포한 내용을 보면, 청사와 차고지를 분리하여 시흥3동에는 청사만 이전하고 차고지는 가산동 빗물펌프장에 건설한다는 것이다. 시흥3동 주민들이 이전을 반대했던 이유는 차고지가 올 경우 소음, 분진 등으로 주거환경이 악화되는데 따른 불만이었는데 그 부분을 해소하는 것으로 결정을 한 셈이다. 이 결과는 시흥3동의 반대 주민들의 강력한 저지에 서울시가 내린 절충적 결정으로 그동안 펼쳤던 반대 주민들의 노력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하는 주민들은 이 결정도 반대하고 있어 앞으로 시행과정에서 민․관 간 충돌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대하는 주민들이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은 서울시의 결정은 우선 민원을 잠재우기 위한 시간벌기 수순일 뿐 본래 계획은 수정되지 않을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청사와 차고지 분리 이전은 주민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기만책일 뿐 청사이전 공사를 하면서 부지를 확보한 뒤 궁극에는 차고지까지 들어온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서울시는 근거 없는 소문이라면서 수정된 이전계획서를 배포하였는데 그에는 청사와 차고지의 분리 건설을 자세히 살필 수 있는 설계 도면과 추가 예산서(분리로 인한)로 구성되어 있는 등 그것을 허위로 볼 여지는 없는 같다. 그런가 하면 그간에 주민들에게 심려를 끼친데 대한 보상으로 청사 공간의 상당부분(약 860평)에 주민 편의 공간 설치를 덧붙였다. 서울시는 이런 내용의 분리이전 계획서를 준비하여 2회에 걸쳐 주민 설명회를 시도하였지만 반대하는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로 시작조차 못하였고, 오히려 주민 간 갈등만 심화하는 부작용을 빗었다. 

주민 간 갈등이유는 주민 중에는 이전을 반대하는 주민들이 있듯이 찬성하는 주민들이 있어서이다. 반대하는 주류는 청사이전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이고, 현장과는 거리가 있는 곳에 거주하지만 결과적으로 마을환경이 악화됨에 따른 불이익(주택시세의 하락 등)을 우려하는 주민들이다. 청사와 차고지 분리 이전계획이 알려지면서 반대주민 수는 줄었으나 서울시의 계획을 불신하는 주민과 그들과의 유대를 지키기 위해 반대 입장을 고수하는 주민들로 반대의 강도는 여전하다.

차고지와 분리 하여 청사만의 이전을 찬성하는 주민들은 두 부류인데, 한 부류는 청사이전으로 현재 거주처가 수용이 예정된 주민들로 이 계획이 발표된 이후 재산권 행사를 제대로 못하는가 하면 반대주민들과의 갈등으로 심한 심적 고통을 겪고 있다. 그리고 다른 부류는 청사이전의 찬성을 드러내놓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마을에 변화가 있고 그에 따른 발전을 기대하는 주민들이다. 

다양성이 존재하는 오늘 우리사회에는 이와 같은 주민갈등 모습은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것으로 크게 문제 삼을 소재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주민 간 갈등을 예사롭게 보아서는 안 된다. 공동체에서 구성원 간 갈등은 그 공동체는 물론 사회적 부정성 양산의 계기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사회는 오랜 시간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기본권이 유린된 삶을 산 경험이 있는 국민이 다수이다. 다시 말하면 반대 주민들의 정서를 가슴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들이 서울시의 구체적 해명에도 반대의지를 철회하지 않는 것은 국가정책에 대한 강한 불신 때문이고 이는 어제오늘에 생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반면 그런 사태(반대)로 상대적 고통을 겪는 주민들도 있음을 살펴야 한다. 우리사회는 이웃의 주장으로 공연한 불이익을 당하는 다른 이웃들도 있다.  

시흥3동 주민들은 이제 냉정하게 현실을 보아야 한다. 내게는 불편하다 하여 그것을 관철할 때 공동체가 불편해 진다면 이는 다시 살펴야 하는 것이 민주시민의 자세다. 그간에 당국의 정책이 불신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런 현상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사회에는 질서가 존재하고 그로 하여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다양성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내가 있듯이 타인이 있고 우리 가족 공동체가 있듯이 다른 가족 공동체가 함께 공존하는 것이 세상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항상 서로 우호적 관계로만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우리세상이다. 

이제 서울시 남부도로사업소 이전과 관련한 시흥3동의 주민갈등은 종식되어야 한다. 이의 선도는 반대주민들이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 아름답다. 그간에 있었던 일에 대한 회오(悔悟)가 아니라 내게는 불만이지만 마을의 유익을 구했다는 자부심을 가짐으로 이는 가능하다. 사실, 반대하는 주민들로 하여 오늘의 결과가 도출되었고 그것은 어쩌면 시흥3동의 발전의 한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찬성하는 주민들도 반대했던 주민들의 그간의 고심에 심심한 위로와 함께 경의의 박수를 보내야 한다. 그들은 마을의 평화를 지키려는 주민의 열정을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그로서 공동선의 추구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책임임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의 주장은 관철되지 않았지만 마을사랑을 온몸으로 행동한 역사의 주인공으로 시흥3동의 주민들의 기억 속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서울시도 이번 시태를 정책수립에 참고하여 다시는 주민 간 갈등사유가 되는 시행을 하지 않아야 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사전에 주민에게 진실한 정보제공과 더불어 이해를 구하는 절차를 진정한 자세로 진행하여야 한다. 그런 한편, 시흥3동 주민에게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며 그 일환에서 제공하기로 한 주민편의 공간의 조성은 반드시 시행하되 가급적 주민의견이 많이 수렴되는 방향으로 하여야 한다.

시흥3동의 남부도로사업소 이전으로 야기된 갈등들은 한 작은 마을의 사건이 아니고 오늘 우리세상의 한 단면이다. 그것은 변화가 있는 곳에 고통이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세상은 변화를 구함으로 발전의 동력을 구할 수 있음의 시사(示唆)이다. 시흥 3동 주민들은 이를 동의해야 하고, 서울시는 그런 시흥3동 주민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제시한 내용대로 성실하게 시행하여야 한다. 그래서 서막은 서로 힘들었지만 함께 윈윈(win-win)하는 것으로 막이 내려져야 한다.(♣2015.06.12)


장제모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하

고 있으며 다양한 마을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생태환경운동의 시작 레이첼 카슨



(왼쪽)'자연을 사랑한 레이첼 카슨' 에이미 에를리히 글/웬들 마이너 그림/ 아이세움

(오른쪽)'지구의 목소리 레이첼 카슨' 진저 워즈워스 글 /두레아이들


“침묵의 봄” ... 봄이 와도 자연은 침묵하고 있다.

 봄의 소리! 작은 꽃잎들의 속삭임과 화려함에 이어 나온 연두 빛 작은 싹들의 번져감이 참 좋은 봄. 이런 움직임을, 속삭임을 느낄 수 없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 우리는 우리의 편리함 때문에 얼마나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는가?

 요즘 들어 더욱더 많아진 환경파괴의 모습, 기상 이변의 모습, 가축들이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죽어가는 현상, 시냇물까지도 생명을 잃은 상태 등 생태계의 재앙은 우리 생활주변에서 심각한 상태로 진행되고 날로 악화되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를 돌아보며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침묵의 봄”으로 환경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과학자, 레이첼 카슨!  개발과 효율이라는 60년대의 흐름을 거스르고, 세상을 향해 환경의 소중함을 이야기한 과학자.  레이첼 카슨을 시작으로 환경 보호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50년전 우리가 놓치고 있는 자연의 소중함을 걱정했던 레이첼 카슨은 살충제를 비롯한 유독성 화학물질의 위험성을 낱낱이 경고한다. 


  두 권의 책 ‘레이첼 카슨’

지구를 대신해서 '지구의 목소리'를 전파한 레이첼 카슨의 일대기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레이첼 카슨의 전 생애와 업적을 중요한 시기별로 세분화해 놓았으며, 자연을 사랑하고 느낄 줄 알았던 레이첼 카슨의 모습이 담겨 있다. 레이첼 카슨의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환경의 중요성과 자연보호의 절실함을 일깨울 수 있으리라 여기며 소개한다.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 라는 질문에 난 레이첼 카슨을 말한다. 나는 환경운동가는 아니다 하지만 작은 실천은 할 수 있다.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여성이고, 엄마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환경에 대한 생각과 실천은 아이들에게 전해진다. 또한 어른들을 대상으로 환경강의를 할 때면 이야기 한다. 

엄마의 힘이 크다는 사실, 아이들은 엄마가 갖은 환경에 대한 생각과 모습을 고스란히 가져가 아이도 엄마처럼 환경에 대한 생각과 모습이 번져나간다는 사실을 알리며 엄마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소소한 움직임이 큰 변화의 시작임을 믿으면서...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독산2동 마을카페 '써니쉬'-'삶이 힘들수록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을 줘야'




독산2동 주택가 한복판에 산뜻한 가게가 생겼다. ‘써니쉬’라는 이름을 가진 카페이자 빵집이자 미술치료와 상담과 교육의 공간이다. 독산2동 마을투어에서 만난 써니쉬의 주인장 전서연씨는 몇 년 동안 고민을 한 끝에 얼마전에 오픈했다고 했다.

몇 년 동안 어떤 고민을 했을까? 마을에서 무엇을 펼치고 싶은 것은 걸까? 지난 5월26일 써니쉬를 찾아 전서연씨를 만났다. 써니쉬는 전서연씨와 홍승우씨가 함께 운영하고 있고 서연씨는 글쓰기, 심리상담, 미술치료를, 홍승우 씨는 파티쉐로서 카페를 운영하고 빵을 만들어 판매한다. 

서연씨를 인터뷰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것은 ‘굶어죽지 않을 정도’라는 말이었다. 시작과 끝이었다고 할까.

“거창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순전히 개인적으로 시작됐다. 두 사람 모두 먹고살되 어디에 속해 임금을 받아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먹고 살자는 것이 출발점이었다. 그러려면 컨텐츠가 있어야 굶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2008년부터 어떤 컨텐츠로 굶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까 많은 고민을 했다. 손님이 안와도 되고 파리가 날려도 굶지만 않으면 된다.”고 담담히 웃었다. 애초에 대박을 내겠다는 심정으로 강남이나 홍대를 알아본 것도 아니고 임대로도 비싸지 않을 곳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자는 것이 출발이었고, 처음에는 지방으로 갈까 했지만 살고 있던 금천구에 먼저 가게를 오픈했다.


3개월간의 작업

굶어죽지 않는 것이 모토일 뿐만 아니라 돈도 부족해 개업 인테리어의 대부분의 작업은 두 사람의 발품으로 해결했다. 전기나 싱크대 같은 전문기술이 필요치 않는 것은 모두 두 사람의 몸을 굴려 작업했다. “직접 하다보니 너무 힘이 들어 병이 나기도 하고 그럼 쉬고…그러다 보니 3개월이 훌쩍 지났다. 그 와중에 인근 주민들은 ‘도대체 뭐가 들어서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공사를 하나?’라고 궁금해 했고 그런 것이 예상외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공간이 됐다. 공간이 주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분위기 변화시키거나 새로운 것을 매개하는 것을 느낀다.”


굶어죽지 않을 콘텐츠

서연 씨는 고등학교 국어교사였고 승우 씨는 3D프린터 툴도 다루는 나름(?) 전문적인 직장을 그만 두면서 가장 먼저 콘텐츠에 집중했다. 서연씨는 심리상담에 대한 공부를 몇년 간 하고 있고 지금도 지속하고 있고 손재주가 뛰어난 승우 씨는 파티쉐공부를 하면서 제과제빵, 바리스타 등을 공부했다. 

그런 것을 카페 ‘써니쉬’에 모두 넣었다. 서연 씨는 ‘여러 가지를 때려 넣었다’.다고 표현했다. “욕심이 많기도 하고 콘텐츠라는 것이 환경과 트랜드, 동네분위기와 어울려야 하지만 하고 싶은 것을 넣었다. 책을 가지고 여기 사람들이 이것저것 해보고 싶기도 하고 글쓰기도 해보고 싶고 심리상담도 하고 워크숍이나 강좌도 하고 싶다.”

써니쉬는 5월12일에 오픈했다. 오픈하고 온라인 마켓에 타르트를 입점하고 6월초부터 납품을 시작할 예정이다. 처음에는 온라인 마케팅으로 하려다보니 장소는 중요치 않게 생각하다가 막상 시작하니 대충은 하지 못하겠다는 생각과 함께 동네 분들이 오가면서 요구가 있었다.

“엄청 소박하고 간단하게 생각했는데 동네를 생각해야 하는 것을 알았다. 무엇이 필요한지 물으니 아동미술상담이나 베이킹 스쿨의 요구가 있다. 현재로는 가용인력이 부족해 엄두를 못 내고 있긴 하다. 우리가 먹고 사는 일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것을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뭔지는 아직 모르겠다.”

마을공동체 탐방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준비해서 준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오가며 인연이 닿고 우연적인 만남을 통해서 서로를 보는 것이 좋다고 한다.

써니쉬가 일상적인 삶의 문제, 힘든 문제를 토로하고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많은 사람들이 애들에게만 좋은 것을 주려고 하지만 정작 자기에게 주려하지 않는다는 안타까움, 삶이 힘들수록 자기자신에게 좋은 것을 줘야한다는 바람, 내 마음 편하자고 시작한 일이 다름 사람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써니쉬의 작은 공간에 가득차 보인다. 

이름따라 햇빛처럼 밝고 환하게  써니쉬의 바람이 독산2동에 펼쳐지기를 응원한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차 광 호

한밤 중 또는 새벽녘 노동자들은 하늘을 오른다. 가장 인적이 드문, 사람의 눈길이 사라진 시간에서야 함께 살자는 염원의 공간을 찾는다. 그가 참다 참다 못해 선택한 곳은 45미터 공장굴뚝이다. ‘노동자는 자본의 하수인이나 개가 아니다. 존중하고 존중받는 사람으로 노사가 만나 고용문제를 해결하자’고 나선 하늘 길, 하늘로 올라 차린 굴뚝제단, 그 제단 위에서 희생양으로 살아 온 시간이 2015년 5월26일로 딱 1년. 2014년 5월 27일 새벽 굴뚝에 오른 노동자, 그의 이름이 스타케미칼(구 한국합섬) 차광호다.   


우리는 철탑으로 굴뚝으로 오른 사람을 하늘사람이라 부른다. 그들은 자기 몸을 통째로, 하루 24시간을 다 바쳐 기도하는 사람이다. 될 때까지 오직 제 몸만 괴롭히는 이 시대 바보들의 투쟁. 돌도 칼도 총도 없이 세상 사람들이 칭송해 마지않는 간디의 무저항비폭력 투쟁을 전심전력으로 펼치는 평화로운 사람들이다. 이들의 목숨 건 투쟁을 통해 우리는 우리 사회의 상처를 만난다. 신음소리를 듣는다. 몸에 가장 현명한 충고는 통증이라 하지 않는가? 미처 돌보지 못한 곳, 경중완급에서 밀쳐진 곳에서 발생하는 통증은 경고다. 부족하면 채우고 넘치면 덜어 울퉁불퉁 없이 고른 건강한 생명들의 세상을 만들자는 권고다.    


스타플렉스 김세권사장은 한국합성을 인수해서 관련기업 인수를 통한 시너지 효과를 원해, 399억 원을 빌려 자산가치 455억 한국합섬을 인수한다. 그런데 공장부지가 공장구조구도화 시범단지가 되면서 땅값이 상승해 자산가치는 두 배 이상 올랐다. 공장운영이 어렵다는 근거로 내세운 2012년 적자는 주로 영업외 비용에서 나왔는데, 이는 인수 대금 300억 원을 한꺼번에 갚았기 때문이다. 경영이 나빠진 것이 아니라 좋아졌다는 말이다. 스타플렉스가 한국합섬을 인수하여 스타케미칼을 운영할 때 매출액도 매출이익도 대폭으로 증가했다. 그럼에도 자본은 생산적 경영보다 부동산 등의 재산 증대를 노리며 투기성 먹튀 자본의 길을 선택한다. 끊임없는 구조조정으로 비정규직 공장을 만들려했고, 노조를 무력화하기 위한 폐업을 할 거면서 정리해고를 시도하며 노조를 분열 이간시켰다. 공장이 사라지고 노조가 무력화되고 민주와 인권이 열악해질수록 돈을 버는 천민적인 한국형 자본에 맞서 노동자 차광호는 어쩔 수 없이 45미터 굴뚝 위로 올랐다. 


문제의 핵심은 자본이 자기 생산성을 잃고 (금융)투기화 즉 먹튀가 됐다는 점이다. 투기자본은 경영이 어려운 기업을 저가로, 불법으로 인수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산업은행 등 국가기관이다. 투기자본과 국가기관을 연결하는 것이 김앤장으로 대표되는 로펌이나 대형 회계법인 등 이른바 전문가 그룹이다. 투기자본과 국가기간사이에 회전문 인사와 전관예우를 통해 대 정부 로비력을 극대화한 전문가 그룹이 먹튀 삼각동맹의 연결축이다. 이들은 투기적 수익을 위해 정리해고 조기퇴직 비정규직화를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반드시 기존의 노사관계를 파괴하고 노조를 무력화시킨다. 이것이 지난 20년 우리 사회를 지옥으로 만든 선진경영기법의 실체다. 그러고도 마지막까지 투기수익을 극대화하는 것인데 그것이 기업의 재매각이다. 구조조정과 주가 상승으로 몸값을 부풀려 또 다른 투기자본으로 매각되거나 공장 구조화사업과 연결된 부동산 개발 투기 이득을 노린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성공한 M&A’다. 스타케미칼은 이런 흐름의 전형이다. 


스타케미칼 자본은 이득을 보고 있지만 더 큰 이득으로 위해 노동자 생존권은 무시해도 된다고 믿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업의 경영상의 재량권이나 경영 전략적 선택이 불가피하다며 이를 적극 옹호한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것이 경영법칙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그들이 최소화한 것이 사람의 생명이며 그들이 최대화 한 것이 빈곤과 차별의 재난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기는 난망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자본이 먹고 튄 그들의 선택으로 남는 사회적 폐해들에 대한 책임은 물어야 한다. 특히 폐업의 경우는 특별하다. 지엠이 떠난 디트로이트시의 비극은 디트로이트 시민이나 노조가 아니라 지역민과 일터 간의 공동체적 관계를 외면하는 지엠 자본의 책임이다. 하지만 지엠의 책임 대신 노조 탓만 하는 곳이 한국이다. 

폐업은 그 곳에서 인생을 산 노동자들, 노동자의 가족들, 연관되어 살아 온 지역 공동체를 파괴한다. 그럼으로 프랑스의 경우 자본의 일방적 폐업을 불법 시 한다. 폐업을 하기 전에 먼저 인수자를 찾는 의무를 부과하고 필요한 경우 회생법원이 관장 한다. 특히 노동자들이 인수를 한다면 먼저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의 책임은 폐업 자본의 대주주에게 돌려진다. 

결국 이윤을 위한 경영이라도 노동자들의 생존권, 노동권을 배제하는 것은 경제행위에 인간을 배제하는 사회적 범죄다. 기업인수 시 인수 기업에 대한 생산적 검토가 구조화되어 투기자본의 먹튀를 차단해야 하는 것도, 법적으로 책임의무 경영기간을 마련하거나, 기업의 해외 이전이나 해외기업의 사업철수의 경우에도 먹튀는 아닌지 감시하는 체제가 필요한 것도 경영에 대한 인간적 사회적 책임을 확인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차광호, 사계절이 흐르는 동안 그에게 어려운 것은 더위일까 추위일까? 외로움일까 괴로움일까? 어떤 때는 쏜살이요 어떤 때는 달팽이 같은 시간일까?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는 슬프고 아픈 고공농성 기록을 늘려만 가고 있다. 단군 신화에서 웅녀가 사람이 되기 위한 기간은 삼칠일, 즉 21일이다. 차광호는 곰이 사람이 되는 기간 21일의 17배가 넘는 시간을 기도했다. 징하고 가혹한 자본, 문제해결 능력이란 전무한 한국사회의 잔혹함이 버무려진 기간이다. 하지만 차광호, 그가 축적하는 시간의 기록은 뜬구름이 아니라 우리 사회 평화와 평등을 향한 위대한 역사의 축적이라 믿는다. 절망 속에서 핀 연꽃 한 송이 청결한 기도다. 평등한 세상 평화로움을 살고 싶은 차광호가 옳다. 

세상아, 그의 말을 들어라.


 문재훈

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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