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사람들-서른다섯번째
근대 법의 근원을 따지면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프랑스 혁명의 반봉건 시민혁명일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자유, 평등, 박애. 미국의 독립선언서의 내용이자 민주 공화국의 고전인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모든 사람은 천부인권이라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며 그 기본권으로 생존(명)권 그리고 자유권 그리고 사람으로 행복추구권을 사람으로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며, 이를 침해하는 권력에 대해서는 저항권을 명시하여 국가권력이 근거가 백성임을 분명히 한 것이 근대 국가와 법의 근원이다. 이후 인류는 공화제의 공동체적 대의를 강화하고, 인간 존엄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
인권의 강화를 보여주는 것이 법에서는 사회법의 강화발전이다.
일반법이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기본원리를 전제했다면, 사회법은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실을 인정하여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원칙에 의해 제정된다. 그런 사회법의 가장 대표적인 법이 노동법이다. 그 중 근로기준법은 근로기준의 최저를 정하여 그 이하의 조건은 반인간적임을 헌법이 확인해 주는 조항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근로기준법을 지키는 것이 인간 존엄의 최소 기준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 경직성의 원인이요, 병통이라 주장된다.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의 시대가 인간을 경제적 동물, 그것도 승자독식의 이리떼쯤으로 여기는 반인간적 존재로 만들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수단에 불과한 경제활동에 사람을 희생시키는 만행을 저지하고, 인권과 민주주의가 존중되는 사회를 위한 이성적 양심적 성찰이 정치라면, 그 규범을 판단하는 것은 재판이다. 그러니 사회법의 법리를 통해 사람을 존중하는 최후보루가 법원이 된다.
하지만 한국의 대법원은 최근 강정마을 판결에서 보듯 이른바 권력과 자본의 입장에서 정치적 판결을 계속하고 있다. 법이 이전시기 독재 권력의 시녀였다면 이제는 돈의 시녀로, 나아가 돈과 권력의 공범이 된 듯하다. 그런 모습을 확인해 주는 것이 있다. 대법은 장기적 노예관계를 방지하기 위한 법 조항인 "근로기준법 제 21조"를 풀면서 '근로자 우선 보호의 원칙이 기업의 경쟁력 제고에 걸림돌이 되고 국민경제 발전의 해악함'이라며 노동자 보호에 대한 완화, 인간 존엄의 최소기준의 저하를 "국내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완화하여 유연성을 갖게 했다"고 자화자찬한다. 인간 존엄의 최저기준마저 존중하지 않는 기업, 그러니깐 노동자를 인간이하로 취급해야 하는 기업과 그 기업의 경쟁력이 사람에게 왜 필요할까? 이런 야만을 인정하는 법과 법관이 민주시민에게 왜 필요할까? 대한민국의 대법은 사회적 약자의 최후의 의지처가 되어야 할 법을 강자들의 면죄부로 만들었다.
실제 요즘 노사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법원이라고 한다. 유성기업의 경우 사측의 단체협상을 거부하다 재판부가 단체협상을 거부할 때 마다 벌금을 부과하고 나서야 단체협상에 임했다.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투쟁 중인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이라는 판결을 위해 4년이 필요했고 그 과정동안 노동자는 해고의 고통을 감수했다. 하지만 자기들의 법적 승리는 철저하게 강제하는 자본이 현대 자동차 정몽구회장의 모습에서 보듯, 노동자가 이긴 대법판결은 이행하지 않는다.
최근에 새누리 당은 사내하도급법 제정을 시도하고 있다. 사내 하도급은 예전에 유행했던 소사장제이고, 요즘은 세련된 듯 말해지는 '아웃소싱'의 형태다. 직접고용에 대한 책임을 생산 과정에 대한 책임을 분산 전가시켜 권한은 누리되 의무는 최소화하는 경영이다. 한마디로 자본이 원칙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의 제공 비용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를 그대로 고착시켜 이전에는 불법이었던 행위를 합법으로 만들어 주자는 것이 이 법안의 숨겨진 본질이다. 돌아보면 지금까지 여당이 비정규직법을 개정하면 자본들은 표정관리를 하고, 노동자들은 줄기차게 반대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비정규직법은 비정규직 양산의 법적 면죄부였고, 비정규직 고통은 항상 그대로였다. 그러니 이번에 새누리당이 사내하청 노동자를 보호한다고 적극적으로 나오는 것도 그 속셈은 "어차피 실효 없는 것이니 말 서비스나 잔뜩 해 국민들 눈이나 혼란케 하겠다."는 것은 아닐까?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 보는 것은 인간 자신의 자기모멸이다. 그런데 이 모멸을 법으로 확증해 주고, 법을 무기로 쌍용자동차 노동자 22명을 죽인 자가, 태안 주민들의 생계를 박탈한 자가 마치 물 한 컵 쏟은 실수쯤으로 간단하게 사과하고 대법관이 되려는 모습을 보면서, 강정 해군기지 반대에 대한 대법 판결을 보면서 대한민국 법 자체의 실효성에 의문을 가지는 것은 나의 예민함일까?
2012.07.13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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